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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에 대한 위계적 고찰2

시스템에 대한 위계적 고찰 - 2
[분배의 문제]

죽은 사람에 대한 평가는 되도록이면 조심해야할 것이다. 산 사람이야 변명이나 항변을 할 여지라도 있지만 죽은 사람은 그렇지 않다. 이런 가정에서 조심스럽지 않은 평가는 폭력이다.
더더욱 자살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더더욱 조심해야할 것이다. 경우 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얼마나 괴로왔으면 자살했을까?

근래 들어 자살 소식이 끊이지 않고 있다. 게다가 한국 제일의 황태자라 할 수 있는 정몽헌회장의 자살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자식까지 내던지는 사건이 있었다. 여러 말들이 많지만 착안하고 싶은 대목은 가난이 얼마나 끔찍했으면, 자식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자식을 던졌을까?
대기업에 들어가 엥벌이를 하면서 더욱 안티해졌다. (말로만 듣던) 한국이 이렇게 살기 힘든 나라인줄 절감에 절감을 더하고 있다.
대한민국 1%를 위해 나머지 99%가 아니 적어도 80%가 피를 빨리고 있다.
(한계레 21의 '죽음이 드리운 그늘진 동심'(http://h21.hani.co.kr/section-021003000/2003/07/021003000200307300470038.html)과 '지금 그들은 한국에 없다'(http://h21.hani.co.kr/section-021003000/2003/07/021003000200307300470027.html) 참고..)
더욱 한심한 작태는 시스템의 오류를 알더라도 개선은 커녕 그 1%에 가까이 가기 위해 아귀다툼이다.
이런 상황을 한탄하면 오히려 나를 이상하게 바라본다.
아마도 일반적인 서민이 두, 세번의 봉변을 당한다면 누구나 기사에 나오는 사람들 처럼 될 것이다.
한국은 이렇게 불안한 나라다.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이 하나 같이 한국을 떠난 이유는 단순이 돈을 구걸하는 깡패들 때문만은 아닐꺼다..

사실 오류를 개선하는 것 보다 오류에 적응하게 사는게 더 편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시스템에 대한 위계적 고찰 - 1'에서 재화의 한계와 인간의 무한한 욕심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이런 환경이기 때문에 분배와 배분의 문제가 중요하게 된다.
아마도 모든 시스템을 설계하는 사상가가 경제 시스템 부터 적립하는 이유가 이 때문일 거다.
분배는 공평하고 정교해야 한다는건 모두가 동의하는 부분이고 문제는 노동가치 만큼의 분배가 보장되어야 하는데 자본논리는 겉은 그럴듯 하지만 기실은 그렇지 않고 있다.
모든 자본 논리가 가진자들의 세계에서 나왔기 때문에 약자는 항상 당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의 먹이사슬의 법칙으로 인정되고 있다.
아담 스미스나 경제적 측면의 신 자유주의, WTO체제는 번지르르한 사기로 없는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완벽하게 GATT체제 아래서 대기업만 성장시켰던 모델이었다. 국민들은 고가의 질나쁜 대기업 제품들을 소비해줬고, 저임금으로 대기업 및 대기업에 대한 하청 작업을 해주면서 대기업을 공룡으로 만들어 줬다. (아시겠지만 7,80년대 우리 노동자 부모님들은 100 hour week로 병걸려가며 일해줬다.)
대기업의 부실이 대한민국의 부실로 이어지고 여러가지 형태(국민연금, 의료보험, 신용카드...)로 국민들은 대기업의 부채책임을 양도하고 있다. IMF당시 부채의 대부분은 기업이었던 반면 현재의 부채는 개인 부채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이제 2003년에 와서 가난해서 자식과 함께 자살하는 소식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래도 오류 시스템의 적자이고 싶은가? 당신이 패자(敗者)가 된다하더라도 이 시스템을 인정할 것인가?
분배의 문제에 심각해져야 하고 노동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남들은 제자식을 아파트에서 던져버리든 말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현실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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