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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의 어느 날, 뉴욕의 빈민가인 Bronx에서 Tupac Amaru Shakur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는 할렘 출신의 여느 다른 흑인들처럼 힘든 삶을 살았으며, 1996년 9월7일 라스베가스에서 괴한의 습격으로 총상을 입었다. 그리고 정확히 6일 후인 9월 13일에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언뜻 보면 우리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보이는 이 흑인 청년의 이야기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랩 음악을 통하여 흑인 사회에,나아가서는 미국 사회 전체에까지 미친 영향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그의 사망 후에조차도 그의 음악과 인생을 재조명하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적어도 전세계 수백만의 팬들의 마음 속에서, 2Pac은 아직도 진정한 승리자로 인정받고 있다. 여기에서는,국내에는 비교적 알려지지 않았던 2Pac에 관한 여러 사실들을 통하여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지, 또 그의 음악은 어떤 것이었으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자.
2Pac Shakur는 흑인 과격 세력의 모임이었던 Black Panther의 멤버였던 Afeni Shakur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볼티모어에서 예술 고등학교를 다니며 음악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졸업후 그는 서부 캘리포니아의 Marin City로 와서 당시 상당한 주목을 받기 시작하던 랩 그룹 Digital Underground에 정식 멤버로서 참여하게 되었다. Digital Underground의 앨범 'Sons of the P' 앨범으로 그래미상 후보에 오르며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이때 2Pac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솔로 앨범인 '2Pacalypse Now'를 발매하여 'Trapped', 'Brenda's got a baby'등을 히트시켰다. 그러나 그의 행운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첫 앨범의 수록곡들이 텍사스에서 있었던 경찰관 살해범에게 살인 동기를 제공하였다는 법원의 판결을 받았고, 92년당시 부통령이었던 댄 퀘일은 2Pac을 문화의 이단아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는 93년 2집 'Strictly 4 My N.I.G.G.A.Z.'를 발표, 'I get around', 'Keep ya head up'과 같은 명곡들로 그해에 American Music Award의 최우수 힙합 신인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는 'Juice','Above the Rim'과 같은 영화에 출연하여 배우로서의 활동도 시작한다. 그러나 영화감독 앨런 휴즈와의 싸움은 L.A.의 구치소에서의 15일간 구류라는 결과를 낳는다. 같은해 11월에는 아틀란타에서 경찰관 살해범으로 몰려 재판을 받았다. 결국 혐의는 풀렸지만, 그의 평판은 나빠지기 시작했다. 또한 11월 말경, 2Pac은 무기 소지와 성추행 사건으로 기소되는데, 행운의 여신이 그를 외면했기 때문일까, 법원의 마지막 판결이 있던 바로 전날 맨하탄의 녹음실로 향하던 2Pac이 3명의 갱단에게 총격을 당하고 금품을 강탈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날 그는 기브스를 하고 휠체어에 앉은 상태로 징역18개월의 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그는 인생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한 것 같다. 이것은 출옥후에 가졌던 인터뷰에도 잘 드러나며, 무엇보다도 1995년 옥중에서 발표한 'Me Against The World' 앨범에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이 앨범은 초유의 인기를 모으며 싱글 'Dear Mama'를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올려 놓는다. 그의 말을 빌자면, 감옥에서의 생활은 지옥이었고 다시 사회에 돌아온 그에게는 모든 곳이 곧 천국이었다. 1995년 말경에 오랫동안 사귀어왔던 Keisha Morris양과 뉴욕에서 결혼식까지 올리게 되었다. 2Pac에게 있어서는 MC로서의 경력과, 그의 인생 자체에 있어서 커다란 전환점이라 할 수 있겠다.
그의 짧은 인생을 놓고 보았을때, 그에게는 L.A.의 Death Row 레코드사에 속해 있었던 기간이 최고의 전성기였다. Dr.Dre와 함께 Death Row를 설립한 Suge Knight는 2Pac이 출감되자마자 그를 찾아가 계약을 맺고, 96년 드디어 대망의 더블 앨범 'All Eyez On Me'를 발표한다. 이후 Dr.Dre의 독립과 Snoop Doggy Dog의 이적 등으로 재정난에 시달렸던 Death Row 레코드사에 있어서 모든 것의 중심은 바로 2Pac이었으며,그는 이미 신화적 인물이 되어 있었다. 2Pac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90년대 랩 음악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 그는 연기자로서도 한층 성숙된 모습을 보여, 그의 사후에 공개된 영화 'Gang Related'에서는 주연을 맡기도 했었다. 그러나 1996년 9월 7일,그는 또다시 총탄을 맞아야 했고 결국 9월 13일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2Pac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하지만 그에게 세상 사람들의 계속적인 관심이 쏟아지는 것은 과연 무엇때문일까? 지금 이순간에도 인터넷의 랩 뉴스그룹에서는 2Pac의 음악과 그의 사상 에 대한 열띤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는 2Pac이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홈페이지도 올려져 있다. 그리고 미국의 몇몇 대학에서는 90년대의 흑인 문화 현상을 연구하는데 있어 2Pac을 강의의 소재로도 삼고 있다.
2Pac은 한마디로 묘사하자면 마틴 루터 킹 박사와 말콤 엑스의 특성들을 나눠가진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3집과 4집을 통하여 미국 흑인들에게 자성의 목소리를 높일 것을 종용하였다. 1집과 2집에서 보여주던 Thug Style과 외설스러움은 수그러지고 대신 그의 주변을 유심히 관찰하고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보게 하는 눈이 생겼던 것이다. 그는 4집의 수록곡인 'Life goes on'에서는 놀라우리만치 뛰어난 감수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중 한 구절을 보자; "얼마나 많은 형제들이 더 희생되어야 하는가? 모두에게 평온함이 깃들기만을 바라지만 나와 같은 범죄자에게도 천국이 있는가? 나는 죽음을 생각한다. 인생이란 과연 무엇인가?"
어떤가. 2Pac은 그가 자라난 뒷골목의 잔인함과 비참함을 통하여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많은 고민을 하였다. 그러한 자기 통찰의 과정을 통하여 그는 예전에 세상에 대하여 품었던 증오를 풀었고,그의 안에 내재되어 있던 인간적 면모를 발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간혹 언론들은 앨범 사진에 보이는 그의 기이한 문신들을 놓고 그것이 마치 범죄성이 2Pac의 전모를 나타내는 것으로 부각시킬 때가 많았다. 물론 그는 한때 혼란과 광폭함이 넘치는 야생마와 같았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과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편견을 가지게 되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음악은 분명히 '갱스터 랩'으로 분류되지만 그것이 전하려 하는 메시지는 오히려 윤리적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미덕인 경우가 많이 있다. 그 중 하나를 들자면 '여권의 존중'이다. 2Pac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에 의해 홀로 자라난 만큼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깊었는데, 그는 복역 기간중에 어머니의 자신에 대한 깊은 애정을 경험했었다. 2Pac의 어머니는 계속 지방법원을 찾아다니면서 까지 아들의 결백을 주장했던 것이다. 2Pac은 'Dear Mama'라는 노래에서 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한 사회가 발전하려면 근본적으로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청소년들 이다. 흑인 구역의 청소년들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는 한 대개가 학업과는 거리를 두게 된다. 거리에서는 쾌락과 범죄의 유혹이 청소년들을 기다리고 있다. 청소년들은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악순환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2Pac은 특히 청소년들에게 강한 힘과 의지를 가지라고 격려한다. 그의 곡들 중 'Keep ya head up'이라는 곡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쳐 실의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그의 격려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 "우리들 스스로가 변화를 만들어 가야만 한다. 우리 사회는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내일은 반드시 밝은 태양이 우리를 비춰줄 것이다"라고 그는 이야기했다.
위에서 잠시 20세기 흑인 인권 운동의 두 대표자인 킹 박사와 말콤 엑스를 언급한 적이 있다. 이 두 사람은 흑인의 인권 확보라는 같은 주제를 상반된 방식으로 해석했다. 킹 박사는 늘 평화와 비폭력,그리고 사랑을 강조한 반면 말콤 엑스는 무조건적인 쟁취와 투쟁을 전면에 내세웠다. 2Pac이 인터뷰나 그의 노래에서 전하는 메시지들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이 두 가지 입장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두 인물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2Pac은 흑인 사회 구성원들 자체를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흑인들 스스로가 올바로 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같은 흑인들이라 해도 좋게 봐줄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생각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사례에는 역시 총격으로 사망한 래퍼 The Notorious B.I.G.와 그의 소속사인 Bad Boy Entertainment와의 갈등을 들 수 있다. Notorious B.I.G.는 뉴욕의 빈민가에서 갖은 고생을 하다가 2Pac의 도움으로 랩 음악계에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자 Notorious BIG는 2Pac 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2Pac은 이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Notorious B.I.G. 는 내가 아끼는 형제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최대한 잘 해 주었고 성공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돈의 어둠에 가려 사물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다" 라고 말이다. 그는 3집의 'Temptations'라는 곡에서 그러한 메시지들을 잘 담아내고 있다.
2Pac의 사후에 랩 음악계를 비롯한 흑인 사회 전반에는 조용한 반성의 기운이 감돌았다. 랩 음악계 관련인들 간의 간담회가 여러 차례 열렸고, 2Pac의 생애를 기리는 출판물도 상당수 간행되었다.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하나로 일치시키고 있는 듯 하다. '더 이상의 폭력은 용납하거나 미화할 수 없다'라는 결론에 많은 이들이 동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을 뿐, 요즈음 발매되는 랩 음반들을 보면 여전히 갱스터적인 소재들이 득세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 몹시 안타까운 점이다. '힙합의 의식적인 면을 되찾자'는 운동이 생각만큼 실효성을 거두고 있지 못하는 듯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2Pac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그의 인간적인 면에 대한 연민을 갖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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