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1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08/05
    <월간 신동아>&quot;좌파&quot;에 대한 노회찬의 생각
    free-vahn
  2. 2004/07/18
    유 시 민 [서른 살 사내의 자화상]
    free-vahn
  3. 2004/07/18
    유시민씨의 <항소이유서>
    free-vahn

<월간 신동아>&quot;좌파&quot;에 대한 노회찬의 생각


<월간 신동아>"좌파"에 대한 노회찬의 생각  


이 글은 월간 신동아 1999년 11월호의 특집 <한국의 좌파>난에서 서면 인터뷰로 게재된 내용입니다.


1. 선생님은 좌파 논리의 핵심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달리 말해서 현 시점, 한국의 상황에서 좌파, 또는 진보의 개념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노회찬 : 좌파 또는 진보의 개념은 관념적일 수 없으며 실천과 유리될 수 없다. 따라서 진보의 개념은 시대적 과제에 대한 태도와 그 철학적 기반에 따라 규정된다. 21세기 한국 사회의 시대적 과제는 우선 이 사회가 20세기에 받았던 고통, 그리하여 20세기에 청산하거나 성취했어야 했던 미완의 과제들을 해결하는 것이다. 즉 ▲빈곤으로부터의 해방 ▲민족적 억압과 간섭으로부터의 해방 ▲계급적, 성적, 각종 차별과 불평등으로부터의 해방 ▲모든 형태의 비인간적 폭력으로부터의 해방  ▲분단과 냉전으로 인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폐해로부터의 해방  ▲모든 봉건적이고 유교적인 비인간적 관습으로부터의 해방이 바로 그것이다. 이 5대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 곧 진보이며 이를 추구하는 세력이 바로 좌파이다.

2. 문항 1)과 관련, 선생님이 생각하는 좌파의 청사진, 다시 말해 좌파가 지향하는 우리 사회의 궁극적 모습, 가치관, 세계관은 무엇입니까?

노회찬 : 소비에트식 사회주의, 북한의 우리식 사회주의, 유럽의 사민주의는 한국 좌파의 이념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본질로부터 발생하는 제반 모순을 극복하는 것은 좌파의 기본임무이다. 우리 사회의 궁극적인 모습은 단일한 통일 민족국가이며 사회경제체제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고 더 많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민주적 사회주의체제이다. 이 체제는 모든 차별, 억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3. 선생님은 현 시점에서 한국의 좌파세력에게 최대의 적, 혹은 극복해야 할 대상은 누구(집단, 제도, 혹은 여타 세력)라고 생각하십니까?

노회찬 : 한국의 좌파세력에게 최대의 적은 좌파세력 자신이다. 한국의 좌파세력은 국제주의적 전통과 안목의 부재, 전문성의 결여, 정치적, 현실적 무능력이 좌파의 초상이다. 게다가 김대중 비판적 지지와 같은 현상이 말해주듯이 정치적으로 우파의 헤게모니를 강화시키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경향은 정치적 독립을 통한 좌파의 독자적 존재기반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실패 요인이 되었다. 좌파의 이같은 자가당착적 오류는 좌파의 구성이 주로 우파의 주도세력과 같은 엘리트층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좌파 역시 봉건적 잔재, 유교적 관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나이와 학번을 가장 중시하는 집단이 바로 `운동권`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고백해야 한다. 한국의 좌파문화 속에선 미국의 40대 대통령, 영국의 30대 당수와 40대 총리가 나올 수 없다. 능력에 의해 검증되고 , 발탁되고, 키워지는 풍토가 매우 척박하다. 삼성그룹에 다수의 30대 이사가 활동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한국의 좌파는 재벌그룹보다 더 봉건적이라 평가할 수도 있다. 이른바 386세대의 일부가 국민회의 등 기성 정치권에 편입하는 현상에는 `젊은 그들`에게 그만한 기회를 갖는 것이 좌파내부에선 힘들기 때문인 측면도 있다.
한국의 좌파는 기본적으로 소외된 대중을 대표하려는 사람으로서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고 대중을 위해 일한다는 철학과 소명의식이 부족하다. 모든 논쟁과 실천에 있어서 대중의 생각과 처지를 중시하는 전통이 매우 부실하다. 반대로 대중을 가르치고, 대중을 위해 더 낳은 기회를 포기했다는 선민의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4.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진보정당(민주노동당) 결성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과 관련, 1) 진보정당의 구성원리(인적 구성, 정강 등의 면에서) 2) 현실정치에서 진보정당이 안착할 가능성과 한계 3) 기존 제도권 정당과의 관계 설정 등등의 측면에서 선생님의 견해를 말씀해주십시오.

노회찬 : 지금 건설되고 있는 진보정당이 민주노총등 조직노동자를 주요 기반으로 하여 출발하고 전체 근로계층의 정당으로 발전하는 전략을 추구하는 것은 올바르다. 한국적 현실에서 이와 역순으로 외연을 확장하고 그 영향력으로 내부를 강화하는 전략은 이제까지의 경험이 말해주듯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 진보정당이 진보적 시민운동과 조직적 연대를 하는 이른바 적녹동맹의 추진은 독자적인 세력화를 이룬 후 중장기적으로 시도되어야 성공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과거 진보정당의 실패를 가져왔던 요인 중 독자정당건설과 비판적 지지로 분열되었던 주체형성의 문제와 조직 노동자들의 참여문제가 해결됨으로써 진보정당이 현실정치에 연착륙할 조건은 매우 향상되었다. 진보정당의 남은 장애물은 기성정치세력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선거 및 정당제도와 좌파 일반의 정치적 무능력이며 진보정당의 미래는 이를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달려 있다. 진보정당의 등장으로 2000년 이후의 한국정치는 신 3당구도로 변화될 것이며 진보정당은 국민회의와의 대립을 축으로 활동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제 1 야당의 지위를 확보할 것이다.  

5. 한국의 좌파 진영은 크게 이론가 집단과 운동가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혹자는 학문적 차원에서의 좌파 이론가와,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노력하는 운동가 사이의 괴리, 간극을 지적하기도 하는데, 이들 양자간의 관계에 지금까지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향후 바람직한 방향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논평해주십시오.

노회찬 : 경험적으로 말하자면, 사회변혁 프로그램에 관한 논쟁이 활발했던 80년대와 90년대 초반에는 `이론의 과잉`이라 부를 만큼 다양하고 풍성한 `이론`이 제시되었다. 그 깊이와 정치성은 별도로 치더라도 총체적 이론(grand theory)은 풍성한 반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에 관해서는 `전문성(혹은 전문가)의 부족`이라는 곤란을 자주 겪어왔다. 즉 사회변혁 프로그램에 관해서는 좌파가 많았지만 각론에 들어서면 좌파 이론가가 늘 부족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 차원에서는 좌파가 공세적이고 논쟁의 우위를 점했지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안 창출에서는 우파의 우위가 일반적이었다. 말하자면,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는 좌파의 것이었지만 `현실`은 늘 우파의 승리였던 것이다. 이것은 곧 이론과 실천의 괴리 즉 좌파의 실천이 현실과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는 원인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6. 우리 사회 일각에서 한동안 `제3의 길`에 대한 논의가 무성했습니다. 한국 좌파가 향후 지향해야 할 방향과 `제3의 길`과의 관계에 대해서 선생님의 견해를 말씀해주십시오.

노회찬 : 유럽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20세기에 들어서서 대부분의 시기에 걸쳐 다수당 혹은 제2당의 지위를 점하게 된 성장의 배경은, 국외 수탈 등을 통한 사회적 부의 축적과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확산을 경계한 각국 자본의 국내 타협정책에 있다. 유럽에서 사민주의가 성장하게 된 이같은 요인은 한국에서 사민주의가 뿌리내리기 힘든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일 백년이 넘는 역사를 갖는 유럽 사회민주주의는 시대의 변천을 겪으면서 지속적으로 우경화의 길을 걸어왔다. `제 3의 길`은 유럽 사회민주주의의의 우경화가 최근 도달한 지점이기도 하다. 유럽 사회민주주의가 사회변혁적 전망을 사실상 포기한 것은 오래되었지만, `제 3의 길`에 이르러서는,  현실적 이해관계에서조차 노동자와 서민의 편에 서는 것을 포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제 3의 길`은 노동자와 서민의 지지를 일부 포기하는 대신 자본과 타협을 강화함으로써 지속적인  집권을 추구하려는 사민주의 정치가들의 집권전략에 불과하다. 한국의 경우 좌파의 당면 과제가 노동자, 서민의 지지를 모아 정치적, 사회적 기반을 형성하는 것이라 할 때, `제 3의 길`과 같은 대자본 타협전략은 좌파 자신의 입지마저 잃게 할 `위험한 길`, `최악의 길`이 될 수 있다.


7. 선생님은 한국 좌파의 장래에 대해서 낙관(혹은 비관)하십니까? 낙관(혹은 비관)하신다면,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노회찬 : 한국 좌파의 장래는 밝다. 그 근거는 좌파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라는 조건 자체로부터 나온다.  무엇보다도 한국 사회는 정치, 경제의 개혁, 사회복지의 실현, 민주주의의 확대, 민족문제의 해결 등 좌파적 대안과 해결능력이 요구되는 사안들로 가득 차 있다. 한국의 좌파가 이제까지 성취한 것은 적지만 아직 기회는 많다.
21세기 한국 사회의 가장 큰 과제는 `통일`이다. 통일이란 곧 단일한 통일 민족 국가의 수립이며 단일한 사회경제체제의 건설이다. 이 새로운 건국을 해방과 일치시키는 것- 이것이 한국 좌파의 21세기 과제이다. 군인에게 전쟁이 호기이듯 새로운 사회경제체제의 건설이라는 시대적 과제는 한국의 좌파들에게 유래 없는 호기를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 좌파의 장래는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유 시 민 [서른 살 사내의 자화상]

유 시 민 [서른 살 사내의 자화상]


아픔을 먹고 자라는 나무 (젊은 활동가의 성장 체험기) 82∼102 P
                                  - 교육출판기획실 엮음 / 도서출판 푸른나무

== 인간과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갖기까지 ==

유 시 민 [서른 살 사내의 자화상]



삼십. 흔히 하는 말로 "꺽어진 육십" 내 나이다.
세상은 나에게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주었다.
"제적학생" 이것은 사실 그 자체다. 나는 대학에 두 번 입학해서 두 번 다 제적당했다. 성적증명서를 떼보면 2학년까지밖에 나오지 않는다.

나의 어머니와 고향 친구들, 함께 일하는 동지들과 친지들은 나를 "민주투사"라고 부른다. 하지만 형사와 검사, TV 어나운서와 정부당국의 "나으리들"은 나를 일컬어 "좌경용공분자"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름들은 사람들이 자기 주관에 따라 붙여준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일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일자리 없이 여기저기 배회하는" 실업자라고 나를 비난한다. 그렇다. 나는 직장이 없다. 하지만 직업은 있다. 나는 힘으로 벌어먹고 산다. 번역을 하거나 수필을 쓰고, 어떤 때는 드라마 대본이나 소설을 쓰기도 한다. 나의 직업을 구태여 말하자면 "자유기고가"라 할 수 있다. 별 볼 일 없기는 하지만 내 이름으로 출판된 책도 하나 있다. 나는 실업자가 아니다.

나는 감옥에 두 번 갔다온 전과자이지만 예비역 육군 병장이기도 하다. 폭력전과가 있지만 그렇다고 폭력배는 아니다. 한번도 남을 때려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계엄령 위반혐의로 군사재판을 받은 적도 있지만 그때는 민간인 신분이었다. 군대생활 32개월 동안에도 영창 한번 간 일이 없는 모범 사병이었다.

나는 별로 잘나거나 훌륭한 인물이 아니다. 보증금 1백만 원에 월세 5만 원짜리 자취방이 내 보금자리이고 저금통장이나 처자식은 아직 없다. 나는 가난한 노총각이다. 혼자된 어머니에게 매달 용돈을 보내드리지도 못하는 "있으나마나 한" 아들이다.

나는 호주머니에 돈이 있는 동안에는 돈벌이를 안한다. 그러나 건달은 아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미래가 하루 빨리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쓴다. 내가 원하는 미래란 별것이 아니다. 열심히 노동하는 삶들이 천대받지 아니하고 사람답게 사는 사회, 자기 생각을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말하고 쓸 수 있는 사회, 평생을 눈물과 비탄 속에 살아가는 남북의 이산가족들이 그리운 혈육을 만날 수 있는 나라, 강대국에 매이지 않고 우리 운명을 우리 민족 스스로 결정하고 개척해나가는 나라. 이런 사회, 이런 나라가 바로 내가 간절히 바라는 미래인 것이다.

자신과 자기 가족만의 부귀영화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은 이런 나를 미워한다. 그래서 무슨 구실을 붙여서든 감옥에 잡아 가두려고 한다. 계엄령 위반이니 폭력 죄니 하는 내 전과는 그 때문에 생긴 것이다.

하지만 내가 뭐 별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지난해 6월에 수백만 국민이 했던 일들에서 보듯 아주 많은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매일 매일 하고 있는 일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일 뿐이다.

내가 나를 설명하자면 대충 이렇다. 하지만 내가 어릴 적에 이렇게 살려는 뜻을 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내가 이 짧은 글에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바로 여기에 대해서이다. 어째서 나는 오늘의 내가 되어버렸는가? 어째서 나름대로의 삶의 기쁨과 보람을 이런 생활에서 찾게 되었는가? 인간은 누구나가 복잡하고 독특한 존재이듯이 나도 또한 그렇다. 나는 여기서 나라는 인간의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수도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다. 단지, 지난 십 수 년간이 사회가 나와 이웃에게 가한 억압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어떻게 내가 인간과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런 생활에서 기쁨과 보람을 가지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을 따름이다.


[ 출세욕을 품게 한 "가난뱅이 의식" ]

나는 2남 4녀 중의 차남이자 다섯째이다. 태어나서 10년은 경주에서, 고교 졸업까지 10년은 대구에서 자랐고, 대학에 진학한 뒤로는 서울에서 살고 있다. 나의 아버지는 1982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35년간 교직에 몸담았던 분이다. 그 분은 비록 "가슴에 달 금빛 훈장도 타고 갈 황금 마차도 없는" 평교사로 일생을 마쳤지만 자식들을 배고프지 않게 먹였고 모두 대학교육을 시켰다.

나는 "가난뱅이"였던 적이 없다. 밥이 없어서 굶은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소년시절 나는 주관적으로 가난을 몹시 심각하게 경험했다. 다른 친구의 것보다 빈약한 도시락 반찬은 점심시간마다 나를 괴롭혔다. 미술시간이면 두꺼운 스케치북과 포스타칼라를 꺼내놓은 친구들이 낱장 켄트지를 꺼내는 나를 주눅들게 했다. 뒤꿈치를 꿰맨 양말 때문에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웠고 외풍 센 먼지투성이 우리 집은 나로 하여금 친구들을 데려오지 못하게 했다. 가난 그 자체가 아니라 "가난하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그것은 내 소년기의 대부분을 어두움으로 뒤덮었다.

대학생부터 중학생까지 두 살 간격으로 늘어선 6남매. 내가 중 3일 때 큰 누님과 형은 더구나 사립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교사의 박봉으로는 유지가 불가능한 가계였다. 빚이 늘어갔다. 어머니는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집에 달린 점포에 잡화상을 차렸다. 매일 새벽 시내의 큰 시장에 나가서 생선과 야채를 받아오는 중노동 때문에 심장이 약한 어머니는 늘 어딘가 편찮았다. 나는 어머니가 이고 오는 짐의 무게를 헤아리고 그 헌신에 감사드려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가난과 어머니의 병환으로 인한 집안의 어두운 분위기에 화가 났다.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길을 가다가 길 건너편에 짐을 이고 가는 어머니를 보고서 모른 척 지나간 적도 있었다. 나는 이 일 때문에 그 뒤 며칠 동안 몹시 번민하고 자학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 가난의 이유를 몰랐다. 사모님 소리를 듣는 어머니가 왜 시장아줌마가 되어야 했는지, 어째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밤새 빚 걱정에 한숨을 쉬다가 얼마 후 아버지가 대구에서 경주로 학교를 옮겼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만이 확실할 분이었다.

나는 법관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두 가지 일 때문이었다. 한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앓아 누운 적이 있었는데 나는 가끔 보건소에 가서 무료로 주는 알약을 타오곤 했다. 어머니가 그 알약을 한 움큼씩 입안에 털어 넣는 것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그런 결심을 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버지의 일이었다. 경주에서 토요일이면 오던 아버지가 가끔 일직 때문에 못 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때면 나는 밑반찬을 가지고 경주에 갔다. 아들에게 더운밥을 먹이려고 쌀을 씻는 모습을 보면서는 나는 의문을 품었다. " 하숙 대신 자취를 해서 도대체 얼마나 절약될까?"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혼자 우는 적이 많았다. 그 때 눈물을 훔치면서 나는 결심을 굳혔다. "하루빨리 법관이 되어야지"

나는 누가 장래의 희망을 물으면 "판사"라고 대답하게 되었다. 사회정의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아는 바로, 가장 빨리 출세해서 부모님 모시는 것이 바로 그 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비장한 각오로 "판사"라고 대답하면 백부님이나 당숙들은 매우 기꺼워하였다. 하지만 내 부모님께서 그런 대답을 요구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단지 나의 누이들이 은근히 그런 결심을 부추겼을 분이다. 나는 소위 "출세"라는 것을 하기 위해 "판사"가 되기로 한 것이다. 이 결심은 내 삶에서 처음으로 자각한 사회적 욕구였다.


[ 사회적 부조리의 첫경험 ]

"경험은 바보의 가장 좋은 학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내 경우에 있어서도 타당한 것 같다. 자유니 정의니 하는 빛나는 단어들을 책에서 배웠지만 나는 한번도 그 단어들 때문에 가슴 설레거나 잠 못 이룬 적은 없었다. 적어도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는.

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나왔을 때 나는 중학교 신입생이었다. "이제 북괴라는 말 대신 북한이라고 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그저 신기하게 들릴 뿐이었다. 곧이어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박정희 종신집권체제가 출범했지만, 그것 역시 다음해 국민윤리 교과서에 장황하게 서술된 "한국적 민주주의" 만큼이나 막연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고,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이철씨가 간첩으로 나오는 반공드라마를 들으면서도 나는 일간신문에 기둥만한 활자로 박혀나오던 그 사건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고교에 진학하면서 학생회장 선거가 없어지고 학도호국단이란 것이 생겼지만 별로 섭섭하지 않았다. 75년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는 동아일보를 구독하던 우리집에 아침마다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가져다주었지만 나는 정치권력의 언론자유 탄압에 비분강개하지는 않았다. 그건 드물게 재미있는 정치적 사건에 불과했다. 정치경제 교과서에 국민의 자유권적 기본권을 설명한 내용과 유신헌법 조문 사이에 명백한 모순이 있었지만 나는 대학입시를 위해 그것을 몽땅 외어야 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로 잡혀간다는 풍문은 들었지만 아무도 긴급조치의 내용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75년 당시 긴급조치 9호에 항의하여 김상진이라는 성루대학생이 할복자결한 일까지 있었지만 내가 긴급조치 때문에 불편을 느낀 적은 별로 없었다.

나는 어느 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우등생"이었다. 중학교 때보다는 성적이 훨씬 향상되어 선생님들로부터 일류대학에 진학하리라는 기대를 받는 "우수한 고교평준화 1기생"이었던 것이다. 교실 구석에서 박정희와 모모한 여인과의 관계에 대해 속살거리거나, 수업시간에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에 대한 질문을 해서 사회선생님을 당황하게 하는 친구들을 나는 경멸했다. 나는 그런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또 학생이라면 학교공부나 잘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위해서 "사회라는 것"에 대해, 특히 우리 사회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상황이 나에게 닥쳐왔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그야말로 우연한 사고처럼 닥쳐왔다.

나는 아버지의 월급이 얼마인지를 고3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알았다. 그전에는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부터 교직에 몸담았던 아버지는 이미 30년 가까이 교편생활을 한 노교사였다. 그런데 당시 아버지가 경주에 있는 미션 계통의 사립고등학교에서 받은 봉급을 대학을 갓 졸업한 교사의 초임과 같았다. 이것은 크나큰 충격이었다. 나는 그 이유에 대해 누이들에게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썩어빠진 교육계의 풍토 때문이었다.

몰락한 양반의 후예. 소작농이나 다름없는 빈궁한 어린 시절. 소학교 졸업 후 농사일에 매인 가운데 검정고시로 중학교 졸업 자격 획득. 영양실조로 인한 한쪽 눈의 실명. 일본으로 건너가 병원 간호보조원으로 일하면서 전문학교 수료. 해방. 태평양전쟁 당시의 식량부족 속에서 얻은 만성적인 위장병. 맨손의 귀국. 그리고 역사교사로 교직생활 시작.

나의 아버지는 이토록 험한 인생역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보기 힘든 이상주의자였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접에서 쉴새없이 독서하며 무언가 쓰는 것에 이외에는 다른 취미가 없었다. 소심한 성품이라 친구도 별로 없었다. 자식들을 아들 딸 구별 않고 키웠고 가장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이런 성품 때문에 당신은 소위"운동"이란 것을, 말하자면 인사 청탁 같은 것을 전혀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교감 승진 자격을 얻고도 무려 10년째 되던 해에야 겨우 승진 발령을 받았는데, 그것도 경북 청송 골짜기의 교사 3명뿐인 분교장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상 교직을 떠나라는 선고나 다름없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20리길을 걸어야 하는 벽지 근무를 감당하기에는 건강이 허락치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늘어난 빚의 무게 때문에 밤이면 불면증에 시달리기 까지 하였다.

아버지는 사표를 내고 퇴직으로 빚을 갚았지만 이젠 직장을 잃어버린 셈이다. 웬만한 교장선생과 맞먹는 높은 호봉의 노교사를 받아들일 만큼 어리숙한 사립학교는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경주시에 있는 모 고등학교에서 교사 초임만 받는 조건으로 다시 교편을 잡았다. 어머니가 장사일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유도, 아버지가 한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객지에서 손수 밥을 지어야 했던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고3이 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도 아버지를 무척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한글을 깨우쳐주고 손수 구구단을 가르쳐준 아버지, 여섯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받아 읽은 그 수많은 책들, 늘 독서하는 모습, 나는 아버지를 존경할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그때까지 가르침을 받은 어느 역사선생님보다 아버지는 역사에 대해 훨씬 해박한 지식을 가진 분이었다. 제자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 잘못 가르친 때문이라고 스스로 자기의 종아리를 때리는 선생님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훌륭한 선생님이자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런데 그러한 분이 좀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고 권모술수를 모른다는 이유로 냉대받고 소외당한다는 것이 내 가슴속에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단지 봉급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25년여 교직생활에서 쌓은 아버지의 연륜과 풍모가 가차없이 짓밟히고 있다는 데서 나는 내 자신의 인격과 존엄성이 짓밟히는 것과 똑같은 아픔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이후 나의 의식 한귀퉁이에서 정신적 반란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 오도된 반란 - 냉소주의 ]

아버지의 봉급액수를 알게 된 순간 이후, 나는 교과서와 선생님들의 "지당하신 말씀"들 속에서 거짓의 냄새를 가려낼 수 있게 되었다. "각자가 이기심을 추구하기만 하면, 신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적 조화가 이루어진다" 사회교과서 전체를 지배한 이런 조화론적 세계관은 위대한 거짓말이었다. 각자가 자기의 이기심을 추구할 때 이루어지는 것은 약육강식의 냉혹한 세계일 뿐이었다. 그것을 사회적 조화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부자와 권력자뿐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내가 느낀 가난에 대해 부모님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성실 근면하고 정직하며 힘껏 일하는데도 가난하다면 그 가난이 경멸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가난한 부모님이 오히려 조금은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러자 장래의 희망을 법관으로 잡은 데 대한 회의가 싹텄다. 유신시대의 사법부는 권력의 시녀로 타락해 있었으므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법관을 진심으로 존경하지 않고 있었다. 단지 어느 정도 권력에 가까이 있고 잘만 하면 한재산 모을 수도 있기 때문에 부러워할 뿐이었다. 하지만 특별히 나쁜 직업이라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 꿈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학교생활도 완전히 엉망이었다. 중고등학생 3천 명이 ㄱ자 4층 하나에 몽땅 수용된 학교. 도서실 좌석이 1백 서 남짓하고 그거 교사와 학생들을 족쳐서 명문대학에 많이 넣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학교운영. 교사의 평균연령이 30세를 겨우 넘고, 서울의 강남지역에 여학교를 짓느라고 정신이 팔려 어두운 교실에 형광들을 더 달아달라는 소박한 요구마저 묵살하는 재단 측의 횡포. 대부분의 학교에서 그러하듯 학생들의 인격함양에 신경을 쓰기엔 선생님들에게 여유가 너무 없었고, 오직 명문대학 진학에만 눈이 팔린 우등생을 만족시키기엔 젊은 선생님들의 경륜이 부족했다. 나는 학교에 대해 아무런 애정을 가지지 않았다. 수업시간엔 아무 책이나 마음 내키는 대로 꺼내놓고 혼자 공부하거나 잠을 잤다. 방학중의 보충수업에는 한시간도 참석하지 않았고 예비고사가 끝난 후 두 달간은 학교에 나가지도 않았다. 선생님들을 존경하지도 않았고 믿지도 않았다. 나는 인간성이 비뚤어진 우등생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어느 정도는 비뚤어져 있기도 했다.

그러나 나도 나름대로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친구들이 과목당 몇 만원씩 내고 학원강사들에게 그룹지도를 받는 시간에 나는 어머니 대신 가게에 앉아 영어 참고서를 읽어야 했고, 아무리 해도 늘지 않는 수학 때문에 고민하다가 최후수단으로 수학정석과 해법수학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어버려야 했다. 나는 미적분의 개념에 대해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문제는 척척 풀 수 있게 되었다. 다 아는 문제를 푸는 선생님의 강의를 꼬박꼬박 듣다가는 시간만 낭비하고 말 것이라는 절박한 심정이 나를 비뚤어진 우등생 쪽으로 끊임없이 몰아댔다. 나의 그런 행동이 선생님들에게 얼마만한 마음의 상처를 입혀드렸을까. 지금 생각하면 무릎 꿇고 사죄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그때에는 나의 정신세계도 실로 황폐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지나쳤다. 각박한 입시교육이 쳇바퀴 속에서 선생님도 나도 혹심한 상처를 입은 것이다.

졸업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법관이 된다는 데 대한 흥미를 잃어갔다. 흥미나 적성으로 보자면 역사학과 언어학 쪽으로 마음이 끌렸다. 하지만 그건 별로 돈벌이가 안되는 직업인 것 같았다. 가난이 부끄럽지는 않지만 너무 불편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하루 빨리 그것을 벗어나려면 법관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담임선생님께 고민을 털어놓았지만 선생님도 한숨만 내쉴 뿐 이래라저래라 권유하지 않았다. 나는 괴로웠다. 아무리 고민해도 정답을 얻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당한 열쇠를 찾아낸 후 고민을 덮어버렸다. 그 열쇠는 바로 냉소주의였다.

세상은 어차피 불합리한 것이다. 사람 사는 것도 그렇다. 꼭 논리적으로 타당한 행동만 할 수는 없다. 불합리해도 하고 싶거나 해야 하는 것이다. 보라!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란 없지 않은가? 아버지처럼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도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고, 뒤로는 개수작해서 돈 벌어도 남 보기에 정승같이 쓰면 칭찬 받는다. 졸업식날까지는 술 담배 하면 안되지만 졸업장만 받으면 그때부턴 제 마음대로 아닌가? 마음 내키는 대로 공부해도 합격하면 영웅대접 받지만, 선생님 말씀 꼬박꼬박 듣고 예습 복습 철저히 하고서 떨어지면 병신 소리 듣게 된다. 세상에 절대적인 가치나 진리는 없고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이렇게도 보이고 저렇게도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마음 편하게 먹고 공부나 열심히 하자. 이 세상에 인생을 걸고 추구해야 할 절대적인 가치란 없는 거야. 정 역사학이 하고 싶으면 법관 하면서도 할 수 있을 꺼야.

나는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관습이나 규범을 진리 혹은 가치와 혼동했다. 겨우 열 아홉 살 촌뜨기 주제에 마치 인생의 비밀을 다 알아버린 늙은이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 하기야 고등학교 3년 동안 단 한 권의 교양서적도 읽지 않고 교과서 참고서만 팠으니 사고의 폭이란 것이 벼룩의 간만큼 밖에 안되는 건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서울대 사회계열에 원서를 썼다. 법대와 경영대, 사회과학대학의 신입생을 몽땅 한꺼번에 뽑는 계열별 모집이었기 때문에 법대를 지망한 나는 사회계열에 원서를 낸 것이다.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고 아무도 나의 선택에 간섭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예 말씀이 없었고 아버지는 내가 듣기에 어처구니없는 제안을 하였다. 영어과를 가서 영어를 능통하게 쓸 수있게 된 후 다시 서양철학을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동양 사람은 서양을 잘 알지만 서양 사람들은 오만해서 동양을 모른다. 그들이 아는 동양이란 고작 인도와 일본뿐이다. 그러고서 다 아는 것처럼 만용을 부린다. 따라서 동서양 철학을 하나로 통합하는 일은 동양인만이 할 수 있다. 그러니 우선 서양어와 서양철학을 전공한 후 다시 동양철학을 연구해서 훌륭한 세계적인 철학자가 되어보란 것이 아버지의 말씀의 요지였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아버님, 그 많은 공부할 동안 제 학비는 누가 댑니까? 돈은 언제 벌어 부모님 편안히 모시구요? 아버님은 자식들의 생각을 너무 모르십니다. 왜 자식 덕에 노후에 편안히 사실 생각은 안하십니까? 아버진 너무 이상주의자세요. 현실은 냉혹하지 않습니까? 전 별로 판사 되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판사가 되어야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서 다음날 학교에 나가 원서를 쓰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서울대 사회계열에 합격했다.

무엇인가 뚜렷한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달리며 가슴 설레야 할 그 열 아홉의 나이에 나는 상당히 냉소적으로 세상을 보는 애늙은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한글과 구구단을 배웠고, 화랑 관창과 김유신의 생애를 들었으며, 어버지의 생애를 통해서 세상의 불합리성을 처음으로 체험했다. 그리고 그 체험 속에서 교과서와 선생님의 "지당하신 말씀"에 대한 정신적 반란의 싹을 틔웠다. 하지만 내 정신의 텃밭이 너무나 황폐하고, 입시공부라는 환경이 너무나 메말랐던 탓으로 그 저항의 싹에서 돋아난 것은 자유와 정의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냉소의 가시였다. 그리고 이 때문에 내 대학 신입생 1년간은 사실상 고등학교 4학년의 의미밖에 가질 수 없게 되어버렸다.




[ 대학생활의 첫해 - 실망과 환멸의 시기 ]

나는 숨쉴 틈도 없이 빡빡한 입시공부의 지옥에서 그야말로 "시간이 지천으로 남아도는 대학생활"속으로 내던져졌다. 남들처럼 나도 대학이라는 것에 대한 막연한 기대로 가슴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부딪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대학은 상아탑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전쟁터였다. 그곳에는 입시지옥보다 조금도 덜하지 않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은 지성을 가둬놓는 하나의 정신적인 감옥이었다. 면접시험을 보던 날, 귀밑에 희끗희끗 새치가 돋은 중년의 교수님이 던진 질문에서 나는 대학이 풍기는 감옥의 냄새를 희미하게나마 맡을 수 있었다.

" 학문은 현실과 완전히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학을 다니다보면 사회적 부조리에 눈을 뜨게 된다. 그럼 자네는 어느 것을 택하겠는가? 학문인가 아니면 부조리와의 싸움인가?"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사회적 부조리와의 싸움이라고 하다가는 무언가 좋지 못한 일을 당할까 두려웠고, 그게 무서워 학문 쪽을 택하려니 자신이 비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 다 해서는 왜 안될까 하는 의문도 떠올랐다. 나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쉽게 말해서 데모를 하겠느냐 안하겠느냐 그 말이야!"
좀 짜증 섞인 교수님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러나 나도 짜증이 났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대학에 다녀보지를 않아서요. 앞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그게 옳은 일인지 아닌지 지금 제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학생이면 그저 학문을 열심히 하겠다고 하면 되 무슨 말이 많으냐는 호통과 훈계를 듣고 나서 나는 면접시험장을 나왔다. 같이 입학하는 친구들이 큰일났다며 걱정을 해주었다. 나도 좀 걱정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실망이 그보다 훨씬 컸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따위 질문을 한단 말인가? 대학생이면 성인이고 독립된 인격체인데, 데모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에 대한 질문이나 토론은 몰라도 하겠냐 말겠냐를 그렇게 다그치다니. 지성인인 대학교수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날의 실망과 회의는 다가올 숱한 환멸의 날들에 대한 하나의 암시오, 예고였다.
인간과 사회에 대해 내가 품고 있던 그 숱한 의문들에 대해 대학은 아무런 답변을 해주지 않았으며 교실에서든 기숙사에서든 캠퍼스 잔디밭에서든 단지 몇 명이 모여 자유로운 토론을 하는 것조차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교실에서 배우는 모든 이론들이 난해하고 심오해 보였다. 그러나 이런 이론들은 그저 이론일 뿐이었다. 사람 사는 것과는 별개였다.

경제학개론 강의는 미적분 강의의 연장선이었다. 제한된 액수와 화폐를 가진 소비자가 그 돈으로 최대의 만족을 얻기 위해 어떻게 소비지출을 하는가. 일정액의 자본을 가진 생산자가 일정한 물가와 임금이라는 조건 속에서 가장 큰 이윤을 얻기 위해 어떻게 자본과 노동을 결합하는가? 경제학 교수는 이런 이치를 밝히기 위해 갖가지 방정식과 기하학을 동원했다. 그러나, 왜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부자이고 다른 사람은 날 때부터 가난한가? 어째서 아무런 생산적인 노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평생 어마어마한 소비를 하며 호의호식하는데 하루 10시간 이상 고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사람들이 다같이 경제적으로 넉넉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의문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런 것은 과학이 아니라 규범의 문제에 속하기 때문에 사회과학인 경제학이 다룰 영역이 아니라고 했다. 내게는 경제학이 매우 신비롭기는 하지만 쓸데없이 복잡하기만 하게 느껴졌다.

국가란 무엇이고 정치란 무엇이며 민주주의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주의주장을 다루었지만, 정치학 교수는 우리나라의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정부를 비판하면 영장 없이 체포해서 몇 년 씩 징역을 살리게 하는 긴급조치.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헌법.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남들에게 알리는 것조차 긴급조치 위반인 이상한 현실. 그것을 연구하는 것, 그에 대해 토론하는 일마저도 엄격히 금지된 우리나라의 국시가 자유민주주의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할 수 없는 정치학 강의에 나는 흥미를 잃었다.

철학개론 교수는 칸트의 "위대한" 사상에 대해 가르쳤지만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1978년 대한민국 청년학도가 칸트를 연구해야 하는지, 칸트의 사상이 우리의 삶에 어떤 빛과 희망을 주고 있는 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모른 이론들은 "난삽하고 심오했다" 그리고 하나같이 "재미없는; 것이었다. 대학의 강의는 고등학교의 강의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골라잡기와 단답형 주관식 문제를 풀기 위해 단어와 문장을 암기해야 했지만, 대학에서는 논문식 문제에 답하기 위해 교수님의 강의와 교과서의 핵심적인 대목을 한두 페이지에 걸쳐 몽땅 암기해야 했다. 차이는 그런 정도였다. 하나의 이론의 타당성을 시험하는 자유로운 질문과 토론은 거의 없었다. 일주일이면 다 읽을 수 있는 정도의 내용을 지닌 교과서로 한 학기 내내 수업을 했다. 지금, 그리고 이 땅에서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고 고뇌하고 있는 "우리들이 문제"는 모든 강의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의 문제를 다룬 주장은 이미 학문이나 과학일 수 없는 것 같았다. 우리 사회의 현실에 대해서라면 메모 한 장 하는 것조차 철저히 금지되었다. 교정 곳곳에서 사복형사들이 차가운 눈초리로 학생들을 감시했고, 기숙사에서 내려오는 언덕배기에는 사시사철 무장전경을 태운 닭장차가 주둔해 있었다. 데모를 한다든가 이념서클에 들면 틀림없이 처벌을 당한다는 "무서운 소문"들이 신입생들 사이에 은밀하게 흘러다녔다. 유신시대의 대학에는 자유가 너무나 많고 또 너무나 없었다. 술을 마시고 연애를 하고 스포츠를 즐기고 학점을 잘 따기 위해 시험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는 거의 무제한적인 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현실을 비판하고 빈부격차의 원인을 연구하며, 남북통일의 방도에 대해 토론하고, 왜 술 먹고 연애 하고 학점 따는 일에만 열중해서는 안되는가를 주장하는 데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단 한 뼘의 자유조차 없었다.

나는 문득 내가 새로운 형태의, 입시공부와는 다른 성격의 사회적 억압 가운데 놓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햇다. 대학 진학이라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대학 진학은 "법관"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에 나는 입시공부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울 유학, 대학생활이라는 신천지에서 나는 무엇이 된다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욱이 법관이란 독재정권의 시녀라는 사실을 이미 "알아버린" 상태에서 법관이 된다는 것은 정신적 타락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선택에 직면했다. 자신과 가족의 안일을 위해 이 부조리한 현실과 타협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과의 싸움 가운데 몸을 던질 것인가? 나는 대학에서 이같은 선택의 기로에 직면하리라고는 조금도 예측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이 새로운 선택, 성인으로서 그리고 자주적인 인간으로서는 처음 직면하는 이 선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대학생활의 첫해를 다 바쳐야 했다.

[ 절망적인 선택 - 달걀로 바위치기 ]

나는 매우 냉소적인 신입생이었다. 흔히 이념서클이라 일컬어지는 학회(學會)에 가입하여 역사와 철학, 노동문제와 농업문제를 공부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온갖 부조리의 원인에 대해 눈뜨게 되고 박정희 유신정권을 깊이 증오하게 되었지만 나는 냉소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도 아무런 정치적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판사가 되려면 어떤 정치적 행동도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 아무리 똑똑한 체 해도 결국 나는 행동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 때문에 나는 진지한 태도를 가질 수 없었다. 세상 자체에 대한 냉소 외에는 달리 행동하지 않는 자신을 합리화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유신독재는 철옹성 같아 보였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박정희는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할 것이고, 그가 죽으면 후계자가 또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할 것이다. 그러나 몇백 명이 학교 안에서 데모를 해본들 신문에 한 줄 보도되지도 않고 지나간다. 돌멩이와 구호만으로 이루어지는 혁명이 어디 있는가? 아무리 싸워도 유신체제를 무너뜨릴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이 더욱 냉소주의를 부추겼다.

학교 공부는 별 재미가 없었지만 학회에서 하는 공부는 매우 흥미로왔다. 매스컴에서는 "지하대학"이라는 이상스런 명칭을 붙여주었지만 그곳이야말로 진정한 대학이었다. 우리는 매주 한 번씩 모여 일고 책에 대해 토론하고, 학습이 끝난 후 봉천동의 후미진 막걸리집에서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노래 불렀다. 매월 한 번씩은 야외로 나가 논문 발표와 토론을 했다. 여름과 겨울의 방학에는 열흘씩 농촌 활동을 했다. 입시를 위한 암기가 아니라 내가 사는 사회에 대한 폭 넒은 이해, 논리적인 사고와 발표력 등 지성인의 기본 소양을 쌓은 것은 현대식 건물과 눈부시게 푸른 잔디밭이 있는 관악 캠퍼스가 아니라 음습한 선배의 자취방과 봉천동의 쓰러져가는 막걸리집에서였다.
그러나 독서와 토론만으로는 산다는 것의 총체적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여하튼 행동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1학기 여름방학에 구로공단의 한 야학선생이 되었다. 3학년으로 올라갈 때까지 1년 반의 야학활동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어리면 16세, 많아야 23세 사이의 여성 노동자들. 대개 전라도에서 호남선·전라선 야간열차로 상경하여 공단으로 흘러들어온 농민의 딸들. 그들은 하루 10시간 이상 일해서 한 달에 2만 5천 원 남짓한 임금을 받고 있었다. 국립대학의 한 학기 등록금이 12만 원, 하숙비가 보통 3만 5천 원, 내가 살던 학교 기숙사의 한 달 식비가 2만 1천 원, 하루 두 시간 일주일에 세 번 고등학생에게 영어·수학을 가르치는 대가로 내가 매월 6만 원을 벌 때 그들은 매주 60시간 이상 노동해서 2만 5천 원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 돈으로 먹고 입고 방세를 내고, 적금을 붓고 부모님의 약값이나 동생의 학비를 대고 살았다.
한 달 용돈을 5백 원밖에 쓰지 않는 또순이도 있었다. 국민학교를 중퇴하거나 겨우 졸업한 그들에게 국민학교 산수를 가르치면서 나는 내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았다. 밥을 굶은 적도, 내 힘으로 벌어먹어야 했던 일도, 셋방살이 설움을 겪은 일도 없는 내가 스스로 가난이 싫어 출세하려는 욕망을 품다니 나는 얼마나 사치스런 인간인가? 1백 원짜리 크림빵 하나에도 어김없이 들어 있는 세금을 이들도 꼬박꼬박 내고 있는데, 국가의 녹이라는 형식으로 그 세금을 얻어서 살아가는 직업을 단지 내 개인적인 욕망 때문에 목표로 삼다니, 나는 얼마나 염치없는 자인가? 가난에 대한 나의 강박관념이 사실은 하나의 허위의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너무나 편한" 기숙사를 나와서 자취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와 내 가족만이 아니라 우리의 주변에 수없이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1978년 한 해 동안 학교에서는 네 번의 시위가 일어났다. 그 때마다 많은 학생들이 구속되었다. 그들은 꽁꽁 묶인 채 법정에 세워졌고 단지 몇 분 동안 구호를 외친 대가로 한없이 높아만 보이는 교도소 담벼락 안에서 그 싱싱한 젊음을 바쳐야 했다. 검은 법복으로 몸을 감싸고 높이 좌정한 판사들은 그들 순결한 젊음 위에 죄인의 너울을 뒤집어씌웠다. 지금도 그렇지만, 매년 대학입시 수석합격자의 소감을 들어보면 "훌륭한 법관이 되어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는 따위의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내가 본 판사들은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고결한 영혼들을 짓밟는 독재의 하수인일 뿐이었다. 나는 두려웠다. 영원히 유지될 것 같은 이 유신체제 하에서 판사가 될 경우, 만인 후배들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잡혀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기 저 판사처럼 조금도 주저없이 징역 3년 4년을 선고해야 할까? 아니면 무죄를 선고하고 쫓겨나야 할까? 쫓겨나려면 애초에 무엇하러 판사가 된다는 말인가?

겨울방학 내내 나는 고민했다. 밥을 손수 짓는 늙은 아버지, 편찮은 몸을 이끌고 시장을 다니는 어머니. 내가 으레껏 법대에 진학하여 사법고시를 보리라고 기대하는 일가친척들. 매일 열 시간 이상 일하고서 2만 5천 원의 월급을 받아쥐는 야학의 어린 여성 노동자들. 유신 독재의 횡포에 비분강개했던 그 수많은 불면의 밤들. 법복을 입은 중년의 나. 붉은 오랏줄에 묶여 법정에 선 나의 모습. 감옥의 높은 담장. 내 앞에는 두 개의 길이 열려 있었다. 타협과 투쟁, 출세의 탄탄대로와 투옥의 가시밭길, 평화롭고 안일한 미래와 쫓기고 고난받는 미래, 이 두 갈래길 앞에서 나는 번민했다.

학과 선택을 결정하는 날, 나는 밥을 먹지 못했다. 오후 2시까지 온통 고민에 휩싸였다. 덩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결정의 순간이 닥쳐왔을 때 나는 법대를 썼다가 지워버리고 경제학과를 써넣었다. 몸음 편하지만 마음이 불편한 삶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몸은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한 것이 나은 길이라 생각했다. 경제학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지만 커트라인이 제일 높고 취업이 순조롭기 때문에 집에다 이야기하기가 가장 편할 것 같아서 경제학과를 선택했다. 그날, 5년간이나 간직했던 법관의 꿈을 털어버리면서 나는 그만큼의 세월 동안 나의 생활을 지배했던 냉소주의와 결별했다. 사실 나는 그 순간 조금은 다른 인간으로 새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학교에서 나오며 나는 가슴이 후련해서 한껏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참았다. 당시에는 학교 안에서 닭싸움을 하거나 유행가를 크게 부르는 행위만으로도 경찰의 눈총을 받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나는 학습의 골방을 벗어나 행동의 광장으로 거침없이 달려나갔다.

그러나 가슴속의 먹구름이 말짱하게 걷히지는 않았다. 유신체제의 철폐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우리의 행동이 성공할 수 있다는 전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의와 투쟁하지 않고서는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없는 사회에서, 그 투쟁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정치적 행동은 하나의 도덕적 결단이요 절망적인 몸부림일 수 밖에 없다. 2학년이 되면서 나는 야학과 농촌활동, 학회활동과 학과생활 등 모든 면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시위대의 선봉에서 돌멩이를 던지고, 강의실 복도의 소화전을 열어 전경과 최루탄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저 흉악한 유신체제가 영원히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혹은 공포감이 떠나지를 않았다. 나는 인간이 사회를 개조할 수 있다는 명제를 가슴 깊이 확신하지 못한 가운데 행동으로 나선 것이다.


[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갖기까지 ]


79년 10월 26일 밤. 궁전동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리는 순간 유신체제는 붕괴되었다. 그 가을의 전국적인 학생데모와 부산 마산 시민 항쟁으로 불안에 빠진 유신 집권층은 서로 죽이고 죽는 가운데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그리고 봄이 왔다. 양심수가 석방되고 너도나도 민주주의를 칭송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유신만이 살길이다"고 떠들어대던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고 유신체제의 죄악상을 공개적으로 비판해도 잡혀가는 일이 없어졌다. 세상은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역사의 발전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열흘 붉은 꽃이 없고 십 년 가는 세도가 없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 것 같았다. 1980년의 봄에 79년의 겨울은 실로 "이상한 시대"였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쓴 메모지 한 장까지 범죄의 물증이 되는 그런 사회가 어떻게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단 말인가? 나는 희망에 가슴 부푼 3년째의 대학생활을 맞이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았다. 민주화가 소리높이 칭송되던 시대의 저편에서 다시 반동의 칼날이 준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79년 12월 12일 밤, 열 개가 넘는 한강 다리가 모두 차단되고 약수동에서 총성이 울리는 가운데 몇십 개의 별이 허망하게 떨어지고 "보안사령관 전두환 장군"이 실권을 장악했다는 외신보도들이 우리의 마음을 짓눌렀다. 4월에는 그가 중앙정보부장 및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을 겸임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취규하 씨가 유신헌법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데 반대한 YWCA 집회가 강제해산되고 주동자들이 헌병들에게 입을 찢기는 등 혹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소문은 우리들을 전율케 했다. 언제 헌법이 민주적으로 개정되어 선거가 있을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유신잔당과 군부가 다시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다.

5월에 접어들면서 전국의 모든 대학생들이 "전두환 퇴진"과 "비상계엄 해제"를 외치며 일제히 궐기했다. 5월 13일과 14일에 나도 광화문과 서울역 일대에서 목이 터져라 외치고 다녔다. 나는 그때 총학생회의 간부로 뛰고 있었기 때문에 늘 시위의 선두에 섰다. 순진하게 민주화를 낙관하고 있던 시민들은 영문을 알지 못하고 학생들을 비난하기도 했다. 서울역에 20만의 시민·학생이 운집하여 계엄해제를 절규하는 시간에 잠실에는 탱크가 나타났고 효창구장에는 무장군인들이 집결했다. 앞으로 전개될 사태는 불을 보듯 명확했다. 충돌과 유혈,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무엇이 나타날지는 알 수 없었다. 시민들의 미온적인 호응과 계엄사의 강경대응 사이에서 고뇌하던 학생 지도부는 가두시위 중단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5·17이 왔다.

전국적으로 시위가 중지된 평화로운 밤에 5·17은 닥쳐왔다. 계엄이 제주도까지 확대되면서 주요도시에 계엄군이 진주했다. 나는 그날밤 학교에서 체포되어 계엄사 예하 수사대로 끌려갔다. 그리고 광주의 피바람이 불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했고 YWCA 집회 주동자들의 입을 찢었던 장본인들, 즉 대통령 경호실 소속의 헌병들에게 내가 밟히고 걷어채이고 얻어맞던 그 시간에 광주에서는 수천 애국동포가 동포의 손에 학살되고 있었다. 유신체제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혹독한 독재체제가 우리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나는 다시 역사에 대한 환멸에 빠져들었다.

석달 만에 석방이 되고, 군대로 끌려가 32개월을 썩고 다시 사회로 돌아올 때까지도 나는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희망을 버린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희망이 현실화할 수 있으려면 앞으로 엄청난 세월과 엄청난 희생이 소요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다시 행동하기가 쉽지 않았다. 세상은 넓고 큰데 나는 너무 작고 무력했다. 그러나 세상은 끊임없이 달라지고 있었다. 70년대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투옥과 고문을 무릅쓰고 반독재투쟁에 나서고 있었으며, 제5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에만 수십 명이 그것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더 많은 사람들이 80년 봄의 투쟁을 뒤늦게나마 이해하고 마음속으로 성원을 보내고 있었다. 세상은 유신 때나 마찬가지였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동포를 학살하고 들어선 정권을 인정치 않았으며, 그것을 배후에서 지원한 미국에 대해 비판했다. 엄청난 변화였다. 그리고 변화는 인간들이 변하지 않는 사회를 개조하기 위한 싸움에 나서고 있었다. 80년 봄의 그 엄청난 패배 속에서 사람들은 승리에의 더 큰 희망을 가졌고 승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더 깊이 연구했다.

달라진 사람들이 스스로 나서서 달라지지 않는 사회를 질타하기 시작한 계기는 85년의 2·12 총선이었다. 나는 84년 9월에 복학하자마자 프락치 사건으로 다시 투옥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현장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대우자동차 파업, 구로지역 민주노조 연대투쟁, 서울 미국 문화원 점거농성의 소식은 감옥에 갇힌 나를 흥분케 하기에 충분했다. 학생뿐만 아니라 노동자들도 세상을 바꾸는 일에 나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부푼 희망을 안고 1년간의 징역살이를 마감했다.

86년 이후 나는 다시 행동으로 나섰다. 어두운 밤거리, 박종철 군 고문살해 사건을 규탄하는 유인물을 집집마다 배달하면서도, 인쇄골목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유인물 박스를 빼내오는 숨막히는 순간에도, 인쇄비를 마련하기 위해 밤새워 영문 번역을 하면서도, 나는 기쁨을 느꼈다. 87년 6월의 거리, 남녀노소 각계각층이 한덩어리가 되어 외치는 독재타도의 구호를 들으며, 최루탄과 방망이로 무장한 전경의 벽을 육탄으로 부수고 그 독재의 흉기를 불사르는 매캐한 연기를 맡으면서, 나는 인간이 사회를 변혁한다는 진리를 확인했다.
사회와 역사의 주인은 인간이라는 것, 다수의 대중이 하나의 의지로 뭉쳤을 때 사회는 결정적으로 변화한다는 것, 이것은 교과서 속의 박제된 명제가 아니라 펄떡펄떡 살아 숨쉬는 진리였다.

대학물을 맛본 지 이제 10년. 내가 이루어놓은 일은 별로 없고, 이같은 인간과 사회의 변화에 내가 기여한 것도 아주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내가 아주 작은 한 부분이나마 기여한 것을 나는 기뻐한다. 내가 만일 판사가 되어 법조문을 암송하거나 무고한 민주인사와 학생, 노동자들을 감옥으로 보내는 하수인 역할을 했다면 6월의 그 엄청난 대중투쟁을 보면서 기쁨이 아니라 공포를 느꼈을 것이며, 자기의 삶과 세상에 대해 무기력한 냉소나 흘리며 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스무 살 적에 내린 그 소박한 선택으로 10년을 살아왔다. 그리고 그 선택에 기초를 둔 실천 가운데 인간과 역사에 대한 희망과 신뢰를 배웠다. 그래서 내가 열 아홉일 때 했던 것과 같은 인생관, 고민을 가진 후배들에게 말하고 싶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유시민씨의 <항소이유서>

내가 이 나이때 뭐 했던가?
지금 내가 (그래도) 이나마 민주적인 환경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멋있는 386세대들이 있었던 것 아닌가?




------------------------------------------------------------------------

                                      柳時敏의 <항소이유서>  

  
  

본   적 : 경상북도 월성군 내남면 망성동 163  

주   소 :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흥 1동 한양아파트 11동 1107호  

성   명 : 류  시  민  

생년월일 : 1959년 7월 28일  

죄   명 :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요     지  

  

  본 피고인은 1985년 4월 1일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에서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 받고 이에 불복 다음과 같이 항소이유서를 제출합니다.  

  

  

다     음  

  

  본 피고인은 우선 이 항소의 목적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1심 선고형량의 과중함을 호소하는데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합니다. 이 항소는 다만 도덕적으로 보다 향상된 사회를 갈망하는 진보적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려는 노력의 소산입니다. 또한 본 피고인은 1심 판결에 어떠한 논란거리가 내포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며 알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본 피고인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하느님이 주신 양심이라는 척도이지 인간이 만든 법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법률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본 피고인으로서는 정의로운 법률이 공정하게 운용되는 사회에서라면 양심의 명령이 법률과 상호적대적인 모순관계에 서게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으리라는 소박한 믿음 위에 자신의 삶을 쌓아올릴 수밖에 없었으며 앞으로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 인간집단과 인간집단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행위는 본질적으로 그 사회의 현재의 정치적·사회적·도덕적 수준의 반영인 동시에 미래의 그것을 결정하는 규정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따라서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이하 폭행법이라 함) 위반 혐의로 형사소추되어 1심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본 피고인으로서는 자신이 관련된 사건이 우리 사회의 어떠한 정치적·사회적·도덕적 상태의 반영이며 또 미래의 그것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규명함과 동시에 사건과 관련된 각 개인 및 집단의 윤리적 책임을 명백히 밝힐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 사회가 젊은 대학생들이 동 시대의 다른 젊은이들을 폭행하였다는 불행한 이 사건으로부터 “개똥이와 쇠똥이가 말똥이를 감금 폭행하였다. 그래서 처벌을 받았다”는 식의 흔하디 흔한 교훈밖에 배우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사건 자체보다 더 큰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 항소이유서는, 부도덕한 개인과 집단에게는 도덕적 경고를, 법을 위반한 사람에게는 법적 제재를, 그리고 거짓 성령 속에 묻혀 있는 국민에게는 진실의 세례를 줄 것을 재판부에 요구하는 청원서라 하겠습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본 피고인은 법률에 대해 논한다는 것이 아니므로 이 글 속에서 ‘책임’ ‘의무’ ‘과실’ 등등의 어휘는 특별한 수식어가 없이 사용된 경우, 그 앞에 ‘윤리적’ 또는 ‘도덕적’이라는 수식어가 생략된 것으로 간주하여 무방합니다. 그리고 본 피고인이 특히 힘주어 말하고 싶은 단어나 문장에는 윗점을 사용하였습니다.  

  

  본 피고인은 우선 이 사건을 정의(定義)하고 나서 그것을 설명한 다음 사건과 관련하여 학생들과 현정권(본 피고인이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원칙에 비추어 제 5 공화국이 합법성과 정통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표시하기 위해 정부대신에 정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각자가 취한 행위를 분석함으로써 이 글의 목적을 달성코자 합니다.  



  이 사건은 학생들에 의해서는 ‘서울대 학원 프락치사건’으로, 정권과 매스컴에 의해서는 ‘서울대 외부인 폭행사건’으로 또는 간단히 ‘서울대 린치사건’이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건명칭의 차이는 양자가 사건을 보는 시각을 전혀 달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건의 본질 자체가 달라질 리는 만무한 일입니다. 본 피고인이 가능한 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 사건을 정의하자면 이는 정권과 학원간의 상호적대적 긴장이 고조된 관악캠퍼스 내에서, 수사기관의 정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은 네명의 가짜학생을 다수의 서울대 학생들이 연행·조사하는 과정에서, 혹은 약간의 혹은 심각한 정도의 폭행을 가한 사건입니다.  

  

  ‘정권과 학원간의 상호적대적 긴장상태’를 해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4월 민주혁명을 짓밟고 이땅에 최초의 군사독재정권을 수립한 5·16 군사쿠데타 이후 4반세기에 걸쳐 이어온 학생운동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혈사(血史)와 아울러 가열되어온 독재정권의 학원 탄압사를 살펴 보아야 할 터이지만, 이 글이 항소이유서임을 고려하여, 1964~65년의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소위 6·3사태), 1974년의 민청학련 투쟁, 1979년 부산마산지역 반독재 민중투쟁 등을 위시한 무수한 투쟁이 있어 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데 그치기로 하고 현정권의 핵심부분이 견고히 형성되어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1979년 12월 12일의 군사쿠데타 이후 상황만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경제적 모순·사회적 갈등·정치적 비리·문화적 타락은 모두가 지난 날의 유신독재 아래에서 배태·발전하여 현정권 하에서 더욱 고도성장을 이룩한 것들입니다. 현정권은 유신독재의 마수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와 민주회복을 낙관하고 있던 온국민의 희망을 군화발로 짓밟고, 5·17 폭거에 항의하는 광주시민을 국민이 낸 세금과 방위성금으로 무장한 ‘국민의 군대’를 사용하여 무차별 학살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피묻은 권력입니다. 현정권은 정식출범조차 하기 전에 도덕적으로는 이미 파산한 권력입니다. 현정권이 말하는 ‘새시대’란, 노골적·야수적인 유신독재헌법에 온갖 화려한 색깔의 분칠을 함으로써 그리고 총칼의 위협아래 국민에게 강요함으로써 겨우 형식적 합법성이나마 취할 수 있었던 새로운 ‘유신시대’이며, 그들이 말하는 ‘정의(正義)’란 소수군부세력의 강권통치를 의미하며, 그들이 옹호하는 ‘복지’란 독점재벌을 비롯한 있는 자의 쾌락을 뜻하는 말입니다.  



  ‘경제성장’ 즉 자본주의 발전을 위하여 ‘비효율적인’ 각종 민주제도(삼권분립, 정당, 노동조합, 자유언론, 자유로운 집회결사) 등을 폐기시키려 하는 사상적 경향을 우리는 파시즘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파시스트 국가의 말로가 온 인류를 재난에 빠뜨린 대규모 전쟁도발과 패배로 인한 붕괴였거나, 가장 다행스러운 경우에조차도 그 국민에게 심대한 정치적·경제적 파산을 강요한 채 권력내부의 투쟁으로 자멸하는 길뿐임을 금세기의 현대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나찌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군국주의 일본은 전자의 대표적인 실례이며,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 합법정부를 전복시키고 등장했던 칠레·아르헨티나 등의 군사정권, 하루저녁에 무너져버린 유신체제 및 지금에야 현저한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권 따위는 후자의 전형임에 분명합니다.  



  국가는 그것이 국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만이 구성원 모두에게 서로 방해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복과 자아실현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기 때문에 존귀합니다. 지난 수년간,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요구하며 투쟁한 노동운동가, 하느님의 나라를 이땅에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 양심적 종교인, 진실과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감수한 언론인과 교수들, 그리고 민주제도의 회복을 갈망해온 민주정치인들의 선봉에 섰던 젊은 대학인들은, 부도덕하고 폭력적이며 비민주적일 뿐만 아니라 반민중적이기 때문에, 국민이 자유롭게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 조건 아래서라면 단 한주일도 유지될 수 없는 현 군사독재정권이 그토록 존귀한 우리 조국의 대리인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해 왔습니다. 우리 국민은 보다 민주적인 정부를 가질 자격과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정권은 12·12 군사쿠데타 이후 4년동안 무려 1,300여명의 학생을 각종 죄목으로 구속하였고 1,400여명을 제적시키는 한편 최소한 500명 이상을 강제징집하여 경찰서 유치장에서 바로 병영으로 끌고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정 구석구석에 감시초소를 세우고 사복형사를 상주시키는 동시에 그것도 모자라 교직원까지 시위진압대로 동원하는 미증유의 학원탄압을 자행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한번도 이러한 사실을 시인한 적이 없으며, 1982년 기관원임을 자칭한 괴한에게 어린 여학생이 그것도 교정에서 강제추행을 당하는 기막힌 사건이 일어났을 때조차, 최고위 치안 당국자는 국회 대정부 질의에 대하여 “교내에 경찰을 상주시킨 일이 없다. 유언비어의 진원지를 밝혀내 발본색원하겠다”고 태연하게 답변하였을 정도입니다. 현재 학원가를 풍미하고 있는 전경 특히 경찰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은 이와 같은 정권의 학원탄압 및 권력층의 상습적인 거짓말이 초래한 유해한 결과들 중의 한가지에 불과합니다.  

  

  이솝우화의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은 양떼를 잃어버리는 작은 사건을 낳는데 그쳤지만 주 유왕(周 幽王)이 미녀 포사(褒似)를 즐겁게 하기 위해 거짓봉화를 울린 일은 중국대륙 전체를 이후 500여년에 걸친 대 전란의 와중에 휩쓸리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양치기 소년의 외침을 외면한 마을사람들이나 오랑캐에게 유린당하기까지 주(周)왕실을 내버려 둔 제후들을 어리석다 말하지 않습니다. 정권의 주장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않으려는 학생들의 불신은 과연 누구의 책임이겠습니까?  



  더욱이 야만적이고 부도덕한 학원탄압은 전국 각 대학에서 목숨을 건 저항을 유발하였고 그 결과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학생들이 생명을 잃거나 중상을 당했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만도 고 김태훈·황정하·한희철 등 셋이나 되는 젊은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83년 12월의 소위 자율화조치 이후에도 주전선(主戰線)이 교문으로 이동하였다는 단 한가지를 제외하면 거의 변함없이 계속되어 왔으며, 특히 지난해 9월 총학생회 부활을 전후하여 더욱 강화되었던 수사기관의 학원사찰, 교문앞 검문검색, 미행과 강제연행 등으로 인해 양자간의 적대감 또한 전례없이 고조된 바 있습니다. 즉 소위 자율화조치 이후에도 ‘학원과 정권 사이의 적대적 긴장상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바로 이와 같은 조건 하에서 수명의 가짜학생이 수사기관의 정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을만한 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예기치 못한 사건입니다. 이들의 의심을 받게된 경위 및 사건경과는 이미 밝혀진 바이므로 재론할 필요가 없지만 여기에서 가짜학생에 대해서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이 실제로 정보원인지 그 여부는 극히 중요한 정치적 관심사임에 분명하지만 사건의 법률적·윤리적 측면과는 거리가 있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이 연행·감금·조사 또는 폭행한 것은 결코 정보원이나 단순한 가짜학생이 아닌 ‘정보원 혐의를 받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폭력 자체가 정당할 수는 없으며 또 아니라고 해서 학생들의 일체의 행위가 모두 부당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이 이 문제에 대해 재론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정보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위의 이유에 의해서 입니다.  



  갖가지 목적으로 학생처럼 위장하고 캠퍼스를 배회하는 수많은 가짜 학생들, 이들은 소위 대형화·종합화된 오늘날의 대학에서, 졸업정원제·상대평가제 등 대학을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마비되어 제 한 몸 잘사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전문기능인의 집단양성소로 전락시키기 위해 독재정권이 고안해 낸 각종 제도가 야기한 바 대학인의 원자화·고립화 등 비인간화 현상을 틈타 캠퍼스에 기생하는 반사회적 인간집단으로서, 교내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절도·사기·추행·학원사찰의 보조활동(손형구의 경우처럼) 등과 복합적인 관련을 맺고 있음으로 해서 대학인 상호간에 광범위한 불신감을 조성하고 대학의 건강한 공동체문화를 파괴하는 암적 존재입니다. 현정권은 이들이 대학인의 일체감을 파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내에 사복경찰을 상주시킴으로써 야기된 숱한 문제들마저 이들에게 책임전가시킬 수 있다는(여학생 초생사건 때처럼) 이점 때문에 가짜학생의 범람현상을 방관 또는 조장하여 온 것입니다. 따라서 학생들이 이들에 대해 평소 품고 있는 혐오감이 어떠한가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일입니다.  



  이들이, 이들 가짜들이, 혹은 복학생들의 소규모 집회석상에서 혹은 도서실에서, 법과대학 사무실에서, 강의실에서, 버젓이 학생행세를 하면서 학생활동에 대한 정보 수집활동을 하다가 탄로났을 경우, 법이 무서워서 이를 묵과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올바른 일이겠습니까? 상호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바로 그들을 보냈으리라 추정되는 수사기관에, 정보원 혐의를 받고 있는 가짜학생의 신분조사를 의뢰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대학의 교정은 개방된 장소이므로 은밀한 사찰행위뿐만 아니라 예전처럼 수백 수천의 정·사복 경찰이 교정을 온통 휘젓고 다닌다 할지라도 이는 전혀 비합법 행위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본 피고인은 이러한 행위가 도덕적으로 바람직하다고 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반면 이러한 부도덕한 학원 탄압행위에 대한 학생들의 여하한 실질적 저항행위도, 비록 그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한 일이지만, 현행법률에 대한 명백한 침해가 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정의로운 사회에서라면 존재할 수 없는 법과 양심의 상호적대적인 모순관계가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그 누구도 이 상황에서 법과 양심 모두를 지키기란 불가능합니다. 이 사건이야말로 우리 사회 전체가, 물론 대학사회도 포함하여, 당면한 정치적·사회적 모순의 집중적 표현이라는 학생들의 주장은 바로 이와 같은 논거에 입각한 것입니다. 법은 자기를 강제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하고 있지만 양심은 그렇지 못합니다. 법은 일시적 상대적인 것이지만 양심은 절대적이고 영원합니다.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양심은 하느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 피고인은 양심을 따랐습니다. 그것은 법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양심의 명령을 따르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이 사건에서만이 아니라 그 이전의 어느 사건에서도 그랬습니다.  

  

  지난해 9월, 10일간에 걸친 일련의 사건은 이렇게 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자체로서 그리 복잡하지 않은 이 사건은 서울대생들의 민한당사 농성사건, 주요 학생회 간부들의 제적·구속, ‘학생운동의 폭력화’에 대한 정권과 매스컴의 대공세, 서울대 시험거부 투쟁과 대규모 경찰투입 등 심각한 충격파를 몰고 왔으며 공소 사실을 거의 전면부인하는 피고들에게 유죄를 선고함으로써 일단락된 바 있습니다.  



  사건종료 다음날인 9월 28일 전학도호국단 총학생장 백태웅과 뒤늦게 프락치사건 대책위원장 겸 사회대학생장 오재영군 등이 지도한 민한당사 농성은 자연발생적·비조직적으로 일어난 이 사건을 부도덕한 학원사찰 및 정권의 비민주성을 비판하는 조직적 투쟁으로 고양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비로 가짜 학생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의 법률적·윤리적 과실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학원사찰의 존재라는 별개의 정치적 문제를 덮어둘 수는 없는 일이므로 이 투쟁은 그 자체로서 완전히 정당한 행위였다고 본 피고인은 생각합니다.  



  이 일이 있은 다음 날인 9월 29일 저녁 학교당국은 이정우·백기영·백태웅·오재영 등 4명의 총학생회 주요간부를 전격적으로 제명 처분하였으며 본 피고인은 9월 30일 하오 경찰에 영장없이 강제연행 당한 후 며칠간의 조사를 받고 구속되었습니다. 본 피고인이 가장 먼저 연행당한 것은 미리 도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도피하지 않은 것은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고,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은 도망칠만큼 잘못한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은 경찰·검찰에서의 조사 및 법정진술시 기억력의 한계로 인한 사소한 착오 이외에 여하한 수정·번복도 한 바 없었으며 오직 사실 그대로를 말했을 따름입니다.  



  어쨌든 서울시경국장은 10월 4일 소위 ‘서울대 외부인 폭행사건’의 수사결과를 도하 각 신문·TV·라디오를 통해 발표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4명의 외부인을 감금·폭행한 이 일련의 사건이 복학생협의회 대표였던 본 피고인 및 학생대표들의 합의 아래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10월 4일 이전에 경찰에 연행된 몇몇 학생들 중(본 피고인을 포함) 어느 누구도 이 발표를 뒷받침해줄 만한 진술을 한 바 없으며, 이후에 작성된 구속영장·공소장 및 관련학생들의 신문조서들이 모두 이 발표의 기본선에 맞추어 만들어진 것임은, 만일 이 모든 서류를 날짜별로 검토해 본다면, 누구의 눈에나 명백한 일입니다.  



  한마디로 10월 4일의 경찰발표문의 본질은 모종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견강부회·침소봉대·날조왜곡 바로 그것입니다. 그 목적이란 다름이 아니라 학생운동을 폭력지향적인 파괴활동으로 중상모략함으로써 이 사건의 정치적 성격은 물론 현정권 자체의 폭력성과 부도덕성을 은폐하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이 비조직적·우발적으로가 아니라, 학생단체의 대표들에 의해 조직적이고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몇몇 관련 학생뿐만이 아니라 학생운동 전체를 비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총학생회장, 학도호국단 총학생장, 프락치사건 대책위원장, 복학생협의회 대표 등은,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인간이며 어떤 행위를 실제로 했는가에 관계없이 선전을 위한 가장 손쉬운 희생물이 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수법은 지난 수십년간 대를 이어온 독재정권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상투적으로 구사해온 낡은 수법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현정권은 막 출범한 서울대 학생회의 주요 간부의 활동을 실질적으로 봉쇄하는 동시에, 60만 대군을 동원해도 때려 부술 수 없는 학생운동의 도덕성을 훼손시키는 데에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마치 자신이 더 도덕적인 존재가 된 듯한 자기만족조차 조금은 맛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검찰 역시 사실을 밝혀내는 일보다는 경찰의 발표를 뒷받침하기에만 급급하여 대동소이한 내용의 공소를 제기하고 그것에만 집착하여 왔습니다. 사건 발생후 일개월도 더 지난 작년 11월, 관악경찰서 수사과 형사들이 김도형·손택만군 등 무고한 학생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함으로써 공소사실과 일치하는 허위자백을, 형사들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짜내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입니다. 즉 경찰은 본 피고인들이 ‘폭행법’을 위반하였다는 증거를 바로 그 ‘폭행법’을 위반하여 관련된 학생들을 고문함으로써 짜낸 것입니다. 그 짜내어진 허위자백이 증거로 채택된다는 사실을 못 본 체 하더라도 ‘법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중대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전혀 정당한 윤리적 기초를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양심인으로서는 복종의 의무를 느낄 필요가 없었던 지난날의 긴급조치나 현행 ‘집시법’과 달리 이 ‘폭행법’은 지켜져야 하며 또 지켜질 수 있는 법률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각인은 현정권에 대한 정치적 견해에 따라 이 법 앞에서 불평등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본 피고인은, 과분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학생들을 상습적으로 폭행·고문하는 각 대학 앞 경찰서의 정보과 형사들이 그 때문에 ‘폭생법’ 위반으로 형사소추당했다는 비슷한 이야기조차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19일, ‘민주화운동 청년연합’이 주최한 광주항쟁 희생자 추모집회에 참석하였다가 귀가하는 길에, 그녀 자신 제적학생이면서 역시 고려대학교 제적학생인 서원기씨의 부인 이경은씨가 동대문 경찰서 형사대의 발길질에 6개월이나 된 태아를 사산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부부는 이 법의 보호 밖에 놓여 있음이 누구의 눈에나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고소장을 접수하고서도, 검찰은 수사조차 개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 역시 여러 차례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조사받는 과정에서 폭행당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지만 이 법의 보호를 요청할 엄두조차 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에게도 협박 또는 폭행을 가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본 피고인은 폭력법으로 유죄를 선고받고 말았습니다. 본 피고인이 굳이 지난 일을 이렇듯이 들추어냄은 오직, 흔히 이야기되고 있는 바 검찰의 정치적 편향성의 존재를 환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이 사건을 담당한 경찰관 역시 앞에서 밝힌 바 현정권의 정치적 음모와 무관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결론적으로 검찰이 주장하는 바 공소사실의 대부분은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경찰이 날조한 사건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으로서, 한편에 있어서는 정권과 매스컴이 공모하여 널리 유포시킨 일반적인 편견이 기초 위에 서 있으며,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경찰이 고문수사를 통해 짜낸 관련 학생들의 허위자백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공허한 내용으로 가득찬 것입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이 이 사건에서 드러난 학생들의 과실과 본 피고인 자신의 법률적·윤리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이렇듯 정권의 부도덕을 소리 높이 성토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가짜학생에 대한 연행·조사가 윤리적으로 정당하다손치더라도, 이들에게 가한 폭행까지를 정당화할 의향은 없습니다. 조사를 위한 감금은 가능한 한 짧아야 하며 폭행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현상적으로 폭력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본질상 다 폭력의 영역에 속할 수는 없지만, 무력한 개인에게 다중이 가한 폭행은 비록 그것이 경찰에 대한 이유있는 적대감의 발로인 동시에 그들이 상습적으로 학생들에게 가해온 고문을 흉내낸 것이라 할지라도 학생운동의 비폭력주의에서 명백히 이탈한 행위라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또 폭행을 가한 당사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책임을 감당하지 않은 것 또한, 비록 그것을 어렵게 만든 당시의 특수한 정치적 사정이 개재됐다손치더라도, 학생들이 가진 윤리적 결함의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자신 폭행과 절대로 무관하며사건 전체와도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여 틀림이 없을 총학생회장 이정우군이 스스로 모든 책임을 떠맡아 항소조차 포기했다고 하는 아름다운 행위가, 그 누구도 선뜻 폭행의 책임을 감당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윤리의 공백상태를 어느 정도는 메꾸어 주었다고 본 피고인은 확신합니다.  



  본 피고인은 역시 언행이나 조사를 지시한 사실이 없지만(지시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만일 그럴 필요가 있었다면 언제라도 기꺼이 직접 그들을 연행·조사하였을 것입니다(그것이 위법임은 물론 잘 알지만). 본 피고인은 복학생 협의회의 사실상의 대표로서 개인적으로 비폭력의 원칙을 준수해야 할 소극적 의무에 부가하여 학생운동의 전체수준에서도 이 원칙이 관철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적극적 의무 또한 완수해야 할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의 9월 26일 밤 전기동·정용범 양인이 구타당하는 광경을 잠시 목격하고서도 그것을 제지하려 하지 않았던 본 피고인에게는 다른 학생들보다 더 큰 윤리적 책임이 있음에 분명합니다(법률적 측면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또한 임신현·손형구의 경우에도 본 피고인이 사건에 접했을 때는 이미 감금 및 조사가 진행 중이었으므로 어떠한 지시를 내릴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 자신 조사를 위한 감금에 명백히 찬동했으며 또 잠시나마 직접 조사에 임한 적도 있기 때문에 법률을 어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에 따른 책임이라면 흔쾌히 감수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경우, 가능한 한 짧은 감금과 비폭력이라는 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실제로 이 원칙이 관철되었으므로 본 피고인은 아무런 윤리적 책임도 느끼지 않습니다.  



  어쨌든 상당한 정도의 법률적·윤리적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떠맡기 위해 이정우군처럼 처신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그 또한 나쁘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너무나도 명백한 정권의 음모의 노리개가 될 가능성 때문에 본 피고인은 사실과 다른 것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결코 시인하지 않으리라 결심하였고 또 그런 자세로 법정투쟁에 임해 왔습니다. 그래야만 본 피고인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책임감이, 공소사실을 기정사실화시키기 위해 우격다짐으로 요구하는 그것과는 성질상 판이한 것임을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본 피고인은 이 사건의 재판이 갖는 정치적 의미가 무엇이며 이 사건을 우리 사회의 도덕적 진보의 계기로 삼으려면 사법부가 본연의 윤리적 의무를 완수해야 함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사건은 누적된 정권과 학원간의 불신 및 적대감을 배경으로 하여 수명의 가짜학생이 행한 전혀 비합법적이라 할 수 없지만 명백히 부도덕한 정보수집행위가 본질적으로 부도덕하지 않으나 명백히 비합법적인 학생들의 대응행위를 유발함으로써 빚어진 사건입니다. 지난 수년간 현정권이 보여준 갖가지 부도덕한 행위들 - 학원내에 경찰을 수백명씩이나 상주시키면서도 온국민에게 거짓증언을 한 치안당국자의 행위, 소위 자율화조치라고 하는 아름다운 간판 위에서 음성적인 확원사찰을 계속 해온(이에 관해서는 법정에서 상세히 밝힌 바 있음) 수사기관의 행위,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 사건조차 서슴지 않고 날조·왜곡한 행위 등 - 은 같은 뿌리에서 돋아난 서로 다른 가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재판은 사건의 진정한 원인을 규명하여 그에 대한 처방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행위중 비합법적인 부분만을 문제삼아 처벌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마도 사법부 자체는 이처럼 부도덕한 정권의 학원난입 행위를 옹호하려는 의도가 없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사태의 전후맥락을 모조리 무시한 채 조사를 위한 연행·감금마저(폭행부분이 아니라)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규정한 1심의 판결은 지금 이 시간에도 갖가지 반사회적 목적으로 위해 교정을 배회하고 있을 수많은 가짜학생 및 정보원의 신변안전을 보장한 ‘가짜학생 및 정보원의 안전보장 선언’이 아니라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 피고인은 결코 학생들의 행위 전부에 대한 무죄선고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부도덕한 자에 대한 도덕적 경고와 아울러 법을 어긴 자에 대한 법적 제재가 가해져야 하며, 허위선전에 파묻힌 국민에게는 진실의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것, 사태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지 않고서는 우리 모두의 도덕적 향상은 기대될 수 없는 것을 주장할 따름입니다. 법정이 신성한 것은 그것이 법정이기 때문이 결코 아니며, 그곳에서만은 허위의 아름다운 가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때로는 추악해 보일지라도 진실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늘날의 사법부가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正義)를 세우며, 또 그 정의가 강자(强者)의 지배를 의미하지 않는다면, 1심의 재판과정에서 매장당한 진실이 다시금 생명을 부여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본 피고인은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마도 이 사건으로 인하여 그렇지 않아도 쉽게 허물어버리기 어려울 만큼 높아져 있는 현재의 불신과 적대감의 장벽 위에 분노의 가시넝쿨이 또 더하여지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고, 언젠가는 더욱 격렬한 형태로 폭발할 유사한 사태를 반드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난 5년간 현정권에 반대했다 하여 온갖 죄목으로 투옥되었던 1,500여명의 양심수 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신성한 법정’에서 정의로운 재판관들에 의해 유죄선고를 받았습니다. 야수적인 유신독재 치하에서도 역시 그만큼 많은 분들이 전대미문의 악법 ‘긴급조치’를 지키지 않았다 하여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긴급조치 위반사건의 보도 또한 긴급조치 위반이었으므로 아무도 그 일을 말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변론을 하던 변호사도 그 변론 때문에 구속당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긴급조치가 정의로운 법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리고 그때 투옥되신 분들이 ‘반사회적 불순분자’ 또는 ‘이적행위자’였다고 말하는 이도 거의 없지만, 그분들을 ‘죄수’로 만든 법정은 지금도 여전히 ‘신성하다’고 하며 그분들을 기소하고 그분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검찰과 법관들 역시 ‘정의구현’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정의를 외면해 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법정이 민주주의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왔다”는 뜻일 것입니다. 누군가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정의를 세워왔다”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가 진정 진지한 인간이라면, 그는 틀림없이 “정의란 독재자의 의지이다”고 굳게 믿는 인간일 것입니다.  



  본 피고인은 그곳에 민주주의가 살해당하면서 흘린 피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서만은 진실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신성한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싶습니다. 본 피고인은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재판관이 ‘자신의 지위가 흔들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정의에 관심을 갖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는’ 현명한 재판관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을 밝히는 일이야말로 정의가 설 토대를 건설하는 일이라 믿습니다.  





  이상의 논의에 기초하여 본 피고인은 1심판결에 승복할 수 없는 이유를 간단히 언급하고자 합니다. 본 피고인은 판결문을 받아보았을 때 참으로 서글픈 심정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려 7회에 걸쳐 진행된 심리과정에서 밝혀진 사건의 내용과 거의 무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 피고인이 그토록 진지하게 임했던 재판의 전과정이 단지 예정된 판결을 그럴듯하게 장식해주기 위해 치루어진 무가치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선, 「판결이유」의 ‘범죄사실’ 제 1 항 중 “······임신현이····· 구타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피고인 유시민은 성명불상 학생들에게 위 임신현의 신분을 확인·조사토록 하고···”라는 부분은 형식논리상으로조차 성립할 수 없었습니다. 본 피고인에게 지시를 받은 학생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면, 어떻게 그가 성명불상일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본 피고인이 한번도 이를 시인한 바 없으며, 백수택군 등 여러학생들의 진술은 물론이요, 임신현 자신의 법정진술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할지라도, 본 피고인이 임신현이 연행 구타되던 현장에 있었음을 증명하기란 불가능한 일인데 하물며 본 피고인이 성명불상의 누군가에게 어떠한 지시를 내렸다는 일이 어찌 증명 가능하겠습니까? 사실 본 피고인은 그때 그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다음, ‘범죄사실’ 제 2 항 중 “·····위 김도인은 피고인 백태웅과 피고인 유시민 앞에서····· 구타하여 동인(손형구를 말함)에게 전치 3주간의·····다발성 좌상을 가한·····” 부분 역시, “백태웅과 유시민에게 조사받는 동안 한번도 폭행당한 일이 없다”고 한 손형구 자신의 법정진술에조차 모순됩니다.  



  그리고 ‘범죄사실’ 제 3 항 중 “피고인 유시민은·····동일(9월 26일을 말함) 21:00경부터 익일 01:00까지 피고인 윤호중, 같은 오재영 및 백기영, 남승우, 오승중, 안승윤 등과 같이·····(정용범을)·····계속 조사하기로 결의하고·····” 및 ‘범죄사실’ 제 4 항 중 이와 유사한 대목 역시, 본 피고인이 당시 진행중이던 총학생회장 선거관리 및 학생회칙의 문제점에 관해 선거관리 위원들과 장시간에 걸쳐 논의한 사실을 왜곡해 놓은 것에 불과하며, 이는 오승중, 김도형 등의 진술에 의해서도 명백히 밝혀진 일입니다.  



  이 몇 가지 예는 특히 현저하게 사실과 다른 부분을 지적한 것에 불과하며 판결문 전체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의 유사한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습니다. 이는 사건 전체가 본 피고인 및 학생대표들의 지휘 아래 의도적으로 진행된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정권의 의도를 반영하는 현상으로서, 기실 판결문의 내용 중 대부분이 침소봉대·견강부회·날조왜곡된 지난해 10월 4일 경찰발표문을 원전(原典)으로 삼아 구속영장·공소장을 거쳐 토씨하나 바꾸어지지 않은 그대로 옮겨진 것에 대한 증거입니다.  



  1심판결은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사건과 관련된 각 개인 및 집단의 윤리적 법적 책임을 명확히 함으로써 우리 사회 전체의 도덕적 향상에 기여해야 할 사법부의 사회적 의무를 송두리째 방기한 것이라 판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본 피고인이 이처럼 1심판결의 부당성을 구태여 지적한 것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당한 이유에 의한 유죄선고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현재 마치 '폭력 과격 학생'의 본보기처럼 되어 버린 본 피고인은 이 항소이유서의 맺음말을 대신하여 자신을 위한 몇 마디의 변명을 해볼까 합니다. 본 피고인은 다른 사람보다 더 격정적이거나 또는 잘난 체하기 좋아하는 인간이 결코 아니며, 하물며 빨간 물이 들어 있거나 폭력을 숭배하는 젊은이는 더욱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은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청년에 지나지 않으며 늘 "불의를 보고 지나치지 말라",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생각하라", "거짓말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신, 지금은 그분들의 성함조차 기억할 수 없는 국민학교 시절 선생님들의 말씀을 불변의 진리로 생각하는, 오히려 조금은 우직한 편에 속하는 젊은이입니다. 본 피고인은 이 변명을 통하여 가장 순수한 사랑을 실천해 나가는,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 곧 민주주의의 재생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투쟁 전체를 옹호하고자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1978년 2월 하순, 고향집 골목 어귀에 서서 자랑스럽게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눈길을 등뒤로 느끼면서 큼직한 짐보따리를 들고 서울 유학길을 떠나왔을 때, 본 피고인은 법관을 지망하는 (그 길이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키우시느라 좋은 옷, 맛난 음식을 평생토록 외면해 오신 부모님께 보답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또 그 일이 나쁜 일이 아님을 확신했으므로) 아직 어린티를 벗지 못한 열아홉 살의 촌뜨기 소년이었을 뿐입니다. 모든 이들로부터 따뜻한 축복의 말만을 들을 수 있었던 그때에, 서울대학교 사회계열 신입생이던 본 피고인은 '유신 체제'라는 말에 피와 감옥의 냄새가 섞여 있는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유신만이 살길이다"고 하신 사회 선생님의 말씀이 거짓말일 수도 없었으니까요, 오늘은 언제나 달콤하기만 했으며,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 설레던 미래는 오로지 장밋빛 희망 속에 감싸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달래는 벌써 시들었지만 아직 아카시아 꽃은 피기 전인 5월 어느 날, 눈부시게 밝은 햇살 아래 푸르러만 가던 교정에서, 처음 맛보는 매운 최루 가스와 걷잡을 수 없이 솟아나오던 눈물 너머로 머리채를 붙잡힌 채 끌려가던 여리디 여린 여학생의 모습을, 학생 회관의 후미진 구석에 숨어서 겁에 질린 가슴을 움켜쥔 채 보았던 것입니다. 그날 이후 모든 사물이 조금씩 다른 의미로 다가들기 시작했습니다. 기숙사 입구 전망대 아래에 교내 상주하던 전투 경찰들이 날마다 야구를 하는 바람에 그 자리만 하얗게 벗겨져 있던 잔디밭의 흉한 모습은 생각날 적마다 저릿해지는 가슴속 묵은 상처로 자리잡았습니다. 열여섯 꽃 같은 처녀가 매주일 60시간 이상을 일해서 버는 한달치 월급보다 더 많은 우리들의 하숙비가 부끄러워졌습니다. 맥주를 마시다가도, 예쁜 여학생과 고고 미팅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이런 현상들이 다 ‘문제 학생’이 될 조짐이었나 봅니다. 그리고 그 겨울, 사랑하는 선배들이 ‘신성한 법정'에서 죄수가 되어 나오는 것을 보고 나서는 자신이 법복 입고 높다란 자리에 않아 있는 모습을 꽤나 심각한 고민 끝에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음해 여름 본 피고인은 경제학과 대표로 선출됨으로써 드디어 문제 학생임을 학교 당국 및 수사 기관으로부터 공인받았고 시위가 있을 때면 앞장서서 돌멩이를 던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점증하는 민중의 반독재 투쟁에 겁먹은 유신정권이 내분으로 붕괴해 버린 10·26정변 이후에는, 악몽 같았던 2년간의 유신 치하 대학 생활을 청산하고자 총학생회 부활 운동에 참여하여 1980년 3월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그 봄의 투쟁이 좌절된 5월 17일, 본 피고인은 갑작스러이 구속 학생이 되었고, ‘교수와 신부를 때려준 일’을 자랑삼는 대통령 경호실 소속 헌병들과, 후일 부산에서 ‘김근조 씨 고문 살해'사건을 일으킨 장본인들인 치안 본부 특수 수사관들로부터 두 달 동안의 모진 시달림을 받은 다음, 김대중 씨가 각 대학 학생회장에게 자금을 나누어 받았다는 허위 진술을 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구속 석 달 만에 영문도 모른 채 군법 회의 공소 기각 결정으로 석방되었지만, 며칠 후에 신체 검사를 받자마자 불과 40시간 만에 변칙 입대당함으로써 이번에는 ‘강집 학생'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입영 전야에 낯선 고장의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이면서 본 피고인은 살아 있다는 것이 더 이상 축복이 아니요 치욕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날 이후 제대하던 날까지 32개월 하루동안 본 피고인은 ‘특변자(특수 학적 변동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며 늘 감시의 대상으로서 최전방 말단 소총 중대의 소총수를 제외한 일체의 보직으로부터 차단당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하 20도의 혹한과 비정하게 산허리를 갈라지른 철책과 밤하늘의 별만을 벗삼는 생활이 채 익숙해지기도 전인 그해 저물녘, 당시 이등병이던 본 피고인은 대학시절 벗들이 관계한 유인물 사건에 연루되어 1개월 동안 서울 보안사 분실과 지역 보안 부대를 전전하고 대학 생활 전반에 대한 상세한 재조사를 받은 끝에 자신의 사상이 좌경되었다는, 마음에도 없는 반성문을 쓴 다음에야 부대로 복귀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다른 연대로 전출되었습니다. 하지만 본 피고인은 민족 분단의 비극의 현장인 중동부 전선의 최전방에서, 그것도 최말단 소총 중대라는 우리 군대의 기간 부대에서 3년을 보낼 수 있었음을 크나큰 행운으로 여기며 남에게 뒤지지 않는 훌륭한 병사였음을 자부합니다.  



  그런데 제대 불과 두 달 앞둔 1983년 3월 또 하나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세상을 놀라게 한 ‘녹화 사업' 또는 ‘관제 프락치 공작'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일신의 안전을 위해서는 벗을 팔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하는 가장 비인간적인 형태의 억압이 수백 특변자들에게 가해진 것입니다. 당시 현역 군인이던 본 피고인은 보안 부대의 공포감을 이겨 내지 못하여 형식적으로나마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 타협책으로써 일신의 안전을 도모할 수는 있었지만 그로 인한 양심의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군사 독재정권의 폭력 탄압에 대한 공포감에 짓눌려 지내던 본 피고인에게 삶과 투쟁을 향한 새로운 의지를 되살려준 것은 본 피고인과 마찬가지로 강제 징집당한 학우들 중 6명이 녹화 사업과 관련하여 잇달아 의문의 죽음을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동지를 팔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 순결한 양심의 선포 앞에서 본 피고인도 언제까지나 자신의 비겁을 부끄러워하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순결한 넋에 대한 모욕인 탓입니다. 그래서 1983년 12월의 제적 학생 복교 조치를 계기로 본 피고인은 벗들과 함께 ‘제적 학생 복교추진 위원회'를 결성하여 이 야수적인 강제 징집 및 녹화 사업의 폐지를 위해 그리고 진정한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며 복교하지 않은 채 투쟁하였습니다. 이때에도 정권은 녹화 사업의 존재, 아니, 강제 징집의 존재마저 부인하면서 우리에게 ’복교를 도외시한 채 정부의 은전을 정치적 선동의 재료로 이용하는 극소수 좌경 과격 제적 학생들'이라는 참으로 희귀한 용어를 사용해 가면서, 어용 언론을 동원한 대규모 선전 공세를 펼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9월 여러가지 사정으로 복학하게 되었을 때 본 피고인은 ‘민주화를 위한 투쟁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형태로든 계속되어야 한다'는 소신에 따라 ‘복학생 협의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과 복학한 지 보름 만에 이 사건으로 다시금 제적 학생 겸 구속 학생이 되었슬 뿐만 아니라 본 피고인의 이름은 ‘폭력 학생'의 대명사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본 피고인은 이렇게 하여 5.17폭거 이후 두 번씩이나 제적당한 최초의 그리고 이른바 자율화 조치 이후 최초로 구속 기소되어, 그것도 ‘폭행법'의 위반으로 유죄 선고를 받은 ‘폭력 과격 학생'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은 지금도 자신의 손이 결코 폭력에 사용된 적이 없으며 자신이 변함없이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늙으신 어머니께서 아들의 고난을 슬퍼하며 을씨년스러운 법정 한 귀퉁이에서, 기다란 구치소의 담장 아래서 눈물짓고 계신다는 단 하나 가슴 아픈 일을 제외하면 몸은 0.7평의 독방에 갇혀 있지만 본 피고인의 마음은 늘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빛나는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설레던 열아홉 살의 소년이 7년이 지난 지금 용서받을 수 없는 폭력배처럼 비난받게 된 것은 결코 온순한 소년이 포악한 청년으로 성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가 ‘가장 온순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 내는' 부정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이 지난 7년간 거쳐온 삶의 여정은 결코 특수한 예외가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학생들이 공유하는 보편적 경험입니다. 본 피고인은 이 시대의 모든 양심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에 비추어, 정통성도 효율성도 갖지 못한 군사 독재 정권에 저항하여 민주 제도의 회복을 요구하는 학생 운동이야말로 가위눌린 민중의 혼을 흔들어 깨우는 새벽 종소리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오늘은 군사 독재에 맞서 용감하게 투쟁한 위대한 광주 민중 항재의 횃불이 마지막으로 타올랐던 날이며, 벗이요 동지인 고 김태훈 열사가 아크로폴리스의 잿빛 계단을 순결한 피로 적신 채 꽃잎처럼 떨어져 간 바로 그날이며, 번뇌에 허덕이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이 성스러운 날에 인간 해방을 위한 투쟁에 몸바치고 가신 숱한 넋들을 기리면서 작으나마 정성들여 적은 이 글이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것을 기원해 봅니다.  



  모순투성이이기 때문에 더욱더 내 나라를 사랑하는 본 피고인은 불의가 횡행하는 시대라면 언제 어디서나 타당한 격언인 네크라소프의 시구로 이 보잘것 없는 독백을 마치고자 합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1985년 5월 27일  

성명 류 시 민  

서울 형사 지방 법원 항소 제5부 재판장님 귀하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