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빨갱이..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에게 남아있는 레드 컴플렉스는 꺼지지 않았다. 빨갱이란 단어는 냉전을 벗어난 전후후세대인 우리에게도 여전히 하나의 리트머스로 남아있다.
단순히 냉전적 사고를 떠나서도 이 '빨갱이'란 단어는 여지없이 적용된다.
'빨갱이'란 하나의 바로미터가 아니다. 빨갱이는 파쇼다..


아직도 여전한 리트머스
데리다를 놓고 말했지만, '그렇다/아니다'의 입장강요는 상당히 파쇼적이다. 바로 전에 있었던 친노/반노의 논쟁이 그렇다.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이 친노라고???
내가 인공언어로 증명해줄께 -(탄핵 옹호자) = 친노 , -친노 =  반노 = 탄행 찬성자, 그러므로 '노무현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탄핵을 찬성한다' ............ 맞냐???
난 노무현을 지지하지 않았는데 열라 탄핵 반대 했는데???

이번엔 자연언어로 증명해줄께..
자민련 유운영 아저씨의 논리다. ('SBS 대토론 이것이 여론이다' 참조) '반미를 외치니까 사회주의다.' 반미를 외치는 유럽권은 사회주의인가??

리트머스는 아주 유용한 화학 기제일 수 있지만 빨강/파랑 밖에 표현하지 못 한다. 화학에선 산성과 알카리성을 대분류할 수 있지만 사회는 오로지 두 가지 색깔만 있는것이 아니다. 어떤 문제는 (전여옥 대변인이 발하는 것 처럼) '네/아니요' 로 답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가령 이런 질문 "대한민국을 진심으로 사랑하시나요? 네/아뇨로 답해주셈~"

이런 흑백의 리트머스를 들이데는 논리는 냉전적 사고방식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이 논리는 첨예한 기득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하게 단정할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빨갱이의 정체가 뭘까?

마녀사냥, 혹은 메카시즘

가끔 기독교인과 어떤 논쟁을 벌일때 접하는 경우다. "왜 욥의 시험과 상관없는 욥의 자녀는 아버지(욥)의 시험 때문에 죽어야 하나요?" 또는 "한국 기독교가 일제시대때 친일한거 아시나요??" 난 이거 무지 궁금하거든... 근데 이들은 곧바로 공격한다... 사실 공격도 못 하고 화를 낸다... 대부분 이런 논조다. 기독교를 시험하지 말라고... 아니 왜? 난 궁금했는데? 왜 나의 시험이 당신의 시험이 되는가? 그걸 떠나서 대답해달란 말이에요...!!

빨갱이를 말하는 사람은 대부분 빨갱이와 '파랭이??'를 구분할 줄 모른다. 더구나 그 구분이란 것 마저도 작위적이다. 내가 기독교의 예를 든 이유가 있다. 자신의 믿음, 신념이 바로 그 빨갱이의 기준이다. 지극히 작위적이다. 혹은 자기 해석적이다.

사실 '빨갱이'의 목적은 피아식별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응징..., 영화 [넘버 쓰리]에서 송강호의 논조와 똑 같다.
"니....니들..내말..자..자..잘들어...내..내가 하늘색깔이...빨간색..하면 그때부턴 무조건 빨간색이야....이..이..이건 노..노..노리끼리한 색이지만...내가..빨간색!! 하면 이것두 빨간색이야...응?..이 십새끼야...응?..내가 현정화라그러면..무조건. 현정화야...내말에....토.토.토.토토토토다는 새끼는 전부 배반형이야 배반형... 배신!!배반형...무슨말인지 알겟어?...앞으론 직사시켜버리겟어..직사!!.....

빨간색은 그들이 무조건 빨갱이라면 빨갱인거다... 그래서 '직사' 시키는 거다..

중세 때 마녀사냥이 그랬다. 어떤 질서가 흐트러지면 그 질서를 바로잡기위한 희생양 '마녀'가 필요했다. 그때 신부들이 진짜 그 마녀가 악마를 부르고, 부정한 동물의 피로 제사를 드려서 죽였던가? (대부분의 '마녀'는 종교의식과 아무 상관이 없는 과부들이었다.)
그냥 신부가 빨갱이라니까 빨갱이인거다. 그들은 빨간색, 파란색에 대한 분류 근거, 확인을 대지 못 한다.

미국의 메카시즘이 아주 대표적인 역사적 예이다...

그러니까.. 빨갱이는 단지 니네들이 빨갱이라면 빨갱이인거다....!!

왜 빨갱이인가???

아까 주제와 관련있지만 빨갱이의 목적은 자신의 철학적, 체제적, 논리적, 정치적... 이런 위기를 당했을 때 도망가기 가장 좋은 장치가 '빨갱이'이다.

즉, '빨갱이' 운운하는 사람은 자신의 논리가 허술하던가, 자신이 위기에 있을 때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혹은 모 정당 처럼 '흠집내기' 위한 방법...

이 '빨갱이' 수법은 너무나 쉽게 잘 먹혀들어간다. 내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빨갱이로 몰고 물고문하고, 발톱뽑고 .. 하면 될 뿐이다. 그러면 알아서 빨갱이가 된다.


빨갱이 취급 많이 당한 자로서 바람..

제발 좀 이성과 논리 갖고 싸우자. 아니면 싸움의 법칙을 확실히 하자. (머리끄댕질 할지 논쟁을 할지..) 그리고 몰릴 때 어줍잖게 빨갱이 운운하지 말자...

난 빨갱이도 아니고 적그리스도도 아닌데.. 자꾸 '사상검증' 시키니까 짜증나자나.. 그럼.. 니네들도 사상검증해봐.. 이 빨갱이들아..!!


ps> 또 들린다. 나보고......... '역시 쟤 빨갱이었어..' 하는 소리가.............ㅋ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펌] "쿠바 사회주의는 러시아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다”

출처 : 진보누리 http://news.jinbonuri.com/sub_read.html?uid=1148§ion=section1&nil_profile=g&nil_News=15

 

"쿠바 사회주의는 러시아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다”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 : 거대한 논쟁이 다시 시작된다
조회수 3145

(편집자 주) 1989년 구소련과 동구권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우후죽순 무너질 무렵 미국의 일본계 학자인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을 이야기했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에 승리함으로써 역사가 일단락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사회주의는 역사의 사생아, 혹은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가장 먼 길’로 전락했고, 사회주의자들은 줄줄이 과거의 이념을 버리고 자유주의나 심지어 파시즘으로 전향해버렸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제임스 페트라스는 자본주의-사회주의 논쟁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그는 ‘신생 자본주의 국가'인 러시아와 동유럽의 현재와 과거를 비교하고 또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과 사회주의를 견지해온 쿠바를 비교한다. 그리고 시민들의 삶의 질 측면에서 ‘신생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 그나마 옛 사회주의와 쿠바가 훨씬 우월하다고 판단한다.

저자 : 제임스 페트라스 미국 빙햄턴 대학 사회학과
출처 : Rebelion 2004년 6월호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이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념 전쟁’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유엔, 국제노동기구, 식량농업기구(FAO), 세계보건기구 등과 엔지오, 유네스코, 각종 전문가들의 보고서를 보면 이 논쟁은 오히려 지금 다시 시작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내려면 우선 ‘자본주의 도입’ 이후 러시아, 동유럽의 모습을 그 이전과 비교해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옛 사회주의 국가들의 현재와 지금도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를 비교해보면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옛 사회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로 이행하기 시작한지 15년이 흘렀다. 평가엔 충분한 시간이다.

옛 사회주의 국가들 : 산업은 절망, 실업률은 급등, 조직범죄 극성

옛 사회주의 국가들이 공산주의 체제였을 당시, 경제 자원들은 국가 소유이거나 공공 소유였다. 또한 이를 운용하는 결정도 국가적이거나 공공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국가들이 자본주의로 이행한 15년 동안 일어난 일은 이런 경제 자원들, 즉 모든 기초산업, 에너지, 광업, 사회하부구조, 유통 등이 미국과 유럽 혹은 억만장자 마피아들에게 넘어가는 것이었다. 혹은 문을 닫았다. 이는 대량실업과 불안정 고용의 증가, 경기침체, 이민, 돈 세탁과 국민경제에서 자본이 탈출하는 현상으로 이어졌다.

폴란드에서는 연대노조의 기반이었던 그다노스크 조선소가 폐업하고 박물관이 되었다. 이 나라의 노동인구 중 20%는 공식적으로 실업상태이다.(『파이낸셜 타임스』 2004년 2월21일) 나머지 30%는 성매매, 밀수, 노천시장, 행상, 각종 지하경제 등 주변부의 저임금 부문에서 일하고 있다. 불가리아, 루마니아, 라트비아, 동독도 비슷하거나 더 나쁜 상황이다. 이러한 옛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지난 15년 동안의 1인당 평균 실질소득 증가는 그 이전의 15년(공산주의 치하) 보다 훨씬 낮았다. 이와 함께 소득격차는 엄청나게 심각해져서 최상위 소득계층 1%가 사적 자산의 80%와 소득의 50%를 지배하게 되었다. 빈곤층은 50%를 상회하고 있다. 옛 소련, 특히 아르메니아, 조지아, 우즈베키스탄 등의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생활 표준이 80%나 떨어졌다. 인구의 25%가 이민을 가거나 극빈 상태에 놓였으며, 산업과 공공자금, 에너지는 강탈당했다. 과학, 보건, 교육 시스템은 거의 붕괴되었다.

옛 소련에서는 하이테크의 중심지였던 아르메니아의 경우 지난 1990년엔 2만 명에 달했던 과학기술 연구자의 수가 1995년엔 5천명으로 폭락했으며 지금도 줄어드는 추세이다.(『내셔널 지오그래픽』 2004년 3월호) 아르메니아는 결국 대다수 인민들이 중앙난방장치와 전기 없이 사는 국가로, 국가의 경제적 자원들을 마피아들에게 강탈당한 국가로 전락했다.

러시아의 경제적 쇠퇴는 더욱 심각하다. 1990년대 중반 현재, 러시아 인구 중 50% 이상이 빈곤층이며 이러한 현상은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옛 레닌그라드) 외부에서 더욱 심각하다. 노숙자는 증가 추세이고 국가적 차원의 보건․교육 시스템은 붕괴했다. 비(非)전시 상황에서 한 나라의 경제가 이토록 빠르고 철저하게 무너진 경우는 현대사에서 ‘러시아 자본주의’밖에 없다. 러시아 경제는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민영화되면서 마피아들에게 접수되었다. 러시아 마피아를 이끄는 것은 8개의 억만장자 과두체제이다. 이들은 뉴욕, 텔아비브, 런던, 스위스 등의 은행으로 2천억 달러 이상을 반출한 바 있다. 이로 인해 러시아의 전 경제 부문에서 살인과 테러는 ‘경쟁력’이 되었고, 과학은 말살되었다. 공산주의 체제하에서는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이었던 러시아 과학자들이 현재는 저소득과 설비부족 때문에 굶주리고 있다.

러시아 자본주의 : 한 나라 경제가 이토록 빠르고 철저히 망가진 적은 없다

‘러시아 자본주의화’의 수혜자는 옛 소련의 관료, 마피아 보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은행, 유럽의 땅 투기꾼, 미국의 제국주의자, 군부, 초국적 기업들이다. 이렇게 약탈과 대량실업, 빈곤, 절망이 만연하면서 자살과 알콜, 약물 중독이 폭증하고 있다. 소련 체제하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던 질병도 나타나고 있다. 옛 소련이 붕괴되던 당시 남성의 예상 수명은 65세였으나 2003년엔 58세로 줄어들었다.(『월스트리트 저널』 2004년 2월4일자) 이는 방글라데시 보다 낮은 수준이다. 또 쿠바 남성의 예상 수명인 74세 보다 16년이나 적다. 인구학 전문가들은 러시아 인구가 다음 10년 동안 30%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월스트리트 저널』 2004년 2월4일자)

그러나 최악의 상황은 아직 오지 않았다. 옛 사회주의 국가들이 도입한 자본주의는 대중적인 보건 시스템을 전체적으로 붕괴시켜 과거엔 통제 가능했던 전염병을 다시 대대적으로 부활시켰다. ‘유엔 합동 프로그램’ 보고서에 따르면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에서는 에이즈 전염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2004년 현재 1백50만 명이 에이즈 보균자인데 1995년엔 3만 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상황을 초래하는 데 큰 몫을 한 집단이 바로 러시아, 동유럽, 발칸, 발틱 국가의 범죄조직들이다. 이들은 헤로인 무역을 주도하면서 매년 20만 명의 성노예를 세계 각국으로 팔아 넘기고 있다. ‘해방’된 코소보를 근거지로 설치고 있는 알바니아 마피아들은 헤로인 무역의 요충지를 통제하면서 성노예들을 서유럽과 북미에 ‘수출’하고 있다. ‘해방’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미국과 동맹을 맺었던 군부가 헤로인을 생산, 옛 유고슬라비아를 거쳐 서유럽으로 반입시키고 있다. ‘해방’된 러시아의 마피아 과두체제는 주로 마약 및 불법무기 거래, 성매매 여성 양산, 미국-유럽-캐나다를 경유한 돈세탁 등에 종사하고 있다. 마피아 억만장자들은 정치인과 정당들(‘동방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선거에서 선출된)을 사실상 사고 팔면서, 미국, 유럽 등의 정보기관과 공식/비공식적인 동맹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자본주의’의 경제, 사회적 상황들은 본질적으로 이전의 사회주의체제 당시 실존하던 완전 고용, 안정적 성장, 복지 보다 못하다. 개인적인 삶에서 봐도 고용, 노후생활, 저축, 생활의 공적, 사적 안전성 측면에서 옛 사회주의 체제는 ‘범죄집단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보다 훨씬 안전한 시스템이었다. 정치적으로도 옛 공산주의 국가들은 노동자들의 사회적 수요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했고, 소득 불평등을 억제했으며, 대외정책에서도 자국의 이해를 지킬줄 알았다. 또한 경제의 주요 부문을 산업화했고 소유했다. 그러나 새로 도입된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정치가들은 자국의 모든 주요 산업을 해외나 특정인에게 팔아 넘겼고 기괴할 정도로 심한 사회적 불평등을 지지하고 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보건과 고용은 무시된다.

쿠바 사회주의는 건재하다

옛 사회주의 국가들의 ‘자본주의 15년’과 ‘이전의 15년’을 비교해보면, 오히려 사회주의 당시에 시민들은 질적으로 훨씬 우월한 삶을 누렸다. 이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제 ‘신생 자본주의 사회’인 러시아, 동유럽, 중앙아시아를 쿠바 사회주의와 비교해보자.
 
쿠바 사회주의는 소련과 동유럽의 자본주의화로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산업 생산과 무역은 60% 하락했으며, 쿠바인의 1인당 칼로리 섭취량도 절반으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바의 유아사망률은 1989년의 1천명 당 11명에서 2003년엔 6명으로 하락했다. 한편 러시아가 국민소득의 3.8%를 공공 보건에, 1.5%를 사보험에 쓰는데 비해, 쿠바는 16.7%를 사용한다. 남성의 예상 수명도 자본주의 국가인 러시아에서는 58년이지만, 사회주의 쿠바에서는 74년이다.

자본주의 국가 폴란드에서는 실업률이 21%로 뛰어 올랐다. 그러나 쿠바에서는 3%로 떨어졌다.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마약과 조직범죄자들이 날뛰고 있다. 그러나 쿠바에서는 청년실업자들을 위한 교육, 훈련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젊은이들은 기술을 배울 때마다 봉급을 받고 일자리를 제공받을 수도 있다. 쿠바에서는 과학기술(특히 생명공학과 약학)이 계속 발전해왔으며 이젠 세계적 수준에 도달한 상태이다. 이에 반해 옛 사회주의 국가들의 과학 인프라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 국가들의 과학자들은 이민을 가거나 국내에 머물러도 먹고 살 수가 없다.

쿠바는 정치, 경제적으로 자주성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은 미국에 군사적으로 예속되어, 발칸반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에 용병을 보내 미 제국주의에 봉사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현재 쿠바의 의료인 1만4천 명은 남미와 아프리카의 최빈곤 지역에서 그곳 정부와 협력해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쿠바는 하이티에도 의료인 5백 명을 파견했다.

산업 측면에서 보면 쿠바에서는 대다수 산업이 국민적이거나 공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시장 부문도 존재하며, 외국자본과 합작한 벤처회사도 영업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옛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우 거의 모든 기간 산업과 언론매체, 문화산업 등의 소유권을 해외로 넘겨 버렸다. 쿠바는 기초 식량, 주택, 보건, 교육, 스포츠 등에서 사회적 안전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실업자와 저소득자들이 재화와 서비스로의 접근에서 배제되고 있다.

사회주의 운동의 새로운 전망

이렇게 경제․사회 지표들을 비교해 보면 쿠바의 ‘개혁 사회주의’는 동유럽과 러시아, 중앙아시아의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 보다 훨씬 낫다. 윤리, 문화적 측면에서 봐도 쿠바의 경우 비록 1990년 이후 관광 부문의 성장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불거지고 있지만, 마피아가 주도하는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마약, 성매매, 미제국으로 종속 때문에 부패한)보다 우월하다.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수백만 명을 감염시킨 에이즈에 대해서도 쿠바는 세계에서 가장 예방중심적이며 인간적인 의료 시스템으로 대처하고 있다. 에이즈에 대한 무료 의료, 무료 약품, 광범위한 공공 보건 프로그램 및 교육은 쿠바의 에이즈 발병률이 개발도상국 중 가장 낮은 이유를 설명해 준다. 분명히 관광산업과 저소득으로 인한 성매매가 존재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에 관한 논쟁은 계속될 것이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와 동유럽에 도입된 자본주의가 그 이전의 체제 보다 모든 경제, 사회적 부문에서 훨씬 열악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에 관한 논쟁은 계속 될 수밖에 없다. 쿠바의 성과가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을 뛰어 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아메리카에서 시작된 사회운동들이 자치(사파티스타), 토지소유 민주화(브라질의 MST 운동), 자원에 대한 민주적 통제(볼리비아)에서 실질적인 변혁을 이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미 제국주의가 제공하는 것, 그리고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이 시민들에게 제공하는 것 보다 훨씬 우월하다.

이렇게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사회주의는 과거의 복지국가에 쿠바식 인간적 사회 프로그램과 사회 안전망, 사파티스타와 MST의 자치 실험을 결합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이 기사는 디지털 말에서 제공한 것이며 이종태기자는 월간 말 편집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기사입력시간 : 2004년 07월28일 [04:00] ⓒ 진보누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종교권력] 발기문(draft ver) (부제 : 조심해!)

마징가Z와 메칸더V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아무리 마징가Z가 '기운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사람 인조인간 로보트고 무쇠팔 무쇠다리 로케트 주먹'이라도 메칸더V는 '원자력 에너지에 힘이 솟'고 '용감히 싸운'다. ^^
원자력 에너지는 무쇠도 파괴한다. 그리고 마징가Z, 메칸더V ..... 알파벳에서 'Z'보다 'V'가 먼저다..
결론, 메칸더V가 더 싸움 잘 한다.

종교적으로 누가 옳고 그르다.. 라는 싸움.. .대부분 신앙의 대결은 믿음과 신념, 자신의 가치를 재료로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위에서 처럼 논리나 이성적 관점에서 보면 옳고 그름이 명백치 않다.
불신자의 관점에서 보면 보수기독교단과 여호와증인과 똑같다.
즉,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믿음'의 체계이기 때문에 이성의 칼로 난도질 하기에 너무 형체가 투명치 않다.
아퀴나스가 그랬던가? 종교는 이성(과학)과 신앙(믿음)이 양쪽 날개를 펴고 나는 새와 같다고...
(내가 논하고자 하는 것은 이 '이성'의 영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시론을 작정하고, 의지를 갖고 시작하려는 이유는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는 종교인(기독교인)이고 우리의 접근법, 논의, 교의를 똑같이 아끼기 때문이다.
퇴화되지 않으려면, 아니 더욱 정당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그것들에 대해 자기성찰을 해야 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는 어떤 나라를 막론하고 정의도 필요하고 질서도 필요하지만 "정의보다 우선되는 것은 질서"라고 밝히고 있다.
종교의 영역에선 질서보다 정의(진리)가 우선이다. 왜? 이것은 내세와 모든 질서의 근거가 되니까...
그리고 진리(정의)가 없는 신앙이 존재할까?
가령 내가 믿는 교의과 진리가 확실치 않은데 종교를 위해 목숨도 버릴 각오(순교) 가 가능한가?


난 우리가 믿는 신(하나님)이 기운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사람이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는 구태한 당위적 접근법에 반대한다. 그리고 근거를 알 수 없는 권위적 '율법'도 부정한다.
적어도 내가 아는 종교(기독교)란 수동적, 정적 메커니즘에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라 생명력이 적나라하게 들어나 있는, 살아 팔딱 뛰는 유기체라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역사적으로 본받을 만한 선진들이 바로 이렇게 살았으니까...
그래서 야심차게 해보고 싶은 것, 개혁, 수정, 보다 옳은 진리를 찾는 것...

우리는 시대에 뒤떨어져 과거의 메커니즘과 가치들만 붙든 채 점점 벌어지는 시대와의 간극을 아예 인정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이 타락했네.. 한탄하며 세상과 절연하고 살겠다는 비장하기까지 한 태도.. 그리고 초기 기독교 부흥기 때 있었던 개혁이니 진보니 하는 단어들과 거리가 먼 보수의 자리를 꽤차고 있는 우리의 현주소.
우리는 과거의 도그마를 인정하지 않는다. 과거의 악용/오인된 습속도 버리지 않는다.
이때 [넘버3] 보스가 하신 말 "세상은 눈깔 튀어나오게 팍팍 돌아가는데 넌 언제까지 재떨이 타령만 하고 있을꺼야....!! "


세상에 불화하지 말고, 저항하지 말고 '남들처럼' 살길 바란다던 어머니 말씀이 또 생각난다.  하지만 비장하게, 대차게 가야지.. (기질이 이런 걸..)


ps. 제목에도 썼지만 이 문서는 초안이고 언젠가 체계를 갖고 진지하게 수정하겠다..

 + 정말 쪽 팔린 일련의 사건들..
화이트 앤젤, 기독교 극우 근본주의자들의 초등학교 단군상 참수 사건, 김선일씨 죽음을 둘러싼 온누리 교회의 태도... 그리고 이명박 시장의 서울 헌납... 그 외에도 조직적이고 개인적인 기독교인들의 스스로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들...

정말 같은 기독교인인게 쪽 팔리다..
다른 사람이 종교가 뭐냐고 물어보면 러시아 정교나 루터교라고 말하고 다닐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화씨 9/11

나도 봤다.
추악한 부시의 이라크를 대상으로한 전 세계 유린/기만전을 낱낱히 폭로하고 있다.

종로나 신촌에 출몰하는 서양인들 팔짱끼고 다니는 '일부' 아가씨들(사실 난 이들을 속으로 양갈보, 양공주라고 비하한다.. 물론 '일부'다.. ^^;) 그 Mr.들하고 필히 관람 부탁 바람...!!

무고하게 미국 무기에 코가 깨지고 머리가 찢어지고...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조직적 테러를 목격하고 다시 한번 반전주의를 가슴에 담았다.
그리고 이렇게 상처받고, 친구와 가족의 죽음을 목격하고, 불구가 된 아이들은 미국인들의 차세대 주적이 될 차세대 알카에다 전사들이 된다. 이 끊을 수 없는 피비린내 나는 상속관계 !!

전쟁은 미친 짓이다..........!!
---------------------------------------------------------

출처 : 딴지일보 (http://www.ddanzi.com/new_ddanzi/movie/4074/mo4074_best_051.asp)

최근의 전 세계적인 반전, 반부시 정서가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이란 궁극의 갑빠와 결합, 마침내 초절정 정치적 올바름 영화의 화신처럼 되어버린 <화씨 9/11>이 드뎌 울나라에 상륙했다.

제목과 달리 당 영화, 9.11테러 자체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음이다. 2000년 미대선과 9.11테러, 아프가니스탄 공습과 이라크 침략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부시와 그 똘마니들이 대중을 기만하기 위해 행한 광범위한 가라와 사실 은폐가 어떻게 진실을 왜곡했는가, 고걸 알기 쉽게 갈켜주는 게 당 영화의 목적되겠다.

그리고 느무느무 당연하게도 당 영화가 최종적으로 노리는 정치적 효과는 마이클 무어 스스로도 주장하듯, 부시 쉐이를 백악관에서 끌어내리고, 혼자서 카우보이 놀이하며 자빠질 수 있게 텍사스로 돌려보내는 데 있다.

이 같은 주장을 위해 당 영화 대략 세 가지의 방식을 이용한다.

첫 번째, 다큐의 본래적 성격이라 할 수 있는 현실고발기능을 십분 발휘,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무척 궁금한 다양한 자료화면들을 통하여 빈 라덴 가문, 사우디 왕가, 탈레반 지도자들과 부시 가문간의 석유와 돈을 매개로 한 유착관계를 뽀록 낸다.

두 번째, 부시와 그 똘마니들의 무능과 가라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적재적소에서 편집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9.11 테러의 순간, 그 소식을 듣고도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부시의 모습을 시간 경과별로 자막까지 넣어가며 친절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라던가, 부시일파가 9.11의 책임을 이라크로 돌리기 위해 지속적으로 이라크와 후세인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편집한 장면 등이 대표적이다.

세 번째, 백악관과 의회를 지배하고 있는 전쟁광 쉐이들과 이들에 의한 피해자들간의 극명한 대비를 보여준다. 고도의 정밀폭격으로 민간인 피해는 없을 거라는 럼스펠드의 인터뷰 뒤에 미군의 폭격으로 아수장이 된 이라크 민간인 지역의 처참한 광경과 가족을 잃은 이라크 여인의 절규가 이어지는 장면. 500여명의 국회의원 중에서 고작 1명의 자식만이 참전한 미국의 의회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입대하는 것 외에 별 희망이 없는 미국 빈민가 모습간의 대비가 그것이다.

당 영화, 단순히 내용만 보면 졸라 진지하고 무겁고 지루할 것 같지만 걱정은 붙들어 매시라. 이거 만든 마이클 무어란 넘 다큐멘터리 재밌게 만들기로 유명한 넘이다. 우덜이 좃선 데리고 놀 듯, 이 넘 주특기가 권력 가진 꼴통들 염장 달구기다. 당 영화에도 꼴통들 뻘짓하는 화면에 조롱 섞인 나레이션을 깐다거나, 법도 안 읽고 어처구니 없는 법을 통과시킨 의원넘들에게 직접 법을 읽어주는 이벤트를 감행하는 등, 이 넘 영화의 전매특허가 고스란히 살아있음이다.

무엇보다 이라크 파병을 눈앞에 두고 있는 작금의 울나라 상황에서, 울나라 정부가 가담하려는 일이 뭔 짓인지 똑똑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당 영화, 남다른 의미가 있다 하겠다.

이런 전차로 당 영화를 온 국민 관람가 등급인 베스트에 봉하는 바이다. 이상.


베스트/워스트 선정 특별위원회
(
movie@ddanzi.com)



=====================================================

출처 : 노회찬 난중 일기에서 '영화 <화씨 9/11>을 관람하였다' ( http://www.nanjoong.net/board/view.php3?club=&mode=view&id=866&page=1&num=85&nowpos=71&type=&sermun=&qu=§ion=election&tb_name=notice )

7월 19일 (월) 맑음


공식일정이 없어 종일 의원실에 있는데도 시간이 모자란다.

찾아오는 기자들이나 손님들을 반갑게 맞지만 마음은 부담스럽다.


용산미군기지 이전비용에 대한 감사청구 기자회견을 22일 갖기로 최종결정했다.

언론들은 개정된 국회법에 따라 감사원 감사를 최초로 청구하는 데 모아져 있다.

일부 언론은 이전비용의 적실성과 한미간 부담 비율 등으로 관심을 넓히고 있다.

그러나 이 사안은 거기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그런 것은 수면 위로 드러난 빙산의 일부일 뿐이다.


법사위 활동에 대한 분석에 착수했다.

역대 활동 자료에 대한 분석을 마치면 관련단체, 전문가 면담과 현장탐방을 추진키로 했다.

이 모든 것을 8월 초까지 마쳐야 한다.


영화 <화씨 9/11>을 관람하였다.

개봉 전 시사회의 성격을 갖기는 했으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릴 줄 예상하지 못했다.

연예부 기자들은 민주노동당이 <문화>를 통해 정치를 말하는 게 신기한 듯 묻는다.


사실 문화는 배부른 사람들의 관심사라는 생각이 아직 진보진영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겠다는 진보정당에 있어서 문화와 문화적 접근은 전략적 중요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계급사회에선 <지배계급의 문화가 지배적인 문화이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이 <문화>를 자포자기하는 근거로 오용되어선 안된다.


마이클 무어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보여준 것은 <진실의 힘>이자 <예술의 힘>이다.

지하철에서 이 영화홍보전단을 나눠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민주노동당 동료들은 밀려든 관객의 열기에 고무되었다.

좌석이 모자라 통로에 앉고 일부는 서서 보는 상황이 되자 단병호의원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벽 쪽 통로에 기대서서 관람하였다.


그의 결벽증에는 인간의 체온이 담겨 있다.


서서 보느라 혼났다는 아내와 함께 모처럼 일찍 귀가하였다.

올해도 여름휴가를 갖지 않을게 뻔해보였던지

아내는 처제들과 며칠 쉴 계획을 추진 중이다.

고맙고 다행스런 일이다.


성각스님께서 글씨를 보내 주셨다.

마음은 이미 남해 망운암 중턱에 올라선 듯 하다.




=====================================================

출처 : 한겨레, 씨네 21 리뷰 ( http://www.cine21.co.kr/kisa/sec-003100100/2004/07/040720121421014.html )
Key ‘스토킹 무비’의 대가 마이클 무어의 안티-부시 프로파간다 영화.

올해 칸영화제가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에 황금종려상을 안겨준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궁지에 몰린 영화미학에 돌파구를 마련해줄 대안적인 영화형식으로서의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었기 때문에? 심사위원장이었던 타란티노의 궁색한 변명이야 어찌됐건 <화씨 9/11>의 황금종려상 수상은 누가 뭐래도 확실히 정치적인 제스처였다고밖에는 달리 판단할 길이 없다. 무어는 화씨 911도가 “자유가 불타는 온도”라고 말했다지만, 생각건대 그것은 영화가 타들어가 죽음을 맞이하는 온도이기도 한 것 같다. 그는 기꺼이 미학을 찢어발기고 논리를 포기하면서 프로파간다의 길을 선택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화씨 9/11>은 걸작의 반열에 오르기엔 한참 못 미치는 영화이지만,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부시 대통령의 온갖 행태들에 반감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 원할 법한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또 들려주는 영화다. 부시 가문과 빈 라덴 가문의 긴밀한 유착관계, 자국민의 눈과 귀를 멀게 하기 위해 공화당 정부가 취한 온갖 비열한 술수들, 명분없는 전쟁에 투입됐다 죽거나 다친 젊은이들, 졸지에 집과 가족을 잃고 분노에 차 있는 이라크 민간인들 등등 <화씨 9/11>이 다루고 있는 이러한 것들은 조금도 새로운 것은 없지만 여하간 우리가 공적인 미디어들을 통해 접할 수 있었던 것보다는 훨씬 강도 높게, 또 선동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로저와 나>(1989)에서부터 이미 분명해졌듯이 그의 장기는 브리콜라주(bricolage)와 캐리커처(caricature), 그리고 무엇보다 스토킹(stalking)에 있다. 즉 뉴스화면, 극영화, 그리고 직접 촬영한 것들을 닥치는 대로 조합하고, 특정 사안에 책임이 있다고 판단되는 인물 하나를 골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황당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퍼부어대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황색 저널리즘의 좌파적 전유라 할 만한 것이다. 또한 무어의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그 특유의 과장과 조롱, 풍자에 의해 변형되어 지극히 희극적인 모습으로 변모하게 된다. 물론 <화씨 9/11>은 (9·11 테러 자체를 직접 보여주는 대신 장시간의 암전 뒤에 뉴욕시민들의 놀란 표정을 하나씩 보여주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 무어의 전작에 비하면 약간은 조심스러워졌고 또 신중해진 게 사실이다.

<화씨 9/11>에서 무어가 제기하는 비판과 주장은 넓게 보면 대부분 수긍할 만한 것이다. 솔직히 감히 누가 그의 견해에 반박할 수 있겠는가? 어떤 점에서 무어의 논변은 전체적으로 볼 때 일종의 ‘우물에 독 타기’(poison in the well)라고도 말할 수 있다. 즉 문제는 그의 견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전개되는 방식에 있다. 무어는 <로저와 나>, <볼링 포 콜럼바인>(2002), 그리고 <화씨 9/11>에서 언제나 쟁점이 될 만한 핵심적인 문제를 곧바로 제기하는 것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수다는 종종 지엽적인 것으로 향하고 또한 지엽적인 것을 과장함으로써 원래의 논지를 흐리곤 한다. ‘무능한’ 대통령 부시가 백악관 참모들과 결탁하여 9·11 사태에 뒤이은 대중의 불만을 다스리기 위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게 된 경위를 비판하는 과정은 매우 흥미진진하기는 하지만 여기엔 위험천만한 제노포비아(xenophobia)적 사고 또한 도사리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무어는 9·11 직후 미 정부가 빈 라덴 가문의 일원들이 국외로 빠져나가는 것을 방치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해, 부시 가와 빈 라덴 가의 오랜 유착관계를 파헤치고 나서, 갑자기 사우디아라비아인들이 미국 경제의 7%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협적인 것인가- 전형적으로 마이클 무어적인 치기어린 질문, “만일 그들이 돈을 다 빼내간다면 우린 어떻게 될까요?”- 를 강조한다.

결말부에 이르기까지 <화씨 9/11>은 9·11 사태를 둘러싸고 있는 국제정치의 역학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침묵한다. 대신 순박하고 애국적인 시민들이 국가권력의 거짓에 속아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가를 고발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 점에서 <화씨 9/11>은 미국인의, 미국인에 의한, 미국인을 위한 영화일 수밖에 없다. 보수적인 백인 민주당원임을 자처하는 한 여성이 이라크로 파병된 아들을 잃고 나서 백악관을 서성이며 오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감동적이라기보다는 감상적이다. 무어 자신이 상원의원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자식들을 이라크로 보내라고 권유하는 것은 <화씨 9/11>의 논리적 허점들을 다분히 치졸한 방식으로 메워보려는 시도로밖엔 보이지 않는다. <화씨 9/11>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주장이 얄팍한 지성과 조우했을 때 초래될 수 있는 거의 모든 폐단을 안고 있는 영화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선일씨 피살사태 및 이라크 파병문제 등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현재의 상황하에서라면 이 영화가 어느 정도 유효하게 기능할 수 있으리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 ‘안티-마이클 무어’ 영화제

보수주의자들, 무어에게 이의를 제기하다

제작과정에서부터 탈도 많고 말도 많았던 <화씨 9/11>은 이제 미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과연 이 작품은 부시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겠다는 애초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이때 마이클 무어의 반대자들이 ‘안티-마이클 무어’ 영화들을 모아 영화제를 개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해 눈길을 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 이 영화제는 미국 내 거물급 보수주의자들의 후원을 받아 준비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올해 9월9일에서 11일까지 댈러스에서 열릴 예정이며 대략 24편 정도의 영화가 상영될 것이라 한다.

이 영화제를 기획한 이들은 텍사스에 거주하는 변호사 부부인데, 남편인 짐 허버드는 영화제를 구상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언제나 영화 속의 문화적, 정치적 메시지들에 흥미를 느껴왔다. 솔직히 영화 속에 나타난 그러한 메시지들은 언제나 진보주의적이었다. 근 40년 동안 좌파들이 독점해왔던 이러한 영화들에 대해 우리는 이의를 제기하려 한다.” 허버드가 현재 교섭 중인 작품 가운데는 <마이클 무어는 미국을 증오한다>(마이클 윌슨)와 <마이클과 나>(래리 엘더) 같은 영화들이 있는데, 이 두 영화의 연출자들은 모두 무어가 자신의 영화에서 그러했듯이 그와의 인터뷰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한편 마이클 무어는 이런 영화들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 영화제에서는 노골적인 ‘안티-마이클 무어’ 영화들뿐 아니라 테러와의 전쟁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들도 상영될 예정인데, 역시 영화제의 보수주의적 색채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은 작품들인 것처럼 여겨진다. 하여간 <화씨 9/11>이 불러일으킨 파장은 급기야 다큐멘터리 영화계에 대대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을 끌어들이는 예기치 않은 결과를 낳게 된 것 같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나의 자유

흔히 '리버럴'이란 입장을 보이면 정치적, 경제적 측면에서의 '자유'를 얘기하지만 나에게 있어서의 자유는 ROCKER나 히피에게서 볼 수 있는 인간적 자유다.


사실 나에게 자유란 실존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모든 개념과 대상에 대한 정의를 내가 내리겠다는 자유... 타인으로 부터 나의 사상과 관념을 나의 기호와 취사를 간섭받지 않고 독자적 울타리에서 주유하고 싶은 자유..

하지만 '신자유주의'적인 이 대한민국, 그리고 더 '신자유주의'적인 서울에서 자유주의자로 살기엔 너무도 답답하고 심신의 위협까지 느낄 정도다.

문화적, 사상적, 정치적, 경제적 일괄 시스템에서 자유주의자는 언제나 익셉션으로 처리된다.

아래 해체론을 말하면서 언급한 내용이지만, 이 일괄 시스템에서 '다름'을 주장하는 데엔 치졸한 보복이 따른다.
수능식 비효율적 걸러내기 필터를 거부함에 따른 보복, 신앙적 양심에 의해서 다른 형태의 복무의 의무를 담당하겠다는 집단을 깜빵 보내는 보복, 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갖지 않겠다는 경계인에게 징역3년 집행유예 5년을 때리는 보복, 직장에서 불합리한 상사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데 따르는 보복.... (이런 공감대로 인해 내가 요즘 이들에게 유달리 관심을 보였나 보다..)

버나드 쇼가 말한 "사상의 자유는 그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터무니없다고 할지라도 표현하고 주장할 수 있는 자유" 로자 룩센브루크가 말한 "나에게 자유란 언제나 정치적 반대자의 자유"...
이렇게 다양성과 이질성을 관용할 수 있는 사회를 원한다.


다시 자연인으로서의 '자유'로 돌아가서... ^^;
락커는 자유를 찾기 위해 저항한다. 자유는 거기에 따른 투쟁이 따른다. 그러므로 자유는 흔히 말하는 것 처럼 말랑말랑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고생해서? 얻은 자유를 통해 정치적, 사회적 목적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유로운 나'에 의미를 둔다.
그렇다면 이 자연인으로서의 자유란 무엇일까?
방해받지 않고 관여받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내면을 탐닉할 수 있는 상태를 바랄 것이다. 이것은 나름대로의 열반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리버럴'이란 단어는 일반 통념적인 수식이 아니다.

나에게 자유는 빠삐용 가슴의 나비처럼 그냥 '나 나름 자체'로의 자유다..



이 형처럼..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월간 신동아>&quot;좌파&quot;에 대한 노회찬의 생각


<월간 신동아>"좌파"에 대한 노회찬의 생각  


이 글은 월간 신동아 1999년 11월호의 특집 <한국의 좌파>난에서 서면 인터뷰로 게재된 내용입니다.


1. 선생님은 좌파 논리의 핵심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달리 말해서 현 시점, 한국의 상황에서 좌파, 또는 진보의 개념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노회찬 : 좌파 또는 진보의 개념은 관념적일 수 없으며 실천과 유리될 수 없다. 따라서 진보의 개념은 시대적 과제에 대한 태도와 그 철학적 기반에 따라 규정된다. 21세기 한국 사회의 시대적 과제는 우선 이 사회가 20세기에 받았던 고통, 그리하여 20세기에 청산하거나 성취했어야 했던 미완의 과제들을 해결하는 것이다. 즉 ▲빈곤으로부터의 해방 ▲민족적 억압과 간섭으로부터의 해방 ▲계급적, 성적, 각종 차별과 불평등으로부터의 해방 ▲모든 형태의 비인간적 폭력으로부터의 해방  ▲분단과 냉전으로 인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폐해로부터의 해방  ▲모든 봉건적이고 유교적인 비인간적 관습으로부터의 해방이 바로 그것이다. 이 5대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 곧 진보이며 이를 추구하는 세력이 바로 좌파이다.

2. 문항 1)과 관련, 선생님이 생각하는 좌파의 청사진, 다시 말해 좌파가 지향하는 우리 사회의 궁극적 모습, 가치관, 세계관은 무엇입니까?

노회찬 : 소비에트식 사회주의, 북한의 우리식 사회주의, 유럽의 사민주의는 한국 좌파의 이념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본질로부터 발생하는 제반 모순을 극복하는 것은 좌파의 기본임무이다. 우리 사회의 궁극적인 모습은 단일한 통일 민족국가이며 사회경제체제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고 더 많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민주적 사회주의체제이다. 이 체제는 모든 차별, 억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3. 선생님은 현 시점에서 한국의 좌파세력에게 최대의 적, 혹은 극복해야 할 대상은 누구(집단, 제도, 혹은 여타 세력)라고 생각하십니까?

노회찬 : 한국의 좌파세력에게 최대의 적은 좌파세력 자신이다. 한국의 좌파세력은 국제주의적 전통과 안목의 부재, 전문성의 결여, 정치적, 현실적 무능력이 좌파의 초상이다. 게다가 김대중 비판적 지지와 같은 현상이 말해주듯이 정치적으로 우파의 헤게모니를 강화시키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경향은 정치적 독립을 통한 좌파의 독자적 존재기반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실패 요인이 되었다. 좌파의 이같은 자가당착적 오류는 좌파의 구성이 주로 우파의 주도세력과 같은 엘리트층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좌파 역시 봉건적 잔재, 유교적 관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나이와 학번을 가장 중시하는 집단이 바로 `운동권`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고백해야 한다. 한국의 좌파문화 속에선 미국의 40대 대통령, 영국의 30대 당수와 40대 총리가 나올 수 없다. 능력에 의해 검증되고 , 발탁되고, 키워지는 풍토가 매우 척박하다. 삼성그룹에 다수의 30대 이사가 활동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한국의 좌파는 재벌그룹보다 더 봉건적이라 평가할 수도 있다. 이른바 386세대의 일부가 국민회의 등 기성 정치권에 편입하는 현상에는 `젊은 그들`에게 그만한 기회를 갖는 것이 좌파내부에선 힘들기 때문인 측면도 있다.
한국의 좌파는 기본적으로 소외된 대중을 대표하려는 사람으로서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고 대중을 위해 일한다는 철학과 소명의식이 부족하다. 모든 논쟁과 실천에 있어서 대중의 생각과 처지를 중시하는 전통이 매우 부실하다. 반대로 대중을 가르치고, 대중을 위해 더 낳은 기회를 포기했다는 선민의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4.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진보정당(민주노동당) 결성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과 관련, 1) 진보정당의 구성원리(인적 구성, 정강 등의 면에서) 2) 현실정치에서 진보정당이 안착할 가능성과 한계 3) 기존 제도권 정당과의 관계 설정 등등의 측면에서 선생님의 견해를 말씀해주십시오.

노회찬 : 지금 건설되고 있는 진보정당이 민주노총등 조직노동자를 주요 기반으로 하여 출발하고 전체 근로계층의 정당으로 발전하는 전략을 추구하는 것은 올바르다. 한국적 현실에서 이와 역순으로 외연을 확장하고 그 영향력으로 내부를 강화하는 전략은 이제까지의 경험이 말해주듯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 진보정당이 진보적 시민운동과 조직적 연대를 하는 이른바 적녹동맹의 추진은 독자적인 세력화를 이룬 후 중장기적으로 시도되어야 성공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과거 진보정당의 실패를 가져왔던 요인 중 독자정당건설과 비판적 지지로 분열되었던 주체형성의 문제와 조직 노동자들의 참여문제가 해결됨으로써 진보정당이 현실정치에 연착륙할 조건은 매우 향상되었다. 진보정당의 남은 장애물은 기성정치세력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선거 및 정당제도와 좌파 일반의 정치적 무능력이며 진보정당의 미래는 이를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달려 있다. 진보정당의 등장으로 2000년 이후의 한국정치는 신 3당구도로 변화될 것이며 진보정당은 국민회의와의 대립을 축으로 활동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제 1 야당의 지위를 확보할 것이다.  

5. 한국의 좌파 진영은 크게 이론가 집단과 운동가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혹자는 학문적 차원에서의 좌파 이론가와,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노력하는 운동가 사이의 괴리, 간극을 지적하기도 하는데, 이들 양자간의 관계에 지금까지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향후 바람직한 방향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논평해주십시오.

노회찬 : 경험적으로 말하자면, 사회변혁 프로그램에 관한 논쟁이 활발했던 80년대와 90년대 초반에는 `이론의 과잉`이라 부를 만큼 다양하고 풍성한 `이론`이 제시되었다. 그 깊이와 정치성은 별도로 치더라도 총체적 이론(grand theory)은 풍성한 반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에 관해서는 `전문성(혹은 전문가)의 부족`이라는 곤란을 자주 겪어왔다. 즉 사회변혁 프로그램에 관해서는 좌파가 많았지만 각론에 들어서면 좌파 이론가가 늘 부족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 차원에서는 좌파가 공세적이고 논쟁의 우위를 점했지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안 창출에서는 우파의 우위가 일반적이었다. 말하자면,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는 좌파의 것이었지만 `현실`은 늘 우파의 승리였던 것이다. 이것은 곧 이론과 실천의 괴리 즉 좌파의 실천이 현실과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는 원인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6. 우리 사회 일각에서 한동안 `제3의 길`에 대한 논의가 무성했습니다. 한국 좌파가 향후 지향해야 할 방향과 `제3의 길`과의 관계에 대해서 선생님의 견해를 말씀해주십시오.

노회찬 : 유럽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20세기에 들어서서 대부분의 시기에 걸쳐 다수당 혹은 제2당의 지위를 점하게 된 성장의 배경은, 국외 수탈 등을 통한 사회적 부의 축적과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확산을 경계한 각국 자본의 국내 타협정책에 있다. 유럽에서 사민주의가 성장하게 된 이같은 요인은 한국에서 사민주의가 뿌리내리기 힘든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일 백년이 넘는 역사를 갖는 유럽 사회민주주의는 시대의 변천을 겪으면서 지속적으로 우경화의 길을 걸어왔다. `제 3의 길`은 유럽 사회민주주의의의 우경화가 최근 도달한 지점이기도 하다. 유럽 사회민주주의가 사회변혁적 전망을 사실상 포기한 것은 오래되었지만, `제 3의 길`에 이르러서는,  현실적 이해관계에서조차 노동자와 서민의 편에 서는 것을 포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제 3의 길`은 노동자와 서민의 지지를 일부 포기하는 대신 자본과 타협을 강화함으로써 지속적인  집권을 추구하려는 사민주의 정치가들의 집권전략에 불과하다. 한국의 경우 좌파의 당면 과제가 노동자, 서민의 지지를 모아 정치적, 사회적 기반을 형성하는 것이라 할 때, `제 3의 길`과 같은 대자본 타협전략은 좌파 자신의 입지마저 잃게 할 `위험한 길`, `최악의 길`이 될 수 있다.


7. 선생님은 한국 좌파의 장래에 대해서 낙관(혹은 비관)하십니까? 낙관(혹은 비관)하신다면,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노회찬 : 한국 좌파의 장래는 밝다. 그 근거는 좌파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라는 조건 자체로부터 나온다.  무엇보다도 한국 사회는 정치, 경제의 개혁, 사회복지의 실현, 민주주의의 확대, 민족문제의 해결 등 좌파적 대안과 해결능력이 요구되는 사안들로 가득 차 있다. 한국의 좌파가 이제까지 성취한 것은 적지만 아직 기회는 많다.
21세기 한국 사회의 가장 큰 과제는 `통일`이다. 통일이란 곧 단일한 통일 민족 국가의 수립이며 단일한 사회경제체제의 건설이다. 이 새로운 건국을 해방과 일치시키는 것- 이것이 한국 좌파의 21세기 과제이다. 군인에게 전쟁이 호기이듯 새로운 사회경제체제의 건설이라는 시대적 과제는 한국의 좌파들에게 유래 없는 호기를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 좌파의 장래는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파병반대 : NO WAR !!

모르겠다.. 말들 많지만.. 무조건이다... NO WAR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러브액츄얼리 최고의 명장면!!!!

 


『Say it's carol singers』 캐롤 불러주는 사람이라고 말해요

『with any luck, by next year』 운이 따라준다면 내년엔

『I 'll be going out with one of these girls..』이 중에 한명과 사귀게 될거예요

『To me you are perfect』 나에게 당신은 완벽해

『and my wasted heart will love you』 그리고 헛된 마음인거 알지만 당신을 사랑할겁니다

『until you look like this...』 당신이 이런 모습이 될때까지...

『Merry Christmas』 메리 크리스마스


충분해...난이걸로 충분해...
러브액츄얼리 최고의 명장면중 하나. ㅋ 감동적인..!!! ☆이나엘http://blog.naver.com/jypark19퍼왔어요^^☆


--------------------------------------------------
난 이 영화 보면서 이 친구가 젤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많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혼자 남 좋아하는 거... 못 할 짓이다. 게다가 친구의 여친이라면...

"골키퍼 있다고 골 안들어가냐?"란 말도 있지만 아직까진 내가 행복하기 위해 남(그 여자의 남친)을 불행하게 하고 싶지 않다. - 근데 진짜 죽고 못 살정도로 사랑한다면 ??


그나저나 이번 크리스 마스에도 동네 후미진 선술집에서 승봉/경원이랑 소주나 마시고 보내겠지... ㅠ.ㅠ


여하튼, 이 여자 웃는 모습 무지 예쁘다..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국가 정체성 이슈의 '정체'가 궁금함..

참고 기사 : 여야 정체성 논란 숨고르기 <== 클릭

sbs, 토론회 보셨습니까? - 각골명심 / jnbkorea <== 클릭

사실 요즘 사회문제에 대해서 별로 귀를 열어놓고 살진 않지만 각 방송사의 토론 프로그램에서 '정체성 식별'류의 토론을 벌이는 걸 보면 정체성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정체성의 접근법이 좀 외곡되고 있다고 본다.
'너와 다른 나', 경쟁, 사상의 차이, 우열, 옳고 그름.. 등의 상대적, 대결적 정체성을 논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도화선으로 여러 (정체성과 무관한) 의미부여가 난무하는 듯 싶다.

"난 당신과 달리 성장을 통한 분배 주의자다. 그리고 당신의 발본색원 태도보다 질서 속에서 안정, 합의를 좋아한다....."

이와같은 스탠스의 목적이 뭘까?
피아식별, 적과 나를 구분, 지지자 식별 및 확보.. 같은 것이 아닐까? 혹은 정쟁..

왜 정체성을 논할 때 상대를 개입시켜야 하나?
정체성이란 독자적 아이덴티티 아닌가?

'난 최상훈이구요.. 하얀색을 좋아하구요.. 바다가 좋아요.. 그리고, 실존주의자로 살고 싶구요......'

이런거 아닌가????????

난 모.. 그렇다~~
정체성 이슈, 정체성 논란의 정체가 궁금하다.. 그치?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over lap

‘노무현대통령의 방주’에는 누가 탈것인가?

노무현대통령은 과거사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국가적 사업이 필요하다고 했다.
노무현표 역사세우기 작업이 ‘전면전’을
선포한 셈이다.


노무현대통령은 의문사진상위 문제에 대해
유감을 표시할 것이란 모든 방송의 예측을 깨고
의문사위는 모든 공권력의 피해를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빨치산 전력도 민주화 운동의 증거로,
간첩전력이 있는 사람이 전현직 군 장성을
조사한 것도 적절했다고 밝힌 셈이다.
방송도 놀랐을 발언이다.


노무현대통령은 이제 친일, 유신을 넘어서
모든 국가공권력은 곧 부당하고 부정하고
불의라는 등식을 성립시키려 하고 있다.
그야말로 나라의 뿌리를 흔들고
대한민국호를 침몰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은 무엇인가?
경제의 뿌리는 이미 뽑혀가고 있다.
시장경제는 크게 위협받고 있다.
정치의 체제도 지금 침몰직전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위협받고 있다.

이제 ‘노무현대통령의 방주’에는
과연 무엇이 실리며 누가 탈 것인가?
함께 타길 거부하는 국민들의 불행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노무현대통령의 ‘무서운 역사세우기’가
이제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2004.  7.  31

한  나  라  당   대 변 인   전  여  옥


갑자기 오버랩되는 일화.............



나치 선전장이었던 요제프 괴벨스의 말이다.


이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자기에게 단 하나의 문장만 주면 누구든지 감옥에 보낼 수 있다고.

예를 들어 누군가 "나는 아버지를 좋아한다.." 라고 했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오직 아버지만 사랑한단 말인가.. 조국은 사랑하지 않는단 말인가.. 지금 위기에 처한 이  조국을 구하기 위한 민족의 군대는 사랑하지 않는단 말인가... 당신은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 조국을 배신할 수 있는 자다..보내버려.. !!!!!!!!!!!! "



괴벨스와 아줌마와 다름이 뭔가?
난 아줌마의 '무서운 무대포 몰아치기'가 더 무섭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