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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수사를 위해서는 모든 사생활을 공개하라?

수사를 위해서는 모든 사생활을 공개하라?

[내 삶의 불복종 ⑨] 후불제 교통카드를 쓰지 않는 정보인권 활동가

오병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용카드와 결합된 후불제 교통카드를 이용하고 있는 듯하다. 어차피 대부분의 결재가 카드로 이루어지는 세상에서 교통요금을 카드로 결재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교통카드 초기모델인 선불제 충전식 교통카드를 지금까지 이용하고 있다.

후불제 교통카드와 선불제 충전식 교통카드는 사용할 때에는 별 차이가 없지만, 그 이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후불제 교통카드는 이후 요금 정산을 위해 모든 이용 내역, 즉 언제 어디서 버스를 타서, 어디서 지하철로 갈아탔는지 등과 같은 정보들이 기록에 남게 된다. 반면 충전식 교통카드는 카드에 충전된 액수에서 차감하면 되므로 기록을 남길 이유가 없다. 이 차이는 개인의 프라이버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몇 년 전에 아는 사람이 자신의 교통카드 이용 내역이라고 보여준 적이 있다. 그 사람은 개인적인 일로 교통카드 이용 내역을 뽑아보게 되었는데, 문서로 뽑아놓고 보니 자신의 행적이 훤히 들여다보여 소름이 끼친다고 말했다. 교통카드 이용 내역으로부터 우리는 그 사람의 생활 패턴까지 추측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매일 비슷한 시간대에 같은 노선을 이용한 기록이 있다면, 아마도 출퇴근 시 이용한 기록일 것이며, 집의 위치와 회사의 위치가 대강 드러날 것이다. 평소의 공간 반경이나 이동 패턴으로부터 벗어난 기록이 있다면, 그날 그 사람에게 특별한 어떤 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기록이 다른 정보(예를 들어 문제의 사건이 일어난 장소)와 결합된다면, 그 사람과 문제의 사건이 연관되었을 개연성이 커진다.

이렇게 남겨진 교통카드 이용 내역이 본인에게만 열람될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존재하는 모든 기록(정보)은 어떻게든 이용(남용)될 위험성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차라리 기술적인 해킹에 의한 유출은 가능성이 적다. 업체 직원에 의해서 유출될 가능성도 높고, 수사기관의 요청에 의해 넘겨질 수도 있다. 설사 수사기관이 적법한 절차에 의해서 요청을 했다고 하더라도, 아예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면 넘겨질 정보도 없었을 것이다. 개인정보 보호원칙 중 ‘수집제한의 원칙’, 즉 꼭 필요한 경우에만 최소한의 정보를 수집해야한다는 원칙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충전식 교통카드를 계속 사용하고 있는 것은 무슨 대단한 정치적 동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후불제 교통카드에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가끔씩 교통카드를 충전해야하는 것이 번거로울 수 있겠지만, 난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아마 조금 더 불편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내 교통기록을 남기는 찝찝함을 감수하지는 않을 듯하다.

물론 교통카드는 작은 부분일 뿐, 나 역시 삶의 많은 부분에서 프라이버시를 일정하게 포기하면서 살고 있다. 내 거래 내역이 축적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용카드를 이용하고 있고 신용카드로 인터넷 쇼핑을 하기도 한다. 내 위치와 통화 내역이 추적될 위험을 감수하고 휴대전화를 이용한다. 늘 이용하는 인터넷 서버 공간 어디엔가는 사이버 공간의 내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서버의 로그 기록에는 내가 언제, 어디서(어느 IP 주소로), 어떤 웹브라우저를 통해, 어떤 행위를 했는지 등이 기록된다. 인터넷 서비스 업체에서 어떻게 설계를 하느냐에 따라 채팅 기록, 온라인 구매 목록, 게시판에서 글 쓴 목록, 가족 및 친구 관계, 관심 분야 등 한 사람의 모든 영역이 투명하게 남을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내 삶의 기록들이 ‘나도 모르게’ 남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교통카드와 신용카드를 이용하고,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며 인터넷을 즐길 뿐이다. 우리가 이용하고 있는 도구 저 너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내 정보가 남는지 아닌지, 어떤 정보들이 남겨지는지, 남겨진 기록들이 어떻게 관리되는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내 정보에 대한 통제가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래서 개인정보에 대한 사회적 통제장치가 중요하다. 사회적 통제장치로는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법제와 개인정보 감독기구를 들 수 있다. 개인정보 감독기구는 정부와 기업을 포함한 개인정보 수집자에 대한 감독, 개인정보 보호정책의 수립, 개인정보 침해에 대한 구제, 개인정보 보호교육 등의 역할을 맡는 기구이다. 그러나 정보화의 진전으로 개인정보 수집은 급증하는 반면, 개인정보의 남용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의 마련은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개인정보 감독기구 설립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개인정보보호기본법안은 발의된 지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반면 정보인권을 침해할 우려가 큰 법안들은 속속들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있다. 강제적인 인터넷 실명제의 시행과 인터넷 상의 표현에 대한 정부의 검열 권한을 강화한 ‘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등에관한법률’과 최근 국회 법사위에서 논의되고 있는 ‘통신비밀보호법’이 대표적이다. 범죄자에 대한 유전자 데이터베이스 구축 법안도 국회에 상정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법 개정 방향의 공통점은 인터넷을 비롯한 새로운 기술의 이용에 있어서 국민에 대한 정부의 감시를 강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수사기관의 요구가 크게 반영되고 있다. 정보통신 기기의 이용 시 남는 이용기록을 수사에 이용하는 것을 넘어, 아예 수사편의를 위해 이용기록의 보관을 의무화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다. 예를 들어 통신비밀보호법의 경우, 이동통신이나 인터넷 사업자가 서버에 남겨진 IP 주소 등의 이용자의 이용기록을 일정기간(1년) 동안 보관할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물론 지금도 사업자들은 요금 결재 등 다양한 필요에 의해 이용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고유한 목적을 위해 필요한 기간만큼 이용기록을 남기는 것과 수사목적을 위해 이용기록을 의무적으로 남기도록 하는 것은 명백하게 다르다. 나는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오프라인 환경에서도 여러 형태의 삶의 기록이 남았다.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수도 있고, 특별한 경우 기록을 남기기도 하며, 자신도 모르게 지문이나 소지품을 남길 수도 있다. 수사기관은 남겨진 기록들을 추적하여 수사를 진행하며, 필요한 경우 영장을 받아 정보 제공을 요청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수사의 편의를 위해 삶의 행적들을 남겨놓을 것을 의무화하지는 않았다.

이번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의 논리대로라면, 기술적인 환경이 갖춰지기만 하면 수사의 편의를 위해 우리 삶의 모든 영역들을 투명하게 기록으로 남기도록 의무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집안에도 CCTV를 설치하고, 가정 내의 모든 사생활을 기록하도록 의무화할 수 있다. 가정 폭력이 일어날 수도 있고 강도가 침입할 수도 있으니, 가정도 범죄의 안전지대가 아니지 않는가? 물론 이렇게 된다면 진정 ‘범죄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

우리는 점점 투명해지고 있다. 이러다 기록만 남고 내 존재 자체는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 오병일님은 진보네트워크센터에서 활동하는 활동가입니다.
* 인권오름 제 50 호 [입력] 2007년 04월 18일 1:5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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