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트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노동, 노동자, 노동자운동

1987~2007, 한국에서 노동정책과 노동운동사

1987년~2007년 한국노동운동사

 

 

사용자 삽입 이미지

 

 

 

 

 

 

 

 

 

 

 

 

 

 

 

 

 

 

들어가며

 

현 시기 한국의 노동운동은 직접적으로는 1987년 6월 민중항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에 따른 계급역학관계 변화의 산물이다. 한국노동운동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자생적인 대중적 동력을 회복하면서 민주노조운동을 중심으로 성장해 왔다. 노동열사들의 헌신적인 투쟁과 ‘민주노조’의 대중동원력과 투쟁력에 기초하여, 민주화를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로 한정하려는 지배세력에 맞서 생존권과 민주적 권리를 중심으로 한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 투쟁해 온 역사이다.

그 결과 지난 30여 년간 한국의 노동운동은 한국 사회운동의 중심적인 한 축으로 자리잡았고,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인 구심인 내셔널센터가 건설되면서 민주노조운동이 일반화됐으며, 노동자의 요구는 임단협을 통한 노동조건의 개선과 노동3권의 보장으로부터 사회정치적 요구로까지 확장되어 왔다.

 

그러나 1987년 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성장은 한편으로는 현장의 대중투쟁동력에 기초한 것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자본주의의 고도성장에 기반한 것으로, 1990년대 후반에 외환위기를 계기로 경제위기가 전면화되면서 노동운동 역시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1990년대 초반 이후 한국자본주의가 세계 자본주의체제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자본의 축적전략의 변화를 모색해 온 지배세력은 IMF경제위기를 계기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노동유연화 공세와 개방화⋅민영화 공세를 전면화하게 되고, 이러한 자본운동 자체에 대한 대안적 전망을 가지지 못한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심각한 정체성과 대표성의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 글에서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30여 년간 노동운동의 역사를 정부와 자본의 노동정책의 변화, 노동자의 상태와 노동자 투쟁의 진행, 그리고 노동운동의 전망과 발전을 둘러 싼 주요 쟁점을 정리하고자 한다. 한국 노동운동이 30여 년에 걸친 발전의 결과로 다시 기로에 선 지금, 한국 노동운동이 어떠한 길을 걸어왔는지를 정리하는 것은 단지 과거를 되돌아본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지금 한국 노동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극복하고, 미래의 전망을 구체화해 나가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1. 19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

 

1)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역사적 배경

 

(1) 1953년 한국전쟁 종전 이후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그리고 19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 민주화투쟁의 역사에서 분수령을 이루는 19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은 6월 민중항쟁이 6.29선언으로 그 진군을 멈춘 바로 그 시점에서, 한편으로는 6월 민중항쟁의 민주화 요구를 계승하고 확대⋅심화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군부독재정권의 6.29선언의 한계와 책략을 폭로하면서 시작됐다.

 

(2) 1985년 총선에서 야당의 승리에 따른 ‘직선제 개헌’ 공세와 노동자 민중투쟁의 고양, 그리고 학생들의 민주화투쟁의 격화 등으로 위기에 직면한 전두환 군부독재체제는 1986년 11월 소위 ‘건대 사건’을 통해 정세를 역전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1987년 1월 박종철 열사 치사 사건을 계기로 전두환 정권은 정치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평화적 권력승계를 약속했던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은 태도를 바꿔 1987년 4월 3일에 직선제 개헌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호헌 조치’를 발표했고, 이러한 ‘호헌 조치’에 맞서 야당과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한 재야세력은 1987년 5월에 직선제 개헌을 당면 목표로 하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여 반정부투쟁을 본격화했다.

6월 10일 명동성당을 거점으로 시작된 6월 투쟁은 6월 23일 평화대행진에서 그 정점에 달했는데, 6월 투쟁기간 동안 전국의 34개 시, 4개 군 이상의 지역에서 시위, 집회가 열렸고 4~5백만 이상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학생운동 세력과 보수야당의 중간 시민계층에 대한 정치적 호명에 의해 전개된 반독재 민주화투쟁이었던 6월 민중항쟁은 ‘6.29.선언’을 통해 군부독재정권이 직선제를 수용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는데, 그것이 7~9월 노동자대투쟁이었다.

 

(3) 6월 민중항쟁 과정에서 ‘넥타이부대’로 상징되듯 개별 시민으로 민주화투쟁에 참여했던 노동자들은 7~9월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계급적 이해(생존권과 민주적 권리)에 기초한 투쟁을 통해 하나의 계급적 실체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7~9월 노동자대투쟁은 6월 민중항쟁을 그 직접적인 계기로 촉발됐지만, 그 배경과 투쟁의 동력은 멀리 70년대부터 준비된 것이었다.

7~9월 노동자대투쟁은 1970년대 이후 국가와 독점자본 중심의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에서 응축된 노자간 계급모순이 가장 집약적이고 순수하게 드러난 것이다. 즉 자본주의 발전 그 자체의 필연적 산물이었다. 노동자대투쟁은 이미 독점자본을 중심으로 한 자본의 전일적인 지배가 전국, 전산업에 걸쳐 완성되었고, 자본주의의 발전이 노동자계급에 대한 억압과 착취, 그리고 무권리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극명하게 폭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이 6월 민중항쟁에서 비롯된 지배세력의 정치적 위기를 뚫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멀리는 70년대의 민주노조운동, 가깝게는 1984년 이후 노조 결성투쟁, 1985년의 구로동맹파업과 대우자동차 파업투쟁 속에 이미 어느 정도 준비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19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은 70년대 이후 민주노조운동사의 단절이 아니라 계승이고, 그 일반화였다.

 

2)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전개 과정

 

1987년 7월 5일, 울산의 현대엔진 노동조합 결성에서 불붙기 시작한 파업투쟁의 불길은 울산의 현대그룹, 마산·창원의 현대, 삼성, 대우, 럭키금성 등 독점대기업 노동자들의 투쟁을 거쳐, 8월 초에는 경인지역과 성남, 구로공단 등 전국적인 노동자투쟁으로 번져나갔다.

거제에서 구로까지, “노동자의 인간적 대우”, “임금인상과 노동조건의 개선”, “민주노조 쟁취”를 요구하는 전제조업 노동자들의 투쟁은 순식간에 운수노동자, 광산노동자, 사무직 노동자, 판매·서비스직 노동자, 기술직 노동자까지 일깨우고 파업투쟁의 불길 속으로 끌어 들였다. 공단 거리를 휩쓰는 파업대오의 물결이 신문과 TV 등 메스컴을 온통 장식하면서, 파업투쟁 그 자체에 고무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투쟁이 갖는 사회적 영향력과 위력을 어렴풋이 깨달으면서 투쟁의 불길을 계속 확산시켜 나갔다. 투쟁을 지도할 정치세력도, 전국적인 조직적 구심도 없는 상태에서 파업투쟁 그 자체가 다른 파업투쟁을 촉발시켜 나갔다.

대파업투쟁의 불길은 8월 17일~18일 이틀간 현대그룹노조협의회의 연합가두시위를 정점으로, 9월 4일, 9개 파업현장(대우자동차 부평공장, 울산 현대중공업 등)에 공권력이 투입되어 소강상태에 이르기까지, 3,300여개 공장에서 전체 노동자의 1/3이 넘는 노동자를 파업투쟁의 대오로 이끌어 내었다. 그 투쟁의 조직적인 성과로 1,300여개의 신규노조가 결성되었다.

 

3)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성과와 그 의의

 

(1) 19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은 이후 민주노조운동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대중투쟁의 거대한 수원지로, 민주노조운동을 일반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에 가장 주요한 투쟁수단인 대중파업을 일반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1987년 이후 한국에서의 대중파업이 갖는 여러 특징들을 잉태하고 있었다. 즉 어느 현장, 어느 지역으로부터 시작되더라도 그 파업의 강고함이 곧바로 지역, 업종, 나아가 전국적인 연대투쟁으로 발전하여, 그 투쟁이 ‘노동자계급의 전국적 단결’, ‘민주노조의 총단결’, ‘천만노동자 총단결’의 기치 아래 전개되는 것, 임금인상이나 노동조건의 개선과 같은 경제적인 요구를 민주노조의 건설이나 노동조합의 민주화라는 자주적인 단결권 보장 요구와 밀접하게 결합해 투쟁을 전개하는 것, ‘투쟁을 통해 투쟁을 촉발’하고, 또 그 ‘투쟁의 성과로 조직을 건설’하는 것, 그리고 공장점거파업과 그에 기초한 가두투쟁으로의 발전이라는 투쟁 양식 등, 그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대중파업을 특징지우는 내용을 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은 잉태하고 있었다.

 

(2)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변화시킨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1987년 노동자투쟁은 1953년 한국전쟁의 종전 이후 35년 만에 노동운동의 자생적인 동력을 복원하여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어용 한국노총에 의해 지배되어 오던 노사관계를 변화시켰고, 자유주의적 정치세력이나 소부르조아적 재야세력, 그리고 학생운동이 주도해 오던 사회운동에서 노동운동이 주도하는 사회운동으로의 진전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3) 나아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지배세력의 지배방식과 정치지형도 변화시켰다. 더 이상 80년대식의 억압적 지배방식으로는 정권의 안정적인 재생산은 물론 자본주의 자체도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 판단한 지배세력은 지배방식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그 전략의 핵심은 “절차적 수준의 정치적 민주화와 관련해서는 개방을 어느 정도 허용하지만, 사회⋅경제적 민주화의 요구에 대해서는 기존의 반공주의적 억압전략을 지속”시키는 것이었다.

 

(4) 이로서 1987년 6월 민중항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최고조로 이르렀던 1987년의 위기는 “한 측면에서는 한국사회의 전후 지배구조에 파열구를 냈다는 측면에서는 성공한 민주화투쟁이었지만, 동시에 지배계급이 지배전략의 변화를 통해 파열 지점을 신속히 복구해 냈다는 측면에서, 결과적으로 해방 후 처음으로 세력균형에 도달한 --- 그러나 아직 안정적인 새로운 정치⋅사회질서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즉 과도기적 정치질서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소위 ‘87년 체제’가 형성”(최형익)됐다.

 

 

2. 노태우 정권의 노동정책과 노동운동

 

1) 노동정책

 

(1)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진영은 임금인상투쟁과 민주노조 건설, 노동3권의 쟁취투쟁을 결합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이에 대해 1987년 12월 대선을 통해 재집권에 성공한 노태우 정권을 중심으로 지배세력과 자본진영은 신속하게 내부를 정비하면서, 87년 위기를 통해 형성된 계급 역학관계의 변화가 고착되지 않도록, 특히 민주노조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계급의 실질적 민주주의의 진척이 지배체제를 위협하지 않도록 대대적인 공세를 전개했다.

 

(2) 노태우 정권의 대노동정책의 골간은 ‘탄압을 통한 민주노조 배제’, 매년 하반기 경제종합대책 발표로 ‘한자리수 임금가이드라인’을 제시하여 임금인상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88올림픽’과 ‘5공 청문회’를 통해 보수야당을 견인해 내고 지배세력 내의 갈등을 봉합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노태우 정권은, 투쟁을 통해 성장하는 노동운동에 대해 위기를 느끼면서 1988년 12월 28일에 ‘민생치안 확립을 위한 특별지시’라는 체제수호 선언을 하였다. 이어 1990년 1월 22일, ‘민주자유당’의 결성으로 보수대연합 체제를 구축한 지배세력은 민중운동, 노동운동진영 전체를 체제전복세력으로 규정하여, 이념적, 제도적, 물리적 탄압을 강화했다.

 

(3) 노태우 정권은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물리적 탄압, 좌경척결이라는 이념적 공세, 경제위기의 노동자 책임설 등의 공세와 탄압을 퍼부었지만, 오히려 그러한 공세와 탄압은 민주노조의 성장을 위한 자양분으로 되었다. 1987년 6월 ‘민중항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에서 비롯된, 지배세력과 노동운동·민중운동진영간의 계급적인 힘의 관계는 ‘민주노조운동의 사수냐 말살이냐’를 축으로 팽팽한 대치선을 그으면서 나아갔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전노협의 건설은 그 자체가 총자본진영에 대한 민중투쟁의 최전선에 위치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고, 따라서 총자본진영의 탄압과 공세의 초점 역시 ‘전노협’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노태우 정권은 파업사업장에 공권력 투입, 전노협 지도부에 대한 대량 구속·수배령, 100여개가 넘는 민주노조에 대한 업무조사, 임금동결, 무노동 무임금정책 등 총자본진영은 전노협을 와해시키기 위한 입체적인 공세와 탄압을 가했다.

 

(4) 다른 한편 87개의 자본가 단체는 1989년 12월에 ‘경제단체협의회’를 결성하여 총노동진영의 형성에 대응한 총자본진영을 구축해 나갔다. “대화를 통한 해결”, “건전한 노사관계의 수립”은 거추장스러운 가면에 불과했다. 경단협은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이고 계급적인 단결에 대응하여 모든 자본진영의 연대와 공동행동을 호소하였으며, 파업투쟁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무노동 무임금정책, 전체 노동자의 임금투쟁 전선을 봉쇄하기 위한 3급이상 공무원 임금동결, 그리고 자본의 현장권력을 사수하기 위한 경영권·인사권의 단체협상 제외 등의 공세를 강화해 나갔다.

 

(5) 노태우 정권의 이러한 임금억제 정책과 민주노조 배제 정책은 변칙적인 임금인상과 민주노조운동의 성장, 그 자체로 무력화되었다. 그러자 1991년부터 노태우 정권은 임금수준만이 아니라 임금구조, 임금격차, 지급 및 결정방식까지 통제하려는 ‘총액임금제’조치를 위로부터 강제했으나, 민주노조진영의 강력한 반발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2) 1987~1991년 전노협 건설 투쟁

 

(1) 1987년 11월 ‘사무전문직 노동조합협의회’와 1987년 12월 ‘마산.창원 노동조합총연합’ 결성을 시작으로, 제조업 노동자들과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은 ‘지역노조협의회’(이하 지노협), ‘업종노조협의회’(이하 업종협)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1988년 상반기에 결성된 ‘지노협’과 ‘업종협’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성과를 조직적으로 사수하기 위한 투쟁과 자각의 직접적인 산물이었다.

1988년 상반기, 임금인상을 위한 투쟁은 곧바로 노동조합의 사수를 위한 투쟁으로, “단결의 유지·강화”를 위한 투쟁은 민주노조 건설투쟁, 지역별, 업종별 단결 투쟁으로 발전해 갔다. 이러한 투쟁의 과정에서 생존권과 단결권을 가로막는 법적, 제도적 장애를 지역별, 업종별 연대만으로는 극복해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한 노동자계급은 1988년 8월에 ‘전국노동법개정 투쟁본부’를 결성하고, 1988년 11월에는 전국에서 5만여 노동자대오가 결집한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노동법 개정”, “독점재벌 해체”를 요구하기에 이르렀으며, 다시 이러한 투쟁의 성과를 모아 1988년 12월에는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전국적 대중조직인 ‘지역·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를 결성했다.

 

(2) 1989년 4월, 임수경 학생과 문익환 목사의 방북에 뒤이은 ‘공안정국’ 조성은 노태우 정권의 위기의식의 표현에 다름 아니었다. 이에 1989년 4월, 현중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울산 지역 노동자들의 열흘간에 걸친 결사항전은 노태우 정권의 공안정국을 정면으로 돌파해 내면서, 주춤하고 있던 전국 노동자들의 투쟁에 불길을 지폈다. ‘전국회의’는 ‘투쟁본부’체제로 재편되고, 전국의 각 지역, 지구별로 투본, 특위를 구성하여 공동임투를 전개해 나갔으며, 1989년 5월 1일에는 해방 후 최초로 ‘세계노동절 100주년 기념 한국노동자대회’를 대중적인 투쟁을 통해 조직해냈다. 뿐만 아니라 대우조선 노동자들은 4월의 ‘위원장 불신임투쟁’, ‘5월 임금인상·원직복직 요구투쟁’, ‘5월 29일 박진석, 이상모 열사 분신’ 등의 투쟁을 통해 ‘회사위기설’에 따른 ‘임금동결정책’에 맞서 투쟁하여 ‘적자회사 임금동결정책’을 분쇄함으로서, 전체노동자의 이익을 수호해 나갔다.

 

(3) 1989년 5월 28일, ‘전국 교직원노조’의 결성과 그 사수투쟁은 민주노조운동의 지평을 확대하고 심화시켰다. 7월 9일 ‘국민대회’, ‘명동성당 단식농성’, 9월 24일 ‘국민대회’ 등의 투쟁을 통해 비록 1,550명의 해직교사, 67명의 구속자, 10,000여명의 탈퇴각서 제출자 등의 조직 손실을 입었지만, 전교조는 14,000여 조합원과 30,000여 후원회 조직을 사수해 냈을 뿐 아니라, ‘노조 = 경제적인 지위향상’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노동조합운동이 노동, 교육, 중고생운동, 참교육을 위한 학부모운동 등 폭 넓은 영역에 걸쳐 현 사회의 뿌리깊은 부조리와 모순을 돌파해 나갈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단일산별노조 건설 실험 또한 민주노조운동의 조직적인 발전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체 민주노조운동진영에 그 지향을 제시해 주었다.

 

(4) 비록 기업별 노동조합체제라는 법적, 제도적 한계를 실질적으로 뛰어 넘을 수는 없었지만, 민주노조운동진영은 요구 내용과 투쟁의 형식에서 개별사업장에 국한하거나 지역, 업종에 얽메이지 않고 전국적으로 계급적 연대를 강화해 나갔으며, 또한 방어적이고 즉자적인 수준이긴 하지만 그 투쟁의 정치적 성격 - 노동법 개정투쟁, 공안합수부 폐지투쟁, 노태우 불신임퇴진투쟁, 노동운동탄압 분쇄투쟁 - 을 강화시켜 나갔다. 공장에서의 파업투쟁은 곧바로 농성으로 이어졌으며, 공권력 투입에 대해서는 전투적인 가두투쟁으로 대응하였다. 5월의 노동절 투쟁, 11월의 전국노동자 대회 등 전국적인 집회가 정착되고, 지역총파업 투쟁이 현실화되었다. 이러한 투쟁을 통해 15개의 지노협과 9개의 업종협이 조직되었고, 민주노조운동은 1,000여개의 전투적인 노동조합, 30만명의 조합원을 포괄해 나가면서 반어용노총전선으로서의 성격도 분명해져 갔다.

 

(5) 새로운 술은 새부대를 요구했다. 2년간의 공동투쟁을 통해 고양된 노동자의 계급적인 단결의식을 더 이상 기업별 노조의 울타리 안에 가둬둘 수는 없었다.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보편적 계급의식을 담을 새로운 조직이 요구되었다. 민주노조운동진영은 1989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를 통해 그 대의를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90년 1월 22일, 천만노동자의 이름으로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건설을 선포하였다. “우리는 오늘 전노협의 깃발을 높이 들어 이 땅에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됨을 엄숙히 선포한다.”

14개의 지노협과 2개의 업종협에, 600여개의 민주노조와 20만 조합원을 포괄하는 전국 조직으로 출범한 전노협은 자신의 깃발 위에 “평등세상 앞당기는 전노협”을 선명하게 새겨 놓았다. 이는 전노협으로 결집한 민주노조운동진영이 단지 600여개 노조, 20만 조합원의 이해만을 위해 투쟁하는 조직이 아니라, 2,500만 노동자와 가족, 그리고 나아가 4,000만 민중의 생활 향상을 추구하며, 참다운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해 나가겠다는 열망과 의지의 표현이었다.

 

(6) 그러나 전노협이 내세운 ‘노동운동의 계급적, 민주적 통일을 위한 구심’은 아직은 선언의 수준이었다. 19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해 왔던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은 연맹 건설 및 합법화투쟁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여 전노협 건설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대공장 노조는 그 특성상 단위 현장 내부의 문제에 주력하여, 전노협은 지노협을 중심으로 건설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노동운동 진영내의 노선 차이의 문제만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내부의 구성과 상태, 그리고 투쟁의 역사적 경험의 차이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러한 차이의 극복은 이후 ‘민주노총’의 출범에 이르기까지 “의식적인” 노력을 필요로 했다. 이러한 의식적인 노력의 노선적 표현이 1990년 하반기에 구체화된 “민주노조 총단결” 이었다.

 

(7) 1987년 이후 새롭게 조성된 정세는 총자본진영을 대표한 ‘경단협’과 총노동진영을 대표한 ‘전노협’의 결성으로 일차적으로 수렴되었다. ‘계급적 단결의 강화냐’ 아니면 ‘계급적 단결의 와해를 통한 자본의 전횡적인 지배의 강화냐’는 이제 노동자계급에게 있어서나 정권과 자본측에 있어서나 물러설 수 없는 절대절명의 과제로 되었다. 이는 87개의 경제단체와 600여개 노조의 20만 조합원의 대립·대결을 뛰어넘는 ‘총자본진영 대 총노동진영의 결전’의 출발을 의미했다.

 

3) 1990년, KBS의 ‘방송민주화 투쟁’과 현대중공업의 ‘골리앗 점거 농성투쟁’

 

(1) 1990년 상반기, 총자본진영의 집중적인 탄압과 이데올로기 공세로 노동운동전선은 일시적으로 침체하게 되었다. 그러나 독점자본의 부동산 투기로 인한 전세·월세값의 폭등, 물가 불안, 증시 폭락 등으로 민자당과 독점자본에 대한 노동자·민중들의 분노는 용암처럼 들끓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4월 보선에서 민자당 패배는 중산층조차 민자당으로부터 이탈이 가속화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노동운동전선의 일시적인 침체를 돌파하고, 노동자·민중들의 분노에 불을 지핀 것은 90년 4월, KBS 노동자들의 방송민주화투쟁과 뒤이은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골리앗 점거 농성투쟁이었다.

 

(2) ‘서기원 사장 임명’이 노태우정권의 방송장악 음모이며, 그 목표가 노동조합의 와해에 있음을 간파한 KBS 노동자들은 “서기원 사장 퇴진”, “방송 민주화”를 요구하며 제작거부에 돌입하였고, 4월 12일 공권력 투입 후에는 조합원 투쟁에서 전사원 및 가족의 투쟁, 나아가 MBC 노동자들의 제작거부 동맹투쟁, CBS 노동자들의 지지 철야농성으로 이어지면서, 침체되었던 노동운동전선에 활기와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었다.

 

(3) KBS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방송노동자들의 투쟁은 당시 “고소·고발, 단협 갱신”의 문제로 진통을 겪던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을 자극하고 고무시켰다. 비록 “고소·고발 취하, 단협갱신”이라는 단위사업장의 문제를 요구조건으로 내걸고 있었지만, 현중노동자들은 투쟁의 출발에서부터 공권력과의 전면적인 투쟁으로 발전할 것을 예측했고, 동시에 이 투쟁이 노동운동 전체의 운명이 걸려 있다는 점을 예견하면서 ‘골리앗 점거 농성’이라는 투쟁전술을 선택했다. 자본의 상징인 골리앗이 현중노동자들에 의해 점거되어 파업투쟁에 돌입하는 순간, ‘골리앗’은 1990년 상반기 전체 노동운동의 상징으로 되었다.

 

(4) 골리앗투쟁이 갖는 이러한 정치적 의미를 파악하여, 이에 즉각적으로 대응한 것은 ‘전노협’이었다. 전노협은 1990년 4월 29일 비상중앙위원회를 개최하여 “경찰병력 즉각 철수”, “구속노동자 석방”, “노조탄압 중단”, “노동부장관 퇴진”을 요구하는 ‘5월1일 전국총파업투쟁’을 결의했다. 5월 1일, 전국 70개 사업장, 12만 노동자 5.1노동절 파업투쟁 돌입 -> 5월 3일, 전국 76개 사업장, 10만 노동자 파업투쟁 돌입 -> 5월 4일, 전국 146개 사업장, 12만 노동자 총파업투쟁 전개.

전노협의 총파업투쟁 결의로 KBS 노동자들의 투쟁과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골리앗투쟁은 전국적인 노동자투쟁으로 확산되고, 민주노조운동진영은 그 역량과 조건에 맞게 전면파업, 부분파업, 집단조퇴, 총회투쟁, 성금모금 등을 통해 총파업투쟁에 결합해 나갔다. 민주노조진영은 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을 의식적이고 조직적으로 재현해 냈다. 독점대기업 금속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파업투쟁이 계열사의 연대투쟁으로 이어지고, 앞선 지노협을 중심으로 한 대중적 동맹파업의 결의가 전노협을 매개로 전국적 총파업을 결의해내며,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선진적인 투쟁이 나머지 사업장에서의 임금인상투쟁을 유리하게 강제해 나간 과정은 노동자 대중투쟁의 합법칙적인 발전경로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었다.

 

(5) 그러나 골리앗투쟁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인 총파업투쟁은 5월 9일 ‘반민자당 국민궐기대회’를 촉발시켜냈으나, “해체 민자당, 퇴진 노태우” 반민자당 투쟁 전선에서 전노협은 더 이상 투쟁의 중심을 세워내지 못하고, 타올랐던 대중동력을 단위사업장 차원의 임투전선으로 복귀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1990년 5월 투쟁은 사수된 전노협을 중심으로 대공장과의 결합을 강화하고, 이 힘을 근거로 비제조업 ‘업종회의’(1990년 5월 결성)와 결합하여 “민주노조 총단결” 대오를 강화하며, 나아가 천만노동자의 총단결로 전진해야 할 과제를 전체 민주노조운동진영에 제기하였다. 그 투쟁의 성과는 1990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로 수렴되었다. 업종연맹과 전노협이 공동주최한 1990년 전국노동자대회는 “노동운동탄압분쇄와 91임투 승리를 향한 민주노조총단결”을 전면에 내걸음으로써, 생산직 노동운동과 사무·전문직 노동운동이 “민주노조 총단결”이라는 방향에서 의식적으로 결합해 나갈 기반을 마련해 냈다.

 

4) 1991년 5~6월 투쟁, 박창수 열사와 강경대 열사

 

(1) 1991년 들어 독점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더욱 심화되고, 그 부담이 노동자·민중에게 물가폭등, 집값폭등 등으로 고스란히 전가됨으로써 노동자·민중들의 생존권에 대한 위기의식은 더욱 고조되었다. 또한 의원 외유비리, 수서비리, 페놀 방류 등 잇달은 부정부패와 맛물려, 노동자·민중의 분노가 91년 상반기 노동자들의 임투를 계기로 폭발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에 노태우 정권은 정치적 위기를 직감하면서, 1991년 초 페르시아만 전쟁을 기화로 전면적인 공세를 취했다. 그 탄압과 공세의 초점은 1990년 하반기 대공장 노조민주화의 성과를 모아 1990년 12월 9일에 결성된 ‘연대를 위한 대기업노조회의’에 맞춰졌다.

 

(2) 노태우 정권은 1991년 2월 10일, 의정부 다락원에서 대우조선투쟁 지지방안과 1991년 공동임투 성사를 위한 모임을 마치고 나오던 한진중공업 박창수 위원장을 비롯한 전노협, 연대회의 위원장들을 대거 연행, 구속하였다. 민주노조 지도부에 대한 사전 연행 및 구속이 1991년 상반기 임투에 대한 탄압의 시작이라고 인식한 민주노조운동진영은 노동운동탄압분쇄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갔고, 전노협과 연대회의를 중심으로 ‘공동투쟁본부’를 결성하여 상반기 공동임투를 준비해 나갔다. 4월 26일 강경대 열사의 살해로 인한 계급정세의 급격한 변화는 민주노조운동진영을 다시 한번 전국적인 정치적 총파업투쟁의 불길로 이끌어 갔다.

 

(3) 강경대 학생 살해를 계기로 형성된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 민주주의투쟁 전선’에 노동자계급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옥중 살해에 대한 분노였다. 민주노조운동진영은 5월 6일, 전노협과 업종회의 그리고 노동운동단체를 중심으로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규탄 및 노동운동 탄압분쇄를 위한 전국노동자대책위위원회’를 신속하게 결성하여, 사업장투쟁으로부터 지역투쟁으로, 전국총파업투쟁으로 나아갔다. “옥중 살인 진상규명”, “노동운동탄압분쇄”요구로부터 “노태우 정권 퇴진”을 내걸고 가두에서 현장으로, 현장에서 다시 가두로, 노동자의 독자적인 집회로부터 국민대회로, 학생들의 동맹휴학과 시민들의 참여와 맞물리면서 노태우정권을 압박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반노태우 민주주의 투쟁 전선에서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기층 근로민중들의 투쟁을 자극하여, 교사들의 시국선언, 농민들의 군단위 투쟁을 촉발해 내면서, 민주주의 투쟁 전선의 계급적인 내용을 강화시켜 나갔다.

5월 9일, 98개 노조, 48,000여 노동자 동시다발 시한부 파업투쟁, 360개 노조, 18만여 노동자 중식집회, 잔업거부, 동시퇴근 -> 5월 11일, 5만여 노동자, 옥중살인규탄 및 노정권퇴진 결의대회 -> 5월 18일, 16개 지역, 42개 노조, 16,200여 노동자 파업, 20개 노조, 45,800여 노동자, 옥중살인 규탄 및 노정권 분쇄 2차 국민대회 참여.

5월 9일부터 5월 18일로 이어지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총파업투쟁은 학생 중심의 노태우정권 퇴진투쟁의 내용을 심화시키고, 전선을 확대시켰으며, 민주주의 투쟁 전선에 계급적인 숨결을 불어 넣었다.

 

(4) 5월 18일 강경대열사의 장례식을 계기로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는 ‘공안통치 종식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로 전환되어 명동성당을 근거지로 투쟁을 계속해 나갔지만, 학생들의 급속한 전선 이탈로 명동성당 농성은 87년 6월의 명동성당 농성을 재현해내지 못한 채 고립되어 버렸다. 이후 박창수 위원장의 옥중살해 진상규명과 노동운동탄압분쇄를 요구하는 노동자투쟁만이 전선을 계속 유지해 나갔다. 그러나 그러한 전선마저도 기만적인 내각개편에 뒤이은 노태우정권의 반격과 파업사업장에 대한 대대적인 공권력 침탈 (대우정밀, 태평양화학, 세원, 인천의 동신공업, 부산의 제일교통, 대구의 파티마 병원 등)로 급속히 위축되어 갔다. 민주노조운동진영은 한진중공업을 비롯한 공권력 침탈 사업장의 상경투쟁을 통해 다시 한번 투쟁 전선의 구축을 시도했으나, 6월 16일 ‘수도권 노동자규탄대회’의 조직화에 실패하면서 6월 24일 ‘상설연합 건설을 위한 민중운동 일선 대표자회의’, 6월 29일 국민대회, 6월 30일 ‘박창수 위원장 장례투쟁’을 마지막으로 ’91년 5~6월투쟁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5) 강경대 학생 살해를 계기로 형성되었던 ‘공안정국 종식, 노태우 정권 퇴진 범국민 민주주의투쟁 전선’은 강경대, 박창수, 김귀정, 김기설 열사의 죽음의 대가로 ‘노재봉 총리의 퇴진’이라는 정치적인 성과만을 남긴 채 막을 내렸다. 노태우 정권의 도덕적, 정치적 정당성은 크게 훼손되었고, 내각제 개헌 음모을 통한 장기집권 구도는 정치적인 타격을 받아 좌절되었다. 적어도 현상적인 결과는 그러하다.

그러나 1991년 5~6월 투쟁은 그 내용에서 질적으로 심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자계급은 단위현장에서의 임금인상이나 노동조건의 개선 등의 직접적인 경제적 이해관계를 매개로 하지 않더라도, 특정한 정세하에서는 타계급·계층과 더불어 민주주의투쟁 전선의 전면에 나설 수 있을 만큼 성장하고 있고, 전노협, 업종회의, 노동운동단체가 결합한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규탄 및 노동운동 탄압분쇄를 위한 전국노동자대책위위원회’의 결성에서 보듯이, 조직적인 선진 대중을 중심으로 투쟁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이 1991년 5~6월 투쟁을 1987년 민중항쟁과 노동자대투쟁, 그리고 1990년 골리앗투쟁에 이은 전국적 총파업투쟁과 구별시켜 주는 내용이다.

1991년 5~6월 투쟁의 성과로 1991년 10월, 전노협과 업종회의, 노동운동단체가 결합한 ‘ILO기본조약 비준 및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 공동대책위원회’가 결성됐다.

 

(6) 1992년 1월 현대자동차 상여금투쟁의 패배를 계기로, 노동운동위기론을 둘러 싼 광범위한 위기논쟁이 촉발되어, 19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이념과 조직, 투쟁노선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와 전환이 주장되기도 했지만, 민주노조운동진영은 1992년 상반기에 ‘총액임금제’라는 새로운 임금억제정책에 맞서기 위해 420여개 노조가 함께 ‘총액임금제 분쇄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투쟁 전선을 전국적으로 구축해 나갔다.

그러나 1992년 상반기 투쟁과정에서 모색된 노동자계급 내부의 통일·단결 투쟁의 기조는 대선투쟁 과정에서 대통령 후보 지지운동을 중심으로 ‘비판적 지지론’과 ‘제한적 독자 후보론’, 그리고 ‘독자 후보론’ 등으로 분열하여 끝내 대선에 대한 통일된 방침을 세워내지 못했다.

 

 

3. 김영삼 정권의 노동정책과 노동운동

 

1) 노동정책

 

(1) 3당 합당과 보수적인 중산층의 지지 및 극단적인 지역 대결구도의 형성에 힘입어 출범한 김영삼 정권은 과거 ‘군부정권’과의 단절을 강조하고, 문민정부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부정부패 척결, 공직자 재산 공개 등 ‘위로부터의 개혁’에 착수했다. 그러나 중산층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으면서 진행된 ‘위로부터의 개혁’의 진정한 목표는 ‘자본축적의 효율화·합리화’에 있음이 ‘신경제정책’에 종속된 ‘신노동정책’(임금정책, 고용정책, 노사관계정책, 사회복지정책을 국제 경쟁력 강화 논리에 종속시켜 협조적⋅생산적 노사관계 제도화)을 통해 드러났다.

 

(2) 김영삼 정권은 집권 초기에 ‘신경제정책’을 제시하고, 노동을 포섭하고 통제할 목표 하에 한국노총과 경총간의 ‘노-경총 사회적 합의’를 추진했다. ‘노-경총 사회적 합의’는 한자리수 임금인상률과 사업장 내 복지기금 확대, 그리고 정부의 소비자 물가 억제 노력과 고용보험 실시 등이 그 내용이고, 1993년과 1994년 두 차례 이루어졌다. 이는 정부의 일방적 탄압과 임금통제정책의 한계를 ‘노사간 자율적 합의’라는 형식으로 돌파하며, 한국노총을 중앙단위 단체협상의 파트너로 삼음으로써 민주노조의 저변 확산 저지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노-경총 사회적 합의’는 임금인상을 전체 국민경제 수준에서 통제하는 정책으로, 즉 ‘고통분담론’이나 ‘국가경쟁력 강화론’과 같은 이데올로기를 통해 노동조합을 압박하며 임금억제정책을 고용보험제 실시 등의 사회복지정책으로 보완하려했다는 점에서, 민주노조운동 배제전략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그 이후 한국사회에서 시도된 ‘사회적 합의’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의 ‘사회적 합의’ 시도는 실패했다. 대부분 생계비를 임금에만 의존하는 한국 노동자들의 현실에서 획기적인 사회보장정책과 물가안정 없이 임금억제를 수용할 수 없었고, 오히려 노동자대중은 ‘사회적 합의’를 ‘임금억제정책’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또 19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을 중심으로 대중운동이 성장 발전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사회적합의의 주체인 한국노총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었다.

 

(3) 김영삼 정권은 초기 개혁시도가 좌절되면서, 1993년 하반기부터는 자본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하는 ‘세계화전략’을 추구하는데, 독점자본의 국제적 진출을 위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입을 추진했다.

그런데 OECD가입을 위해서는 ‘국제노동기구’(ILO)에서 요구하는 ‘노동법 개정’ 요구를 수용

해야만 했다. 동시에 국내 자본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노동통제의 강화를 통한 노동조합의 무력화와 인원감축을 필연적으로 요구했다. 이처럼 1987년 이후 국내 자본의 ‘신경영전략’과 ‘세계화 전략’에 따른 자본의 경쟁력 강화를 법적⋅제도적으로 뒷받침해 줄 필요성과 ILO의 노동법 개정 요구가 맞물리면서, 자본의 새로운 축적운동에 걸 맞는 새로운 협조적 노사관계의 틀을 구축해 나갈 필요가 있었다.

또한 김영삼 정부는 1993~1994년 ‘노-경총 사회적 합의’의 실패를 통해, 그동안 실제로 노사관계 변화를 주도해 왔고, 또 주요한 전략사업장을 포괄하고 있는 민주노총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노동정책도 실효성이 없다는 점을 확인했다. 따라서 민주노총을 인정한 조건 속에서의 새로운 노사관계 패러다임을 구체화시켜 나가야 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되었다.

 

(4) 이에 김영삼 정권은 1996년 4월24일, ‘21세기 세계 일류국가로의 도약을 위한 신노사관계 구상’을 발표했다. ‘신노사관계 구상’은 ‘참여와 협력의 새로운 노사관계’를 기치로, ‘공동선의 극대화의 원칙’, ‘참여와 협력의 원칙’, ‘노사 자율과 책임의 원칙’, ‘교육 중시와 인간존중의 원칙’, ‘제도와 의식의 세계화의 원칙’ 등 5가지의 원칙을 제시했고, 노동법만이 아니라 노사관계 제도, 관행, 의식까지도 개혁 목표로 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할 기구로서 5월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로 ‘노사관계 개혁위원회’ 설치했다.

‘참여와 협력의 새로운 노사관계’라는 기치나 ‘5가지 원칙’이라는 화려한 수사와는 달리, ‘신노사관계 구상’의 의도와 목표는 구체적이고 분명했다. 즉 정리해고 요건 완화와 월차 및 생리휴가제의 폐지, 변형근로제의 도입 등 노동유연화를 법적으로 제도화하고, 민주노총을 협조적 노사관계의 틀로 포섭해 내는 것이었다.

 

(5) 그러나 김영삼 정권의 ‘신노사관계 구상’은 ‘참여와 협력’이라는 기치와 ‘5원칙’에 걸맞지 않게 낡고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1996년 5월에 만들어진 ‘노사관계 개혁위원회’에서 노동법 개정을 둘러 싼 논란은 의례적인 겉치레 과정에 불과했다. 1996년 8월 한총련 사태를 전후하여 김영삼 정권은 5․6공 비리인사를 석방, 사면하는 것을 시점으로 경찰력 증원, 국방비 증액, 안기부법 개정 시도 등 반개혁적인 공세를 강화하더니, 9월 초 제출한 ‘향후 경제운영방안’에서는 재벌 규제완화와 고임금 구조 해소,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을 통해 경기불안과 무역적자를 해결해 나가겠다는 방침을 구체화했다.

김영삼 정권의 이러한 공세와 맞물려 자본가진영은 9월6일에 전경련 41개 주요 재벌 기획조정실장회의를 열어 ‘임금총액 규모 동결’ 방침을 발표하고, 노동법 개정과 관련해서는 정리해고 요건 완화와 함께 복수노조와 제3자 개입 인정을 신중히 추진할 것을 정부에 강력하게 요구했다.

또한 화이트칼라를 주 대상으로 하는 대량감원이 명예퇴직제, 배치전환, 직급정년제 등을 활용하여 대대적으로 이루어졌고, 이는 기업 전반의 구조조정과 연관되어 추진되었다. 민주노총과의 ‘사회적 합의’를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이데올로기적 압박을 통해 ‘신노사관계 구상’을 관철시켜 나가겠다는 것이었고, 결국 이런 의도는 1996년 12월 26일 “노동악법의 날치기 통과”로 그 본 모습을 드러냈다.

 

(6) 그러나 이처럼 신자유주의적 노동정책을 ‘노동법 개악’ 강행을 통해 법제화하려던 김영삼 정권의 시도는 노동자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부분적으로 좌절됐다. 민주노총의 1996~97년 노동법 개악저지 총파업투쟁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1996~97년 노동자총파업은 ‘신노사관계 구상’이라는 허구적인 ‘사회적 합의’ 시도는 무산시켰지만, 노동법의 개악 그 자체는 저지시켜 내지 못했다.

1997년 하반기 들어 재경원을 중심으로 기업의 인수⋅합병 시 정리해고를 가능케 하는 ‘구조조정 특별법’ 개정이 추진되고, 8월 말에는 임금과 인원감축에 대한 노조동의서 첨부를 주 내용으로 하는 부도유예협약이 개정되는 등 국내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위한 공세가 본격화될 즈음, 그해 10월 말에 한국 사회는 외환금융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결국 김영삼 정부는 그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처방으로 IMF에서 제시한, 긴축정책과 구조조정, 개방화, 국공유기업의 사유화, 노동유연화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정책 권고를 전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2) 1993~1995년, 민주노총 건설 투쟁

 

(1) 민주노조운동진영은 1992년 대선에서의 패배가 가져다 준 후유증과 개혁 드라이드 공세를 ‘노·경총합의 반대투쟁’을 통해 극복해 나가면서, 대공장, 전노협, 사무·전문직으로 전개되어 왔던 민주노조운동의 세 흐름을 1993년 6월 ‘전국노동조합 대표자회의’라는 사안별 공동사업체로 결합시켜 냈다.

김영삼 정권의 ‘위로부터의 개혁’이 갖는 한계를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을 통해 최초로 폭로한 것은 현총련의 공동임투였다. 1993년 6월 4일 현대정공 위원장의 직권조인에 대한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분노로부터 촉발된 현총련의 공동임투는 현총련이 현대그룹과의 협상을 요구하며 6월 30일의 대중집회, 7월 7일 10개 노조, 63,000여 조합원이 참여하는 일일 연대 총파업투쟁까지 조직해 냈으나, 7월 20일 현대자동차에 긴급조정권이 발동하고, 7월 23일 현대자동차 노조의 잠정합의안이 50.07% (21표차)로 가결됨으로서 두 달간에 걸친 막을 내렸다. 현총련의 두 달간에 걸친 공동임투는 문민정부의 개혁 대상이 민주노조운동이 아니라, 바로 ‘고통분담론’이라는 허구적인 이데올로기로 노동정책을 자본의 국가경쟁력강화 논리에 종속시켜 나가려는 문민전부의 신노동정책 그 자체가 ‘아래부터의 개혁’ 대상임을 분명히 했다.

현총련의 공동임투는 김영삼정권의 ‘무쟁의 원년’, ‘고통분담론’에 의해 숨죽이고 있던 노동자계급을 고무시켜 전국적인 임투전선을 추동해 내고, 노·경총 임금가이드라인 (4.7%~8.9%)을 대중투쟁을 통해 돌파해 나갔으며, 1993년 하반기에는 대우조선, 대우자동차, 한진중공업, 아시아자동차, 현대정공 등 전국의 대공장 사업장에서 민주노조가 출범함으로써, 민주노조운동은 더욱 일반화되어갔다.

 

(2) 김영삼 정권의 ‘신노동정책’과 그에 따른 ‘노-경총 사회적 합의’에 맞서서 민주노조운동진영은 1993년 전노대의 노·경총 사회적합의 반대투쟁, 현총련의 공동임투, 노동법 개정투쟁, UR 반대 및 사회개혁투쟁, 그리고 ‘전국 해고노동자 원직복직 투쟁위원회’소속 해고노동자들의 전투적인 원직복직투쟁 등으로 대응하였다.

민주노조운동진영은 ‘노·경총 사회적 합의’를 임금억제정책으로 받아들여 ‘노·경총 사회적 합의 반대투쟁 전선’을 구축해 냈으며, 이 투쟁을 역으로 ‘어용노총 해체투쟁’과 결합시켜 나감으로써 대중적인 반어용노총전선을 형성하고 민주노조운동진영의 결속을 강화하고 확대하는 계기로 조직해 냈다. 한국노총은 2년간 ‘사회적 합의의 대가’로 그 어용성이 대중적으로 폭로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총탈퇴운동(94임투시 31개 노조의 노총탈퇴, 135개 노조의 의무금 납부 거부)으로 노동조합운동의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2) 1994년 상반기, 전노대는 한편으로는 ‘노·경총 사회적 합의 반대투쟁’을 ‘어용노총 해체투쟁’과 결합시켜 나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1994년 상반기 임금인상투쟁을 시기집중이라는 공동임투로 전개해 나갔다. 1994년 상반기 임금인상투쟁에서 투쟁의 중심에 선 것은 철도노동자들의 연대파업투쟁이었다. 1994년 6월 ‘전국기관사협의회’소속 철도노동자들과 지하철 노조의 연대투쟁은 “공기업 3% 임금억제 정책 철폐”, “근로기준법의 준수”, “해고자 원직복직” 등 공동요구에 기초한 공동파업을 전개함으로써 업종별 공동투쟁의 새로운 모범을 보여 주었으며, 1994년 상반기 임금투쟁 전선을 과감하게 돌파하여 노동자대중 전체에게 투쟁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었다. 전지협 노동자들의 연대파업투쟁은 이후 부산의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LNG 선상파업투쟁, 광주의 금호타이어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대구의 대우기전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등 각 지역별 대공장노조의 파업투쟁으로 이어져, 김영삼 정권의 임금억제정책과 노사협조정책을 실력으로 무력화시켜 나갔다.

 

(3) 제조업 노동자들이 대중적인 파업투쟁을 통해 민주노조운동의 지평을 확대시켜 나간 반면,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은 “업종별 교섭”, “사회개혁투쟁”, “단일 산별노조의 건설 및 연맹의 합법화”라는 형태로 민주노조운동의 새로운 경험을 축적시켜 나갔다. 병원노련과 전문노련은 기업별 노조체계하에서 집단교섭을 성사시킴으로 업종별 공동투쟁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전국과학기술노조, 전국의료보험노조 등은 단일 산별노조(소산별)를 건설하고, 합법성을 쟁취함으로서 기업별 노조체계를 극복하여 산별노조를 건설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과 전망을 현실화시켜 냈다. 뿐만아니라 사무·전문직 민주노조운동의 경우, 의료제도의 개선, 완전한 사회보장의 실시, 언론 민주화 등 사회개혁 요구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서 노동조합의 사회적인 역할을 부각시키고, 노동자의 정치의식을 고양시켜 나갔다.

 

(4) 1994년 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의 활성화는 19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성과가 새로운 영역으로까지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동안 정부의 임금 가이드라인 정책의 선도사업장으로 정부의 임금통제정책의 희생양이 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공공부문’이라는 이유로 노동3권마저 심각하게 제약당해 왔던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1994년 상반기 철도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을 출발로 한국통신 노동조합의 민주화, 조폐공사 노조의 파업투쟁 등을 계기로 공공부문에서의 민주노조운동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마침내 11월 4일에 142개 노조, 21만 조합원을 포괄하는 ‘공공부문노조 대표자회의’를 결성하였다. “임금 가이드라인 철폐”, “대정부 직접 교섭”, “민관 대등의 원칙 확인”, “공공부문 노동기본권 쟁취” 등의 요구 사항을 중심으로, 한국전쟁 이후 40여 년간 일방적인 무권리 상태에서 침묵과 굴종을 강요당해 왔던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투쟁의 전면에 나서고 있다는 점에서 노동조합운동 지형의 새로운 재편을 예고했다.

 

(5) 공공부문 노동운동의 활성화가 민주노조운동의 외연의 확대라면, 1994년 6월 ‘원진레이온 살인기계 중국이전 반대 대책위원회’의 결성은 민주노조운동의 이념적인 내용의 심화의 정도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1991년 1월 원진레이온 노동자 김봉환의 사망을 계기로 출발한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직업병인정 투쟁은 산업재해·직업병의 문제를 전사회적인 문제로 부각시켜 내었다.

1995년 1월 9일 네팔인 노동자 13명이 폭행과 임금착취에 항의하여 명동성당에서 무기한 단식 농성에 돌입하고, 이어 1월 12일 ‘외국인 취업연수생 인권실태 개선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결성해서 이주 노동자 문제를 사회적 쟁점화시키기도 했다.

 

(6) 1995년 민주노조진영의 투쟁은 과거와는 다른 조건에서 진행되었다. 1994년 11월에 결성된 ‘민주노총 준비위원회’가 1995년 5월 1일 노동절 106주년기념대회에서 1995년 11월에 민주노총을 출범한다고 공식 선언한 것이다. 즉 1995년 투쟁은 민주노조운동진영이 한국전쟁 이후 지배세력의 노동통제기구였던 한국노총을 대신할 자주적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구심체의 지도아래, 산업별 노조운동으로 질적 발전을 담보할 조직적 구심체인 민주노총 건설을 목표로 전개됐다. ‘민주노총 준비위원회’는 1995년 상반기 투쟁의 주요 지침으로 ‘임금인상 투쟁과 사회개혁투쟁의 결합’을 내걸고, 그 투쟁의 성과를 모아 하반기에 민주노총을 건설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7) 1995년 5월 16일 한국통신은 유덕상 위원장 등 노조간부 60여명을 파면했고, 5월 19일에는 김영삼 정권이 “국가 전복 저의를 가진 불법행위”라는 발언을 통해, 단지 ‘파업 가능성’이라는 이유로 주요간부들을 구속·수배했다. 이어 명동성당과 조계사에서 농성을 하는 한통 조합원들을 경찰병력을 동원하여 강제연행했다. 한통 노조가 내건 요구는 “임금가이드라인의 철폐”와 “통신개방 반대” 및 “재벌특혜 민영화 정책 반대” 였다. 그동안 한국통신을 비롯한 공공부문의 임금정책은 민간부문 노사관계를 통제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되어왔으며, 공공부문 중에서도 한국통신에 대한 임금정책은 공공부문 임금억제이 주요대상이 되어왔다. 따라서 한통 노동자에 대한 노동통제와 임금억제는 다른 공기업이나 민간기업의 노동통제의 잣대였던 만큼 이러한 임금억제정책에 대한 반대는 한통 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노동자의 문제였다. 또한 통신개방과 민영화에 대한 반대는 노동자의 고용불안을 초래하는 정부의 개방정책, 합리화정책에 대한 분명한 분노와 자각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1995년 현대자동차노조 양봉수 해고노동자의 분신에 뒤이은 현대자동차 노동자와 현총련의 연대투쟁, 그리고 대우조선 박삼훈 조합원의 분신은 자본의 신경영전략의 의미와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었다.

95년 상반기 한국통신노동자들의 투쟁과 민간대기업 노동자들의 신경영전략 반대투쟁, 그리고 사회개혁투쟁은 민주노조운동이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이 이 사회 전체의 변혁을 자신의 과제로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 자본 합리화 공세(공공부문 민영화, 신경영전략)에 대해 노동조합운동의 위상과 전망을 새롭게 재구축해 나가야 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8) 이러한 투쟁의 성과를 모아 마침내 1995년 11월 11일, 업종, 지역, 그룹의 50만 노동자를 포괄하는 ‘민주노총’이 출범했다. 이로서 전노협에서 전노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온 민간부문의 ‘민주노조 총단결’ 구도는 일단락됐다. 한국전쟁 이후 40년간 지배세력의 노동통제 도구였던 한국노총을 무력화시키고, 민주노조운동의 산별노조운동으로의 질적 발전을 위한 조직적 구심체가 드디어 출범하게 된 것이다. 민주노총의 출범은 한국 노동조합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것으로, 노사관계의 새로운 재편만이 아니라 민주노조운동진영에 반어용노총전선을 뛰어넘는 새로운 변혁 주체로 성장해 나갈 것을 요구받게 됐다.

바로 8년 전, 대파업투쟁의 물결 속에서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고 외치던 천만 노동자의 요구와 바램은 「민주노총」의 선언문에 집약되었다.

“1. 우리는 95년 임단투와 사회개혁투쟁을 활발히 전개하여 민주노총을 힘있게 건설할 것을 결의한다.

1. 우리는 복수노조 금지조항 등 노동악법 개정투쟁을 힘차게 전개하여 노동기본권을 쟁취할 것을 결의한다.

1. 우리는 최대한 많은 노동조합이 민주노총에 참가할 수 있도록 총력을 기울일 것을 결의한다.

1. 우리는 기업별 노조를 극복하고 산업별 노조를 건설하기 위해 앞장 설 것을 결의한다.”

(1994년 11월 13일, 「민주노총 준비위 출범 결의문」 가운데서)

 

3) 1996~97년 노동법 개악 저지 총파업투쟁

 

(1) 김영삼 정권이 1996년 4월 ‘신노사관계 구상’을 발표하자, 민주노총은 초기에 ‘노사관계 개혁위원회’에 참여냐 불참이냐를 둘러싸서 혼란과 동요에 휩싸였다. 민주노총은 그해 7월 단위노조대표자 수련회에서 현장으로부터 강력한 문제제기가 있었음에도 이후 집단적 노사관계법과 개별적 노사관계법의 맞바꾸기 구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노동법 개악 의도가 분명해진 가운데 11월 들어 총파업 돌입 여부를 둘러 싼 민주노총의 동요와 혼란에 종지부를 찍어준 것은 김영삼 정권의 노동악법 날치기 통과였다.

 

(2) 1996년 12월 26일,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과 안기부법의 날치기 통과에 항의하여, 민주노총은 즉각 총파업에 돌입했다. 1996년 12월 26일에서부터 1997년 1월 말까지 40여 일간, 누적규모 3,206개 노조, 연인원이 359만7,011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정치총파업이었다.

1996~97년 노동자 총파업은 한편으로는 ‘정리해고제’의 법적 제도화 자체가 전체 노동자계급을 단결시키는 조건이 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1987년 이후 지속된 대중투쟁동력과 투쟁 경험, 그리고 민주노총이라는 내셔널센터의 존재와 대공장 노동조합이라는 주력부대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총파업은 1997년 1월 18일, 민주노총 지도부가 ‘유연한 전술’이라는 명목으로 수요파업으로 전환한 이후, 투쟁의 주도권을 상실하면서 결국 3월 국회에서 노동악법 재개정이 통과됐다.

 

(3) 총파업 투쟁은 노동악법을 완전히 저지시켜내지 못했지만, 민주노조운동의 민주적⋅계급적 발전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사적 의의와 가능성을 남겨 주었다.

1996~97총파업은 ‘노동악법 전면무효화’라는 정치적 요구를 중심으로 전노동자계급의 이해와 단사별, 지역별, 업종별, 산업별 이해를 일치시켜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시켜 내는데 성공했다. 이는 한편으로는 금속노동자를 중심으로 강고한 파업투쟁동력을 유지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1987년 6월 민중항쟁에서 소위 넥타이부대라 일컬어지면서 하나의 ‘시민’으로 민주주의투쟁에 참여했던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이 1996~97총파업투쟁에서는 노동자계급의 일부로 총파업투쟁에 조직적으로 나섰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96~97년 총파업투쟁은 투쟁의 형태에서도 민주노총의 조직적인 준비를 통한 총파업투쟁이 중심이 되어 가두 집회와 시위를 결합하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대중적 정치 총파업투쟁을 통해 정권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세력적 접근전이 가능할 수 있다는 점을 현실에서 확인시켜 주었다.

나아가 1996~97년 총파업투쟁은 그 성격에서 실질적 민주주의(사회⋅경제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와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계급 내적으로 결합시킨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투쟁으로서 기존의 무계급적 민주주의투쟁과는 다른 성격, 다른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이를 통해 한국의 사회운동은 이제 청년학생이나 재야세력이 사회운동을 주도하던 시대로부터 노동운동이 사회운동을 주도하는 시대로 전환됐음을 현실적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맞서 내셔널센터 수준에서의 정치총파업을 전개한 것은 1980년대 이후 세계 노동운동의 역사상 유래가 없는 것이었고, 따라서 신자유주의 공세로 고통받고 있었으나 침묵했던 전세계 노동자들을 고무시켰고,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선 전세계노동자들의 반세계화투쟁에 하나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4) 1996년 12월 26일,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과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에 항의하여 이후 40여일간 전개됐던 민주노총의 96~97년 총파업투쟁은 한편으로는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전개되어 왔던 총자본과 총노동간의 대립을 총괄하는 투쟁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투쟁의 승패와 관계없이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세계화 시대에 다가 올 노동과 자본간의 피할 수 없는 격돌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 개악 날치기 통과 시도는 1997년 대선에서의 정권재창출을 위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플랜이기도 했지만, 보다 근저적으로는 90년대 이후 격화되는 자본의 세계적 경쟁 속에서 노동유연화라는 노동자에 대한 착취의 강화를 통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는 국내 자본의 사활이 걸린 공세였기 때문이다.

 

 

4. 김대중 정권, 노동정책과 노동운동

 

1) 노동정책

 

(1) ‘경제위기’와 ‘IMF관리체제’라는 조건 속에서,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에 성공한 김대중 정권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국정지표를 내세우면서, 경제위기의 극복책으로 ‘외자유치’, ‘자본자유화와 민영화’, ‘노동유연화’를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전면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경제위기’와 그 극복을 위한 ‘IMF 이행각서’에 바탕하여 김대중 정권은 신자유주의 공세, 즉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무소불위의 힘으로 추진했다. 구조조정이 목표로 하고 있는 공공⋅금융⋅기업부문에서의 시장원리 확립은 고용관리의 유연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리해고에 따른 대량실업 문제가 한국 노사관계의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2) 선거 공약과는 달리 IMF에서 요구한 노동유연화, 즉 정리해고제의 도입을 전적으로 승인한 김대중 정권은 과거와 같은 일방적인 노동통제를 곧바로 구사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해 12월 말에 ‘IMF체제 극복을 위한 노사정위원회’ 구성을 제의했고, 1998년 1월 ‘노사정위원회’라는 사회적 합의의 형식을 빌어 한편으로는 노동법 개악을 시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조조정과 사유화, 노동유연화 공세를 전면화해 나갔다.

그 핵심 내용은 바로 1990년대 초반의 ‘신경영전략’과 김영삼 정권의 ‘신노사관계’에서 추진하고자 했던 것이고, 국내 독점자본과 초국적 자본 모두의 이해를 관철시키는 것으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의 법제화”였다. 물론 이러한 노동시장의 유연성 제고가 노동기본권의 부분적인 신장(공무원과 교원의 단결권 보장, 정치자금법 개정으로 노조의 정치활동 보장)과 맞바꾸는 형식으로 교환되고, 기업 역시 구조조정을 촉진하는 대신 경영투명성 확보(결합재무제표 의무화 등)에 노력하며, 정부도 고용 및 실업 대책, 물가안정, 임금안정과 노사협력 증진, 그리고 사회보장제도의 확충(고용보험 1인 이상 확대 실시, 임금채권보장제도 도입)에 노력한다고 하여 마치 공정하게 고통을 분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현실에서는 노동자들의 대량실업과 비정규직화라는 고용불안과 그에 따른 생존권의 위기만이 강요됐다.

“외자유치를 위해서는 노동시장이 유연화되어야 한다”는 ‘IMF이행 합의’를 명분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20%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논리로 조직노동자의 대량해고를 가능케 하는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의 즉각 실시를 추진하였다

 

(3) 1기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정리해고제’를 관철시키는데 성공한 김대중 정권은 1998년 5월 말에 민주노총을 제외한 채 2기 노사정위원회를 출범시켰다. 2기 노사정위원회 산하에 ‘공공부문 구조조정 특별위원회’와 ‘금융산업 발전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8월에는 4대 소위원회(경제개혁소위, 고용실업대책소위, 노사관계소위, 사회보장소위)를 구성하여 노동계와 협의하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실제로는 퇴출기업과 퇴출은행, 그리고 공기업 민영화 방침을 일방적으로 발표하면서 추진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합의’를 위한 노사정위원회 내부에서의 논의와 달리, 현실에서는 1998년 9월 3일에 만도기계 노동자들의 투쟁에 공권력을 투입하기도 하는 등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의 고삐도 늦추지 않았다.

 

(4) 2000년 하반기부터 총체적 위기에 직면한 김대중 정권은 총체적 위기의 핵심 원인인 경제문제를 신자유주의적으로 해결하고 이에 저항하는 노동자투쟁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탄압을 강화했다. 그 첫 시험대가 2001년 2월 대우자동차에서의 대량 정리해고로 시작된 대우자동차 구조조정이었고, 이어 공기업 구조조정, 생보사 구조조정 및 은행합병 등 금융권 구조조정, 2단계 협동조합 구조조정 등을 추진했다. 2단계 구조조정의 목표는 구조조정의 항상화와 일상화를 위한 토대를 노동현장에 정착시켜내는 것이었다.

강도높게 추진될 구조조정 및 노동법 개악에 저항할 투쟁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김대중 정권은 노동자에 대해 한치의 양보도 없는 강공책과 탄압을 노골화했다. 김대중 정권은 2001년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강력한 정부’를 선언했으며, 불법 집회와 시위에 대한 강력 대처, 노동자 대량 구속 등으로 현실화시켰다. 이런 탄압과 더불어 김대중 정권은 노동자투쟁을 무력화하고 교란시키기 위해, ‘개혁=구조조정’, ‘노동운동=개혁을 거스르는 집단이기주의’란 이데올로기 공세도 진행했다.

 

(5) 김대중 정권은 이런 탄압 속에서도 노사정위원회를 통한 양대노총 분할전략과 민주노총에 대한 압박전략을 더욱 강도높게 추진했다. 노사정위원회는 2000년 하반기 한국전력과 철도투쟁을 무력화시키면서 부활되었으며, 2001년 2월 9일에는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와 ‘단위사업장 복수노조 허용’조항의 5년 유예를 합의하면서, 사회적 합의기제로서의 그 기능 을 강화했다. 정권은 민주노총을 배제한 채 한국노총과의 파트너쉽을 형성하는 노사정위원회를 적극 활용하면서, 주요 노동 현안을 기만적인 ‘사회적 합의’ 형식으로 해결해 나가면서, 민주노총 및 여러 노동자투쟁을 무력화시키는 한편, 사회적 합의에 동참하지 않는 민주노총을 압박해 나갔다.

 

2) 1998년 1,2기 노사정위원회와 민주노총 총파업

 

(1) 1998년 1월15일에 ‘1기 노사정위원회’가 출범했고, 이후 두 차례에 걸쳐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간의 공정한 고통분담에 관한 공동선언문’이 나온 뒤, 2월9일에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이 잠정 합의되기에 이르렀다. 잠정 합의의 내용은 그 이전에도 추진하려다 좌절됐던 ‘맞바꾸기’였다. 즉 노사정간에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와 노동기본권의 부분적 신장이라는 정치적 교환이 잠정 합의됐다.

법적 근거조차 없는 정치적 합의기구에 불과한 1기 노사정위원회에서의 합의는 그것이 ‘잠정’ 합의였다고는 하지만 결국 민주노총 1기 지도부(위원장 직무대행 배석범)가 조합원 정리해고에 동의한 것이고, 고용불안과 생존권 위협에 직면한 현장조합원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2월 중순,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에서는 ‘노사정위원회’의 잠정합의안을 부결시켰고, 1기 지도부는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이어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단병호)를 중심으로 ‘2․9잠정합의안’ 철회를 위한 총파업을 결의했으나, 2월 말 총파업마저, 민주노총의 분열 가능성, 대중투쟁동력의 부재란 이유로 철회되고 말았다. 민주노총은 ‘잠정 합의’와 ‘총파업 철회’로 인해 지도력과 정체성의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2) 3월 말, 선거를 통해 이러한 지도력의 위기, 정체성의 위기를 민주노총의 혁신과 대중투쟁으로 돌파해 나가겠다는 2기 지도부(위원장 이갑용)가 새로 들어섰고, 2기 지도부는 5월1일 노동절투쟁을 기점으로 대중투쟁동력에 불을 붙이면서 5월말에는 총파업투쟁을 조직해 냈다. 그런데 6월10일로 예정되어 있던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에 맞추어 경제외교에 필요한 노사안정 구도를 위해, 6월5일 노정간에 현안문제를 둘러 싼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민주노총은 6월10일 제2차 총파업을 철회하고 2기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사실 ‘6․5합의’의 내용이라는 것이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의 남용 방지안 논의, 노사정위원회에 근로시간위원회를 설치하여 근로시간단축방안 논의, 노조조직과 교섭체계의 산별화 등 제도적 개선방안 논의, 노사정위원회 위상 강화, 삼미특수강 문제 해결, 노동절 집회 구속자와 5․27 총파업 관련자에 대한 고소고발 철회 등, 실질적인 조치 없는 ‘논의’ 약속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합의를 근거로 민주노총 2기 지도부가 총파업을 철회하고 다시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한 것은 6월 4일 지자체 선거 이후로 예정되어 있던 금융⋅공공부문 구조조정 부담감이 크게 작용했다고는 하나, 민주노총의 위상과 지도력을 다시 훼손하는 것이었다.

 

(3) 이어 2기 노사정위원회에서는 6월 말에 공공⋅금융부문 구조조정에 대한 노동계의 협의 요구에 따라 ‘공공부문 구조조정 특별위원회’와 ‘금융산업 발전대책위원회’를 구성했지만 정부가 퇴출기업과 퇴출은행, 그리고 공기업 민영화 방침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자,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7월 10일에 노사정위원회 불참선언을 하고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 방침으로 맞섰다. 민주노총은 7월14일에서 16일까지 공공, 공익, 금속, 금융산업 연맹 중심으로 총파업을 전개한 후 다시 7월23일 노정간 합의하면서 총파업 방침을 철회하고, 7월 말에 2기 노사정위원회는 재가동되었다. 7월23일의 합의 내용 역시 구체적인 실현 계획도 구속력도 없는 것으로, 퇴출 금융기관 노동자의 생계대책과 55개 퇴출기업 노동자의 고용대책을 노사정위원회에서 논의, 삼미특수강 노동자들을 포철계열 창원특수강에 취업하며 현대자동차 등 정리해고 문제가 쟁점인 사업장의 평화적인 분규 해결, 노사정위원회 위상 강화 등이었다.

8월 초 노사정위원회는 1기합의 사항에 대한 이행점검을 위해 4대 소위원회(경제개혁소위, 고용실업대책소위, 노사관계소위, 사회보장소위)와 ‘노사정위원회 위상강화 소위’를 구성하였으나 ‘사회적 합의’를 위한 노사정위원회 내부에서의 논의와 달리, 현실에서는 9월3일에 만도기계 노동자 투쟁에 공권력을 투입하고, 금융기관의 고용조정과 공기업에 대한 민영화 방안을 강행하는 등 노동탄압과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전면화해 나갔다.

 

(4) 결국 민주노총은 1999년 2월 대의원대회에서 ‘노사정위원회’를 신자유주의의 청소부 기구나 구조조정의 들러리 기구로 일축하여 노사정위원회 탈퇴를 결정하고, 동시에 구조조정․정리해고 중단, 노동시간 단축, 사회안정망 구축, 산별교섭체계 확보 등의 요구를 실질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대정부⋅대자본 교섭틀을 쟁취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김대중 정권 아래서, 노사정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합의’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를 추진해 나가는데 민주노총을 들러리로 세우는 것에 불과했다. 결국 1997년 11월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공세의 전면화와 노사정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허구적인 사회적 합의 전략에 민주노총 지도부가 분명한 대중적 전선을 치지 못함으로써 민주노총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대한 확고한 대중적 교두보 역할과 지도력을 상실하였고, 그 결과 민주노조운동은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더욱 심각한 점은 계급적 단결의 위기였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 공세가 일상적으로 정착되면서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노동자의 분열이 고착화됐고, 정규직 노동자는 고용불안과 노동강도의 강화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빈곤과 차별로 극심한 고통에 처하게 됐으며 민주노조운동은 지도력의 위기에 따른 상층지도력과 현장조합원의 분리, 단위노조의 현장장악력 무력화, 그리고 대중파업 자체의 무기력화라는 엄혹한 현실에 직면하게 됐다.

 

3) 1998~2002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아래로부터의 투쟁

 

(1) 김대중 정권과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공세에 맞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계급은 혼란과 동요 속에서도 ‘고용안정’ 요구를 중심으로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끈질긴 투쟁을 전개했다. 1998년 5월 메이데이투쟁을 시작으로, 5월 말의 총파업투쟁, 6월 퇴출은행과 퇴출기업 노동자들의 고용승계 및 생계대책 요구투쟁, 7월 공공부문 구조조정에 맞선 공공부문노동자들의 투쟁, 7월~9월 현대자동차 노동자들과 10월 만도기계 노동자들의 정리해고저지 및 민주노조사수투쟁, 그리고 11월 8일의 민중대회에 이르기까지 힘겹지만 완강한 저항을 했다.

이어 1999년 4월 서울지하철 파업투쟁과 10월 한라중공업노조 파업, 2000년 3~4월 자동차3사 노조 연대파업과 6~8월 롯데호텔노동자투쟁, 8월 사회보험노동자투쟁, 12월 금융노동자파업, 한국통신노동자 파업, 2001년 2월 대우자동차 노조 정리해고저지 파업투쟁 및 5월 1일, 민주노총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 및 김대중 정권퇴진투쟁 선언’, 2002년 한국전력 노동자, 민영화 반대투쟁, 철도노동자 민영화 저지투쟁, 2003년 1~3월 배달호 열사 분신 대책 투쟁에 이르기까지 투쟁을 이어졌으나, 대부분의 투쟁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공세를 제대로 저지시켜 내지 못한 채, 개별적인 투쟁으로 고립되어 각개 격파되어 버렸다.

 

(2)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현장의 끈질긴 투쟁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정리해고제를 철폐시켜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소속 사업장에서 4만여 조합원이 정리해고됐고, 90% 가까운 넘는 사업장에서 임금동결과 삭감을 강요당했다. 작업장에서의 노동통제는 고용불안을 빌미로 하여 더욱 강화되었으며, 단협안이 개악되고 노동조합 활동 역시 일방적 탄압과 통제 대상이 되어, 지난 10년간 투쟁을 통해 쟁취해왔던 현장의 민주적 권리가 심각하게 훼손당했다.

 

(3) 2000년 이후 주목해야 할 점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최대 피해자이며, 동시에 민주노조운동의 사각지대였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스스로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생존권과 민주적 권리를 사수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2000년 이랜드노조와 한국통신계약직노동자들의 투쟁에서 2003년 현자아산사내하청노동자들의 투쟁과 연이은 분신투쟁, 2004년 현대중공업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과 현대자동차 비정규직노조의 투쟁, 그리고 2004년 9월 비정규직연대회의 대표자들의 열린우리당 당사점거투쟁에 이르기까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 공세에 맞선 새로운 투쟁의 주체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선도적인 점거투쟁이 조직노동자들의 총파업투쟁을 촉발해 내는 양상은 새로운 투쟁조직화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4) 2001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 및 김대중 정권퇴진투쟁

 

(1) 2001년 초, 김대중 정권의 대우자동차에 대한 대량의 정리해고와 공권력 침탈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둘러싼 노동과 자본(정권) 간의 치열한 대립투쟁을 불러일으켰다.

민주노총은 애초 핵심요구로 잡았던 ‘주5일 근무제 쟁취투쟁’에서 대우자동차와 현안투쟁(생보사 투쟁, 한국통신계약직 투쟁, 공공부문 예산권 남용 저지투쟁 등)을 결합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를 중심 투쟁요구로 잡아나가면서 3월 투쟁을 조직했고, 5월 1일 노동절에는 ‘신자유주의 분쇄⋅김대중 정권 퇴진’을 선언했다.

 

(2) 민주노총의 2001년 6월 총력투쟁은 ‘임단투의 시기집중’이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졌지만, 예년의 연대파업과는 투쟁의 성격이 달랐다. 무엇보다도 민주노총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와 김대중 정권퇴진’이라는 정치적 방향을 분명히 하면서 6대 요구안을 제출했고, 이러한 정치적 방향 아래서 임단투를 결합했다는 점이다.

또한 6월 총력투쟁이 대우자동차 정리해고저지투쟁에 대한 경찰폭력만행, 한국통신계약직노동자․대우캐리어계약직 노동자투쟁, 건설운송노동자 투쟁, 그리고 울산의 효성 노동자파업투쟁에 대한 탄압 등에서 보듯이, 2001년 상반기투쟁의 방향을 예고하는 주요 투쟁에 대한 탄압에 맞서 노동자들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완강하고 끈질긴 투쟁을 전개해 온 성과로서 성립했다는 점이다.

 

(3) 그러나 6월 총력투쟁과정에서 125개 사업장, 55,000여 조합원만이 결합했고, 또 주력사업장 혹은 주역 연맹이 없었다는 점에서 아직 민주노총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김대중 정권퇴진투쟁’의 목표가 대중적으로 확고하게 인식되어 있지 않다는 점 또한 확인시켜 주었다. 즉 위로부터의 ‘김대중 정권퇴진’투쟁 선언과 아래로부터의 임단투 시기집중 투쟁동력이 수평적으로 결합된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또한 한국통신계약직노동자투쟁, 대우개리어 비정규직노동자투쟁, 한국통신114분사저지투쟁 과정에서 보듯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완강한 투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가 노동운동 내부는 물론 사회적으로 쟁점화는 되고 있지만, 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노동자들간의 연대가 구조조정 자체에 대한 분쇄투쟁의 방향에서 현실적으로 조직되지 못할 때,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은 곧장 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표현되고, 이 자체가 노동통제와 파업무력화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됐다.

 

(3) 6월 총력투쟁은 투쟁의 출발에서부터 김대중 정권의 신속하고 전면적인 탄압과 민주노총의 제2차 총력투쟁 결의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정권의 신속하고 전면적인 탄압으로 그 투쟁의 예봉이 꺾일 것 같았던 6월 총력투쟁은 울산지역에서 화학섬유노동자투쟁을 중심으로 한 완강한 연대투쟁, 그리고 현자노조의 쟁발 결의로 반전의 계기를 잡으면서, 6월 22일 민주노총 비상중앙위원회에서 ‘7월 5일 하루 총파업투쟁’을 시작으로 ‘노동운동탄압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 김대중 정권퇴진’투쟁을 전면적으로 전개해 나가기로 결의했다. 비상중앙위원회는 제2차 총력투쟁이 ‘임단투 시기집중’이 아니라 ‘노동운동탄압․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 김대중 정권의 퇴진’을 내건 ‘정치총파업’임을 분명히 했다. 정세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노동운동탄압 분쇄, 김대중 정권의 퇴진’이라는 분명한 정치적 목표 아래서 현장의 노동자대중을 누가 전취하느냐, 즉 위력적인 총파업투쟁을 조직할 수 있느냐의 국면으로 발전하였다.

 

(4) 그러나 7월 5일 하루총파업은 결의에도 불구하고 힘있게 조직되지 못했다. 이어진 7월 22일 총력상경투쟁 또한 시청광장 집회 실현이라는 진전에도 불구하고 2001년 투쟁기조인 대중 참여를 전제한 완강하고 지속적인 투쟁과정으로 조직하지 못하였다. 이는 8월 2일 명동성당 농성을 풀고 자진출두를 결정하는 민주노총 지도부의 행동을 규정하는 요인으로까지 작동하였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자진출두는 하반기 투쟁을 위력적으로 책임있게 조직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라는 표현에도 불구하고, 상반기 투쟁평가와 하반기 투쟁계획을 결정해야 할 민주노총 8월 임시대의원대회의 유회라는 결과를 낳았다.

 

 

5. 노무현 정권의 노동정책과 노동운동

 

1) 노동정책

 

(1) IMF 외환위기 이후 10년간 이른바 ‘민주 정권’ 아래서 추진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세계화의 결과 한국 사회와 경제는 심각한 구조적 위기에 직면했다. 과잉 유동자본에 따른 부동산 거품과 붕괴 위험, 기업․산업․수출과내수․재산과소득․교육․지역 등 경제와 사회 전부문에 걸쳐 양극화와 불균형의 심화, 내수와 수출의 연계고리의 단절 및 수출 주도의 경제로 인한 환율과 유가의 불안정성에 노출, 고용 없는 성장에 따른 실업과 비정규직화, 그리고 대중빈곤의 심화, 저출산․고령화 등 노동력 재생산의 위기, 카드빚에 따른 신용파산자 양산 등이 그것이다.

 

(2) 이러한 구조적 위기를 떠안고 2003년에 출범한 노무현 정권은 “‘새로운 성장 동력의 창출’, ‘3만$ 시대 선진국으로의 도약’이라는 명분으로, ‘서비스산업 경쟁력 강화 종합대책’과 같은 자발적 자유화 조치의 전면화, 한미FTA를 중심으로 한 전지구적 FTA 추진 강행, 해외투자의 자유화, 자본의 대북 진출 적극 추진, 자본통합법의 시행과 연금의 금융시장․주식시장으로의 투입 등을 통한 금융화, 그리고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의 제도화 등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제도적으로 완성”시키고자 했다.

노무현 정권과 자유주의 정치세력에게 ‘87년 민주화의 완성’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걸 맞는 정부의 역할을 뜻하는데, 이는 사회적 갈등을 의회정치 공간으로 수렴해 낼 수 있는 정치시스템, 북한으로의 자본진출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남북관계의 진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는 자본운동을 뒷받침할 수 있는 다양한 제도의 구축, 의식에서도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실질적으로 포섭된 유연한 노동력, 노자간의 갈등을 효과적으로 통제해 나갈 수 있는 협력적 노사관계의 구축 등이 그것이었다.

 

(3) 이러한 목표에 바탕하여 노무현 정권은 출범 직후부터 ‘사회통합적 노자관계’를 노동정책의 핵심으로 제기하면서, 소위 ‘지속가능한 성장’(신성장 정책)을 위한 노자관계의 재편을 모색했다. 그 핵심은 “기업이 마음 놓고 투자할 수 있는 노동환경”을 위한 ‘선진적 노자관계’의 구축으로, 2003년 9월 3일에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으로 구체화했다. 여기서 노무현 정권이 판단하는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란, “투자확대에 장애가 되는 모든 경제규제를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하고, 세재 및 고용보험에 의한 지원 방안을 강구하며, 임금과 근로시간의 조정 배치전환의 원활화 등 기업 내부의 노동시장 유연성 확대하고, 인력자원 개발을 위한 교육훈련을 실시하며,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치하는 것 등”이었다. 이를 위해 걸림돌이 되는 노동조합운동을 약화시키거나 순치시켜서 노사협조적 노동운동으로 재편하고자 하는 것이 곧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이었다.

 

(4) 2005년 들어 경제위기의 핵심이 경제적 양극화와 빈곤의 증대임이 확인됐고, 따라서 “경제위기냐 아니냐”의 수준을 넘어 그 원인에 대한 진단과 극복방안을 둘러싸서 논란은 더욱 확대되고 심화되면서, 노무현 정권은 초기의 ‘개혁 노선’을 포기하고 소위 ‘실용주의 노선’으로 선회했다. 2004년 4대 개혁입법의 추진 과정에서 ‘경제 위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개혁의 추진 자체도 정치적 의미를 상실할 것이라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그래서 노무현 정권은 2005년의 국정지표로 ‘경제 회생, 한반도 평화 정착, 국민통합’을 정하고, 이 가운데 경제 회생을 중심으로 모든 정책을 조율해 나갔다. 그런데 여기서 경제회생을 위한 정책이란 바로 신자유주의적 개방화, 구조조정, 노동유연화 공세를 전면화하는 것이 핵심이고, 부분적인 경기 부양책과 사회보장정책을 통해 그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5) 노무현 정권은 2005년에 들어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구조조정, 노동유연화의 결과’로 드러나는 정치⋅경제⋅사회적 위기를 봉합하기 위한 ‘국민통합’, ‘사회통합’, ‘사회적 대타협’ 공세를 더욱 구체화하고 전면화했다. 2005년 1월에 사회원로와 시민사회단체들은 “경제·사회적 양극화 문제를 해소하고 적극적인 일자리 창출을 통해 새로운 성장 패러다임을 짜자”는 내용의 ‘2005 희망제안’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사회적 대타협’ 분위기 조성에 나섰다. 2004년 ‘노동귀족론’이라는 여론 공세와 총파업의 유보, 그리고 2005년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주요 사업장 노조의 ‘채용 비리’에 대한 공세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노무현 정권은 한편으로는 ‘채용비리’ 폭로를 통해 압박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연곡절을 겪으면서도 ‘노사정 대표자회담’이라는 노사정 타협 체계 구축을 지속적으로 현실화시켜 나가려 시도했다.

 

(6) 이러한 시도와 여론 공세가 어느 정도 먹혀들어 민주노조운동이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비정규입법’과 ‘선진노사관계 로드맵’에 대해서 노동자들의 저항이 거세어지자 당장 ‘사회적 합의=대타협’이 힘들다고 판단하고 2005년 12월 ‘비정규입법’ 강행, 2006년 9월 11일에 ‘선진노사관계 로드맵’ 입법을 강행했다.

“20,000$ 시대, 동북아 중심국가 건설에 걸맞는 선진적 노자관계”를 내걸고, 노무현 정권이 강행 처리한 ‘선진 노사관계 로드맵’은 1990년대 초반 이후 한국 자본주의가 일관되게 추진해 온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제도적으로 완성하는 것이자, 동시에 ‘구조조정 2단계’를 본격화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 교두보를 구축하려는 것이었다.

 

(7) 2006년 9월 11일, 민주노총을 배제한 채 이루어진 노무현 정권판 ‘사회적 합의’는 우선 그 절차에서도 경총-한국노총-정부간 밀실야합의 산물이자, 반쪽 로드맵이었다. ‘선진 노사관계 로드맵’은 노동자의 결사의 자유를 제한하고, 노조의 파업권을 약화시키며, 고용유연성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전임자 임금만 받고 나머지 다 내줬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선진적 노사관계’란 이름으로, 핵심 쟁점 사안은 3년간 유예시키면서 “파업은 약하게, 해고는 쉽게” 한 것이다.

핵심 쟁점이었던 ‘기업단위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조항은 3년간(2009.12.말) 유예됐다. 필수공익사업장과 관련해서는, “직권중재를 폐지하는 대신 필수공익사업에 대해 필수업무유지제를 도입하고, 대체근로를 허용하며, 필수공익사업장의 범위도 현행 철도, 전기, 병원, 수도, 가스, 석유, 한국은행 등에서 혈액공급, 항공, 폐·하수처리, 증기·온수 공급업 등으로 확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고, 부당해고와 관련해서는, “금전 보상도 허용”하고, “사업주에게 부과했던 벌칙 규정을 삭제”했으며, “해고사유와 해고시기를 반드시 서면으로 통보”해야 한다고 했지만, “현행 60일인 사전통보기간을 기업규모에 따라 30~60일까지 차등 설정”했다. 이로서 사업주의 해고권한은 대폭 강화됐고, 부당 해고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됐으며, 근로기준법은 무력화됐다.

이로써 노무현 정권은 불안정한 ‘87년 민주화 체제’를 마무리 짓고, ‘97년 신자유주의 체제’를 제도적으로 완성시킨 정권으로 기록될 것이다.

 

2) 비정규 운동의 성장과 2006년 비정규악법 저지 투쟁

 

(1) 1998년 최초의 비정규투쟁으로 불리는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투쟁으로부터 시작하여, 1999년 재능교사노조의 투쟁, 2000년 이후 517일간 투쟁한 한국통신계약직노조, 2000년 방송사 비정규직 노조의 파견법 철폐투쟁과 인사이트코리아 노조의 정규직화 투쟁, 2000년 롯데호텔노조와 이랜드노조의 정규직화 투쟁, 2001년 건설운송노조의 특수고용노동자 노동자성 인정 투쟁, 2000년 이후 시설노동자들의 투쟁 등에 이르기까지 비정규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 스스로 투쟁에 나섰다. 투쟁 속에서 비정규노조는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시켜 냈고, 비정규 투쟁의 주체로 서나가게 됐으며,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에서 정규직-비정규직의 공동투쟁의 중요성을 인식해 나갔다.

 

(2) 2003년 들어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에서 사내하청 노조가 만들어지고, 이어 현대자동차 울산, 금호타이어 사내하청노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조 등 사내하청 노조들이 건설되기 시작하면서 불법파견투쟁을 전개했다. 2003년에 화물노동자들도 투쟁에 나서면서 5.15. 노정합의를 이끌어냈다. 이처럼 대규모 비정규직 노조가 건설되고, 또 투쟁에서 일정 승리하기도 하면서 비정규직 운동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성과를 모아 전국비정규노조대표자연대회의(전비연)를 건설했으며, 이후 전비연을 중심으로 비정규악법에 맞선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또한 이용석 열사 분신을 계기로 공공부문 근로복지공단 비정규노조가 파업투쟁을 전개했고, 건설노동자, 덤프노동자, 이주노동자들도 스스로를 조직하면서 투쟁에 나섰다. 건설노조와 하이닉스-매그나칩, 하이스코 등은 지역공동투쟁의 모범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3) 2004년 9월 노무현 정권이 <기간제·단시간 고용에 관한 법률 제정안>과 <파견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하면서, 비정규직 문제는 법 개악을 둘러싸서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됐다. 전비연은 즉각 열린우리당 항의점거농성을 조직하여 정부 법안의 본질을 고발했고, 이에 민주노총이 하반기 총파업을 결의했다. 그러나 비정규법을 둘러싼 민주노조운동 내부의 쟁점이 드러나면서 2005년 4월에 민주노총 입법요구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정부 법안에 대한 의견 발표 이후 국가인권위 의견 수준으로 후퇴했고, 2005년 11월이 되면 기간제 사용사유를 대폭 확대한 단병호 의원 수정안, 기간제 고용에서 사유제한원칙을 사실상 포기하고, 파견법 철폐가 아닌 현행 파견법 유지를 골자로 하는 한국노총 최종안 등등 다시 후퇴와 축소가 이루어졌다. 결국 정부와 여당의 비정규 법안은 비정규노조와 민주노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006년에 통과되고 말았다.

 

(4) 이후 비정규노조의 투쟁은 자본의 탄압과 민주노조운동의 한계, 그리고 비정규노조의 역부족까지 겹치면서 다시 정체기를 맞았다. 그러나 비정규악법이 통과된 이후 무기력한 노동운동 진영에 불을 지핀 것이 뉴코아, 이랜드 노조, 코스콤의 투쟁이었다. 뉴코아-이랜드, 코스콤, GM부평공장 비정규직, 기륭전자, KTX, 학습지 노조 등은 전 노동운동 진영의 힘으로 비정규악법 폐기의 전선이 쳐지지 못한 상황에서도 ‘비정규직 철폐, 비정규악법 폐기’를 위한 공동행동을 구성하고 투쟁의 흐름을 굳건하게 이어갔다.

 

(5) 10여 년간 비정규노동자들의 치열한 투쟁으로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적인 쟁점으로 부각됐다. 그러나 ‘고용불안’과 ‘저임금’ 문제만이 집중적으로 부각됐을 뿐 비정규 노동자들의 노동자로서의 권리 문제는 제대로 사회적 의제화되지 못했다.

무엇보다 비정규직 노조의 조직률은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을 포함해도 3%에 불과한 실정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권리의 주체로 설 수 있으려면 가장 고통을 당하고 있고 자본의 착취가 집약되는 영세사업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한 전략적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정규직노조의 대리주의적 경향과 비정규직 노조의 정규직 활용론을 극복하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계급적 단결을 이루어 내야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

 

3) ‘노동운동 위기논쟁’과 ‘선진노사관계 로드맵’

 

(1) 비정규직 철폐를 요구하고 비정규직 입법 강행을 반대하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이 계속 고양되고 있을 2004년 8월 경에 ‘노동운동 위기 논쟁’이 다시 촉발됐다. 한 인터넷 매체의 적극적인 기획으로 촉발된 ‘노동운동 위기 논쟁’은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지만 노무현 정권의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과 전면적인 이데올로기 공세 - “고임금 정규직 노동자들의 배부른 투쟁”, “노동귀족”, “그들만의 노동운동” 등 -와 맞물려 진행되어, 노동운동 내부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파장을 낳았다. 뒤이어 2004년 하반기에 비정규직 노동자투쟁의 진전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간의 분할이 고착화’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나고, 연이은 ‘노동조합의 부패와 비리 사건’ 등이 터지면서 노동운동 내부의 위기감은 더욱 증폭되기 시작했고, 이와 더불어 ‘위기 논쟁’은 확대되었다.

 

(2) 2004년 하반기에 촉발된 ‘위기 논쟁’은 그것이 현실의 일정 부분을 반영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민주노조운동진영으로서는 매우 ‘수세적’인 논쟁이었다. 노동운동이 처해 있는 ‘위기적인 현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논쟁의 구도와 경과 자체가 그랬다.

위기논쟁은 한국의 노동운동 - 더 정확하게는 민주노조를 중심으로 한 전투적인 노동조합운동 - 을 ‘위기’로 진단하고, 위기의 원인을 노동운동 ‘내부’로 돌렸다. 민주노조운동이 낮은 조직률로 전체 노동자를 대표하고 있지 못하고 있고, 노동운동이 대기업 정규직 남성 노동자 중심으로 이루어진 결과 대기업 이기주의에 갇힌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 진단 속에서는 비정규직-정규직으로 분할 고착화시키고, 양극화시키는 근본적 원인인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구조조정, 노동유연화’의 문제는 은폐되고 말았다.

‘노동운동 위기논쟁’에 뒤이어 ‘사회적 교섭’이 강행되었고, 2005년 들어 ‘사회적 교섭’을 둘러 싼 노동운동 내 논란은 물론, ‘사회적 타협체제’ 구축을 둘러 싼 노사정간의 공방이 이루어졌다. 신자유주의와 노동유연화는 대세이고, 대중투쟁으로는 이 대세를 꺾을 수 없기 때문에 노무현 정권을 활용해서 노사정 사회적 합의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 쟁점이었다.

 

(3) 2005년 4월 국회에서 노사정 합의를 통한 비정규직 입법 처리가 무산되고, 6월 임시국회로 넘어가자마자, 노무현 정권은 곧바로 노동조합에 대한 ‘부패 비리 공세’를 전면화했다. 한국노총의 사무총장과 한국노총 복지회관 건립과정에서의 금품 수수문제로 한국노총을 압박했고, 현대자동차 노조의 ‘채용 비리’에 대한 전면적인 수사로 노동조합운동의 도덕성 그 자체를 공격했다. 한편에서는 비정규직 입법의 6월 임시국회 처리를 둘러싸서 임시국회 강행 처리냐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의 재논의냐의 공방이 이루어졌고,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조합의 도덕정 자체에 대한 공세를 통한 압박을 더욱 강화했으며, 동시에 덤프연대, 불법파견 노동자들의 투쟁, 울산SK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대응했다.

이는 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분리시켜, 정규직 노조는 ‘부패 비리’문제로 발목을 잡고,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이 전체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발전해 나가지 못하도록 하며, 동시에 노동조합운동의 상층부와 하부를 분리시켜 상층부를 ‘사회적 타협’의 구도 속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게 하기 위한 노무현 정권의 대노동 분할통제전략이었다.

 

(4) ‘노사정 대표자회의’를 통해 논란을 거듭하던 ‘선진노사관계 로드맵’이 2006년 9월 11일 정부-경총-한국노총간의 합의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2003년 9월에 노사정위원회를 중심으로 논의를 시작한지 3년만이었다. 민주노총은 들러리만 서다가 끝내 배제된 꼴이 됐다.

민주노총이 9월 19일 임시대의원대회를 통해서 ‘노무현정권 퇴진과 노사정대표자회의 용도 폐기, 그리고 한국노총과의 연대 파기’를 공식 선언했고, 11월 15일 총파업에 돌입했지만, 민주노총과 시민사회단체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선진노사관계 로드맵’은 2006년 말 국회에서 통과됐다.

9.11.합의를 선도한 한국노총과 경총, 그리고 노동부는 9.11.합의가 노사관계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고심 끝에 내린 결단으로 ‘사회적 대타협’이었다고 강변했고, 이에 대해 민주노총은 9.11.합의가 “민주노총이 빠진 밀실 야합”이고, “1,500만 노동자를 기만하고 노동권을 유린하는 폭거”이며 “노사관계 선진화를 정치적 흥정거리로 전락”시켰다고 규탄했다.

그러나 9.11.합의라는 노무현판 사회적 합의주의는 민주노총을 배제한 채 사회적 합의에 도달함과 동시에 그 생명을 다하게 됐다. 출범 이후 사회적 합의의 주체로 민주노총을 끌어들이려고 했던 노무현 정권의 시도는 이로서 막을 내리게 됐다. 노사정대표자회의를 통해 이루려고 했던 사회적 합의의 내용도 결국 노동자와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에 다름아니라는 점이 최종적으로 확인됐다. 1998년 1월에 이어 다시 한 번 들러리로 전락한 민주노총은 적어도 당분간은 어떤 명분으로든 노사정간 사회적 대화에 나서기는 힘들게 됐고 민주노총과 노무현 정부 간에 돌이킬 수 없는 대립적 관계가 고착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에게는 1998년 노사정위원회에 이은 두 번째의 쓰라린 경험의 반복이었다.

 

(5) ‘9.11.합의’는 민주노총이 처한 현실을 냉혹하게 가르쳐주었다. 한국노총처럼 ‘신자유주의의 하위 파트너’로 “책임 있게” 임하지 않을 때, ‘사회적 대타협’ 운운하던 정권이 정략적인 판단에 따라 얼마든지 민주노총을 버릴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내부 개혁’과 ‘민주노총과의 공조’를 외치던 한국노총도 자신의 조직 보존을 위해서는 공조의 파기만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의 대의와 권리를 헌신짝처럼 내팽겨 버릴 수도 있다는 점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결국 민주노총이 민주노조로서, 신자유주의에 맞선 대중적 교두보로서 자신이 서있어야 할 지점이 어디인지, 아래로부터의 대중의 동력과 힘에 기초하지 않을 때 상층으로부터의 교섭과 협상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확인했다.

 

4) 산별노조, 비정규직 조직화와 산별투쟁⋅산별교섭

 

(1) 2006년 말과 2007년 초에 걸쳐 금속연맹과 공공․운수4조직이 산별노조로의 조직 형식을 전환하거나 결의함으로써 민주노조운동은 산별노조 시대로 본격적으로 접어들었다. 이로써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 가운데 75%가 산별조합원으로 전환됐다. 물론 산별노조로의 조직 형식 전환이 그 자체로 산별노조 정착을 의미하는 것도, 노동운동의 민주적․계급적 발전을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산별노조로의 조직 형식 전환은 지난 수년간 위기에 봉착한 민주노조운동의 지평을 넓히고, 초기업단위 노사관계를 전면화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2) 2007년 조직형식을 전환한 산별노조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어느 정도 산별노조로 조직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이는 산별노조로 비정규 노동자를 직접 조직하는 것, 산별교섭을 통해 비정규 노동자의 교섭권을 확보하는 것과 맞물려 있었다. 복수노조가 3년 유예된 상황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3권도 부정됐는데, 산별노조가 기존에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에 교섭구조가 이원화되는 양상을 극복하여 단일한 산별 임단협으로 조직해 낼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또한 산별교섭구조를 확보할 수 있는지가 노사관계의 핵심적 쟁점으로 등장했는데, 사용자단체의 구성 및 이행, 그리고 산별최저임금과 비정규 문제 등과 관련하여 산별노조들이 산별중앙교섭을 시도할 수 있느냐가 중요해졌다.

이러한 요구에 대해 자본측은 산별교섭이 기업별 교섭보다 교섭비용이 덜 들고, 더 편하다면 언제든지 산별교섭에 응한다고 했고, 또한 자본측은 산별노조의 중앙지도부가 현장에 대해 확실한 통제력을 가지고 타협할 것을 요구했다. 여기서 산별노조 중앙지도부가 산별노조를 통한 계급적 단결, 아래로부터의 산별투쟁의 조직화를 통한 산별교섭의 강제 보다 위로부터의 교섭구조 확보에 더 큰 무게를 싣는다면, 산별노조로의 중앙집중화와 관료화의 문제가 쟁점으로 다시 등장하게 될 것이다.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산별노조로의 조직 형식전환을 통해, 민주노조운동의 제도화의 완성인가, 계급적 단결의 새로운 출발인가의 기로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3) 또한 2007년 산별노조로의 조직 형식 전환과 관련하여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지점이 금속노조의 직선제 실시였다. 금속노조는 2007년 2월 중순 대의원대회에서 산별노조의 첫 지도부를 직선제로 선출했는데, 금속노조는 새로 제정된 규약에서 “조합 내 모든 단체 교섭의 대표자는 위원장이 되며 기업 교섭단위에 교섭권을 위임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교섭권과 체결권, 파업권이 모두 위원장에게 위임되어 있어 위원장은 막강한 권한을 가지게 됐다.

위원장에게 교섭권과 파업권, 체결권 모두를 위임한 것은 자칫 자본의 대노동통제 구도와 맞물려 민주노조운동을 급속히 제도화시키거나 관료화시킬 수 있다. 따라서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통제를 위한 방안과 역량을 시급하게 준비해야 할 과제를 부여받게 됐다.

 

 

마치며

 

현 시기 한국의 노동운동은 1987년 6월 민중항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 그리고 96~97년 노동자총파업투쟁에 따른 계급역학관계 변화의 산물이고, ‘민주노조’의 대중동원력과 투쟁력에 기초하여, 민주화를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로 한정하려는 지배세력에 맞서 생존권과 민주적 권리를 중심으로 한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 투쟁해 왔다. 이러한 투쟁의 결과, 민주노조운동과 대중파업은 일반화됐고,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인 구심인 내셔널센터를 건설했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운동의 성장은 한편으로는 현장의 대중투쟁동력에 기초한 것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자본주의의 고도성장에 기반한 것으로, 1990년대 후반 들어 외환위기를 계기로 경제위기가 전면화되면서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로 전환되는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1990년대 초반 이후 한국자본주의가 세계 자본주의체제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자본의 축적전략의 변화를 모색해 온 지배세력은 IMF경제위기를 계기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노동유연화 공세와 개방화⋅민영화 공세를 전면화하게 되고, 이러한 자본운동 자체에 대한 대안적 전망을 가지지 못한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800만을 넘어 전체 노동자 가운데 55%를 차지하고 있지만, 비정규노동자들은 87년 이전에 노동자들이 처했던 저임금, 장시간 노동, 고용불안, 무권리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조운동 20년 성과가 과연 이것이냐 할 정도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수준은 총액임금을 기준으로 정규직 노동자 임금수준의 절반 이하에 그치고 있으며, 정규직 노동자의 대부분이 4대 보험의 적용을 받고 있는 반면 비정규직 노동자 중 극소수만이 4대 보험의 적용받고 있다. 임금노동자라는 이름으로 동일성을 부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의 극심한 임금격차를 보이고 있고, 나아가 80만 이주노동자와 여성 비정규노동자로 고통의 전가가 당연시되고 있다.

한국의 민주노조는 800만 비정규노동자들의 저임금과 고용불안, 무권리 위에 불안정하게 얹혀 있는 상황이고, 한국 자본주의 사회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간 분할 통제 위에 유지되는 상황이다.

 

또한 상시 구조조정에 따른 노동자들의 고용불안 때문에 노동현장에서는 실리적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 정리해고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행되는 구조조정이 현장의 단결보다 일자리 경쟁을 유발하고, 늘 현장에 드리워진 고용불안의 그림자는 노동자를 항상적으로 위축시키고 있다. 그 결과 집단주의보다 개인주의가, 너보다 내가 우선이 되는 팍팍한 현장, 정이 없는 노동현장이 되어가고 있다. 많은 조합원들이 노조와 회사를 동시에 거리두기 하는 이중 생존전략으로 버티고 있다.

 

노동자의 현실, 현장의 현실, 민주노총의 현실이 이러한데, 민주노조운동에 다가오는 과제들은 막대하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촉발된 세계 자본주의 위기가 가져올 계급간 대립의 격화와 더욱 거세어질 구조조정 공세, 한국 사회 전영역에 걸친 신자유주의 공세 전면화, 그리고 2006년 말에 비정규직 입법과 선진노사관계 로드맵이 통과되어, 향후 몇 년에 걸쳐 다시 노사관계와 노노관계의 격동적인 재편이 이뤄질 가능성 등, 민주노조운동진영은 변화하는 정세에 조응하여 다시 한 번 자신의 혁신을 통해서든 새로운 주체의 형성을 통해서든 민주적이고 계급적인 운동의 대중적인 교두보로서 스스로를 세워나가야 할 과제를 부여받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현차비정규직, 공장점거농성 풀던날 양재동에서(2010.12.09.)

12.09. 19:30 현차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공장점거농성을 풀던 날 양재동 현대차사옥 건너편에서는 "투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잠시 휴전일 뿐이고  '새로운 투쟁의 시작'이라며 촛불집회가 열렸다.

언 손에 움켜쥔 촛불만으로는 영하의 추위를 녹일 수는 없었지만,  '비정규직 철폐, 정규직화'를 바라는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뜨거운 연대는 힘겨운 추위를 견딜 수 있게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노동운동 내, ‘정파’는 어떻게 ‘정파’가 됐나

노동운동 내, ‘정파’는 어떻게 ‘정파’가 됐나

 

 

문제는 ‘정파’다?

 

‘정파’에 대한 융단 폭격이 끊이지 않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이 직면한 ‘총체적 위기’의 원인이 민주노조 내 ‘정파’때문이라는 비판들이 그것이다. 물론 이런 진단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다시 ‘정파’의 문제가 불거진 것은 지난 민주노총의 ‘성폭력 사건’과 지도부의 총사퇴로 민주노총의 위기 논란이 본격화되면서 이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래 민주노조운동 역사에서 최대의 위기” 상황과 맞물리면서 위기의 주범으로 민주노조운동 내 정파의 ‘존재’, 정파간 ‘갈등’과 ‘나눠먹기’가 지목됐다.

 

내놔라하는 민주노조운동의 전현직 지도자들의 입에서, ‘정파’의 폐해를 우려하고 질타하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노동운동 내 ‘정파’는 “이념도 없는 파벌”이고 “내용도 없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재창출하는 도구”이며, 오로지 “정파간 타협을 통한 미봉책, 땅따먹기식의 정파싸움, 서로의 발목을 잡으면서 민주노총의 힘을 소진”시켜 버리는 집단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정파의 ‘논리’는 “자기 식구 감싸기”에 불과하며, 굳건하고 고질적인 정파구도는 이제 “권력이 됐고 기득권이 되어”버려서, 대중조직인 민주노총은 “정파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대중조직의 주요 집행단위의 결정을 무시하고 자기입장을 가지고 흔들면 흔들리는 조직”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탄식이 뒤이어졌다.

 

그래서 “정파들의 민주노총에서 조합원의 민주노총으로 거듭나기 위해”, “정파의 폐해부터 투명하게 공개”해서 정파를 철저하게 “혁신”하거나 “해체”시켜야 하고, 아니면 “한국 노동운동을 재생시키려면 제대로 된 정파를 (재)형성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덧붙여진다.

 

‘정파’는 노선투쟁의 역사적 산물

 

물론 민주노조의 위기의 원인을 다 ‘정파’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모든 정파가 다 똑같은 수준에서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도매금으로 평가할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피할 수는 없다. 또 그래서도 안된다. 지난 20여 년간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에서 ‘정파’의 역할은 중요했기 때문이다. 중요했기 때문에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는 곧 지난 20여 년간의 ‘정파운동의 위기’이며, 바로 ‘정파운동의 위기’가 민주노총을 총체적으로 무력한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정파’ 자체에 대한 진단과 평가가 마녀사냥식으로 이루어져서는 곤란하다. 마치 자신은 정파적 질서와 책임으로부터 무관한 듯이 초월해서 양비론적으로 훈계하는 방식으로 진단과 평가를 하는 것은 더 더욱 곤란하다. 자칫 ‘정파’가 노동운동 내 노선투쟁의 역사적인 산물이고, 노동운동이 합법칙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의 일부라는 점을 은폐하거나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정치적 허무주의를 조장함으로써 노동운동을 탈정치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은 정파의 ‘폐해’에 대한 진단과 평가가 아니다. 정파의 ‘실체’, 정파의 ‘노선과 입장’, 정파의 ‘실력’을 더욱 분명하게 대중적으로 드러내 놓고 공론화하고 실천적으로 검증하는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의 위기가 ‘정파운동의 위기’로부터 비롯되고 있다는 진단은 민주노조운동이 정파의 ‘발전’때문이 아니라 정파의 ‘미발전’ 때문에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진단이기도 하다. 목욕물을 버리려다 그 안에 있는 아이까지 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정파’는 어떻게 ‘정파’가 됐나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은 정파의 탄생과 발전, 그리고 그 분화 과정과 분리할 수 없다. 물론 1987년 이전에도 반독재 민주화투쟁과정에서 “통일과 민족 문제 중심으로 변혁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인가”, “남한 내 계급 문제를 중심에 둘 것인가”를 둘러싸서 ‘민족해방파(NL)’와 ‘민중민주파(PD)’ 등의 정파가 형성됐고, 여전히 이 두 흐름이 지금까지 노동운동 내에서 커다란 정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민주노조운동 내에서 ‘정파’가 ‘정파’로서 형성⋅발전⋅분화되어 온 것은 1990년대 초반 이후였다.

 

1990년 전노협이 출범한 이후 ‘전노협 사수’를 둘러 싼 두 차례의 총파업을 거치면서, ‘노동운동 위기론’이 전면적으로 제기됐다. ‘전투적 조합주의’를 둘러싼 노동운동 위기 논쟁 과정에서 주로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사회발전적 노동운동론’, ‘진보적 노사관계론’ 등이 제기됐다. 노동운동의 목표를 둘러싸서 변혁적인 ‘노동해방’의 기치를 계속 내세울 것인지, 변혁노선을 포기하고 체제내적 노동운동을 해나갈 것인지가 핵심적인 쟁점이었다. 그리고 이 때 형성된 노동운동의 목표에 대한 두 가지 노선적 경향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어 민주노조운동 내에서 ‘노선’의 문제가 본격화된 것은 민주노총의 출범 직후 1기 집행부가 내건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서였다. ‘사회개혁적 요구’를 전면에 내걸어 ‘사회적 합의’를 통해 국민적 지지를 획득해야 한다는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노선에 반대하며, 노동자의 ‘계급적 요구’와 ‘계급적 단결’을 통해 사회를 변혁시켜 나가야 한다는 ‘계급적 노동운동’노선이 제기됐다.

 

이러한 노선적 대립은 1996~97년 노동법개악 저지총파업 이후 총파업에 대한 평가와 노동자정치세력화를 둘러싼 입장의 차이로 분화되었다. 노동법개악저지 총파업의 패배가 노동자출신 국회의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 세력들은 이후 ‘국민승리21’을 거쳐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 건설로 나아갔다. 이에 대해 노동자민중의 전면적인 투쟁으로 진전시키지 못한 지도부의 ‘국민주의적 노선’과 ‘유연한 전술’이 패배의 원인이었다고 평가한 세력들은 변혁적인 계급정당 건설로 나아갔다. 민주노조운동 내 노선의 차이와 분화가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둘러 싼 차이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민주노조운동 내에서 ‘정파’간 분화와 갈등이 본격적으로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 과정은 1998년 1월 정리해고제 직권조인 이후 거세져가는 정권과 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구조조정 공세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둘러싸서였다. 특히 당시 김대중 정권의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할 지 여부를 둘러싸서 정파간 입장의 차이와 대립은 첨예해졌다. 물론 겉으로는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의 차이로 드러났다.

그러나 그 근저에는 크게 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구조조정을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대세라고 보고, 자본의 틀 내에서 사회적 합의를 통해 가능한 방안을 모색해보자는 입장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구조조정 그 자체에 맞서 비타협적인 투쟁을 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으로 대별되었다. 현실에서는 이 두 가지 모두 현실화되지 못했고, 그 결과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는 더욱 깊어지고 확장됐다.

 

이와 더불어 민주노조운동의 전략적 과제의 하나인 ‘산별노조’ 건설을 둘러싸서도 산별교섭과 조직형식 전환 중심으로 산별노조를 건설해 나간 입장과 아래로부터의 계급적 산별투쟁을 통해 산별노조를 건설해 나가자는 입장이 대별되었는데, 이 역시 두 주장이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는 민주노총의 ‘사회연대전략’을 둘러싸서, 사회연대전략을 통해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과 ‘정규직 노동자 양보론’으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명박 정권 아래서 민주당까지 포괄하는 반MB연합을 결성하자는 주장과 반MB연합은 민주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의 연장이며 반신자유주의 진보대연합을 결성해야 한다는 주장 등이 서로 논란을 벌이고 있다.

 

민주노조운동 전체가 ‘반자본’ 정파로 서나가야

 

이렇게 민주노조운동 내 정파는 우파-중앙파-좌파의 3분립 구도로 형성⋅분화되어 왔다. 정파의 역량과 실력의 한계 때문에, 또 정파운동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정파적 이기주의나 종파주의적 활동방식 때문에, 정파 운동이 때론 대중조직운동에 폐해를 끼치고 질곡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정파’의 형성과 발전과 분화는 민주노조운동의 질적 발전을 위해 피할 수 없는 길이다.

 

정파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전망과 주장을 하는 정파냐’, ‘어떻게 활동하는 정파냐’, ‘어떻게 정치적 책임을 지는 정파냐’로 논의 지형을 구체화시켜야 한다. 그래서 정파‘다운’ 정파로 서나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운동 전체가 한국사회에서 ‘반자본’ 정파로 굳건하게 서나가야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펌] 제2의 촛불은 비정규 철폐 투쟁으로 - ‘만인 선언, 만인 공동회의’ 준비하며

촛불 탄생 실화와 배후 & 우리의 꿈

제2의 촛불은 비정규 철폐 투쟁으로

‘만인 선언, 만인 공동회의’ 준비하며…"9일, 우리를 잡아가라"

 

송경동 / 시인

<레디앙> 2008년 09월 05일 (금) 07:43:47

 

 

“한가위 전에 기륭, KTX, 이랜드, 성신여대, 코스콤, GM대우, 도루코, 콜트콜텍, 하이텍알시디코리아, 재능교육, 광주시청비정규직… 그 모든 비정규 노동자들을 일터로 보내줄 수 있다면… 890만 비정규노동자들에게도 눈물바람 없어도 되는 따사로운 한가위가 될 수 있다면.”

 

구로동 후미진 골목과 촛불

 

 

4월, 광화문 촛불이 시작되기 전 나는 서울 구로동 디지털산업단지 내 후미진 골목 속에 있는 기륭전자에서 몇 사람들과 함께 비정규직 철폐의 촛불을 켜고 있었다. 처음엔 누구도 잘 주목하지 않는 작은 촛불이었다. 작을 땐 열 명이 채 안되는 이들이 모여 멋쩍어하며 켰다.

 

며칠 후 광화문 촛불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함부로 생각하고 재단했지만, 하루 나갔을 때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반성했다.

 

그때부터 구로동 촛불문화제를 마치고 난 저녁 10시 경이면 늦더라도 광화문으로 향했다. 광화문은 이제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시작해 나도 광화문 네거리를 밤새 떠돌다 먼동이 터오를 때면 다시 돌아왔다. 때로는 해산이 끝나고도 무슨 미련이 남아 프레스센터 앞 노상에 앉아 있다 돌아오기도 했다. 잠시 눈 붙이고 나면 다시 기륭으로 향했다. 그렇게 2008년 봄과 여름이 가고 가을 초입이 되었다.

 

그 사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어쩌다보니' 라고 늘상 표현하는데, 정말 어쩌다보니 ‘기륭비정규여성 투쟁 승리를 위한 공동대책위’의 집행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기륭여성노동자 투쟁 1000일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 3월말부터 공대위를 꾸리는 작업부터 주도적으로 함께 했으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절반은 기륭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과 한 몸이 되어 버렸다. 5월 11일 하이 페스티벌 마지막 행사가 열리는 시청 앞 광장 조명탑에 그들이 오를 때, 5월 26일 다시 구로역 CC카메라탑을 오를 때, 다시 6월 11일 공장 옥상을 점거하고 전원 무기한 끝장단식을 들어갈 때, 그리곤 이제 단식 83일차가 되는 오늘까지 그들, 기륭 동지들과 한 몸이 되어, 편파적으로 움직였다. 기륭 동지들을 닮아 시시때때로 눈물나던 날들이었다.

 

목숨 건 투쟁은 동지를 불러모으고

 

비정규 투쟁은 쉽지 않았다. 특히 기륭 투쟁은 3중고, 4중고의 투쟁이었다. 불법파견 판정을 받고도 부당해고당했지만 대법에서도 지고 말았다. 처음부터 법외투쟁일 수밖에 없었다. 3년여를 지나오며 사측은 대부분의 라인을 중국으로 이전해 버렸다.

 

고용을 받아줄 공장이 없다는 얘기 앞에 우리 쪽 사람들도 오히려 수긍하는 쪽이었다. 더더욱 지금의 최동렬 회장은 기륭을 인수한 지 6개월이 채 안되는데 왜 자기에게 모두 책임지라고 하냐고 했다. 타당한 이야기일 수 있다고 우리 쪽 사람들도 눈치를 살폈다. 거기다 남은 조합원들도 생계에 나가 있는 사람들을 빼면 10명이 전부였다. 위로금이라도 받을 수 있으면 다행인 투쟁이었다.

 

하지만 기륭 여성 비정규직 동지들은 최선을 다했다. 딱 하나 빼놨던 것, ‘죽음을 거는 투쟁’까지를 선택했다. 그 완강함과 진정성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들기 시작했다. 어느 틈엔가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2008년 상반기 비정규투쟁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몇 명이 외롭게 지켜왔던 농성장엔 이제 나도 모르는 얼굴들이 태반이다. ‘대학생 릴레이단식단’이 들어와 자신들이 주인이 되어 움직인다. 10개 단체나 모임들이 주도해서 스스로 ‘기륭을 사랑하는 네티즌연대’를 만들고 독자적으로 사업들을 만들어 간다.

 

근자엔 기륭의 주거래사인 미국 시리우스사 공략을 위한 원정투쟁단 보내기 기금 모금 사업을 펼치고 있다. 뉴욕 타임즈에 1억 짜리 광고를 네티즌 모금을 통해 달성해 보겠다고 한다. 가히 제2의 기륭 공대위가 되고 있다. 광화문 촛불 96차와 103차, 그리고 105차 촛불문화제가 기륭 공장 앞에서 열렸다.

 

광화문 촛불의 수수께끼

 

그러다 보니 근래 주변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기륭이 광화문 촛불과 만나게 되었는지를 묻는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어떻게 비정규직 문제를 가지고 네티즌들과 연대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묻는다.

 

 

기실 광화문 촛불은 그간 민중민주 운동을 해왔던 이들에게는 수수께끼와 같은 투쟁이었다. 전혀 의외의 조직 경로와 여타 전투적 운동들을 넘어서는 완강함, 모두가 주체가 되어 움직이는 운동, 지도부가 없는 상태에서도 창조적으로 자기를 생성해 가는 새로운 자율적 운동 앞에서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이런 평범한 촛불들과 어떻게 만날 것인지가 관건이었지만 쉽지 않았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광화문 촛불운동을 처음에 시작했던 사람들을 만나자 의문이 풀렸다. 우연히 4월말 처음 오프라인 집회를 기획했던 네티즌들을 만났다. 촛불이 튀어나온 것은 4월 말이었지만, 나름 지난한 준비가 있었다.

 

처음 아고라 토론방을 중심으로 광우병 소와 관련된 문제 제기를 꾸준히 올리는 이들이 있었다. 금세 여론이 형성되었다. 광우병 문제만이 아니라 이 사회의 민주주의와 관련한 문제 제기였다. 오프라인에서 갈 곳을 딱히 찾지 못한 수많은 민주 시민들이 토론과 소통에 참여했다.

 

자연스레 까페 모임들이 제안됐고, 너댓개의 소통 까페들이 조직되었다. 네티즌들은 이 까페 공간을 통해 다양한 자체 학습과 공동 행동들을 실험했다. 리플 달기부터, 사이버 리본달기 등등. 어느 정도 조직력이 형성되자 자신감을 가지고 다른 동호회 까페들 조직에 들어갔다.

 

촛불 탄생의 기원 '실화'

 

목적의식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결집해 있는 생활 관련 까페들에 접근해 갔다. 유명한 패션까페, 음식까페, 유명 연예인 팬까페들이었다. 그곳에서 읽을만한 글들을 꾸준히 올리며, 베스트 만들기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과 함께 다시 초보적인 수준부터 사이버 공동행동을 실험, 조직해 갔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일상에서 관계와 생동하는 삶을 느낄 수 없었던 수많은 이들이 밥상머리에서조차 죽음을 느껴야 한다는 현실에 분노했다.

 

수위가 점점 높아져 위력적인 사이버행동들이 진행되었다. 이제 거리로 나설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날짜를 정하고, 전체 까페들에 공지를 올렸다. 4월 26일, 광화문에서 만납시다. 조직 확인을 해보니 1만에서 3만이 확인되었다. 누가 주역이 아니었다. 모두가 놀라면서 2008년 광화문 촛불이 시작되었다.

 

모든 새로운 운동은 물론 정세가 밑바탕이 되겠지만 의외의 정성과 노력, 믿음과 꿈에 의해 실현된다. 사이버라고 무슨 신화적인 관계가 존재하는 건 아니다. 일상의 연장일 뿐이다. 사이버 영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소통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편지를 통해 오가듯 오갈 뿐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거기도 유령이 아닌 사람이 있을 뿐이다 라는 생각. 만나고자 하면 만날 수 있다는 믿음. 우리 모두는 평범하다는 사실. 결핍이 그리움과 새로운 만남과 새로운 존중을 연다는 믿음을 가졌다. 서로 외롭고 소외된 존재들이라는 사실. 그런 소외된 현실이 있기에 우리는 서로 소외되지 않는 만남을 갈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었다.

 

광화문에서 갈 곳 없는 사람들

 

비정규 투쟁은 2중 3중으로 소외된 투쟁이었다. 당연히 수많은 이들의 연대와 힘이 필요했다. 그 필요를 향한 간절함이 촛불 네티즌들을 만날 수 있게 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어디로도 갈 곳이 없고, 가고 싶은 곳이 없는 뿌리뽑힌 마음으로 새벽을 맞는 사람들의 외로움과 간절함은 기륭여성비정규직들이 고공에서, 공장 앞에서 1100일씩 노숙하며 가져온 외로움과 간절함과 같은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내용적으로도 같다. 둘 다 일부 자본들의 초과 착취를 위해 기획된 일이다. 그래서 촛불이 막 시작되던 5월 11일, 서울 시청 광장 조명탑에 올랐을 때 허공에 내걸은 플래카드에도 그렇게 썼다. “일터의 광우병, 비정규직 철폐하라”

 

그때부터 우린 광우병 촛불과 비정규직 촛불의 만남을 염원했다. 2차 고공농성 당시 구로역 광장에서 자연스런 지역 촛불을 켜들었다. 7월 초 아예 1040인 동조단식단을 조직해 시청 광장으로 나아가 청와대로 진격하는 희한한 선도투를 결행했다.

 

우리가 광화문으로 나선 수많은 연약한 촛불 소녀들, 촛불 시민들을 함께 동지로 삼고 도울 수 있는 길은 촛불들의 배후에는 비정규직 투쟁도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일이었다. 6월 촛불의 배후에서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물론 주체적 준비는 충분치 않았지만 기륭 동지들과 기륭 공대위는 끊임없이 그런 입장과 의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광화문 투쟁만큼이나 절박하고 끈질기며, 완강하게 투쟁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언젠가 광화문 촛불들이 정신 머리 없고 무책임하며 이기적인 운동권들 탓에 동력을 잃고 실망하며 갈 곳을 잃을 때 작은 곳이지만 올 곳이 있다는 것을 만드는 투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광화문에서 길을 잃었을 때

 

물론 그런 씁쓸한 전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자연스레 그런 마음이 한켠에 남는 것은 이 시대의 문제이지,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여하튼 광화문 촛불도 시들해지고, 기륭 투쟁도 어려워지던 때, 우리는 이제 활력과 분노를 잃지 않고 있는 광범위한 촛불들과 수평적으로 만나가자는 기조를 택했다. 그리고 시도했다. 이미 네티즌들도 기륭을 알고 있었다. 미안해 했다고 한다. 미안한 얘기지만 광화문을 중심으로 거대한 촛불이 연일 타오를 때는 듣는 시늉도 않던 광우병 국민대책회의에서도 요청을 받아 주었다.

 

 

96차 촛불과 103차 촛불, 105차 촛불이 구로동의 조그마한 공단 골목 안에서 지펴졌다. 더 이상 많은 수도 아니었다. 갈 곳을 잃어버린 촛불들이 조금씩 모여 들었다. “기륭이 아니었으면 오늘 평일 촛불이 꺼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으며 마음 서늘했다.

 

마지막 촛불을 지키는 이들은 두 부류였다. 마음이 강건한 숨은 일꾼들이거나, 정말 갈 곳 없는 이들이었다. 기쁘게 기륭에서는 이 두 부류의 분들을 만나게 되었고 지금껏 여러 도움들과 나눔을 가지고 있다. 이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광화문 촛불의 마지막 지킴이들이었다.

 

가슴 아픈 건 후자의 분들이었다. 우린 수많은 운동 과정에서 얼굴은 다르지만 성정은 말할 수 없이 착한 그들을 많이 보아 왔다. 의식과 생활의 간극 사이에서 안주하는 삶을 잃어버린 수많은 이들. 말하자면 허세욱 열사와 같은 분들이었다. 그보다도 어렵고 외로운 삶 속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KBS 앞에서의 노숙도 힘들어졌을 때 이 분들이 기륭 농성 천막에서 며칠을 기거하기도 했다. 아무도 그들에게 무슨 일을 하시는 분들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냥 농성장 앞 밥집 아주머니에게 얘기해 두었다. 누구든 식사를 달라고 하면 묻지 마시고 밥을 내주시고 수량만 적어놔 달라고. 그게 우리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네티즌 사이버 행동이 언론보다 더 큰 힘 돼

 

이런 네티즌들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기륭 투쟁의 전기를 맞기도 했다. 그들이 조금씩 기륭 비정규직 문제를 가지고 사이버 상에서 움직여주는 힘이, 그간 여러 언론들에서 조금씩 기륭 문제를 다루어주었던 것보다 훨씬 큰 힘을 주었다.

 

그들은 기륭 문제를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국제적인 투쟁으로 만들어 주었다. 기륭의 주 거래사인 미국의 시리우스사에 대한 항의 메일 조직, 자발적 릴레이 동조단식 조직 등은 그간 기륭 투쟁이 사측과 사회를 향해 해왔던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타격을 넘어 자본 타격의 실마리를 풀어 주었다.

 

그 분들은 광화문의 상징들을 기륭으로 불러 주기도 했다. <아프리카 TV>가 자발적으로 들어와 나흘간에 걸쳐 기륭 농성장에 상주하며 일상을 네티즌들에게 송출해 주었다. 네티즌들을 따라 <칼라TV>가 들어오고, '촛불다방'이 들어오고, '다인이 아빠' 차가 들어왔다. 며칠 전에는 80그릇의 삼계탕을 끊여 주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그 분들이 기륭 농성장의 주인이 되었다. 명색이 집행위원장이라지만 사실 그 분들 중 몇 분 빼놓고는 인사도 나눠보지 못했다. 광화문 촛불 대열에서 그랬듯이, 나도 그냥 기륭 농성장을 찾은 한 사람일 뿐이었다. 누구도 그들을 통제하려 하거나, 지도하려 하거나, 질서지우려 하거나 지휘하려 하거나 통계내려 하지 않았다. 작은 대추리처럼, 작은 광화문처럼 늘 농성장은 편했고, 모두가 주체였다.

 

물론 기륭에서의 경험은 작은 실험일 뿐이다. 아직도 진행 중인 시도일 뿐일 수도 있다. 이런 시도들과 실험, 새로운 만남들이 곳곳에서 진행 중임도 알고, 그렇게 이어져 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정형화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기억이고, 만남이고, 투쟁일 뿐이다. 투쟁이 이어져 나간다면, 이런 만남은 지속될 것이다. 투쟁이 사그라지면 만남도 사그라질 것이다. 그리고 사그라져도 좋을 것이다.

 

기억, 만남 그리고 투쟁

 

필요한 것은 믿음이며, 삶일 뿐이다. 삶이 있다면 만나질 것이고, 삶이 없다면 쓸쓸해질 것이다. 그냥 이렇게 무턱대고 시적으로 말해 버리고 말고 싶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투쟁이라고. 맨날 박터지며 소리지르며 싸우기만 하는 투쟁만이 아니라, 이 부정한 구조와 체재와 제도를 넘어서는 꿈을 꾸는 운동이라고.

 

며칠 전 회의에서 기륭공대위는 기륭 단사 문제를 넘어 비정규직을 만들고 은폐하며 양산하는 이 사회 구조 자체를 문제삼는 투쟁으로 나아가자는 결정을 내리고,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만인 선언, 만인 행동’에 모두가 힘모아 나서자고 결의했다.

 

제2의 촛불을 비정규직 철폐 투쟁을 통해 만들어 보자고 얘길하고 있다. 촛불 시민들에게 함께 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다시 노래하자고, 그 선봉에 890만 비정규직들과 이 시대의 양심들이 함께 떨쳐 일어서자고 호소하고 있다.

 

이 모든 게 꿈일 수 있다. 하지만 꿈은 꾸는 순간, 그만큼 이루어질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꾸지 않으면 실현 가능성 0%이지만, 꾸는 순간만큼은 100%의 고밀도다. 그 밀도가 새로운 현실을 만들 수도 있다.

 

2008년 촛불로 나섰던 수많은 이들을 유령으로 만들고, 신화화, 우상화 시킬 필요없다. 그들도 890만 비정규세상이 싫어 나왔던 것이다. 일상이 죽음으로 점철되는 신자유주의 세상이 싫어 나왔던 것이다. 새로운 이들을 만나고 싶어서 나왔던 것이다.

 

견결한 이들을 만나고 싶어 나왔던 것이다. 반성하며 나왔던 것이다. 정말 헌신적이고 살아 있는 운동이 있다면 그 운동에 함께 하고 싶다고 그렇게 목청껏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외쳤던 것이다.

 

실망한 촛불에게 말걸기

 

자, 이제 공안탄압과 후퇴해버린 사회운동들에 실망해 실의에 빠진 ‘위대한 촛불’들에게 누군가 말들을 걸어 갈 때다. 우리 서로에게 말들을 걸어 갈 때다. 운동이 폭발할 때 그 파도 위에서 파도타기를 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정세를 타고 올라 앉아 묘수를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새로운 정세, 아직 오지 않은 새로운 운동의 계기, 지점을 만들어가는 운동을 안 보이는 곳에서부터 끌어올려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야 한다. 87년 6월 21주년을 얘기하는 목소리는 그렇게 많은데, 왜 87년 7~9월을 만들자는 목소리들은 소수인가? 왜 6월의 이데올로기에 7~9월이 밀리는가. 왜 소수 정규 세상에 다수 비정규 아픔들이 밀리는가?

 

명백한 객관 사실보다 꿈을 더 이야기한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엄혹하고 폭력적이며 부조리한 세상이라면 있는 객관에 대한 쓸데없는 재단과 평가, 인정보다는 그 시간에 신기루 같을지라도 더 많은 새로운 꿈이나 꾸며 살고 싶다.

 

차라리 실패하는 삶을 사는 것이 이 사회에서는 조금은 더 양심적인 일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모든 것을 버리는 게 실패는 아니라는 것 쯤이야 모두가 알겠지. 타협하지 않고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길과 대지가 이 세상엔 얼마든지 있다.

 

이제 모두가 떨쳐 일어서고 있다. 제2라운드가 시작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와 싸우고 있는 것일까? 이명박과 한나라당, 그렇다면 지난 시기 노무현당과는 안 싸우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누구와 어떤 정신으로 싸워나갈 것인가? 우리는 우리와 싸운다. 나는 나와 싸운다. 소심한 나와.

 

 

제발 우리를 쥐잡듯 잡아가다오

 

이명박 대통령에게 부탁한다. 제발 9월 9일 서울역 앞에서 890만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나서는 우리를 쥐잡듯 잡아다오. 제발 한번만 더 우리의 동지, 우리의 배후가 되어다오.

 

참, 기륭 김소연 분회장 단식이 오늘로 87일째다. 응급처치로 링겔을 가끔씩 맞으니 단식이 아니란다. 시시때때로 눈시울이 붉어지는 이 바보야. 정말 죽어라는 소리인지. 참 무감하다. 이 사회가. 그리곤 이제 며칠 후면 한가위란다. 한가위란다.

 

* * *

 

비정규직 노동자들 투쟁 일정

 

9월 5일, 금, 저녁 7시, 이랜드 문화제 (시흥집중)

9월 5일, 금, 저녁 7시, 기륭 네티즌 문화제

 

9월 6일, 토, 저녁 7시, 기륭 문화제

9월 6일, 토, 저녁 7시, 이랜드 상암 촛불문화제

9월 6일, 토, 저녁 7시, 철도 노조 촛불 문화제(촛불 집중)

 

9월 7일, 금, 저녁 7시, 이랜드 문화제(시흥 집중)

9월 7일, 일, 저녁 7시 KBS

 

9월 8일, 월, 저녁 7시, 기륭문화제

9월 8일, 월, 저녁 7시, 이랜드 문화제(홈에버 면목 집중)

 

9월 9일, 화,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 1차 행동, 서울역

 

9월 10일, 수, 오후 4시~, 기륭 일일 주점(용산 철도 웨딩홀)

9월 11일, 목, 기륭 네티즌 문화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펌] 뜨거운 가슴으로 돌아보고, 차가운 이성으로 봐야 할 뉴코아 합의서

뜨거운 가슴으로 돌아보고, 차가운 이성으로 봐야 할 뉴코아 합의서

[기고] 지못미, 뉴코아 노조

오도엽(작가) / <참세상>2008년09월08일 0시47분

 

8월은 끔찍했다.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싸움이 천일하고도 백일이 넘어가고, 김소연 분회장은 차마 기록하기조차 두려울 정도의 시간을 단식으로 항거하고 있다. 새마을과 KTX 승무 노동자가 서울역 40미터 철탑에 고공농성에 들어가고 부산에서도 단식농성을 시작하였다. 강원도 문막의 도루코 비정규 노동자도 정문 앞에 철탑을 세우고 목이 빠져라 공장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충청도 오창의 하이텍씨알티코리아 노동자도 공장에 천막을 쳤다. 길게는 삼천일 이상을 거리에서 싸우는 노동자들이다.

 

생계를 잃은 노동자에게 하루란 목숨이 달린 시간이다. 이들 노동자를 거리로 내몬 사업주들은 법원에서 부당해고와 불법파견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법은 노동자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사업주들은 아직도 공장을 돌리고 주식과 부동산 투기를 통해 이익을 취득하고 있다. 하지만 법으로 복직 판결을 받은 노동자는 공장 앞에서 한뎃잠을 자야하는 비극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8월의 무더위보다 끔찍하고 잔인한 현실 앞에서 분노마저 타버려 가슴 속이 하얀 잿가루가 되었다.

 

쉽게 뉴코아 합의를 이야기하는 언론과 사람에 가슴이 아팠다

 

끔찍한 팔월의 마지막 날을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뉴코아 노동자들의 협상타결 소식이다. 사백일이 넘는 뉴코아 노동자의 투쟁이 끝났다는 말에 기뻐 만 할 수 없는 협상안을 들여다보고 어금니를 으스러지게 꽉 깨물어야 했다. 이것은 사업주가 사백일 넘게 싸워온 뉴코아 노동자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내용이었다. 노동조합과 노동자를 협상의 대상은커녕 사람으로 보지도 않는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와 사업주의 관계가 아니라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주가 노예에게 가하는 채찍만큼 가혹하였다.

 

뉴코아 노동자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보내고 싶었다. 당신들이 이런 사업주와 400일 넘게 싸운 게 얼마나 힘들었으며 위대한 몸짓이었는지 뜨거운 가슴으로 보듬어 주고 싶었다. 당신들의 가슴에 노예주의 채찍에 맞아 깊게 생긴 생채기를 어루만져주고 싶었다.

 

신문과 인터넷 언론을 뒤적이며 분노를 하였다. 보수언론은 싸우는 노동자의 어리석음을 욕하고 있고, 진보언론은 그런 협상안에 도장을 찍은 안타까움과 함께 ‘백기투항’이니 ‘굴복’을 들이대며 또 한 번 뉴코아 노동자에게 채찍을 내리치고 있지 않는가. 한 진보 인터넷 언론에서는 인터뷰이를 밝히지 않은 채 따옴표를 쳐서 “뉴코아노조 간부들이 자기 개인의 것을 지키기 위해 노조를 팔아넘겼다”는 말을 서슴없이 기사로 내보냈다. 같은 기사에 뉴코아노조 상급단체인 서비스연맹 위원장의 목소리로 “이랜드일반노조의 파업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그것도 ‘막대한 영향’이라는 기사를 썼다.

 

지난해 여름 뉴코아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싸움을 위해, 외주화 저지를 위해 정규직의 기득권을 다 버리고 싸운, 그것도 처절하게 434일을 싸운 그 소중한 흔적은 다 지우고 가려한다. 상급단체는 다른 사업장에 ‘막대한 영향’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 싸움을 지켜주지 못한 반성이 앞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개인의 것을 지키기 위해 노조를 팔아넘겼다’는 코멘트를 딸 것이 아니라 뉴코아 노동자들이 싸우고 있는데 상급단체가 슬슬 꼬리를 뺀 정황을 먼저 다루고 지적해야 옳지 않는가. 노사 합의문의 도덕적 한계를 지적하는 부분에서 ‘개인의 손해배상과 가압류만을 해결하고 노조와 연대조직의 손해배상은 모른 체했다’는 지적이 있다. 노동자들의 피해를 막으려고 서비스연맹도 민주노총도 만든 것이다. 당연히 상급단체에서 그 문제는 싸워야 하고 풀어야 할 문제이지 뉴코아 노동자를 평가하는 도덕의 잣대는 아니다.

 

말하고 싶다. 뉴코아노조의 정규직 노동자만큼만 다른 정규직 노동자들과 상급단체들이 싸웠더라면, 아니 그 절반이라도 싸웠더라면 최소한 기륭전자의 김소연 분회장이 80일이 넘는 단식을 하는 일은 이 땅에서 없었을 거다.

 

지난 금요일 기륭전자 단식장에 갔더니 지금 단식을 중단하면 도루코 노동자의 싸움도 영향을 미치는데 어찌 멈출 수 있겠냐는 말을 들었다. 어떤 기사에서는 “뉴코아 노사의 합의가 이들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당장 뉴코아노조와 함께 파업을 시작한 같은 이랜드그룹의 유통업체 홈에버의 비정규직 문제도 직격탄을 맞게 됐다.”라고 썼다.

 

과연 홈에버 노동자는 어떨까? 추석맞이 집중투쟁을 하는 홈에버 상암점을 찾아갔다. 이랜드 노동자의 얼굴을 보았다. 겉으로는 다르지 않았다. 아니 더욱 여유로운 모습이다. 이남신 이랜드 일반노조 수석부위원장은 직격탄을 맞을 걱정보다는 뉴코아 간부들이 이 힘든 시간을 어찌 이겨낼 것인가를 고민하고, 하루빨리 만나 함께 풀고 싶다는 동지의 애정이 담긴 걱정을 하였다. 협상에서 물론 영향이 있겠지만 이랜드 자본이 얼마나 악랄한지를 보여주었기에 싸움의 정당성과 도덕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어 우려만 하지는 않았다.

 

맞다. 회사와 합의한 내용 때문에 가슴이 아팠던 것은 아니다. 너무도 쉽게 합의내용을 이야기하고 재단하는 언론과 사람들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노동조합의 항복문서였다는 표현에서 다른 장기투쟁사업장에 미칠 파급 효과를 들이대며 비판하거나 안타까워했다. 그 마음은 이해하면서도 화가 났다. 뉴코아 노동자의 434일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루를 싸웠는지 백일을 싸웠는지 천일을 싸웠는지 숫자로 계산하는 일만큼 서러울 때가 없다. 이 숱한 날들이 어찌 노동자가 싸운 날짜이겠는가. 사업주가 싸우게 한 날짜이자 버틴 날짜이지. 노동자에게 그것도 비정규 노동자에게는 단 하루만 일을 하지 않아도 목숨을 내놓는 일과 다르지 않다. 노동자가 싸우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도 질기게, 끈질기게 싸워야 얻을 수 있다. 그래야 임금의 노예가 아닌 사람이 될 수 있다. 알면서도, 노동자에게 이 시간은 죽기보다 어려운 시간이기에 쉽게 말을 할 수가 없다.

 

인주가 아닌 자신의 피로 도장을 찍은 뉴코아 합의서

 

뉴코아 노동자의 사백일이 넘는 항거를 돌아본다. 그 항거의 순간순간을 뉴코아 노동자의 마음이 되어 바라본다. 이 시간을 ‘뜨거운 가슴’으로 본 뒤에 이번에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합의서를 ‘차가운 이성’으로 보았으면 한다. 그 합의서에 인주가 아닌 자신의 피로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의 핏발 선 눈을 보았으면 한다.

 

뉴코아 노동자의 투쟁은 많은 희망을 주었다. 비정규악법 시행을 앞두고 시작된 뉴코아 노동자의 파업은 보이지 않는 숱한 곳에서 비정규 노동자의 일터를 지켜주었다는 것도 알았으면 한다. 지난해 6월, 파업을 선택했을 때 달려갔듯이 이번 합의서의 선택에도 사랑으로 찾아가 뉴코아 노동자를 만났으면 한다. 그 다음에 비판도 하고 평가도 하고 비난도 하였으면 한다. (다만 뉴코아 노동자에게 시간을 준 뒤 만나고 이야기 하자.) 어차피 노동자는 목숨을 건 끝없는 선택을 강요받아야 하니까. 앞으로도 지난 1년보다 더 어려운 선택을 뉴코아 노동자는 끊임없이 해야 하니까.

 

이제는 당분간 뉴코아 노조에서 보내 올 문자가 없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이제 문자를 받을 게 아니라 보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당신의 집과 적금통장이 손해배상에 가압류를 당해야 하던 순간, 가정이 파괴되려던 순간, 생계에 허덕여야 했던 순간, ‘지 못 미’ 였다고.

 

어렵게 뉴코아 조합원과 인터뷰를 했다.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자신은 이미 8월 초에 지부 조합원들과 현장에 복귀했는데 무슨 말을 하겠냐며 말을 아꼈다. 18명의 해고자 문제는 너무 가슴이 아프고 평생 응어리로 안고 살 것 같다는 말을 했다. 물론 외주화 부분도 아쉽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이후 어찌되더라도 마지막까지 간부들이 비정규 노동자의 고민을 놓지 않은 거 아니냐는 말을 했다. 뉴코아 정규직 노동자들은 그야말로 얻은 것 하나 없다. 하지만 뉴코아 노동자의 434일의 투쟁은 너무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싸움으로 남을 것이다.

 

싸움은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타협도 있고 굴복도 있다. 노동자의 싸움은 그 결과를 떠나 그 과정이 너무도 귀중하다. 그 귀중함을 스스로 지울 필요가 없다. 박양수 위원장과 함께 술 한 잔 할 날을 기다린다. 기다릴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민주노조로서 최소한의 예의(2005.10.05.)

민주노조로서 최소한의 예의

 

이 글은 현자노조 집행부나 현장 활동가들께 쓰는 것이 아닙니다.

현장에서 묵묵히 일하는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동자, 평조합원들께 쓰는 것입니다.

혹 현자 조합원도 아닌 사람이 이런 글을 쓸 수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고, 혹 현장의 정서 즉 ‘당신들의 정서’를 모른다고 항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저는 이 글을 써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작년 상반기에 노무현 정권과 보수 언론이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를 향해서 ‘고임금’을 받는 ‘노동귀족’들이라고 몰아 부칠 때, 저와 제가 속한 연구소는 당신들의 ‘고임금’을 옹호했습니다.

대공장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고임금을 받지만, 그것은 주야 맞교대와 잔업철야 등 장시간 노동과 노동강도 강화의 댓가일 뿐이라고.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임금’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일부 지배세력들의 부와 사치와 고소득이 더욱 문제라고.

 

대공장 정규직의 ‘고용 경직성’ 때문에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차별이 심화된다고, 그래서 비정규입법을 강행하겠다고 정권과 자본과 보수언론이 호들갑을 떨 때, 그에 맞서 당신들의 ‘고용 경직성’ 즉 ‘고용 안정’을 옹호했습니다.

비정규직이 양산되는 것은 대공장 정규직의 ‘고용 경직성’ 때문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의 결과라고.

따라서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은 정규직을 비정규직화하는 노동유연화로는 해결될 수 없고,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을 철회해야 가능하다고.

 

분명 ‘당신들’의 고임금과 고용 경직성을 옹호했고 방어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들‘만’의 고임금과 고용 경직성을 옹호하고 방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민주노조운동진영 전체가, 고용불안과 비정규직화와 차별과 탄압으로 고통받는 전체 노동자들이 그랬을 겁니다.

올 상반기 임단협 과정에서 현자 정규직 노동자들이 숨막히는 이러한 현실을 과감하게 뚫고, 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간의 계급적 단결을 이뤄낼 것을 기대했습니다.

계급적 단결이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능성’ 혹은 ‘어떤 희망의 단초’라도 보여주길 바랬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조금씩 무너져 갔습니다.

비정규직을 ‘고용안전판’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래도 시간이 필요하고, 임금이나 노동조건에서 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간의 차별도 하루아침에 없앨 수는 없을 거라 애써 자위했습니다.

그러나 상반기 임단협 과정에서 현대 원청 사용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납치 연행하고, 구속하고, 유혈적인 폭력을 휘둘렀을 때, 대다수 정규직 노동자들이 수수방관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은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습니다.

9월 초 비정규직 노동자인 류기혁 동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즉각 ‘열사’로 받아 안지 않고 임단협을 마무리짓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민주’노조로서의 최소한의 예의도 아니라는 생각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래서 현자 정규직 노동자분들께 묻습니다.

이것이 ‘당신들의 정서’, 소위 ‘정규직 노동자의 정서’입니까?

현자노조는 당신들‘만’의 노조입니까?

비록 자본에 의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었지만, 한울타리 안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탄압받고 죽어갈 때 현장으로부터 함께 연대하지 못하는 노조가 진정 ‘민주’노조입니까?

 

2005.10.05.

현자노보칼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