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bonobonoya.tistory.com/16
1. 청소년 보호주의, 청소년들을 도망치게 하다. 누군가가 보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통제가 허용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리하여 어떤 십대들은 '어른'들에게 내 삶을 계획하거나 일상을 내 의지대로 디자인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 채 그저 자신의 삶을 도망으로 채우기도 한다. 그들에게 '현재'는 '어딘가로부터 도망 온 결과'에 불과하다. 새로운 사회를 위한 기획에서 어른과 아이의 구별이 설정되고 난 후 특정 연령을 기반으로 한 통제는 '보호'라는 이름으로 정당성을 획득했다. 어떤 어른들이 디자인한 사회에서 아이들은 그 사회의 충실한 노동자이자 재생산자가 되기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힌 채 '미래의 어른'이 되기 위한 수업이나 얌전하게 받을 것이 기대된다. 그러므로 청소년 보호주의가 보호하고자 하는 진짜 대상은 따로 있다. 기존 사회질서를 원활하게 유지시키기 위한 보수적 사회관리 장치. 청보주의는 기존 사회가 그어 논 금 밖으로 나가는 청소년이나 그 금을 균열시키고자 하는 세력들을 통제하는 하나의 논리로서 그 금을 지키는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다. |
2. 주어진 경계를 넘어 준비되지 않은 세상으로. 나는 혹은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얼굴도 모르는 대한민국의 무수한 십대들이 아침 7시 30분에서 오후 3-4시까지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를 알고 있다. 특정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특정한 시각에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지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다는 것. '보호'를 이유로 십대들이 사회적으로 관리되며 감시와 통제를 당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사실 십대를 제외하고 이렇게 총체적으로 파악이 가능한 연령대는 별로 없다. 아이들은 전근대적 질서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학교에 몰아넣어진다. 그렇게 다양하고 그렇게 무수한 색깔을 지니고 있는 아이들이 몇몇 소수의 공부 잘하는 아이들 대학 들어가기 위한 과정에 맞추어 기획되어진 입시위주의 학교에 집어넣어진다. 소수의 성적 우수자를 위한 입시 드라마 속에서 엑스트라 이외에 자신들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어떤 아이들은 기성세대의 질서에 대한 하나의 도피처로서 상업자본이 제공한 놀이터로 도피한다. 소비자본주의의 확산과 인터넷등 정보매체의 대중적 보급은 십대들의 생활세계를 적지않게 변화시키고 있다. 기성세대와는 달리 이들을 극진하게 모시는 상업자본, 서로 다른 공간과 조건에 있는 십대들을 광범위하게 매개해 줄 수 있는 정보매체의 등장은 이들의 생활반경을 확장시키고 있다. 이러한 조건들은 어떤 십대들에게 집, 학교/바깥세계 사이의 경계넘기인 가출을 보다 용이하게 해 준다. 그리고 많은 아이들은 현재로서는 집과 학교에 '붙어 있어주기'는 하지만 어떠한 계기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경계를 넘을 수 있는 잠재적 가출상태에 놓여있다. 집을 나온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독립을 뜻할 수도 있다. 모든 가출이 필연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청소년을 보호하겠다는 어떤 어른들의 계획에 따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아보지 못했던 십대들은 또 다른 삶의 계획으로서의 '가출'이 아닌 도피로서의 '가출'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주체적으로 새로운 공간과 문화를 열어 가는 십대들이 있지만 여전히 많은 십대들은 '보호'와 '상업자본'의 양분화 된 관할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도피문화는 십대여성의 몸을 자본화하여 교환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이 사회의 성매매 문화와 상업적 놀이문화로 채워진다. 한쪽에서는 성에 대해 무지할 것이 강요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성에대한 볼거리, 할거리가 넘쳐난다. 어떤 '사회'는 소녀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얌전하게 성에 대해 무지와 무경험의 상태로 기다려 주기를 원하지만 어떤 '사회'는 그들이 성의 소비자이자 '판매'자가 되기를 원한다. 사실 현재로서는 이 두 세계가 거의 경합이 불기도 힘든 상태에 와 있다. 아이들의 생활세계에는 이미 성폭력인지 성매매인지 분간할 수도 없는 성적 실천과 의미들이 포진하고 있고 집을 나온 여자아이들은 생활 속에서 몸을 자본화하는 과정에 무방비로 포섭된다. 무지를 강요당하는 사이 백지상태가 되어버린 아이들의 성은 성폭력과 성매매로 가득 채워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모든 성적인 것으로부터의 접근금지와 철수를 외치는 보호주의는 아이들이 성인이 되거나 결혼 할 때까지 건강한 몸으로 얌전하게 보존되어 주었으면 하는 '어른'들의 바램을 위한 것이라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다. 청소년 성보호주의가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미래의 예비 엄마로서의 소녀들의 몸이지 어느 경우에도 매매되지 말아야할 인간의 기본적인 인격권, 성적 자기결정권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보호받을 만한 성과 그렇지 못한 성이 나누어진다. '별로 싹수가 없어 보이는' 소녀의 몸에 대해서는 성매매가 아닌 개인간의 자유로운 합의에 기반한 사적 교제라는 판결이 내려진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보호'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나의 시간, 공간, 몸에 대한 관리권을 보호주의에 빼앗긴 채 아이들은 집에서, 학교에서, 나의 삶에서 도망을 친다. 도망친 십대들을 맞이할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세상으로. 3. '당신'들은 십대 삶의 관리권을 쥐고 흔들 권리가 없다. 보호주의는 모든 십대들이 집과 학교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십대에 대한 인권은 적지 않은 교문과 집 대문 앞에서 멈추어진 상태이다. 가출에 대한 대안이 다시 학교로 돌아가 보름동안 수업시간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복도 청소를 하거나 화단의 쓰레기를 줍고 틈나는 대로 선생님에게 출석부로 머리를 두들겨 맞아가며 교무실 바닥에 꿇어 엎드려 반성문을 써내야 하는 것이라면 도대체 무엇이 안전하다는 말인가. 기존의 학교와 집에 별 기대를 걸기 힘든 상황에서 가출한 십대를 무조건 학교와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을 뿐더러 효과마저 없다. 그만큼 십대들은 쉽게 경계를 넘을 수 있는 조건 위에 서 있다. 아이들의 현재를 알고, 인정한 위에서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모색해야할 것이다.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버리듯 놔두고 도망치지 않고 자기 시간, 공간, 삶을 디자인할 수 있도록. 그래서 이제는 그들이 그만 도피생활을 마감할 수 있도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