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인권활동이란 걸 하고 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불편한 것들’을 인식하게 되었고, 처음으로 ‘미친 학교를 혁명하라’ 라는 집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 날의 경험은 나를 흔들어놓았다. 그러다 이렇게 저렇게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리고 학교를 그만두면서, 지금과 같은 활동을 하게 된 것 같다. 그렇게 청소년인권은 어느새 내 삶의 중심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학생인권은 내가 하는 청소년인권운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청소년들의 대부분이 학교라는 공간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니 어찌 보면 안타깝지만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학생인권은 학교 안 청소년들의 인권을 말하는 것인데, 두발자유나 체벌금지나 또는 강제야자 반대 같은 게 대표적인 목소리이지 않을까 싶다.
성별에 따른 폭력의 강도 차이
이제 1년 조금 넘게 활동을 하면서 그 동안 캠페인이든, 집회든, 청소년의 목소리를 담은 문화제이든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해 학교가 정해놓은 선 밖으로 나온 청소년들을 꽤 많이 만났다. 처음엔 무조건 많이 만나는 게 중요했다. “청소년들의 직접행동이 중요해요!” 라고 외치면서 여기저기 얘기하곤 했다. 그러다가 요즘엔 점점 어떤 ‘현상’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학생인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여성 청소년들보다 남성 청소년들의 움직임과 분노가 더 크고 더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서명을 받거나 캠페인을 하거나 할 때는 적극적인 액션이 다들 비슷비슷하긴 한데, 행동을 고민하고, 불만을 더 크게 터뜨리는 쪽은 남성청소년들이 대부분이었다는 ‘현상’이다. 왜 그럴까? 왜 남성청소년들이 더 적극적이고 더 많을까?
기억을 더듬어보면 확실히 남성청소년들(앞으로는 남청) ‘신체적인 폭력'에 노출되기가 더 쉬웠던 것 같다. 어렸을 때, 친구끼리(남자애들끼리) 때리고 맞고 하고서 집에 들어오면 "뚝! 울지 마!" 하면서 남자애들은 싸워가면서 크는 거라고 말하곤 하는 상황을 우리는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반대로 어느 누구도 여자애들이 서로 치고 박고 때리고 하면서 크는 거라는 얘길 들은 적이 없을 것이고, 그렇게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일들은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교사들이 체벌을 행할 때, 여성청소년들(앞으로는 여청)은 상대적으로 더 살살 때리기도 하고, 봐주기도 한다. 똑같은 잘못-이라고 규정되는 것들-이었는데, 나는 손바닥을 맞고, 나와 같은 반의 남자애는 허벅지를 '거칠게' 맞았다. 왜 그랬을까? 답이 나오긴 한다. 왜냐하면 남자애들은 강하게 커야 하니까. 어릴 때부터 거칠고, 강하게 커야 '진짜' 남자 소리 듣지.
그래서일까, 남청들의 적극적인 액션은? 더 많이 규제 당하고, 더 많이 잡히고, 더 많이 맞기 때문에? 더 불만이 많이 쌓이기 때문에?
체벌은 남성청소년들 사안일까
이렇게 보면 학생인권의 주요 이슈 중 하나인 ‘체벌’은 여청들의 이야기라고 하기엔 거리가 있는 것도 같다. 확실히 여청들은 상대적으로 체벌에서 비껴나 있다. 남청들이 100대를 맞는다고 하면 여청들은 40대를 맞는다고나 할까. 그래서 남청들은 여기에서도 불만을 표하곤 한다. "여학생들은 왜 살살 때리냐", "여학생은 왜 덜 잡냐", "남녀 차별이다." 등등. 체벌의 강도나 횟수로만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다.
하지만 과연 여청들은 남청들보다 더 나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걸까? 여청들에게는 체벌을 안 당하는 대신, 그 체벌을 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여성이기 때문에 당하는 폭력이 존재한다. 광주의 한 학교에서는 교사가 벌로 한 여학생에게 치마를 벗고 교실을 한 바퀴 도는 것을 시켰다고 한다. 여청들에게는 이처럼 ‘수치심’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벌’을 주곤 한다. 거칠고 강하게 자라기를 요구받는 남자애들과는 달리 착하고 부드럽게 자라기를 요구받는 여자애들을 팰 순 없으니, 몸 처신 잘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끊임없이 존재한다. ‘체벌 대신 성추행을 당한다’, ‘더 많은 통제를 당한다’ 라고 하면 너무 비약일까나.
성별 권력이 인정하기는 싫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한, 더없이 폭력성이 드러나는 공간인 학교에서, 비록 '학교'라는 특수성-교육의 장이라든지, 하는 겉으로만 좋아 보이는 것 때문에 여성/남성이 아닌 '학생'으로써 입시경쟁의 문제가 주로 부각되는-덕분에 묻혀있으면 묻혀있지 그것이 덜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성역할은 구분되어 왔다. '성'의 구분이 아니라, 성'역할'의 구분이다. 철저하게. 이런 성역할, 거기다 청소년을 연결해볼까? 성역할의 구분뿐만 아니라 그 역할을 잘 수행해내게 하기 위한 기대도 확 커진다. 청소년은 기대 받는 '자원'들 아닌가. 이 사회를 잘 굴러가게 하기 위해 틀에 맞춰진 좋은 여성이, 좋은 남성이 되길 우리는 기대 받는다. 그래서 여청과 남청은 다른 방식으로 통제당하고, 다른 폭력을 몸에 각인하고 살게 된다.
체벌에 다른 성역할 고정과 학생들 간 분리 효과
체벌은 태초부터(!) 폭력이다. 학교 안 남청들에게만 더 많이 가해져서, 차별이어서가 문제인 것이 아니다. 체벌로 신체적인 폭력을 가하는 것 자체가 문제이고, 그런 폭력을 겪으면서 여성성과 남성성의 성역할을 더욱 명확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힘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이다. 뿌리 깊은 가부장제로 먹고 살아온 이 사회를 알게 모르게 유지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학교는 그런 점을 미처 보지 못하게 만들고, 누가 더 맞고 누가 덜 맞았는지 치사한 차별-평등 논리만 오가게 된다. 그래서 더 무시무시하다. 그곳에서 남성청소년들은 여성청소년을 공격한다. “나도 맞았으니, 그리고 나도 걸렸으니, 너도 맞아야 하고 걸려야 해.” 라는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도록 이끄는 곳이 학교다.
폭력은 학교 내 권력질서에서 발생한다. 벌을 받는 일은 학교에서 벌어진다. 그렇기에 여학생들이 남학생들처럼 똑같이 맞는다고, 벌을 받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당장은 더 맞고 덜 맞는 차이가 보일지 몰라도, 결국 그런 차별 대우(?)의 피해자는 여학생 남학생 모두이다. 벌 받는 건,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건, 어떤 방식이건, 매한가지다. 남청들이여, 여청들과 손을 잡을지어다. 당신들의 고통은 여성들이 그만큼의 고통을 받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청소년들이여, 꾸준히 폭력을 행하고, 벌을 줌으로써 청소년들을 통제해야한다는 생각이 깊이 박힌 낡은 학교에, 성역할을 깨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만들려는 무시무시한 의도를 가진 이 사회에, 함께 손을 잡고 어퍼컷을 날릴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