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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 at | 2011/09/23 15:38 |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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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와 성노동 발제를 해주신
밀사님의 글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
초대교회 공동체에서의 그리스도인 사이에는‘철저한 교환’(intensive exchage)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부유한 그리스도인이 가난한 형제 자매들에게 물질을 나누어 주었고, 계층간의 물질 소유의 평등화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평등화는 물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레인 폭스(Robin Lane Fox)가 지적한 것처럼‘기독교는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집단의 사람들이 의사표시를 할 수 있게 했다.’ 초대교회 공동체 기독교인들에게는 포용(inclusivity)과 관용(generosity)이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등을 표현하는 의식인 평화의 입맞춤을 통해서 평등과 평화를 만들어 갔다. 이것은 초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화해(reconciliation)를 경험하였다. 거룩한 입맞춤은 예배의식의 몸짓만이 아니라‘혁명적인 사회적 결속과 근본적 평등에 관한 표현이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원형경기장에서‘평화의 입맞춤’으로 순교를 확증하였다. 이런‘평화의 입맞춤’은 평화의 공동체의 예배의식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성령의 임재를 축하하고 서로 교통하는 것 뿐만 아니라 평화와 신자들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인사였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평화의 입맞춤이 없는 기도와 성만찬은 무의미하고 헛되다고 믿었다.
그러나 콘스탄틴이 로마를 통치하게 되면서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의 역사는 끝이 났고 교회는 제국이 선택한 종교가 되었다. 로마군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혔던 예수가 로마 제국의 구세주로 경배되게 된 것이다. 교회는 순교의 시험을 성공적으로 견뎌왔으나 호의의 시험을 받게 된 것이다. 기독교는 법적, 제도적 종교가 되었고,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핍박을 받게 되었다.
기독교의 국가화, 제도화
기독교국가사회(Christendom)를 통하여 기독교는 상류사회로 들어섰다. 기독교의 가치를 공표한 문명이 탄생하였고, 기독교는 강권적이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종교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국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과 의미가 바뀌어 버렸다. 4세기 초에 작성된 이집트의 파피루스는 교리문답 수강자를 권고하는 편지로 나중에 이름을 기입할 수 있게 한 형식의 문서가 발견되었다. 이 문서를 작성한 공동체에서는 세례지원자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문답대신에 상투적 절차를 밟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얼마 전까지 순교로 믿음을 나타냈던 것과는 매우 다른 일임에 분명하다.
제자도의 변화는 세례에서도 분명히 나타났다. 로마 황제 유스티아누스1세는(Justinian Ⅰ) 유아세례를 황제가 제정하는 법으로 만들었다. 국가 교회에서 회심에 대한 유일한 가르침의 수단은 대중 설교만이 남아 있었다. 이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종교로 공인되기 이전의 관점대로라면 회심이라는 것은 극히 소수의 것으로만 남게 된 것이다. 초대 교회의 공동체는 단순한 종교적 공동체가 아니라 실천적 공동체, 정치적 공동체였다. 하지만 콘스탄틴 이후로 교회는 사회 지배체계 속으로 들어가거나 그것을 종속시킴으로 초대교회의 모습을 상실하였다.
기독론(그리스도론)
기독론(基督論)은 시대가 지나면서 끊임없이 신학적으로 재해석되어져 왔다. 초기 교회의 기독론의 전통에서부터 종교 개혁, 근대 이후의 기독론은 예수와 그리스도 사이의 재해석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기독론의 인식의 지평은 때로는 정치적인 수단으로 이용당하기도 하였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자였던 예수는 선포(宣布)되는 자가 되었고, 그가 비판하였던 제도권 체제 속에 갇히게 된 것이다.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에서 예수가 그리스도로 고백되는 바로 거기에 기독교 신앙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이 의심스러워지거나 흐려지거나 혹은 부인될 때 기독교 신앙은 존재하지 않게 되며 역사적 기독교의 중요성도 몰락하게 된다. 또한 몰트만은‘예수에 대하여 신앙을 고백하고 말씀과 행동과 새로운 결합을 통하여 그의 자유하게 하는 통치를 그의 뒤를 따르면서 확장시키는 사람들이 있는 한, 기독교는 살아 있게 된다’고 하였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과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새로운 지평으로, 아나키적 지평으로 이해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기독론은 공동체가 처한 문화적 배경과 물음 위에서 정립되어진다. 기독론은 인간의 다양한 상황과 인식 속에서 새롭게 고백되어지는 것이다. 예수 시대에도 지금과 유사한 민족주의, 경제적 억압, 탐욕, 폭력, 권력의 남용, 교만한 개인주의 같은 문제들이 드러나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예수는 성전정화 사역을 통하여, 합법적으로 성전에서 헌금과 희생제물을 파는 이들을 공격하였고,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반자본주의를 가르쳤다. 이렇게 예수는 합법화된 제도를 뒤집었고, 지배 이데올로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예수를 고백하는 교회는, 왕정시대에는 군주제주의자였고, 제국시대에는 제국주의자였으며, 공화국하에서는 공화국주의자가 되었다. 이는 현 세상의 개념에 순응되어서는 안된다는 바울의 말과도 반대되는 결정이다.
신학함에 있어 몰트만은 하느님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만을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특정한 상황 속에서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침묵하는 것이 어떤 공적인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해서도 물어야 한다고 하였다. 신학은 방법론적으로 통시적(diachronoc)이며, 공시적(synchnic)인 특성을 지닌다. 신학 방법에 있어 역사를 통한 통시적 고찰은 중요시 된다. 그리고 시대와 맞물려 있는 공시적 시각 또한 간과해서는 안된다. 정치신학은 기독교 신학에서 정치적 자의식을 일깨우고자 하는 신학이다. 몰트만은 비정치적인 신학은 그들의 침묵으로서 보수적인 정치와 더불어 견고한 동맹을 맺는 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비추어 아나키적 신학은‘무강권’의 반정치를 논하는 정치신학적인 특성을 가진다.
소종파 신앙공동체 운동
1) 교회형은 보수적이며, 세상을 포영하고 대중을 지배하는 선교개념을 지니는 데 반하여, 소종파형은 소규모의 공동체성을 강조하면서 개체신도들의 완전을 강조한다.
2) 교회형은 국가와의 관계를 원만히 가지려고 함으로서 예수의 급진적 요구를 약화시키는 한편, 국가의 지배계층을 수용, 교회의 목적을 위하여 이용하려 한다. 이에 비하여 소종파형은 폭력을 사용하는 국가권력이 예수의 윤리적 요구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서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 비타협적이며, 지배계층보다는 비지배계층을 선호한다.
3) 교회형은 현존하는 세계를 초자연적인 하느님나라를 향한 예비단계로 파악함으로써 비연속성을 강조하는 데 비하여, 소종파형은 현존하는 세계와 초월적인 세계와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4) 교회형은 윤리적 방법론에 있어서 금욕적이고, 명상적이며, 德론적인측면을 강조하는 데 비하여, 소종파형은 엄격히 세상과 신앙공동체 간의 분리를 강조하면서 산상복음의 정신에 입각한 사랑의 일원성을 주장한다.
5) 교회형은 사도적 권위와 교회론적 전통을 강조하지만, 소종파형은 교회론적 권위보다는 사랑의 공동체성을 강조한다.
6) 교회형은 사회질서를 유지시키는 제도적 지배와의 타협을 통하여 보편적인 원리를 확보하려 하는 데 비하여, 소종파형은 급진적인 개인주의, 인격적인 성취, 평신도성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 동시에 이익 관계를 위한 경제적 투쟁을 피하면서 가난의 이상과 자족의 윤리를 지향한다.
7) 교회형은 은총의 객관성을 강조하면서 교리적 일치를 강화시킨다. 이에 비하여 소종파형은 자발적인 공동체성에 근거한 실천적 우위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교회형에서의 신도는 교회의 멤버가 되는 일이 중요하지만, 소종파형의 입장에서는 교회의 제도성보다는 개인적인 회심이 더욱 강조된다.
8) 교회형은“지속하는 역사를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강조점을 두지만, 소종파형은 역사의 문제보다는 종말론적 생의 의미를 강조한다.
함석헌과 퀘이커
함석헌이 퀘이커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1921년 오산학교 시절 조지 폭스의 『일지』를 읽으면서부터이다. 그리고 동경 유학 시절 일본 퀘이커 모임에 출석을 하곤 했다. 1947년 남학으로 내려온 시점에 함석헌은YMCA 총무 현동완으로부터 퀘이커들의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 운동을 전해 들었다. 함석헌은 이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중에 미국 퀘이커들의 평화운동, 특히 양심적 병역 거부(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에 대한 말을 하셨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람 죽이기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에는 같이 곁들어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징병령을 반대하고 나서서 즐겨 감옥에 들어가고 남아 있는 교도들은 책임을 지고 그들의 뒤를 돌봐주며 운동을 전개해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
한국 전쟁이후 함석헌은 군산병원에서 의료 봉사 중이던 영국과 미국의 퀘이커들의 활동에 좋은 인상을 받았다. 퀘이커들과 많은 교류를 가진 후, 무교회주의자였던 함석헌은1967년에 퀘이커 회원이 된다. 함석헌은 퀘이커의 직접적인 체험과 자유로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것이 정말 자유요 참 민주주의며, 그들이 신비파 운동에서 일어나기는 하면서도 다른 모든 신비파들이 빠지는 극단의 주관주의에도 빠지지 않고, 그렇다고 다른 모든 큰 교파들이 하는 것처럼 귄위주의에 되돌아가지도 않고 비교적 건전히 중간노선을 걸어오게 된 까닭이요, 도 미래에 대해 누구보다도 발언권을 가지는 까닭입니다. ‘
함석헌은 교회와 국가 권력과의 유착을 정면에 나서 비판하는 사람이었다. 이승만은 정권을 강화시키는데 한국 교회 조직의 협조와 지지를 구했고, 자유당을 위해 많은 재정적 후원을 받았다. ‘기독교인 대통령 아래 전국민의 기독교인화’라는 모토아래 한국 교회는 부패한 이승만 정권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동맹자를 자처한 것이다. 함석헌에게 조직화된 힘이나 권력은 잠재적인 폭력을 뜻하는 것이었다. 함석헌은 권력과 유착하는 근본주의 기독교를 멀리했다. 함석헌은 군사독재와 권력의 문제의 책임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상이 이렇게 어두워진 책임 어디 있는가 하면, 종교가 그 책임을 져야 해요. 믿는 사람이 잘못해서 이렇게 됐어요. 미신이 날뛰는 거는 책임이 다른데 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 믿는다는 종교가, 소위 세상을 건지기 위해 있다는 종교가 거짓말을 자꾸 하니까, 그리고 그걸 이용해서 물질적인 탐욕을 충동질하니까 세상이 잘못되어갑니다.’
이렇듯 함석헌은 기존의 교회 조직이나 제도에 속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관심이 근본주의가 아닌 세상의 평화와 사회 정의를 이루는 일에 있는데 공감하였다. 함석헌은 씨알의 종교였던 기독교가 콘스탄틴의 공인 이후로 통치자, 박해 하는 자의 종교로 변질되었다고 보았다. 이 또한 비국가 교회인 퀘이커 신앙을 받아 들인 이유 중에 하나이다. 김경재는 함석헌이 퀘이커에 들어간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함석헌이 퀘이커에 들어가게 된 까닭은 퀘이커 사상은 모든 인간 속에 하느님의 거룩한 빛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인간의 존엄성과 가능성을 강조하는 점, 그리고 모든 허례허식과 신학적인 추상론을 배제하는 신앙과 삶의 단순선과 간결성, 평등, 박애사상과 평화사상 등이 그가 일생 추구해 왔던 신앙의 유행과 체질에 가장 알맞았기 때문이었다.’
나가면서
국가, 권력, 폭력과의 관계에 있어서 교회가 어떠한 위치에 서 있어야 되는가의 문제에 아나키스트 기독론의 자리가 있다.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세상 특히 국가와의 관계를 맺는 방식에 있어 아나키스트 기독론은 국가, 권력, 폭력과의 결별을 요구한다.
로마 제국이 황제 숭배(emperor cult)신앙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한 이후로, 국가는 초기 기독교 교리형성은 물론 기독교 교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니케아, 칼케돈 공의회를 기반으로 하는 고전적 기독론은 철학적 개념으로 예수의 본성을 규정함으로써, 생동적인 예수의 메시지를 가두어버렸다. 아나키스트 기독론은 이러한‘제국의 기독론’을 거부하고 예수의 메시지를 중시하며, 특히 국가, 권력, 폭력을 거부했던 예수상을 제공한다. 뒤틀려진 기독교가 국가, 권력, 폭력의 사탄의 체제와 연합되었다면, 아나키적 기독교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찾는 르네상스이다. 제국 종교, 국가 교회 이전의 예수 운동의 온정신이 살아있는 원상(原象)을 회복하는 것이다.
아나키적 기독교은 종교 개혁의 전통 속에서, 다시 국가와 결탁한 복음적 개혁자들과 다른 길을 택했던 급진적 개혁자들의 소종파 운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재세례파와 퀘이커의 소종파 운동 공동체는 신앙이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과 국가 교회를 거부한다. 아나키스트 기독론은 제국 종교 이전의 초대교회 공동체의 고백들을 재조명한다. 필자는‘제국의 기독론’이 아닌‘제국 이전의 기독론’이‘아나키스트 기독론’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나키스트 기독론은 역사적 예수를 강조하고 있지만, 예수론에는 빠지지 않는, 그리스도중심적인(Christocentric) 기독론을 지향한다.
콘스탄틴주의는 기독교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종교 회의에서의 황제권은 유일신론을 강화하는데 기여했으며, 교회의 제도화나 관직, 체계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제국 속에서 제도화된 기독교는 하느님께 다가가는 정규적 길만을 제공하였다. 아나키스트 기독론은 이러한 정규적 길, 제의적 권력에 대한 비판을 통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차별주의, 봉건주의, 인종주의, 계급주의와 같은‘기독교의 무자비한 결과들’에 맞서는 것이다.
재세례파와 퀘이커 신앙공동체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국가, 법, 자본과 군사주의의 폭력에 저항했다. 이들의‘우두머리 없는’ 신앙 공동체상은21세기 한국교회의 창조적, 대안적, 저항적 공동체를 위한 충분한 도움이 될 것이다. 불순종, 전쟁세 거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같은 비폭력 직접행동은 평화교회를 만들어가는 준비이자, 그것이 가능함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구로(@riotguro)
명동3구역 타결 다음날 카페 마리가 철거된 관계로, '아나키의 여름' 장소를
'수유너머R 세미나실'로 변경하였습니다.
찾아오는 길은 http://commune-r.net/map.h
이번주 일요일 저녁 7-9시 주제는 '아나키와 성노동' 입니다
발제자는 밀사님
8월 21일(일) 투쟁과 콩국수가
명동 카페 마리에서 열립니다.
오셔서 맛있는 점심 드세요~
* 2011 아나키의 여름 '아나키와 펑크' 일정은 9월로 변경되었으니
이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2011 아나키의 여름 준비팀입니다.
'아나키의 여름'은 아나키즘, 반(反)국가주의, 비(非)자본주의, 탈권위, 자립, 공생, 비폭력 직접행동. 상호부조, 서브시스턴스(subsistence) 등의 키워드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모여 억압과 차별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토론하고 행동하는 자리입니다.
2011년 아나키의 여름은 서울에 위치한 사랑과 연대 가득한 철거농성장 마리와 제주 강정마을에서 오는 8월 14일부터 8주 동안 매주 일요일마다 세미나와 토론회 그리고 8월말 강정마을 방문 1박 2일 캠프 등이 열릴 예정입니다.
8월 14일 일요일 오후 7시 첫번째 아나키의 여름 토론회가 열립니다.
주제 발표는 두 가지입니다.
1. 디자인 서울과 4대강 사업을 통해 본 개발독재와 반국가주의 (박은선, 리슨투더시티)
2. 풍동, 대추리, 도두리, 용산, 두리반, 명동에서의 재개발에 맞선 비폭력직접행동 (구로, 재개발 지역 세입자)
주제 발표 이후 저녁 9시까지 자율토론회가 열립니다.
이후 2011 아나키의 여름에서는 매주 일요일마다 성노동, 아나키와 신학, 펑크록과 아나키즘, 퀴어, 탈원전과 대안에너지, 동물해방 등의 주제를 놓고 치열하고 흥미로운 발표와 토론이 이어질 예정입니다.
2011 아나키의 여름에 참여하세요!
함께 행사를 만들어갈 사람들을 모집합니다.
다음 준비팀 모임은 8월 8일 월요일 저녁 9시에 철거농성장 명동 마리에서 합니다.
트위터에서 아나키의 여름 관련 글을 검색할 때는 해쉬태그 #anarchysummer 를 사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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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고 싶었지만 못간 사람들을 위해.
기록이랄지, 후일담이랄지, 올려줫으면 좋겠네요..
^^&
아 이제야 댓글 확인을 ㅜㅜ
발제문 하나둘씩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