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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4/28
    팍스 로마나, 팍스 브리타니카 그리고 팍스 아메리카나
    은하철도
  2. 2008/04/28
    티벳 유랑기
    은하철도

팍스 로마나, 팍스 브리타니카 그리고 팍스 아메리카나

 

팍스 로마나, 팍스 브리타니카 그리고 팍스 아메리카나

들어가면서 

  세계 역사를 바꾼 한 순간을 나름대로 꼽아본다. (한 개인의 선택에서의 가정도 의미 없는 일이라고 하는데  세계 역사에서 가정이란 정말 의미 없는 일이지만 추운 겨울날 밤도 길고 심심파적이라고 생각해주시기를!) 가까이부터 보자. 한반도에 있어서 고구려의 나당연합국에 의한 멸망? 그럼 어떻게? 고구려가 중심이 되어 삼국을 통일한다!!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후의 역사전개에 큰 이변을 가져오지는 못할 듯 하다. 항우의 유방에 대한 승리는 어떨까? 아마도 ‘사면초가’가 ‘사면한가’로 바뀌었을 것이고 경극 ‘패왕별희’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서양을 살펴보면 알렉산더의 장수와 제국의 확대는 어떨까? 기왕에 알렉산더 당시의 지중해 연안의 인간들의 세계 인식은 소아시아와 그리이스 그리고 북아프리카와 인디아 정도라고 볼 수 있으니 32살에 요절한 것이나 차라리 70살 넘어 천수를 누리는 것이나 알렉산더의 제국은 차이가 없을 듯 하다. 카이사르의 암살과 아우구스투스와 안토니우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와의 대결은 어떨까?

 

영웅인가? 학살자인가?

  로마의 영걸 카이사르는 온 몸에 피를 뒤집어 쓰면서 서유럽을 로마의 영토로 편입시키면서 본격적인 제국의 시대를 연다. 시오노 나나마는 [로마인 이야기]를 쓰면서 입에 침이 마르게 카이사르를 칭송한다. 심한 인종주의자 정도는 아니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그의 책 여기 저기에서 거침없이 기독교와 유대인에 대한 그의 편견을 내비친다. 아울러 힘에 대한 숭상과 ‘질서’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폭력과 살육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는 극우 보수주의자이다. 지금의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독일에서 ‘로마의 안전보장’이라는 명분으로 벌어진 수십만의 학살과 문화 파괴와 정복을 로마인의 편에서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그를 보면 다음으로 그가 저술할 책이 “혹시 히틀러의 ‘제 3제국’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예초에 조그만 도시국가에서 출발한 로마는 주변의 부족과 도시를 정복하면서 이탈리아 반도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지중해의 지배자였던 페니키아 인들의 ‘카르타고’와 격돌하게 된다. 한니발과 스키피오와의 대결로 유명한 카르타고와의 전쟁은 지중해의 유일한 패자로 로마서 서게 되었다는 점뿐만 아니라 전쟁중 세습귀족 계급(파트라이키)의 쇠락과 신흥 기사 계급(에퀴타스)의 부흥을 가져오면서 로마 과두정체제의 한계가 노출된다. 소수 세습귀족에서 운영되던 원로원 중심의 과두제 체제에 신흥기사계급이 월등한 경제력과 수적 우세로 위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카이사르 이전에 그라쿠스 형제의 암살과 마리우스와 술라의 대결은 모두 사회 경제체제의 모순으로 인한 내란 내지는 혁명과 반혁명의 상태였다. 웅장하고 화려한 로마의 유적을 보면서 하얀 대리석의 로마 석상들을 보면서 생각하는 로마의 모습은 투쟁과 갈등과 피의 연속의 로마역사와는 너무도 다르다.

  첨예한 계급 갈등 속에서 카이사르는 해결책을 제국주의에서 찾는다. 세습귀족 계급의 기득권을 보장하면서 신흥 기사 계급 등을 위한 토지와 자원을 이탈리아 반도 밖에서 찾는다.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화’라고 말하는 정복과 약탈을 통한 경제체제의 수립을 꾀한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시작된 원로원과 폼페이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세습귀족세력과의 내전이 마무리 되었음에도 숙청을 하지 않은 것은 카이사르의 ‘클리멘티아(관용)'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100여년 간의 내전 속에 세습귀족 자체가 수적으로 적어져서 세력이 거의 미미해 졌으며 숙청을 통한 계속되는 무리한 계급 투쟁과 내전의 불필요성을 없애기 위해서다. 이런 측면에서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의 투쟁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승리는 예견 가능하다. 세습귀족의 계급과 연계를 가지고 있는 세습귀족 출신의 안토니우스와 비록 카이사르와는 외가쪽에 연결되어 있지만 할아버지의 이력조차 알려지지 않은 옥타비아누스(후에 아우구스투스)는 신흥기사계급의 세력에 기반을 하고 있어 악티움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와의 연합군을 무찌르고 당당히 제정을 열게 된다.

  

전성기의 영국의 식민지 지역

양들이 사람을 잡아 먹는다!!

  영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좁은 섬나라에서 수 많은 영지로 나뉘어서 농업을 기반으로 하던 봉건제 사회에서 봉건 귀족의 입장에서는 왕이란 결국 자신의 계급의 일부이며 강력한 왕권의 존재는 불필요하다.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시작되면서 자급자족적 농업 경제체제의 한계를 신흥 계급(부르주아지)는 생득적으로 느끼게 된다. 봉건귀족 세력과의 한판 싸움이 시작된다. 마치 로마 오현제 중에 하나인 철인황제(哲人皇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공익을 우선’으로 하는 스토아 철학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제국을 이끌었듯이 부르주아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사유재산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무장했다. 양들이 농민을 몰아낸 것이 아니고 사유재산이라는 ‘복음’을 통해 봉건귀족의 몰아낸다.

이윤축적에 신들린 듯한 생산력의 폭발은 새로운 시장과 원료 공급처를 필요로 한다. 흡혈귀가 하루하루 연명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피가 필요하듯이 신대륙(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지역을 의미한다.)에 대한 정복과 착취의 시작이다. 19세기 영국은 잘 알 듯이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서 전세계의 공장역할을 하면서 최전성을 구가한다.

로마의 황제와 제국주의가 천재적인 카이사르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영국의 제국주의 역시 엘리자베스 I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역사의 종언?, 자본주의의 우월성?

  1989년 헤겔의 역사 철학을 속류화한 일군의 학자들이 ‘역사의 종언’을 합창한다. 때마침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연쇄 붕괴와 뒤이어 소련의 해체가 뒤를 이었다. 그들의 합창은 천상의 목소리 인양 간주되었다. 역사의 종언이라는 것은 종말이나 멸망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직 ‘민주주의 대의체제’의 승리 솔직하게 얘기하면 ‘자본주의’의 우월성과 진리성을 의미한다. 대결에서 한쪽의 몰락은 다른 쪽의 승리를 의미하지만  결코 이긴 쪽의 우월성과 진리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한쪽의 승리가 영원이 지속되지도 않는다. 91년 걸프전의 발발로 상대방 없이 시작되었던  미국의 일방독주 시대(팍스 아메리카 라고 하겠다)는 삐걱거렸으며 자본의 세계화로 재편하던 지구화 시대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다양한 계층과 계급의 봉기와 거부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ATTAC과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에서 벌어지는 사파티스타 운동 그리고 미국의 앞 마당인 중남미의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실험들......

  독일에서 ‘반세계화 운동의 교황’이라고 불리는 엘마 알트파터는 이런 자본주의 체제 외부의 충격과 아울러 차분하게 자본주의 체제 내적 모순을 설명하고 있다. 하나의 사회경제체제의 혁명적 변혁은 외부의 충격만으로 가능하지 않으며 내부의 첨예한 모순의 폭발을 기폭제로 필요하다. 이런 차원에서 과연 현재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과연 최상의 경제 체제인지 그리고 문제가 없는지에 대해 화석자원의 희소성과 그에 따른 자본주의의 계속적 성장에 근본적인 회의를 하면서 구체적 예를 들고 있다. 






알렉상드르 카바넬이 그린 클레오파트라

반세계화 시위에 참여한 이탈리아 노조원들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변명

  지중해 건너 아프리카의 풍요로운 신들의 땅. 이집트의 아름다운 여왕인 클레오파트라는 이미 즉위 이전부터 로마의 사실상의 속국의 형태에 들어갔었다. 죽은 부왕 프톨레마이오스는 유언의 집행자로 국가 ‘로마’를 지정했으니 동아시아적 형태로는 중화와 주변국가의 ‘조공’ 형태보다도 더 기속력이 강한 지배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뛰어난 능력과 임기응변으로 카이사르 생존시에 이미 어느정도의 자치를 이루었으며 기원전 31년 9월 그리이스 서부에 위치한 악티움 해전으로 로마 제국과 정면 승부를 겨룬다. 한 사람의 왕이 자신의 주권과 영토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라고 볼 수 있지만 강력한 제국이 되어 가고 있는 로마에 저항하고 싸움을 건 그녀의 행위를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저항이라고 한다면 너무나 큰 의미 부여일까?

  클레오파트라의 원수는  그녀 사후  수 백년이 지나 이슬람세력의  확대와 게르만 제 종족의 이동으로 이루어졌다. 지중해권 중심의 경제체제가 이슬람세력에 의해 곳곳에서 막히게 되면서 교역에 이상이 생기는 등 동맥경화 증상이 나타나면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곧 체제의 붕괴에 이르게 된다.

전지구적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이 발효하는 가운데 세계 곳곳에서 여러 계급이 계층이 또는 ‘다중’의 활발한 활동과 투쟁을 하는 자본과 미국 중심의 전지구적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여러 ‘클레오파트라’들이 나날이 늘어가기를....



[로마혁명사 1, 2] 로널드 사임  한길사

[로마인 이야기 1-15] 시오노 나나미 한길사

[자본주의의 종말] 엘마 알트파터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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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 유랑기

 

 

 티벳 유랑기 

靑藏열차를 타고 티벳으로 

 12월 대선이 끝나고 어수선한 연말연시를 뒤로하고 07년 마지막 날 북경행 비행기에 올랐다.

중국도 그렇지만 한국도 이제 양력의 설은 무의미한가 보다. 오후에 떠나는 비행기에 자리가 헐렁하게 비어있다. 한 시간 남짓 승무원이 주는 밥을 먹고 맥주 두 병을 마시고 나니 북경 수도 공항이라고 한다. 1000킬로미터 남짓이니 가깝기는 가깝다. 어둠이 내린 북경은 늘 그렇듯이 스모그가 낮게 깔려 있고 연탄이 탈 때 나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8월에 올림픽이 열리니 여기 저기 새로운 건물들이 무서운 속도로 들어서고 있었다. 40여분 만에 북경 시내에 도착을 하고 천안문 근처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근처 가게에서 독한 빼갈을 큰 병으로 하나 사고 택시를 타고 북경서역으로 향한다.

  중국에서 가장 큰 역중에 하나라서 그런지 항상 사람으로 붐볐다. 원칙적으로 외국인의 경우는 티벳으로 가기 위해서는 중국 당국의 허가서를 받아야 한다. 긴장을 하고 표를 내미니 역무원이 개찰을 하면서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성공이다’ 초록색의 육중한 북경발 라사행 T-27열차에 오른다. 9시 반에 출발해서 이틀을 달려 46시간여 만인 저녁 8시에 라싸에 도착한다고 한다. 장시간 기차여행의 경험이 한국에 태어나 살아온 나로서는 없었으니 걱정이 앞선다. 예상대로 출발 전 이미 기차는 꽉 차있었다. 같은 칸의 승객들과 인사를 나누고 양치를 하기 전에 술을 마신다. 빼갈의 장점은 빨리 술기운이 몸전체에 퍼진다는 점이다. 양치를 하는데 몸이 휘청인다. 창 밖으로 불빛이 빠르게 지나가고 한 두 시간 간격으로 잠을 깨고 다음날 새벽 서안을 지나고 저녁에는 란주에 그리고 3일째 아침에 서녕에 도착한다. 정차한 틈을 이용하여 기차 밖으로 나와 대륙의 찬 공기를 한껏 폐속에 집어넣는다. 청해성의 성도인 서녕을 지나니 6명이 정원인 침대칸에 달랑 승객은 나와 세 살배기 아이를 둔 엄마만 있다. 올해 28살의 ‘스이’의 엄마는 서안 주변의 농촌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3년째 라싸에서 노동일을 한다고 한다. 다시 10여시간을 달려니 거얼무 자정이 한참지나 새벽에  꺼얼무에 도착한다. 靑藏(칭짱)철도가 놓이기 전까지는 선로는 꺼얼무에서 멈추고 꺼얼무에서 라싸까지는 靑藏공로를 이용해서 15시간을 가야만 했었다. 지금은 철로가 놓여서 10여시간만에 라싸에 다다를수 있게 되었다. 자리에 누워 불면의 밤을 보내니 어느덧 새벽이 다가 오고 있었다. 하늘의 별들의 빛이 약해지고 지평선 저 너머로 희뿌연 가느다란 빛이 올라오고 있었다. 집들도 보이지 않고 저 멀리 산들이 보이는 평원 한 가운데를 기차는 쉼 없이 달린다. 기차에 있는 전광판에는 해발 고도가 이미 4000미터를 넘고 있었다.  투통과 소화불량 그리고 심장 박동의 이상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같은 칸의 스이 엄마는 고산증 증세가 심하게 나타나나 보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맥을 놓고  누워만 있다. 나도 식욕이 없어 맥주만 마시게 된다. 환한 아침이 되자 순정무구한 티벳의 대지가 눈에 확 들어온다. 저 멀리 만년설이 덮힌 설산이 보이고 간혹 야생 당나귀와 야크 무리가 기차에 놀라 뛴다. 라싸 중심지에서 남서쪽에 위치한 역에 도착 하고  티벳 사람의 자가용을 얻어 타고 시내로 향한다. 광장에서 조명을 받은 포탈라 궁전이 궁전 건너편 중국이 연못을 메우고 만든 광장을 굽어보고 서있었다.


(조캉 사원 근처 바코르에서 설날을 맞아 라싸로 온 순례객들이 점심을 먹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 그리고 사람들

  동이 트기 전인 7시 즈음 티벳 각지에서 온 순례객들만이 바코르를 순례하고 조캉사원에 있는 당나라 태종때 문성공주가 가져 왔다는 12살 석가모니불을 친견하기 위해 줄을 길게 서고 있었다. 티벳의 순례객들에게서는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같은 냄새가 난다.  불교 사원에서 염원을 하면서 사르는 향냄새와 젖먹이 아이들에게서 나는 우유냄새. 두 냄새가 티벳 사람들의 삶을 대강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티벳 사람들의 종교적인 면과 유목 생활을 통한 쇠고기와 우유를 즐겨 먹는 그들의 식생활이 녹아 있다. 티벳이라는 나라를 알게 되고 티벳의 역사와 현재 상황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티벳의 독립’이 절대 절명의 진리처럼 여겨졌던 적이 있었다. 중국의 강제적 점령과 티벳 문화의 말살을 통한 중국으로의 동화. 수백만 티벳인들을 학살하고 중국 한족의 대량 티벳 이주로 인한 티벳의 중국화. 이 모두는 티벳이라는 성스러운 나라와 성스러운 민족에 대한 절대악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대책으로는 티벳의 독립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티벳 사람들과의 대화 그리고 티벳 현지에서 본 티벳의 현실이 다가오면서 조금씩 생각이 변하기 시작했다.

  현재 티벳의 공식적인 명칭은 西藏(시짱)자치구로서 중국의 행정 구역상 하나의 省(성)에 속한다. 59년 중국인민해방군의 점령이후 50여년 간 지속된 중국화 정책으로 티벳의 인구의 절반은 한족이 차지한다. 실제 티벳의 수도(성도)인 라싸의 경우 포탈라 궁과 조캉 사원 근처 지역을 제외하면 다른 지역은 티벳인 보다 한족이 숫적으로  우세한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라싸시내는 물론이고 시골에서도 한자로 쓰여진 간판들과 한족의 문화는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티벳 고유의 것들을 빠른 속도로 사라지게 하고 있다. 게다가 인적이 드문 오지에까지 설치된 군부대를 보면 티벳의 얼마남지 않은 고유성 조차도 시간 문제인 것 같아 보인다.

 

(포탈라 궁전 앞 광장의 중국공산당이 세운 기념비를 경비하는 중국 인민 해방군)



철도가 개통되면서 한족의 티벳 이주는 가속화되고 있다. 현재 사천성의 충칭이나 청뚜는 물론이고 수도인 북경에서 그리고 저 남쪽 홍콩의 옆인 광쩌우와 상하이에서 티벳의 라싸까지 직통열차가 연결되면서 새로운 신흥개발지인 티벳으로의 가난한 한족 농민들의 이주는 간편해졌다. 새로이 건설되는 건물이나 대단위 아파트 단지에서 힘겹게 일하는 한족 이주 노동자들과 저 멀리 야크를 방목하다가 또는 농사를 짓다가 추수를 마치고 설날에 즈음하여 라싸로 성지순례를 온 때묻은 티벳 전통 복장의 유목민들과 농민들을 보면 얼굴과 체격의 차이가 있을 뿐 힘겨운 삶의 무게는 차이가 없는 듯 하다.


2002년 처음으로 티벳에 갔을 때만 하더라도 관광객의 대부분은 한국인을 포함한 서양의 외국인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중국의 경제 성장과 더불어 관광수요의 폭증은 티벳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몇 몇 서양 단체 관광객들을 제외하고는 광동지방이나 북경에서 오는 중국인 배낭여행객들의 숫자가 두드러지게 늘어난 것으로 보였다. 그들의 기호에 맞는 식당이나 술집이 포탈라 궁전을 조금 벗어난 지역에 즐비하게 들어서면서 조캉사원 주변의 바코르가 맡았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티벳인들이 밀집한 이 지역은 저녁이 되면 용량 문제로 자주 정전이 되었지만 새로운 한족의 환락가는 정전을 모르고 밤이 되면 각종 식당과 유흥업소의 네온사인이 여타의 중국 대도시와 다르지 않게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티벳의 과거와 티벳의 미래

  티벳의 한족화는 5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금도 중국 당국이 세운 학교를 통해서 티벳어와 문자는 잊혀지고 한자와 한문이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티벳의 정치적, 종교적 유일한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망명과 더불어 새로운 티벳 세대들의 세속화는 학교 교육이라는 미명하의 한족화와 중첩되어 가속화 되고 있다. 이전에 할리우드 영화를 통한 서구화는 한류라는 이름의 한국 영화와 드라마의 유입이 더해져  급속히 티벳 청소년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다. 이들 새로운 티벳의 젊은 세대들은 과거의 전통과 종교 그리고 티벳의 독자성을 부정하기에 앞서 잊은 상태로 태어나 성장하고 있었다. 

우연히 티벳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중국의 북경에서 대학들을 마치고 공무원으로 그리고 교사를 하는 소위 ‘인텔리’라고 할 수 있는 친구들이었다. 그들의 공통적인 점은 서구화에 경도 되었지만 여전히 티벳의 전통적 종교에 대한 신심은 두터웠다. 몰래 조그만 목걸이를 만들어 달라이라마의 사진을 지니고 다닐 정도로 현 달라이 라마에 대한 존경심도 대단했다. 그러나 그들의 달라이 라마의 세속적 권력에 대해서는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중국이 침공하지 전에 티벳은 소수의 특권층이 지배하는 계급사회”였다라고 분명히 비판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으로부터의 “자치와 독립은 원하지만 과거처럼 신권정치 형태는 반대한다”라고 말을 했다. 아울러 중국이 티벳을 침공할 당시의 “200만명의 양민학살을 잊지 않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80년대 이전까지의 중국 공산당의 티벳에 대한 내치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90년대 이후 특히 89년 천안문사태 이후의 중국공산당의 티벳에 대한 더 나아가 중국 전체에 대한 정책에 대해서는 비판을 삼가지 않았다. 자리에 함께 늘 했었던 한족의 중국인 친구도 상당부분 티벳의 자치와 독립에 공감을 표명하면서 중국 공산당의 무늬만 사회주의 슬로건에 대한 심한 혐오감과 나날이 확산되는 계급간의 그리고 민족간의 모순과 분열 그리고 갈등을 우려하고 있었다.

독립과 자치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한결같이 “중국의 문화와 교육을 통한 한족화로 인한 티벳인들의 자치 능력의 저하를 우려”했으며 서부대개발이라는 명목하에 벌어지는 티벳의 부존자원에 대한 무분별한 개발과 티벳  제의 중국 의존성 심화를 이유로 들면서 상당기간 능력을 배양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민족을 넘어 People로

티벳에 머무는 기간 많은 서구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수 있었다. 대개는 관광객이었지만 많은 수의 서구인들은 영어권 나라에서 온 중국 현지의 학교의 영어 교사들이었다.  그중에 미국 오레곤중에서 온 A라는 친구는 홍콩 옆의 션쩐의 외국어 학교에서 작년 여름부터 초등학생을 상대로 영어를 가르치는 신출내기 교사 였다. 나름 영어를 모국어로 둔 덕분(?)에 세계 곳곳을 누비며 돈도 벌고 여행도 하는 그가 부럽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중국에서 한국돈 60여만원을 받고 영어를 가르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들으니 세계 최고의 부자나라라는 미국의 일반 시민들의 사상누각의 삶이 안타깝기도 하였다.

A는 백남준과 같은 비디오 아티스트가 꿈이라고 한다. 당연히 전공도 비디오 아트이고 졸업후 당장의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중국영어교사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대형 마트의 매니져 였으나 50세 이후 정리해고 상태이고 바로 밑의 동생은 소아당뇨병으로 18세에 돌연사망했으며 중국에 있는 동안 여동생도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신도 “올해 6월 말 미국으로 돌아가면 의료보험 혜택이 없는 상태”라고 하면서 걱정을 하고 있었다. 꾸준히 지속되어온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단란하고 평범한 한 미국의 가정의 가장 큰 고민거리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낙천적이고 너그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얼핏 보면 걱정없는 미국의 20대 청년으로 보였지만  커다란 여행용 배낭보다 더 무거운 제도적 모순을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친구의 뒷 모습을 보면서 그 날 저녁 남은 친구들과 만취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티벳의 억압받는 티벳인들, 하루 하루 먹고 살기가 버거운 티벳에 온 한족 이주노동자들, 그리고 세계 최고의 부자나라 미국에서 온 영어 선생. 모두들 얼굴과 언어 문화 그리고 핏줄과 인종은 다르지만 하나로 묶을 수 있었다. 바로 억압받고 고통받는 ‘인간’이라는 틀이었다. 따지고 나누고 분류할 필요없이 ‘인간’이라는 점을 술 기운을 빌어서 토로를 했고 친구들도 선선히 수긍했었다. 그 날 술집 창문 밖으로 새벽 하늘에 초승달은 맑은 티벳의 대기 덕분에 밝았고 그리고 창백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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