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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초딩시절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실비아 크리스텔이 주연한 '엠마뉴엘부인'과 같은 동경 내지는 금기의 대상이었다.
한참 나이가 들어 국도극장에서 어느정도 편집(?)된 '탱고'가 상영된다는 소식이 화제가 되었다.
72년 베르툴루치가 만든 이 영화는 첫장면에서 마론브란도가 분한 폴이라는 주인공의 "fucking
God"라는 독신의 절규와 처음 보는 남녀의 그것도 부녀지간만큼의 나이차는 남녀주인공의
정사씬이 충격이었다.
영화 시작 프롤로그에서 아일랜드 화가 프란시스 베이커의 뒤 틀린 인물들의 초상이 지금와서 생각하는 더 기괴했다,.
스스로 맑스주의자라고 했던 감독의 영화 제작 당시 이미 좌절되고 굴절된 '68'에 대한 오마쥬는 아닌지......
영화 내내 많은 정치적 은유와 설정이 눈에 띈다.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정체모를 주인공 미국인 폴
대령의 딸로 부르주아적 삶을 사는 여주인공 잔
이둘의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존재적 만남
외로운 호화 부르주아 저택에서 이유없는 정사를 벌인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은유와 아울러 남녀간의 성 정치학적 역학 구조!
마지막의 파괴적 결말은 결코 공존할수 없는 그리고 극복될수 없는 계급간의 모순과 적대감을 표현한 것은 아닌지......
‘전함포템킨’과 ‘1917년 10월혁명’의 감독 러시아 아니 영화역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꼽히는 세르게이 에이젠쉬타인의 ‘이반 뇌제’를 보았다.
2차 대전이후 피폐한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의 물적 정신적 토대에서 탄생한 또하나의 역작!
16세기 러시아의 대공작인 이반이 러시아 전체의 짜르가 되기 위한 과정과 과정에서의 다른 왕족과 귀족들의 조직적인 반발이 극의 대개를 이룬다.
1부에서는 타타르족(동양계 몽고족)과 동유럽 국가와의 전쟁을 통한 민족국가 성립과정을 그리고 2부에서는 전제군주제 확립을 위한 평민계급의 친위군대(오프라치니)를 통한 귀족과 왕족의 숙청을 그리고 있다.
전쟁이후 독일제국주의 침략을 이겨낸 스탈린 대원수는 1부에 크게 만족을 할 만하지만
20년대 후반과 30년대 자신의 일인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트로츠키 등의 ‘반대파’에 대한 처절한 숙청을 자행했던 그는 2부에서 당연히 노발대발할 수밖에....
결국 2부는 58년에 스탈린 사후 5년이 지나 상영이 되었다고 한다.
2부 마지막 이반의 연회장면은 갑자기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는데 화려한 러시아 춤과 음악등이 인상에 남는다.
그리고 이반의 역을 맡은 세르게이 쉐르카초프의 괴기스러우면서도 고뇌하는 연기가 일품이다
세르게이 에이젠쉬타인
Sergei Mikhailovich Eisenstein
1898-1948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에이젠쉬타인은 1세기의 영화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감독이자 이론가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반세기의 짧은 삶을 살았지만 초기 무성영화의 혼돈스런 상황을 정리하고 예술과 선동으로서 영화역사를 개척하여 영화의 질적 비약을 가 능하게 하였던 감독이다.
세르게이 에이젠쉬타인은 1898년 1월 23일 라트비아 Latvia 공화국의 리가 Riga 에서 태어났다. 러시아인인 어머니와 독일계 유태인으로 건축으로 성공한 아버지를 둔 부르주아 출신이다. 그러나 그가 11살이 되던 해 부모가 이혼하고 그는 혼자 지내는 시 간이 많아졌다. 에이젠쉬테인은 아버지가 졸업한 페테스부르그 Petesbrug(제정 러시아의 수도)의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하였다. 그러던 중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페테스부르그의 신문 <가제타 Gazetta>에 필명으로 전쟁 상황을 스케치하여 게 재하였다. 그리고 1918년 그는 페테스부르그의 민간 엔지니어 연구소를 떠나 적군에서 복무하게 된다. 그는 페테스부르그 부근 요새에서 엔지니어로 일한 다음 그는 이른바 선동 열차의 선동 일꾼으로 투입된다. 그가 학교를 마치기 위해 군에서 제대한 것은 선동 열차에서 포스터와 삽화를 그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엔지니어를 그만두었던 1920년 여름에, 그는 일본 미술에 대한 관심 때문에 모스크바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그림 대신에 흥미로운 새로운 노동자 극단인 <프롤레쿨트 Proletkult >에서 일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그는 영화에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무대 감독 및 연출가로 일하였다. 여 기서 에이젠쉬테인은 영화에 대한 눈을 뜨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평생의 은사로 여기게 되는 메이어홀드 Vsevolod Meyerhold를 만나게 된다. 메이어홀드와의 만남을 통해 그는 영화에 대한 보다 전문적인 기량을 닦을 수 있었다.
1923년 이 극장에서 그는 오스트롭스키 Ostrovsky의 19세기 고전인 <모든 현인들은 소박하다 Enough Folly in a Wise Man >을 연출하면서 극 중간에 삽입할 단편 영화 <글루모프의 영화 일기 Kinodnevik Glumova>를 제작한다. 그리고 두 달 후 그는 좌파 예술지인 <레프 LEF>에 몽따쥬 이론의 기초가 되는 '견인 몽따쥬 Montage of Attractions'를 발표한다.
그리고 1925년 에이젠쉬테인은 <프롤레쿨트 극단>에서 디자이너 및 감독으로 그동안 수행해 오던 실험적 혁신을 벗어 던지고, 또한 쿨레쇼프와 새로운 영화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하여'라는 15편의 영화 시리즈 중의 한 편을 에이젠쉬테인이 맡았다. (15편 중 완성된 것은 에이젠 쉬테인의 것과 발레리 플레트노프 Valeri Pletnyov의 작품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첫작품 <파업 Strachka:Strike>이 만들어졌다. 그는 이 영화에서 부르주아 영화의 개인주의 대신에 대중의 집단적 행동을 담아 내는 집단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최초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이 영화는 러시아 영화계의 충격이었으며 , 세계 영화사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파업>은 그의 연극 원리인 '견인의 몽따쥬'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는 극장 속의 관객이 매순간 삽화와 삽화 사이, 혹 은 그 삽화 안에서 최고의 충격과 긴장을 느껴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파업>은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등의 영화 적 은유와 이미지로 충만해 있으며, 실제의 일들과 상황들로 홍수를 이루고 있다. 이 영화는 투철한 장인 정신의 예술가인 촬영 기사 에두와르 찌세 Eduard Tisse라는 인물을 탄생시켰다. 그는 러시아 내전에서 뉴스 릴 카메라맨으로 일했으며, <파업> 이후 많은 감독들과 작업하며 그의 재능을 발전시켰다.
<파업>은 소비에트 영화 작업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 작품에 직접 참여한 작업자들에게도 대단한 감명을 주었다. 이 로써 에이젠쉬테인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영화라는 자신을 갖게 되었다. <프롤레쿨트>에 머무르는 한 그는 연극 작업과 영화 작업을 동시에 수행해야 했다. 그러나 자신의 최초의 영화가 완성되자마자 에이젠쉬테인은 <프롤레쿨트 중앙 극 장>의 감독직을 사임하고, 세브잡끼노의 <모스크바 영화촬영소>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에이젠쉬테인의 두 번째 영화<전함 포템킨 Pronenosets Potemkin>('25)은 <파업>에서 실험한 형식들이 더욱더 발 전하여 미학적으로 완벽한 작품으로 탄생하였다. <파업>을 제작하면서 에이젠쉬테인은 놀라운 속도로 예술적으로 성숙되어 서, <파업>과 <전함 포템킨>을 동시에 보아야만 그 성숙과정을 가늠해 볼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수준에 이르렀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관한 프로이드의 에세이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뒤로 자신에게 항상 중요한 문제였던, 예술 창조의 심 리학적 연구 작업에서 맑스와 레닌이 철학적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고 말했으며, 또 <파업>은 다음 작품을 걸작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동기로써, 자신의 이론적 발전 단계의 적절한 시기에 출현했다고 말했다.
1926년 여름 영농 집단화에 관한 공산당의 정책이 우수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다큐멘터리 <총노선 Generalnaia Linnia> 을 제작하게 되나 당은 10월 혁명 10주년을 기념하는 영화를 제작하라는 요구를 전달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에이젠쉬 테인의 세 번째 작품이자 1917년 혁명 10주년 기념작인 <시월 Oktibar>('28)이다. <시월>은 제작된 뉴스 릴이나 혁 명과정중의 다큐멘터리 필름 등을 사용한 대담한 지적 몽따쥬 실험을 하여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이 작품은 혁명군 내부의 이견 과 알력이 그대로 묘사되어 당사자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기도 하였다. 몇 번의 재편집과 선택 과정을 거쳐 대중에 공개된 <시 월>은 대중들로부터 다양한 평가를 들었다. <시월>이 소비에트 영화 예술의 시조라는 극찬과, 노동 대중이 이해하기에 는 너무 관념적이라는 비난이 동시에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강렬한 시각 이미지의 지적 몽따쥬를 적절히 사용한 이 영화는 에이 젠쉬테인 영화 미학의 으뜸으로 손꼽히고 있다.
<시월> 발표 후 에이젠쉬테인은 1926년도에 작업하였던 <총노선>을 <옛것과 새것 Staroie i Novoie : Old and New>('29)으로 개명하여 1929년에 공개하였다. <전함 포템킨>의 해외에서의 성공으로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Douglas Fa irbanks등 외국의 유력한 영화인들의 초청을 받아들여 그는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유럽과 미국을 여행하였다. 1930년 헐리우드 로 건너가 <파라마운드사>와 계약을 체결한 뒤 <미국인의 비극>등 3편의 대본 각색에 들어갔으나 모두 기획 단계에 서 무산되었다. 싱클레어 루이스 Sinclair Lewis 가 자본을 대주어 멕시코 문화와 혁명 정신을 담은 <멕시코 만세 Que Viva M exico!>는 예산 초과로 제작이 중단되어 편집을 마치지 못한 채 소비에트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1934년 사회주의 리얼리즘 Social Realism이 당의 공식적인 예술 노선으로 공표 되자 1935년 작가 동맹에서 형식주의자로 공 식적인 비난을 받고 에이젠쉬테인은 자기 비판을 하는 수모를 겪는다. 1936년 <베진 초원>으로 당에 대한 충성을 나타내려 했으나 독감으로 중단하고 만다. 그리고 1938년 그는 13세기 독일의 침공에 쐐기를 박은 국가적 영웅 알렉산더 네프스키의 영웅 담을 영화화한 <알렉산더 네프스키 Alexandr Nevskii>를 완성한다. 이 영화를 통해 그는 몽따쥬 이론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수직적 몽따쥬 Vertical Montage'를 완성시킨다. 음악과 화면의 완벽한 일치를 꾀하였던 이 영화로 그는 1939년 레닌 훈장 을 받는다.
그리고 1944년 러시아 제국의 최초 황제인 이반 4세가 러시아 통일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이야기를 다룬 3부작 영화를 기획하 여 그 첫 번째 영화인 <폭군 이반 Ivan Groxny>1부를 완성한다. 1945년 이 영화가 개봉되자 스탈린은 그에게 예술가에게 수여하는 최고상인 스탈린상 1등급을 수여한다. 수상 축하 행사 때 그는 <폭군 이반> 2부를 완성하고 흥에 겨워 춤을 추다 가 심장 마비로 쓰러지고 이후 줄곧 병상에 누워 있게 된다. 그러나 <폭군 이반> 2부를 본 스탈린은 자신의 모습이 암시적 으로 묘사되었다고 판단하여 개봉을 금지시킨다. 이 영화는 1958년 스탈린 사후에 개봉되었다.
에이젠쉬테인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 개봉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48년 2월 11일 모스크바의 아파트에서 심장 마비로 숨을 거 두었다.
위대한 감독이자 이론가로서의 세르게이 에이젠쉬테인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계속 되고 있으며, 전세계적으로 그의 영화는 매 일 상영되고 있다. 고작해야 7편의 완성된 작품과 4편의 미완성작품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계적인 감독의 대열에 당당 히 오를 수 있는 것은 그의 독창적이고 탁월한 영화 이론과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여 이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1898년 : 1월 23일 라트비아 리가에서 태어남.
1923년 : 단편 <글루모프의 영화 일기 Kinodnevik Glumova>
1925년 : <파업 Strachka>
<전함 포템킨 Bronenosets Potemkin>
1926년 : <총노선 Generalnaia Linnia> 개봉 안됨.
1928년 : <시월 Oktibar>
1929년 : <총노선>을 개명하여 <옛것과 새것 Staroie i Novoie>으로 공개.
1903-31년 : <멕시코 만세 Que Viva Mexico!> 미완성.
1979년 공동 연출가였던 알렉산드로프 Alexandrov에 의해 완성.
1935-37년 : <벤진초원 Bezhin Lug> 미완성.
1966년 나움 클레이만 Nahum Kleimann에 의해 사진 편집 영화로 완성.
1938년 : <알렉산더 네프스키 Alexandr Nevskii>
1944년 : <폭군 이반 Ivan Grazny>1부 완성.
1947년 : <폭군 이반 Ivan Grazny II : Boyarskii>완성. (1958년 공개>
1947년 : <폭군 이반 Ivan Grazny III> 미완성.
1948년 : 2월 11일 심장 마비로 사망.
영화를 봤다 글쎄 ....
새로운 영화는 아니고 전에 봤던 것을 리와인드 했다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탈지아'와 '스탈커'
향수 그리고 잠입자
70년대 말과 80년대 초의 영화인데.....
무지하게 졸리고 무지하게 지루하고
무지하게 상징이 많고.....
보는 동안 한시도 한눈 팔 수가 없고 머리를 계속 굴려야 하는 영화다.
영화도 하나의 텍스트라고 한다면
그의 영화는 시와 철학이 담겨진 텍스트(최악이다! )
본질적으로 종교적이고 주의주의적 감독의 취향에 반대하지만......
중국 유감
은하철도
7월 말과 8월 중순까지 북경과 서안을 중심으로 중국쪽 실크로드를 다녀왔다. 한국에 있어서는 장마가 끝나고 풍성한 가을걷이를 위해서도 땡볕이 쏟아져야하는 절기에 하늘의 해를 보기가 무척 어려웠고 줄창 비가 왔다고 해서 사막에 갔던 필자로서는 가족과 동지들께 좀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린다.
실크로드! 고대 동양과 서양의 중요 교역로로 비단과 차 그리고 말이 거래되고 불교, 이슬람교, 종이 등 문화적 교차로로써 인류사적인 중요성을 가진 길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80년대 초반 일본과 중국의 공영방송이 합작으로 만든 다큐멘터리 ‘실크로드’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일본의 뉴에이지 음악가 ‘키타로’의 음악이 터지면서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모래 언덕에 낙타들이 열을 지어 걸어가는 화면은 막연한 두려움보다는 동경을 각인시켰던 것 같다.
북경어언대학에 미리 자리를 잡고 연수를 받고 계신 선생님의 도움으로 여행 시작은 북경에서 여유있게 하였다. 북경 서북쪽에 밀집되어있는 대학가에 있는 어언대학은 방학중임에도 불구하고 세계각국에서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온 외국 학생들로 가득했다. 간간히 들리는 한국말로 많은 수의 한국학생들도 짐을 풀고 이곳에서 유학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시내를 오갈때는 시내 버스를 이용했다. 요금은 1위안으로 한국돈으로 120원 정도였다. 자주 버스가 왔지만 항상 만원버스! 정거장 간의 간격도 짧아서 인지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이 한 시간 동안 차장의 함성과 욕설을 듣고 있자니 중국 승객들의 너그러움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인이 박혀서 인지 아니면 무시하는 것인지........
천안문 광장 남쪽 끝에 있는 치엔먼(前門) 주변의 오래된 거리를 어슬렁 거려 본다. 08년 북경올림픽 준비로 여기 저기 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 곳은 600여년 된 거리로 명나라 영락제가 남경에서 북경으로 수도을 옮기면서 형성된 서민들의 생활근거지로 오래되고 좁은 골목들이 많이 남아있었는데 빠른 속도로 재개발을 하고 있었다. 주말 오후 남성들은 사각 ‘빤쓰’차림으로 삼삼오오 집앞에서 카드 놀이나 마작 등을 하고 있었다. 공동화장실에나는 암모니아 냄새와 집집마다 뿜어져 나오는 음식 냄새등으로 북경민중들의 일반적 모습을 볼수 있는 것 같아서 늘상 정겹다.
천안문 광장은 늘 사람들로 북적된다. 모주석기념관, 인민영웅기념탑등 중국현대사의 격랑의 한복판이었다. 49년 내전의 승리로 공화국 성립을 선언했던 곳이자 문화대혁명 당시의 수시로 열렸던 군중집회의 장소요 89년 민주화운동의 성지였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중국은 이런 집회나 대중운동을 잊고자 하는 것 같았다. 광장 주변 임시 화장실로 쓰였던 맨홀도 매워진 것 같았고, 인민영웅탑 주변은 잔디를 깔았으며 철저히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정복 경찰이외에 사복 경찰이 광장 요소요소를 감시하는 것 같았다. 멀리 장안대로 건너의 천안문 중앙의 모주석 초상도 나이가 들어 보였으며 ‘세계인민단결만세’라는 글자를 보면서 작금의 중국의 쇼비니즘과 대비되 아이러니 같아 헛웃음과 욕지거리가 나온다. 서울시청앞 광장과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89년 민주화의 상징에서 이제는 접근조차 힘들어진 인민영웅탑)
중국에 현재 상주하는 한국인 수가 100만 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얼마전까지는 북경 서북쪽의 대학가 근처인 우타커우(五大口)가 한국인 거리였었는데 북경수도 공항 근처 북동쪽에 신시가지 왕징(望京)이 만들어지고 한국인촌이 형성되었다. 평양의 옥류관도 몇 년전 분점을 내고 성업중이었다. 단고기와 평양냉면을 화사한 여성 복무원 접대를 받으면 먹었는데..... 추천할 맛은 아니었다. 너도 나도 나름대로의 희망과 꿈을 같고 ‘서울을 보면서’ 타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북경서 비행기를 타고 4시간 정도 비행해서 신쟝위구르자치성(新彊省)의 성도 우루무치에 도착했다. 서쪽끝의 지방으로 청나라 말엽 중국영토로 복속된 말그대로 ‘새로운영토’이다. 여느 중국 도시마냥 높은 빌딩 숲과 널따란 길 사이로 자전거 대신 자동차의 물결이다. 위구르 족은 예전 유목민족으로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 한족 다음으로 수를 차지하는 민족으로 이슬람교를 기본으로 한다. 그러나 우루무치에서는 위구르민족보다 한족의 숫자가 더 많았다. 90년대 말부터 시작된 소위 ‘서부대개발’의 기치로 내지의 빈한한 한족들이 기회를 찾아 변경 소수민족이 사는 곳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마치 15,6세기 스페인의 몰락한 기사계들(히달고)들이 칼과 갑옷을 가지고 남아메리카 대륙으로 기회를 잡기 위해 돛단배에 올랐듯이.....
우루무치에서 실크로드 여정을 시작했다. 일단 투르판으로 끝없이 계속될듯한 사막이 어느새 초록의 나무들로 끝나면 그곳이 바로 오아시스이다. 풀 한포기 못자라는 척박한 땅에 포플러 나무가 쭉쭉 뻗어 있고 포도밭에서 포도가 익어가고 물소리, 새소리를 듣게 된 예전의 캐러반들은 어떠했을까?
나지막한 건물들로 구성된 투르판은 위구르족 천지였다. 숙소 앞의 시장에 가서 양고기로 만든 빵과 만두를 먹고 포도로 입가심을 한다. 애석하게도 이슬람교도인 그들은 식당서 주류를 팔지 않는다. 연평균 강수량 30밀리의 이 사막의 까칠함! 저녁 위구르 민속 공연을 단체로 일본서 온 할아버지 관광부대와 보는데.....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회전에 넋을 잃었는지 아니면 여정에 지쳤는지 박수 소리가 유난히 작다. 밤 늦게 비가 쏟아진다. 저 멀리 사막 넘어 시커멓게 보이는 산줄기에서 번개가 치고 불모의 땅에 비가 온다. 현지인들은 ‘운 좋은 날’이라면 한다. 그러나 여행객에게는 숙소에 말리고 미쳐 챙기지 못한 옷가지가 걱정이다.
다음은 돈황이다. 기차는 이미 표가 없어서 침대버스를 이용한다. 저녁 8시에 출발 다음날 아침 8시에 도착! 한없이 연결되는 길과 주변의 사막들! 사막 한가운데 덩그라니 기사가 내려놓고는 생리적 문제를 해결하라고 한다. 한밤중 구름없는 하늘에 별들은 쏟아지고 단조롭게 직선으로 뻗은 길에 거침없이 전진을 한다. 예전에 일본 작가 이노우에 야스시가 쓴 소설 ‘돈황’의 로맨스와 살육을 떠올리면서 도시에 접근한다. 여기 저기 옛날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또 파괴되었을 성벽유적을 본다. 돈황은 깐수성(甘肅省)의 끝자락에 위치한다. 돈황석굴로 20세기 초에는 전세계로부터 도굴꾼들을 끌어모으더니 이제는 관광객을 끌어 모으고 있다. 400년 북위시대에서 시작해서 19세기 청나라까지 1500여 년 간 지역의 세력가들은 사막 한가운데 산에 굴들을 파고 나름대로의 염원을 담아 불사를 조성했다고 한다.
입장료가 무려 180위안이다! 기차 차장이 월급 2000위안인데.... 많이 비싸다. 중국도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로 돌아서면서 빈부의 격차가 발생하고 있다. 수 많은 중국인들이 여행을 시작한다. 그래도 좀....
저녁 해가 지면서 사막의 열기가 누그러지고 시내를 어슬렁거린다. 작은 도시인데도 흥청인다. 건물로 둘러싸인 한가운데에 노천술집이 있다. 여기저기서 중국 졸부와 서양의 관광객이 양꼬치 안주 삼아 술을 먹는다. 자리 잡고 한잔 하는데 중국 여성이 테이블로 와서 술을 따라 준다.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변경 지역의 낯설음보다 무안함과 자괴감이 앞선다. 서둘러 맥주 두병을 비우고 조잡한 관광 상품의 행렬을 빠져 나오면서 돈황의 마지막 밤을 마친다. 다음날 아침 11시 깐수서의 성도인 란저우(蘭州)행 침대 버스에 오른다. 다음날 7시까지의 19시간여의 장도이다. 고린내가 난다. 에어컨도 작동하지 않는다. 기사는 연신 독한 중국 담배를 피워 문다. 나도 담배를 피운다. 장시간 버스를 운전하다 보니 두 명의 기사가 번갈아 가면서 밤을 새워 가면서 달린다. 간간히 도로변에서 승객을 태우고 승객을 내린다. 농산물에 옷가지를 잔뜩 들고 타고 내리면서 빗방울이 떨어진다.
소위‘중원’에 들어섰나 보다. 아침 일찍 비몽사몽간에 란저우에 도착한다. 며칠 만에 도착하는 대도시이다. 매연과 매캐한 도시만의 냄새가 잠을 깨운다. 바로 실크로드 여행의 종점인 시안(西安)행 버스를 탄다. 일반 버스다. 12시간 이동거리! 한국에서 12시간 여정은 없지만 중국에서 12시간은 동네 마실 가는 수준인가 보다. 란저우에서 시안까지의 굽이굽이 산길을 낡은 버스는 힘겹게 매연을 토하며 간다. ‘중원’에 들어서면서 이전의 변경과 다른 점이 있다면 마을과 마을의 간격이 조밀하다는 것과 산 정상까지 개간을 하여 밭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인구도 조밀해진다. 정거장 간격도 짧고 많은 사람이 타고 내린다. 문명의 이기에 익숙치 못한 사람들을 위한 멀미용 비닐 봉지가 길의 굴곡의 따라 손잡이에 매달려 흔들린다. 갑자기 버스가 선다. 창문 너머 보니 버스와 승용차가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낙석 사고다. 개간으로 인해 약간의 비로도 길은 쉽게 낙석등으로 끊어 진다. 결국 2시간여의 도로 한복판에서 뙤약볕에 기다린다. 다시 출발! 두 시간의 길에서의 지체를 만회하려는 듯이 기사는 위험천만한 추월과 과속질주를 한다. 마치 추월과 과속을 하기 위해 태어난 듯이.... 깐수성을 넘어 저녁 무렵 샨시(陝西)성에 도착하고 고속도로 다운 길에 접어들면서 안도가 된다. 끝없이 이어진 옥수수 밭의 연속 속에 저 멀리 당태종의 거대한 능이 눈에 들어온다. 시안까지는 이제 200여 키로 남았다. 고속도로 상에서의 승객의 타고 내림은 계속되고 본격적인 비가 내린다. 정말 비를 몰고 다니는 것 같다. 서서히 건물이 보이기 시작하고 드디어 종착점인 시안 외곽에 도착한다. 대학시절 시안을 가고 15년 만에 다시 가본다. 한창 공사로 여기 저기 혼잡했던 기억이 나는데 이제는 제법 틀을 잡았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세운 시안의 성벽을 돌아 북쪽에 위치한 기차역에서 버스는 정차한다.
일찍이 진나라 시황제가 수도로 삼은 시안은 그 후 한나라와 당나라의 수도로 국제적으로 이름을 높였다. 촉촉이 내리는 비에 우산을 벗삼아 시내를 어슬렁거린다. 대로변을 약간만 벗어나면 중국 한족의 생활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현재 국제관광도시로 이름이 높아서인지 화려하고 거대한 호텔과 백화점이 시 한복판을 점령하고 있고 수 많은 젊은이들이 서양과 한국의 문화 쫒기에 여념이 없는 활기찬 도시이다. 길 여기 저기 구걸하는 이와 장애인들이 관광객들의 값싼 동정심을 유발한다. 거리 곳곳의 호텔은 현관문에 커다랗게 짧은 시간 방을 빌려준다는 간판을 내건다. 개방화와 자유화의 현주소 같아 씁쓸했다.
시안 시내의 종루 근처의 야시장에 갔다. 관광객으로 흥청거렸다. 역시나 주인은 한족이고 일하는 이는 소수 민족이다. 투루판의 야시장이나 그전 우루무치의 야시장 이건 비슷한 모습이다. 자유화와 개방화란 곧 자본주의화를 의미하고 90년대 말이후 중국의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첨단을 내딛고 있다. 의료와 교육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사라졌다고 한다. 귀족형 사립학교의 광고가 공중파 텔레비전을 타고 화끈하게 그 학교 출신의 북경대 재학 중인 졸업생이 학교 광고를 한다. 시장에서는 단돈 120원짜리 식사를 위해 줄을 서는 서민들이 있는 반면 백화점에는 수백만원 옷과 수천만원 시계가 팔려나가고 있다.
계급 사회의 철폐를 내건 사회주의의 이념은 없고 선전만이 난무한다. 세계인민대단결의 구호만 있고 내부에는 민족간의 착취와 억압의 강화되고 있다.
(시안 시내의 백화점과 호텔 자본주의 어느 나라보다 흥청인다)
마지막 날 밤 북경시내를 산책하면서 조명을 받아 화려하게 빛을 발하는 천안문주변을 보았다. 89년 당시의 수많은 대학생과 민중들로 매워졌던 광장이 이제는 관광객과 사복 공안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휘황찬란한 천안문 주변의 야경과 묘하게 공안의 위압적 태도와 막무가내의 행동에 아무 말 못하는 중국 민중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는 북경과 상해의 마천루와 화려한 야경에 혹했던 그리고 유적과 유물에 경탄만 했던 여행객이었음을 반성하게 된다.
(허망한 구호로 천안문은 장식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끝없이 연결된 사막과 황무지 중국의 서부대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성장을 빌미삼아
제국주의정책을 노골화하고 있다)
매트릭스에서 벗어나기. 학벌 사회에서 벗어나기.
은하철도
몇 년전 개봉한 영화를 새삼스레 다시 찾아서 보게 된다. 전편 말고도 후속편으로 두 편이 더 나왔으며 애니메이션 영화도 개봉된 ‘매트릭스’가 바로 그것이다. 첨단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컴퓨터 그래픽과 홍통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현란한 액션, 그리고 귀청을 울리는 테크노 음악이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어 개봉 당시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관객들의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야?”와 “정말 재미있군!”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읽고자’하는 관객들과 영화를 ‘보고자’하는 관객 모두를 충족시켰다는 점이 세계적 흥행작의 원인이었다.
꿈인가 현실인가?
주인공은 소프트웨어회사의 평범한 사원이다. 거개의 사람들처럼 정보화 사회 속에서 생활하고 잠도 자고 내일을 준비한다. 홀연히 컴퓨터 상에서 메시지가 뜨고 그 메시지가 원인이 되어 완전히 인생이 뒤바뀐다.
“지금 우리는 꿈을 꾸고 있다고 하자. 그리고 저 개별적인 것들, 즉 우리가 눈을 /뜨는 것, 머리를 움직이는 것, 손을 펴는 것 및 이와 비슷한 것들은 참된 것이 아니 라고 하자. 또 아마 우리는 손도 몸 전체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자. ......”
- 데까르트의 성찰 1편에서 -
17세기의 프랑스의 데까르트(1596-1650)는 이성(理性)의 의심을 통한 실험을 통해 결국 이성의 자기 회복과 확신을 한다.
그러나 영화의 주인공(네오)의 경우는 다르다. 결국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는 실재가 아니고 가상의 세계이며 자신이 먹고 자고 생활하는 상황은 컴퓨터에 입력되어 있는 프로그램상의 가상이며 단순히 거대한 인큐베이터 안에서 단순이 기계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는 ‘밧데리’역할의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데까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자신의 사유의 기초를 의심한다.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모든 현상들 심지어 손, 몸, 눈도 공상적인 것일 수 있다고 의심한다. 마치 네오가 거대한 기계에 케이블로 연된 된 채 끝없는 꿈을 꾸면서 이 꿈을 실재라고 여기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데까르트는 이러한 의심 상태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근거로서 의심하는 ‘자신’을 산출한다. 즉,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의심하고 회의하는 ‘자신’의 존재는 결국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ergo sum.) 결국 중세 사회 안에서 신의 예지에 부속된 기능으로서 한정된 기능만을 인정받은 인간의 이성이 오히려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주도적인 위치로 올라서게 되면서 근대사회는 시작이 되고 과학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놀랄만한 생산력의 증대는 자본주의 생산형태의 출현과 발전은 물론이요 오늘날의 인류의 생활 환경을 가져다주었다.
데까르트와 달리 우리의 주인공은 현실의 삶을 긍정하지 못하고 또 다른 삶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현대식의 깔끔한 아파트와 맛있는 스테이크를 버리고 먹기가 역겨운 음식과 기름때로 얼룩진 함정을 받아들이고 목숨을 담보로 한 기계와의 한 판을 통한 매트릭스의 파괴에 나선다.
대학 서열이라는 매트릭스
우리는 태어나서 자라면서 무수한 경쟁을 경험한다. 아니 경쟁을 하기 위해 길러진다. 특히 학교에 들어오면서 수많은 자기또래들과의 공식, 비공식의 경쟁을 통해 자기 발전의 기회로 삼거나 자기혐오의 원인으로.
수업시간과 시험은 물론이고 운동회와 학예회에서의 경쟁을 통해 자기를 형성한다. 누구는 경쟁의 대오에서 앞줄에 서서 나아가고 누구는 낙오되어 뒷줄에 서서 방관하거나 자기모멸과 멸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경쟁의 최대 관문은 입시 바로 그것이다. 날아다니는 비행기도 서야 하고 출근시간도 늦추어야 하는 모든 국민들이 알아야 하는 수능 시험날! 수험표를 가지고 온 수험생에게는 머리파마도 할인해 주어야 하고 당일의 술주정과 일탈도 너그러이 봐 줘야 하는 모든 국민들의 이벤트!
하루에 그간의 실력(?)을 평가한다. 등급제이던 점수제이던 전국의 모든 수험생을 단일한 기준으로 줄을 세우고 대학으로 하여금 선발하도록 한다. 수험장에서는 모든 통신기계와 전자 제품의 반입이 금지가 되고 대 테러 검색용 금속탐지기가 동원된다. 출제 교사와 검토 교사는 한 달간 세속으로부터 격리되고 수험장에는 앞과 뒤로 교사들이 매시간 감독을 한다. 완벽한 차단과 객관성을 통한 공정한 경쟁의 압권이다. 시험을 마친 후 공중파 방송에서는 시험의 분석이 이루어지고 뉴스에서는 상위권 대학의 합격권의 점수가 공표된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수험생들은 심한 자기 우월감에 또는 자기 혐오감에 학교에 입학을 하고 많은 수험생은 다음번의 국민적 이벤트(?)에 동참하기 위해 학원을 등록한다.
완벽한 시나리오와 과정을 통해 학벌과 입시 제도는 공정성을 최대한 내세우면서 학부모와 학생은 물론 전 국민들에게 당당하게 받아들이기를 강요한다. 그리고 국민들은 제도와 구조 안에서 순응하면서 고통임에도 감수한다. 완벽한 또 하나의 매트릭스!
매트릭스 안에서 살기 아니면 벗어나기
허상을 만드는 것도 인간이고, 자신이 만든 허상에서 허우적거리는 것도 인간이다. 아울러 허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실재의 세상을 찾고 만드는 것도 인간이다. 21세기 포스트 모던과 노마디즘이 휩쓰는 한국사회에서도 데까르트의 가상실험이 유의미 한 것은 아닐런지!
결론을 대신하여 들뢰즈의 말을 옮겨 본다.
“혁명의 장래에 관한 물음은 나쁜 물음이다. 왜냐하면 이 물음을 묻는 한은 혁명적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며, 이 물음은 어느 층위에서건 어느 곳에서건 사람
들의 혁명적으로-되기라는 문제를 훼방한다는 그런 목적으로만 정확히 제기되기 때문
이다.” - 질 들뢰즈 -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은하철도
우리의 억제된 욕구와 욕망의 원천은 개인적인 성적 억압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사회 경제적인 모순에 기인한다.(자살의 원인을 살펴보라!)
편집증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분열증을 꿈꾸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끊임없는 분열증적 모습을 꾀한다.(선량한 아버지 그러나 원조교제의 '도너')
'원조교제'라는 관계속에서 도너의 경우는 지배적 , 우월적인 위치를 점하고 상대방의 경우는
수동적, 피억압적 지위를 가지게 된다. 지배와 피지배 그리고 능동과 수동의 관계는
개인 각각의 성적,사회적 지위에 기인하기 보다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화폐의 량에 기초한
'화폐의 능력'에 기초한다.
'호스트바'에서의 경우를 보면 관계의 전도(물론 성적 지위로만 보면)가 나타나는 듯 하지만
두 경우의 공통점이 바로 '돈의 능력'임이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성적 도착, 색광증 등으로 설명하는 전통적인 정신 분석학의 설명보다는 사회 경제적 원인을 중시하면서 설명하는 들뢰즈 가타리적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는 부분이다. 물론 과도기적으로 구조적 언어학에 기반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개혁을 추구한 라캉의 학설도 있지만 라캉의 경우는 언의의 상징으로서의 기능은 인지하였지만 사회의 관계속에서의 언어의 능력과 전도된 허상의 인식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아무리 개인간의 관계가 유지 지속 된다고 하더라도 또는 종료된다 하더라도
관계속의 개인들의 욕구와 욕망은 고개를 쳐들게 되고 관계의 유지와 상관없이
재생산된다는 것에 근본문제가 있다.
과연 해결점은?
한계 개념의 한계(The limit of concept of the Marginal)
은하철도
19세기 후반 맑스의 잉여가치이론에 기초한 '정치경제학'의 계급적 과학적 성격을 희석시키기
위한 전세계적 부르주의 경제학의 노력은 '한계이론'이라는 국제적 공모의 결과물로 나타난다.
수확 체감의 법칙, 한계비용 체증의 법칙,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
미분수학의 도움을 얻어 정교하게 짜여진 한 편의 소설같은 이 사이비 과학은 자본에게는
상품의 가격 인상의 정당성을, 노동계급에게는 임금 인상의 악마성과 절제 검약의 십계명을
가져왔다.
'단위당 소비량의 증가는 단위당 만족감의 절대적 감소를 초래한다'라고 요약될수 있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은 실제 경제활동에서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작동한다.
오히려 끊임없는 욕구와 욕망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이윤획득의 자본주의적 욕망이 도처에서
횡행하고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생산요소 투입의 단위당 증가는 이전의 생산량보다 생산량의 절대적 감소를 가져 온다'라는
수확체감의 법칙은 자본에게 상품의 가격 인상의 절대적 정당성의 기제로 작동하는 금과옥조이다.
그러나 교통과 통신의 발달과 세계시장으로의 확대 그리고 '규모의 경제'등으로 인해 맞지 않는 사이비 이론이다
아울러 '수확 체감의 법칙'에 전제를 둔 '한계 비용 체증의 법칙'은 노동계급의 임금 인상 요구의 반대논리로 작동하고 있다.
이것들은 과학성이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 왜곡의 전형이다.
맑스주의와 수정주의
레닌
『프롤레타리』29호, 1908년 4월 16일
기하학의 공리가 인간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을 논박하려는 시도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잘 알려진 속담이 있다. 신학의 낡은 편견들과 충돌했던 자연사에 관한 제이론은 가장 광적인 반대를 불러 일으켰으며, 여전히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의 선진계급을 계몽․조직하는 데 직접적으로 봉사하며, 이 계급이 직면하는 과제들을 지시해주고, 새로운 체제에 의한 낡은 체제의 (경제적 발전에 의한) 대체를 증명하고 있는 맑스주의의 교리-이 교리가 그 성장 과정에서 일보일보 전진할 때마다 투쟁해야 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와 같은 것은 소유계급들의 자라나는 세대의 의식을 혼미하게 하고 그들을 내외의 적들에게 적대적으로 “훈련”시키기 위해 공식 교수들이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부르주아 과학과 철학에 적용된다. 이 과학은 맑스주의에 관한 것이라면 들어 보려고도 않으면서 맑스주의는 논박되어 폐기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맑스는 사회주의를 논박함으로써 경력을 쌓고 있는 소장 학자들과 온갖 종류의 낡아빠진 “체계”의 전통을 보존하고 있는 쇠약한 노장들 양자에 의해 맹렬히 공격받는다. 맑스주의의 진보, 즉 그 사상이 노동계급 사이에 확산되고 확고하게 자리잡아 가고 있다는 사실은 불가피하게 맑스주의에 대한 이들 부르주아적 공격의 빈도와 강도를 증대시키며, 맑스주의와 공식과학에 의해 “폐기될” 때마다 그 공격은 더욱 강해지고 맹렬해진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투쟁과 관련된 그리고 주로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유행한 제교리 사이에서 조차 맑스주의는 결코 단번에 그 입지를 공고히 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이 존재한 첫 반세기(1840년대부터 계속해서)에 맑스주의는 자신에게 근본적으로 적대적인 제이론과 투쟁을 벌였다. 40년대 초 맑스와 엥겔스는 철학적 관념론의 관점에 있었던 급진적 청년헤겔파와 관계를 청산했다. 40년대 말 그 투쟁은 푸르동주의에 대항하여 경제이론 분야에서 시작되었다. 50년대에는 1848년의 폭풍의 해에 모습을 나타냈던 제당파와 이론에 대한 비판에서 이 투쟁이 완결되었다. 60년대에 투쟁은 일반이론의 분야에서 직접적인 노동운동에 더 가까운 분야, 인터내셔날에서 바쿠닌주의의 축출로 옮겨졌다. 70년대 초 독일의 무대가 잠시 프루동주의자 뮐버거에 의해 장악되었다가 70년대 말에는 실증주의자 뒤링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양자의 영향력은 이미 완전히 무가치한 것이었다. 맑스주의는 이미 노동운동 내부의 다른 모든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의심할 바 없는 승리를 획득하고 있었다.
90년대가 되자 이러한 승리는 대체로 완결되었다. 심지어 프루동주의의 전통이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고수되어 왔던 라틴 국가들에서조차 노동자당들은 실제로 맑스주의적 토대에 기초하여 자신들의 강령과 전술을 수립했다. 부활한 노동운동의 국제 조직-주기적인 국제 대회의 형태-은 처음부터 거의 한 번의 투쟁도 없이 모든 근본적인 점에서 맑스주의적 관점을 채택했다. 맑스주의가 자신에게 적대적인 다소 통합적인 모든 교리를 축출한 이후, 그 교리들 속에 표현되어 있었던 제경향은 다른 통로를 찾기 시작했다. 그 투쟁의 형태와 원인은 변했지만 투쟁은 계속되었다. 맑스주의가 존재한 두 번째 반세기는 맑스주의 자체 내부에서 맑스주의에 적대적인 한 경향의 투쟁과 함께(90년대에) 시작되었다.
한때는 정통 맑스주의자였던 베른슈타인은 맑스 개정의 가장 소란스럽고 가장 고의적인 표현인 맑스주의의 수정, 즉 수정주의를 들고 나옴으로써 이 경향에 자기 이름을 부여했다. 더욱이-경제적 후진성과 농노제의 잔재에 짓눌린 농민인구의 웨 때문에-비맑스주의적 사회주의가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근거를 갖고 있었던 러시아에서, 그것은 우리 눈앞에서 쉽게 수정주의로 넘어가고 있다. 농업문제(모든 토지의 시유화 강령)와 강령 및 전술의 일반적인 문제 양자에서 우리의 사회-나로드니끄들은 나름대로 통합적이고 맑스주의에 근본적으로 적대적이었던 자기들 체계의 사멸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잔재 대신 맑스주의의 “개정”을 더욱 더 도입하고 있다.
전맑스주의적 사회주의는 패배했다. 그것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의 독자적인 근거가 아니라 맑스주의의 일반적 근거 위에서 수정주의로서 그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수정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철학의 영역에서 수정주의는 교수들의 “과학”의 흔적을 쫓아 다녔다. 교수들은 “칸트로 되돌아”갔으며-수정주의자들은 자기만족적으로 웃으면서 유물론은 오래 전에 “논박되었다”고([편람] 최신호의 말 한자한자 그대로) 중얼거렸다. 교수들 자신들은 헤겔의 관념론보다 천 배는 더 조잡하고 맥빠진 관념론을 설교하면서도 헤겔을 “죽은 개” 취급하고 변증법을 비웃었고-수정주의자들은 정연된(그리고 혁명적인) 변증법을 “단순한”(그리고 정적인) “진화론”으로 대체하면서 과학의 철학적 천박화라는 늪에 빠져 버둥거렸다. 교수들은 자신들의 관념론적이고 “비판적인” 체계를 지배적인 중세 “철학”(즉 신학)에 맞게 각색함으로써 그들의 공식 봉급을 벌었고-수정주의자들은 종교를 현대의 국가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선진계급의 당과 관련되어 있는 “사적인 문제”로 만들려고 하면서 그들과 가까워졌다.
그러한 맑스주의의 “개정”이 계급관계에서 실제로 의미했던 것은 기술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명약관화하다. 우리는 단지 국제 사회민주주의운동에서 일관된 변증법저 유물론의 관점에서 수정주의자들의 믿기지 않을 정도의 진부함을 비판한 유일한 맑스주의자가 플레하노프였다는 정도만 지적하겠다. 플레하노프의 전술적 기회주의를 비판한다는 미명하에 낡고 반동적인 철학적 찌꺼기를 밀수입하려는 깊이 잘못된 시도들이 현재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이 점은 더 더욱 강조해야 한다.
정치경제학으로 넘어가서, 제일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영역에서 수정주의자들의 “개정”은 훨씬 더 광범위하고 포괄적이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경제발전에 관한 신자료들”로 공중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들도 있었다. 그들이 말한 바에 따르면, 대규모 생산에 의한 집중과 소규모 생산의 축출은 농업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으며 상업과 산업에서는 매우 서서히 진행된다. 공황이 이제는 희귀해지고 약화되어서, 카르텔이나 트러스트는 아마 자본이 공황을 완전히 제거하게 할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들에 따르면 계급적대가 더 완화되고 덜 첨예하게 되는 경향 때문에 자본주의 “붕괴론”은 불건전하다. 마지막으로, 그들에 따르면 맑스의 가치이론을 뵘-바베르크에 일치하도록 교정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 문제들과 관련한 수정주의자들에 대한 투쟁은 국제사회주의에서 20년 전 엥겔스가 듀링과 벌인 논쟁만큼이나 풍성한 이론적 사유의 부활로 귀결되었다. 수정주의자들의 제논지는 사실과 수치의 도움을 받아 분석되었다. 수정주의자들은 현대의 소규모 생산을 장미 빛으로, 체계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공업뿐만 아니라 농업에서도, 소규모 생산에 대한 대규모 생산의 기술적․상업적 우위가 반박할 수 없는 사실들에 의해 입증되었다. 그러나 농업에서 상품생산은 훨씬 덜 발전해 있으며, 대체로 현대의 통계학자들은 농업이 점차 세계경제의 교환과정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특별한 농업분야(때때로 그 진행과정조차)를 선별해 내는데 별로 능숙하지 못하다. 항상적인 음식 질의 악화, 만성적인 기아상태, 노동일의 연장, 가축의 질과 관리의 악화 등, 한마디로 수공업 생산이 매뉴팩처에 대항하여 자신을 유지시켰던 바로 그 방법들에 의하여, 소규모 생산은 자연경제의 파멸위에서 자신을 유지한다. 과학과 기술의 모든 진보는 자본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소규모 생산의 토대를 피할 수 없게 그리고 가차없이 잠식한다; 종종 복잡 미묘하기까지 한 이 과정의 모든 형태를 연구하여 소생산들에게 자본주의 아래에서 자기 것을 유지하는 것의 불가능성, 농민경영의 절망상태 및 농민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점을 채택할 필요성을 증명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과제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과학적 의미에서 수정주의자들은 전체로서의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언급없이 일면적으로 선택한 사실들에 기초한 피상적인 일반화라는 죄를 저질렀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불가피하게 그들은 자신들이 원했던 농민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관점을 채택하는 대신 소소유자의 태도(즉 부르주아지의 태도)를 취하게끔 조장하고 부추김으로써 죄를 저질렀다. 공황이론과 붕괴이론에 대한 수정주의의 입장은 더욱 조악하다. 아무리 짧은 시간이었을지라도, 오직 가장 시야가 좁은 사람들만이 겨우 몇 년의 산업상의 번성과 번영의 영향을 받아 맑스 이론의 토대를 재주조하려고 생각할 수 있었다. 현실은 곧 공황은 과거의 것이 아니라는 것; 즉 번영 뒤에는 공황이 온다는 것을 수정주의자들도 분명히 알게 해주었다. 특수한 제공황의 형태, 순서, 양상은 변화했지만 공황은 자본주의체제의 불가결한 구성자로서 남아있다. 생산을 통합함과 동시에 카르텔과 트러스트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만큼 생산의 무정부성, 프롤레타리아 존재의 불안정성 및 유례가 없을 정도로 계급투쟁을 격화시키는 자본의 억압성 등을 심화시켰다. 자본주의가 몰락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것-개별 정치․경제적 위기 및 전체 자본주의체제의 완전한 붕괴라는 의미에서-이 분명해졌으며, 바로 새로운 거대 트러스트들에 의해 대규모적으로 되었다. 많은 징후들이 보여주고 있는 임박한 산업공황을 굳이 거론치 않더라도 최근 미국의 금융공황과 전유럽을 덮친 가공할 실업의 증대-이 모든 것은 분명히 수정주의자 자신들을 포함하여 모두에게 잊혀진 수정주의자들의 최신 “이론들”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인들의 동요가 노동계급에게 준 교훈은 잊혀져서는 안된다.
가치이론에 관해 말하자면, 뵘-바베르크를 모방한 아주 모호한 암시와 탄식을 빼고 나면 수정주의자들은 전혀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과학적 사유의 발전에 어떤 흔적도 남겨 놓지 못했다.
정치학의 영역에서, 수정주의자는 맑스주의의 토대인 계급투쟁의 교리를 진짜 수정하려고 했다. 정치적 자유, 민주주의 및 보통선거로 인해 계급투쟁의 근거가 제거되며, 노동자들에게 조국은 없다는 『공산당 선언』의 낡은 명제는 비진리로 된다고-그들은 우리에게 말했다. 그들이 말한 바에 따르면, 민주주의에서는 “다수의 의지”가 지배하기 때문에, 국가를 계급지배의 기관으로 간주해서는 안되며 또한 반동들에 대항하는 진보적이고 사회개혁적인 동맹들을 거부해서도 안된다.
이러한 수정주의자들의 논지는 결국 상당히 균형잡힌 관점의 체계, 즉 오래되고 유명한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의 견해가 된다는 것에는 재론할 여지도 없다. 자유주의들은, 투표권과 참정권을 모든 시민이 공유하기 때문에 부르주아 의회제는 계급과 계급분화를 파괴한다고 줄곧 주장했다. 19세기 후반 유럽의 전역사와 20세기 초 러시아혁명의 전역사는 그러한 견해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경제적 차별들은 “민주주의적인” 자본주의 아래에서 완화된 것이 아니라 심화되고 강화되었다. 가장 민주적인 부르주아공화국일지라도, 의회제는 그 계급억압 기관으로서의 본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노골화한다. 이전에 정치적 사건들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보다 훨씬 광범위한 주민대중을 계몽․조직하는 것을 도움으로써 의회제도는 공황과 정치혁명의 제거가 아니라 그러한 혁명 동안 내전의 최대한의 격화로 나아간다. 1871년 봄의 제사건과 1905년 겨울의 제사건은 어떻게하여 이러한 격화가 불가피하게 일어나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프롤레타리아운동을 짓밟기 위해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국가 전체의 적이며 그 나라를 파괴한 외국군대와 거래했다. 의회제도와 부르주아민주주의의 불가피한 내적 변증법은-그것은 대중적 폭력에 의해 이전보다 훨씬 첨예한 논쟁의 결정으로 나아간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의회제도에 기초하여 원칙적으로 일관된 선동․선전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며, 그러한 논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노동계급을 진정으로 준비시킬 수도 없을 것이다. 서구 혁명에서는 사회개혁론자들, 러시아 혁명에서는 자유주의적 개량주의자들(카데트)과의 동맹, 합의 및 블록의 경험은 이러한 합의가 대중들의 의식을 몽롱하게 할 뿐이며, 투사들을 전혀 투쟁할 능력이 없고 가장 동요하고 배신적인 요소들과 결합시킴으로써 대중투쟁의 실제적인 중요성을 고양하는 것이 아니라 약화한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 주었다. 프랑스의 밀레랑주의-수정주의 정치전술을 광범위하게, 진짜 전국적인 규모로 적용했던 최대의 경험-는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결코 잊지 못할 수정주의에 대한 실천적인 평가를 제공해 주었다.
수정주의의 전제 및 정치적 경향의 자연스러운 보완물은 사회주의운동의 궁극목적에 대한 그 태도였다. “운동이 전부이며, 궁극목적이란 아무것도 아니다”-이 베른슈타인의 표어는 많은 긴 논문들보다 수정주의의 본질을 더 잘 표현하고 있다. 사건 하나 하나마다 행동을 결정하고, 그날 그날의 사건들과 수시로 변하는 사소한 정치를 쫓아다니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차적인 이익과 전체 자본주의체제 및 모든 자본주의적 진화의 기본 특징들을 잊으면서, 순간의 실제적이거나 가상적인 이익 때문에 이 일차적인 이이들을 희생하는 것-그러한 것이 수정주의의 정책이다. 이 정책의 바로 그 본성으로부터 그것이 무한히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으며, 그리고 모든 다소라도 “새로운” 문제, 모든 예기치 못한 사건의 전환이 있을 때마다, 그것들이 사소한 정도로 또한 아주 짧은 시기 동안만 발전의 기본노선을 변경시키기만 해도 이런저런 류의 수정주의가 불가피하게 나타나리라는 것을 불을 보듯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수정주의의 불가피성은 현대사회에서의 그 계급적 기원에 의해 결정된다. 수정주의는 국제적 현상인 것이다. 아무리 정보에 어둡더라도 생각하는 사회주의자라면 누구라도 독일에서 정통파와 베른슈타인파의 관계, 프랑스에서 게드주의자와 죠레스주의자(지금은 특히 부루스주의자)의 관계, 영국에서 사회민주주의연합과 독립노동당의 관계, 러시아에서 볼셰비크와 멘셰비크의 관계는 이 나라들이 처한 현 상태에서 민족적인 제조건과 역사적 요인들의 엄청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동일하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현재의 국제 사회주의운동 내부의 분리는 세계의 모든 나라들에서 동일한 노선을 따라 진행되고 있는데, 이것은 여러 나라들의 이질적인 제경향이 하나의 국제 사회주의운동 내부에서 투쟁했던 삼사십 년 전에 비해 거대한 진보가 이루어졌음을 증거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혁명적 생디칼리즘”처럼 라틴계 나라들에서 형성되어 온 “좌로부터의 수정주의” 또한 맑스주의를 “개정”하면서 맑스주의에 적응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라브리올라와 프랑스의 라가드렐은 번번히 잘못 이해된 맑스에서 옳게 이해된 맑스에게로 호소하곤 한다.
우리는 아직은 기회주의적 수정주의만큼 발전하지 못한 이 수정주의를 분석하는 데서 멈출 수는 없다; 그것은 아직 국제화되지 않았으며, 단 한 나라에서도 사회주의당과의 한 번의 실천적인 대전투도 겪어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에서 묘사한 “우로부터의 수정주의”에 한정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정주의의 불가피성은 어디에 놓여있는가? 왜 그것은 민족적인 특이성이나 자본주의의 발전정도의 차이보다 더 뿌리깊은 것인가? 왜냐하면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나란히 항상 광범한 쁘띠부르주아지와 소소유자 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소생산자에서 발생했으며,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수많은 새로운 “중간층”들이 자본주의에 의해 불가피하게 생겨나게 된다(공장의 하청업체들, 가내노동, 자전가나 자동차산업과 같은 대산업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전국에 흩어져 있는 소규모 작업장들). 이 새로운 소생산자들 또한 불가피하게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열로 내던져진다. 그렇기 때문에 광범위한 노동자당들의 대열 내부에서 쁘띠부르주아적 세계관이 계속해서 고개를 치켜들게 된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일어나게 될 운명의 변화에 도달할 때까지는 그럴 수밖에 없으며 항상 그럴 것이라는 것도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대다수 인구의 프롤레타리아화가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이론적인 영역, 즉 맑스에 대한 이론적 수정들에서만 겪고 있는 것; 수정주의와의 전술적 차이 또는 그것에 기초한 분열처럼 현재는 노동운동의 개별적이고 부분적인 문제들에 관해서만 등장하는 것-이것을 노동계급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모든 논쟁점들을 첨예하게 하고, 대중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가장 직접적인 중요성을 갖는 문제들에 모든 차이를 집중시킬 때, 그리고 투쟁의 열기 속에서 적과 우군을 구별하고 적에게 결정타를 먹이기 위해 나쁜 동맹자를 버리는 것이 필요하게 될 때,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규모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19세기 말에 수정주의에 대항하여 혁명적 맑스주의가 벌인 이데올로기 투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위대한 혁명적 전투의 전주곡일 뿐이며, 프롤레타리아트는 쁘띠부르주아지의 온갖 동요와 허약함을 뚫고 그 대의의 완전한 승리를 위해 행군하고 있다.
(1908년 3월 후반과 4월 3일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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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채만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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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흥미있는 글-사실은 제가 정치경제학에 원래부터 관심이 많아서-인데, 아쉽다면 조금만 더 길고, 상세하게 써 줄수 는 없을까하는 점이네요.주장 자체는 꽤 좋은 주장-제가 판단키로는요-인데 정치경제학 개념에 생소하신 분들도 좀 있을 것 같고, 글의 성격상 너무 짧게 치고 넘어가는게 좀 무리다 싶기도 하구요 ^^ '인간적인~'이라는 글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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