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등을 거론하는 것도 그가 그것을 고집하게 되는 제스춰 그 자체에 있을 것이다. 지젝은 레닌의 철학 따위에 관심이 없다. 명백히 쓰레기라고 말하고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알카에다 테러리즘과 지젝의 이론 사이의 변별점을 이해하고 있어야한다. 알카에다의 민간인 자살 테러가 실재의 열망에 기초한 임상적으로 주체성이 상실된 정신병에 가깝다면, 지젝이 호출하는 주체는 상징계의 법을 그 자체로 부정성으로 이미 겪고 그것이 텅비어있다는 실재를 겪고난 후에, 실재에 내맡겨 버리라는 것또한 부정하는 제스춰를 취하는 주체가 아닐까? 데카르트의 철학이 그러하듯말이다.
이런 주체는 일본의 재난 만화의 대표겪인 생존게임의 주인공에서도 발견된다. 주인공은 대재앙으로 폐허가 되버린 일본에서 남겨진 생존자다. 그렇지만 남은 생존자들은 힘을 합치기보다 인륜이 없어진 사회 그 자체, 도덕과 윤리가 잠정적으로 사라진 홉스가 말하는 만인에 대한 민인의 투쟁으 여실히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그런 실재에 빠진 사회에 있어서 주인공은 너무 상투적으로 인간다움을 끝까지 유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곧 그의 생존의 근거가 되니, 고집 자체가 어떻게 교묘하게 억압적인 상징계와 냉소적인 초자아를 비켜나가는지 명백히 알 수 있다. 고집은 대상을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끊임없는 행위 자체이기 때문이다.
예컨데 지젝적 혁명론은 손쉽게 국내 CF에서 사용되지 않았던가? 모두가 no를 외쳤을때 yes를 외쳤다는.. 안티고네가 고집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좌파적인 계급론이 아니라 오빠의 장례를 치뤄야한다는 가족중심주의가 아니었겠는가. 그것은 아마 오늘날의 정치적 스펙트럼에 의하면 우파에 가까울텐데, 요는 그런 고집이 상징계 내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냐가 아닐까? 그런 고집은 좌파와 우파의 상식을 넘어서 상징계의 분열을 몸소 보여준다.
예를들어 우리는 민주주의라는게 텅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헌법에서 인권을 이야기 했을때 우리 사회는 쉽게 그것을 무시하고 있지 않는가. 현실이라는 초자아의 모습으로. 그렇지만 민주주의를 의심하는 들뢰즈 주의자들과 다르게 우리가 만약 그 텅빈 민주주의, 즉 국민이 주인이 되는 형식 자체를 고집하게 된다면 어떤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뤄낸다면 그것이야 말로 혁명인게 아닐까? 예수의 경우도 그러한게 아닌가. 믿음과 고집. 그것이 상징계내의 어떤 구멍과 변화를 가져오는게 그것이다. 주체의 출현도 그런식으로 나타나지 않는가. 실재와 상징계의 중간지점. 그것이 주체의 자리다.
그러므로 내가 봤을때 지젝에게 민간인을 목표로한 자살 테러는 가장 손쉬운 해결책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자기 존재를 그대로 무엇엔가 내맡겼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우리는 진정한 영웅들을 근대 우리 독립운동에서 너무나 많이 발견하고 있다.
지젝에게 혁명이란 고집 그 자체다. 죽음 충동을 거론하지 않아도 지젝이 호출하는 혁명적 주체란 고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너무나 명백하게 우리는 이런 고집을 테러리즘에서 분리할 수 있지 않을까? 예컨데 민간인에 대한 테러가 마치 알카에다의 전유물이라고 했을때, 누군가 알카에다 내부에서 그런 테러를 지양하자고 주장하고 그 주장을 핍박을 넘어서 고집하려고 한다면 그거야말로 지젝이 말하는 혁명성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필연적으로 테러리즘과 지젝적 주체의 비교를 삼가해야 한다. 기실 지젝이 300을 다룬면서 이야기 했던 영웅들은 내외의 여러 지점에서 행위의 차원을 막는 상징계의 억압을 뚫어내는 행위 자체였으니까. 그러므로 혁명의 과격함은 기실 어떤 행위도 서슴치않는 스탈린식 사회주의나 탈레반식 자살 폭탄같은 실재의 열망이 담긴 폭력성이 아닌 더 그것보다 멀리 나아간다. 그런것들은 사실 주체성이 상실된 것들이니 말이다. 더 나악 우리가 그것들을 지젝의 주체로 호명했을때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적 형태인 카미가제또한 긍정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렇지만 지젝은 이미 국내 강연에서 이런것들과 결별하고 있다.
아, 읽으면서 짧은 탄성이 나오네요. 너무 잘 읽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계속 지난 1여년 동안 제가 제 후임을 바라보았던 시선, '위안부'와 재일조선인의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의 어려움 그리고 미카엘 하케네의 <히든>을 보면서 했던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었습니다:)
캐즘님 글보고 Ghassan Hage가 쓴 White Nation란 책이 생각났어요. 호주의 다문화주의에 대한 책인데, 거기서 저자가 동화와 백호주의를 부르짖는 "evil white nationalists"와 관용을 강조하는 "good white nationalists"를 동전의 양면으로 묘사하거든요. 즉, 보통 후자가 마치 전자의 한계를 뛰어넘는 무언가로 또는 전자라는 악에 대조되는 선으로 묘사되지만, 사실 둘은 동일한 담론체계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이라고하면서 후자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해요. 그러고보면 최근 있었던 컬럼비아대학교 이란대통령 스캔들 (?)이 위의 카툰전쟁과 너무 유사하지 않을지. 들은바에 의하면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이 대통령을 직접 초청했다는 컬럼비아대 총장이 토론회에서의 그의 홀로코스트 부인에 대해 당신의 어처구니없는 무지함에 대꾸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는데, 왠지 총장 개인 및 총장이 대표하고 있을 미국 대학사회의 관용주의의 한계가 그것도 너무 우스꽝스럽게 드러난 것이 아닐는지. 이런 신경질적 대꾸는 관용이란게 애초에 얼마나 경직되어 있고 비관용적인가를 보여주었다고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