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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계획 제3장 (3)」 『총명한 유물론』 제2집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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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격대
레닌그라드 라벤스트보(“평등”) 섬유공장의 링 방적(정방) 부서에서는 청년 노동자들이 양질의 생산에서 모범을 보이고, 원가 문제에 대한 유의 등을 목표로 “돌격대”를 창설했다. 그들은 그들 기계군에서의 생산속도를 8% 높였고, 원가를 4% 가량 절감시켰다. 이 운동은 공장 전체로 퍼졌고, 3개월 후에는 공장 노동자의 30%가 돌격대에 속해 있었다. 이들 청년 노동자의 발기는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우랄 산맥의 도시인 즐라토우스트의 공장들에서 청년돌격대가 여럿 창설되었다.1 1927년 말에 소빈카(블라디미르 주)의 “공산주의 전위” 섬유공장에서 일군의 청년 노동자들은 “합리화 모임”을 결성했다. 소빈카의 합리화 모임은 가동되지 않은 채로 방치된 환기장비들과 자동스위치 등의 문제를 논의하는 것을 시작으로, 공장의 일부 기술자의 관심을 겨우 점차 이끌어냈다. 그리고 경영진과 공장 내 당조직, 기성 노동자들의 상당한 초기 저항을 극복하며 1928년 동안 그 숫자를 약 200명으로 늘렸고, 공장의 다양한 작업장 안에 더 많은 모임을 조직했다. 이 사업 역시 많은 주목을 받았다.2
같은 무렵에 생산 회의도 커다란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1927년 10월부터 1928년 9월까지 이바노보-보즈네셴스크의 거대한 섬유공업지대에서 13만 5천 명의 노동자는 산업을 개선하기 위해 8천 개 이상의 제안을 제출했다. 루간스크의 광업 및 기계공업지대에서는 같은 시기에 12만 5천 명의 노동자가 9,500개의 제안을 제출했다. 노동자가 약 12만 명이던 아르툐몹스크 광산지대에서는 8천 건의 제안이 나왔다. 도합, 전국 15개가 넘는 공업지대에서 제안 건수는 6만 2천 건을 초과했다.3 여기서는 양이 질로 전화할 만큼 규모에 이르고 있었다. 사회주의 경쟁의 발전에서 새로운 국면이 열리고 있었다.
전환점은 점진적 과정에서 “임계점(critical point)”에 도달할 때 물리학이나 화학에서 나타나는 결정적 변화 가운데 하나처럼 찾아왔다. 그 계기는 1929년 4월 소련 공산당 제16차 대표자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채택될 예정이었던 제1차 5개년 계획 초안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면서였다. 그해 1월에 소련 청년의 일간지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청년돌격대의 모범을 “전 연방 사회주의 경쟁”의 형태로 전국적 차원에서 채택할 것을 제안했다.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는 생산 회의에 대한 두 달의 “공개 감찰”을 조직했다. 그 기간 노동자들은 약 30만 건의 제안을 내놓았다.4 이 발의들에 대한 반응은 경쟁 형식의 발전이 이미 지체되어 왔음을 보여줄 만큼 거대했다. 레닌그라드에서 시베리아까지, 모스크바에서 남부 우크라이나까지 전국의 광산, 공장, 철도 차량기지, 항구 등에서 노동자들은 돌격대를 결성하고, 사업장들 사이에서 서로 도전장을 주고받으며, 작업장, 공장, 산업 전체 사이에서 여러 영역에 걸친 구체적이고 명확한 성과를 서약하는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응답했다.
이 운동의 성격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생산 회의에 대한 프라우다의 감찰 기간 이바노보-보즈네셴스크에서 노동자들의 제안 건수는 6만 건으로 늘어났는데, 이는 노동자 2-3명당 1건에 해당하며 전년도에 노동자 17명당 1건이었던 것과 대조된다. 앞서 언급한 전국 15개 공업지대에서 제안 건수는 321,600건으로, 전년도보다 다섯 배를 훨씬 넘어섰다.5 그리고 이러한 제안들, 더 나아가 감찰 기간에 제기된 수많은 다른 제안도 결코 헛말에 그치지 않았다. 1928–29 경제연도에 그것들은 생산비를 1/4분기(1928년 10–12월)에 1.2%, 2/4분기에 3.4%, 3/4분기에 6.3%, 4/4분기에 7.8% 낮추었다. 산업 전반의 노동생산성은 그해 1/4분기에 7% 증가했고 4/4분기에는 24% 증가했다.6 이는 사회주의 경쟁의 직접적 결과였으며, 제1차 5개년 계획 첫해 계획의 초과달성을 가져왔다. 1929년 2월 28일 열린 제17차 모스크바 주 당 대표자회의에 제출된 보고는, 1월과 2월 소련 공산당 모스크바 위원회가 조직한 99회의 생산 회의에 수만 명의 대표자가 참석했으며 그들이 50만 명이 넘는 공장 노동자와 종업원을 대표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여섯 개의 섬유 트러스트에서만 해도, 그 결과는 노동자들의 제안에 따라 6백만 루블의 순절약을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7
1929년 4월 8일 트베르(현 칼리닌)에서, 앞서 언급한 프롤레타르카 공장과, 그 공장에 도전했던 모스크바 트레흐고르나야 마누팍투라, 그리고 다른 여덟 개 공장의 대표자들 사이에 정식 협정이 서명되었다. 도합 58,000명 노동자의 공장 대표자들이 그 협정에 서명했다. 그 협정의 일반적 목표는 원가를 낮추고 산출을 높이는 것이었으나, 각 공장에서 이루어진 상세한 토론은 훨씬 더 정확한 책임 사항들을 만들어냈다. 모스크바 공장은 원가를 7.7% 낮추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는 총 300만 루블의 절약을 의미했다. 그 공장의 노동자들은 1928년에 평균 3½%였던 불량품을 완전히 없애겠다고 약속했다. 공장이 떠맡은 전체적 책무는 각 부서에서 그에 상응하는 정확한 약속을 의미했다. 이 경쟁 협정이 성공할 경우 개별 노동자들에게 돌아갈 순증가분은, 처음의 2.75루블 대신에 일당 평균 임금이 3.14루블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8
이바노보-보즈네셴스크 노동자의 시(市) 회의가 4월 15일 열렸는데, 협정을 서명하기 위해 트베르로 갔던 대표자들이 그 자리에서 보고했다. 몇 가지 특징적인 발언은 인용할 만하다:
“나는 5월 1일까지 프롤레타르카가 우리로서는 따라잡기 어려울 만큼의 성과를 달성할까봐 두렵다. 3월에는 부실작업이 이미 통상적인 수준 아래로 줄어들었다. 트베르의 노동자들은 현재 각 기계의 개별 생산량에서 우리보다 뒤처져 있지만,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의 목표에 도달할 것이다. … 우리는 11월 혁명의 날들에 목격했던 것과 비교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단결을 관찰했다. … 우리는 노동자들을 사로잡은 열정을 보았다. 우리는 자신들이 얻어 온 악명을 씻어내겠다고 맹세한 결근자들을 보았다. … 우리는 특히 기계공작 작업장의 청결함에 놀랐다. 그것은 우리 공장에서는 견줄 수 없는 것이다. … ” 계획에 따르면 그 무렵 이 공장은 하루 618,000미터를 생산했어야 했다.
“노동자들은 협정에서 680,000미터를 생산하기로 맡아 약속했지만, 경쟁이 시작되자마자 생산은 하루 940,000미터라는 놀라운 수치에 도달했다. 계획에 따르면 방적공장은 하루 40,644킬로그램의 실을 생산했어야 했다. 협정에 따라 프롤레타르카 노동자들은 41,170킬로그램을 생산하기로 맡아 약속했으며, 그들은 이미 이를 달성했다.”9
만약 이 상세한 모습을 독자가 마음의 눈으로 수천 번쯤 반복해서 본다면, 그것은 1929년에 소련의 공장들─그리고 나중에는 사무실들과 마을들─에서 무엇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매우 거친 윤곽 스케치를 제공할 것이다. 이제부터 노동자들의 경쟁 원칙과 사회주의 국가에서 국민경제를 계획하는 원칙은 영구히 불가분하게 결부되었다: 그리고 문제는 더는 설득의 노력이 아니라, 조직, 모범, 그리고 경쟁의 시야를 끊임없이 넓히는 데에 있었다.
새로운 단계는 사회주의 경쟁을 주제로 하여 1929년 4월 29일 소련 공산당 제16차 대표자회의가 채택한, “소련의 모든 노동자와 근로농민에게”라는 성명에서 서술되었다. 그것은 1920년 2월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선언문의 강렬한 메아리였다. 그 성명은 최초의 수보트니크 시절을, 그리고 제9차 당 대회가 다음과 같이 선언했던 것을 그들의 기억에 상기시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은 적대적 투쟁의 성격을 띠었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로 이어졌다. 생산수단이 국유화된 사회에서 노동에서의 경쟁은 연대를 침해하지 않으며, 오로지 노동생산물의 총량을 증가시켜야만 한다.” 성명은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 경쟁을 통해 자신의 창조적 에너지와 자기 교육을 발전시킬 것을 촉구했는데(특히 마을에서 온 새 노동자들과 도시의 소부르주아층에서 온 새 노동자들의 교육을), 이를 위해서는 충분한 격려가 주어졌다:10
“레닌 공산주의청년동맹과 언론의 발의로 올해 발전한 사회주의 경쟁은 점점 더 강력한 대중운동이 되어가고 있다. 경쟁에서의 첫 걸음의 결과로, 돈바스(루간스크, 샤흐티)의 광부들은 3월에 석탄 산출 계획을 초과했다. 이바노보, 트베르, 모스크바의 섬유 노동자들은 현 경제 연도의 산업 및 재정 계획을 이행하기 위해 서로 간에 경제적, 정치적 협정을 체결했다. 우랄, 레닌그라드,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모스크바, 로스토프의 노동자들은 수백 개의 돌격대와 돌격 교대조를 조직했다. 매일 새로운 노동자 집단이 경쟁 속에 들어가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은 이미 서로 간에 경쟁을 하고 있으며, 그들과 함께 시베리아, 북캅카스, 볼가 하류 및 중류도 수확과 농업 집단화를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 노동자들의 노동영웅주의와 헌신은 또한 생산 할당량의 자발적 증대에서, 휴일에 일하는 것에서, 생산 회의에서 제안이 거대하게 증가하는 것에서, 태만자와 결근자를 보이콧하는 것에서,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투쟁에서 표현되고 있다. … 공장과 사무실에서 창설되고 있는 돌격대들은 공산주의 수보트니크의 가장 훌륭한 전통에 대한 계승을 의미한다. 생산 회의와 생산대표자회의의 사업범위가 확대됨에 따라서, 이와 관련된 생산 감찰과 경쟁, 심사 등은 사회주의 건설 운동 전반에 있어 엄청난 중요성을 띠게 된다. 새 형의 소비에트 근로자들이 소련의 작업장과 공장들에서 자라나고 있다. 근로인민대중이 국가의 운영에서 맡는 몫과 역할은 커지고 있다. ... 경쟁과 5개년 계획은 불가분하게 상호연결되어 있다.”
그 다음 달, 경제활동의 모든 영역, 그리고 노동조합과 여러 공장에서 일하는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들에게 토론을 위해 제시된 새로운 조건에서 사회주의 경쟁의 실천적 목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관하여 정확한 지시를 받았다.11 그것들은 다음을 포함했다: 산업 및 재정 계획의 달성과 초과달성, 그리고 원가 절감과 생산성 증대에 관한 계획된 기준들의 달성과 초과달성; 산출물의 질 개선; 부실작업에 대한 투쟁과 간접비의 절감; 무단결근에 대한 투쟁과 모범적인 노동규율을 위한 투쟁; 기술적으로 더 완전한 설비를 확보하려는 적극적인 노력, 생산의 합리화, 그리고 가능한 최대 규모에서 노동자들의 발명성을 장려하는 일.
이를 실천에 옮기는 것은 결코 순탄하고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1929년 봄과 여름에는 심지어 많은 돌격대의 활동이 심지어 어느 정도 감소하는 현상도 나타났다.12 그것은 주도권이 우선적으로 작업장에서의 노동조합 조직들─즉, 전 노동 대중에 의해 선출된 공장위원회와 사업장(작업장)위원회들─의 손에 있기보다는, 당과 청년기구들 및 경영진을 대표하는 위원회들의 손에 여전히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돌격대들과의 적절한 협력을 통해 생산 약속의 이행을 보장하도록 경영진에 대하여 아래로부터 끊임없이 압력을 가하는 요소가 결여되어 있었음을 의미했다. 1929년 10월에 이 상황은 노동조합 지도부와, 산업을 책임지는 정부 부서인 최고경제회의(V.S.N.H.) 사이의 회의에서 철저하게 논의되었다. 그 뒤 노동조합 중앙평의회는 모든 노동조합 집행부에서 선발한 지도적 성원들로 이루어진 스물한 개의 ‘반’(각 ‘반’마다 여섯 명 또는 일곱 명) 을 파견했는데, 이들은 공산주의청년동맹과 경영진의 대표자 한두 명과 함께 주요 공업지대를 방문하여, 서명된 경제적, 정치적 협정들에 대한 감찰을 조직했다. 각 공업지대의 지역 노동조합 조직들은 현지 사정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 ‘반’들을 돕기 위해 자기들의 가장 우수한 성원 3,000명을 동원했다.13 상부로부터의 이러한 대대적 정비의 효과는 정부의 실질적 장려에 의해 강화되었다. 인민위원평의회는 경영진이 노동자들의 제안들을 1주일 안에 검토해야 하며, 노동조합 기구들과 그것들이 기술적, 경제적으로 유리하다는 데 합의가 이루어진 제안들의 채택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결정을 공포했다. 또한 발명들이 가져오는 절약액의 크기에 따라 달라지는 상여금 지급 기준을 정했는데, 연간 절약액이 200루블까지인 발명에 대해서는 3개월 안에 30루블에서 80루블의 상여금을, 연간 절약액이 500,000루블까지인 발명에 대해서는 6개월 안에 2,600루블에서 3,000루블의 상여금을 지급하도록 했다.14
이러한 조치들과 그 밖의 조치들의 결과는 가장 만족스러웠다. 1929년 말까지 노동자들의 상당 부분이 돌격대의 구성원인 공장이 수백 곳이었다. 모스크바 노동조합의 한 조사는, 13만 5천 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192개의 지역 공장에 약 2만 2천 명에 조금 못 미치는 대원을 가진 2,020개의 돌격대가 있었으며─이는 전체 노동력의 6분의 1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드러냈다.15 우랄 지역에서는 1929년 5월 1일에 1만 2천 명의 대원을 가진 400개의 돌격대가 있었는데, 12월 1일에는 5만 2천 명의 대원을 가진 3,582개의 (돌격)대가 있었다.16 1929년 12월에 열린 전연방 돌격대원 대회에서는, 산업 부문에서 이미 30만 명의 돌격대 구성원이 있었으며─전체 290만 명의 노동자 가운데서─라고 보고되었다.17 노동조합 통계에 따르면 1929년 늦가을 무렵 생산 회의에 참가한 노동자들의 비율은 79.6%까지 증가18했으며; 1930년 1월 1일에는 전체 소련 노동자의 29%가 사회주의적 경쟁에 참여하고 있었다.19 따라서 1928-9년도의 산출 계획, 노동생산성, 원가절감에 관한 계획(프로그램)들이 초과 달성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리고 공장 집회의 결의들 속에 “5개년 계획을 4년 안에!”라는 새로운 구호가 나타났다.20
1930년 1월, 노동조합 중앙평의회와 공산주의청년동맹이 레닌의 서거 6주년을 맞아 “레닌 입대”로서 50만 명의 노동자들을 돌격대 입대로 호소했을 때, 100만 명이 그러한 요청에 응답했다. 1930년 3월 무렵 많은 대규모 사업장에서는 노동자의 대다수가 돌격대의 구성원이었다. 이제는 “돌격 교대조”, 즉 그 교대조 전체의 노동자들이 돌격대에 가입해 있는 교대조들만이 아니라, 돌격 부서들과 돌격 사업장들까지 존재했다.21
스탈린은 1929년 11월 7일에 출판된 한 글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전선에서 노동계급의 광범한 대중이 보여주는 창조적 주도성의 확대와 격렬한 노동열”이 그해의 가장 중요한 사실이 아니더라도 가장 중요한 사실들 가운데 하나라고 썼는데, 오직 그것만이 “노동생산성의 점진적 증가를 보장할 수 있으며, 그것 없이는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가 생각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22
이 운동은 이제 이 자신감 있는 논조를 정당화할 만한 속도로 확장되고 있었다. 1930년 3월 1일에 사회주의 경쟁에 참여한 노동자는 200만 명이었고 돌격대원은 150만 명이었다:23 금속 노동자의 4분의 3, 섬유 노동자의 70%, 석탄 광부의 50% 이상이 경쟁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제 운동 자체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었는데, 그 다양성은 그것이 노동자들 자신이 발휘한 자발적 주도성에서 솟아났다는 사실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레닌은 이미 언급된 1918년 1월의 자신의 글에서 다가올 경쟁의 이러한 측면을 예견했었다:
“우리는 노동자들과 농민들 사이에서 실천적 조직가들이 서로 겨루는 경쟁을 조직해야 한다. 우리는 지식인들이 그토록 쉽게 기울어지는, 모든 종류의 표준화와 위로부터 획일성을 확립하려는 시도들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 표준화도, 위로부터 획일성을 확립하는 것도 민주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중앙집중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근본적인 것, 뿌리에 놓인 것, 본질적인 것에서의 통일은, 세부에서의 다양성, 지역적 특수성, 접근 방식들의 다양성에 의해 깨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에 의해 보장된다. … ”24
레닌의 이 말은 1929-33년에 놀랍게 입증되게 될 것이었는데, 그 시기 소련의 노동계급과 집단농장에 가입한 소련 농민의 상당한 부분이, 자신들 나라의 경제를 계획하는 일에 대한 자기 자신의 개인적·집단적 책임을 처음으로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번역: 김의진 | 사무위원
2026년 2월 3일
- Popov, Chto Dayot Rabochaya Initziativa, 1930, 66, 71.

- Moskovskie Udarniki Za Rabotoi, 1930, 66, 71.

- Chto Dayot Rabochaya Initziativa, 1930, 39.

- Olkhov, Za Zhivoye Rukovodstvo Sotz-Sorevnovania, 1930, 56.

- Chto Dayot Rabochaya Initziativa, 1930, 40.

- Za Zhivoye Rukovodstvo Sotz-Sorevnovania, 1930, 10-1.

- Bauman, Generalnaya Bolskevistskaya Linia i Nasha Rabota, 1929, 42-3.

- Mikulina, Socialist Competition of the Masses, Moscow, 1932, 26-7, 33.

- Ibid., 34-6.

- VKP(b) v Rezolutsiakh, Ch. 2, 1941, 355-8.

- “Resolution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C.P.S.U. of 9th May”, 1939.; V. I. Lenin, K Voprosu o Sotsialisticheskom Sorevnovanii, 1929, 61.에서 재인용.

- 그러나 레닌그라드의 “프롤레타리아” 철도수리작업장 페인트공들의 주도로 “전연방 산업화의 날”이 1929년 8월 6일 소련 전역에서 열렸다는 사실은 충분히 주목할 만 하다. 6월에 《레닌그라드스카야 프라우다》에 실린 초기의 어려움과, 타 공장으로부터의 지지의 물결, 그리고 “산업화의 날” 행사에 관한 자료로는 Zhestev & Farfel, Den Velikikh Rabot, Leningrad, 1929.을 보라.

- Za Zhivoye Rukovodstvo Sotz-Sorevnovania, 1930, 16, 24-5.

- Chto Dayot Rabochaya Initziativa, 1930, 50-2.

- Ibid., 21-2.

- Za Zhivoye Rukovodstvo Sotz-Sorevnovania, 1930, 32, 43.

- Webbs, Soviet Communism, Vol. 2, 748.

- Za Zhivoye Rukovodstvo Sotz-Sorevnovania, 1930, 55.

- XVII Syezd VKP(b), 1934, 548.

- Sorokin, Sotsialistickeskoe Planirovanie Narodnogo Khoziaistva SSSR, 1946, 91.

- Chto Dayot Rabochaya Initziativa, 1930, 22. 같은 시기 돌격대의 활동과 생산량과 효율성에 끼친 영향에 관한 시각적 자료는 1930년 2월 25일 몰로토프의 연설에 제공되어 있다. 이에 관해서는 V. M. Molotov, The New Phase in the Soviet Union, London, 1930, 19-23.을 참고하라.

- Leninism, 1944, 295.

- Shvernik, Trade Unions of the U.S.S.R. and their Role in Building Socialism, Moscow, 1930, 13.

- V. I. Lenin, Works, 3rd Russian edition, Vol. 22, 1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