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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현실의 발전과 그것의 이론적 반영의 나선형적 성격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 제2장 (3) 총명한 유물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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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발전과 그것의

이론적 반영의 나선형적 성격

 

이처럼 유물론적 변증법은 이론의 구체성을, 대상의 상호 조건적이고 내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모든 필연적인 측면의 반영으로서 이해한다.

 

어떤 변증법적으로 구분된 전체에 전형적인 조건화(conditioning)의 상호적 성질은 이론에 대한 엄격한 요구를 부과하며 동시에 이론가들에게 감각적으로 주어진 복합체로부터 오직 내적으로 필연적인 정의들만을 골라내기 위한 명확한 기준을 제공한다.

 

보다 직접적인 의미에서, 그것은 각각의 구체적 추상들(그것의 총체가 하나의 이론을 구성한다)이 모든 다른 대상들의 보편적, 필연적 조건인 동시에 그 대상 사이 상호작용의 보편적·필연적 결과이기도 한 대상의 존재 형태만을 반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조건은 예컨대 앞서 분석한 “노동 도구를 생산하는 존재”로서 인간에의 규정에 의해 충족된다. 노동 도구의 생산, 생산수단의 생산은 (논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다른 모든 인간 생존 활동의 형태의 보편적 전제조건일 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발전의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결과 혹은 귀결이기도 하다.

 

인류는 그 발달의 매 순간에 자신의 보편적 토대, 즉 전체로서의 사회적 인간 유기체의 존립을 위한 보편적 조건을 자신의 생산물로서 정립(posit)하는 것, 다시 말해 재생산할 것을 필연적으로 강제당한다.

 

오늘날 엄청나게 복잡한 기계와 기계 조립품들로 발전해 온 노동 도구들의 생산은, 한편에서는 인류의 여명 때와 똑같이 인류의 향후 발전의 보편적인 객관적 토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본질적으로 과학의 발전 수준에, 즉 그것 자신의 머나먼 후손이자 그것 자신의 결과물에 의존하며, 그 의존성이 너무나 강하여 기계는 (유물론적 틀 내에서) “사람의 손에 의해 창조된 인간 두뇌의 기관1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정도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상품, 화폐, ‘자유로운’ 노동력이 모든 것은 그것의 역사적 전제, 즉 그것의 출현 조건만큼이나, 자본의 생산물이자 그것의 특정한 운동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자본이 그것의 출현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끊임없이 증대하는 규모로 재생산하는 그러한 종류의 생산물이다.

 

대상의 출현을 위한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조건이 그것 자신의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결과가 되는, 모든 현실 발전의 이러한 변증법, 즉 조건이 피조건자가 되고, 원인이 결과가 되며, 보편이 특수가 되는 이 변증법적 역전은, 실제 발전의 원형,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매 회전마다 그 운동의 범위를 항상 확장하는 나선(spiral)의 형태를 취하게 하는 내적 상호작용의 특징적인 양상이다.

 

동시에 여기에는 일종의 ‘자체 안으로의 자기-결속(locking-in)’이 존재하며, 이는 개별적 현상들의 집합을 하나의 상대적으로 닫힌 체계, 즉 자신의 내재적 법칙에 따라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하나의 구체적인 통합적 유기체로 변형시킨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 체계 내의 상호작용의 이러한 본질을 확고하게 강조했다: “만약 발전된 부르주아 체계에서 정립된 어떤 것이 동시에 전제라면, 어떤 유기적 체계에서도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2 위에서 강조체로 표시한 단어들은, 상호작용의 ‘순환적’ 본질이 자본주의의 존립와 발전의 특수한 법칙이 결코 아닌, 변증법적 발전의 보편적 법칙, 변증법의 법칙이라는 사실을 표현한다. 이것은 정확히, 추상과 구체의 일치의 논리학적 법칙과 이론적 구체성이라는 변증법적 유물론적 개념의 근간을 이루는 법칙이다.

 

그러나 상호작용하는 현상들의 체계의 나선형적 발전과 동일한 법칙이 사고에 있어서 몇 가지 특수한 어려움들―변증법적 방법 일반 없이는 그리고 특수하게는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의 명확한 개념 없이는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들―을 부과한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연구를 진행하며 이러한 상황, 즉 부르주아적 부의 다양한 형태들이 지닌 상호 조건 지움의 나선형적 성격에 직면했을 때, 가장 중요한 범주들을 정의함에 있어 필연적으로 순환론(circularity)에 빠져들었다. 마르크스는 이 희망 없는 ‘순환론’을 이미 1844년에 영국 경제이론들에 대한 첫 번째 분석 시도에서 발견했다. 세이(Say)의 논거를 분석하면서, 그는 세이가 다른 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가치를 설명함에서 그 자체가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현상들예컨대 '부', '분업', '자본' 등의 개념들에 대한 설명 대신에, 도처에서 가치 개념을 대체시키고 있음을 발견한다.

 

‘부. 여기서 가치 개념은 아직 발전되지 않았지만, 그 개념은 이미 가정된다; 왜냐하면 부는 누군가가 소유한 “가치들의 총합”으로, “가치 있는 것들의 총합”으로 정의되기 때문이다.’3

 

15년 후, 마르크스는 이 지점으로 돌아와서 이 희망 없는 순환 논리의 비밀을 밝혀냈다: “이론에 있어서, 가치 개념은 자본 개념에 선행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가치 개념은 자신의 순수한 발전의 조건으로서 자본에 기초한 생산방식을 전제한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불가피하게, 경제학자들은 때로는 자본을 가치들의 창조자로, 그것들의 원천으로 간주하고, 때로는 가치를 자본의 형성을 위한 전제로 간주하며, 자본 자체를 일정한 기능을 하는 가치의 총합으로 제시한다.”4

 

정의에서의 이러한 논리적 순환성은, 과학이 연구하는 현실이 상호 조건 짓는 측면들의 체계로서, 역사적으로 발생하고 발전하는 구체성으로서 항상 나타나기 때문에 어떤 대상도 사실상 변증법적 발전의 산물이라는 이유에서 일어난다.

 

물론 화폐와 가치 양자를 자본의 출현을 위한 전제들로 간주하면서, 자본은 그의 탄생과 동시에 화폐와 가치를 자본 자신의 운동의 보편적 형태로, 자본의 특수한 존재의 추상적 계기들로 전화시킨다. 그 결과로, 자본은 역사적으로 수립된 관계를 고찰하는 관찰자 앞에 가치의 창조자로서 출현한다. 여기에서의 난점은, 오직 자본의 출현만이 가치를 모든 생산의, 경제적 관계들의 전체 체계의 실제적인 보편적 경제적 형태로 변형시킨다는 데에 있다. 그 이전에는, 즉 자본의 출현 이전에는, 가치는 노동력과 같은 중요한 ‘특수한’ 생산요소를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편적인 경제적 관계가 결코 아니었다.

 

개념들과 그것들의 정의들을 가지고 정교한 논리적 절차들이나 의미적 조작을 통해 가치와 자본의 정의 내에 있는 논리적 순환을 끝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순환성은 개념의 정의에 있는 결함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 사이 상호작용의 변증법적 본성을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 즉 이 상호작용의 연구에 대한 진정으로 역사적인 접근을 수행하지 못한 것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길을, 아니 차라리 그것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발견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역사적 접근법뿐이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그러한 접근에 소원한 한, 그 순환성은 그들에게 절망적이다.

 

그러한 시도들의 실패는, 구체성이 역사적으로 진화하는 “다양성 속의 통일”로서 가일층의 발전을 겪는, 내적으로 상호작용하는 현상들의 역사적으로 발전된 체계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는 무능력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경제학의 이 기본적인 이론적 문제를 해결할 방법론적 열쇠를 마르크스에게 준 것은 바로 구체성에 관한 이러한 변증법적 개념이었다; 특히 이는 상품 물신성의 비밀을 폭로한 사람이 마르크스였음을 해명한다. 자본주의 세계의 구체성은, 이 세계가 자신의 전제조건으로 간주하고, 더구나 자신의 특수한 생산물로 재생산하며, 그것들을 자신의 결과로 상정하는 그러한 객관적인 운동형태만을 포함한다.

 

태양, 상품, 천연자원, 화폐, 자유로운 노동력, 기계들의 가용성 모든 것은 그것들의 부재 속에서는 자본이 출현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는, 동등하게 객관적인 전제들이자 조건들이다. 그러나 그것의 기원의 자연적 상황들도, 기계들의 기술적 매개변수들도, 인간의 인류학적 특징들과 그의 노동 능력도, 자본의 존재에서 그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내재적 형태들을 형성하지는 않는다.

 

마르크스의 분석은, 구체적인 이론적 특징들로서 자본 자체의 운동에 의해 재생산되는 그러한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자본의 존재 조건만을 추려냈다. 자본주의는 노동력 그 자체나 자연적 자원들 및 여타의 물질적 구성 요소들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을, 즉 노동력이 발전된 자본주의적 관계들의 체계 내에서 기능을 수행하는 그러한 사회적 형태로서 재생산한다.

 

노동력은 자체로서는, 심리적 혹은 생리적 능력의 총합으로서는 다른 과정 혹은 과정들에 의해 생산되고 재생산된다. 자본주의가 노동력을 생산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햇빛, 천연자원 그리고 공기 등을 생산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그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이 모든 사물이 그것의 특수한 운동에 연계되고 그것의 유기체 내에서 그것의 형태들로서 운동하게 되는,  사회적 형태들을 정말로 생산한다.

 

마르크스가 여기서 대상적 운동의 내재적 형태들을 구별하기 위해 적용한 기준은 본질적으로 보편적·논리적 기준이다. 이것은 그 어떤 개별적 대상, 사물, 현상, 혹은 사실도 그것이 연계되게 된 그 운동 속에서의 구체적 과정에 의해 자기 존재의 특정한 구체적 형태가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어떠한 개별적 대상도 그것 존재의 그 어떠한 구체적 형태를 그것 자신, 즉 그것 자신의 개별적 본성에 빚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적으로 확립된 구체적인 사물들의 체계에이는 그것[개별적 대상]이 출현하는 곳이며, 그것은 이에 그 일부로서 속해 있다빚지고 있다.

 

금은 그 자체로서는 화폐가 아니다. 금은 그것이 연계되어 있는 화폐와 상품 유통 속에서 화폐가 된다. “다리가 네 개 달린 의자와 벨벳 덮개는 특정한 사정 하에서는 왕좌가 된다; 그러므로 이 의자, 즉 앉을 자리로서 기능하는 하나의 사물은 그 사용가치의 성질을 통해서 왕좌가 되는 것이 아니다.”5 다시 말해서, 그것의 내재적 성질에 의해서는, 즉 ‘즉자대자적으로(in and for itself)’는, 그것을 오직 왕좌로 만드는 그러한 특수한 조건들로부터 추상하여 취해졌을 때, 그것은 결코 왕좌가 아니다.

 

그리하여 이론적 추상물들의 구체성에 대한 변증법적 개념이, 이자, 지대 등을 포함한 가치의 모든 파생적 형태만 아니라 가치의 본성을 은폐하는 자연주의적 물신 숭배적 환상들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거대한 의의를 가졌는지가 명백해진다.

 

그것의 본성에 있어서, 금이 화폐가 아닌 것은, 석탄이 기관차에게 원료가 아니고, 달이 연인들에게 보호자가 아니고, 그리고 사람이 노예 혹은 귀족이 아니고, 프롤레타리아 혹은 부르주아가 아니고, 철학자 혹은 수학자가 아닌 것과 같다.

 

하지만 여기에는 변증법이 고려해야만 하는 미묘한 지점이 있다. 금, 석탄, 그리고 인간은 그 자체로, 그것들로 말미암아 그것들이 연계되어 있는 과정이 그것들을 그것 자신의 운동 형태들로, 즉 그것의 존재 형태들로 변형시킬 수 있는 그러한 특정한 특징들과 질들을 소유해야만 한다.

 

일반적 가치 형태가 실현되는 자연적 재료는 점토나 화강암 조각이 아니라 금이다. 여기에서 자연적 물리-화학적 질들이 실제로 어떤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연적 성질들은 우리가 그 본질, 즉 가치 자체의 화폐형태의 본성을 다룰 때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 형태는 금의 자연적 속성들과는 무관하게 상품 유통 내에서 발전한다. 나중에 자신의 목적들에 적합한, 자기 완성을 위해 가장 유연한 재료를 ‘발견하는’ ‘순수 경제적 형태’를 발전시키는 것은 바로 유통 영역이다. 금이 화폐 형태의 새롭게 발전하는 특징들을 표현하기 위한 불충분하게 유연하고 가소적인 수단 혹은 실체임이 판명되자마자, 그것은 종이, 은행권, 서면 주문 결제(written-order clearing) 등으로 대체된다.

 

이 논의는 어떠한 객관적 실재가, 추후 그[질료] 안에 그것[형상]이 체현되고 또 그것[형상] 안에 포함된 요구들에 따라 그것 자신의 방식대로 주조하게 될 ‘질료’의 외부에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며, 그것[순수 형태] 안에 포함된 요구들에 따라 그것 자신의 방식대로 [그 질료를] 주조하는 엔텔레키(entelechy), 즉 ‘순수 형상’의 가르침이라는 형태로 아리스토텔레스적(그리고 나중에는 헤겔적) 변증법에 의해 수수께끼화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상호작용하는 사물들의 체계로서의 실재적인 객관적 구체성인데, 거기서 개별적 사물은, 일단 그 체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것(체계)의 요구들에 순응하며 그것에게는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존재 형태를 획득한다.

 

구체성에 대한 변증법적 유물론적 개념은 그로써 지성적인, 변증법적 관념론의 마지막 피난처를 파괴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엔텔레키의 수수께끼에, 즉 개별적 사물들의 세계 외부에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독립하여 발전하며 이 사물들을 그것의 특수한 운동에 종속시키는 ‘순수 형태’로서의, ‘목적 원인’으로서의 보편자의 수수께끼에 이성적인 해결책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목적인, 능동 형상이라는 개념의 관념 속에서 관념론적이고 신비화된 방식으로 표현된 실재는 단지 현실적인 객관적 구체성에 다름 아닌데, 그것은 역사적으로 출현하고 발전하는 상호 규정적인 현상들의 체계이자, 각각의 개별적 사물을 포함하며 사물들의 구체적 성격과 형태를 규정하는 복잡한 변증법적으로 분할된 전체이다.

 

유물론적으로 해석된 상호작용의 범주는 ‘목적인’의 수수께끼를 밝혀준다: “상호작용은 사물들의 참된 목적인”6이라는 것이 엥겔스가 이 명제를 정식화한 방식이다.

 

위의 내용은 본질적인 수정을 요한다. 각각의 과학은, 이 ‘다른 모든 것’ 없이는 자신의 주제 설정이 불가능하며 또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타의 모든 것으로부터의 추상을 행하면서, 명백히 자신의 범주들 내에 오직 자신의 특수한 주제를 구성하는 상호작용하는 현상들의 구체적 체계의 특정한 형태들과 법칙들만을 반영한다.

 

예를 들어, 경제학은, 의사소통의 기술적 측면들과 개인들 간의 생물학적 관계들을 제쳐놓고, 하나의 체계적인 형태 속에서 사람들 간의 사회적 생산관계의 구체적 총체성을 드러낸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것 중 어느 하나가 없으면 존재하지 못하고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생산관계 체계 내에서 일어나는 저 모든 변화, 생산관계 체계 및 경제적 연계 형태의 전체적인 진화가 실제로 인간의 생산력의 발전에 의존하며, 게다가 이 발전에서 규정된다는 점은 상당히 명백하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적 관계들의 체계를 하나의 ‘자기-발전하는 체계’로서, 즉 그것의 발전 추진력들이 그것 자체 내에, 그것의 내적 모순들 내에, 경제적 형태의 내재적 모순들 내에 놓여 있는, 그 자체로 닫혀 있는 하나의 구체성으로서 고찰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생산관계 체계 진화의 실제적인 추진력들은 체계 그 자체 내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산력의 발전 내에 있다. 생산력이 발전하지 않는 한, 경제적 관계들의 체계의 그 어떤 ‘내적인’ 변증법도 진화를 산출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생산양식을 하나의 전체로서 연구하며, 따라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적 상호 규정성을 기록한다. 생산력의 발전은 여기서 하나의 원인으로서의 그 자체로만 취해지는 것이 아니라, 생산관계 체계의 생산력으로의 반작용이라는 하나의 귀결, 결과 그리고 산물로서도 취해진다.

 

예를 들어, 『자본론』은 상대적 잉여가치의 경제적 형태의 출현이 노동생산성의 성장을 야기하여 자본가로 하여금 손노동을 기계 노동으로 대체하고 잉여가치 생산의 기술적 토대를 발전시키도록 유도하는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그런데 사실상 기계들의 출현이 잉여가치의 절대적 형태가 그것의 상대적 형태에 의해 구축되는 실제적 원인이라는 것은 명백하다(그리고 이는 마르크스 자신이 보여준다).

 

상대적 잉여가치는, 노동생산성이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노동일의 단순한 연장에 의해 증가되는 절대적 잉여가치보다 기계 노동에 더 잘 부합한다는 바로 그 이유로 하여 잉여가치의 지배적 형태로 된다.

 

하지만 핵심은 생산력 발전의 한 단계의 경제적 형태 사이의 상호 조응 그 자체가, 다시금 하나의 변증법적 상호 조응이라는 점이다. 상대적 잉여가치는 그것이 그 안에서 기계들이 작동하는 하나의 수동적 형태로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계 생산에, 즉 그것을 발생시켰던 그 자신의 토대에 매우 강력한 반작용을 가하는 하나의 능동적인 형태가 되어, 이 토대를 발전시키고 이로써 그 자신의 운동을 위한 하나의 새로운 유인을 창출하기 때문에 정확히 기계제 생산에 부합한다.

 

여기서, 어떠한 현실적 발전에서도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원인의 결과로의 전화(轉化)가 일어난다. 이러한 사정은 마르크스가 자신의 연구에서 선택한 경로들을 이해하는 데 극히 중요하다.

 

마르크스는 임금노동에 기초한 생산관계 체계의 진화를 고찰했다. 그는 주로 생산관계 체계 내에서, 즉 사회의 경제적 구조 내에서 일어나는 바로 그 변화들에 관심을 두었다. 어떠한 형태의 생산관계로부터도 독립된 생산력 그 자체의 발전에 관해서라면, 그것은 『자본론』에서 고찰되지 않는다. 그것은 또다른 과학, 즉 공학의 연구 대상이다.

 

마르크스는 생산력 그 자체가 인간 사이 관계의 특정한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형태로부터 독립적으로 발전한다는 사실을 주어진 전제로 취급하며, 이를 정치경제학 내에서 특별히 연구되어서는 안 될 사실로 가정한다.

 

이는 그가 생산관계의 발전을 일반적으로 생산력의 발전과 무관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뜻인가? 그와는 반대다. 실제로 경제적 관계들의 체계 내에서 고찰되는 것은, 정확히 생산력 발전에 의해 야기되는 바로 그 변화들이다. 더욱이 정치경제학은 생산력 발전을 그 자체로 ('즉자대자', '즉자', '대자') 고찰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발전이 경제적 형태들의 체계에 미치는 작용, 즉 후자와의 상호작용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방식으로 파악된다. 즉, 이러한 작용이 사적 자본주의적 소유의 세계에서 작동하는 정확히 바로 그 형태로 파악되는 것이다.

 

생산력의 새로운 증대에 의해 생산관계 체계에 도입된 변화의 본성은 전적으로 이 변화가 도입되는 그 체계의 특수한 특징들에 달려있다.

 

생산력의 어떤 새로운 증대도 그것에 직접적으로 부합되는 경제적 관계나 사회경제적 형태를 자동적으로 창출하지는 않지만, 이미 존재하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경제적 관계 체계의 진화 방향을 결정한다. 이 상황은, 과거에 형성된 경제적 관계의 체계가 그것의 순서에서 [그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생산력의 전체적으로 선행하는 발전의 산물이라는 사실에 영향 받지 않는다.

 

구체적이고 역사적으로 형성된 경제 체계는 언제나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유기체로서, 자기 자신의 토대인 생산력의 총합에 반작용을 가하며, 후자의 어떠한 작용도 자기 자신의 특수한 본성을 통해 굴절시킨다. 동일한 기초로부터 발전하여 단일한 체계로 엮인 경제적 형태들의 총체는 경제적 유기체의 특수한 본성을 구성하며, 이로써 경제적 유기체는 생산력 그 자체에 대한 상대적 독립성을 획득하게 된다.

 

특수한 과학으로서 정치경제학은 생산관계 체계의 상대적 독립성을 표현하는 정확히 바로 그 형태들을 자신의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생산력이 생산관계에 미치는 결정적인 작용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방식으로 드러나는데, 이는 정확히 생산력의 발전 그 자체는 고찰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고찰되는 것은 오직 생산관계 체계 진화의 내적 논리, 곧 이 체계의 형성과 발전의 내적 논리뿐이다. 이로써 생산력이 적절한 생산관계를 창출하는 과정이 매우 구체적으로 추적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연구는 추상적인 장광설에 머물고 말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정치경제학뿐만 아니라 여타의 모든 이론과학과도 관계가 있다. 모든 과학은 대상이 다른 대상들과 공유하는 추상적인 특징들이 아니라, 대상의 상대적 독립성을 표현하는 정확히 바로 그 존재 형태들에 대한 체계적인 개념을 발전시켜야 한다.

 

생산력은 매번 무언가를 처음부터 새로이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이것은 오직 인간 발전의 여명기에만 실제로 가능하다); 그것들은 이미 확립된 생산관계 체계 내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유형과 성격을 결정한다. 이러한 상황은 정신적 문화, 법률, 정치적 제도, 철학 그리고 예술의 모든 형태 발전에서 동일하다.

 

엥겔스는 “여기서 경제는 아무것도 새롭게 창조하지 않지만, 현존하는 사유의 총체가 변화하고 한층 더 발전하는 방식을 결정하며, 그마저도 대부분 간접적으로 이루어진다”7고 강조하면서, 이 점을 사적 유물론 이론을 속류 경제학자들의 추상적인 고찰과 구별 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간주했다. 이 속류 경제학자들은 정신적 발전의 실제 과정이 지닌 구체적인 복잡성 전체를 경제의 우선성과 그 밖의 모든 것의 파생적 본성에 대한 추상적인 주장으로 환원해 버렸다.

 

그러므로 역사적 유물론은 경제가 “특수한 영역 자체에 의해 규정된 조건 내에서”8 언제나 지배한다는 것, 즉 동일한 하나의 경제적 변동이 예술의 영역에서는 특정한 작용을 낳고, 법의 영역에서는 전자와는 전혀 다른 작용을 낳는다는 사실 등을 온전히 고려한다.

 

법이나 예술 영역의 특정한 현상을 그것의 경제적 원인으로 환원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는 너무나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적 유물론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환원보다는 연역의 관점을 취하며, 각각의 구체적인 경우에 경제의 주어진 변동이 왜 다른 방식이 아니라 바로 그 주어진 방식으로 정치나 예술에 반영되었는지를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과업은 경제적 변동이 반영되고 전화되는 특수한 본성에 대한 이론적 이해를 전제한다. 사회적 인간 활동의 상부구조적 영역들 각각은 이 영역에 특수하게 역사적으로 확립된 구체적 형태들, 즉 경제, 곧 인간의 사회적 존재를 반영하는 형태들의 체계로서 이해되고 설명되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확립된 상호작용 체계로서 자본주의적 관계 체계의 연구에 마르크스가 적용한 모든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원칙들은 어떠한 자연 과학이나 사회 과학에도 적용 가능하다.

 

단 하나의 예, 즉 법적 규범의 기원만을 고찰해 보자. 어떠한 법적 규범의 출현을 위한 필수적이고 보편적인 조건은 '사실관계'인데, 이는 법학자들이 비법률적이고 순수하게 경제적인 사실에 적용하는 용어이다. 이 사실 그 자체는 법학자의 관할 범위를 벗어나며, 정치경제학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요점은, 아무 경제적 관계, '사실관계'가 적절한 법적 규범을 낳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법적 보호를 필요로 하는, 즉 개개인의 의지에 대한 강제적 복속을 요구하는 경제적 관계만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법적 규범의 보조를 통해 추후 법의 작용의 결과로서 행사되는 그러한 경제적 관계만이 보호를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하에서는 법과 법적 규범 체계 자체에 대한 필요성이 사멸할 것인데, 그 이유는 정확히 경제적 관계의 형태 자체, 즉 ('사실관계'로서의) 공산주의적 소유 형태가 그 관철을 위해 더 이상 법적 형태를 필요로 하지 않을 성격을 띠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관철을 위해 법적 형태를 요구하는 그러한 경제적 관계, 즉 비법률적 사실만이 법적 규범 출현의 진정한 전제이자 조건을 구성한다. 다시 말해, 기능하는 법의 전체 체계를 통해 능동적으로(즉, 법을 적용한 결과로서) 관철되고 보호되는 그러한 비법률적 사실만이 법적 규범의 진정한 조건이 될 것이다. 만약 특정한 '사실관계'가 법적 보호와 [그것을 통한] 관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만약 그것이 법을 적용한 결과가 아니라면, 그것은 법의 원인 또한 아니다. 이 경우 법적 규범은 전혀 출현하지 않는다: 도덕적 규범이나 여타의 규범이 출현한다.

 

이에 따라, 인간들 사이의 그러한 경제적 관계만이 법적 규범 출현의 진정한 전제이자 조건을 구성하는데, 그것은 법적 규범의 산물, 즉 법적 규범 적용의 결과로서 법적 규범을 통해 관철되고, 표면상 법의 원인이 아니라 법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이 경우 우리는 상호 제약하는 현상들의 어떠한 현실적 발전이 지닌 나선형적 성격에서 비롯되는, 원인의 결과로의 변증법적 전화를 다시 다루게 된다. 모든 형태 내에서의 사회적 의식이 사회적 존재에 대하여, 즉 인간 사이의 그리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경제적 관계의 영역에 대하여 미치는 능동적인 반작용의 관점으로부터, 단면적인 방식으로 이해되고 설명되는 바로 이 실재적 사실이, 다양한 관념론적 개념들을 발생시킨다.

 

이러한 측면의, 즉 경제와 인간 및 자연 사이 관계의 장을 포함한 활동의 여타 영역에 대하여 사고가 미치는 능동적 반작용의 추상적 절대화가 헤겔적 개념을 위한 기초를 형성하였으며, 이 구상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전 사회적 삶과 심지어 자연 그 자체까지도 개념이라는 용어 안에서의 사유의 결과물 혹은 산물로, 즉 보편적 이성의 논리적 활동의 일종의 결과물로 선언하였다. 사고가 (경제를 포함한)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 대하여 능동적 역작용[역능]을 갖게 되는 근거인, 사고의 상대적 독립성이라는, 인간의 논리적 발전이라는 바로 이 사실을 헤겔은 일면적으로 강조한다. 이러한 일면성은 존재에 대한 사고의 관계에 관한 객관적-관념론적 견해와 일치한다.

 

논리적 과정의, 즉 논리적 범주 체계의 절대적 독립성에 관한 테제를 거부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 논리학은 사회적 인간의 논리적 활동 영역의, 즉 감각 자료에 대한 지각과 분석에 있어서 논리적 범주 활동의 상대적 독립성을 고려한다. 사유는 감각적으로 주어진 사실들의 '일반적 형태들'의 단순한 수동적 복제물이 아니며, 오히려 사회적으로 발전된 주체의 정신적 활동의 특수한 양식이다. 이러한 활동이 실현되는 보편적 형태들(논리적 범주들)은 가장 일반적인 추상물들의 단순한 우연적 집합이 아니라, 각각의 범주가 다른 모든 범주를 통해 구체적으로 규정되는 하나의 체계이다.

 

논리적 범주의 체계는 변증법적으로 분할된 전체를 반영하는, 여타 과학의 개념들의 체계가 하는 것과 동일한 종속을 실행한다. 이 종속은 유에서 종으로 이어지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양의 범주는 질의 종도 아니며, 인과성이나 본질과 관련하여 유인 것도 아니다. 따라서 논리적 범주는 원칙적으로 더 높은 유에 포함되거나 그 자체의 특수한 특징을 지시함으로써 정의될 수 없다. 이는 진정한 개념은 오직 개념들의 체계 내에서, 그리고 그 체계를 통해서만 존재하며, 체계 외부에서는 어떠한 명확한 정의도 없는 텅 빈 추상물, 즉 단순한 용어나 명칭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준다.

 

번역: 노준엽 | 집행위원

 

2026년 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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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 Marx, 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Rohentwurf): 1857-1858, Moskva: Vorlag fur frem dsprachigo Literatur, 1939, 594.텍스트로 돌아가기
  2. Ibid., 189[강조는 내가 표시한 것; E. V. Il’enkov].텍스트로 돌아가기
  3. K. Marx & F. Engels, Historisch-kritische Gesamtausgabe (MEGA), Abt. 1, Bd. 3, Berlin: Marx-Engels-Verlag GMBH, 1932, 449.텍스트로 돌아가기
  4. 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Rohentwurf): 1857-1858, 1939, 163.텍스트로 돌아가기
  5. Arkhiv Marksa i Engelsa (Marx and Engels’ Archives), Vol. 2(VII), Moskva, 1933, 46.텍스트로 돌아가기
  6. Dialectics of Nature, 231.텍스트로 돌아가기
  7. F. Engels, “Frederick Engels to Conrad Schmidt in Berlin, London, October 27, 1890”, Selected Correspondence, Moskva: Progress Publishers, 1975, 401.텍스트로 돌아가기
  8. Ibid.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