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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인식운동의 순서로 본다면 ...

“물론 모순의 보편성을 인식함이 없이는 사물의 운동발전의 보편적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모순의 특수성을 연구함이 없이는/ 한 사물이 다른 사물과 다른 특수한 본질이 무엇인지 확정지을 수 없고, 사물의 운동발전의 특수한 원인 또한 특수한 근거를 발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사물을 구별할 수도 없고 과학의 연구 분야를 구분할 수도 없게 된다.

 인류의 인식운동의 순서로 본다면 그것은 항상 개별적으로, 특수한 사물의 인식으로부터 점차로 일반적인 사물의 인식으로 확대된다.” [ [20호] 마오쩌둥의 [모순론]을 읽고 - 지역 현장 활동가 2006/0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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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인식운동...?!!
인류가 노예를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한 것은 언제부터였던가?
여성을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한 것은 언제부터였던가?
아이를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한 것은 언제부터였던가?

노동자를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하는 것은 또 언제일런가?

<결국 인류는 순차적으로 이러한 사물들에 대해 인식의 폭을 넓혀왔음을 알 수 있다.>


 


 

[20호] 마오쩌둥의 [모순론]을 읽고 - 지역 현장 활동가 2006/09/25

마오쩌둥의 [모순론]을 읽고
지역 현장 활동가
2006-09-25 09:45:37

 [실천론]을 읽고나니 실천론의 내용 중 부분적이기는 하나 나의 과거 노동조합활동 실천 속에  마우쩌둥의 실천론이 살아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매우 감탄스러웠다.

특히 그 중 한 가지는 매일의 노동을 통해 노자간에 대립되는 현상, 성질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노동자와 사측의 관계가 본능적으로 이해되고 내게 부여되는 임무를 상당한 자신감과 용기백배로 일관한 투철함이 그 대표적인 예다.

나 스스로도 가끔 ‘내 자신이 뭘 믿고 이렇게 자신감 있고 용감한가’를 생각해보면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속담을 통해 나의 상태를 정리하고 결론을 내렸던 때가 있다. 그때 그것이 내게는 구체적인 진리를 담은 속담이었다. 나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옆에서 나를 부러워하던 간부가 물어보면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대답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일부 동지들은 부여되는 임무를 용감하게 받아들이지 못할 때 흔히 자신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 왜 자신이 없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그가 그런 사업의 내용과 환경에 대하여 그 규칙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가 이전부터 이런 사업을 접촉해 본 일이 없거나 접촉이 많지 못하므로 이런 사업의 규칙성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업의 상황과 환경을 자세히 분석하여 주면 그는 비교적 자신을 가지게 되어 그 임무를 수행하려 한다.”라는 내용이다.

나는 한때 주변의 지역동지가 왜 현장활동을 하지 않는지 불만이었던 적이 있었다. 심지어 심한 충격도 받았다. 상처받아 심한 배신감에 눈물도 났다. 그 동지가 내 생각과 다르다는 사실이 이해하기 어려웠고 그런 그 동지의 모습이 현실이라는 것은 인정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리고 그 상황이 정리되는 기간과 파장은 길었다.

그러나 지금은 [실천론]을 통해 말끔히 정리 되었다.

그리고 [모순론]을 읽고나니 해고 이후 지금까지의 삶은 온통 모순 그 자체였다. 진작 읽었더라면 나의 모순투성이 생활에 대해 훨씬 덜 괴로워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암흑과도 같은 암울하고 어두운 삶과 미래에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웠던가.

그러나 모순론을 통해 긴 장막이 걷어졌다. 학습을 통해 해결되었다는 게 믿기가 어려울 정도로 신기하다.

“엥겔스는 ‘운동 자체가 하나의 모순이다’라고 말했다. 레닌은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에 대하여 그것은 자연(정신도 사회도 포함한)의 모든 현상과 과정들에서 상호 모순되고, 상호배제하며, 대립적인 경향들을 인정(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라는 정의를 내렸다. 이런 견해들은 옳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그렇다. 이러한 견해는 옳다고 보아야 한다. 모든 사물 가운데 있는 모순되는 측면의 상호의존과 상호투쟁은 모든 사물의 생명을 결정하며 모든 사물의 발전을 촉진시킨다. 모순을 내포하고 있지 않는 사물이라고는 없으며 모순이 없으면 세계도 없다.”

나의 모순을 조잡하고 쓸 데 없고 허무한 고민거리라고 치부한 것은 옳지 않았다. 나의 그런 모순 없이는 내가 존재할 수 없었으므로. 치열하게 고민한다는 것은 나의 삶이 부단히도 치열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남편과의 투쟁은 적대화 되었고 격화되었다. 문제는 나의 일방적인 공격에 있을 뿐이다. 남편 자신의 활동 중심에는 가족이 없기 때문이다. “애들은 상관하지 말아야 하고 애들 신경쓰다보면 아무 것도 못한다.”고 말한다. 간단하다. 애들은 내 몫인 것이다.

모순되는 상호의존과 상호투쟁은 남편이 아닌 주위 동료의 발전을 촉진 시킨 결과가 되었다. 아이들을 열심히 먹여주고 씻겨주며 가르쳐주고 있다. 심지어 아이들은 부모에게보다 더 열렬한 애정의 반응을 동료동지에게 편지로 전화로 보내고 있다.

한때 활동을 고민하면서 지역에서 육아문제 해결 관련 사업을 적극적으로 해 줄 것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육아 문제는 활동가의 문제가 아닌 우리집 가정사만의 문제라면서 반대를 했다.

“물론 모순의 보편성을 인식함이 없이는 사물의 운동발전의 보편적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 그 러나 모순의 특수성을 연구함이 없이는 한 사물이 다른 사물과 다른 특수한 본질이 무엇인지 확정지을 수 없고, 사물의 운동발전의 특수한 원인 또한 특수한 근거를 발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사물을 구별할 수도 없고 과학의 연구 분야를 구분할 수도 없게 된다.인류의 인식운동의 순서로 본다면 그것은 항상 개별적으로, 특수한 사물의 인식으로부터 점차로 일반적인 사물의 인식으로 확대된다.”

우리 가정의 모순의 특수성을 인식함이 없이 일방적 사업의 요구만을 하는 그 부류들은 공통된 본질을 인식하지 않거나 연구하지 않음으로 해서 각종 구체적 사물들과 특수한 본질을 발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내게 맡겨진 아줌마를 조직화하는 사업은 다시 말해 육아문제의 해결 없이는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 아닌가.

모순의 특수성을 그 모순의 총체에서, 즉 모순의 상호연관 속에서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모순의 개개의 측면으로부터 착수하여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해야만 그 총체를 이해할 수 있다. 모순의 각 측면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각 측면이 어떤 특정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각각 어떤 구체적 형식으로 상대와 서로 의존하면서 또 서로 모순되는 관계에 있는가, 서로 의존하면서 또 서로 모순되고 있을 때와 그 의존이 파열된 후에는 또 각각 어떠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상대와 투쟁해야 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이들에 맞서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가를 일깨워준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개개의 입장, 각 측면의 연구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더욱더 기쁜 것은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일상적이고 알 수 없었던 현장에서 이런 연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나 재미있고 신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절대로 허위로 자만하거나 교만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를 연구함에 있어서는 주관성, 일면성, 표면성을 피해서 객관적으로 문제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레닌은 ‘대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 모든 면, 모든 연관과 매개물을 파악.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렇게 완전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면성의 요구는 우리로 하여금 오류와 무감각을 면케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가정에서 현장에서, 지역에서 투쟁을 조직하고 실천함에 있어서, 나의 준비되지 못하고 투철하지 못한 어설픔으로 인해 레닌이 말한 내용의 최소한 오류와 무감각으로 인한 실패가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해 본다.

현 장의 한 동지가 내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맹목성을 지적했다. 그러나 성실하고 겸손한 태도로 자신감을 갖고 열심히 토론하고 연구하고 파악하여 그 동지에게 또 현장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자유자재로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실천투쟁을 해보고자 한다.

마오쩌둥의 [모순론]은 현장에서 내용 없이 빈약하고 풍부하지 못한 활동의 내용을 너무나도 가득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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