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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과 활동가의 과제/노정협

파업과 활동가의 과제

1. 민주노총 파업과 대중파업

“전교조 연가 투쟁 강행”, “전국 폭력시위로 뒤덮여”, “교통체증 시달려” 11월 22일 민주노총 총파업과 한미FTA 반대 집회에 대한 부르주아 언론의 한결같은 반응이다. 그런데 민주노총 파업에 대해서는 별로 반응이 없다. 민주노총 파업의 강도가 강하고 이후 잠재적 폭발력이 강해서 일부러 민주노총 파업을 여론의 관심 밖으로 떠밀기 위해서 파업에 대해서 태연하게 보도한 것일까? 그러길 바란다. 그러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주관적 소망이다.


민주노총의 파업이 솜방망이가 된 것이 언제인데 민주노총 파업의 파괴력에 대해서 기대를 하겠는가?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세상물정을 몰라도 정말 모르는 사람이다. 폴리스 라인을 따라서 충실하게 행진하는 모습,! 이것이 민주노총의 자화상이다. 최대한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국민경제에 피해를 주지 않고 시민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테두리 안에서 부담을 최소화하고 민주노총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파업이 민주노총의 총파업이다. 민주노총의 파업은 어떤 긴장감도 주지 못한다. 파업에 참가하지 않는 민주노총 사업장과 민주노총 조합원은 물론이고 파업에 참가하는 사업장과 민주노총 조합원들도 긴장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파업에 참가한다. 자본가와 자본가 국가를 공격하여 물리적 대치와 충돌을 한다든지, 자본가 국가의 공권력(자본가 계급의 무장력)이 투입된다든지 파업 후에 해고를 비롯한 중징계를 당한다든지 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조합원에 대한 안전을 세심하게 고려하는 민주노총 지도부에 대해서 감사해야겠다.

공허한 구호와 힘없는 깃발만이 펄럭이는 맥 빠진 집회로 전락한 민주노총의 총파업은 총파업이 아니고 총력집회와 걷기대회일 뿐이다. 민주노총의 총파업은 잠재된 노동자의 계급본능과 계급감정을 최대한 표현하여 분노의 폭풍이 되고 파도가 되는 노동자 대중의 파업이 아니다. 그저 파업 할 곳 알아서 하고, 하는 곳 모아서 집회하고 행진하고, 어떤 식으로든 파업에 참가한 곳은 부분파업이든 집회이든 파업 참가 노동자 수로 계산해서 공표하는 관료주의적이고, 노동자가 파업의 주체가 아니라 파업에 동원되는 대상으로 전락하는 파업이다.

이런 관료주의적 파업은 노동자의 누적된 분노를 끌어올리고 결의를 모아내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노동자의 자기희생과 헌신을 추동할 수 없다. 노동자의 외부에서 즉 관료적 명령과 지시, 통제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파업은 노동자 자신의 파업이 아니라 낯설고 불안하고 짜증나는 노동자에게 강요된 파업이다. 이 파업에서 노동자는 수동적인 대상이기 때문에 능동적으로 책임을 질 수 없다. 노동자가 하는 파업이지만 노동자의 파업이 아닌, 노동자가 주체적으로 책임질 수 없지만 파업의 결과에 대해서는 일방적인 영향을 받는 파업이 누적되어 오늘의 파업 자화상을 만들었다. 파업에 대한 불신, 피로, 불안, 공포, 무관심이 노동자의 가슴을 짓누르고 현장을 황폐화 시켰다. 파업은 자본가와 자본가 국가의 조롱거리가 된지 오래다.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파업은 자본과 국가의 역공세의 빌미를 제공하는 부메랑으로 바뀌었고 자본과 국가는 어떤 망설임이나 두려움 없이 구조조정을 마음껏 하게 되었다. 파업의 변질과 파업을 매개로 한 노자간의 역학관계의 변화는 노동자를 지옥으로 인도하고 자본가를 천국으로 인도하였다.

일찍이 로자 룩셈부르크는 1905년 러시아 혁명의 경험을 이론화하여 ‘대중파업론’을 썼다. 대중파업은 노동자 해방운동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열정적으로 주장했다. 총파업은 무정부주의자들의 전유물이 아니고 맑스주의를 통해서만 과학적 사상으로, 노동자 해방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연적인 해방의 무기라고 주장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대중파업은 파업위원회를 거쳐서 노동자 평의회를 탄생시키고 대중파업은 시가전과 무장봉기로 전화하였다.) 대중파업은 약동하는 해방의 맥박이고 뜨겁게 불타오르는 해방의 심장이다.

대중파업은 로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위적으로 언제 어디서나 필요하면 꺼내 쓸 수 있는 주머니칼이 아니다. 국가, 자본, 당을 중심으로 한 계급관계의 표현이자 대중투쟁의 누적된 결과 즉 역사적 산물이다. 누적된 계급감정과 계급본능이 특정한 계기와 원인을 통해서 표출되어 파상적으로 진군하는 계급투쟁의 형태이다. 그래서 노동자는 파업을 통하여 건강한 계급적 본능을 자각하고 감각적, 경험적 형태의 날카로운 지적 능력을 발휘한다. 노동자는 이상주의와 열정의 불꽃에 휩싸여 개인적인 이익과 두려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잊고 이겨낸다.

파업은 기본적으로 외부에서 주입되거나 강요될 수 없는 노동자 내부의 계급투쟁의 법칙의 표현으로 노동자 자신의 것이다. 일정을 정하고 국회의 일정에 맞추어서 그 일정을 조절하고 강도를 조절하는 것은 파업을 언제든지 계획하고 지시하고 조절할 수 있는 고정된 물건이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계급본능과 계급감정은 계급관계, 사회적 관계로부터 고정되고 고립되어 있는 추상적인 그 무엇이나 물건이 아니다. 다양한 사회적 관계와 요소로부터 영향을 받고 우연적인 요소로부터 발생하고 늘 변화하기 때문에 수치화 할 수 없고 조절할 수 없다. 날짜를 예측하는 것도 거의 어렵다. 이것은 러시아 혁명과 독일혁명에서 보여준 대중파업이 생생하게 증언한다.

그래서 로자는 대중파업에서 정치적 지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기술적 준비와 지도의 잔머리를 굴리는 대신에 최대한 대중의 정서에 밀착하여 대중의 정서를 파악하고 대중에게 파업의 조건과 국면을 설명하고 올바른 전술적 방침과 투쟁의 방향을 제시하고 대중의 정치적 시야를 넓혀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기술적 준비와 지도를 부정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정치적 지도가 주요한 것이고 기술적 준비와 지도는 꼭 필요한 것이지만 상대적으로 부차적이다. 그런데 개량주의자, 관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는 똑같이 기술적인 측면에 집착한다.

로자는 계획되고 준비되고 조직된 파업을 시위성 파업이라고 하고 대중의 계급본능과 감정이 유감없이 표출되어 역동적이고 파상적으로 발전하는 파업을 전투적 파업이라고 한다. 시위성 파업과 전투적 파업의 관계는 무엇인가?

2. 시위성 파업과 전투적 파업

‘파업은 해도 문제이고 안 해도 문제이다!’ 대공장 정규직 노조의 위기와 객관적인 현장상황의 딜레마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파업을 하지 않으면 자본의 구조조정을 분쇄할 수 없는 데 파업을 할 경우에 어이없는 참담한 노조 지도부의 파업파괴와 백기투항, 여기에 저항할 수 있는 세력의 부재, 파업에 대한 대중의 불신이 깊어지는 현실을 표현한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현상의 어려움을 보여줄 뿐이지 실천적 답을 제시해 주는 것은 아니다. 실천적 측면에서 보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과 같다. 파업은 계급투쟁의 형태이기 때문에 파업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없다. 파업을 파업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파업 형식주의, 파업 물신주의, 파업 만능주의다. 계급투쟁의 내용, 계급관계, 계급적대감을 파업을 통해 표출해야 한다. 또한 파업은 역사적으로 누적된 파업을 비롯한 대중투쟁의 경험의 연속성과 영향 아래서 표출되기 때문에 파업을 그 순간만의 소동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즉, 일상적 대중투쟁의 집중적 표현으로 파업을 위치시켜야 한다. 따라서 대중의 분노가 표출되어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전투적 파업이 되려면 일상적 시기에 대중투쟁을 조직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일상적 투쟁과 파업의 통일, 파업의 내용과 대중의 계급본능, 계급감정을 통일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파업에만 모든 것을 기대하는 것은 파업이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파업을 기술적이고 형식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주도력과 지도를 포기하고 대중을 우상숭배 하면서 대중투쟁의 성과를 따먹으려고 하는 무책임한 도둑심보이자 대중추수주의이다.

시위성 파업과 전투적 파업은 파업의 본질을 이야기 할 때 상대적인 개념이고 오늘의 남한 노동운동의 상황에서 보는 것처럼 전투적 파업을 시위성 파업으로 대체하고 전투적 파업을 억압하는 경우가 많지만 양자가 반드시 대립하는 개념은 아니다. 시위성 파업은 주로 자본주의가 평화적이고 정상적인 형태로 발전하는 시기에 부응하고 대중파업은 주로 혁명의 시기에 부응한다. 그러나 이것은 상대적인 것이지 고정되고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평화적이고 정상적인 자본주의 시기에는 계급대립과 적대가 전면적인 형태로 드러나지 않는다. 일정한 조건 아래서 노동자의 경제적, 정치적 요구를 수용하고 노자가 타협할 수 있는 경제적 조건이 마련되기 때문에 개별 자본가와 노동자의 노동조건 개선과 의회를 통한 정치적 권리개선 문제가 주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정치와 경제는 분리되고 노자관계는 분절적 형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부분적 요구와 전체, 현재의 투쟁과 궁극적 운동의 목표를 결합하는 것이 중요한 운동적 과제가 된다.

하지만 자본이 근본적 위기에 빠지고 노자 적대감이 최고조에 이르게 되는 혁명의 시기에는 부분적 문제와 전체문제, 경제와 정치의 경계가 흐려지고 유동적으로 변한다. 어떤 하나의 문제는 모든 문제와의 관련성이 드러나서 모든 문제로 즉, 계급전체의 문제로 발전하고 경제와 정치의 연관관계(계급적 동일성)가 폭로되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이 통일되는 경향성을 낳는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적, 정상적 시기에는 시위성 파업이, 혁명적 시기에는 대중파업이 주로 어울린다. 하지만 평화적, 정상적 시기에도 계급적대는 관철되고 있고 또 특정 국면과 특정 부분에서는 적대감이 집중적으로 형성될 수 있기 때문에 시위성 파업은 대중파업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우리는 발전시키기 위하여 온 힘을 쏟아야 한다. 혁명의 시기에도 조직적, 기술적 준비와 지도가 없으면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정치적 지도와 대중의 조직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생사를 놓고 경쟁하고 투쟁하는 다른 정치세력들의 대중적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없다. 그리고 당이 대중과 긴밀하고 광범위하게 결합하면 할수록 대중의 정서와 밀착될 수 있고 적절한 타이밍과 개입방법과 수단을 찾을 수 있다. (물론 완전하게 수치화하거나 예측할 수는 없다.)

오늘의 자본주의 세계와 남한 자본주의는 정상적이고 평화적인 자본주의 발전의 시기를 지나고 있지 않다. 고삐 풀린 자본은 미쳐 날뛰고 있고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반동이 춤을 추고 있다. 자본과 자본가 정권은 구조조정을 줄기차게 추진하고 있다. 자본가 국가는 이데올로기적, 법, 제도적, 물리적 측면에서 노동자를 억압하고 착취를 강화하는 데 미쳐 있다. 자본과 자본가 국가에서 인간의 얼굴이 사라진지는 이미 오래됐다.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흡혈귀의 모습을 하고 흡혈귀의 지배와 법칙을 인정사정없이 노동자와 사회에 강요하고 있다.

노자적대는 갈수록 날카로워지고 있고 경제와 정치는 거대하고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시위성 파업과 대중파업이 결합될 수 있는 객관적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객관적 가능성이 현실로 표현되는 것을 제약하고 억압하는 요소들이 있다. 현재 제약하고 억압하는 요소들이 주요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중 가슴의 깊은 곳에는 분노와 원한이 쌓이고 있지만 지도부에 대한 불신과 패배주의, 정치적 전망의 부재는 분노와 원한을 개별적이고 수동적으로 해소하는, 술자리에서의 체념과 탄식을 통해, 자포자기와 냉소를 통해 해소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이미 말한 것처럼 민주노총 지도부는 시위성 파업을 관료주의적이고 보신주의적 파업으로 변질시켰다.

이런 요소들은 대중파업이 파상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제약하고 시위성 파업이 대중파업으로 발전하는 출발점, 조건이 되는 것을 제약한다. 하지만 우리가 눈물과 분노로 목격하고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은 대중파업의 성격이 강하고 계급적대감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에 민주노총 지도부의 관료주의적인 시위성 파업이 대중파업의 출발점과 조건, 계기를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은 존재한다.

대중파업의 요소를 어떻게 발전시키고 관료주의적 시위성 파업공간을 대중파업의 출발점으로 어떻게 이용하고 관료주의적 지도세력을 어떻게 폭로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3. 정치적 지도가 중요하다.

파업은 이미 살펴 본 것처럼 그 성격상 정치적 지도를 중요하게 만든다. 그리고 오늘 남한의 현실은 대중이 패배주의와 지도부에 대한 불신, 파업에 대한 피해의식을 극복하도록 할 것인지, 대중에게 “그래 그거야! 그렇게 하면 되겠다.”는 정치적 방향과 목표를 제출할 것인지를 운동의 생사가 걸린 문제로 만들고 있다. 또한 자본과 자본가 정권의 대대적인 이데올로기 공세를 타파하고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없애야 하는 임무가 있다. 우리는 이 점을 ‘노동자정치신문’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지적했다.

계급 의식적 활동가는 최대한 대중의 정서와 분위기와 밀착하고 민첩하게 대중의 정서의 변화에 대응하면서 최대한의 명확함과 일관성, 단호함을 가지고 전술적 방침과 투쟁의 목표를 대중이 이해하고 경험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적 지도는 조직적 힘이 없으면 일관되고 안정되게 진행되기 어렵다. 또 대중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볼 것이다. 조직적 주체와 힘이 없이는, 조직적 개입이 없이는 정치적 지도의 권위와 영향력을 확보할 수 없다.

우리의 현장상태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툭하면 사라져서 잠수 타다가 어쩌다가 나타나서 좌익공론이나 조합주의적 발언으로 활동에 찬물을 끼얹고 투쟁하는 활동가들의 가슴에 상처를 주고 사기를 떨어뜨리는 룸펜 활동가들을 비판하고 일정하게 선을 긋고 최대한의 결의와 열정, 헌신과 자기희생을 가진 활동가들이 적더라도 확실한 조직이나 연대틀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대중의 앞에 서서 실천을 주도해야 한다. 파업 때 파업파괴자로 움직이는 반동적인 노조지도부의 투항에 대해서 어떤 비판과 저지도, 파업의 지속을 위한 어떤 시도도 하지 못하는 현재의 현장조직 실태를 볼 때, 결의에 차 행동하는 현장조직의 건설은 너무도 시급한 과제이다. 땅에 떨어진 활동가들의 도덕적 권위와 지도력을 회복하지 않으면 정치적 지도와 조직적 개입과 영향력, 조직적 지도는 이루어 질 수 없다.

정치적 지도, 도덕적 지도, 조직적 지도력은 유기적으로 통일되어야 한다.<노/정/협>

파업과 활동가의 과제
http://lmagit.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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