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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5/25
    상식, 인간은 거수기가 아니다(2)
    사람
  2. 2010/05/06
    사람 5-6월호에 급조한 편집인의 글
    사람

상식, 인간은 거수기가 아니다

한 때 '백기 들어!, 청기 들어!' 하는 게임이 유행한 적 있다. 어떤 신문기사를 보니 천안함 사건의 정부 발표를 70% 정도가 믿는다고 한다. 그럼 나는 30%에 속하는데 그나마 나 같은 사람이 30%나 된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한편으론 마치 청기백기 게임을 강요받는 느낌이다. 아래는 한 블로그에 댓글로 적은 글이다.  

 

"(천안함 사건) 조사결과 발표가 설득력을 갖는 이유 중에 하나는 해외 전문가들이 참여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부분은 MB정부가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되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여기에도 어떤 맹점이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어떤 분야의 누구인지도 전혀 알고 있지 못하며(아직 민군 조사단 명단도 발표가 안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조사단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모르니까요. 멀리 갈 것도 없이 황우석 사태에서 보듯 전문가는 그 전문성으로 인해 전체에 대한 통찰, 숲을 보지 못하는 오류에 더 쉽게 빠지는 반면, 일반인에게는 전문가들이 검증했으니... 라고 하는 거짓된 믿음을 주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런 일일수록 상식에서 출발해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가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았다는 뉴스도 있었다. 어차피 그네들의 잔치인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것이 뭐 대단한 것인 양 취급하는 풍토가 그리 보기 좋지만은 않다. 신화로 승격된 월드컵 4강, 박세리-박찬호-박태완-김연아로 이어지는 스포츠 '월드' 스타들의 행렬, '세계적인 국가 브렌드'로 떠받들여지는 삼성, 그리고 해마다 꼴불견이 연출되는 노벨문학상 유력 운운하는 헤프닝까지. 이 모두 지리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분단되어 망망대해에 섬이 되어버린(섬나라를 비하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후진국 컴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넓지 않은 땅덩어리에 인구만 많은, 그 인구가 너무 많다고 호들갑, 줄어든다고 호들갑을 피우는 '대한민국'의 소아병 증상 같기만 하다.  

 

그래도, 그러하기에 최소한의 상식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 상식이 조금씩, 더디지만 천천히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제 나라 인민을 학살하고 권좌에 오른 독재자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상식,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상식, 민주주의와 인권이 최소한 이 시대에 가장 기본적인 가치라는 상식.  

 

이창동 감독의 <시>는 영화진흥위원회 심사에서 0점을 받은 작품이란다. '대한민국' 영진위가 칸 심사위원들보다 더 엄격하고 예술적인 식견이 높다면 그보다 이놈의 '대한민국'이 더 자랑스러울 것도 없겠지만 영진위가 그간 해온 작태에 비춰보자면 이 또한 상식에 반한다.  

 

잠수함을 찾아내는 초계함이었던 천안함이 잠수정의 어뢰에 맞아 피격되었다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하고 거기에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으면 잡혀가는 세상이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은 대한민국이다. 이미 미네르바가 있었고 정연주, PD수첩, 용산참사와 쌍용자동차가 있었고 4대강 사업이 진행 중에 있다. 상식에 반하는 일이 불과 몇 년 사이에 전혀 새로운 일이 되지 못한다. 아니 상식적이지 못한 일이 일상이고 다반사다.  

 

바야흐로 선거철,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투표로 말하라"는 단 하나의 상식만이 거리 곳곳에 내걸리고 있는다. 나는 이 선관위 홍보물을 볼 때마다 "투표만 하고 그냥 닥치고 있어!"라는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 '투표로 복수하자'는 말도 있는 모양이지만 내 생각에는 투표는 그저 아주 작은 한 부분의 원상복구(그것도 잘 된다면)일 뿐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투표로 말해야 하고, 그럴 것이지만 결코 투표만으로 다 말할 수는 없다. 인간은 거수기가 아니니까 말이다.      

 

   

p.s 미국 독립혁명에 지대한 영항을 끼친 토마스 페인의 <상식, 인권>이란 책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왜 세습 군주제를 반대하는가? 그 아버지가 왕이었다고 해서 그 아들이 국가를 더 잘 통치할 것이란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성일가와 서울대 입학생에서 보듯 이미 이른바 '자유대한'에서 부와 권력은 세습되고 있다.    

이 책이 고전인 까닭은 도처에 상식에 반하는 일이 행하여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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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5-6월호에 급조한 편집인의 글

<사람> 5-6월호가 나왔습니다.

마눌님이 보자마자 그럽니다.

"색 다르네."

전 편집인(박래군)이 구치소에서 보내온 편지를 '편집인의 글'로 때우고 날로 먹으려고 했는데, 예기치 않게 편집 막바지에 전 편집인이 보석으로 출소하느라 땜방식으로 편집인의 글, 원고를 급조해야 했습니다. (물론 편지도 잡지에 실기는 실었지만)

또 늦어진 변명을 하자면... 칠레 지진사태로 종이 구하기가 힘들었고 편집이 늦어져 인쇄일정도 어그러저버린 탓입니다.

종이잡지를 5년 가까이 만들어왔으면서도 우리 잡지에 쓰이는 종이 펄프가 칠레에서 온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밑에서도 썼지만 참 저는 주변과 관계에 무심한 놈인 거 같습니다.

그래도 좋은 글을 많이 실어 기분이 좋습니다. 편집인의 글에 대해 약간 변명을 하자면, 좋은 글을 소개할 겸 예전부터 한 번 써보고 싶던 방식(서평 방식?)을 도전해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호 편집인의 글은 <사람> 5-6월호 서평인 셈입니다. 그런데 서평은 책을 안 읽은 독자도 고려해야 하는 것인데, <사람>을 다 읽지 않은 사람들,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제 느낌이 전달될까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또 한 권의 <사람>이나왔습니다.

 

 

 

타인의 언어로만 이야기되는 사람들의 연대

 

대구에 있는 병원 하나가 문을 닫았습니다. 한 달에 1억5000만 원의 적자가 나고 그렇게 쌓인 적자가 120억 원에 달했다고 하니 너무나 당연한 결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가 그리 간단치는 않습니다. 그 병원은 바로 적십자병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적십자병원은 공공의료기관으로 저소득층과 이주노동자 같은 취약계층에게 무료진료나 부담이 적은 비용으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대구적십자병원이 만성적자에 시달렸다는 것은 그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했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해 대구적십자병원의 의료급여환자 진료 비율은 다른 지역 적십자병원들보다 많게는 두 배가 넘었습니다. 의료급여환자가 1000원짜리의 진료를 받았다면 일반병원에서는 360원을 내야 하지만 적십자병원에서는 190원만 내도 됩니다. 그래서 대구적십자병원이 일반병원이었다면 오히려 흑자를 낼 수 있었다고도 합니다. 이러한 공공의료기관을 살리기 위해 직원들은 10개월 동안의 임금체불도 감수하면서 폐원만큼은 막고자 애썼습니다. 그런데 애초부터 이윤추구보다 공익성에 무게를 두고 만들어지고 운영되었던 병원이 왜 문을 닫게 된 것일까요?


대구적십자병원 폐원 사태를 다룬 이번 호 르포 ‘왜 대구적십자병원은 문을 닫았나’의 앞머리에는 <한겨레21> 기사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서울 강북의 빈곤층이 모여 사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121가구를 심층 조사한 그 기사를 뒤늦게 찾아 읽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살다 가난하게 죽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아픕니다. 아파서 가난해진 것인지 가난해서 아픈 것인지를 구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더 가난하고,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식구가 있는 집은 앞으로 더 가난해질 확률이 높습니다. 노인들은 무능하고 젊은이들은 무기력합니다. 나이가 적으면 적을수록 자포자기가 심하고 세상에 대한 분노는 더욱 크다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새로울 것 없는 내용인데 기사를 읽으니 가난에 대한 공포가 밀려옵니다. 살얼음판을 걷는 위태로움. 벼랑 끝에서 한 발 삐끗하면 저 아래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이러한 불안과 두려움이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게 하는 것 중 하나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해서든지 빈곤층은 면하고 싶다는 생각, 우선 차상위계층에서 벗어나고 봐야겠다는 심리가 절로 작동합니다.
 

<사람>의 르포에서 대구적십자병원이 문을 닫은 것은 국민들에게서 거둔 적십자회비의 단 1%도 적십자병원에 지원하지 않은 채 그 어떤 개선의 노력도 하지 않았던 대한적십자사와 “목소리가 없는 시민들을 위해선 관심과 시선주기를 꺼리는 국회의원과 관계 당국” 그리고 “소외되고 외로운 이들을 위해 따뜻한 눈길, 마음을 주지 않았던 많은 대구시민들”의 합작품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만약 목소리가 없는 시민들,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되찾아 어떤 울림을 낼 수 있었다면 결론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저 목청 높고 자신들의 정치세력을 확고하게 틀어쥐고 있는 이들,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 또는 그 어떤 희망의 끝자락을 쥐고 그 침묵의 카르텔에 어떻게든 끼어보고자 했던 이들의 담합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그 목소리, 울림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사회적 고통, 그 중에서도 특히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진상규명에는 관심없이 천안함 침몰 사건의 희생자들을 ‘대한의 아들’이자‘순국한 용사’로 일컬으며 유족 돕기 성금모금으로 추모를 독려하고 애도기간을 정해 슬픔을 강요하는 것을 보면 사회적 고통을 정치적 이해관계에 맞춰 이용하려 든다는 의심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반면 “이 참혹하고 억울한 죽음을 알려야 한다는 절박함. 그리고 그 죽음의 원인을 밝히고, 책임을 물어야 하며, 이 같은 사건이 다시 재발해서는 안 된다는 모든 당위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그 죽음의 장면을 마구(!) 사용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라는 질문(‘어느 넝마주이가 생각하는 사진과 인권’) 앞에서 과연 우리는 어떠했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통 받는 피해자의 증언을 듣는다는 것, 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는 것, 그들의 고통 혹은 죽음에 대한 의미부여가 또 다른 방식으로 그들을 밀어내고 가두었던 것은 아닌지, 어떤 명분을 내세워 하나의 의미를 독차지하려는 욕망은 없었는지 되짚어봅니다.
 

어떤 의미부여에 앞서 아픔에 공감하고 서로의 고통과 경험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최근 불거진 낙태 찬반 논란과 관련하여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선택권이라는 현재의 논쟁 구도에서, 여성은 태아를 죽인 자로서 등장”할 수밖에 없기에 자신의 경험을 말할 수 없음(‘말하기 어려움, 또는 낙태에 대한 작은 말하기’)은 제도적 차별만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각종 억압과 편견들 가운데서 우리가 말하고 듣고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닫게 해줍니다.
 

한 가지 고백을 하자면 삼성의 문제가 심각하고 그래서 깊이 있게 다뤄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또 하나의 가족, 아시아의 삼성’이란 글을 읽기 전까지 삼성에 대한 제 머릿속 사고는 대한민국 국경을 한 발자국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소통과 이해의 전제조건은 타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란 말, 연대가 중요하다는 말은 그저 미사여구였을 뿐 아직껏 제 언어가 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재작년 이맘때 서울 청계광장에서는 그전까지 아무도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청소녀/년들에 의해 촛불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그 광장에서 100여 일 동안 무수한 말들이 흘러넘쳤고 천차만별, 각양각색의 어깨동무가 있었습니다. “무엇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의 “말들에 귀 기울이고, 계속 말하라고 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명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없으며 “누구나 말할 권리”가 있고 누구나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일 의무”(‘김예슬 선언과 나의 스무 살’)가 있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그렇지만 매우 짧은 시간 동안만 증명되었다 곧 다시 부정되고는 하는 명제 앞에서 다시금 목소리를 빼앗긴 이들, 타인의 언어로만 이야기되어지는 이들과 함께 나누는 말, 그 언어로 재구성되는 관계를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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