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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한잔 하며 이야기하는 불복종과 세상살이

용산투쟁으로 쫌더 유명해진 인권활동가 박래군을 팔아서(?) 인권재단 사람도 알리고 잡지 <사람>도 알리는 자리를 만들어보자고 술자리에서 기획된 행사다. 애초에는 '박래군의 토크쇼' 형태였는데 며칠 뒤 다시 만나니 영 부담스러워했다. 환갑도 안 된 나이에 무슨 자서전 출판기념회도 아니고...
 
얼떨결에 1부 사회를 맡게 되었는데 진행이 매끄럽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용산싸움과 420일 동안의 수배생활. 순천향병원, 명동성당, 서울구치소를 전전하며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고 고민했을지 사람들은 궁금해할까?
 
그는 구치소에서 나와 자신의 이야기보다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생각인지를 궁금해했다. 사실 나도 박래군보다 나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지가 더 궁금하다.^^ 
 
 
 
막걸리 한잔합시다
- 420일간의 불복종과 세상살이
 
용산참사 500일.
그 한복판에 있었던 인권운동가에게 듣는 420일간의 불복종 이야기.
돈 때문에 싸우고 돈으로 위로받고 돈으로 굴러가는 세상에서
자본에 복종하지 않는 삶을 찾아 나선 사람들의 이야기.
제2의 용산이라 불리는 홍대 앞 두리반에서 막걸리 잔 기울이며
술이 익어가듯 술술술 사는 이야기를 풀어봅시다.
 
때와 곳; 2010년 6월 24일(목) 19시 두리반(2호선 홍대입구역 4번출구)
 
 
 
첫째 판 “420일간의 불복종”
이야기 꺼리:  박래군, 용산을 만나다
                   탈주를 꿈꾸다 
                   용산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불복종이 남긴 것
이야기 손님:   박래군, 이종회, 안종녀 
  
인디밴드 공연
 
둘째 판 “돈 없으면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 인권운동가의 주머니 사정”
이야기 꺼리:   요즘 뭐 부쳐 먹고 사시나요? 
                    빈대떡 신사들의 쩐의 전쟁
                    생계와 활동, 이중생활의 곤란 혹은 비결
                    불복종과 재단의 수상한 만남
이야기 손님:    박래군, 김배균, 박옥순  
 
 
※ 이 행사는 인권재단 사람에서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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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로호는 발사되지 못했다

육아일기라는 걸 한 번 써보기로 했다.  오늘은 역사적인(?) 그 첫번째 글이다.  


우선 주인공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첫째는 31개월 딸내미 유니, 둘째는 석 달 뒤에 태어날 벼리다.  둘째는 성별을 모르는데 담당 의사가 미리 안 알려주기로 유명한 의사란다.  

 

유니는 한창 유행이라는 수족구 의심 환자로, 어제부터 어린이집을 가지 않고 있다. 그래서 오늘 엄마랑 아빠랑 누워 TV를 봤다.  YTN 뉴스였는데  나로호 발사 생중계였다. 아래는 유니와 엄마의 대화.

 

 

"저게 뭐야?" 
"우주선" 
"누가 타고 있어?" 
"아무도 안 타고 있어" 
"그럼 왜 그래?" 
"..." 

 

 

결국 나로호는 발사되지 못했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어린이집에 가지 못한다.
짐작하건대 수족구 병균은 어린이집에 다 퍼졌을 거 같은데...
내일은 유니와 함께 사무실로 출근해야 할 거 같다. 
 
아이폰을 보면 참 인간의 과학기술이 여기까지 왔나 싶다가도 수족구병의 창궐이나 나로호를 보면 허허 이것 참... 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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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인간은 거수기가 아니다

한 때 '백기 들어!, 청기 들어!' 하는 게임이 유행한 적 있다. 어떤 신문기사를 보니 천안함 사건의 정부 발표를 70% 정도가 믿는다고 한다. 그럼 나는 30%에 속하는데 그나마 나 같은 사람이 30%나 된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한편으론 마치 청기백기 게임을 강요받는 느낌이다. 아래는 한 블로그에 댓글로 적은 글이다.  

 

"(천안함 사건) 조사결과 발표가 설득력을 갖는 이유 중에 하나는 해외 전문가들이 참여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부분은 MB정부가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되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여기에도 어떤 맹점이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어떤 분야의 누구인지도 전혀 알고 있지 못하며(아직 민군 조사단 명단도 발표가 안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조사단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모르니까요. 멀리 갈 것도 없이 황우석 사태에서 보듯 전문가는 그 전문성으로 인해 전체에 대한 통찰, 숲을 보지 못하는 오류에 더 쉽게 빠지는 반면, 일반인에게는 전문가들이 검증했으니... 라고 하는 거짓된 믿음을 주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런 일일수록 상식에서 출발해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가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았다는 뉴스도 있었다. 어차피 그네들의 잔치인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것이 뭐 대단한 것인 양 취급하는 풍토가 그리 보기 좋지만은 않다. 신화로 승격된 월드컵 4강, 박세리-박찬호-박태완-김연아로 이어지는 스포츠 '월드' 스타들의 행렬, '세계적인 국가 브렌드'로 떠받들여지는 삼성, 그리고 해마다 꼴불견이 연출되는 노벨문학상 유력 운운하는 헤프닝까지. 이 모두 지리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분단되어 망망대해에 섬이 되어버린(섬나라를 비하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후진국 컴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넓지 않은 땅덩어리에 인구만 많은, 그 인구가 너무 많다고 호들갑, 줄어든다고 호들갑을 피우는 '대한민국'의 소아병 증상 같기만 하다.  

 

그래도, 그러하기에 최소한의 상식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 상식이 조금씩, 더디지만 천천히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제 나라 인민을 학살하고 권좌에 오른 독재자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상식,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상식, 민주주의와 인권이 최소한 이 시대에 가장 기본적인 가치라는 상식.  

 

이창동 감독의 <시>는 영화진흥위원회 심사에서 0점을 받은 작품이란다. '대한민국' 영진위가 칸 심사위원들보다 더 엄격하고 예술적인 식견이 높다면 그보다 이놈의 '대한민국'이 더 자랑스러울 것도 없겠지만 영진위가 그간 해온 작태에 비춰보자면 이 또한 상식에 반한다.  

 

잠수함을 찾아내는 초계함이었던 천안함이 잠수정의 어뢰에 맞아 피격되었다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하고 거기에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으면 잡혀가는 세상이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은 대한민국이다. 이미 미네르바가 있었고 정연주, PD수첩, 용산참사와 쌍용자동차가 있었고 4대강 사업이 진행 중에 있다. 상식에 반하는 일이 불과 몇 년 사이에 전혀 새로운 일이 되지 못한다. 아니 상식적이지 못한 일이 일상이고 다반사다.  

 

바야흐로 선거철,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투표로 말하라"는 단 하나의 상식만이 거리 곳곳에 내걸리고 있는다. 나는 이 선관위 홍보물을 볼 때마다 "투표만 하고 그냥 닥치고 있어!"라는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 '투표로 복수하자'는 말도 있는 모양이지만 내 생각에는 투표는 그저 아주 작은 한 부분의 원상복구(그것도 잘 된다면)일 뿐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투표로 말해야 하고, 그럴 것이지만 결코 투표만으로 다 말할 수는 없다. 인간은 거수기가 아니니까 말이다.      

 

   

p.s 미국 독립혁명에 지대한 영항을 끼친 토마스 페인의 <상식, 인권>이란 책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왜 세습 군주제를 반대하는가? 그 아버지가 왕이었다고 해서 그 아들이 국가를 더 잘 통치할 것이란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성일가와 서울대 입학생에서 보듯 이미 이른바 '자유대한'에서 부와 권력은 세습되고 있다.    

이 책이 고전인 까닭은 도처에 상식에 반하는 일이 행하여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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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5-6월호에 급조한 편집인의 글

<사람> 5-6월호가 나왔습니다.

마눌님이 보자마자 그럽니다.

"색 다르네."

전 편집인(박래군)이 구치소에서 보내온 편지를 '편집인의 글'로 때우고 날로 먹으려고 했는데, 예기치 않게 편집 막바지에 전 편집인이 보석으로 출소하느라 땜방식으로 편집인의 글, 원고를 급조해야 했습니다. (물론 편지도 잡지에 실기는 실었지만)

또 늦어진 변명을 하자면... 칠레 지진사태로 종이 구하기가 힘들었고 편집이 늦어져 인쇄일정도 어그러저버린 탓입니다.

종이잡지를 5년 가까이 만들어왔으면서도 우리 잡지에 쓰이는 종이 펄프가 칠레에서 온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밑에서도 썼지만 참 저는 주변과 관계에 무심한 놈인 거 같습니다.

그래도 좋은 글을 많이 실어 기분이 좋습니다. 편집인의 글에 대해 약간 변명을 하자면, 좋은 글을 소개할 겸 예전부터 한 번 써보고 싶던 방식(서평 방식?)을 도전해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호 편집인의 글은 <사람> 5-6월호 서평인 셈입니다. 그런데 서평은 책을 안 읽은 독자도 고려해야 하는 것인데, <사람>을 다 읽지 않은 사람들,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제 느낌이 전달될까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또 한 권의 <사람>이나왔습니다.

 

 

 

타인의 언어로만 이야기되는 사람들의 연대

 

대구에 있는 병원 하나가 문을 닫았습니다. 한 달에 1억5000만 원의 적자가 나고 그렇게 쌓인 적자가 120억 원에 달했다고 하니 너무나 당연한 결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가 그리 간단치는 않습니다. 그 병원은 바로 적십자병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적십자병원은 공공의료기관으로 저소득층과 이주노동자 같은 취약계층에게 무료진료나 부담이 적은 비용으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대구적십자병원이 만성적자에 시달렸다는 것은 그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했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해 대구적십자병원의 의료급여환자 진료 비율은 다른 지역 적십자병원들보다 많게는 두 배가 넘었습니다. 의료급여환자가 1000원짜리의 진료를 받았다면 일반병원에서는 360원을 내야 하지만 적십자병원에서는 190원만 내도 됩니다. 그래서 대구적십자병원이 일반병원이었다면 오히려 흑자를 낼 수 있었다고도 합니다. 이러한 공공의료기관을 살리기 위해 직원들은 10개월 동안의 임금체불도 감수하면서 폐원만큼은 막고자 애썼습니다. 그런데 애초부터 이윤추구보다 공익성에 무게를 두고 만들어지고 운영되었던 병원이 왜 문을 닫게 된 것일까요?


대구적십자병원 폐원 사태를 다룬 이번 호 르포 ‘왜 대구적십자병원은 문을 닫았나’의 앞머리에는 <한겨레21> 기사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서울 강북의 빈곤층이 모여 사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121가구를 심층 조사한 그 기사를 뒤늦게 찾아 읽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살다 가난하게 죽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아픕니다. 아파서 가난해진 것인지 가난해서 아픈 것인지를 구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더 가난하고,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식구가 있는 집은 앞으로 더 가난해질 확률이 높습니다. 노인들은 무능하고 젊은이들은 무기력합니다. 나이가 적으면 적을수록 자포자기가 심하고 세상에 대한 분노는 더욱 크다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새로울 것 없는 내용인데 기사를 읽으니 가난에 대한 공포가 밀려옵니다. 살얼음판을 걷는 위태로움. 벼랑 끝에서 한 발 삐끗하면 저 아래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이러한 불안과 두려움이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게 하는 것 중 하나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해서든지 빈곤층은 면하고 싶다는 생각, 우선 차상위계층에서 벗어나고 봐야겠다는 심리가 절로 작동합니다.
 

<사람>의 르포에서 대구적십자병원이 문을 닫은 것은 국민들에게서 거둔 적십자회비의 단 1%도 적십자병원에 지원하지 않은 채 그 어떤 개선의 노력도 하지 않았던 대한적십자사와 “목소리가 없는 시민들을 위해선 관심과 시선주기를 꺼리는 국회의원과 관계 당국” 그리고 “소외되고 외로운 이들을 위해 따뜻한 눈길, 마음을 주지 않았던 많은 대구시민들”의 합작품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만약 목소리가 없는 시민들,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되찾아 어떤 울림을 낼 수 있었다면 결론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저 목청 높고 자신들의 정치세력을 확고하게 틀어쥐고 있는 이들,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 또는 그 어떤 희망의 끝자락을 쥐고 그 침묵의 카르텔에 어떻게든 끼어보고자 했던 이들의 담합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그 목소리, 울림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사회적 고통, 그 중에서도 특히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진상규명에는 관심없이 천안함 침몰 사건의 희생자들을 ‘대한의 아들’이자‘순국한 용사’로 일컬으며 유족 돕기 성금모금으로 추모를 독려하고 애도기간을 정해 슬픔을 강요하는 것을 보면 사회적 고통을 정치적 이해관계에 맞춰 이용하려 든다는 의심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반면 “이 참혹하고 억울한 죽음을 알려야 한다는 절박함. 그리고 그 죽음의 원인을 밝히고, 책임을 물어야 하며, 이 같은 사건이 다시 재발해서는 안 된다는 모든 당위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그 죽음의 장면을 마구(!) 사용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라는 질문(‘어느 넝마주이가 생각하는 사진과 인권’) 앞에서 과연 우리는 어떠했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통 받는 피해자의 증언을 듣는다는 것, 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는 것, 그들의 고통 혹은 죽음에 대한 의미부여가 또 다른 방식으로 그들을 밀어내고 가두었던 것은 아닌지, 어떤 명분을 내세워 하나의 의미를 독차지하려는 욕망은 없었는지 되짚어봅니다.
 

어떤 의미부여에 앞서 아픔에 공감하고 서로의 고통과 경험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최근 불거진 낙태 찬반 논란과 관련하여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선택권이라는 현재의 논쟁 구도에서, 여성은 태아를 죽인 자로서 등장”할 수밖에 없기에 자신의 경험을 말할 수 없음(‘말하기 어려움, 또는 낙태에 대한 작은 말하기’)은 제도적 차별만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각종 억압과 편견들 가운데서 우리가 말하고 듣고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닫게 해줍니다.
 

한 가지 고백을 하자면 삼성의 문제가 심각하고 그래서 깊이 있게 다뤄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또 하나의 가족, 아시아의 삼성’이란 글을 읽기 전까지 삼성에 대한 제 머릿속 사고는 대한민국 국경을 한 발자국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소통과 이해의 전제조건은 타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란 말, 연대가 중요하다는 말은 그저 미사여구였을 뿐 아직껏 제 언어가 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재작년 이맘때 서울 청계광장에서는 그전까지 아무도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청소녀/년들에 의해 촛불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그 광장에서 100여 일 동안 무수한 말들이 흘러넘쳤고 천차만별, 각양각색의 어깨동무가 있었습니다. “무엇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의 “말들에 귀 기울이고, 계속 말하라고 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명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없으며 “누구나 말할 권리”가 있고 누구나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일 의무”(‘김예슬 선언과 나의 스무 살’)가 있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그렇지만 매우 짧은 시간 동안만 증명되었다 곧 다시 부정되고는 하는 명제 앞에서 다시금 목소리를 빼앗긴 이들, 타인의 언어로만 이야기되어지는 이들과 함께 나누는 말, 그 언어로 재구성되는 관계를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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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들여다보기-사라져가는 동네 사진관

4년 전 일이다. 아이가 생긴 것 같다는 아내의 말에 함께 산부인과에 들렸다 돌아오는 길. 내 손에는 콩알만 한(의사가 ‘요 게’ 태아라고 알려준) 물체가 찍혀있는 초음파 사진 한 장이 들려있었다. 불과 십 수 일 된 생명. 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과연 어떠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약간 당혹스러웠다. 열 달 뒤에는 분만대기실에서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촬영대기중인 예비 아빠들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흔한 똑딱이(소형 디지털카메라) 하나 챙기지 않았지만 분만실 어딘가에 있던 카메라를 통해 출산 직후 아이의 모습은 동영상 CD로 구워져 지금 우리 집 책꽂이에 꽂혀있다.

사진을 찍고 찍히는 일은 하나의 의식(儀式)이다. ‘인증샷’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나지도 않았을 무렵부터 우리는 가족사진을 통해 누군가로부터 한 가족, 그것도 화목하고 단란한 가족임을 인증 받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러고 보니 나는 늘 졸업앨범 비를 아까워했지만 어머니는 졸업장보다 졸업사진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듯하다. 그런데 아이를 낳은 뒤 손주와 가족사진을 찍자고 하자 너희 식구 끼리나 찍으란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가 찍힐까봐 두려우셨던 걸까?

인천 동암역 ‘역전 사진관’


언제부터인가 동네 사진관들이 하나 둘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나마 오래된 사진관이 몇 군데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천으로 향했다. 인천은 좀 묘한 도시다. 닫혀 있던 조선이 외세에 의해 처음으로 문을 열어야 했고, 그 문으로 선진 문물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던 항구. 한국전쟁의 또한 한국 현대사의 판도를 뒤바꾸어 놓았던 맥아더의 상륙작전의 도시. 낡아서 인기가 높다는 ‘바이킹’의 월미도와 처음으로 짜장면을 만들었다는 ‘공화춘’이 있는 차이나타운. 확인할 수는 없지만 사진에 최초로 등장했던 조선 사람은 고기잡이를 하는 어부였다고 하니 그 무대가 인천은 아닐까 하며, 인천 부평구 십전동 동암역 광장에 있는 참 오래된 동네 사진관 ‘역전사진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버님은 반공포로였어요. 이승만 대통령 적에 거제도(포로수용소)에 있다가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 남아라, 그랬는데 아버님은 이북 사상이 싫어서 여기(남한)에 남게 되었죠. 그런 사람들을 정부에서 당시 인천에 있던 동일방직에 많이 들여보냈어요. 거기 다니면서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시고…… 어머니 막내 삼촌이 평화사진관이란 곳에 근무하셨는데 동일방직을 나와 거기 다니면서 사진 기술을 배워서 사진관을 연 거죠.”

1964년 그렇게 만석동에 문을 연 부흥사진관은 1974년 지금 동암역 근처로 옮겨와 동암사진관이 되었고 1980년 지금의 동암역 남부광장에 자리 잡으면서 역전사진관이 되었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최광남 씨가 증기기관차를 타고 학교를 오가던 시절, 학교를 마치면 아버지 도시락 심부름을 하며 그는 자연스럽게 사진관 일을 돕게 되었다.

“그때는 사진관마다 외무원(외판원)들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티켓(할인권)을 팔면서 사진관 홍보를 해주었는데 이 사진관 가면 설탕 준다, 저기 사진관을 가면 수건 준다, 자기들 멋대로 그러고 다니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사진 찍으러 와서 왜 설탕 안 주느냐? 항의하는 사람도 있었죠. 아버님은 그게 못마땅하셔서 우리 사진관은 조금 하다가 외무원을 아예 안 두게 됐죠.”

다들 어렵던 시절, 설탕을 주거나 말거나 양장점이나 제화점과 같이 사진관은 큰맘 먹고 찾아야 하는 곳이었으리라. 그 무렵 최광남 씨가 기억하는 최고의 호황은 1968년이었다. 1968년 정부는 모든 성인남녀에게 주민등록증이란 것을 만들게 했고 거기에는 하나같이 증명사진을 붙여야 했으니 국가적 차원의 기념촬영이 이뤄졌던 것이다. 또한 1964년부터 1973년까지의 베트남 파병도 사진관 매출을 올리는 데 한몫했다. 처음에는 파병군인 손을 통해, 이후에는 밀수업자들을 통해 손목시계와 사진기가 대량으로 국내에 들어왔고 그만큼 사진을 인화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이 시대적인 특수였다면 연례적인 호황도 있었다.

“3월 입학 시즌이 제일 바빴지. 중고등학교 학생증 때문에 2~300명이 증명사진을 찍으러 한꺼번에 몰려오고 그랬으니까. 그때는 온 식구들이 잠도 못자고 사진관 일에 달라붙어야 했어요. 한 사람당 여섯 장씩 뽑아줬거든. 그때는 일일이 손으로 노광(필름에 적당한 빛을 줘서 밝기를 조정하는 일, 노출이라고도 한다)을 줘서 밝기를 동일하게 해야 하는데 어떤 사진에 조금만 오래 주면 그것만 색이 달라져버려. 그럼 그거 한 장만 오려내고 다시 필름을 현상해야 돼요. (옆에서 함께 사진관을 운영했던 부인 임경희 씨는 ‘다시’라는 말이 제일 징그럽다며 추임새를 놓는다.) 나중에 많이 하면 달인이 되어서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기계적으로 됐지. 그런데 또 학생들이 대부분 까까머리에 옷도 똑같은 검은 색 교복을 입었잖아. 다 인화하고 나오면 요만한(손바닥 절반 크기의) 봉투에 풀칠을 해서 사진 한 장을 붙여가지고 커다란 베니어판에 봉투들을 쫙 붙여놔요. 어떻게 일일이 다 꺼내보고 확인하고 찾아줄 수가 없으니까. 그럼 자기 얼굴 찾아서 떼어 가는 거지. 그런데 자기 것만 떼어 가면 문제가 없는데 꼭 친구 것도 같이 가져가서 안 전해주는 경우가 생겨요. 그럼 그 친구는 왜 자기 사진은 없느냐 그러고. 그럼 그것도 다 필름을 다시 확인해서, 어떨 때는 필름의 명찰까지 확대해서 그걸 보고 찾아서 다시 뽑아주고 그랬죠.”

그리 오래지 않은, 불과 2~30년 전 일이지만 지금은 찾을 라야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 되었다. 암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다니던 학교 사진반 서클룸의 암실은 몰래 담배피기 딱 맞춤인 공간이었다. 한쪽은 검고 한쪽은 붉은 커튼을 걷고 들어서면 풍겨 나오던 알싸한 화학약품 냄새.

“그 당시에는 다 손으로 했어요. 암실에 들어가서 야광이라고, 붉은 다마(전구)에 필름을 비춰서…… 온도계도 없었지만 오래 하다 보면 새끼손가락 끝이 온도계야. 인화지에 노출을 준 다음 욕조에 약품을 타고 인화지를 담가서 희석을 시켜요. 처음에는 현상액, 그 다음에는 정지액, 정착액…… 약품들이 희석이 잘 안 되면 (사진에) 줄이 생기거든. 그럼 또 다시 해야지. 그리고는 흐르는 물에 12시간 정도 담가둬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사진이 좀 오래되면 노랗게 돼. 사진 잘 보는 사람은 인화한 걸 보고 딱 그러지. 금방 변하겠네요. 그때는 그걸 다 손으로 하니까 손톱이 맨날 노래졌지. 또 건조를 해야 하는데 작은 탁자 크기의 건조기가 있어요. 스텐리스 판에 열장씩 얹어놓고 롤러 같은 걸로 물을 쫙 뺀 다음 약간 있으면 김이 모락모락 내는데 조금만 오래 두면 또 사진이 거기에 눌러 붙어. 그럼 또 다시 뽑아야 되고. 그게 다 기술이지. 암실에 있는 시간이 하도 많아서 해를 거의 못 보고 살았어요.”

따라가기 벅찬 디지털 세상

한참 이야기를 하는데 어느 할머니가 사진관 문을 열자마자 대뜸 여긴 처음 올 적에는 총각 사장이더니 지금은 백발이 다 되었다며 농을 던지고는 딸네 사진 한 장 찍어주고 싶다며 가격을 묻고 가신다. 아버지 일을 도와 사진관을 하던 최광남 씨가 군대를 제대하고 결혼을 한 뒤 신혼집을 겸한 사진관을 차려 독립한 것은 1980년. 그때만 해도 동암역 남부광장은 그야말로 허허벌판에 양계단지만 들어서 있어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생활고에 직면한 최광남 씨는 낮에는 사진관을 부인에게 맡기고 인천항에 있는 선원조합에 취직을 했고 80년대 후반 경기가 좋아지고 형편이 좀 나아지자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사진관에 전념했다.

“88년 올림픽 앞두고 큰맘 먹고 그동안 모아둔 돈에 대출까지 해서 칼라사진 인화기를 샀어요. 5000만원이 넘었는데 당시 빌라 한 채 값이었죠. 그때 사람들이 참 사진을 많이 찍은 거 같아요. 사진기를 빌려주기도 했죠. 입학식이나 졸업식, 소풍이나 바캉스 같을 때. 제일 잘 나가던 게 올림푸스 팬이라고 24장짜리 필름 넣으면 48장 나오는 사진기인데 사람들은 같은 필름을 사도 여러 장 찍을 수 있으니까 좋고, 우리는 인화 많이 하니까 좋고. 그 기계(칼라사진 인화기)를 10년도 넘게 썼어요. 애지중지하며 썼죠. 그런데 어느 날부터 디카(디지털카메라)로 바뀌면서 쓸 일이 없어지니까, 기계가 돌아가야 고장도 안 나는 법이잖아요. 그 안에 약이 들어가는데 헌 약이 빠지고 새 약이 다시 들어가고 그래야 되는데 약도 그대로 두니까 상하고. 그러면 쓰지도 않은 약 몇 개월에 한 번 갈아줘야 하고. 이래저래 적자만 계속 쌓여가니까 몇 해 전에 처분을 했죠. 여기 사진관 문으로 나갈 수도 없는 큰 기계여서 내가 다 분해해서 고철상 불러서 가져가라고 했어요. 13만원 고철 값 내주고 가져가는데 마음이 짠하더라고.”

디지털인화서비스란 것이 처음 등장한 게 2000년, 그 시기 대부분의 언론사 사진기자들도 일명 DSLR이라고 하는 디지털카메라로 바꾸던 시기였다. 한 언론에 따르면 디지털인화 시장은 2002년 12억 원 대였던 것이 2년 뒤 600억 원 대로 가파르게 성장했다고 한다. 너나없이 사진기를 갖고 다니고 핸드폰에도 사진기가 장착되던 무렵, 사진기가 많아지니 더 많이 사진을 뽑을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동네 사진관들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시대가 너무 빨리 바뀌어. 디카가 들어오니까 나도 2000년인가 카메라 바디만 천 몇 백만 원짜리를 샀지. 그때는 1기가 메모리만도 60만원에 베터리 가격도 만만치 않아. 그때는 베터리가 TV리모컨만 했어요. 그런데 지금 1기가에 얼마나 해? 4기가에 만원도 안 하잖아. 디카는 너무 빨리 바뀌고 다 수입에 의존하니까 부품도 금방 단종이 되어서 고장 나면 수리할 때도 없어. 그러니까 장비 구입하고 따라가기 바쁘지. 증명사진 전용 프린터기도 코닥 제품으로 600만 원짜리 샀는데 좀 있으니까 코닥이 생산을 안 한다는 거야. 사진관들 문 닫는 게 다 그런 이유야. 디카 나오기 몇 해 전에는 폴라로이드 사진기, 증명사진 찍는 전용 폴라로이드가 있었어요. 25분, 17분, 5분, 3분…… 빨리 뽑아주는 게 경쟁이 될 때였으니까 그걸로 증명사진을 찍었는데 그럴 98만원 주고 샀었는데 그것도 몇 해 지나서 무용지물이 됐지. 또 폴라로이드는 필름 값이 비싸잖아. 딱 찍고 1분 있으면 나오는데 보면 눈을 감았어. 그럼 다시 찍어줘. 또 눈을 감았어. 눈감은 사진 필름은 반품도 안 되는데, 속이 타지. 손님은 왜 자꾸 눈 감을 때 찍느냐고 그러고. 네 번까지 찍은 적도 있어. 그럼 뽑을 때 얼마나 조마조마 한지……. 그 필름이 여기 어디 있는데…… 마지막 쓴 게 2004년 9월이네. 디카가 들어오니까 그거야 좋지. 눈을 감든 말든.”

무언가를 오래 들여다본다는 것

낼 모레 환갑을 바라보는 백발이 성성한 이가 이메일이니 포토샵이니 하는 낯선 용어들과 마주치며 컴퓨터 모니터와 씨름했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부인 임경희 씨는 몇 해 전부터는 “머리 흰 소년(남편을 칭하는 애칭인 듯하다)이 젊은이들 결혼식에 사진 찍고 그러는 게 보기 좋지 않다”며 출장사진도 나가지 말라고 말렸다고 한다. 사실 디지털화와는 별도로 행사사진촬영이 전문화, 기업화되면서 출장사진 주문도 거의 없어졌다.

“예전에는 집에서 돌잔치를 많이 했잖아. 그럼 나는 한 짐 싣고 다녔지. 오토바이에 병풍, 돌상에 올라갈 것들, 삼각대에 조명에, 나중에는 비디오카메라까지 메고. 그런데 가보면 집들이 다 좁아. 지금처럼 좋은 렌즈도 없으니까 방안에서는 돌상이 다 안 나오거든. 그러면 창문 열어놓고 창틀에 매달려서도 찍고 그랬어. 그런데 뷔페 문화가 들어오면서 싹없어졌지. 지금이야 다 그런데서 돌 사진, 결혼사진 그런 거 찍잖아. 또 아이사진 전문 스튜디오가 생겨나고. 애들도 잘 안 낳지만 낳아도 이런 데서는 잘 찍으려고 안 하지. 또 영정사진 작업도 많이 했지. 사진이 서비스업이라고 나는 돌아가신 분들한테도 서비스 잘 했어. (웃음) 구겨지고 접히고 그런 사진 들고 와도 정성들여 복원해주고. 아마 저승에서도 다들 고마워하실 거야. 잘 모르겠는 거는 사진을 뽑아놨는데 안 찾아가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거야. 그것만 다 찾아가도 내 형편이 많이 나아질 거야. (웃음) 신혼여행 사진도 어떻게 됐는지 안 찾아가. 신혼여행가서 갈라섰나? 전화해도 번호가 바뀌었어. 저기 밖에 걸어놓은 사진도 혹시 지나가는 사람 중에 아는 사람이 보고 연락을 해줄까 싶어서 걸어놓은 결혼식 사진이야. 심지어 어머니 팔순잔치 사진을 찍었는데, 그런 사진은 찾으려면 목돈이 들어가니까 형제들 중에서 몇 십만 원 가지고 찾는 사람이 없는 거야. 그래서 재고가 이렇게 많아.”

창고에서 그가 들고 나온 사진을 보니 테이블 한 가득이다. 어려운 살림살이가 많은 동네일수록 버려지는 앨범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진을 찍는 일보다 사진을 정리하고 보관하는 일에 더 많은 여유가 필요하고 더 많은 정성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버려진 사진은 버려진 사연이기도 할 텐데 실시간으로 찍고 버리기가 반복되는 지금 우리는 더 가난해진 걸까, 풍요로워진 걸까?

“필름은 정말 고심해서 찍잖아. 그래서 한 장을 찍더라도 그 사람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돼. 마지막 필름 한 장, 마지막 한 방을 찍을 때 얼마나 생각이 많겠어요. 렌즈를 통해서 보고 또 다시 한 번 쳐다보고.”

사람들은 그렇게 오래 들여다보고 싶어서, 오래 쳐다보고 싶은 것들을 찍어온 모양이다. 그런데 점점 무언가를 오래 들여다보는 일이 쉽지 않다. 사진관을 나서기 전 그는 기억에 남는 한 장의 사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족 중에 누가 아프면 가족사진을 찍으려는 와요. 아버님이 편찮으신데 가족사진을 찍고 싶다고 그래서 모시고 오시라고 했더니 거동을 못하신데. 집에 가서 세팅을 하고 찍으려는데, 가족사진은 화목하게 나와야 하는데 다들 우울해. 얼굴 표정에 다 나타난다고. ‘미소 지으세요.’ ‘좀 웃으세요.’ 그래도 분위기가 침침해. 어떻게 하겠어. 그냥 찍어줬어. 그리고 배경도 다 합성해서 지저분한 거 없애주고 사진관에서 찍은 것처럼 만들어줬는데 그 다음날인가 그분이 그만 돌아가셨어. 그래서 그걸 집에 걸어놓기가 그렇다고 그냥 뽑지 말고 두라고 그러는데 세월이 지나서 마음 바뀌면 찾아가시라고 하고 뽑아서 보관해놓고 있었지. 그랬는데 2년인가 지나서 어머니가 찾아가시더라고. 안 버리기를 잘 했어요, 하시면서.”


- <삶이보이는 창> 5-6월호에 보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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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3-4월호가 업데이트 됐습니다.

이미지 프레시안 - 건투를 빈다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것과 별개로. 고통을 증명한다는 것에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수잔손택이 <<타인의 고통>>이란 책에서 한 질문이다.

<프레시안>이 '이미지 프레시안'(http://www.imagepressian.com/)이란 걸 만들었다.

왜 '포토 프레시안'이 아니라 '이미지 프레시안'인가?
같은 책에 이런 구절도 나온다.  

 

"사람들이 사진을 통해서 뭔가를 기억한다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사진만을 기억한다는 데에 있다. 이렇듯 사진만을 통해서 기억하게 되면 다른 형태의 이해와 기억이 퇴색된다."

"사진은 객관적인 기록인 동시에 개인적인 고백이 될 수 있으며, 실제 현실의 특정한 순간을 담은 믿을 만한 복사본이자 필사본인 동시에 그 현실에 관한 해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형태의 이해와 기억을 위해서 필요한 건 도대체 무엇일까?

사진을 통해 맥락을 드러내는 것, 이야기 하기 혹은 말걸기가 어느 만큼 가능할 것인가?

'이미지 프레시안'은 어떤 이해와 기억을 우리에게 전할 것인가?

아무쪼록 '이미지 프레시안'이 충실한 기록자인 동시에 현실에 관한 탁월한 해석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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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후원, 함께 하실래요?

이미 두주전에 돌렸던 메일이나

오늘 처음 블로그에 글을 올린 기념으로 다시 인증^^

메일 보내고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연락을 받았다.

소장하고 있던 책을 나누겠다는 분부터 정기후원으로 등록하겠다는 분까지..ㅋㅋ

정말 책이 도착했는지는, 후원회원이 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마음만으로도 행복해진 몇일이었다. 

이번 주말은 어려우니 담주 주말에 '휙~'하고 들려 책장에 책이 늘었는지 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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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난 1월 용인 수지로 이사를 갔답니다. 요즘은 동네 곳곳을 돌며 이곳저곳을 익히고 있는데요,

지난 주말에는 수지에 위치한 <느티나무 도서관> http://www.neutinamu.org/ 을 방문했었지요.

지역 도서관운동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겐 익숙할지도 모르겠는데,

이 도서관은 재개발로 쑥대밭이 된 동네에 아이들이고, 어른이고 함께 모여 놀 수 있는 놀이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한 주부의 바램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런 바램들이 모이고 모여서 어느새 10년, 도서관은 넉넉한 그늘을 가진 도서관으로 성장했는데요,

주말에 가보니 아이들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맘대로 뛰어놀던 모습이 아주 인상깊었습니다.

 

근데 한가지 아쉬었던 건, 나름 모양새를 갖춘 도서관에 인권도서는 눈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딱 한권 있더라고요. 책세상에서 낸 <인권>... 물론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 직접행동 등의 책이 비치돼있긴 했지만

인권도 꽤 큰 분류라고 치면 그럴텐데 익숙할만한 이주, 여성은 물론이고 관련한 서적은 없었습니다.

비영리 민간기관이고, 사람들의 소액 후원금으로 운영되다보니 보니, 대부분의 도서는 구입보다는 '증정'과 '기부'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해서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는데요,

각 단체에서 발행했던 책( 혹은 발간중인 책)이나 여유분으로 갖고 있는 책, 또는

각 활동가들이 필자로 참여했거나 다 읽어서 누군가와 함께 볼 마음이 있는 책을 십시일반으로 모아서 기증하면 어떨까했답니다.

해서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메일을 띄우는데요, 

제게 모아주셔도 좋고 직접 느티나무 도서관으로 기증의사를 밝히셔서 보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아참, 우편비를 따로 챙겨드리지 못하는 건 이해해해주실 수 있죠?

이 김에 느티나무 도서관 홈페이지도 함 방문해보시고요, 동참이 가능하신 분들은 연락주세요..(3월 안에 연락을 주심 좋겠지요?^^;)

좀 낯선 내용이긴 할텐데 인권활동가분들의 성원과 관심을 부탁드리고요, 혹여 별 반응이 없으시더라도 넘 슬퍼하거나 좌절하진 않겠습니다. ㅋㅋ

 

그럼 좋은 한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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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식신..

요즘의 나를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사실 '식신'이라는 말보다는 '좀비'라는 말이 더욱 잘 어울리는 것 같지만

임산부가 스스로를 좀비라고 칭하는 것은 너무 거시기 한 거 아니냐는 항의와 반발에 부딪히다보니

대체할 말로 떠오른 것이 '식신'이었다.

식신. 좀 우습지만 이 말만큼 요즘의 나를, 나의 관심사를 잘 드러내주는 말이 있을까?

나는 요즘 매일 먹을 것과 씨름을 하고 있는데

이유인 즉, 지난달 입덧이 끝나기가 무섭게 식욕이 돌더니

눈 뜨자마자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고, 아침을 먹고 나면 간식으로 뭘 먹을까 고민하고, 간식 후에는 점심을, 점심 후에는 또 간식을 고민하는 그런 싸이클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것.

해서 내 24시간 중 8시간은 잠으로, 나머지 16시간은 먹는 것으로 구분되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싶다.

 

그러다보니 새로운 블로그 개설에 이런 저런 고민들과 삶의 흔적들을 남겨야할 것 같은데

그게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어느 정도의 거리두기가 가능할지 역시 걱정..

어쨌거나 ‘재밌지’는 못하지만,

가끔 들려 ‘삶의 소소한 단상’을 화두로 흔적을 남기려고는 해볼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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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와 운동의 철학

 

여기 그림 하나가 있다.  

 

있는 것

없는 것

 

 

위에 있는 그림 중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실선은 과연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있는 것은 하나인가, 여럿인가?
없는 것은 없는 것이라는 형태로 있을(존재할) 수 있는가, 없는가?
 

 



<있음과 없음>은 흔히 '존재와 무'라고 철학에서 일컬어지는 있음과 없음에 대한, 존재론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의 저자 윤구병의 존재론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책을 읽고 3시간 가까운 강의를 들었지만, 감히 존재론에 대해, 윤구병의 존재론에 대해 입을 뻥긋하기도 벅차다. 어쩌면 철학에서 가장 머리 아픈 분야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수학과 자연과학, 불교와 도교, 기독교 등 종교의 영역까지 맞닿아 있는 분야여서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존재론은 윤구병의 말에 따르면 '모든 의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하는' 엄밀성을 가져야 한다(그래서 논리학, 수학과 맞닿아 있다. 집합, 직선과 삼각형, 원주율, 적분과 미적분이 등장한다). 다시 그의 말에 따르면 존재론(그리고 철학)의 과제는 "가장 큰 하나인 있는 것과 가장 작은 하나인 그 무엇을 양극단에 두고 이 두 끝, 한계 사이에 우주 전체의 삼라만상이 어떻게 배열되는지, 차례로 하나하나를 겹쳐서 우주의 전체 구조와 그 구조에 따르는 기능을 밝혀내는 일이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와서 이러한 존재론의 과제는 종교와 철학에서 과학으로, 빅뱅이론에서 소립자까지를 탐구하는 자연과학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거의 신앙에 가까운 과학에 대한 믿음이 생겨났다. 하지만 자연과학, 수학은 아직도 원주율(파이)의 어떤 규칙성도 질서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어쩌면 부질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직선의 세계에서나 있을 법한 법칙을 곡선의 세계, 원에서 찾고 있으니 말이다. "자연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으로 되어 있다!"  

 

잘 알려졌다시피 윤구병은 농사짓는 철학자이다. 철학과를 나와 한국 잡지계의 독보적인 존재인 <뿌리깊은 나무> 초대 편집장을 지냈고, 어린이 책으로 유명한 보리출판사름 만들었고,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1995년 변산에서 공동체 학교를 열고 농사를 짓는 이다. 그래서 그의 존재론, 그리고 철학은 서양철학에도 뿌리를 두고 있지만 한편 불교, 도교의 사상과도 맞닿아 있다. 

있는 것과 없는 것보다 있을 것과 없을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가 말하는 좋은 세상은 "있어야 할 것이 있고 없어야 할 것이 없는" 세상이며 그럴 때 존재론은 객관성이 아닌 당파성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존재론에 대해 입을 열었다가는 선무당이 사람잡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다시 첫번째 질문,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실선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답을 하자면 실선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다. 실선이 있는 것이라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나가 되고, 실선이 없는 것이라도 마찬가지다. 왼쪽으로 가면 좀 있는 것, 좀 더 있는 것, 조금 더 더 있는 것...오른 쪽으로 가며 조금 없는 것, 조금 더 없는 것, 조금 더 더 없는 것... 바로 실선, 경계에서 운동이 생겨난다. 실선이 없으면 다 있거나 다 없는 세상이 되고 말기에 실선, 경계야 말로 존재하는 세상을 현실로 인식하게 하는 열쇠이며 운동의 출발점인 것이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관계만이 아니다. "어떤 하나가 다른 하나와 관계를 맺어 둘을 이루면.. 이 둘 사이에는 이 하나도 아니고 저 하나도 아닌 것이 나타나는데... 둘이 없으면 크기도 없고 공간도 없"다. "둘은 이 하나와 저 하나의 만남의 다른 이름이고, '실체'의이름이 아니라 관계의 이름"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서 해가 뜨고 지는 일까지, 운동에서 관계맺음은 핵심이고 본성이다. 운동은 경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 본성에 대한 탐구, 경계에 대한 존재론, 존재에 대한 질문, 운동하는 존재의 철학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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