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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천 심지

[부활: 2011년 8월 5일]

 

이 글은 내가 써놓고도 가장 뿌듯하고 감격스러웠던 글이다. 하지만 이게 결코 "자뻑 멘트"는 아니다. 아래 덧글로 달린 반응들을 보면,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드러날 것이다. (근데 이렇게 글을 다시 꺼내놓고 보니, 여기 덧글달고 트랙백 달았던 분들은 지금 뭐하나 궁금하네...)

 


 

 

[원글: 2008년 3월 9일]

 

 

고등학교 다닐때, 흔히 말하는 "진로"와 상관없이 나의 꿈은 동인천 심지의 비디오자키(VJ)가 되는 거였다.

동인천 심지가 뭐냐 하면... 1990년대 초반쯤에 인천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많이들 알 텐데... "심지"는 동인천에 있는 음악감상실이다. 나중에 서울에 있는 (주로 신촌과 대학로) 몇몇 음악감상실에도 가본 결과, 심지는 음반보유면에서 가히 "최고"였을 뿐만 아니라, 생김새도 다른 곳들과는 매우 달랐다. 다른 데는 대체로 카페처럼 생겨서 기본적으로 테이블이 있고 거기에 앉아서 스크린을 보는 체제인 데 반해, 심지는 그야말로 극장처럼 생겨서, 마치 영화를 보듯이 뮤직비디오를 보게 생겼던 것이다.

(VJ가 하는 일은, 쪽지로 신청곡을 받아서, 그게 좀 쌓이면, <핫뮤직>이나 테이프 속지 같은 데서 읽은 잡다한 지식들을 섞어서 약간의 멘트와 함께 음악을 틀어주는 거다. 그게 어찌나 좋아보였던지... ㅋ)



오늘. 갑자기 바로 그 "심지"가 생각난다.

뭐, 그렇다. 황당하게도, 고등학교때의 내 꿈은, 뜻하지 않은 복병 "재수"(-_-)를 만나 결국 실현되지 못했고, 난 서울로 대학을 왔다. 물론 그래도 종종 그곳에 놀러가긴 했는데, 언젠가 오랜만에 찾아갔을 때, 심지는 문을 닫고 사라졌다. 그날 난 조금 울었던 것 같다.

심지. 그곳은 그냥 음악만 듣는 곳이 아니다. 이미 말했듯, 그곳에선 음악만이 아니라 뮤직비디오가 함께 나온다. 난 정말이지, 지금도, 그때 그곳엘 갈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아랫층엔 일반 팝음악, 윗층엔 메탈/록음악... 물론 나는 늘 윗층에만 갔고, 올라가는 도중 아랫층을 기웃거리는 녀석들에게 하찮다는 듯이 썩소를 한번씩 날려주곤 했던 것이다. (그땐 뭐.. 그랬다. ㅎㅎ)

그렇다고 심지에서 뮤직비디오만 보는 것도 아니다. 거긴 말하자면 일종의 갈곳없는 청소년들의 집합소 같은 데였다. 지금은 어떤가 모르겠다만 당시 인천은 나름 헤비메탈/록음악의 메카 같은 곳이었고, 비공식적이긴 했지만 "전국 최고의 음악감상실" 심지는 우리에게 그런 자부심을 더해주는 곳이기도 했다. 암튼 그곳은, 바로 그런 음악도시 인천에 사는, 그 중에서도 나름 음악좀 듣는다는 메탈키드들의 집합소 같은 곳이었단 말씀.

물론 누구나 예상할 수 있겠지만, "심지"는 연애하는 학생들의 천국이기도 했다. 그때는 연애를 하면 갈 곳이 별로 없었다. 어쩔땐 갈데가 없어서 시립도서관 같은 데를 가기도 했다. 커피숍 같은 데서 쫓겨나는 일은 예사였고, 지금처럼 비디오방(-_-)도 없었다. 하지만 "심지"만은 그 너른 품으로 모두를 감싸줬던 것이다. 일요일 같은 때는, 아침에 문열자 마자 들어가서 하루종일 앉아있으면서 잠도자고 중간에 친구도 만나고 또 컵라면도 해먹고... 이러다가 저녁나절에 여자친구가 오면 같이 오무라이스(-_-) 먹고... 뭐 그랬다.

음악에 미친 아이들끼리 여기서 자웅을 겨루는 하나의 방식은, "신청곡 많이 선정되기"다. ㅋ 물론 신청곡을 많이 넣는다고 해서 많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날그날의 분위기, 특히 VJ의 심중을 잘 살피는 것이 기본이며, 뭣보다 남들이 다 신청하는 노래는 금물이다. 왜? 그런 노래들은 얼마전에 나왔을 확률이 높으니까 퇴짜맞기 십상이다. 따라서 뭔가 남들이 신청 안했을 것 같지만 들으면 무지 좋아할 것 같은 노래를 신청해 주는 것! 여기에 덧붙여 VJ도 모를 것 같은, 그래서 궁금해서라도 한번 틀어줄 것 같은 "필살기" 하나쯤을 준비해 놓는 것도 필수.

하여튼 바로 그렇게, 나는 내가 좋아하는 거의 모든 곡들을 당시로서는 매우 보기 어려웠던 뮤직비디오로 감상하곤 했다는 얘기다. 좋아하는 곡을 영상으로 보는 것도 좋았고, 모르던 곡을 영상으로 본 뒤 맘에 드는 것을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찾아듣는 것도 좋았다. 그렇게 테이프는 쌓여갔고 그걸 바라보는 엄마의 눈초리는 날카로워져만 갔다.



그런데 사실은, 오늘 "심지"만 생각난 게 아니라, 그때 때로는 내가 듣고 싶어서, 또 때로는 아무리 듣기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어서... 결국 무지무지 자주 듣게 된 X가 난데없이 생각난 것이다. 내가 X의 노래 중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은 Endless Rain이고 제일 좋아하는 것은 Weekend다.

Endless Rain을 싫어한 이유는 간단하다. 심지에서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신청을 해서 거의 한시간에 한번꼴로 나오니... 죽돌이인 나로서는 싫을 수밖에. 반면 Weekend는 사람들이 별로 모르는 곡이기도 했고, 또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특히 스튜디오 버전의 곡 끝부분에 나오는 코러스 부분은 언제들어도 흥분(!)된다.

뭐 암튼 그래서... YouTube에 가서 X의 노래를 몇 곡 들었다, 반복해서.



그런데, 그렇게 듣고 있으려니, 눈물이 났다.

노래서 슬퍼서는 아니고...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그랬던 것 같다. 어린시절(?) 생각... 또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오늘의 내가 거기에 오버랩되면서.... 뭐 이렇게 되면, 눈물이 나는 게 그리 이상한 건 아닐 것 같은데...



끝으로 Weekend의 정식Clip을 링크해 둔다. X - Weekend (여러 라이브 버전도 있는데, 요걸 개인적으로는 제일 좋아한다. 이유? 많이 봤기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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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PPE 국제 컨퍼런스] 2011년 5월 터키에 함께 갑시다!!

내년(2011년) 5월에 터키 이스탄불에서 국제 학술대회가 열립니다.

거기에 함께 참가할 분들을 찾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다음 링크를 참조해 주세요!!!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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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 논쟁 정리

정말 오랜만에 여기에 글을 쓴다. 

 

지금은 비록 자리를 옮겼지만, 나는 이곳에 무한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 내가 쓴 글들, 다녀간 사람들과 그들의 흔적들... 모두 다 내겐 소중하다. 

 

내 글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다녀간 사람들의 거듦으로, 말하자면 "다중지성"에 의해 이 불로그는 하루하루 살쪄갔고, 그것을 몸소 느끼며 놀라워했고 또 행복했었다. 특히 내가 먼 타국땅에서 외롭게 지낼 때, 이곳에서 만난 친구들은 비록 그들은 모르겠지만 내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는지 모른다. 정말 고맙다... 

 

그런 과거의 흔적들을 조금씩 내놓아야지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지금 그 첫 번째 신호탄으로, 시대의 명저 <<88만원 세대>>를 둘러싼 일련의 논쟁들을 정리해서 내놓는다. 요 오른쪽 메뉴에서, "[논쟁 1] 88만원 세대"를 클릭하시면 관련글들이 나올 것이다. 예전에 논쟁에 참여했던 분들께는 아련한 추억을, 내가 이 불로그를 닫는 바람에 그 논쟁을 구경도 못하신 분들께는 신선한 재미를 드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_^)

 

참고로, "88만원 세대"라는 제목으로 된 첫 세 개의 글들은, "[서평] 88만원 세대 (우석훈, 박권일)"이라는 제목으로 나의 새 블로그에 좀 더 정제된 형태로 올라있다.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링크)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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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노동가치 (박영균, 책세상, 2009) (2/2)




(앞의 글에 이어)



5. 이제 마르크스를 다룬 부분을 보자. 안타깝게도, 저자가 분명 가장 공들여 설명하고자 했을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에 대해 저자는 매우 치명적인 오해를 드러내고 있다. 이게 이 책이 매력적이지 않은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이유다. 먼저 좀 길더라도 118-19쪽의 본문내용을 옮겨와보자.

가치란 바로 이런 인간노동 일반이며 가치량은 그런 인간노동이 수행되는 시간, 즉 노동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교환관계로 들어가기 전에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혼란이 존재한다. 실제의 교환관계에서 드러나는 것은 가치가 아니라 교환가치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도 자본을 연구하기 위해서 쓴 노트 <<요강>>에서는 이를 명료하게 구별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본>>에서는 이를 명확히 구분한다. 이 구분은 정말 중요한데 왜냐하면 (1) 인간노동 일반으로 추상화된 가치가 사회적 관계 아래서 결정될 때, 즉 교환가치가 될 때 그것은 더이상 추상화된 노동시간으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만일 내가 다섯 시간의 노동으로 의자를 하나 만들었다고 하자. (2) 나는 다섯 시간에 해당하는 가치만큼의 화폐 또는 다른 상품과 내 노동을 교환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교환과정에서 사람들에게 작동하는 가치는 가치가 아니라 교환가치다. 이때 교환가치량은 투하된 노동가치량과 같지 않다. 교환관계 안에서 나의 노동은 그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즉 (3) 내가 투하한 노동의 양은 그대로 '교환가치의 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승인되는 가치의 양'을 통해서 결정된다. 이것을 마르크스는 '사회적 필요 노동 시간'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내가 다섯 시간의 노동으로 책상을 만들었지만 사회에서 그것이 세 시간으로 인정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세 시간의 가치만을 가질 것이다. 따라서 교환가치는 가치가 사회적으로 표현되는 형태라 할 수 있다. (118-19쪽. 번호와 강조는 내가 덧붙임.)

위의 두 단락에 저자가 마르크스의 가치개념을, 즉 <<자본>>의 첫번째 장(chapter)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가 잘 나와있다. 물론 아래 보듯이 이 이해란 아주 잘못된 이해, 그것도 논쟁의 여지 없이 잘못된 이해다.

위 인용문에 이어지는 내용들을 참고해서 위 내용을 재구성해보자. 기본적으로 저자는 가치의 문제를 두 단계로, 즉 "노동의 투하"와 "(투하된 노동의) 사회적 승인"이라는 두 단계로 이해하는 것 같다. 나아가 이런 두 단계의 이해, 즉 "사회적 승인"이라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고려한 것을 마르크스의 업적이라고 보는 것 같다. 단순화해서 말하면, 리카도는 "투하"의 측면만을 봤던 반면 마르크스는 "승인" 부분에도 두루 주의를 기울였다는 거다. 그리고 이때 "투하"만이 고려된 개념이 "가치"라면, "승인"의 문제까지 두루 고려된 개념이 "교환가치"라는 게 저자의 생각으로 보인다(위 인용문의 (1)을 보라). 그리하여 내가 의자 만드는 데 5시간을 "투하"했어도 사회적으로는 3시간만이 "승인"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거다. 이때 비록 "가치"는 5시간이지만, 그것은 있는 그대로 직접 드러나지 않고 대신 "교환가치"라는 형태를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이 예에서 의자의 "교환가치"는 3시간이다. 물론 저자에 따르면 이런 일은 리카도에게선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투하"만을 봤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저자의 이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ㄱ) 상품의 가치는 그대로 드러나지 않고 교환가치로서 드러난다.
(ㄴ) 가치 = 투하된 노동량.
(ㄷ) 교환가치 = 사회적필요노동(시간)(SNLT).

그러나 <<자본>>을, 적어도 그 첫부분이라도 읽어보신 분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위 내용은 완전히 틀렸다. 먼저 위에서 저자가 "가치"라고 하는 것은 마르크스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비판한 리카도가 이해한 가치("투하노동설")다. 오히려 저자가 "교환가치"라고 부르는 게 마르크스가 말하는 "가치"에 가깝다. 즉 마르크스에 따르면 한 상품의 "가치"--"교환가치"가 아니라!!--란 거기 투하된 노동량(=노동시간)에 의해 단순무식하게 결정되는 게 아니라, 그 상품을 만드는 데 드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SNLT)에 의해 결정된다. 즉 위에서 저자가 내놓는 예에서, "나"는 비록 의자를 만드는 데 5시간이 걸렸지만, 만약 보통 사회적으로는 거기 3시간만이 든다면 의자의 "가치"는 3시간이 맞다. "내"가 거기 얼마의 시간을 들였느냐와 상관없이 말이다.

한편 마르크스에게 "교환가치"란 이와 같은 "가치"가 겉으로 드러나는 갖가지 "겉옷"을 일컬을 따름이다. 이에 대해선 주로 <<자본>> 제1장의 제3절에서 자세히 다뤄지고 있다. 어쨌든 이 교환가치는 각종 사정 때문에 얼마든지 가치로부터 멀어질 수 있고 또 그것은 마르크스 논의의 핵심 중 하나를 구성하지만, 결코 저자가 말한 방식대로는 아니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가치형태(=교환가치)가 바로 "화폐형태" 또는 "가격형태"다. 이제 이 화폐형태, 즉 상품의 가격이 그 상품의 가치와 일치한다고 하자. 그러나 현대경제에서는 예컨대 갑자기 통화량이 두배가 되면 이 상품의 가격은 그에 비례해 두배가 된다. 물론 이 상품의 가치는 그대로다. 이런 식으로 교환가치는 가치와 여러 방식으로 불일치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저자는 5시간의 사적노동이 사회적으로는 3시간으로만 인정받으므로 가치와 교환가치가 불일치한다고 하는데, 이런 식의 사회과정은 (교환가치까지 갈 것도 없이) 이미 가치개념 안에 들어있다.



6. 위에서 지적한 것은 매우 명백한 오류다. 이 오류의 근원, 그리고 저자가 내놓는 관련설명들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들 수도 있겠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보인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할 점은, 저자가 진정 공들여 설명하는 대목이 바로 이 마르크스 관련 부분임을 고려할 때, 그리고 앞서의 논의들이 결국 마르크스의 가치 개념으로 흘러들고 있음을 고려할 때, 위 오류는 이 책 전체 구조와 내용에 비춰보더라도 매우 치명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 책의 전반부는 결국 이 오류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고, 이 책의 후반부는 이 오류 위에 세워지고 있는 셈이다. 뭔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도 그것에 대해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꽤 그럴싸하게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기초가 취약하면 반드시 어떤 대목에 가서는 그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고, 또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대목들이 언제나 가장 중요한 대목이라는 거다.



7. 끝으로 "개념사"에 대해 한 마디. 이 책은 "책세상"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오는 "개념사" 시리즈 중 하나다. 이 책을 포함해 지금까지 8종이 나왔고, 앞으로도 쭈욱 나올 예정이다. 다른 책들은 안 읽어봐서 모르겠고, 이 책에 대해서만 좀 말해보자.

[관련 트랙백: 유이님의 비타 악티바(Vita Activa) - 인권]

앞에서 이 책은 그 핵심부분에서 아주 중대한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고 했는데, 나아가 이 책은 "개념사"라는 그 대전제에도 제대로 부합한다고 보기 어렵다. 굳이 코젤렉(Reinhart Koselleck)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개념사"란 그 자체로 매우 원대한 "이론적" 기획이다. 그리고 이 작업은 그 본성상 다른 어떤 이론적 작업보다 "엄밀함"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책 <<노동가치>>는 "개념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음에도, 매우 대중적인 외양을 하고 있다.

가장 기본적으로 "개념사"는 다음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첫째, "개념사"라고 하려면, 적어도 "개념"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맨앞에서 말한대로 "노동가치"란 그렇게 흔히 쓰이는 "개념"이 아니다. 단순히 "흔히 쓰이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개념"이라고 하기에조차 크게 거시기하단 거다. 둘째, 개념사의 두 번째 기본은, 그것이 해당 개념의 어원을 포함한 용법의 변천, 주요 문헌들에서 사용되는 예 등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러나 이 책에 그런 대목은 눈씼고 봐도 찾을 수 없다. 결국 이 책엔 "개념"도 "사"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셈이다.

물론 나는 이 책이 대중적이라고 무조건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적어도 "개념사"라는 것은, 그 본성상 대중화되기엔 한계가 크다는 거다. 그러니까 나는 이 책이 "내용적으로" 대중적이라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이를테면 "표현상의" 대중성은 언제나 권장할 만한 것이다.

뿐만 아니다. "개념사"라는 게 고도의 엄밀성을 추구하는 이론적 작업임을 고려하면, 그 필자는 당연히 해당분야를 잘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사회철학자인 저자가 현재의 작업에 적임자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노동가치"라는 개념이 마르크스가 발명한 것도 아니고 정치경제학에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그것은 근대사회 자체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그의 기본입장이 무색하게도 이 책은 2/5 정도를 마르크스 및 관련논의로만 채우고 있으며, 70% 이상이 정치경제학에 대한 것이다. 정작 "근대사회--단순히 "경제"가 아니라--를 정당화하는 핵심개념으로서의 노동가치"에 대한 내용은 매우 적다. 더구나 저자는 이런 논의가 마르크스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주지도 못한 것 같다. 결국 저자는, 말로는 노동가치 개념을 마르크스나 정치경제학하고만 연결시키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렇게 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단순한 모순이 아니다. 만약 저자가 "몸소" 보여주듯 노동가치 개념이 주로 경제학 내에서 단련되고 그 핵심적인 의미를 얻어낸 개념이라면, 그는 스스로 자신은 이런 책을 쓰기에 적임자가 아니라고 실토한 꼴이다. 앞에서 내놓은 이 책의 일부가 "개론서의 개론서" 같다는 내 평가도, 이제 바로 이런 의미에서 곱씹어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저자가 전문 경제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책을 쓰기에 적임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보단 내 얘긴, 저자가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논의를 풀어나가는 데 실패했다는 거다. 나아가, 저자는 그 자신이 실제로 이 책에서 논의를 풀어나간 방식을 통해, 즉 "결과적으로", 자신이 이 책을 쓰기에 "적임자"가 아니라고 스스로 실토한 꼴이란 얘기다.

출판사에게도 한 마디. 원대한 기획을 갖는 것이야 나쁠 것 없지만, 그에 걸맞게 내용을 채우는 데 더 신경쓰길 바란다. 이 책의 디자인에 신경쓰는 것만큼만이라도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좀 더 기획의 수준을 낮춰도 좋겠다. 누가 뭐라 하겠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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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노동가치 (박영균, 책세상, 2009) (1/2)




0. 지난 일요일 서점나들이 나가서 책을 하나 사서 봤다. 제목은 <<노동가치>> (박영균 지음, 책세상, 2009). 4월 1일에 출판됐다고 하니 말그대로 "따끈따끈한" 책이다. 몇 가지 메모를 남겨놓는다.



1. 일단 제목이 참 반가우면서도 낯설다. 반가운 이유는 이 제목이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을 연상시키기 때문, 즉 이런 종류의 책이 많이 나오는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건 그냥 나오기만 해도 반가운 거다. 낯선 이유는 "가치" 또는 "노동가치론" 등의 표현은 많이 쓰이지만 대체로 "노동가치"라는 말은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가치"라는 말은 분명 서양에서 온 것일텐데, 그에 해당할 법한 "labour value"도 거의 쓰이지 않는다. "노동가치론"의 영어표현도 "labour theory of value"지 "theory of labour value"가 아니다.

제목부터가 좀 아리송하지만, 그에 대해선 나중에 더 얘기하기로 하고 일단 패스!



2. 이 책은 모두 다섯 개의 장으로 이뤄져있다. 첫장은 별얘기 없고 실질적인 내용은 제2장부터 시작된다. 제2장과 제3장은 각각 노동가치 개념의 역사적 배경과 개념 자체의 역사를 다룬다. 노동가치란 흔히 (정치)경제학의 개념 같지만, 역사적으로 그것은 근대사회 자체의 출현과 발달 속에서 벼려져왔다고 저자는 주장하는 것 같다. 특히 "개념사"(제3장)와 관련해서는 로크(John Locke)가 노동가치의 실질적인 창시자로 제시되고, 후반부에서는 페티(William Petty)로부터 스미스(Adam Smith)를 거쳐 리카도(David Ricardo)에 이르는 정치경제학자들 사이에서 그 개념이 어떻게 다뤄지고 발달했는지를 추적한다.

다음으로 제4장에 이르면 비로소 본격적으로 노동가치 얘기가, 마르크스의 논의를 중심으로 해서 나온다. 이는 앞장 후반부에서 제시되는 마르크스 이전 정치경제학자들의 노동가치 논의의 연장이다. 저자는 여기서 마르크스가 노동가치를 이해함에 있어 이전 경제학자들과 어떤 식으로 자신을 차별화했는지를 중심으로 논의를 펼친다. 끝으로 제5장은 앞에서 논의한 마르크스의 노동가치 개념을 둘러싼 마르크스 이후의 논쟁과 그 함의를 다룬다.



3. 이 책이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을까? 내 판단으로는, 전체적으로는 괜찮아 보인다. 만약 읽는이들이 "노동가치" 자체에 대해 특별히 관심이 많지 않다면, 그들은 분명 이 책(의 특히 전반부)로부터 근대사회의 지적기반에 대한 매우 간략하면서도 그럴싸한 설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아마도 사회철학을 전공하는 저자의 내공이 가장 짙게 묻어있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만약 진짜로 "노동가치"가 뭔지 궁금한 독자들에겐 이 책이 그다지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왜 그런가?

첫째, 이 책의 적지 않은 부분이, 내가 보기엔, "노동가치"라기보단 "노동" 자체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이 책의 제목은 잘못 붙여진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뿐만 아니라 "개념사"라는 이 책의 대전제에 비춰보면, 마르크스 이전, 나아가 정치경제학 외부에서, 그러니까 서유럽 사회사상의 포괄적인 맥락 속에서 "노동가치"라는 개념이 어떻게 발달했는지를 추적하는 것은 이 책의 매우 중요한 부분일 것이며, 만약 이런 부분이 부실하게 처리됐다면 그건 이 책의 치명적인 결점일 것이다. 아래서 나는 이 책의 저자가 마르크스의 (노동)가치 개념을 오해하고 있다고 주장할 것인데, 지금 말하고 있는 이 결점은 이 오해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다. 이 책은 "개념사"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초 서유럽의 사회문화적/사회경제적 발달 속에서 "노동가치" 개념의 발생과 단련을 논하는 대목(제2장 및 제3장의 전반부)을 잘 보면, 정작 "노동가치" 얘긴 별로 없다. 그 부분에서 저자가 "노동가치"라고 써놓은 것들은 그냥 "노동"이라고 하는 게 오히려 더 타당해 보인다. 여기서 저자의 핵심주장은 "근대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물적기반이 되는 근대적 소유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노동가치라는 개념에 호소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때는 굳이 "노동가치"라고 할 것도 없이 "노동"이라고만 해도 상관없을 거란 뜻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의 전반부에서 "노동가치"의 역사적 배경 및 개념사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상은 "노동" 자체에 대한 것이라 보는 게 더 그럴싸하다. 저자가 내놓는 설명엔 굳이 노동"가치"라고 불릴만한 내용이 별로 없어 보인다.

어쨌든 이 부분은, "노동가치"라는 성가신 개념을 "노동"이라는 좀 더 친숙한 개념으로 바꿔놓는다면, 근대사회의 출현/형성/정당화와 관련된 간략하면서도 유용한 설명을 제공해준다고 볼 수 있다.



4. 그렇다면 정치경제학 내부에서 노동가치 개념의 발달을 다룬 부분(제3장의 후반부)은 어떤가?

이 부분에 있어서도 이 책은 그다지 매력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만약 정치경제학에서 노동가치 개념의 발달사에 대해 궁금한 독자가 있다면, 이 책을 보느니 차라리 시간과 수고를 조금 더 들여서 이를테면 미크(Ronald Meek)나 헌트(E K Hunt) 등의 책들을 직접 읽어보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다행히도 이 책들은 (비록 절판되어 구하기가 쉽진 않겠지만) 한글로 번역되어 있고, 사실은 몇몇 각주에서 밝히고 있듯이 저자 자신도 이 책들을 매우 광범위하게 참조하고 있다. 이게 바로 이 <<노동가치>>라는 책이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 두 번째 이유다.

솔직히 나는 이 대목에서는 판단을 어느정도는 보류해둘 수밖에 없다. 사실 경제학이란 게 전문 경제학자가 아니면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다른 학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요즘엔, "경제학 물신주의"라고 불러도 좋을만한 묘한 분위기가 있어서 비경제학자가 경제학에 대한 문제들을 진지하게 다룬다는 게 여간 부담되는 일이 아닐 거다. 이런 점에서 저자(철학자)의 시도는 일단 환영받을만 하다.

그러나 우린 지금 대학생 기말리포트 얘길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린 지금 전문학자가 쓰고 저작권의 보호를 받으며 현재 시장에서 8천5백원이라는 돈을 받고 팔리고 있는 책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나이 지긋한 경제학 교수가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는 학생이 쓴 기말리포트를 채점할 때 품을 법한 관용이, 이 책을 돈주고 사보는 사람에겐 없다. 정치경제학 내부에서 노동가치 개념의 발달을 다루는 이 부분은 그러니까, "개론서의 개론서" 같다. 위에서 언급한 미크나 헌트의 책을 요약한 것 같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개론서란 그것이 해당하는 분야에서 오랜 연마를 거친 사람이 쓰는 거다. 그럼 그 개론서를 요약하는 것은 누구일까? "개론서의 개론서"가 "개론서"에 대해 갖는 이점은 뭘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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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6 (몇 가지. 근황)



지난 한 주는 이래저래 정신이 좀 없었다. 늘 그렇지만 특히 더 그랬다.
덕분에 이 불로그에도 좀 소홀했는데...



1.
그래도 그러는 동안, 지난 3월 14일 토요일, 드디어 이제껏 계속 미뤄왔던 "성묘"(?)를 다녀왔다. 무슨 성묘? 바로 런던 북쪽 하이게이트(Highgate)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는 마르크스다. 런던에 공부하러 오기 전에 잠깐.. 아주 잠깐 유럽에 다녀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한 번 방문해보고 처음이다.

여러모로 좋았다. 뭣보다 날씨가 좋았다. 지난주엔 대체로 봄날씨였는데, 주말 이틀동안은 특히 아주 끝내줬다. 하지만 성묘길이 즐거웠던 진정한 까닭은 바로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이번에 <<자본>>을 함께 읽는 우리 모임의 몇몇 회원들과 함께했다. 뿐만 아니라 공동묘지가 주는 어떤 차분한 느낌도 좋았다.

마르크스의 묘지는 단연 인기 최고였다. 특히 그의 기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단 많았다. 아니, "바글바글"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우리가 그 무덤 앞에 머물러 있는 동안엔 계속해서 끊이지 않고 방문객들이 줄을 이었다.

사실은 그날 아침, 내가 사는 곳 근처에서 3일짜리 학술대회의 2일째가 열리고 있었다. 이 학술대회의 제목은 "Communism 개념에 대하여"였다. 제목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러니까 나는, 이 학술대회와 성묘 사이에서 일종의 "저울질"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성묘"에 더 큰 무게를 둔 셈인데...

그래도 아침에 잠깐 짬을 내서 행사장에 들렀다. 대충 분위기라도 보고 싶었던 것. 중간크기의 계단형 강의실(lecture theatre). 플로어는 청중으로 가득차 있었고, 몇몇 유명인들이 앞에 앉아서 한 사람씩 발제를 하고 있었다. 원래 이 학술대회의 참가비는 "학생할인"을 받아서 약 10만원쯤 했다. 실은 이것이 내가 학술대회를 포기한 주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는데... 그래도 미리 준비된 티켓은 다 팔렸고, "정식"으로 자리를 구하지 못한 이들이 밖에서 모니터로 위의 그 유명인들이 발제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네그리(Antonio Negri)가 이탈리아말로 발제를 하고, 옆에서 누가 그것을 영어로 동시통역 하고 있었다. 그의 약간 굵직한 목소리에 실려오는 이탈리아말이 멋지다고 생각하면서 행사장을 빠져나왔다.

예전 같았으면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다. "Communism의 개념에 대하여"와 같은 제목의 학술행사가 마르크스의 기일에 열린다는 것이 그 자체로 매우 뜻깊은 일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날 든 생각은 좀 달랐다. "Communism의 개념에 대하여"라는 학술행사조차도--어쩌면 그런 행사라서 더더욱--마르크스 기일 따위엔 아랑곳않고 열리고 있구나.


2.
앞서 Das Kapital의 우리말 제목에 대한 글을 쓴 일이 있다. (링크)

사실 그 글은 매우 특수한 배경을 반영하며, 그 배경만 없었다면 글을 쓸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 배경이란 결국 다음 둘로 요약된다. (1) Das Kapital의 우리말 제목으로 "자본"과 "자본론"이 공존하고 있다. (2) "자본"을 고집하는 사람들의 일부가 "자본론"을 쓰는 사람들을 몇 가지 근거를 들어 비판하고 있다.

때마침 청수님께서 관련글을 써주셨다. 앞의 글에서는 굳이 밝히지는 않았지만, 나는 청수님께서 꽤 오래전부터 "자본론"을 쓰는 이들에 대해 못마땅한 심정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사실 그는 내가 직간접적으로 알고있는 "자본론" 비판자들 중 가장 강경한(?) 인물 중 하나다.
(물론 그가 이렇게 비치는 것이, 그가 밝힌대로,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있는 이들이 분명한 입장표명을 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음을 나는 잘 이해하고 있다. 어쩼거나... 이런 까닭에, 앞의 글은 청수님의 글에 대한 "반박"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더구나 그 글은, 거기서 청수님을 언급하기 전에 다뤘던 서양--대체로 영어권--에서의 논쟁에 대한 내 입장표명이기도 하다. 즉 그 글엔 이 모든 측면들이 별다른 구분없이 고려되고 있다.)

어쨌든 나는 지난번 글에서 이런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을 간단히 밝혔는데, 거기서 내 주장은 크게 두 가지였다. (1) "자본"이냐 "자본론"이냐의 문제는 별로 중요한 게 못 된다. (2) 제목을 "자본론"으로 번역하는 데는 (그 비판자들이 흔히 가정하는 것과는 달리) 그 나름의 타당한 근거가 없지는 않다. 달리 말하면 "자본"이든 "자본론"이든 Das Kapital의 우리말 번역으로서 그 나름의 타당성이 있단 얘기다.

어떤이는 이런 내 주장을 두고 (둘 다 인정한다는 점에서) "절충론"이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이는 나로선 좀 받아들이기 어려운 표현이다. 왜냐하면 나는, 위에서 말한대로, 이런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절충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는 거다. 사실 문제는 "제목"이 아니라 "내용" 아닌가? 청수님께서는 "제목"을 어떻게 번역하느냐 하는 문제가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고 보시는데, 일반적으로는, 그리고 아주 느슨하게 말하면 이 진술은 참이라고 나도 생각한다. 그러나 적어도 "자본"이냐 "자본론"이냐의 문제는 그와 별상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다시 반복하지만, "제목"이 아니라 "내용"이 중요한 거다. 결국 (여러 우연적인 요소들도 있겠지만 일단 무시하고 말하면) <<자본>>과 <<자본론>> 두 번역 중 더 나은 것이 살아남을 것이고, 결국 그 살아남는 것의 제목이 "Das Kapital"의 공인 우리말 번역이 될 것이다.



3.
아, "제목" 얘길 좀 더 하면......

위의 글에 붙은 한 덧글에서 간단히 지적한대로, Das Kapital의 제목과 관련해서 진짜 재밌는 부분은 "론"이 아니라 "자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앞에서 약속한대로 자료를 좀 찾아봤다. (그러나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자료에 제한이 있어서 그다지 면밀했다고 보긴 어렵다. <<번역과 일본의 근대>> 등과 같은 책이라도 옆에 있었다면 좀 더 도움이 됐을 것이다.)

일단 문제는 우리보다는 일본이다. Das Kapital은 일본에서 먼저 번역됐기 때문이고, 거기 나오는 주요개념들도 일본에서 먼저 서양으로부터 들여왔기 때문이다. 한 가지 재밌는 발견은, 무로마치(室町) 시대(1328-1573) 어휘를 정리한 일본 "국어사전"엔 "자본"이란 항목 자체가 없다는 거였다. "자본"이란 용어가 그나마 "(사업)자금"과 같은 의미로나마 쓰이기 시작한 게 에도(江戶) 시대(1603-1867)에 와서의 일이고, 메이지(明治) 시대(1868-1912)에 들어서야 비로소 신문 등에서, 다시 말하면 어느 정도 배운 사람들 사이에서 일반화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자본"이라는 용어가 특정한 의미("자금")로 (일정한 테두리 안에서이긴 했지만) 어느 정도 쓰이게 되었다고는 해도, 그것이 곧장 서양의 "capital"의 번역어로 쓰인 것은 아닐 것이다. 일단 여기서 한 가지 확인할 것은, 영어의 capital, 또는 독일어의 Kapital을 번역하는 문제는, 마르크스의 Das Kapital을 번역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거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매우 당연하게도 capital/Kapital 같은 용어들은 Das Kapital이 번역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서양경제학의 핵심개념으로서 들어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언급되는 게 바로 <<철학자휘(哲學字彙)>>다. "자휘"란 우리말로 하면 "사전"이다. 이 책은 1881년 처음 나와서 1884년에 제2판이 나왔는데, 바로 이 제2판에 "자본"이라는 용어가 서양의 capital/Kapital의 번역어로 등재되어 있는 것이다. <<철학자휘>>에 이렇게 등재됐다는 것은, 사실은 그 이전에 이미 capital/Kapital의 번역어로 이미 (적어도 몇몇 사람들에 의해) 쓰이고 있던 "자본"을 사후에 "정식" 번역어로서 추인한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한 번 공식화된 다음엔 capital/Kapital의 번역어로서 "자본"이 (빠른 속도로) 일반화됐을 것이다.

대충은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내용이지만, "자본"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쓰이게 된 게 생각보다는 훨씬 최근의 일이라는 데 좀 놀랐다. 그리고 예상대로 "자본"이라는 용어가 서양의 capital/Kapital의 번역어로 쓰이게 된 것은 길게 잡아도 130년 안팎이다. 어떤 면에선 "자본"이라는 번역어 자체가 (특히 "자본"이라는 말이 이미 동양문화권에서 쓰이고 있었다는 점에서) 아직까지도 논란의 대상일 수도 있는 셈이다. 끝으로 여기서 덤으로 드러나는 한 가지 매우 중요한 포인트는, 우리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자본"의 (대체로) 두 가지 의미, 즉 우리 동양 사회에서 발생하고 굳어진 의미와 서양에서 들어온 개념으로서의 의미를 혼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참고로, 일본의 어떤 <<국어대사전>>은 "자본"의 의미를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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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에 입각한 경제분석의 의의



관련글


기왕에 말을 꺼냈으니 적절하게 "마무리"는 지어야겠단 생각에 하나 더 쓴다. 근데 사실은 이미 다 한 얘기다. 그래도 정리하는 뜻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나 자신을 위해서도 한번 더 써보자.

그동안 명시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제시된 내 주장의 핵심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아마도 불필요한 혼란의 원인도, 적어도 일부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제시되었다는 데 있기도 할 테다. 어쨌든 이제 그것들을 간단하게 내놓을 것이므로, 좀 더 의미있는 논의가 오갔으면 좋겠다.)



(1) 특히 인문사회과학에 종사하는 연구자라면, 그 분야의 고전적인 사상가들이 내놓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들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 그냥 "알아야 한다"가 아니라 "존중해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존중하려면 적어도 대충이라도 그 사람들이 뭐라고 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요새 문제는 전문연구자들조차 그런 기본도 갖춰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같은 애송이들도 문제지만 우 머시기 같은 "박사" 타이틀을 가진 자들이 더 문제다. 왜냐면 애송이들은 발전의 여지라도 있지만, 이미 박사 나리가 된 분들은 고집불통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우 머시기라는 양반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책을 몇권인가를 쓴다고 벌써부터 호기가 대단한 것 같다. 그는 책쓰는 게 무슨 장난하는 줄 아는가? 과연 대단하다.)

- 그런데 그런 "존중심"이 단순한 "앎"에서 쉽게 나오는 건 아니다. 이를테면 "세상이 바뀌었으니 낡은 사상은 쓸모없어"라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많이 알아도 존중심이 생기겠는가? 중요한 것은, 2-3백년 된 사상이라도 그것이 당대 사회를 어떤 식으로든 반영했고 또 그와 어떤 식으로든 긴장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 나아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리고 장소의 바뀜에 따라 그런 사상들이 어떻게든 변화/발전을 해나갔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존중심은 출발한다.

- 바로 이런 과정에서 중요하게 떠오르는 것이 앞의 포스트에서 쓴 "세 가지 역사"다. (링크) 하나의 사상이, 실제의 역사 속에서, 그 역사의 반영이기도 한 지성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그 사상을 내놓은 사상가의 역사(이력) 속에서 어떤 의의를 갖는지... 이런 점을 세심하게 살피는 것이야말로 위와 같은 존중심이 표현되는 기본적인 방식인 것이다. 물론 모든 연구자들이 이런 쉽지 않은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연구자들은, 타인의 성과로부터 도움을 받더라도, 위와 같은 사항을 충분히 인지함으로써 적어도 "존중심"이라도 가져야 한다는 얘기다.



(2) 이 말은 곧, 연구자라면 적어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도는 알고서 떠들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 왜 그런가? 연구자의 논의란 그가 속한 지성사 속에서, 그리고 그 안에서만 제 의미가 찾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세 가지 역사에 대해 말했지만, 그 중에서도 한 사상을 평가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지성사라고 생각한다. 사실 현실의 역사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거기서 결국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모든 것의 "대전제"라고 할 수 있으며, 한 사상가의 지적이력이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특수한 경우(특정 사상가 자체를 연구하는 등의)에만 특히 중요하게 떠오를 것이다.

- 반면 지성사란, 한 연구자가 제 발로 선다는 것은 곧 그가 속한 지성사 속에서 자기 자리를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그 중요성이 절대적이다. 이런 사항을 염두에 두고 이를테면 경제학의 역사를 보면, 자기 학문의 역사에 대한 무지로만 무장한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얼마나 많이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해왔는지, 또는 얼마나 자주 자기들보다 앞선 사상가들의 지혜들을 부지불식간에 반복--그것도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천박한 형태로--해 왔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렇게 무지의 산물들은 설령 그것들이 한때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하더라도 대체로 소리없이 사라지곤 했다는 사실이다.



(3) 대체로 위와 같은 두 가지 전제를 깔고 봤을 때, 적어도 "경제학" 분야에서, "세대에 기반을 둔 분석"은 고전적인 "계급에 기반을 둔 분석"을 대체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 이제껏 보니까 박권일 같은 이들은 내가 "계급"을 옹호하는 것을 두고 "마르크스가 그랬으니까" 그러는 것이라고 자꾸만 주장하는데, 이는 전혀 잘못된 생각이다. 내가 계급론을 옹호하는 까닭은 간단히 말하면 앞서 말한 "존중심" 때문이며, 그 존중심이란 비단 마르크스만을 향하는 것은 아니다.

- 하지만 여기서 진짜 중요한 것은 "누가" 계급론을 말했느냐가 아니라 "'왜' 자본주의 경제를 계급에 입각해서 분석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답변은 간단하게나마 이미 <88만원 세대>에 대한 애초의 비판글에서 내놓았었다. (링크) 그때 암시되었듯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경제"를, "경제학"을, 나아가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 이미 앞에서 내놓았던 개요를 반복하면 이렇다. 경제란 물적 부(material wealth)의 흐름으로 드러나는 인간들 사이의 사회관계의 전체이며, 경제학이란 바로 그것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경제학은 당대 사회의 물적 부가 생산되고 유통되며 분배되고 소비되는 방식에 따라 중상주의, 중농주의 등과 같은 형태를 취하기도 했지만, 자본이 중심이 된 근대적 생산방식(capitalist mode of production)이 자리를 잡으면서 이른바 "고전정치경제학"(classical political economy)으로 확립되었다. 바로 이와 같은 지적 전통과 역사적/사회적 배경 속에서, 당대의 사상가들은 경제를 생산/유통/분배/소비 등과 같은 부문으로 체계적으로 구분하는 것을,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사람들을 자본가/노동자/토지소유자라는 세 개의 계급으로 나눠서 보는 것을 일종의 관례로 삼았다.

- 여기서 보듯이 사회를, 경제를 계급에 입각해서 파악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경제학에서 매우 관례적인 것이었고, "의문"에 부칠만한 사항이 결코 아니었다. 이런 전통이 나중에 훼손된 것은 경제학의 성격 변화와 관련해서만 온전하게 이해될 수 있는데, 이 얘긴 지금 더 할 수는 없다. 원래 얘기로 돌아가면, "계급에 입각한 경제 분석"이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얘기지만) 그것이 아담 스미스나 마르크스에 의해 옹호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런 분석에 입각했을 때 경제를 체계적으로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를테면 자본가와 노동자는 자본주의 경제의 대표적인 두 사회계급으로서, 이들은 경제의 각 영역 즉 생산/유통/분배/소비 등의 영역에서 일관되면서도 복합적인 방식으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갈등하면서 자본주의적 경제과정의 내용을 만들어간단 얘기다. 바로 이렇게, 고전적인 사상가들이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마침내는 당연한 것으로 확립해 놓은 "계급에 기반을 둔 분석"을 제멋대로 내팽개치는 용기가 "무지"가 아니라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 뭣보다 이런 부분에 대한 반성이 전혀 없이 "세대론" 운운 하는 "경제학자들"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단순히 경제학의 역사에 대한 무지 때문에도 비판받아야 하지만, 그들이 내놓는 "세대에 입각한 경제분석"은 계급에 입각한 분석에 비해 열등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도 비판받아야 한다. 과연 각각의 세대들이 경제의 각 영역에서 일관되게 대립하거나 협력하면서 자본주의 경제의 내용을 채워나간다고 볼 수 있는가? 오래전 글에서 물어봤듯이, "과연 세대가 생산의 영역에서 어떤 식으로 상호작용한단 말인가!"

- <88만원 세대>의 저자들은 "세대론"이 그저 "마케팅 개념"으로만 쓰이는 것을 개탄했는데, 사실 상이한 세대들은 "생산"은 몰라도 "소비"의 영역에서만큼은 어느정도 패턴화된 모습을 보인다. 나는 여기서 "상호작용"이라고 하지 않고 "모습"이라고 했다("행태"라는 표현도 적합하겠다). 무슨 말이냐면, 소비란 그 자체로만 고찰했을 때 원자화된 소비자들의 소비로 환원될 수 있으며, 이런 소비는 "상호작용"이라기보단 각 소비주체들이 가지고 있는 일정한 사회적 성격들에 따라 정형화된 패턴을 보일 수 있단 얘기다. 예컨대 "20대 대졸여성"은 어느정도 하나의 공통된 소비패턴을 보이는 집단으로 볼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세대"란 다름아닌 마케팅에 더없이 적절한 개념이며, 그것이 마케팅개념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어떤 면에선 당연한 것이다.



(4) 이렇게 보면, 박권일의 최근 <레디앙> 기고글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계급에 기반을 둔 경제분석이 올바르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매우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 <레디앙> 기고글에서 박권일은 원래는 자기도 계급론을 옹호하며, 세대론을 내세운 것은 사실은 그 계급론을 있는 그대로 내세울 경우 책이 팔리지 않을 것 같아서였을 뿐이라고 밝힌 바 있다. 물론 이 말, 즉 원래부터 자기는 "계급론빠"였다는 주장은, 그의 "주관적인" 속내가 어땠는지와는 별개로 "객관적으로는" (적어도 이 공간에서만큼은) 거짓으로 밝혀졌다. 더 공개적이고 인지도 있는 자리에서는 "사실 난 계급론자야"라고 신앙고백을 하면서, 이 불로그 같은 곳에 와서는 계급론에 대한 조소를 거침없이 내놓는 그 만용이 역겹다. 그러나 그것이 나름대로 상징하는 바가 있다.

- 일단 이 대목에서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개요식으로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1) 세대에서 출발해도 결국은 어느 지점에 가서는 계급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2) 이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세대가 아닌 계급을 움켜쥐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3) 이렇게 되는 까닭은 (이미 앞에서 서술한 대로 계급이 세대보다 자본주의 경제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데 단순히 우월해서가 아니라) 세대는 (한마디로 말해) 비과학적인 개념인 반면 계급은 (이제껏 경제학의 역사를 통해 검증되고 증명되었듯이) 과학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4) 만약 여기서 이제까지의 오류를 반성하고 계급을 택하지 않는다면 그 이상의 논의는 결국 “소설”이 되고 말 것이다.

- “세대”는 단순히 비과학적인 개념(마르크스 식으로 말하면 “공허한 추상”이다)일 뿐만 아니라 <88만원 세대>에서는 “계급”이 들어가야 할 자리를 부당하게 빼앗았다. 이 대목에서 오해가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는 지금 “세대”분석이 쓸데없다는 얘길 하는 게 아니다. 전통적으로 “계급”이 차지했던 자리를 “세대”가 대체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얘길 하는 거다. 이런 세대분석은 (1) 계급분석을 대체할 수도 없고, (2) 심지어 (그것이 주제넘게도 자본주의 경제를 체계적으로 다루기를 지향하는 한) 계급분석과 보완적인 관계로 나란히 설 수조차 없다. 특히 후자는, 세대라는 개념이 한정적으로 쓰인다면 그에 기반을 둔 분석도 일정한 의의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분석은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 그런데 재밌는 것은, 비과학적이고 그래서 자본주의 경제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열쇠로서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세대”에서 출발하더라도, 분석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런 초기의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기회들이 주어지기도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비과학적이고 무매개적이며 단순무식한 개념인 “세대”는 분석이 진행됨에 따라 필연적으로 어떤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고, 또 다름 아닌 바로 그 지점에서 진정으로 과학적인 개념인 “계급”이 스스로 자신을 주장하며(assert itself) 모습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계급과 같은 개념이 과학적인 것은, 바로 이렇게, 어떤 권위자가 그렇게 말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자본주의 현실을 진정으로 반영하고 있어서, 즉 현실의 추이를 좇다보면 끝내는 그것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어서인 것이다. 바로 그런 것들을 골라서 우리 현명한 고전사상가들은 개념화를 했던 것이다. 어쨌든 위와 같은 결정적인 지점들에서 연구자는 갈림길을 맞는다. 그동안 의지해왔던 세대 개념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간의 오류를 수정함으로써 “벽”에 적극적으로 맞설 것인가, 아니면 비과학적인 세대 개념을 계속 밀고나감으로써 “벽”을 슬쩍 비껴갈 것인가. 당연한 얘기지만, 만약 이 후자를 선택한다면, 그의 분석은 이제, 주요한 국면들에서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현실의 심층적인 운동의 거친 표현들, 오직 계급이나 가치와 같은 과학적인 개념들 없이는 결코 적절하게 다룰 수 없는 그런 표현들을 애써 외면하는 식으로 흘러가게 될 테다. 점입가경이 되는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의 <88만원 세대> 저자들은 이 후자의 길로 용감하게 걸어갔고, 예컨대 KTX 승무원들의 부당해고를 둘러싼 문제를 “이철 사장과 여승무원 사이의 세대갈등”으로 묘사하는 것 등은 바로 그런 비범한 용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자기는 원래부터 계급론을 옹호했지만 <88만원 세대>에서는 거기에 단지 “세대론의 당의를 입혔을 뿐”이라는 박권일의 주장이 얼마나 기만적인지가 드러난다.

-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하게 지적해둘 것은, 이상과 같은 설명으로부터, 박권일이 “처음부터” 그리고 “일부러” 계급에다가 세대라는 “당의”를 입혔든 말든, 세대에서 출발하는 논의는 결국 계급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다시, 위 KTX 승무원 문제가 그 대표적인 예다. 즉 박권일은, (<88만원 세대> 출간 이후에 여러 논의들에서 드러났듯이) 자신들의 세대론이 계급문제로 계속해서 귀결되는 것이, 마치 자기들이 계획적으로 그렇게 의도한 것인 듯이 말하고 있는데, 이건 박권일이 의도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오히려 현재 드러난 것으로 미뤄보면, 박권일의 <레디앙> 글은, 이와 같은 “세대의 계급으로의 필연적인--그들의 의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귀결”을 뻔뻔스럽게도 사후에 추인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보면 박권일의 위 글은, 거기 깃든 “진실성”과는 상관없이, 세대론은 자본주의 경제를 포괄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루기를 지향하는 한 결국 어쩔 수 없이 계급론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 요컨대 계급과 같은 자본주의 경제를 다루는 과학적인 개념들은 현실의 심층적인 과정을 체계적으로 개념화하고 있으며, 이런 개념들에 입각해서 구성된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진정한 과학”의 힘은 매우 강력하다. 그런 이론이 얼마만큼 강력하냐 하면, 아무리 일개 연구자 나부랭이 또는 기자 나부랭이가 그것("계급에 기반을 둔 분석")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각색 또는 왜곡을 하더라도, 끝내는 자기 자신을 주장(assert itself)할 정도로 강력하다. 이건 마치 부르주아 경제학이 공황을 아무리 부정해도 끝내 자본주의 경제는 공황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공황이나 계급에 대한 이론을 폐기한다고 해서 공황이나 계급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의 운동을 포착해주는, 지성의 역사 속에서 오랜 동안 벼려진 "참된" 개념들의 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또 공황이나 계급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박권일의 글은, 그토록 애써 부정했던 이런 사항을 끝내는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정작 그 자신은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잘 몰랐을지라도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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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론의 파산선언!



(1)  EM님의 [88만원 세대 (3/끝)] 에 관련된 글.
(2)  EM님의 [또 하나의 세대론?] 에 관련된 글.



최근 <88만원세대>의 공저자 박권일이 <레디앙>에 쓴 글이 화제다.
(링크: 88세대론 <조선> 독우물에 빠지다)


솔직히 나는 이미 (1)과 그에 앞선 두 개의 글에서 내가 하고싶은 얘긴 대충 다 했다. 그런데도 내가 굳이 이런 포스트를 별도로 쓰는 까닭은, 위에 링크해 놓은 박권일의 <레디앙> 글이 기만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박권일은 위 글에서 "88만원 세대론"은 무늬만 "세대론"일 뿐이지, 결국 자기들은 처음부터(!) "계급론"을 제기하려고 했다고 말한다. "계급"을 전면에 내세우면 책이 팔리지 않을 것이므로 "세대"라는 옷을 입혔다는 얘기다.

우리는 공히 세대론이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계급문제를 전면에 내세울 경우 책이 얼마나 팔리지 않을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 결과 떠올린 방책이 불안정노동의 전면화라는 다분히 계급적인 문제에 세대론의 '당의(糖衣)'를 입힌다는 것이었다.
 
웃음이 나올 뿐이다. 이미 이 대목에 대해 여려 비판이 나왔을 줄로 한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저게 이제와서 늘어놓는 변명, 그것도 거짓된 변명이라는 거다. 좋다. "계급" 얘기를 결국에 가서는 하고 싶었지만, 여러 사정을 봐서 "세대"를 앞세우는 "전략적 선택"을 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88만원 세대>라는 책 곳곳에 있는 "계급" 관점에 대한 경멸도 "전략적 선택"이라고 할 텐가??

뿐만 아니다. 트랙백한 글 (1)에서 박권일은 친히 이 불로그에 찾아와서 덧글을 남기기도 했다. 다음은 그 일부다. 좀 길지만 인용해 보겠다. (참고로 작년 6월 13일에 달린 덧글이다.)

세대는. EM님의 표현을 빌자면 분석의 '단위'로도, 분석의 '대상'으로도 유효한 개념입니다. "세대보다 계급이 사회의 물질적 흐름을 파악하는데 더 적절하기 때문에 세대는 분석단위가 될 수 없다"는 말은, 결국 "맑스가 세대가 아닌 계급을 얘기했으니 세대는 분석단위가 될 수 없다"는 말과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분석단위로서의 계급이 더 강력하고 유효하다'는 명제와 '분석단위로서 세대가 무용하다'는 명제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한 사회의 경제를 고찰하는 지점과 시점이 어디냐에 따라 계급보다 세대가 때론 더 유용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우석훈 교수가 10대 이야기를 하고싶다고 했을 때, 제가 20대를 중심으로 써야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던 것은, 경제활동에 막 편입하거나 하려는 20대에 대한 세대론 적 접근이 IMF 이후 변화한 한국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의 어떤 측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계급은 이미 경제활동에 편입한 사람들의 문제를 매우 적확히 설명해주는 단위이지만, 한국과 같이 거대한 경제충격을 경험하고 그것을 또한 엄청난 속도로 내면화한 사회의 '편입과 배제'의 다이내믹스를 묘사하기에는 지나치게 경직적입니다. 세대론이 갖고 있는 어마어마한 '위험'과 '함정'과 '한계'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그 이야기는 책에서 여러 번 반복됩니다) 제가 세대를 분석단위로, 또 분석대상으로 택한 이유는 거기에 있습니다. EM님이 엄청나게 많이 지적하셨기 때문에 반복할 필요는 없겠지요. 50대라고 다 한덩어리의 집단으로 묶을 수 없다 등등등. 다 동의합니다.^^;


우석훈 교수의 경우는 아마 좀 다를텐데, 그가 좌파이면서도 생태경제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세대'라는 개념에 대해 상대적으로 친숙하다는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생태학이 경제학(주류, 맑스 할 것 없이)과 결정적으로 다른 측면이 있는데, 하나의 시스템에 존재하는 콤포넌트들의 동학 뿐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콤포넌트들의 문제까지 적극적으로 포괄한다는 점입니다. 미래세대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지 않으면 시스템의 안정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게 바로 생태학이지요. 책에서 본격적으로 그런 논의들이 등장하기보다는 그저 운을 띄우는 수준이어서 비판을 자초한 면도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골방좌파'들은 맨날 맑스의 진의가 어쨌느니 떠들어대지 말고, 이런 것도 좀 공부해야 돼요. 세대 얘기한다고 다 '우파꼴통' 아니죠. 오히려 저는 우파들이 이 '팜플렛'을 읽어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세대론이 전략적으로 괜찮았다고 평가하는 편입니다.



대체 뭐가 전략적인 선택이라는 건가? 위 인용에서 명백히 드러나듯이, 그들은 처음부터 "계급"이 해주지 못하는 "세대"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게 다다. 이 문제에 대해 더 길게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그리고 박권일이 이번 <레디앙> 글에서 스스로 지적한 문제, 즉 정작 <88만원 세대>를 집어들고 공감했던 사람들은 명문대생이었다는 문제(이 문제는 부분적으로는 (1)에서도 이미 제기되었고, (2)에서는 다른 형태로 제기되었다) 등을 놓고 봤을 때, "88만원 세대론"은 더이상 갈곳이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결국 박권일의 <레디앙> 기고글은 바로 그 "88만원 세대론"의 "파산선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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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undrisse (follow-up)


EM님의 [[책] Karl Marx's Grundrisse (다시)] 에 관련된 글.





위 글은 아무리 봐도 부실한 "책소개"다. 그래서 제목을 수정했다. 그냥 "책"으로..;;

암튼... 위 책과 관련된 세 가지 정보를 더 붙여둔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1. 위 트랙백된 글의 덧글에가다 홉스봄이 쓴 Foreword가 괜찮다고 말했는데, 그것을 무료로 누구나 볼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 다음 링크에 가면 된다. (보다시피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책 파는 사이트다.)


위 링크를 따라가면, 책에 대한 기본정보는 물론 홉스봄의 Foreword를 볼 수 있다. (무료로 볼 수 있는 것은 30페이지뿐이므로, 본문은 하나도 못 본다.)



2. 위 책의 편집자인 Marcello Musto의 글이 MR-Zine에 실렸다. 원래 이 글은 위 책에 포함된 것이라고 하는데,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제3부의 서론격인 글인 것 같다. 참고로 책에는 제목이 "Dissemination and reception of the Grundrisse in the world: Introduction"으로 되어있다.




3. 끝으로, 위 둘의 변증법적 통일이다. (-_-) 뭐냐면, 위 두 사람의 대화;;;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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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Karl Marx's Grundrisse (다시)


EM님의 [[책소개] Karl Marx’s Grundrisse] 에 관련된 글.


작년 1월에 아직 출판되지도 않은 위 책을 이곳에 소개했다. 그 뒤 9월인가에 책이 출판됐고, 엄청난 가격(65파운드=13만원) 때문에 살 엄두를 못 내다가 드디어 British Library에서 손에 넣고야 말았다. (-_-) 사실은 학교 도서관에도 구입신청을 해뒀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출판사쪽에서 책이 넘어오질 않았다. 벌써 절판됐을 리는 없고... 아무래도 무슨 문제가 있나보다.



어쨌거나 손에 넣었다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역시 예상대로 크게 건질 게 없음을 확인했다는 거다. (이건 매우 중요한 거다. 어떻게 보면 이른바 "연구자"란 바로 이렇게, "별 게 없음을 확인하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도 있다.) 물론 이 얘긴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일단 <요강>을 둘러싼 여러 이론적 문제들을 살피고 있는 제1부(요강: 비판적 해석)는 확실히 볼 게 없다. 제목만 화려할 뿐이다. 세부적으로 볼까?

  1. <1857년 서설>에서 역사, 생산, 방법
  2. 현대경제에서 가치개념: <요강>에서 화폐와 자본의 관계
  3. <요강>에서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
  4. 잉여가치 범주의 발견
  5. <자본주의적 생산에 선행하는 형태들>에서 역사유물론
  6. 마르크스의 <요강>과 자본주의의 생태위기
  7. 해방된 사회에서 해방된 개인: <요강>에서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이후 사회 스케치
  8. <요강>에 비춰 <자본>을 재해석함

일단 위 얘기들이 별로 볼 게 없는 까닭은, 위 주제들은 제각각 나름대로 중요한 것들이긴 하지만 굳이 <요강>과 관련해서 논의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렇게 논의됐을 때 몇 가지 치명적인 위험이 발생하는데,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요강>의 신화화"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자본>을 재해석하는 것은 좋지만 굳이 그것을 <요강>에 비춰 해야 할 까닭은 없다. 만약 그와 같은 작업, 즉 오랜 연구의 최종 결과물인 <자본>을 그 이전의 마르크스의 지적 노력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면(이건 진정 필요하다), 그것은 <요강>뿐만이 아니라 마르크스의 전체 경제학 연구, 나아가 그의 전체 지적이력과의 관련 속에서 행해져야만 한다. 사정이 이런데도, 굳이 <자본> 재해석을 <요강>에 비춰서 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결국 <요강>의 위상을 지나치게 격상시키는 효과만 빚어낼 뿐이고, 실제로 지금까지 많이 그래왔다. 이건 매우 위험한 일이고 피해야할 일이며, 정말이지 이제는 제발 좀 그만둬야 할 일이다.

물론 위와 같은 논의가 전혀 쓸모없다는 건 아니다. 이를테면 <자본>을 좀 더 넓은 시야에서 보고자하는 사람에게, 8번과 같은 글은 좋은 입문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왜 그런 구태의연한 글들이 <요강> 집필 150주년을 기념하는 이 엄청나고도 경건한 작업에 끼어드느냐는 데 있다. 그리고 정말 슬픈 것은 그런 구태의연함이 이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내가 아는 한 저 위에 있는 글들의 대부분은 해당 필자들이 그 동안 이곳저곳에서 이미 다 발표한 것들을 그저 재편집한 데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위 글들은 구태의연함 그 자체다. 대체 각 저자들이 몇십년 전부터 똑같이 해오던 저 얘기들이 요강집필 150주년이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해서 위 제1부만 놓고 보면 이 책은 별로 특별할 게 없고,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의 핵심은 제2부와 제3부다. 먼저 제2부(<요강> 시절의 마르크스)는 세 개의 논문으로 채워져 있다. 다음과 같다.

  1. <요강> 시절 마르크스의 삶
  2. 첫 번째 세계경제공황: 경제문제 언론인으로서 마르크스
  3. 마르크스의 1857-8년 '공황에 관한 책들'

뭣보다 나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크게 건진 게 바로 10번과 11번이다. 바로 내가 이곳에서도 몇번 소개한 바 있는 우리의 크래트케(Michael R Kräke)옹이다. 10번은 마르크스의 언론인으로서의 이력을 간략히 요약하면서 1857년, 사상 처음으로 닥친 세계적인 규모의 대공황을 그가 언론인으로서 어떻게 받아들였고 또 보도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11번은 일반인들에게는 물론 연구자들에게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은, 역시 같은 시기에 작성된 '공황에 관한 3권의 노트'를 소개하고 있다. (이 노트들은 MEGA 프로젝트를 통해 출판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크래트케의 위 글들도 지나치게 짧다. 위 글들은 논쟁적이라기보단 설명적인데, 짧기 때문에 그 설명도 기대만큼 자세하지 않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위 '공황에 대한 3권의 노트'의 윤곽을 대략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큰 수확을 거뒀다.



끝으로 제3부. 뭔가를 "기념"한다는 의미에서 보면 바로 이 대목이야말로 이 책의 백미다. 모두 21개의 장으로 이뤄진 이 부분에서는 세계 각지에서 <요강>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가 기록되어 있다. 대체로 설명이 자세하진 않지만 어쨌든 희귀한 자료임에는 분명하다.

이 의미있는 자리를 한국도 한 구석을 채우고 있는데... 모처럼 마르크스 관련 저작에서 "South Korea"라는 제목을 보니 감개무량하기도... 그러나 그것도 잠시다. Reference를 빼면 책으로 한 페이지에도 못미치는 분량이 "나 부실해요~"라고 수줍게 속삭히고 있었고, 실제 그것을 읽어보면 그 부실함이란 결코 그런 애교로 봐줄 정도가 아님이 밝혀진다. 외국 나가면 한국사람들은 뭘 크게 잘하진 못해도 성실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건 뭐... 하기 싫어서 억지로 짜낸 티가 팍팍 나고, "<요강>에 대한 비판적 연구"라는 제목으로 열거된 몇 개의 연구도, "과연 저것밖에 없나? 좀 더 조사좀 해볼 것이지..."하는 푸념을 자아낸다.

한국에 대해 한껏 실망하고서 봐서 그런지 다른 나라의 사정을 다룬 장들도 그다지 좋게만 보이진 않는다. 이를테면 터키를 다른 장. 터키는 사실 마르크스주의가 매우 강력한 나라고, 마르크스주의 학술운동도 상황이 그리 나쁘진 않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내용만 놓고 보면, 마르크스주의의 불모지 같다고 할까. (반대로 유익한 정보를 담고 있는 장들도 많다. 일본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결론적으로 평가를 하자면, 이 책은 별 다섯 개 중에서 두 개 정도를 받을 만하다. 문제가 뭘까? 나는 내용 자체보다는 기획의 부실함을 질책하고 싶다. 이 책은 Marcello Musto라는 젊은 신진 학자가 편집을 했음에도, 젊은이다운 패기나 새로움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오히려 제1부는 구태의연함으로 가득차있고, 제3부의 절반은 부실하다(위에서 예로 든 한국에 관한 장이 그 바로미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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