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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천 심지

[부활: 2011년 8월 5일]

 

이 글은 내가 써놓고도 가장 뿌듯하고 감격스러웠던 글이다. 하지만 이게 결코 "자뻑 멘트"는 아니다. 아래 덧글로 달린 반응들을 보면,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드러날 것이다. (근데 이렇게 글을 다시 꺼내놓고 보니, 여기 덧글달고 트랙백 달았던 분들은 지금 뭐하나 궁금하네...)

 


 

 

[원글: 2008년 3월 9일]

 

 

고등학교 다닐때, 흔히 말하는 "진로"와 상관없이 나의 꿈은 동인천 심지의 비디오자키(VJ)가 되는 거였다.

동인천 심지가 뭐냐 하면... 1990년대 초반쯤에 인천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많이들 알 텐데... "심지"는 동인천에 있는 음악감상실이다. 나중에 서울에 있는 (주로 신촌과 대학로) 몇몇 음악감상실에도 가본 결과, 심지는 음반보유면에서 가히 "최고"였을 뿐만 아니라, 생김새도 다른 곳들과는 매우 달랐다. 다른 데는 대체로 카페처럼 생겨서 기본적으로 테이블이 있고 거기에 앉아서 스크린을 보는 체제인 데 반해, 심지는 그야말로 극장처럼 생겨서, 마치 영화를 보듯이 뮤직비디오를 보게 생겼던 것이다.

(VJ가 하는 일은, 쪽지로 신청곡을 받아서, 그게 좀 쌓이면, <핫뮤직>이나 테이프 속지 같은 데서 읽은 잡다한 지식들을 섞어서 약간의 멘트와 함께 음악을 틀어주는 거다. 그게 어찌나 좋아보였던지... ㅋ)



오늘. 갑자기 바로 그 "심지"가 생각난다.

뭐, 그렇다. 황당하게도, 고등학교때의 내 꿈은, 뜻하지 않은 복병 "재수"(-_-)를 만나 결국 실현되지 못했고, 난 서울로 대학을 왔다. 물론 그래도 종종 그곳에 놀러가긴 했는데, 언젠가 오랜만에 찾아갔을 때, 심지는 문을 닫고 사라졌다. 그날 난 조금 울었던 것 같다.

심지. 그곳은 그냥 음악만 듣는 곳이 아니다. 이미 말했듯, 그곳에선 음악만이 아니라 뮤직비디오가 함께 나온다. 난 정말이지, 지금도, 그때 그곳엘 갈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아랫층엔 일반 팝음악, 윗층엔 메탈/록음악... 물론 나는 늘 윗층에만 갔고, 올라가는 도중 아랫층을 기웃거리는 녀석들에게 하찮다는 듯이 썩소를 한번씩 날려주곤 했던 것이다. (그땐 뭐.. 그랬다. ㅎㅎ)

그렇다고 심지에서 뮤직비디오만 보는 것도 아니다. 거긴 말하자면 일종의 갈곳없는 청소년들의 집합소 같은 데였다. 지금은 어떤가 모르겠다만 당시 인천은 나름 헤비메탈/록음악의 메카 같은 곳이었고, 비공식적이긴 했지만 "전국 최고의 음악감상실" 심지는 우리에게 그런 자부심을 더해주는 곳이기도 했다. 암튼 그곳은, 바로 그런 음악도시 인천에 사는, 그 중에서도 나름 음악좀 듣는다는 메탈키드들의 집합소 같은 곳이었단 말씀.

물론 누구나 예상할 수 있겠지만, "심지"는 연애하는 학생들의 천국이기도 했다. 그때는 연애를 하면 갈 곳이 별로 없었다. 어쩔땐 갈데가 없어서 시립도서관 같은 데를 가기도 했다. 커피숍 같은 데서 쫓겨나는 일은 예사였고, 지금처럼 비디오방(-_-)도 없었다. 하지만 "심지"만은 그 너른 품으로 모두를 감싸줬던 것이다. 일요일 같은 때는, 아침에 문열자 마자 들어가서 하루종일 앉아있으면서 잠도자고 중간에 친구도 만나고 또 컵라면도 해먹고... 이러다가 저녁나절에 여자친구가 오면 같이 오무라이스(-_-) 먹고... 뭐 그랬다.

음악에 미친 아이들끼리 여기서 자웅을 겨루는 하나의 방식은, "신청곡 많이 선정되기"다. ㅋ 물론 신청곡을 많이 넣는다고 해서 많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날그날의 분위기, 특히 VJ의 심중을 잘 살피는 것이 기본이며, 뭣보다 남들이 다 신청하는 노래는 금물이다. 왜? 그런 노래들은 얼마전에 나왔을 확률이 높으니까 퇴짜맞기 십상이다. 따라서 뭔가 남들이 신청 안했을 것 같지만 들으면 무지 좋아할 것 같은 노래를 신청해 주는 것! 여기에 덧붙여 VJ도 모를 것 같은, 그래서 궁금해서라도 한번 틀어줄 것 같은 "필살기" 하나쯤을 준비해 놓는 것도 필수.

하여튼 바로 그렇게, 나는 내가 좋아하는 거의 모든 곡들을 당시로서는 매우 보기 어려웠던 뮤직비디오로 감상하곤 했다는 얘기다. 좋아하는 곡을 영상으로 보는 것도 좋았고, 모르던 곡을 영상으로 본 뒤 맘에 드는 것을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찾아듣는 것도 좋았다. 그렇게 테이프는 쌓여갔고 그걸 바라보는 엄마의 눈초리는 날카로워져만 갔다.



그런데 사실은, 오늘 "심지"만 생각난 게 아니라, 그때 때로는 내가 듣고 싶어서, 또 때로는 아무리 듣기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어서... 결국 무지무지 자주 듣게 된 X가 난데없이 생각난 것이다. 내가 X의 노래 중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은 Endless Rain이고 제일 좋아하는 것은 Weekend다.

Endless Rain을 싫어한 이유는 간단하다. 심지에서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신청을 해서 거의 한시간에 한번꼴로 나오니... 죽돌이인 나로서는 싫을 수밖에. 반면 Weekend는 사람들이 별로 모르는 곡이기도 했고, 또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특히 스튜디오 버전의 곡 끝부분에 나오는 코러스 부분은 언제들어도 흥분(!)된다.

뭐 암튼 그래서... YouTube에 가서 X의 노래를 몇 곡 들었다, 반복해서.



그런데, 그렇게 듣고 있으려니, 눈물이 났다.

노래서 슬퍼서는 아니고...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그랬던 것 같다. 어린시절(?) 생각... 또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오늘의 내가 거기에 오버랩되면서.... 뭐 이렇게 되면, 눈물이 나는 게 그리 이상한 건 아닐 것 같은데...



끝으로 Weekend의 정식Clip을 링크해 둔다. X - Weekend (여러 라이브 버전도 있는데, 요걸 개인적으로는 제일 좋아한다. 이유? 많이 봤기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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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PPE 국제 컨퍼런스] 2011년 5월 터키에 함께 갑시다!!

내년(2011년) 5월에 터키 이스탄불에서 국제 학술대회가 열립니다.

거기에 함께 참가할 분들을 찾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다음 링크를 참조해 주세요!!!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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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 논쟁 정리

정말 오랜만에 여기에 글을 쓴다. 

 

지금은 비록 자리를 옮겼지만, 나는 이곳에 무한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 내가 쓴 글들, 다녀간 사람들과 그들의 흔적들... 모두 다 내겐 소중하다. 

 

내 글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다녀간 사람들의 거듦으로, 말하자면 "다중지성"에 의해 이 불로그는 하루하루 살쪄갔고, 그것을 몸소 느끼며 놀라워했고 또 행복했었다. 특히 내가 먼 타국땅에서 외롭게 지낼 때, 이곳에서 만난 친구들은 비록 그들은 모르겠지만 내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는지 모른다. 정말 고맙다... 

 

그런 과거의 흔적들을 조금씩 내놓아야지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지금 그 첫 번째 신호탄으로, 시대의 명저 <<88만원 세대>>를 둘러싼 일련의 논쟁들을 정리해서 내놓는다. 요 오른쪽 메뉴에서, "[논쟁 1] 88만원 세대"를 클릭하시면 관련글들이 나올 것이다. 예전에 논쟁에 참여했던 분들께는 아련한 추억을, 내가 이 불로그를 닫는 바람에 그 논쟁을 구경도 못하신 분들께는 신선한 재미를 드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_^)

 

참고로, "88만원 세대"라는 제목으로 된 첫 세 개의 글들은, "[서평] 88만원 세대 (우석훈, 박권일)"이라는 제목으로 나의 새 블로그에 좀 더 정제된 형태로 올라있다.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링크)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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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에 입각한 경제분석의 의의



관련글


기왕에 말을 꺼냈으니 적절하게 "마무리"는 지어야겠단 생각에 하나 더 쓴다. 근데 사실은 이미 다 한 얘기다. 그래도 정리하는 뜻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나 자신을 위해서도 한번 더 써보자.

그동안 명시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제시된 내 주장의 핵심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아마도 불필요한 혼란의 원인도, 적어도 일부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제시되었다는 데 있기도 할 테다. 어쨌든 이제 그것들을 간단하게 내놓을 것이므로, 좀 더 의미있는 논의가 오갔으면 좋겠다.)



(1) 특히 인문사회과학에 종사하는 연구자라면, 그 분야의 고전적인 사상가들이 내놓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들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 그냥 "알아야 한다"가 아니라 "존중해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존중하려면 적어도 대충이라도 그 사람들이 뭐라고 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요새 문제는 전문연구자들조차 그런 기본도 갖춰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같은 애송이들도 문제지만 우 머시기 같은 "박사" 타이틀을 가진 자들이 더 문제다. 왜냐면 애송이들은 발전의 여지라도 있지만, 이미 박사 나리가 된 분들은 고집불통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우 머시기라는 양반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책을 몇권인가를 쓴다고 벌써부터 호기가 대단한 것 같다. 그는 책쓰는 게 무슨 장난하는 줄 아는가? 과연 대단하다.)

- 그런데 그런 "존중심"이 단순한 "앎"에서 쉽게 나오는 건 아니다. 이를테면 "세상이 바뀌었으니 낡은 사상은 쓸모없어"라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많이 알아도 존중심이 생기겠는가? 중요한 것은, 2-3백년 된 사상이라도 그것이 당대 사회를 어떤 식으로든 반영했고 또 그와 어떤 식으로든 긴장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 나아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리고 장소의 바뀜에 따라 그런 사상들이 어떻게든 변화/발전을 해나갔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존중심은 출발한다.

- 바로 이런 과정에서 중요하게 떠오르는 것이 앞의 포스트에서 쓴 "세 가지 역사"다. (링크) 하나의 사상이, 실제의 역사 속에서, 그 역사의 반영이기도 한 지성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그 사상을 내놓은 사상가의 역사(이력) 속에서 어떤 의의를 갖는지... 이런 점을 세심하게 살피는 것이야말로 위와 같은 존중심이 표현되는 기본적인 방식인 것이다. 물론 모든 연구자들이 이런 쉽지 않은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연구자들은, 타인의 성과로부터 도움을 받더라도, 위와 같은 사항을 충분히 인지함으로써 적어도 "존중심"이라도 가져야 한다는 얘기다.



(2) 이 말은 곧, 연구자라면 적어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도는 알고서 떠들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 왜 그런가? 연구자의 논의란 그가 속한 지성사 속에서, 그리고 그 안에서만 제 의미가 찾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세 가지 역사에 대해 말했지만, 그 중에서도 한 사상을 평가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지성사라고 생각한다. 사실 현실의 역사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거기서 결국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모든 것의 "대전제"라고 할 수 있으며, 한 사상가의 지적이력이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특수한 경우(특정 사상가 자체를 연구하는 등의)에만 특히 중요하게 떠오를 것이다.

- 반면 지성사란, 한 연구자가 제 발로 선다는 것은 곧 그가 속한 지성사 속에서 자기 자리를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그 중요성이 절대적이다. 이런 사항을 염두에 두고 이를테면 경제학의 역사를 보면, 자기 학문의 역사에 대한 무지로만 무장한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얼마나 많이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해왔는지, 또는 얼마나 자주 자기들보다 앞선 사상가들의 지혜들을 부지불식간에 반복--그것도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천박한 형태로--해 왔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렇게 무지의 산물들은 설령 그것들이 한때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하더라도 대체로 소리없이 사라지곤 했다는 사실이다.



(3) 대체로 위와 같은 두 가지 전제를 깔고 봤을 때, 적어도 "경제학" 분야에서, "세대에 기반을 둔 분석"은 고전적인 "계급에 기반을 둔 분석"을 대체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 이제껏 보니까 박권일 같은 이들은 내가 "계급"을 옹호하는 것을 두고 "마르크스가 그랬으니까" 그러는 것이라고 자꾸만 주장하는데, 이는 전혀 잘못된 생각이다. 내가 계급론을 옹호하는 까닭은 간단히 말하면 앞서 말한 "존중심" 때문이며, 그 존중심이란 비단 마르크스만을 향하는 것은 아니다.

- 하지만 여기서 진짜 중요한 것은 "누가" 계급론을 말했느냐가 아니라 "'왜' 자본주의 경제를 계급에 입각해서 분석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답변은 간단하게나마 이미 <88만원 세대>에 대한 애초의 비판글에서 내놓았었다. (링크) 그때 암시되었듯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경제"를, "경제학"을, 나아가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 이미 앞에서 내놓았던 개요를 반복하면 이렇다. 경제란 물적 부(material wealth)의 흐름으로 드러나는 인간들 사이의 사회관계의 전체이며, 경제학이란 바로 그것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경제학은 당대 사회의 물적 부가 생산되고 유통되며 분배되고 소비되는 방식에 따라 중상주의, 중농주의 등과 같은 형태를 취하기도 했지만, 자본이 중심이 된 근대적 생산방식(capitalist mode of production)이 자리를 잡으면서 이른바 "고전정치경제학"(classical political economy)으로 확립되었다. 바로 이와 같은 지적 전통과 역사적/사회적 배경 속에서, 당대의 사상가들은 경제를 생산/유통/분배/소비 등과 같은 부문으로 체계적으로 구분하는 것을,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사람들을 자본가/노동자/토지소유자라는 세 개의 계급으로 나눠서 보는 것을 일종의 관례로 삼았다.

- 여기서 보듯이 사회를, 경제를 계급에 입각해서 파악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경제학에서 매우 관례적인 것이었고, "의문"에 부칠만한 사항이 결코 아니었다. 이런 전통이 나중에 훼손된 것은 경제학의 성격 변화와 관련해서만 온전하게 이해될 수 있는데, 이 얘긴 지금 더 할 수는 없다. 원래 얘기로 돌아가면, "계급에 입각한 경제 분석"이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얘기지만) 그것이 아담 스미스나 마르크스에 의해 옹호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런 분석에 입각했을 때 경제를 체계적으로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를테면 자본가와 노동자는 자본주의 경제의 대표적인 두 사회계급으로서, 이들은 경제의 각 영역 즉 생산/유통/분배/소비 등의 영역에서 일관되면서도 복합적인 방식으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갈등하면서 자본주의적 경제과정의 내용을 만들어간단 얘기다. 바로 이렇게, 고전적인 사상가들이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마침내는 당연한 것으로 확립해 놓은 "계급에 기반을 둔 분석"을 제멋대로 내팽개치는 용기가 "무지"가 아니라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 뭣보다 이런 부분에 대한 반성이 전혀 없이 "세대론" 운운 하는 "경제학자들"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단순히 경제학의 역사에 대한 무지 때문에도 비판받아야 하지만, 그들이 내놓는 "세대에 입각한 경제분석"은 계급에 입각한 분석에 비해 열등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도 비판받아야 한다. 과연 각각의 세대들이 경제의 각 영역에서 일관되게 대립하거나 협력하면서 자본주의 경제의 내용을 채워나간다고 볼 수 있는가? 오래전 글에서 물어봤듯이, "과연 세대가 생산의 영역에서 어떤 식으로 상호작용한단 말인가!"

- <88만원 세대>의 저자들은 "세대론"이 그저 "마케팅 개념"으로만 쓰이는 것을 개탄했는데, 사실 상이한 세대들은 "생산"은 몰라도 "소비"의 영역에서만큼은 어느정도 패턴화된 모습을 보인다. 나는 여기서 "상호작용"이라고 하지 않고 "모습"이라고 했다("행태"라는 표현도 적합하겠다). 무슨 말이냐면, 소비란 그 자체로만 고찰했을 때 원자화된 소비자들의 소비로 환원될 수 있으며, 이런 소비는 "상호작용"이라기보단 각 소비주체들이 가지고 있는 일정한 사회적 성격들에 따라 정형화된 패턴을 보일 수 있단 얘기다. 예컨대 "20대 대졸여성"은 어느정도 하나의 공통된 소비패턴을 보이는 집단으로 볼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세대"란 다름아닌 마케팅에 더없이 적절한 개념이며, 그것이 마케팅개념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어떤 면에선 당연한 것이다.



(4) 이렇게 보면, 박권일의 최근 <레디앙> 기고글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계급에 기반을 둔 경제분석이 올바르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매우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 <레디앙> 기고글에서 박권일은 원래는 자기도 계급론을 옹호하며, 세대론을 내세운 것은 사실은 그 계급론을 있는 그대로 내세울 경우 책이 팔리지 않을 것 같아서였을 뿐이라고 밝힌 바 있다. 물론 이 말, 즉 원래부터 자기는 "계급론빠"였다는 주장은, 그의 "주관적인" 속내가 어땠는지와는 별개로 "객관적으로는" (적어도 이 공간에서만큼은) 거짓으로 밝혀졌다. 더 공개적이고 인지도 있는 자리에서는 "사실 난 계급론자야"라고 신앙고백을 하면서, 이 불로그 같은 곳에 와서는 계급론에 대한 조소를 거침없이 내놓는 그 만용이 역겹다. 그러나 그것이 나름대로 상징하는 바가 있다.

- 일단 이 대목에서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개요식으로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1) 세대에서 출발해도 결국은 어느 지점에 가서는 계급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2) 이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세대가 아닌 계급을 움켜쥐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3) 이렇게 되는 까닭은 (이미 앞에서 서술한 대로 계급이 세대보다 자본주의 경제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데 단순히 우월해서가 아니라) 세대는 (한마디로 말해) 비과학적인 개념인 반면 계급은 (이제껏 경제학의 역사를 통해 검증되고 증명되었듯이) 과학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4) 만약 여기서 이제까지의 오류를 반성하고 계급을 택하지 않는다면 그 이상의 논의는 결국 “소설”이 되고 말 것이다.

- “세대”는 단순히 비과학적인 개념(마르크스 식으로 말하면 “공허한 추상”이다)일 뿐만 아니라 <88만원 세대>에서는 “계급”이 들어가야 할 자리를 부당하게 빼앗았다. 이 대목에서 오해가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는 지금 “세대”분석이 쓸데없다는 얘길 하는 게 아니다. 전통적으로 “계급”이 차지했던 자리를 “세대”가 대체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얘길 하는 거다. 이런 세대분석은 (1) 계급분석을 대체할 수도 없고, (2) 심지어 (그것이 주제넘게도 자본주의 경제를 체계적으로 다루기를 지향하는 한) 계급분석과 보완적인 관계로 나란히 설 수조차 없다. 특히 후자는, 세대라는 개념이 한정적으로 쓰인다면 그에 기반을 둔 분석도 일정한 의의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분석은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 그런데 재밌는 것은, 비과학적이고 그래서 자본주의 경제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열쇠로서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세대”에서 출발하더라도, 분석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런 초기의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기회들이 주어지기도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비과학적이고 무매개적이며 단순무식한 개념인 “세대”는 분석이 진행됨에 따라 필연적으로 어떤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고, 또 다름 아닌 바로 그 지점에서 진정으로 과학적인 개념인 “계급”이 스스로 자신을 주장하며(assert itself) 모습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계급과 같은 개념이 과학적인 것은, 바로 이렇게, 어떤 권위자가 그렇게 말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자본주의 현실을 진정으로 반영하고 있어서, 즉 현실의 추이를 좇다보면 끝내는 그것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어서인 것이다. 바로 그런 것들을 골라서 우리 현명한 고전사상가들은 개념화를 했던 것이다. 어쨌든 위와 같은 결정적인 지점들에서 연구자는 갈림길을 맞는다. 그동안 의지해왔던 세대 개념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간의 오류를 수정함으로써 “벽”에 적극적으로 맞설 것인가, 아니면 비과학적인 세대 개념을 계속 밀고나감으로써 “벽”을 슬쩍 비껴갈 것인가. 당연한 얘기지만, 만약 이 후자를 선택한다면, 그의 분석은 이제, 주요한 국면들에서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현실의 심층적인 운동의 거친 표현들, 오직 계급이나 가치와 같은 과학적인 개념들 없이는 결코 적절하게 다룰 수 없는 그런 표현들을 애써 외면하는 식으로 흘러가게 될 테다. 점입가경이 되는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의 <88만원 세대> 저자들은 이 후자의 길로 용감하게 걸어갔고, 예컨대 KTX 승무원들의 부당해고를 둘러싼 문제를 “이철 사장과 여승무원 사이의 세대갈등”으로 묘사하는 것 등은 바로 그런 비범한 용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자기는 원래부터 계급론을 옹호했지만 <88만원 세대>에서는 거기에 단지 “세대론의 당의를 입혔을 뿐”이라는 박권일의 주장이 얼마나 기만적인지가 드러난다.

-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하게 지적해둘 것은, 이상과 같은 설명으로부터, 박권일이 “처음부터” 그리고 “일부러” 계급에다가 세대라는 “당의”를 입혔든 말든, 세대에서 출발하는 논의는 결국 계급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다시, 위 KTX 승무원 문제가 그 대표적인 예다. 즉 박권일은, (<88만원 세대> 출간 이후에 여러 논의들에서 드러났듯이) 자신들의 세대론이 계급문제로 계속해서 귀결되는 것이, 마치 자기들이 계획적으로 그렇게 의도한 것인 듯이 말하고 있는데, 이건 박권일이 의도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오히려 현재 드러난 것으로 미뤄보면, 박권일의 <레디앙> 글은, 이와 같은 “세대의 계급으로의 필연적인--그들의 의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귀결”을 뻔뻔스럽게도 사후에 추인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보면 박권일의 위 글은, 거기 깃든 “진실성”과는 상관없이, 세대론은 자본주의 경제를 포괄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루기를 지향하는 한 결국 어쩔 수 없이 계급론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 요컨대 계급과 같은 자본주의 경제를 다루는 과학적인 개념들은 현실의 심층적인 과정을 체계적으로 개념화하고 있으며, 이런 개념들에 입각해서 구성된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진정한 과학”의 힘은 매우 강력하다. 그런 이론이 얼마만큼 강력하냐 하면, 아무리 일개 연구자 나부랭이 또는 기자 나부랭이가 그것("계급에 기반을 둔 분석")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각색 또는 왜곡을 하더라도, 끝내는 자기 자신을 주장(assert itself)할 정도로 강력하다. 이건 마치 부르주아 경제학이 공황을 아무리 부정해도 끝내 자본주의 경제는 공황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공황이나 계급에 대한 이론을 폐기한다고 해서 공황이나 계급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의 운동을 포착해주는, 지성의 역사 속에서 오랜 동안 벼려진 "참된" 개념들의 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또 공황이나 계급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박권일의 글은, 그토록 애써 부정했던 이런 사항을 끝내는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정작 그 자신은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잘 몰랐을지라도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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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론의 파산선언!



(1)  EM님의 [88만원 세대 (3/끝)] 에 관련된 글.
(2)  EM님의 [또 하나의 세대론?] 에 관련된 글.



최근 <88만원세대>의 공저자 박권일이 <레디앙>에 쓴 글이 화제다.
(링크: 88세대론 <조선> 독우물에 빠지다)


솔직히 나는 이미 (1)과 그에 앞선 두 개의 글에서 내가 하고싶은 얘긴 대충 다 했다. 그런데도 내가 굳이 이런 포스트를 별도로 쓰는 까닭은, 위에 링크해 놓은 박권일의 <레디앙> 글이 기만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박권일은 위 글에서 "88만원 세대론"은 무늬만 "세대론"일 뿐이지, 결국 자기들은 처음부터(!) "계급론"을 제기하려고 했다고 말한다. "계급"을 전면에 내세우면 책이 팔리지 않을 것이므로 "세대"라는 옷을 입혔다는 얘기다.

우리는 공히 세대론이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계급문제를 전면에 내세울 경우 책이 얼마나 팔리지 않을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 결과 떠올린 방책이 불안정노동의 전면화라는 다분히 계급적인 문제에 세대론의 '당의(糖衣)'를 입힌다는 것이었다.
 
웃음이 나올 뿐이다. 이미 이 대목에 대해 여려 비판이 나왔을 줄로 한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저게 이제와서 늘어놓는 변명, 그것도 거짓된 변명이라는 거다. 좋다. "계급" 얘기를 결국에 가서는 하고 싶었지만, 여러 사정을 봐서 "세대"를 앞세우는 "전략적 선택"을 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88만원 세대>라는 책 곳곳에 있는 "계급" 관점에 대한 경멸도 "전략적 선택"이라고 할 텐가??

뿐만 아니다. 트랙백한 글 (1)에서 박권일은 친히 이 불로그에 찾아와서 덧글을 남기기도 했다. 다음은 그 일부다. 좀 길지만 인용해 보겠다. (참고로 작년 6월 13일에 달린 덧글이다.)

세대는. EM님의 표현을 빌자면 분석의 '단위'로도, 분석의 '대상'으로도 유효한 개념입니다. "세대보다 계급이 사회의 물질적 흐름을 파악하는데 더 적절하기 때문에 세대는 분석단위가 될 수 없다"는 말은, 결국 "맑스가 세대가 아닌 계급을 얘기했으니 세대는 분석단위가 될 수 없다"는 말과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분석단위로서의 계급이 더 강력하고 유효하다'는 명제와 '분석단위로서 세대가 무용하다'는 명제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한 사회의 경제를 고찰하는 지점과 시점이 어디냐에 따라 계급보다 세대가 때론 더 유용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우석훈 교수가 10대 이야기를 하고싶다고 했을 때, 제가 20대를 중심으로 써야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던 것은, 경제활동에 막 편입하거나 하려는 20대에 대한 세대론 적 접근이 IMF 이후 변화한 한국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의 어떤 측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계급은 이미 경제활동에 편입한 사람들의 문제를 매우 적확히 설명해주는 단위이지만, 한국과 같이 거대한 경제충격을 경험하고 그것을 또한 엄청난 속도로 내면화한 사회의 '편입과 배제'의 다이내믹스를 묘사하기에는 지나치게 경직적입니다. 세대론이 갖고 있는 어마어마한 '위험'과 '함정'과 '한계'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그 이야기는 책에서 여러 번 반복됩니다) 제가 세대를 분석단위로, 또 분석대상으로 택한 이유는 거기에 있습니다. EM님이 엄청나게 많이 지적하셨기 때문에 반복할 필요는 없겠지요. 50대라고 다 한덩어리의 집단으로 묶을 수 없다 등등등. 다 동의합니다.^^;


우석훈 교수의 경우는 아마 좀 다를텐데, 그가 좌파이면서도 생태경제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세대'라는 개념에 대해 상대적으로 친숙하다는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생태학이 경제학(주류, 맑스 할 것 없이)과 결정적으로 다른 측면이 있는데, 하나의 시스템에 존재하는 콤포넌트들의 동학 뿐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콤포넌트들의 문제까지 적극적으로 포괄한다는 점입니다. 미래세대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지 않으면 시스템의 안정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게 바로 생태학이지요. 책에서 본격적으로 그런 논의들이 등장하기보다는 그저 운을 띄우는 수준이어서 비판을 자초한 면도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골방좌파'들은 맨날 맑스의 진의가 어쨌느니 떠들어대지 말고, 이런 것도 좀 공부해야 돼요. 세대 얘기한다고 다 '우파꼴통' 아니죠. 오히려 저는 우파들이 이 '팜플렛'을 읽어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세대론이 전략적으로 괜찮았다고 평가하는 편입니다.



대체 뭐가 전략적인 선택이라는 건가? 위 인용에서 명백히 드러나듯이, 그들은 처음부터 "계급"이 해주지 못하는 "세대"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게 다다. 이 문제에 대해 더 길게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그리고 박권일이 이번 <레디앙> 글에서 스스로 지적한 문제, 즉 정작 <88만원 세대>를 집어들고 공감했던 사람들은 명문대생이었다는 문제(이 문제는 부분적으로는 (1)에서도 이미 제기되었고, (2)에서는 다른 형태로 제기되었다) 등을 놓고 봤을 때, "88만원 세대론"은 더이상 갈곳이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결국 박권일의 <레디앙> 기고글은 바로 그 "88만원 세대론"의 "파산선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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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세대론?



EM님의 [88만원 세대 (2)] 에 관련된 글.
EM님의 [88만원 세대 (3/끝)] 에 관련된 글.




아까 Daum에 갔더니 “298세대론”이라는 것이 뜨고 있더군. 298이란 숫자는 “386 세대”의 386에서 “88만원 세대”의 88을 뺀 것으로, 그리하여 “298 세대”란 사회적으로 많이 논의가 되고 있는 두 세대 사이에 낀 “90년대 초중반 학번”을 가리키는 말인 것 같다. (그런데 왜 386에서 88을 빼지? 나중 것에서 먼저 것을 빼야 하는 것 아닌가? 쩝... 뭐 그렇다 치고.)

링크: 386세대와 88만원 세대 중간의, 298세대를 아시나요?

언젠가 이 곳에서, 명실공히 베스트셀러가 된 <88만원 세대>를 비판하면서 나는, “세대”를 키워드로 해서 세상을 분석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일정한 의의를 가지고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것이 (모든 분석들이 그렇듯) 그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을 수 있는 “문제”란, 바로 그런 세대론들은 생물학적인 연령(대)를 가장 기본적인 기준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일정한 사회적인 특성들(properties)을 세대구분의 기준으로 내세움으로써, 생물학적으로는 해당 세대에 속하지만 그런 특성들에서 배제되는 이들을 필연적으로 낳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만약 “사회적 특성들”이 중요하다면 “세대”라는 호명을 빼야 할 것이며, “세대”에 대해 진정 말하고 싶다면 그 “세대”를 반영할 수 있는 더 좋은 기준을 가져올 일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대부분의 세대론들의 한계는, 그들이 내세우는 기준들이 주관적이고 자의적이라는 데 있다. 예컨대 “298세대는 서태지를 보면서 자랐다”라는 식. 사실 서태지야 볼 수도 있고 안 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으며, 또는 아무런 좋고 싫음의 견해를 갖지 않을 정도로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만약 서태지가 중요하다면(그렇게 생각하니까 “서태지를 보면서 자란 세대”라는 식의 규정도 나오는 거겠지), 그것은 서태지로 요약되는 사회의 물질적 변화가 중요하다는 한에서 그런 것이다. 바로 이런 심층의 힘 내지는 물질적 운동의 추이는, 일개 개인이 의식을 하고 말고 할 것도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배제”라는 문제는 기본적으로 제기되지 않으며, 분석이 집중되어야 할 곳도 사실은 바로 여기다. 서태지라는 현상에 맴돌아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위에서 링크한 글에서도 또한 지극히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몇몇 기준들을 두고서 “298세대”의 문제에 접근하는 것 같다. 위 글은 향후 본격적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프롤로그”에 해당하는데, 흥미롭게도 그 글에서는, 그렇게 자의적으로 규정된 “298세대”를 가장 잘 나타내는 “298세대의 아이콘”을 정해놓고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보겠다고 선언되고 있다. “아이콘”이라! 어쩌면 바로 그 표현이야말로, 자신이 정의한 “298세대”라는 것이 자의적이고 주관적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위 글에 붙은 덧글을을 반드시 볼 필요가 있다. 그 덧글들에 적잖이 나오는 “그 사람은 298세대에 어울리지 않아요”라는 식의 반론(?)들! 나이로 이미 “세대”를 구분해놓고서도 그것으로 모자라, 그 “세대”에 어울리는 건 뭐고 어울리지 않는 것은 또 뭔가. 아예 “세대”라고 하지를 말든가! (차라리 “사회 각계의 영파워 100인” 이런거 어떨까.)

그런데 논의를 잘 지켜보면 재밌는 것, 그러나 매우 위험한 것 하나를 볼 수 있다. 바로 “세대”라는 것이 어느새 “학번”으로 탈바꿈하고 있다는 것. 그렇다. 결국 “298세대”라는 것도 결국은 버젓한 대학 나온 자들의 말잔치에 불과한 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냥 대학도 아니고, “버젓한” 대학을 나왔다는 거다.) 어쩌면 그것도 당연한게... 적어도 한 세대의 “아이콘”쯤 되려면 버젓한 대학쯤은 가볍게 나와주셔야 하니까...(이런 지적에 반박하는 방식이 하나 있다. 대학 안 나오고도 잘나가는 슈퍼맨/원더우먼 한둘쯤 껴넣는 것이다. 바로 <조선일보> 같은 데서 잘 쓰는 눈속임이다.)

대체 왜 이런 “세대론”들은 하나같이 “버젓한 대학나온 자들의 세대론”으로 귀결되고 마는 걸까. “386 세대론”이 맨처음 나왔을 때도 내 불만이 바로 그거였다. 특히나 위에서 제기된 “298 세대”에는 나 자신도 생물학적으로는 속할 것 같은데, 내 기억엔 내가 대학갈 때만 해도 인문계 고등학생의 1/4이상은 “결국” 대학에 가질 못했다. 실업계 학생들은 거의 대학에 가질 않는 것을 생각하면 전체에서 대학에 가는 학생의 비율은 더 작아지며, 위와 같은 세대론들은 이런 무시할 수 없는 수의 사람들을 무참하게 “배제”한다.

하지만 대학에 간다고 끝이 아니다. “버젓한” 대학엘 가야, 위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세대론”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생긴다. 시간이 갈수록 대학 진학률도 높아졌을 것이고, 지금은 나 대학갈 때보다 더 많은 비율이 대학생일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위에서 말한 “배제”의 메커니즘은 더욱 교묘하게 작동한다. 사실 말이 좋아 대학이지, 직업학교나 다름없는 대학들을 나온 이들에겐 캠퍼스의 낭만이니 지성의 전당이니 하는 얘기들은 그저 남얘기에 불과하다. 그들에겐 대체로 4-6년 주기로 짜여 돌아가는 정상적인 “대학”도 남얘기일 뿐이다. 나는 지금 “대학이 직업학교로 전락했다”라는 식의 틀에박힌 한탄을 하는 게 아니라, “대학”이라고 불리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 직업학교인 곳에 다니는 이들 얘길 하는 거다. (나는 결코 그들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다. 과연 누가 이들을 비하하고 있는가? 그들의 사회적 존재의 특수함을 굳이 들춰내는 나인가, 아니면 그들의 특수한 존재를 무시하고 “우리는 모두 ‘학번’으로 묶여~랄랄라”라고 꽃노래를 부르는 이들인가.) 이런 사람들에게, 이를테면 “딴지일보”니 “키노”니 “들뢰즈”니 하는 것들은 죄다 다른 세상의 이야기들일 뿐이다. 어떻게 그런 것들이 “세대”를 대표한다고 그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걸까.

결국 이렇게 보면, “298 세대”라는 범주에 진정으로 묶일 수 있는 사람들의 수는 매우 제한적이다. 위 링크된 글에서 “298세대의 아이콘” 100명을 가려낸다고 했는데, 어쩌면 그들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 글의 취지도 사실은 다른 세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명을 못 받는 세대의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거였는데, 그렇다면 이런 “따뜻한” 취지를 갖는 글에서조차 소외되고 배제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대체 누가 해주나. “아이콘”으로 잠정적으로 뽑힌 사람들을 보니, 그들은 굳이 누가 따로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아도 자기 이야기를 잘 할 수 있는 현실적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다. 하지만 대체로는 그런 수단들을 갖지 못한 사람들, 나와 같은 세대에 속했지만, 대학에 가지 못한 사람들, 대학에 갔지만 “버젓한” 대학엘 못 간 사람들, 그래서 누구도 그들이 (그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 한) 이 사회에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바로 그들의 이야기는 누가 해주나.

그럼에도, 위 링크된 글이 “아이콘”으로 뽑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취지는, 그런 사람들의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통해서 거꾸로 “298 세대”를 조명해보는 것이리라.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1) 이미 “298 세대”를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해놓고, (2) 그에 부합하는 사람들을 뽑은 다음, (3)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미 규정해뒀던 “298 세대”를 조명한다는 것이 말이다. 이런 것을 동어반복이라고 하지 싶다. 사실은 바로 이것이 요새 “사회과학”이라고 불리는 많은 연구들이 취하는 방식인데, 결국 이런 식의 연구들은 처음 예상했던 결론들을 확인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처음보다야 풍부한 얘기가 나올 것이지만, 애초부터 정해진 큰 틀을 벗어나긴 어려울 거고, 내가 위에서 “배제”된다고 한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배제될 것이다.

이와 같은 “세대론”은, 특정한 세대가 공통적으로 경험해왔고 현재도 경험하고 있는, 그리하여 그들 각자의 삶을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이긴 하지만) 규정하는 삶의 물적조건들을 드러내기보다는, 그 세대 중에서도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특정 집단들의 다양한 행태들(이를테면 소비, 사고, 취향, 관심사 등등)을 묘사하는 데서 그칠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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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금융공황에 대해. 좀 더 길게


EM님의 [최근 금융공황에 대한 단상 - 신자유주의의 운명?] 에 관련된 글.

위 글을 요약하면서 내용을 좀 더 추가해봤다.




요즘 범지구적 금융공황을 맞으면서 신자유주의의 운명에 대해 말들이 많은데, 앞의 글은 거기에 초점을 두고 전개해봤다. 많은 이들이 이번 공황을 두고, 신자유주의의 종말이냐 강화냐, 또 만약 종말이라면 그 대신 케인스주의가 부활할 것이냐 하는 물음을 제기한다.

그에 대해 나는 이번 금융공황은 명확하게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사형선고라고 (또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를 케인스주의와 대비시키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먼저 케인스주의를 다시 볼 것을 제안했다. 그에 따르면. 커다란 관점에서 봤을 때, 케인스주의는 특정한 정책들의 단순한 조합이라기 보단 적어도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계속된 경제영역에서 국가의 역할에 대한 별 성과 없는 논란ㅡ오늘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것이 얼마나 무모한 논쟁이었는지를 깨닫는 데는, 당시에 이른바 “야경국가론”이라는 게 꽤 진지한 사람들에 의해 제안되기도 했었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족하다ㅡ에 종지부를 찍는, 말하자면 국가의 불가피성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조직적인) 공공연한 인정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는 거였다. 나는 이런 인식상의 발전은, 특히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더 명확해지듯이, 진정으로 인류사적인 의의를 갖는 것으로, 그리하여 한번 습득하게 되면 쉽게 돌이키거나 물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을 굳이 “케인스주의”라고 부를 까닭도 없다고 했다. 비록 그런 외피를 뒤집어쓰고 나타나긴 했지만.) 이렇게 보면, 20세기 특히 중반부에 서구의 선진국들에서 광범위하게 전개된 사회복지정책과 산업의 국유화 등은 위와 같은 인식을 극단에까지 몰아붙인 것ㅡ그것이 좋으냐 나쁘냐는 논외로 하더라도ㅡ이라고 볼 수 있겠고, 신자유주의는 그런 움직임에 대한 우파의 역공세였다고, 그러나 어떤 “필연적인 것”에 대한 도전이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무모하고 그래서 애초부터 엄청난 희생을 치룰 수밖에 없었던 역공세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케인스주의가 등장한 이래 경제 및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국가의 역할이 (그렇게 큰 저항 없이도) 비약적으로 커질 수 있었던 것은 당대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 한 마디로 동서냉전의 결과이기도 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에 대한 반작용이었던 신자유주의 또한 바로 그 냉전의 산물인 셈인데, 그렇다면 결국 이번 범지구적 금융공황은 바로 그 신자유주의를 끝장냈다는 점에서 “장기 20세기”의 종료선언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 그리고 향후 전개될 사태를 대비하는 것도 바로 이상과 같은 인식 위에서 이뤄질 필요가 있다는 게 내 주장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특히 신자유주의의 운명과 관련해서 쓴 앞의 글에서 나는, 지금으로부터 70-80년 전에 케인스주의에 의해 처음으로 공공연히 표명되었으나 지난 20-30년 사이에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무참하게 짓밟힌 인류사적 인식의 발달을 다시금 공언함과 동시에, 그것을 범지구적 차원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식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곧, 우리가 “경제”라고 부르는 영역, 즉 아담 스미스로부터 헤겔을 거쳐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근대사회의 위대한 과학자들이 하나같이 “사적 개인”의 영역이라고 불렀던 그 “경제”라는 영역에는, 단순히 사적 개인에게만 맡겨둘 수 없는 것들, 공공의 이름으로 관리되거나 보장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물론 마르크스였다면 이런 영역의 존재 자체를 자본주의의 “모순”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근대세계에서 “경제”란 본질적으로 “사적 개인”의 영역이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 경제 영역에서 공적인 것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근대의 모순을 넘어선다는 의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런 주장이 구태의연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 현실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즉 서유럽의 몇몇 선진국들을 빼면, 이른바 후발국들 내지는 저개발국들에서 위에서 말한 “공공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헌신짝처럼 취급되고 있는지를 떠올려보라.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고, 심지어 미국도 그렇다. 어떤 이들은 우리나라나 기타 제3세계에서 오히려 공공성이 훨씬 잘 보존되고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이를테면 이런 사회들에는 토속적인 것이 비교적 강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은 오히려 그런 곳에서 자본주의적 제도ㅡ특히 소유권과 관련된 제도ㅡ가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음을 보여줄 뿐이다. 즉 그런 공공성이란 헤겔식으로 말한다면 “지양되지 않은 공공성”, “직접적 공공성”일 뿐으로, 자본주의가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그런 공공성은 아주 급속하게, 극도로 냉혹한 “개인주의”로 변모할 것이고, 또 그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후발국의 자본주의 발달사에서 목격해온 바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런 제3세계 나라들이 본격적인 자본주의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 또는 (한국처럼) 자본주의화의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했을 바로 그 때, 선진국들 특히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출현했음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사실 돌이켜보면 신자유주의란 국내적인 정책이었다기 보단 대외정책의 성격이 매우 강했다. 어쨌거나 적어도 1980년대 초반부터 세계 최강대국들은 제3세계에 신자유주의적인 형태의 자본주의, 일찍이 그 어디에서도 실제로 실행된 적이 없었던 지나치게 도그마화한 형태의 자본주의, 그래서 단순히 실행 불가능한 형태의 자본주의를 강요해 왔고, 결과적으로 그런 지역들에서는 (대체로 국가가 관리하고 보장해야 할) “공공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제도적으로 발달할 기회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런 요구들이 범사회적 차원에서도 제기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마도 공정하게 평가한다면, 공공성의 제도적 발달이 외부의 압력에 의해 인위적으로 저지되고 지체된 것만큼이나, 그것의 사회적 발달은 (대체로 선진 사회들과의 교류 속에서) 반대로 지나치게 급속하게 이뤄졌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제도발달과 사회적 의식 및 요구의 발달 사이의 부조화는 이른바 자본주의의 후발국들과 제3세계 나라들에서 심각한 사회문제(우리나라의 비정규직 문제처럼)와 함께 엄청난 사회적 갈등을 낳고 있는 실정이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세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런 지역들에서는 여전히 경제에서의 국가의 역할 문제, 즉 이른바 “경제”라는 영역에서 공적으로 확보되고 관리되어야 할 영역의 존재 여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주요한 투쟁의 장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여기서, 이런 지역들에서 그런 역할의 문제가 제기되는 방식이 어떤가를 다시금 강조할 필요가 있다. 즉 아주 놀랍게도, 많은 경우에, 그 역할의 문제는 “정도”에 대해 제기되는 게 아니라 “여부” 자체에 대해 제기된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기에, 오늘날 국가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물론 앞의 글에서도 단서를 달았듯이, 여기서 “국가”란 그저 사회에서 어떤 공적인 것의 (최종적인) 현실의 담지체를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그런 공적인 것을 반드시 국가가, 그것도 아주 투명하게 표현할 것이라고 볼 필요는 없으며(그렇게 한다면 그게 “국가 물신성”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렇게 믿는 무리들을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반대로 특히 위에서 대략적으로 묘사한 것과 같은 상황에 있는 후발국들이나 제3세계에서는 여전히 “국가”라는 이름으로 실행되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는 점도 (뿐만 아니라 선진국들에서도 역시, 그런 의미에서 지난 20여 년 사이에 신자유주의 하에서 이뤄진 엄청난 훼손과 후퇴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점도) 우리는 잊으면 안 된다.

이번 범지구적 금융공황을 통해, 이제껏 내가 해묵은 인류사적 지혜라고 불렀던 것, 즉 경제에서 공적인 것의 존재 또는 국가의 역할에 대한 믿음이 공공연해지는 것의 의의는 바로 위와 같은 배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즉 일부 선진국에서는 그런 지혜가 이미 상당부분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이 지구상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말하자면 많은 나라에서 주요한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장이었으며, 지난 20-30년 사이에는 특히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 앞에서 공공성을 옹호하는 세력들이 수세적인 위치에 있었던 게 사실이다. 따라서 범지구적 금융공황을 통해 결국은 “금융”이라는 현대자본주의의 핵심 중의 핵심이 그 자체로 사실은 공공적인 것이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난 지금, 그리하여 (그동안 금융에는 자율적이고도 자생적인 조화로운 운동양식이 있다고, 그러니 금융은 그냥 놔두라고 줄곧 외쳐왔던) 신자유주의가 극적이고도 필연적인 종말을 고한 지금,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적 공백이 “케인스주의”라는 다소 애매모호한ㅡ그러나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ㅡ이름으로 채워지고 있는 지금, 우리는 그 낡았지만 새로운 “공공성”이라는 가치를 (이를테면 “인권”과 같은) 범지구적, 전인류적 상식으로 격상시킬 호기를 맞았고, 따라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한편 이렇게 이제껏 주요한 이념적 및 실천적 투쟁의 장이었던 것이 상식의 영역으로 옮겨지는 것은, 그와 동시에 새로운 투쟁의 장(들)이 형성될 것을 필연적으로 요구할 것이다. 내가 보기엔, 그중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가 국제적인 영역에서 형성될 것이다. 바로 국제적인 차원에서 범지구적 경제체제의 관리.

앞서 글의 한 덧글에서도 지적했듯이, 사실 이 문제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케인스주의 아래서 성립된 브레튼우즈 체제가 그 가장 대표적인 예이며, 이후 출현한 국제무역기구(WTO)도 비슷한 정신을 구현하고 있다. 문제를 굳이 “경제”라는 것으로 한정짓지 않는다면 그 기원은 더 끌어올려진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런 노력들은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는데, 오늘의 관점에서 봤을 때 그것은 그런 문제가 제기될 만한 여건이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비록 “당위”의 차원에서는 제기될 수 있었지만) 평가할 수 있다. 요컨대, 국제적인 문제를 적극적으로 사고하기엔 각국이 자국 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너무 많았을 뿐만 아니라, 또 국제무대에서 독자적으로 또는 “이기적으로” 행동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았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더해 다양한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범지구적 금융공황을 맞이한 지금, 선진 각국을 중심으로 현재 우리가 속해있는 이 체제는 진정으로 범지구적으로 작동하는 체제라는 점이 공공연하게 인정되고 있다. 이것은 정말이지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다. 이제껏 보수적/반동적 세력들은, 이미 150년 전에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필연적임을 과학적으로 증명해낸 바 있는 위기들이 닥칠 때마다, 대체로 그것을 “체제”의 문제로 보기를 거부해왔다. 대체로 그들은 그런 위기들이, 이를테면 1997-98년의 국제통화금융공황을 맞았을 때도 그랬듯, 자본주의 체제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외부적인 그 무엇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고 (당시엔 예컨대 동아시아의 유교적 특성 때문이라는 식으로) 변명을 둘러대곤 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번 범지구적 금융공황 국면에서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가 “범지구적”으로만 작동하는 체제라는 사실이 대체로 승인되고 있는 분위기 또한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시 1997-98년의 경우를 떠올리면, 당시 좌파들 사이에선 그 문제를 “범지구적 자본주의”의 위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음에 반해, 우파들은 끝끝내 그 문제를 오로지 “동아시아”의 문제로, 또 같은 맥락에서 1996년의 사태는 “러시아”의 문제로, 그리고 1994년의 사태는 “중남미”의 문제로 축소/왜곡해 왔던 것이다. 요컨대, 이번 금융공황에서 특징적인 것은, 그동안 정말로 어처구니없게 부정되어왔던 또 하나의 사실, 즉 현재 우리가 속해있는 체제는 “범지구적 자본주의”이며, 그 안에서 우리가 주기적으로 맞는 위기들은 바로 그 “체제 자체의 문제”임이 은연중에 공언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미세하지만 의미 있는 차이/변화를 감지해내고, 나아가 그것을 발판으로 좀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해 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테면 이번에 선진국들이 특히 중국이나 일본에 대해 그들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걸맞은 역할을 요구하고 있는데, 한편으로 이는 선진국들이 자기들의 책임을 일정하게 회피하려는 수작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의 문제가 “진정으로” 범지구적인 것임을 그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나는 이와 같은 사태의 극적인 전개는, 그 자체로 현대 세계가 도달해있는 일종의 물적 발전의 수준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그 물적 발전이란, 말하자면, 지금으로부터 약 70-80년 전에, 그 전까지는 국가가 굳이 나서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상태가 지속될 수 없게 되었을 때, 즉 사회경제영역에서 국가가 적극적으로 도맡아야 할 일련의 역할들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도달했던 바로 그 물적 발전의 새로운 수준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 당시에 어땠는가. 다시 말하지만, 국가의 역할 인정은,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체제의ㅡ그리하여 자본가들의ㅡ요구이기도 했지만, 단순히 특정한 체제의 문제로만 환원할 수 없는 근본적인 수준에서의 물질적 발전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미 위에서 설명한 대로, 이후 (적어도 서유럽의 선진국들에서는) 국가의 역할은 일정한 범위 안에서 점점 더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과정이 엄청나게 치열한 쟁투의 과정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바로 그 국가의 역할이라는 문제는, 그것이 처음으로 적극적이고 광범위하게 인정된 지 80년이 지난 뒤에도 지구상의 대부분의 곳에서는 “도달해야 할 그 무엇”으로 남아있는 실정이고, 그 사이에 우리는 신자유주의라는 엄청난 반동의 시기를 겪기도 했다.

이와 같은 역사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역사의 문턱 앞에 있는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는 분명하다. 바로 역사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물론 그런 교훈을 배우기 위해 우리는 뭣보다 먼저, 우리가ㅡ이제껏 내가 말했던 바에 따라 표현하자면ㅡ“국가의 역할” 문제를 넘어 “범지구적 경제체제의 국제적 관리”의 문제를 제기하는 방향으로 전진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 전제조건으로서 나는 “국가의 역할”에 대한 부분이 인류의 상식으로 격상되어야 한다고도 말했다.) 이를테면 현재 좌우를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제2의 브레튼우즈 체제”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위와 같은 이해와 깨달음을 바탕으로 이런 문제들을 좀 더 진지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즉 막연한 이상주의적인 상념에 따라 그런 제안에 열광하는 것도(또는 바로 그런 이유로 그것을 거부하는 것도), 반대로 그것이 현실 옹호적인 케인스주의적인 발상이라고 단순하게 거부하는 것도(또는 바로 그런 속셈으로 그것을 지지하는 것도) 결코 바람직한 태도라고 볼 수 없다. 이 대목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항은, 그런 제안들이 이제는 거부할 수 없게 된 현실의 물적 발달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단순한 “깨달음”만으로 많은 것이 이뤄지기도 한다. 특히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뭔가가 내적으로 쌓여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이를 위에선 “물적 조건”의 축적이라고 했다. 이럴 때 하나의 깨달음은, 단 한번의 자극만으로도 그 내적으로 쌓인 것들을 한꺼번에 조직해주고 그로부터 엄청나게 긴 의미의 연쇄를 만들어내 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이 실천으로 보충되지 않는다면 헛될 것임은 물론이다.)



글이 쓸데없이 길어진 것도 같은데, 마무리하면서 두 가지만 다시 강조하겠다. 첫째, 이번 범지구적 금융공황을 통해 명백해진 신자유주의의 패퇴를 명확히 하고(사실은 이것 자체가 하나의 과제다) 이를 사회경제 영역에서 (주로 국가를 통해 제도화되어 온) “공공성”을 범지구적 차원에서 확립하는 계기로 발전시켜야 한다. 둘째, 이런 과정에서 지배계급들에 의해 추진되는 여러 조치들에서조차 현실의 물적 발전의 추이가 필연적으로 드러남을 인식하고 이에 대응하며, 동시에 좌파 나름의 공간을 확보해나갈 필요가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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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금융공황에 대한 단상 - 신자유주의의 운명?



요즘 범지구적 금융위기 와중에 신자유주의의 종말 또는 강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자유주의가 끝나고 이제 새로운 케인스주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사람도 있고, 이번 위기를 통해 신자유주의는 더욱 강력하게 거듭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장차 운명을 논하기에 앞서 그것이 정녕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많은 경우에 신자유주의는 이른바 케인스주의와 대비되곤 하는데, 거기서부터 얘기를 시작하는 것도 좋겠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신자유주의를 케인스주의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것은 지나치게 단순하고도 위험한 성격규정이다. 우리가 흔히 “케인스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사실은 질적으로 상이한 여러 가지 차원들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특정한 차원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케인스주의에 대한 반응이었다고 봐줄 수도 있겠지만, 결코 그것은 오늘날 케인스주의라는 이름으로 요약되는 전체상(像)에 대한 반응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기에 신자유주의는 너무도 취약하다.



그런 차원들 중에서 두 가지가 주요하다. 하나는 정책적인 차원, 다른 하나는 이념적인 차원. 여기서 특히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두 번째인데, 사실 케인스주의라는 것이 처음 나타난 지 70년도 넘은 지금 와서 중요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 케인스주의가 담고 있는 이념적 내용이란 결국 경제영역에서 국가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데 있다. 즉 비로소 케인스주의를 통해, 인류는 [좀 더 정확히는 “서구세계는”] 정부의 역할이나 경제에의 개입 정도에 대한 지난하고도 성과 없는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되었고, 우리는 정부라는 실체를 경제행위의 당당한 주체로 [좀 더 엄밀히는 “경제의 일부로”] 상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강조해둬야 할 것은, 위와 같은 사항이 우리가 “케인스주의”라고 부르는 [구체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정의하든 상관없이] 일련의 이념체계 자체의 내재적인 힘에 의한 결과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일정한 역사적 배경, 즉 우리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정부[또는 국가]를 경제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일련의 역사발달을 사후적으로 추인해주는 매개에 다름 아니었단 얘기다.

바로 이런 까닭에, 흔히 “케인스주의”로 요약되곤 하는 경제영역에서의 국가의 의의에 대한 인식은, 그 자체로 인류의 역사적인 인식의 발전의 표현으로서, 역사가 아무리 요동을 쳐도 쉽게 뒤집어엎거나 되돌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반대로,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런 인류의 발전을 “케인스주의”라고 요약하는 것도 한편으로는 매우 잘못된 일이라 할 것이다.



이에 비하면 “신자유주의”는 한낱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과연 거기에, 위에서 케인스주의가 담아내고 있다고 한 바와 같은 [비록 그것이 케인스주의의 옹호자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의도된 바는 아니라 할지라도] 어떤 인류사적 지혜가 있는가? 몇몇 신자유주의 옹호론자들은 아담 스미스나 기타 19세기 경제학자들을 들먹이며 애써 “시장 대 국가”라는 대립쌍을 강화시킴으로써 자신들이 끼어들 여지를 만들고, 또 나아가 그런 바탕 위에서 “시장”을 옹호하려 했지만, 지금 범지구적 공황이라는 국면에서 명명백백해졌듯이 그런 시도는 앞서 묘사한 것과 같은 인류사적 인식의 발전을 뒤집을 수 없다.

사실 신자유주의는 케인스주의라는 이름으로 표방되는 경제영역에서의 국가 역할 내지는 개입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이는 적어도 1970년대 말 이후 미국이나 영국 등에서 국가가 얼마나 자주, 그리고 유례없는 수준으로 경제영역에 개입해왔는지를 보면 명확해 진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진정한 안식처는 오직 “말”의 영역이었을 따름이다. 최근 장하준 교수는 영국 일간지 <가디언(The Guardian)>에 기고한 글에서, 미국의 신자유주의란 한마디로 “내가 하는 대로 하지 말고, 내가 말하는 대로 해”라는 정책이라고 비꼰 바 있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케인스주의에 반대해서 나타난 것과 같은 겉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련의 사태전개 속에서 이른바 “케인스주의”에 벌어진 “변형”을 고려해야만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이 “변형”이란, 케인스주의가 단순히 국가역할을 인정하는 수준을 넘어 “지나치게 멀리” 나갔음을 가리킨다. 물론 그것은 동서냉전이라는 특수상황, 그 안에서의 체제경쟁, 또 일정부분 그 결과로서 서방진영 내에서의 공산주의 창궐 등을 배경으로 한다. 즉 각종 사회복지의 비약적인 확충, 누진세의 광범위한 도입을 통한 부의 재분배, 엄청난 규모의 산업 국유화 등등의 결과로 경제에서 국가의 비중이 매우 특수한 방식으로 커졌다는 것. 사태의 이와 같은 발달들은 굳이 “케인스주의”라고 불릴 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대체로 나중에] 부당하게도 “케인스주의”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지곤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신자유주의”가 반대한다던 케인스주의란 결국 이렇게 특수하게 변형된 케인스주의, 그 변형의 정도가 너무 심해서 케인스주의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케인스주의, 그리하여 케인스주의라기보다는 사회주의적 정책이라고 불리는 것이 일견 타당한 그 무엇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즉 신자유주의가 반대한 것은 대체로 위에서 간략히 묘사한 것과 같은 국가의 “과잉”이었지 국가 자체가 아니었던 것이며, 그에 대한 반응인 한에서는 신자유주의라는 것도 냉전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겠다.

물론 매우 극단적인 신자유주의론자들 중에는 국가의 역할을 완전히 부정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다. 어쩌면 그런 반응은, 국가의 “과잉”에 대한 비판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으로 국가의 “불필요성”에 대한 옹호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1970년대 특히 서구 선진국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국가의 역할에 대한 엄청난 불신이 쌓였음을 떠올리면, 그런 극단적인 주장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는 어느 정도 명확해 졌듯이, 역사는 국가의 역할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과 같은 극단적인 주장들을 점점 더 주변화했다. 요컨대, 1970년대의 거대한 실패의 충격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감에 따라, 즉 1970년대의 쌔처(Margaret Thatcher)에서 2000년대의 블레어(Tony Blair)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신자유주의는 [적어도 그 언어의 강도 면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말랑말랑해졌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번에 주로 선진국들과 그 주변국들을 휩쓸고 있는 금융공황은, 위와 같은 극단론자들을 포함한 신자유주의라는 매우 역사-특수한 맥락에서만 그 생명력이 유지될 수 있는 말 그대로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형선고에 다름 아니다. 사실 우리는 그와 비슷한 류의 사형선고를 이른바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에서 보았다. 결국 위의 설명을 종합해 본다면, 신자유주의야말로 바로 그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가장 적확한 우파적 대응물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비로소 신자유주의의 몰락을 통해 “장기 20세기”의 진정한 종말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올 것인가. 글쎄 아직은 이에 대해 누구도 명확한 답을 내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내가 보기에, 실제로 그것이 무엇이든, 앞으로 우리가 진입하게 될 새로운 세계에서는, 이미 약 70-80년 전에 케인스주의에 의해 공공연히 선언되었으나 최근 약 20-30년 사이에 신자유주의에 의해 심각하게 위협받았던 인류사적 지혜, 즉 경제영역에서 국가의 의의에 대한 인식이 하나의 상식으로 자리잡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이데올로기에 휘둘려왔던 꼴통들이야 지금 똥인지 된장인지 분간을 못하고 지멋대로 떠들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제관련 최고 수장 두 분(대통령과 장관)을 떠올리면 된다], 이제껏 신자유주의의 “합리적” 옹호자였던 사람들, 즉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또는 글로벌리제이션이라는 이름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에서 벌어진 국가의 “과잉”에 반대했던 합리적인 옹호자들은, 그들이 이제껏 알고는 있었지만 결코 입 밖에 내지는 않았던 진실을 공공연하게 발설하고 있다. 즉 그런 이들의 입에서조차 이제는 “금융시스템은 국가의 일부다”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오고 있으며, 사실 이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어차피 신자유주의는 “말”, 그것도 아주 취약한 체계를 가진 말뿐이었으므로, 그것을 가장하는 것만큼이나 그것을 부정하는 것도 쉽다.]



글을 끝맺기 전에 세 가지를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첫째, 이제껏 계속해서 강조한 인류사적 발달, 즉 경제영역에서 국가의 의의에 대한 인식은 비록 그것이 케인스주의라고 불리는 것은 매우 부당하지만, 한동안은 불가피하게 그렇게 불리게 될 것이다. 이름이야 뭐 아무려면 어떻겠냐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뭐라 불리든 그 핵심을 잊지 않는 것이며, 반대로 그것이 비록 케인스주의라고 불릴지언정 결코 케인스주의는 아니란 사실이다.

둘째, 그 인류사적 발달이란 것이 아무리 거스를 수 없는 것이라 해도, 신자유주의와 같은 새로운 반동적 형태가 출현하지 말란 법도 없다. 계속된 투쟁이 필요한 이유다.

셋째, 비록 이 글에서 “국가”가 강조되었기는 하지만, 그것을 물신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사실 내가 이제껏 국가라고 했던 것은 보편적으로 말해 공동체적인 것 일반에 해당한다. 현실적으로 말해서, 사회의 경제영역에서 국가의 의의를 인정한다는 것은, 경제라는 것이 결코 고립된 개인이 모든 것을 떠맡는 곳이 아님을, 거기엔 공동체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음을, 나아가 개인의 행위라는 것도 사실은 바로 그 공동체성 안에서 진정한 의미를 발휘할 것임을 인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국가를 물신화하지 않는 첫걸음은 국가만이 그런 공동체적인 것을 체현하고 있는 것은 아님을, 그리고 때로는 국가는 공동체성을 오직 기만적으로만 반영함을 잊지 않는 것이다. 어쨌거나 바로 그러한 사항을 인류의 공공연한 상식으로 만드는 것은 현재 범지구적 금융공황의 국면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들 중 하나이며, 또 결국 그것은 상식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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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 (3/끝)




<88만원 세대>를 좀 더 읽어봤다. 솔직히 말해 완전히 다 읽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거의 다 읽었다. 끝을 내지 못한 것은, 변명하자면, 도저히 더 읽기가 어려워서였다. 무개념이 난무하고, 분석이나 과학적 증명 대신 근거없는 억측과 무지막지한 비논리가 판을 치니... 어차피 "토익책을 덮고 짱돌을 들어라"라는 결론을 보기 위해 이 책을 더 읽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든 더 읽은 김에 더 정리해 보련다.



앞의 글에서 이 책의 저자들이 말하는 "경제학적 개념들"이란 것이 사실은 현상에 대한 재진술일 뿐인, 아주 피상적인 "말"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더 나쁜 것은, 그들은 여기에 덧붙여 전통적으로 경제학에서 벼려져 온 (비록 오늘날의 "주류" 경제학에서는 거의 무시당하기는 하지만) 진정한 "개념들"에 대한 무지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그들이 "노동"이라는 개념을 쓰는 방식을 보자.

"학생들이 '공부'라는 이름으로 수행하는 일은 지적 노동이며, 그것도 경쟁이라는 명확한 틀을 가지고 있는 중노동이다." (40쪽)

대체 저자들은 "노동"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더구나 위 구절은 흔히 부르주아 학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아주 천박한 짓거리, 즉 노동을 "이론적으로" 천시하는 짓거리를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 우리가 이론에서든 현실에서든 노동을 굳이 신성시할 필요는 없지만, 위와 같은 몰개념적인 표현이 경제학자, 아니 "경제학 박사"의 손끝에서 나왔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공부"가 "(중)노동"이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그들에게 "임금"이라고 줘야 한단 얘긴가?

"착취"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이 말은 원래 자본주의에서 자본-노동 사이의 임노동관계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즉 자본가에게 고용된 노동자는 자본의 통제 아래 노동을 수행하게 되는데, 노동자가 받는 임금(=가변자본)은 그가 실제로 자본가를 위해 행한 노동량에 훨씬 못미치며 그 차액을 자본가가 가져간다. "착취"는 바로 이런 사정을 표현한다. 이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자들은 요새 젊은 세대가 나이든 세대에 의해 "착취당한다"라는 표현을 심심치 않게 쓰고 있다.

그래, 이해를 못 하는 바도 아니다. 그들은 10대/20대가 나이든 세대들에 의해 뭔가를 "빼앗기고 있다"라는 얘길 하고 싶었을 거다. 그러나 "빼앗기고 있다"라고 하면 될 일을 왜 "착취"라고 하냔 말이다. 내가 지금 말장난을 하는 건 아니다. 이건 매우 중요한 문제다. 위에서 봤듯이 "착취"란 생산의 범주다. 그러나 저자들은 그것을 "분배"의 영역에서 적용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문제가 되는 거다. (그러니까 나는, 단순히 마르크스가 그렇게 썼기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란 얘기다. 이 얘긴 뒤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다.)

그런데 잘 보면 저자들의 무지(또는 "매우 특이한 이해")는 단순히 경제학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사람들은 잘 읽지 않지만, 마르크스는 <자본론> 2권에 영국의 좁은 다락방에 갇힌 채 쭈그리고 앉아 면실을 자아내는 키 작은 소년 소녀들의 모습...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묘사하고 있다. (54쪽)

글쎄... "사람들은 잘 읽지 않지만"이라? 대체 왜 이런 구절을 붙이는 걸까? "사람들은 잘 읽지 않지만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란 뜻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잘 읽지 않기 때문에 자기들도 안 읽어봤다"는 뜻일까? 그러나 불행히도 <자본론> 2권에는 저런 묘사가 없다. 1권에는 있지만 말이다. 이 책 전체의 논지로 봤을 때 "토익책을 덮고 <자본론> 같은 책도 좀 봐라, 자식들아"라는 함의를 가지고 있을 "사람들은 잘 읽지 않지만"이라는 구절이 더더욱 "기만적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이래서다.

너무 지나친 것 아니냐고? 설마.. 오타 아니겠냐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아니, 심지어 나는, 내가 <자본론> 2권에 있다는 저 내용을 기억 못하는 것 아닌가 하면서 자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의 곳곳에는, 실제 저자들이 어땠는지는 몰라도 저것이 "오타"가 아닐 것이라는 심증을 굳게 만드는 예들이 적지 않다.

사회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 '세대'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진행되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물론 루이 알튀세의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와 같은 개념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누가 어떠한 의도로 통제하는지 설명하긴 좀 곤란하다. (32쪽)

어차피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ISA)에 대해 더 설명하거나 논의할 것도 아니라면 사실 저 대목에서 굳이 알튀세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저자들은 했는데, 불행히도 저 짧은 문장은 (때때로 짧은 구절이 핵심을 표현해주기도 한다지만) 저자들의 무지만을 표현할 뿐이며,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마르크스주의를 음해하려는 매우 불순한 의도까지도 읽을 수 있다. (일전에 홍기빈에 대한 글에서 나는, 굳이 마르크스를, 또 알튀세르를 엿먹일 게 아니라면, 잘 알지도 못하는 저런 식의 얘긴 하지 말라고 했었다.) 내가 여기서 ISA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것에 대해 "'누가' 통제한다는 건데?"라고 묻는 것보다 부적절한 것은 없다. 그런데 진짜로 어이없는 것은 따로 있다. 위와 같은 몰이해를 과시한 다음 저자들은, 바로 한 페이지 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난해서 결혼할 수 없고, 그래서 10년 이상을 더 기다려야 하는 우리나라 이팔청춘들의 사랑은 슬프다. 그러나 사랑이 제약받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지금의 청소년들의 삶이 슬픈 것은 아니다. 그들은 상상도 하지 못한 더 큰 음모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33쪽)

대체 "누가 어떠한 의도로" 음모를 꾸민다는 건가? (이 자리에서 논의를 더 자세히 진행시킬 수는 없지만, 내가 굳이 이런 부분을 지적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위와 같은 일관적이지 않은 표현들은,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집단이나 개인들 사이의 상호작용, 말하자면 "사회적 과정" 내지는 "경제과정"에 대한 저자들의 이해가 매우 불명확함을 내비치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다루는 대상에 대한 저자들의 지식이 부족하거나 또는 단순히 틀렸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그 밖에도 많다. 먼저 그들은 "독일 68세대의 이론을 대변했던 사람들은 프랑크푸르트학파라고 부르는데, 주로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강의했던 마르쿠제와 아도르노 같은 교수들이었다"(156쪽)라고 했는데, 프랑크푸르트학파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이 아니라 그 대학의 부설 "사회연구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 둘은 전혀 다른 거다. 더구나 마르쿠제는 사회연구소에 가입한 바로 그 해에 독일을 떠났다.

뿐만 아니라 저자들은 프랑스 68운동을 주도했던 학생들이 아주 딱딱하고 어렵기 짝이없는 싸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가지고 있어야 또래그룹에 낄 수 있었다면서, 이것을 일컬어 "역사의 미스테리"라고 했는데, 내가 알기로는 그런 주제를 다룬 책들이 적지 않다. 더구나 이 책 <88만원 세대>의 성격에 비춰보면,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났는지를 간략하게라도 설명해 주는 것이 중요할 것 같은데, 오히려 저자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숨기기에 급급할 뿐이다. 그것도, "역사의 미스테리"라는 아주 거창하고 우아한 수사를 써가면서 말이다.





"세대" 문제에 관하여


지금까지 나는 <88만원 세대> 곳곳에 드러난 논리적 결함이나 개념에 대한 천박한 이해/구사 등등을 지적했다. 이제는 (사실은 많은 이들의 관심은 여기에 더 있을 것 같은데) 이 책이 분석의 대상이자 단위로 삼고 있는 "세대"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많은 이들이, 특히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에 친화성이 있는) 고전적인 좌파들은 "세대"라는 것에 치를 떠는 경향이 있다. 어떤 이들은 단순히 <88만원 세대>가 "세대"에 기반을 두고 분석을 진행했다는 이유로 이 책을 비난하기까지 한다. (물론 이런 얘길 내놓고 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거다. 그것만으론 논거가 부족하다는 걸 자기들도 알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두고 얼마전 이 블로그에서 댓글을 달았던 어떤 이는 "자기들끼리 수군댄다"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단순히 "세대"를 전면에 내세웠다고 해서 욕먹을 일은 아니다. 이 대목에서 분명히 구별해 둬야할 것이 있다. 즉 "세대"를 어떤 식으로 쓰느냐 하는 건데... 여기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1) 분석의 단위로서의 세대, (2) 분석의 대상으로서의 세대. 이렇게 구분하면 명확해 지듯이, 흔히 "세대론"이 욕먹는 이유, 즉 세대라는 개념으로 전통적인 "계급"을 대체한다는 것은, 세대가 분석의 "단위"로 쓰였을 때다. (물론, 미리 밝혀두지만, 저자들은 이런 식의 구분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것 같다. 책의 어딘가에서 그들은 그저 세대가 계급 같은 것보다 더 나은 단위라는 암시를 줬던 기억은 난다.)

나는, 세대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있지만 주어진 경제를 전체적으로 분석하는 단위로 삼을 수는 결코 없다고 생각한다.



(1) 분석의 단위로서의 세대

세대가 분석의 단위로 적절하지 않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갑갑한 게 있다. 좌파진영에 있는 많은 이들이, 분석단위로서의 세대에 반대하면서도 "왜"라는 질문에 제대로 된 답변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험적으로 봤을 때, 많은 이들이 결국 하는 얘기는, "마르크스가 그랬으니까"다.

하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가 그랬다는 것은 이유가 못 되고, 그가, 아니, 마르크스를 포함한 당대의 이름난 정치경제학자들(여기엔 저자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존 스튜어트 밀도 포함된다)은 물론 이른바 "고전파" 경제학자들(아담 스미스, 데이빗 리카도)이 "왜" 그랬는가, 왜 그들은 세대나 기타 다른 것이 아닌 "계급"을 분석의 단위로 삼았는가가 중요하다.

이에 대한 대답은 "경제"가 무엇인가, "경제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보면 쉽게 할 수 있다. 앞에서 저자들의 "경제(학)"에 대한 이해가 아주 피상적이고 천박하다고 했는데, 그들이 아무런 문제없이 "세대"를 분석단위로 삼을 수 있고 나아가 기존의 계급범주 등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비웃을 수 있는 까닭도 결국은 그들의 독특한 "경제(학)" 이해방식에 있다.

기본적으로 경제학이란 한 사회의 물질적 흐름을 다루는 학문이다. 특히 역사적으로 "정치경제학"이란 근대시민사회(civil society; bürgerlicher Gesellschaft)의 물질적 부의 흐름에 대한 학문으로서 출현했다. 한 사회(=근대시민사회)의 물질적 부(material wealth)란, 맨 먼저 누군가에 의해 생산될 것이며, 일단 생산된 다음에는 시장에서 유통될 것이다. 한편 그 생산에 참여한 주체들은 적절하게 보상을 받을 것인데, 이런 보상은 주로 화폐형태의 소득으로 이뤄지며, 그들은 다시 그 화폐를 가지고 시장에서 소비행위를 한다. 물론 이때 소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애초에 그들이 만든 바로 그 물적 형태의 부일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한 사회의 물질적 부는, 생산-유통(교환)-분배-소비라는 일련의 과정을 계속해서 번갈아 가며 거치는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경제학자들이 당대 자본주의 경제를 위와 같은 네 가지 측면에서 다룬 것도 바로 그래서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밀을 일컬어 가장 인간적인 경제학자라고 칭송했는데, 그들은, 아니 우석훈은 스스로 경제학자라고 생각한다면 밀의 인간적인 면모보다는 그가 왜 세대를 단위로 경제를 분석하지 않았는지를 생각해볼 일이다.) 그렇다면 "계급"이 분석단위로 채용된 것은, 당연하게도 위와 같은 네 가지 (어떤 학자들에겐, 세 가지) 영역에서 상당히 일관된 방식으로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협력하면서 한 사회의 경제적 과정을 굴러가게 만드는 단위로 "계급"이 적절하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 사회의 양대계급인 노동자와 자본가는, 먼저 생산의 영역에서 협력 또는 대립하면서 물질적 부를 상품의 형태로 생산해내며, 분배의 영역(자본가의 이윤, 노동자의 임금)에서도 그들의 이해관계는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들의 소비행태 또한 서로 다른데, 원칙적으로 자본가는 "생산적 소비" 즉 다음기의 생산을 위해 자신들의 이윤을 소비하고 노동자는 "생계적(또는 비생산적) 소비" 즉 자기 자신과 가족들의 생활을 위해 소비한다. 등등.

경제학의 영역에서 전통적으로 계급이라는 범주가 정당화되었던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사정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대"는 어떤가? 당연히 세대는 위와 같은 역할을 못한다. 비록 (앞에서 지적한 대로) 저자들은 "착취"라는 생산의 범주를 세대 간의 문제에 대입하고 있지만, 매우 명백하게도 "세대"란 생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대체 생산의 영역에서, "세대"라는 이름으로 구분된 한 사회의 인간집단들이 어떤 일관된 상호작용을 한단 말인가? 20대와 40대가 어떤 상호작용을 하는가?? 다른 영역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소비"의 영역에서는 "세대"라는 구분이 적절해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세대별로 서로 다른 소비패턴이 존재하는 것 아닌가? 솔직히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쉽게 답할 수 없다. 다만 설령 이 문제에 "그렇다"라고 대답한다고 하더라도, 상황이 저자들에게 호의적으로 변하지는 않는다는 거다. 오히려 정반대다. 저자들은 이 책 곳곳에서 "세대"라는 개념이 그저 (이를테면 상이한 소비패턴을 기준으로 한 시장분할을 위한) 마케팅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비판하는데, 사실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거다.

저자들은 이른바 "386세대"니 "사치세대"니 하는 규정들이 인위적이고 포괄적이지 못하다고 하면서 좀 더 경제학적으로 의미있는 방식으로 세대를 규정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결국 그런 식의 시도는 거듭될수록 안타까움만 자아낼 뿐이다. "세대"는 그저 "세대"일 뿐이다. 거기에 어떤 일관된 경제학적 의미를 집어넣으려 하는 순간 그런 "세대" 규정은 저자들이 경계하는 "마케팅의 도구"로 전락하기가 쉽다. 그러지 않기 위해 저자들은 "억지"도 부린다.

73년에서 80년 사이에 자신의 경제적 삶을 시작한 지금의 40대 후반에서 50대 중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유신 세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 사람들을 일부에서는 '한국경제의 재건세력'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 '건전한 보수'라 부르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중도'라 부르기도 하는데, 어쨌든 현재 한국경제를 일종의 인구 피라미드로 구성한다면 최상위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규정된 유신 세대라고 부르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172쪽)

나는 이 구절을 읽고서 '건전한 보수' 또는 '중도'가 세대에 대한 규정임을 처음 알았다! 세상에 이런 억지가 어디 있나. 그리고 40대 후반에서 50대 중반이 "최상위"에 있다고? "최상위에 있는 사람이 40대 후반에서 50대 중반이다"라고 하면 맞는 얘길지 모르나, 그 역은 결코 참이 아니다. 대체 그럼 "사오정", "오륙도"는 뭔가. 대체 예컨대 "58년 개띠"를 무슨 수로 "경제학적으로" 한데 묶냐는 말이다.

억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KTX 여승무원과 철도공사 이철 사장 사이에서 벌어진 정규직 전환 투쟁"을 "유신 세대와 20대" 사이의 갈등으로 만들어버린다! 뭣보다 사태를 "여승무원 vs 이철 사장"이라고 묘사하는 것도 어이없지만, 저자들 말대로라면 사장이 만약 홍정욱 같은 이로 바뀌면 갈등은 "20대 vs 386세대"가 되는 건가? "성별갈등"이라고 하지 않은 것이 기특할 정도다(차라리 "성별갈등"이라고 보는 게 훨씬 더 그럴싸하지만 말이다).

결국 주어진 (국민)경제의 분석단위로서의 "세대"란 위와 같은 억지 없이는 결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저자들은 "세대"를 분석의 단위로 설정해 놓고도 "세대 간 갈등"과 "세대 내 갈등"이라는 매우 애매모호한 개념을 무분별하게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분석단위로서의 세대"의 타당성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다. (거꾸로 말하면, "세대"라는 구분 자체가 취약하기 짝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온갖 보조적인 수단들이 필요한 것이다.)



(2) 분석의 대상으로서의 세대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다. "세대"란 적어도 분석의 "대상"으로서는 타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 난 짐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또 경제학자들이든 사회학자들이든 특정한 세대, 예컨대 이 책에서 다루는 것처럼 요즘 젊은 세대에 대한 분석을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즘의 젊은 세대를 "분석의 대상"으로 다룬다 했을 때 떠오르는 가장 중요한 과제는 뭣보다 해당 세대를 특정한 방식으로 특징짓는 것일 게다. 저자들에겐 "88만원 세대"라는 규정이 바로 그 최종적인 산물이다. 물론 이런 특징화란 가장 기본적으로 "그 나라의 다른 세대들과는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다른 나라의 같은 세대들과는 어떻게 다른가"를 중심으로 이뤄질 것이다. 한편 저자들에게 또하나 특히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 바로 "세대간 상호작용의 양상"이다. 저자들은 제2부 제1장에서 이런 다양한 작업들을, 그것들을 서로 명확하게 구분하지도 않은 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비록 매우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말이다.

왜 성공적이지 않았단 말인가? 까닭은 그들이 비교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비교의 원칙? 그거 간단하다. 뭔가를 비교할 때는 비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외적 요인들을 최대한 통제해 줘야 한다는 거다. 귀족출신 홍정욱이랑 나같은 가난뱅이의 "능력"을 비교하려면 적어도 우리의 현상태만 볼 게 아니라 그와 내가 처해 했는 상황을 고려해서 그것의 효과를 적절히 통제해줘야 한다는 거다. 그래서 예컨대 우리나라의 "88만원 세대"의 특징을 규명하기 위해 외국과 비교를 하려 한다면, 적어도 시기적으로 "88만원 세대"와 동일한 세대를 비교대상으로 삼아야 하는데, 저자들은 이런 식의 노력은 별로 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그들은 엉뚱하게도 이를테면 "프랑스의 68세대"와 비교를 행한다.

"88만원 세대"와 "프랑스 68세대" 비교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 보자. 원칙적으로 이런 비교는 "88만원 세대"를 다른나라의 경우에 비춰 규정하기엔 매우 부적절하다. 더 적절한 비교 대상은 "오늘날 프랑스의 10대후반~20대초반"인 것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비교를 통해 저자들이 목표로 했던 것은 (그다지 명확하진 않지만) "세대간 상호작용의 양상"을 보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물론 이 경우에도, 더 적절한 것은 "68세대"가 이전세대와 어떻게 상호작용했냐가 아니라, 오늘날의 프랑스 젊은 세대가 그들의 기성세대와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있느냐다.)

그러나 비교대상의 부적절함의 문제는 단순히 "시기"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제2부 제1장에서 영국/독일/프랑스/미국/일본과 같은 외국의 사례, 그리고 유신세대/전두환세대/X세대 등의 한국의 older 세대와 "88만원 세대" 사이의 관계 등을 검토하면서 결국 저자들이 내린 결론은 "88만원 세대는 아주 불쌍하다"라는 것이었다. 왜? 다른 세대들이 가졌던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분석과 결론은 완전 넌센스인데, 책을 잘 읽어보면 저자들이 "88만원 세대"에 비해 운이 좋았다고 평가한 다른 나라의 세대들과 한국의 앞세대들의 "운"(luck)은 그들이 상당히 나이가 든 뒤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런 식의 비교를 통해 내릴 수 있는 논리적 결론이란, "오늘날 한국의 20대는 참 운이 없다"가 아니라 예컨대 "외국의 사례들을 봤을 때, 비록 오늘날 한국의 20대가 처한 상황이 좀 암울해 보이긴 하지만 앞으로 나아질 것이다. 너무 걱정 마라." 정도가 아닐까 싶다. 좀 웃기겠지만 그렇다. 아니, 또 아는가. 한 10년쯤 뒤에 오늘날의 빌빌대는 "88만원 세대"에게 대박이 터질지... 그 때가 되면 저자들이 동정해 마지않는 "88만원 세대"는, 저자들이 동경해 마지않는 유럽의 "68세대"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는 것 아니냔 말이다.

그리고 저자들은 서유럽의 이른바 "68세대"가 무슨 대단한 것이나 되는 듯이 ("역사상 가장 똑똑한 세대")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건 상당부분 신화화된 거고, 또 이른바 "68세대"란 (저자들이 비판하는 마케팅의 개념들과 같이) 그다지 포괄적인 개념이라 할 수도 없다. 그들이 나중에 엄청난 (경제적) 기회를 누렸다는 것보다는, 당대에 그들에 대한 시각이 어떠했는가가 더 중요하다. 68년에는 똑똑한 혁명가만 있었던 게 아니며, 그런 이들이 "절대다수"였다고 보기도 어렵다. (여담인데, 이 대목에서, 당대 영국 젊은이들의 삶과 좌절을 그린 Quadrophenia라는 영화를 저자들에게 권한다.)

(물론 내가 지금 "68세대" 또는 "68혁명"을 폄하하자는 게 아니라는 것은 여기서 길게 변명할 필요는 없을 줄로 안다. 오히려 저자들이 "68세대"와 "68"혁명"을 "신화화"하고 있는데,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런 신화화는 여기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포디즘" 숭배도 아주 걱정스럴 정도다. 전혀 통제가 불가능하다. 다음 구절을 보라.

만약 3세계에도 이러한 풍요를 조금 나눠줄 수 있고 지구 생태계의 위기가 없다면, 포드주의 시스템에 따라 움직이는 세상은 가장 멋진 곳일지도 모른다. (83쪽)

저자들은 여기서 "포디즘"을 미화하고만 있는 게 아니라 포디즘에 대한 무지까지도 드러내고 있다. 세상에, "3세계에도 ... 풍요를 조금 나눠줄 수 있고 지구 생태계의 위기가 없"는 포디즘이 어딨나? 제3세계의 제국주의적 수탈과 환경의 무분별한 파괴는 포드주의적 번영의 가장 중요한 물적기반이었다. 또 일부 자율주의자들이나 '열린 마르크스주의' 논자들이 효과적으로 보여줬듯이 각종 비정규/비표준 노동에 대한 초과착취에 기반을 둔 "백인 남성 노동자들만의 번영 체제"였다. 그게 바로 포디즘의 본질이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흔히 (그리고 저자들이 생각하듯이)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가진 "세대"들, 이를테면 일본의 "단카이 세대", 한국의 "유신세대" 등의 규정들이, 또 더 중요하게는, 그런 세대들이 공유한다고 여겨지는 공통의 특징들이, 사실은 상당부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사후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해봐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과정에서 그와 같은 "세대명칭"들이 갖는다고 여겨지는 공통의 특징들을 수용해내기 위해, 바로 그 "세대" 개념들은 점점 더 그 포괄범위가 줄어드는 경향, 생물학적으로 같은 세대에 속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요컨대 이 책에서 말하는 "88만원 세대"란 "경제학적으로 봤을 때" 매우 성급한, 진지함이 결여된, 인상에 기반을 둔 규정이다. "성급함"에 대해 우스갯소리 하나. 192쪽에 보면, 저자들은 40-50대와는 달리 오늘날 20대는 "아는 사람[친구]이 운영하는 카페보다 스타벅스를 더 선호하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한다. 내가 보기엔 이런 규정은 매우 성급한 것인데, 까닭은, 아직 우리 20대들에겐 아는 사람 또는 친구가 운영하는 카페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내가 보기엔 저자들의 바람과는 반대로 그들의 "세대" 개념은, "마케팅 개념"으로는 아주 적절하다. (그리고 실제 그렇게 되고 있다.)




이제 글을 끝내야겠다. <88만원 세대>에 대해서도 이제 그만 써야겠다. 비록 지금까지 거의 "까대기"로 일관했지만, 맨앞에서 밝힌대로 나는 이 책이 행한 것과 같은 시도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말이지 저자들은 누구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을 했다. 그러나 정말이지 나는 이런 시도가 "경제학적이지 않게" 이뤄졌었다면 훨씬 더 나았을 거라 생각한다. 이 책에 난무하는 "경제학적으로 봤을 때...", "시스템적으로 고려하면...", "진화경제학에서는..." 등의 어법은 내게 거북함만 줬다. 대체 "경제학"은, "시스템적 고려"는, "진화경제학"은 어딨냐고! -- 그래서 이 책은 "경제학 입문서"가 되기에도 (비록 그런 형태를 취하고는 있지만) 매우 부족하다고 판단내리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위와 같은 거창한 수사들은 기존의 우석훈의 글에서 많이 봤던 거다. 그래서 그다지 낯설지만은 않았다. 이렇게 어깨에 힘 잔뜩 들어간 경제학적이고 시스템학적인 글 말고, 이 책만큼 오늘날 젊은이들의 처지에 sympathetic하면서도 이 책보다는 좀 더 modest(이 말은 우리말로 번역할 때 꽤 난감하다)하고 realist한 글을 기대하며 잡다한 글을 마친다.



(본문에서는 미처 지적하지 못했는데, 우석훈의 글은 논리적인 증명이나 실증적인 논거보다는 "인상"에 많이 기대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준다. 이 책에서도 그랬다. 다음 예를 보자.

정치적으로는 89년 입학생까지를 잘라서 386으로 구분하지만, 경제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90년대 초반에서 중반 입학생까지를 동일한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정치적 구호로 본다면 대체로 90년대 초반 근처에서 차이가 나게 되지만, 경제적 패턴으로 본다면 전두환 대통령의 과외 금지 효과가 더 강한 것 같다. (176쪽)

어떤 사람들은 위와 같은 언필칭 "분석"을 두고 그가 "기지가 넘친다"라는 식으로 칭찬할 수는 있겠지만(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러고 있는 줄로 안다), 그가 스스로 자임하듯이 만약 그가 진지한 "경제학자"라면 자신의 넘치는 기지와 통찰력을 그저 "말"의 형태로 "선언적으로"만 제시할 게 아니라, 논리적으로 또는 실증적으로 보이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부록 - "첫 섹스의 경제학"에 대한 메모>


저자들은 "첫 섹스"와 "오늘날 한국의 10대"와 "그들의 경제적 상황" 사이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내린 바 있다. "한국 10대의 첫 섹스가 늦는 것은 그들이 돈이 없어서다"라고. 당장 떠오르는 게 이거다. 저자들의 이 주장에 따라 단순하게 생각하면, 섹스와 동거를 하는 10대는 부자여야 한다. 그러나 저자들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적어도 내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해서 알기로는, 굳이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일찍 섹스도 하고 동거도 하는 애들은 대체로 별볼일 없이 사는 애들이라는 거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려보라. 오히려 집도 좀 살고 공부도 좀 하는 애들은 그런거 못한다. 가난해서 공부에도 별 관심 없고, 집에서도 별로 신경 안쓰는 애들은 자기들끼리 어울리며 섹스도 하고 가출도 하고 동거도 한다. 뽄드도 빨고 더러는 마약에도 손댄다. 얘들이 돈이 많아서 섹스/동거를 하나? 또... 돈이 많든 적든, 얘들이 경제적으로 부모로부터 독립을 해서 섹스/동거를 하는 건가?

뭐 요새는 외국으로 유학가는 애들이 무지하게 많이 늘어났고 또 그들은 대체로 성적으로 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생활한 테니, 그리고 또 이들은 대개 부유층에 속할 테니, 돈많은 애들이 섹스를 일찍 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뭔가? 결국 저자들 말대로 하고싶어 안달이 난 섹스도 못하고 빌빌대는 애들은 그만그만하게 살고 그만그만하게 공부도 하고 그만그만한 부모의 통제도 받는, 그만그만한 애들 뿐인가? 이들이 아무리 다수라 해도, 적지 않은 예외를 감당하기에는 "10대는 돈이 없어 섹스를 못한다"라는 저자들의 명제는 너무도 취약해 보인다. 그리고 요새는, 내가 알기로는, 적지 않은 10대들이 연애경험이 있다. 그런 그들에겐, 동거까지는 몰라도 "섹스"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만큼의 "경제력"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결국 저자들이 내놓는 "첫 섹스의 경제학"은 그리 성공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거다.

누군가는 내게 "그럼 한국 10대의 첫 섹스가 늦은 까닭은 뭐냐?"라고 물을 수 있다. 기본적으로 내 대답은 (첫번째 글의 댓글에서 했듯이) "별로 그에 대해 생각해본 바가 없다"지만, 나는 아무 데나 경제학을 들이대지는 것은 그다지 좋은 태도는 아니라고 덧붙이고 싶다. 다시 말하지만, "저자들이 말하는 경제학"에 입각하더라도, 내가 보기엔 "첫 섹스의 경제학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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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 (2)



앞에 쓴 글은 정말 중구난방이었던 것 같다. 정리가 안 됐단 얘기다. 더 길게 쓰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책을 좀 더 읽어보고서 써야 하는데... 너무 경솔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하지만 이미 몇 분께서 내 글에 반응을 해주시기도 했으니, 하려던 얘기를 좀 더 명확하게 해둬야 겠다.

미리 명확히 해두자면, 앞으로 내가 하는 이야기들은 이 책의 제1부 제1장만을 대상으로 한다. 뭐.. 다 읽지도 않고 뭐 이리 말이 많냐고 욕할 사람도 있겠는데... 암튼 위에서 밝힌대로 이 글은, 앞서 불충분하게 내뱉어놓은 말을 수습하는 성격의 글이다. ^^;



"명확하게 한다"고는 했지만, 사실 앞에 쓴 글에서 하고자 하는 얘기는 대충 다 했다. 거기서 나의 가장 주된 주장은, <88만원 세대>가 특정한 사회문제를 경제학적으로 풀어낸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회현상을 통해 복잡한 경제학적 개념을 설명하는 책처럼 보인다는 거였다. 이 얘기는 달리 말하면, 만약 저자들이 이 책을 "경제학 입문서"로 쓴 것이 아니라면, 그래서 이 책에 난무하는 경제학에서 쓰이는 용어들이 이 책에 반드시 필요한 게 아니라면, 이 책에서 (적어도 내가 지금 대상으로 삼고 있는 제1부 제1장에서만큼은) "경제학"은 그냥 빠져도 크게 상관이 없단 거다.

저자들은 "경제학의 언어를 사용한 설명"과 "일상의 언어를 사용한 설명"을 종종 대비시키곤 한다. 만약 누구나 다 아는 얘기를 "굳이" 경제학적으로 설명했다면, 거기에 어떤 "이득"이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경제학적 설명은 그저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는데, 내가 지금 대상으로 삼고 있는 <88만원 세대>의 제1부 제1장에만 해도 그런 예가 한둘이 아니다. 예를 들어 저자들은 29쪽에서 "첫 섹스"와 관련, "몇 살에, 어떤 식으로 그리고 누구와 첫 번째 섹스를 하는 것이 가장 '최적'인가"라는 질문을 한 다음 그에 몇 가지 답을 "경제학이라는 틀 내에서" 내놓는다. 그러고 나서 그런 모든 설명을 "'끼리끼리 만난다'는 것을 복잡하게 설명"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경우 과연 한 단락에 걸친 "경제학적 설명"이 주어진 현상 또는 행위를 설명하는 데 무슨 이득을 더 주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내가 보기엔 그냥 "끼리끼리 만난다"라고 하면 될 것을 저자들은 "굳이" 경제학적 용어들을 가지고 풀어내려고 하는 것인데, 바로 이래서 나는 이 책을 "경제학 입문서"라고 하는 거다. (그나마 그들이 내놓는 "경제학적 설명"도--상당히 요약되어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내가 보기엔 그다지 정확하지 않다.)

말이 나왔으니 이 부분에 대해 더 이야기를 덧붙여보겠다. 내가 보기에 이 부분은 글의 전개상 제1부 제1장의 제1절("첫 섹스는 왜 슬픈걸까")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저자들은 "첫 섹스"의 문제를 "경제학적으로" 풀어나가려 하는데, 바로 29쪽의 이 구절이 "첫 섹스"를 본격적으로 경제학적으로 다루는 첫 대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부분은, 전체 논지 즉 "한국의 10대는 돈이 없어서 첫 섹스가 늦다"라는 것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대체로 이 책에서 "첫 섹스"에 대해 문제삼는 것은 그 "시기"인데, 이 대목에서 내놓는 "경제학적 설명"이란 자세히 보면 "대상"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저자들은 이렇게 전체 논지와도 맞지 않는 엉뚱한 답변을 내놓고는 그들 스스로 그 "경제학적 설명"을 폐기한다. 그렇다면 이 책의 목적에 맞게 "더 그럴싸한 경제학적 설명"이 그것을 대체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들은 "경제학적 설명" 대신 엉뚱하게도 "역사적 설명"을 취한다.

29쪽 얘기는 이제 그만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하지만 "이 책에서 경제학이 불필요하다" 또는 "만약 이 책에 경제학을 끝내 남겨둬야겠다면 이 책은 경제학 입문서라고 부르는 편이 낫다"라는 내 의견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하나 더 들어보겠다.

물론 지금 고등학교 1학년이나 2학년 소년 또는 소녀가 섹스를 즐기겠다고 공공연히 선언했다가는 집에서 '난리'가 날 것이다. 이게 알려진다면 사회적으로도 큰 물의를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수요와 공급 그리고 '선호도'라고 부르는 선호함수만으로 놓고 보면 문제가 될 것은 없다. 16세 이상의 '성인'들에게 섹스를 제도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것은 긴 인류의 역사로 보면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 상황을 표준경제학적으로 설명한다면 '예산제약'이라는 용어가 필요하다. 청소년들이 원하는 것은 섹스 혹은 결혼생활인데,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예산'이 없기 때문에 섹스도 참고, 결혼도 뒤로 미루어야 하는 것이다. 좀 복잡하지만 이것을 우리 식으로 쉽게 말하자면, 그냥 "돈이 없기 때문"에 참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나이에 성적 충동이 없고,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어서 같이 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면 경제학의 연구 대상이라기보다는 심리학의 연구 대상에 더 가깝다. (30-1쪽)

위 단락을 잘 보자. 저자들은 여기서, "이 상황을 표준경제학적으로 설명한다면"이라고 함으로써 앞으로 뭔가 그럴싸한 "경제학적 설명"을 내세울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예산(제약)", "선호도/선호함수"라는 경제학 "용어들"만 나열한 게 다다. "설명"은 없다. 나아가 이번에도 또 우리의 일상언어를 빌려 "그냥 '돈이 없기 때문'"이라는 우리에게 매우 잘 와닿는 "설명"으로 앞서 자기들이 말하는 "경제학적 설명"을 무화시켜버리고 마는 것이다! (혹시 이 단락 뒤에 좀 더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겠는데, 그런 건 결코 없다.) 암튼 그래서, 위 단락에서 우리가 실질적으로 얻을 수 있는 지식이란, "음, 경제학에서는 그냥 '돈이 없다'라고 하면 될 것을 '예산이 없다'라고 하는군"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이 "경제학 입문서"라고 하는 거다. (앞에 쓴 글에 있는 [예 2]에 대해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며, 이런 예는 이 둘만이 아니다.)

그래도 그냥 지나가기 아쉬우니까 예를 하나만 더 들겠다.

사실 이런 새로운 종류의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우리 사회가 부딪힌 건 이번이 처음이다. 기성세대 대부분은 이 문제가 성장률이 낮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또 일부에서는 양극화 문제라고도 하는데, 단순히 양극화라 하기엔 문제가 너무 복잡하고 다면적이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종류의 문제를,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질에 관한 문제'라고 하고, '크기'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구조'에 관한 문제라고 표현한다. 조금 더 최신 경제학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스템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또, 규모가 커지더라도 그에 비례하는 좋은 변화가 같이 발생하지 않으므로 '비선형적 문제'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학문은 원래 현실보다 한 걸음 늦는 법이어서 그런지, 우리나라 경제학계 내부에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 (64-5쪽)

여기서 저자들은 자기들이 말하는 "문제"를 경제학, 나아가 "최신" 경제학적으로 풀어낼 것 처럼 말한다. 그러나 정작 "설명"은 볼 수 없다. 여기서도 그들은 그저 "용어"만을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아하~ 그런 현상을 '최신' 경제학에서는 '시스템에 관한 문제'라 하는군!"



자, 지금까지가 내가 앞의 글에서 주장한 내용을 다시 쓴 거다. 하지만 위에서 든 예들이나 그 밖에 다른 구절들을 보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 책에 대해 나온 많은 찬사와 비판들이 주로 이 책의 "내용"과 관련된 것인줄로 안다. 하지만 사람은 보통 자기입장에서 책을 보기 마련. 초보 경제학 연구자로서 나는 이 책의 저자들이 경제학을 바라보는 방식, 또 바로 그 경제학을 사회현상과 연결키시는 방식, 끝으로 그런 과정에서 그들이 채용하는 논리전개의 방식 등에 관심이 많았다. 따라서 그런 사항들을 중심으로 좀 더 이야기해 보겠다.

맨먼저 저자들이 경제학을 바라보는 방식. 내가 보기에 그들은, 인간의 사회적 삶의 물신화된 하나의 영역, 즉 흔히 "돈"에 관련된 것으로 일컬어지는 영역을 "경제"라고 이해하고 그것을 다루는 학문을 "경제학"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보면 말이다.

(1) 오늘의 청소년들이 지난 3천여 년 동안 또래의 집단이 누렸던 자유를 가지고 있지 못한 이유가 윤리나 규범의 억압 때문이라면, 경제학이 관심을 가질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돈이 없다는 이유로 권리가 통제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경제학의 대상이다. (32쪽)
(2) 물론 그 나이에 성적 충동이 없고,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어서 같이 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면 경제학의 연구 대상이라기보다는 심리학의 연구 대상에 더 가깝다. (31쪽)
(3) 사회학, 문화인류학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겠지만, 경제학자로서 나는 돈 얘기로 이를 풀어갈 수밖에 없다. (44쪽)

사실 경제(학)를 위와 같이 이해하는 것, 사회(학), 정치(학), 문화(학) 등과는 구별되는 하나의 영역, 좀 더 구체적으로는 "돈"에 관련된 영역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좌파들에겐 경계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이명박이 "나는 경제 대통령, 경제는 내게 맡겨라"라고 말할 때, "아니다, 당신의 '경제' 이해는 틀렸다. 경제는 그게 다가 아니다"라고 반박할 줄 알아야 한다.

경제란 단순히 "돈"에 관련된 문제도 아니지만, 사회/정치/문화 등의 "영역들"과 구분되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어떤 문제는 "정치"의 문제, 또 다른 어떤 문제는 "경제"의 문제 등등인 게 아니란 얘기다. 오히려 주류, 비주류를 막론하고 전통적으로 경제학은 흔히 경제학의 대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문제나 인간의 행위에 담긴 "경제(학)적 의의" 내지는 "경제적 동기"를 캐내는 데 많은 노력을 들여왔다. 그런 과정에서 얻은 게 있다면, 비록 그런 "경제적 설명"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흔히 윤리니 법률이니 하는 것과 같이 그저 "말"에 지나지 않는 것의 근저에 깔린 "물적 이해관계(material interests)"에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주어진 현상에 대한 왜곡된 이해만을 반영하는 한낱 "말"이 아니라 "물적 이해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저자들이 (1)에서 그러듯이 그저 무턱대고 "이 문제는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의 문제야"라고 할 게 아니라, 그 문제가 경제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윤리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바로 그 "윤리적 문제"의 근저에 깔린 "물적 이해관계"를 밝혀내는 데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사실 내가 앞에서 저자들의 주장 즉 "한국 10대는 돈이 없어서 섹스도 동거도 못 한다"라는 주장이 "경제결정론"이라고 한 것도 바로 거기엔 위와 같은 사려깊은 이해(understanding)가 없기 때문이다. (경제결정론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런 비판이 지금까지 대개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가해졌던 데 반해, 내가 보기엔 가장 악질적인 경제결정론자들은 저자들이 꽤 호의적으로 인용하기도 한 Gary Becker 같은 주류경제학자 무리들이다. 그는 개인이 자식을 몇 명 낳을까와 같은 문제를 결정할 때 '경제적 동기'가 중요하다고 했는데, 과연 그게 말이 되냐 이말이다. 내가 보기엔 저자들이 말하는 경제학 또는 경제적 설명이란 그런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3)에 대해선 따로 덧붙일 게 없지만 (2)에 대해선 조금 더. 저자들은 그들이 "이런 경우"라고 일컫는 것을 매우 예외적인 현상으로 보는 모양인데, 내 생각은 다르다. 물론 그들의 말대로 그게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라면 심리학의 사례연구(case study)감일 게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적어도 대한민국에 이성과 동거를 갈구하는 10대는 별로 없다. 왜 그런가? 바로 그것을 밝혀내는 게 중요한 것인데, 저자들은 오히려 "대한민국 10대는 대부분 동거를 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못한다"라는 무지막지한 전제를 깔고 있다. 어쨌든 이런 문제는 분명 심리학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저자들이 말한 대로 인간 개개인에 대한 사례연구로서의 심리학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병리적 현상에 관심이 있는 사회심리학의 대상에 더 가깝다. 그러나 그게 끝은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저자들은 이런 현상들을 경제학의 대상이 아니라고 내팽개쳐버릴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사회적 병리현상의 근저에 깔린 물적 이해관계를 밝혀내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내가 보기엔 그게 바로 경제학이 진정 개입해야 할 지점이다.



경제 및 경제학에 대한 위와 같은 이해, 즉 마르크스라면 분명 "피상적인 이해"라고 불렀을 위와 같은 이해에 기반을 두고 저자들은 논의를 펼치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학의 여러 복잡한 용어들을 가지고 그들이 관심있는 현상을 설명하려 할 때에도, 필연적으로 문제가 노출된다. 이 대목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인 점은, 저자들이 여러 용어들을 사용하는 방식이 매우 "동어반복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미 위에서도 일부 살펴봤다. 그들이 내세우는 경제학적 용어들은 분석/설명에 채용됨으로써 뭔가 새로운 것을 덧붙이기보다는 그저 누구나 다 아는 것을 "재서술"할 뿐이다. 그러니까 이건 가장 단순한 수준의 동어반복이다. 하지만 강조하건대, 이건 단순히 저자들만의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들이 쓰는 언필칭 "개념들", 그들이 옹호하는 이른바 "경제학" 자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석훈이 쓴 서문의 일부인 다음 인용문을 보자.

... 하지만 이런 세대 간 불균형이 문화적 성찰 혹은 철학적 사유 없이 시장에서의 거래자 관계로만 환치될 때 세상은 순식간에 전쟁터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세대 간 불균형은 20대들의 힘만으로는 절대 균형을 회복하지 못한다. 유일한 가능성은 그들이 "더 이상 승자 독식 게임을 하지 않겠다"고 윗세대에 대항해 집단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이지만, 죄수의 딜레마라는 게임 법칙에 걸려 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는 불균형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다. (22쪽)

언뜻 보면 저 밑줄 친 부분이 말이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인과관계의 외형을 취하고 있지만, 그것도 아니다. 일단 저 진술은 거꾸로 되어야 한다. 즉 "죄수의 딜레마에 걸려 있어서 불균형에서 못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불균형에서 헤어나올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죄수의 딜레마에 걸려 있다"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 때문에"로 연결되어 있다고 해서 다 같은 인과관계가 아니란 거다. 내가 보기에 저 진술은 인과관계가 아니라, "죄수의 딜레마"의 정의(definition)를 재진술한 거다. 즉 "...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는 것을 '죄수의 딜레마'라 한다"라는 진술을, 인과관계의 외형을 입혀 재진술한 것, 즉 동어반복이란 얘기다. ("못 빠져나온다"라는 "현상"에 대해 "걘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서 그래"라는 설명은 아무런 정보도 추가하지 못한다. "왜 죄수의 딜레마에 빠졌는가"가 중요한 거다.)

얘기가 좀 복잡하니 다른 방식으로 풀어보자. 일단 여기엔 "죄수의 딜레마"라는 경제학의 용어가 등장한다. 사실 "죄수의 딜레마"란 어떤 현상에 대한 진술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엔 어떠한 "심오함"도 없다. 그것은 그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어떤 상황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상황을 보고 "너는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있는 거야"라고 하는 것은, 비록 그 상황을 (적어도 "죄수의 딜레마"가 뭔지 알고 있는 청자에게는) 한마디로 요약해주는 기능은 갖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위 인용구절에서, 오늘날의 20대들이 "그들 스스로는 불균형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는 까닭은, 그들이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죄수의 딜레마에 빠지게 만든 바로 그 원인들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이,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경제학 개념들, 즉 그 자체로는 그저 현상에 대한 재진술(즉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이면서 마치 그것이 그 현상과 관계된 모든 진실을 담고 있다는 듯이 그런 개념들을 이해하는 것을, 마르크스는 경제학적 범주에 대한 물신주의적 이해라고 불렀다.

(동어반복 얘기가 나온 김에 재밌는 것 하나 더. 27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엥겔스는 폴리가미라 부르는 난혼 시절에서 어떻게 모노가미라고 불리는 일부일처제가 등장하게 되었는가...를 규명하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요 밑줄 친 부분은 그러니까 이런 거다. "labour라 부르는 노동", "cat이라 불리는 고양이".)



얘기를 이제 대충 정리할 때가 된 것 같다. 이제까지의 이야기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1) 적어도 <88만원 세대>의 제1부 제1장에서만 말하면, 저자들은 그들이 처음에 "경제학"을 채용함으로써 의도했음 직한 목표를 제대로 달성하지 못한 것 같다. (2) 저자들이 이해하는 경제(학) 및 경제학의 개념들은 실제 현실의 경제에 대한 피상적이고 물신화된 이해를 반영할 뿐이다. (이 말이 반드시 저자들의 이해 자체가 피상적이란 뜻은 아니다. 이는 그들의 개념구사에 대한 판단이다.) 이상의 두 가지가 전혀 별개의 문제가 아님은 이상의 논의에서 어느 정도 분명해졌으리라 생각한다.

특히 후자와 관련해서, 경제학적 범주들, 개념들의 피상성이라는 문제는, 결국 그것들이 "설명의 도구"로 쓰일 수 있을 만큼 저자들에 의해 충분하게 "개념화"되지 못했다는 것으로 수렴될 수도 있다. 위의 글을 잘 보면, 나는 의도적으로 "개념" 대신 "용어"라는 말을 썼는데, 그게 바로 이래서다. 이렇게 그저 별다른 의미없는 동어반복적 "용어들"은 이 책의 곳곳을 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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