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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천 심지

[부활: 2011년 8월 5일]

 

이 글은 내가 써놓고도 가장 뿌듯하고 감격스러웠던 글이다. 하지만 이게 결코 "자뻑 멘트"는 아니다. 아래 덧글로 달린 반응들을 보면,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드러날 것이다. (근데 이렇게 글을 다시 꺼내놓고 보니, 여기 덧글달고 트랙백 달았던 분들은 지금 뭐하나 궁금하네...)

 


 

 

[원글: 2008년 3월 9일]

 

 

고등학교 다닐때, 흔히 말하는 "진로"와 상관없이 나의 꿈은 동인천 심지의 비디오자키(VJ)가 되는 거였다.

동인천 심지가 뭐냐 하면... 1990년대 초반쯤에 인천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많이들 알 텐데... "심지"는 동인천에 있는 음악감상실이다. 나중에 서울에 있는 (주로 신촌과 대학로) 몇몇 음악감상실에도 가본 결과, 심지는 음반보유면에서 가히 "최고"였을 뿐만 아니라, 생김새도 다른 곳들과는 매우 달랐다. 다른 데는 대체로 카페처럼 생겨서 기본적으로 테이블이 있고 거기에 앉아서 스크린을 보는 체제인 데 반해, 심지는 그야말로 극장처럼 생겨서, 마치 영화를 보듯이 뮤직비디오를 보게 생겼던 것이다.

(VJ가 하는 일은, 쪽지로 신청곡을 받아서, 그게 좀 쌓이면, <핫뮤직>이나 테이프 속지 같은 데서 읽은 잡다한 지식들을 섞어서 약간의 멘트와 함께 음악을 틀어주는 거다. 그게 어찌나 좋아보였던지... ㅋ)



오늘. 갑자기 바로 그 "심지"가 생각난다.

뭐, 그렇다. 황당하게도, 고등학교때의 내 꿈은, 뜻하지 않은 복병 "재수"(-_-)를 만나 결국 실현되지 못했고, 난 서울로 대학을 왔다. 물론 그래도 종종 그곳에 놀러가긴 했는데, 언젠가 오랜만에 찾아갔을 때, 심지는 문을 닫고 사라졌다. 그날 난 조금 울었던 것 같다.

심지. 그곳은 그냥 음악만 듣는 곳이 아니다. 이미 말했듯, 그곳에선 음악만이 아니라 뮤직비디오가 함께 나온다. 난 정말이지, 지금도, 그때 그곳엘 갈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아랫층엔 일반 팝음악, 윗층엔 메탈/록음악... 물론 나는 늘 윗층에만 갔고, 올라가는 도중 아랫층을 기웃거리는 녀석들에게 하찮다는 듯이 썩소를 한번씩 날려주곤 했던 것이다. (그땐 뭐.. 그랬다. ㅎㅎ)

그렇다고 심지에서 뮤직비디오만 보는 것도 아니다. 거긴 말하자면 일종의 갈곳없는 청소년들의 집합소 같은 데였다. 지금은 어떤가 모르겠다만 당시 인천은 나름 헤비메탈/록음악의 메카 같은 곳이었고, 비공식적이긴 했지만 "전국 최고의 음악감상실" 심지는 우리에게 그런 자부심을 더해주는 곳이기도 했다. 암튼 그곳은, 바로 그런 음악도시 인천에 사는, 그 중에서도 나름 음악좀 듣는다는 메탈키드들의 집합소 같은 곳이었단 말씀.

물론 누구나 예상할 수 있겠지만, "심지"는 연애하는 학생들의 천국이기도 했다. 그때는 연애를 하면 갈 곳이 별로 없었다. 어쩔땐 갈데가 없어서 시립도서관 같은 데를 가기도 했다. 커피숍 같은 데서 쫓겨나는 일은 예사였고, 지금처럼 비디오방(-_-)도 없었다. 하지만 "심지"만은 그 너른 품으로 모두를 감싸줬던 것이다. 일요일 같은 때는, 아침에 문열자 마자 들어가서 하루종일 앉아있으면서 잠도자고 중간에 친구도 만나고 또 컵라면도 해먹고... 이러다가 저녁나절에 여자친구가 오면 같이 오무라이스(-_-) 먹고... 뭐 그랬다.

음악에 미친 아이들끼리 여기서 자웅을 겨루는 하나의 방식은, "신청곡 많이 선정되기"다. ㅋ 물론 신청곡을 많이 넣는다고 해서 많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날그날의 분위기, 특히 VJ의 심중을 잘 살피는 것이 기본이며, 뭣보다 남들이 다 신청하는 노래는 금물이다. 왜? 그런 노래들은 얼마전에 나왔을 확률이 높으니까 퇴짜맞기 십상이다. 따라서 뭔가 남들이 신청 안했을 것 같지만 들으면 무지 좋아할 것 같은 노래를 신청해 주는 것! 여기에 덧붙여 VJ도 모를 것 같은, 그래서 궁금해서라도 한번 틀어줄 것 같은 "필살기" 하나쯤을 준비해 놓는 것도 필수.

하여튼 바로 그렇게, 나는 내가 좋아하는 거의 모든 곡들을 당시로서는 매우 보기 어려웠던 뮤직비디오로 감상하곤 했다는 얘기다. 좋아하는 곡을 영상으로 보는 것도 좋았고, 모르던 곡을 영상으로 본 뒤 맘에 드는 것을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찾아듣는 것도 좋았다. 그렇게 테이프는 쌓여갔고 그걸 바라보는 엄마의 눈초리는 날카로워져만 갔다.



그런데 사실은, 오늘 "심지"만 생각난 게 아니라, 그때 때로는 내가 듣고 싶어서, 또 때로는 아무리 듣기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어서... 결국 무지무지 자주 듣게 된 X가 난데없이 생각난 것이다. 내가 X의 노래 중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은 Endless Rain이고 제일 좋아하는 것은 Weekend다.

Endless Rain을 싫어한 이유는 간단하다. 심지에서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신청을 해서 거의 한시간에 한번꼴로 나오니... 죽돌이인 나로서는 싫을 수밖에. 반면 Weekend는 사람들이 별로 모르는 곡이기도 했고, 또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특히 스튜디오 버전의 곡 끝부분에 나오는 코러스 부분은 언제들어도 흥분(!)된다.

뭐 암튼 그래서... YouTube에 가서 X의 노래를 몇 곡 들었다, 반복해서.



그런데, 그렇게 듣고 있으려니, 눈물이 났다.

노래서 슬퍼서는 아니고...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그랬던 것 같다. 어린시절(?) 생각... 또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오늘의 내가 거기에 오버랩되면서.... 뭐 이렇게 되면, 눈물이 나는 게 그리 이상한 건 아닐 것 같은데...



끝으로 Weekend의 정식Clip을 링크해 둔다. X - Weekend (여러 라이브 버전도 있는데, 요걸 개인적으로는 제일 좋아한다. 이유? 많이 봤기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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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금융공황에 대해. 좀 더 길게


EM님의 [최근 금융공황에 대한 단상 - 신자유주의의 운명?] 에 관련된 글.

위 글을 요약하면서 내용을 좀 더 추가해봤다.




요즘 범지구적 금융공황을 맞으면서 신자유주의의 운명에 대해 말들이 많은데, 앞의 글은 거기에 초점을 두고 전개해봤다. 많은 이들이 이번 공황을 두고, 신자유주의의 종말이냐 강화냐, 또 만약 종말이라면 그 대신 케인스주의가 부활할 것이냐 하는 물음을 제기한다.

그에 대해 나는 이번 금융공황은 명확하게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사형선고라고 (또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를 케인스주의와 대비시키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먼저 케인스주의를 다시 볼 것을 제안했다. 그에 따르면. 커다란 관점에서 봤을 때, 케인스주의는 특정한 정책들의 단순한 조합이라기 보단 적어도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계속된 경제영역에서 국가의 역할에 대한 별 성과 없는 논란ㅡ오늘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것이 얼마나 무모한 논쟁이었는지를 깨닫는 데는, 당시에 이른바 “야경국가론”이라는 게 꽤 진지한 사람들에 의해 제안되기도 했었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족하다ㅡ에 종지부를 찍는, 말하자면 국가의 불가피성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조직적인) 공공연한 인정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는 거였다. 나는 이런 인식상의 발전은, 특히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더 명확해지듯이, 진정으로 인류사적인 의의를 갖는 것으로, 그리하여 한번 습득하게 되면 쉽게 돌이키거나 물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을 굳이 “케인스주의”라고 부를 까닭도 없다고 했다. 비록 그런 외피를 뒤집어쓰고 나타나긴 했지만.) 이렇게 보면, 20세기 특히 중반부에 서구의 선진국들에서 광범위하게 전개된 사회복지정책과 산업의 국유화 등은 위와 같은 인식을 극단에까지 몰아붙인 것ㅡ그것이 좋으냐 나쁘냐는 논외로 하더라도ㅡ이라고 볼 수 있겠고, 신자유주의는 그런 움직임에 대한 우파의 역공세였다고, 그러나 어떤 “필연적인 것”에 대한 도전이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무모하고 그래서 애초부터 엄청난 희생을 치룰 수밖에 없었던 역공세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케인스주의가 등장한 이래 경제 및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국가의 역할이 (그렇게 큰 저항 없이도) 비약적으로 커질 수 있었던 것은 당대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 한 마디로 동서냉전의 결과이기도 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에 대한 반작용이었던 신자유주의 또한 바로 그 냉전의 산물인 셈인데, 그렇다면 결국 이번 범지구적 금융공황은 바로 그 신자유주의를 끝장냈다는 점에서 “장기 20세기”의 종료선언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 그리고 향후 전개될 사태를 대비하는 것도 바로 이상과 같은 인식 위에서 이뤄질 필요가 있다는 게 내 주장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특히 신자유주의의 운명과 관련해서 쓴 앞의 글에서 나는, 지금으로부터 70-80년 전에 케인스주의에 의해 처음으로 공공연히 표명되었으나 지난 20-30년 사이에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무참하게 짓밟힌 인류사적 인식의 발달을 다시금 공언함과 동시에, 그것을 범지구적 차원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식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곧, 우리가 “경제”라고 부르는 영역, 즉 아담 스미스로부터 헤겔을 거쳐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근대사회의 위대한 과학자들이 하나같이 “사적 개인”의 영역이라고 불렀던 그 “경제”라는 영역에는, 단순히 사적 개인에게만 맡겨둘 수 없는 것들, 공공의 이름으로 관리되거나 보장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물론 마르크스였다면 이런 영역의 존재 자체를 자본주의의 “모순”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근대세계에서 “경제”란 본질적으로 “사적 개인”의 영역이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 경제 영역에서 공적인 것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근대의 모순을 넘어선다는 의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런 주장이 구태의연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 현실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즉 서유럽의 몇몇 선진국들을 빼면, 이른바 후발국들 내지는 저개발국들에서 위에서 말한 “공공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헌신짝처럼 취급되고 있는지를 떠올려보라.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고, 심지어 미국도 그렇다. 어떤 이들은 우리나라나 기타 제3세계에서 오히려 공공성이 훨씬 잘 보존되고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이를테면 이런 사회들에는 토속적인 것이 비교적 강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은 오히려 그런 곳에서 자본주의적 제도ㅡ특히 소유권과 관련된 제도ㅡ가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음을 보여줄 뿐이다. 즉 그런 공공성이란 헤겔식으로 말한다면 “지양되지 않은 공공성”, “직접적 공공성”일 뿐으로, 자본주의가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그런 공공성은 아주 급속하게, 극도로 냉혹한 “개인주의”로 변모할 것이고, 또 그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후발국의 자본주의 발달사에서 목격해온 바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런 제3세계 나라들이 본격적인 자본주의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 또는 (한국처럼) 자본주의화의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했을 바로 그 때, 선진국들 특히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출현했음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사실 돌이켜보면 신자유주의란 국내적인 정책이었다기 보단 대외정책의 성격이 매우 강했다. 어쨌거나 적어도 1980년대 초반부터 세계 최강대국들은 제3세계에 신자유주의적인 형태의 자본주의, 일찍이 그 어디에서도 실제로 실행된 적이 없었던 지나치게 도그마화한 형태의 자본주의, 그래서 단순히 실행 불가능한 형태의 자본주의를 강요해 왔고, 결과적으로 그런 지역들에서는 (대체로 국가가 관리하고 보장해야 할) “공공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제도적으로 발달할 기회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런 요구들이 범사회적 차원에서도 제기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마도 공정하게 평가한다면, 공공성의 제도적 발달이 외부의 압력에 의해 인위적으로 저지되고 지체된 것만큼이나, 그것의 사회적 발달은 (대체로 선진 사회들과의 교류 속에서) 반대로 지나치게 급속하게 이뤄졌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제도발달과 사회적 의식 및 요구의 발달 사이의 부조화는 이른바 자본주의의 후발국들과 제3세계 나라들에서 심각한 사회문제(우리나라의 비정규직 문제처럼)와 함께 엄청난 사회적 갈등을 낳고 있는 실정이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세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런 지역들에서는 여전히 경제에서의 국가의 역할 문제, 즉 이른바 “경제”라는 영역에서 공적으로 확보되고 관리되어야 할 영역의 존재 여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주요한 투쟁의 장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여기서, 이런 지역들에서 그런 역할의 문제가 제기되는 방식이 어떤가를 다시금 강조할 필요가 있다. 즉 아주 놀랍게도, 많은 경우에, 그 역할의 문제는 “정도”에 대해 제기되는 게 아니라 “여부” 자체에 대해 제기된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기에, 오늘날 국가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물론 앞의 글에서도 단서를 달았듯이, 여기서 “국가”란 그저 사회에서 어떤 공적인 것의 (최종적인) 현실의 담지체를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그런 공적인 것을 반드시 국가가, 그것도 아주 투명하게 표현할 것이라고 볼 필요는 없으며(그렇게 한다면 그게 “국가 물신성”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렇게 믿는 무리들을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반대로 특히 위에서 대략적으로 묘사한 것과 같은 상황에 있는 후발국들이나 제3세계에서는 여전히 “국가”라는 이름으로 실행되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는 점도 (뿐만 아니라 선진국들에서도 역시, 그런 의미에서 지난 20여 년 사이에 신자유주의 하에서 이뤄진 엄청난 훼손과 후퇴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점도) 우리는 잊으면 안 된다.

이번 범지구적 금융공황을 통해, 이제껏 내가 해묵은 인류사적 지혜라고 불렀던 것, 즉 경제에서 공적인 것의 존재 또는 국가의 역할에 대한 믿음이 공공연해지는 것의 의의는 바로 위와 같은 배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즉 일부 선진국에서는 그런 지혜가 이미 상당부분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이 지구상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말하자면 많은 나라에서 주요한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장이었으며, 지난 20-30년 사이에는 특히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 앞에서 공공성을 옹호하는 세력들이 수세적인 위치에 있었던 게 사실이다. 따라서 범지구적 금융공황을 통해 결국은 “금융”이라는 현대자본주의의 핵심 중의 핵심이 그 자체로 사실은 공공적인 것이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난 지금, 그리하여 (그동안 금융에는 자율적이고도 자생적인 조화로운 운동양식이 있다고, 그러니 금융은 그냥 놔두라고 줄곧 외쳐왔던) 신자유주의가 극적이고도 필연적인 종말을 고한 지금,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적 공백이 “케인스주의”라는 다소 애매모호한ㅡ그러나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ㅡ이름으로 채워지고 있는 지금, 우리는 그 낡았지만 새로운 “공공성”이라는 가치를 (이를테면 “인권”과 같은) 범지구적, 전인류적 상식으로 격상시킬 호기를 맞았고, 따라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한편 이렇게 이제껏 주요한 이념적 및 실천적 투쟁의 장이었던 것이 상식의 영역으로 옮겨지는 것은, 그와 동시에 새로운 투쟁의 장(들)이 형성될 것을 필연적으로 요구할 것이다. 내가 보기엔, 그중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가 국제적인 영역에서 형성될 것이다. 바로 국제적인 차원에서 범지구적 경제체제의 관리.

앞서 글의 한 덧글에서도 지적했듯이, 사실 이 문제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케인스주의 아래서 성립된 브레튼우즈 체제가 그 가장 대표적인 예이며, 이후 출현한 국제무역기구(WTO)도 비슷한 정신을 구현하고 있다. 문제를 굳이 “경제”라는 것으로 한정짓지 않는다면 그 기원은 더 끌어올려진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런 노력들은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는데, 오늘의 관점에서 봤을 때 그것은 그런 문제가 제기될 만한 여건이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비록 “당위”의 차원에서는 제기될 수 있었지만) 평가할 수 있다. 요컨대, 국제적인 문제를 적극적으로 사고하기엔 각국이 자국 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너무 많았을 뿐만 아니라, 또 국제무대에서 독자적으로 또는 “이기적으로” 행동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았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더해 다양한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범지구적 금융공황을 맞이한 지금, 선진 각국을 중심으로 현재 우리가 속해있는 이 체제는 진정으로 범지구적으로 작동하는 체제라는 점이 공공연하게 인정되고 있다. 이것은 정말이지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다. 이제껏 보수적/반동적 세력들은, 이미 150년 전에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필연적임을 과학적으로 증명해낸 바 있는 위기들이 닥칠 때마다, 대체로 그것을 “체제”의 문제로 보기를 거부해왔다. 대체로 그들은 그런 위기들이, 이를테면 1997-98년의 국제통화금융공황을 맞았을 때도 그랬듯, 자본주의 체제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외부적인 그 무엇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고 (당시엔 예컨대 동아시아의 유교적 특성 때문이라는 식으로) 변명을 둘러대곤 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번 범지구적 금융공황 국면에서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가 “범지구적”으로만 작동하는 체제라는 사실이 대체로 승인되고 있는 분위기 또한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시 1997-98년의 경우를 떠올리면, 당시 좌파들 사이에선 그 문제를 “범지구적 자본주의”의 위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음에 반해, 우파들은 끝끝내 그 문제를 오로지 “동아시아”의 문제로, 또 같은 맥락에서 1996년의 사태는 “러시아”의 문제로, 그리고 1994년의 사태는 “중남미”의 문제로 축소/왜곡해 왔던 것이다. 요컨대, 이번 금융공황에서 특징적인 것은, 그동안 정말로 어처구니없게 부정되어왔던 또 하나의 사실, 즉 현재 우리가 속해있는 체제는 “범지구적 자본주의”이며, 그 안에서 우리가 주기적으로 맞는 위기들은 바로 그 “체제 자체의 문제”임이 은연중에 공언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미세하지만 의미 있는 차이/변화를 감지해내고, 나아가 그것을 발판으로 좀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해 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테면 이번에 선진국들이 특히 중국이나 일본에 대해 그들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걸맞은 역할을 요구하고 있는데, 한편으로 이는 선진국들이 자기들의 책임을 일정하게 회피하려는 수작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의 문제가 “진정으로” 범지구적인 것임을 그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나는 이와 같은 사태의 극적인 전개는, 그 자체로 현대 세계가 도달해있는 일종의 물적 발전의 수준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그 물적 발전이란, 말하자면, 지금으로부터 약 70-80년 전에, 그 전까지는 국가가 굳이 나서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상태가 지속될 수 없게 되었을 때, 즉 사회경제영역에서 국가가 적극적으로 도맡아야 할 일련의 역할들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도달했던 바로 그 물적 발전의 새로운 수준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 당시에 어땠는가. 다시 말하지만, 국가의 역할 인정은,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체제의ㅡ그리하여 자본가들의ㅡ요구이기도 했지만, 단순히 특정한 체제의 문제로만 환원할 수 없는 근본적인 수준에서의 물질적 발전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미 위에서 설명한 대로, 이후 (적어도 서유럽의 선진국들에서는) 국가의 역할은 일정한 범위 안에서 점점 더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과정이 엄청나게 치열한 쟁투의 과정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바로 그 국가의 역할이라는 문제는, 그것이 처음으로 적극적이고 광범위하게 인정된 지 80년이 지난 뒤에도 지구상의 대부분의 곳에서는 “도달해야 할 그 무엇”으로 남아있는 실정이고, 그 사이에 우리는 신자유주의라는 엄청난 반동의 시기를 겪기도 했다.

이와 같은 역사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역사의 문턱 앞에 있는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는 분명하다. 바로 역사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물론 그런 교훈을 배우기 위해 우리는 뭣보다 먼저, 우리가ㅡ이제껏 내가 말했던 바에 따라 표현하자면ㅡ“국가의 역할” 문제를 넘어 “범지구적 경제체제의 국제적 관리”의 문제를 제기하는 방향으로 전진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 전제조건으로서 나는 “국가의 역할”에 대한 부분이 인류의 상식으로 격상되어야 한다고도 말했다.) 이를테면 현재 좌우를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제2의 브레튼우즈 체제”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위와 같은 이해와 깨달음을 바탕으로 이런 문제들을 좀 더 진지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즉 막연한 이상주의적인 상념에 따라 그런 제안에 열광하는 것도(또는 바로 그런 이유로 그것을 거부하는 것도), 반대로 그것이 현실 옹호적인 케인스주의적인 발상이라고 단순하게 거부하는 것도(또는 바로 그런 속셈으로 그것을 지지하는 것도) 결코 바람직한 태도라고 볼 수 없다. 이 대목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항은, 그런 제안들이 이제는 거부할 수 없게 된 현실의 물적 발달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단순한 “깨달음”만으로 많은 것이 이뤄지기도 한다. 특히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뭔가가 내적으로 쌓여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이를 위에선 “물적 조건”의 축적이라고 했다. 이럴 때 하나의 깨달음은, 단 한번의 자극만으로도 그 내적으로 쌓인 것들을 한꺼번에 조직해주고 그로부터 엄청나게 긴 의미의 연쇄를 만들어내 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이 실천으로 보충되지 않는다면 헛될 것임은 물론이다.)



글이 쓸데없이 길어진 것도 같은데, 마무리하면서 두 가지만 다시 강조하겠다. 첫째, 이번 범지구적 금융공황을 통해 명백해진 신자유주의의 패퇴를 명확히 하고(사실은 이것 자체가 하나의 과제다) 이를 사회경제 영역에서 (주로 국가를 통해 제도화되어 온) “공공성”을 범지구적 차원에서 확립하는 계기로 발전시켜야 한다. 둘째, 이런 과정에서 지배계급들에 의해 추진되는 여러 조치들에서조차 현실의 물적 발전의 추이가 필연적으로 드러남을 인식하고 이에 대응하며, 동시에 좌파 나름의 공간을 확보해나갈 필요가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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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금융공황에 대한 단상 - 신자유주의의 운명?



요즘 범지구적 금융위기 와중에 신자유주의의 종말 또는 강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자유주의가 끝나고 이제 새로운 케인스주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사람도 있고, 이번 위기를 통해 신자유주의는 더욱 강력하게 거듭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장차 운명을 논하기에 앞서 그것이 정녕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많은 경우에 신자유주의는 이른바 케인스주의와 대비되곤 하는데, 거기서부터 얘기를 시작하는 것도 좋겠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신자유주의를 케인스주의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것은 지나치게 단순하고도 위험한 성격규정이다. 우리가 흔히 “케인스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사실은 질적으로 상이한 여러 가지 차원들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특정한 차원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케인스주의에 대한 반응이었다고 봐줄 수도 있겠지만, 결코 그것은 오늘날 케인스주의라는 이름으로 요약되는 전체상(像)에 대한 반응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기에 신자유주의는 너무도 취약하다.



그런 차원들 중에서 두 가지가 주요하다. 하나는 정책적인 차원, 다른 하나는 이념적인 차원. 여기서 특히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두 번째인데, 사실 케인스주의라는 것이 처음 나타난 지 70년도 넘은 지금 와서 중요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 케인스주의가 담고 있는 이념적 내용이란 결국 경제영역에서 국가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데 있다. 즉 비로소 케인스주의를 통해, 인류는 [좀 더 정확히는 “서구세계는”] 정부의 역할이나 경제에의 개입 정도에 대한 지난하고도 성과 없는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되었고, 우리는 정부라는 실체를 경제행위의 당당한 주체로 [좀 더 엄밀히는 “경제의 일부로”] 상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강조해둬야 할 것은, 위와 같은 사항이 우리가 “케인스주의”라고 부르는 [구체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정의하든 상관없이] 일련의 이념체계 자체의 내재적인 힘에 의한 결과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일정한 역사적 배경, 즉 우리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정부[또는 국가]를 경제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일련의 역사발달을 사후적으로 추인해주는 매개에 다름 아니었단 얘기다.

바로 이런 까닭에, 흔히 “케인스주의”로 요약되곤 하는 경제영역에서의 국가의 의의에 대한 인식은, 그 자체로 인류의 역사적인 인식의 발전의 표현으로서, 역사가 아무리 요동을 쳐도 쉽게 뒤집어엎거나 되돌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반대로,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런 인류의 발전을 “케인스주의”라고 요약하는 것도 한편으로는 매우 잘못된 일이라 할 것이다.



이에 비하면 “신자유주의”는 한낱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과연 거기에, 위에서 케인스주의가 담아내고 있다고 한 바와 같은 [비록 그것이 케인스주의의 옹호자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의도된 바는 아니라 할지라도] 어떤 인류사적 지혜가 있는가? 몇몇 신자유주의 옹호론자들은 아담 스미스나 기타 19세기 경제학자들을 들먹이며 애써 “시장 대 국가”라는 대립쌍을 강화시킴으로써 자신들이 끼어들 여지를 만들고, 또 나아가 그런 바탕 위에서 “시장”을 옹호하려 했지만, 지금 범지구적 공황이라는 국면에서 명명백백해졌듯이 그런 시도는 앞서 묘사한 것과 같은 인류사적 인식의 발전을 뒤집을 수 없다.

사실 신자유주의는 케인스주의라는 이름으로 표방되는 경제영역에서의 국가 역할 내지는 개입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이는 적어도 1970년대 말 이후 미국이나 영국 등에서 국가가 얼마나 자주, 그리고 유례없는 수준으로 경제영역에 개입해왔는지를 보면 명확해 진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진정한 안식처는 오직 “말”의 영역이었을 따름이다. 최근 장하준 교수는 영국 일간지 <가디언(The Guardian)>에 기고한 글에서, 미국의 신자유주의란 한마디로 “내가 하는 대로 하지 말고, 내가 말하는 대로 해”라는 정책이라고 비꼰 바 있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케인스주의에 반대해서 나타난 것과 같은 겉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련의 사태전개 속에서 이른바 “케인스주의”에 벌어진 “변형”을 고려해야만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이 “변형”이란, 케인스주의가 단순히 국가역할을 인정하는 수준을 넘어 “지나치게 멀리” 나갔음을 가리킨다. 물론 그것은 동서냉전이라는 특수상황, 그 안에서의 체제경쟁, 또 일정부분 그 결과로서 서방진영 내에서의 공산주의 창궐 등을 배경으로 한다. 즉 각종 사회복지의 비약적인 확충, 누진세의 광범위한 도입을 통한 부의 재분배, 엄청난 규모의 산업 국유화 등등의 결과로 경제에서 국가의 비중이 매우 특수한 방식으로 커졌다는 것. 사태의 이와 같은 발달들은 굳이 “케인스주의”라고 불릴 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대체로 나중에] 부당하게도 “케인스주의”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지곤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신자유주의”가 반대한다던 케인스주의란 결국 이렇게 특수하게 변형된 케인스주의, 그 변형의 정도가 너무 심해서 케인스주의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케인스주의, 그리하여 케인스주의라기보다는 사회주의적 정책이라고 불리는 것이 일견 타당한 그 무엇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즉 신자유주의가 반대한 것은 대체로 위에서 간략히 묘사한 것과 같은 국가의 “과잉”이었지 국가 자체가 아니었던 것이며, 그에 대한 반응인 한에서는 신자유주의라는 것도 냉전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겠다.

물론 매우 극단적인 신자유주의론자들 중에는 국가의 역할을 완전히 부정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다. 어쩌면 그런 반응은, 국가의 “과잉”에 대한 비판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으로 국가의 “불필요성”에 대한 옹호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1970년대 특히 서구 선진국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국가의 역할에 대한 엄청난 불신이 쌓였음을 떠올리면, 그런 극단적인 주장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는 어느 정도 명확해 졌듯이, 역사는 국가의 역할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과 같은 극단적인 주장들을 점점 더 주변화했다. 요컨대, 1970년대의 거대한 실패의 충격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감에 따라, 즉 1970년대의 쌔처(Margaret Thatcher)에서 2000년대의 블레어(Tony Blair)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신자유주의는 [적어도 그 언어의 강도 면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말랑말랑해졌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번에 주로 선진국들과 그 주변국들을 휩쓸고 있는 금융공황은, 위와 같은 극단론자들을 포함한 신자유주의라는 매우 역사-특수한 맥락에서만 그 생명력이 유지될 수 있는 말 그대로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형선고에 다름 아니다. 사실 우리는 그와 비슷한 류의 사형선고를 이른바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에서 보았다. 결국 위의 설명을 종합해 본다면, 신자유주의야말로 바로 그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가장 적확한 우파적 대응물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비로소 신자유주의의 몰락을 통해 “장기 20세기”의 진정한 종말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올 것인가. 글쎄 아직은 이에 대해 누구도 명확한 답을 내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내가 보기에, 실제로 그것이 무엇이든, 앞으로 우리가 진입하게 될 새로운 세계에서는, 이미 약 70-80년 전에 케인스주의에 의해 공공연히 선언되었으나 최근 약 20-30년 사이에 신자유주의에 의해 심각하게 위협받았던 인류사적 지혜, 즉 경제영역에서 국가의 의의에 대한 인식이 하나의 상식으로 자리잡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이데올로기에 휘둘려왔던 꼴통들이야 지금 똥인지 된장인지 분간을 못하고 지멋대로 떠들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제관련 최고 수장 두 분(대통령과 장관)을 떠올리면 된다], 이제껏 신자유주의의 “합리적” 옹호자였던 사람들, 즉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또는 글로벌리제이션이라는 이름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에서 벌어진 국가의 “과잉”에 반대했던 합리적인 옹호자들은, 그들이 이제껏 알고는 있었지만 결코 입 밖에 내지는 않았던 진실을 공공연하게 발설하고 있다. 즉 그런 이들의 입에서조차 이제는 “금융시스템은 국가의 일부다”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오고 있으며, 사실 이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어차피 신자유주의는 “말”, 그것도 아주 취약한 체계를 가진 말뿐이었으므로, 그것을 가장하는 것만큼이나 그것을 부정하는 것도 쉽다.]



글을 끝맺기 전에 세 가지를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첫째, 이제껏 계속해서 강조한 인류사적 발달, 즉 경제영역에서 국가의 의의에 대한 인식은 비록 그것이 케인스주의라고 불리는 것은 매우 부당하지만, 한동안은 불가피하게 그렇게 불리게 될 것이다. 이름이야 뭐 아무려면 어떻겠냐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뭐라 불리든 그 핵심을 잊지 않는 것이며, 반대로 그것이 비록 케인스주의라고 불릴지언정 결코 케인스주의는 아니란 사실이다.

둘째, 그 인류사적 발달이란 것이 아무리 거스를 수 없는 것이라 해도, 신자유주의와 같은 새로운 반동적 형태가 출현하지 말란 법도 없다. 계속된 투쟁이 필요한 이유다.

셋째, 비록 이 글에서 “국가”가 강조되었기는 하지만, 그것을 물신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사실 내가 이제껏 국가라고 했던 것은 보편적으로 말해 공동체적인 것 일반에 해당한다. 현실적으로 말해서, 사회의 경제영역에서 국가의 의의를 인정한다는 것은, 경제라는 것이 결코 고립된 개인이 모든 것을 떠맡는 곳이 아님을, 거기엔 공동체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음을, 나아가 개인의 행위라는 것도 사실은 바로 그 공동체성 안에서 진정한 의미를 발휘할 것임을 인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국가를 물신화하지 않는 첫걸음은 국가만이 그런 공동체적인 것을 체현하고 있는 것은 아님을, 그리고 때로는 국가는 공동체성을 오직 기만적으로만 반영함을 잊지 않는 것이다. 어쨌거나 바로 그러한 사항을 인류의 공공연한 상식으로 만드는 것은 현재 범지구적 금융공황의 국면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들 중 하나이며, 또 결국 그것은 상식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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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e on 노던록

 



EM님의 [국유화! 국유화! (시장의 수호자로서의 국유화)] 에 관련된 글.

이번엔 미국이다. 이래저래 신용위기(credit crunch)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 영국의 Northern Rock 은행의 국유화에 대해 지난번에 간단히 소개한 일이 있는데, 몇몇 경제지 기사들을 중심으로 이를 좀 더 업데이트해 보겠다.




2 17 ::: Northern Rock 국유화 결정 발표.

2 18 ::: Grabbing the bank (Economist.com)

... 현재의 상황에서 [국유화] 결정은 몇 가지 별볼일 없는 선택지 중에서 가장 덜 나쁜(least worst) 것이다. 국유화는 정부가 노던록을 구제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실질적으로 소유해 왔다는 사실에 대한 법적 승인을 제공한다. ...

재무부가 품었던 희망은, 그 은행을 다시 정상으로 되돌려서 [자신이 쏟아부은] 납세자들의 돈을 하루빨리 되갚아줄 수 있는 민간 구매자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거였다. 그러한 바람은, 정부가 앞으로 계속해서 돈을 댄다는 보장이 있어야만 은행이 팔릴 수 있음이 명백해진 [2007] 11월부터 줄곧 허망해 보였다. ...

[국유화를 결정한] 지금, 남아있는 주주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거나 거의 그렇게 될 수도 있다. 그들도 부분적으로는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노던록이 어려움에 처한 뒤에도 자신들의 지분을 늘려온 헤지펀드인 SRM이나 RAB Capital 같은 거대 주주들은, 자기들의 지분을 손상시킬 수 있는 어떤 거래[민간에 은행을 파는 거래]에 대해서도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위협하곤 했는데 ...

국유화 결정 이후, 정부는 아직 두 가지 더 어려운 결정을 해야만 한다. 첫째, [재무장관인] 달링이 시사한 바와 같이 은행을 계속해서 살려둘 것인가, 아니면 대부분 닫아버리고 새로운 모기지 계약과 예금을 받지 않도록 할 것인가. 은행을 계속 살려둘 경우, 만약 주택/신용시장 상황이 좋아져 은행이 잘 팔리게 되면, 납세자들이 자기들의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늘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곧 경쟁을 왜곡하는 것이다...

1970년대의 낡은 사회주의 경향으로 돌아서는 것 아니냐며 정부를 꾸짖는 비판자들은 틀렸다. 그러나 브라운 총리가 현재 은행에 대해 무엇을 하는지는, 이제 그가 은행을 통제하게 되었으므로, 자유시장에 대한 그의 헌신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줄 것이다.



2 19 ::: The 'nationalisation' that is no such thing (Will Hutton, Financial Times)

... 노던록의 "국유화"가 불러일으키는 것은, 자유시장 자본주의(free-market capitalism)를 옹호하는 주장이 생명을 다했느냐, 또 그래서 1970년대로 돌아가는 것이냐 등을 둘러싼 토론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그보다는 더 복잡한 것인데, 그것은 국가와 기업 사이에 가장 생산적인 관계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



2 19 ::: The N-word (Economist.com)

... 그러나 한바탕 국유화 물결의 도래를 알리기 보다는, 노던록의 진정한 메시지는 국유화냐 민영화냐에 대한 낡은 논쟁이 오늘날 금융부문에 대해서는 점점 더 무의미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서브프라임 위기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각 정부들은 금융서비스 산업에 돈을 퍼붓고 있다. 은행_그 규모와 상관없이_이 파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이제는 정말 엄청나서, 이 정부들은 시장(market forces)으로 하여금 실적이 좋지 않은 은행이 스스로 책임을 지게 만들도록 놓아둘 수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불안해서 지레 겁을 먹고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고야 말게 된다는 뜻.]

그 결과 은행들은 국가가 그들의 위험을 줄여줄 것임을 알고 맘껏 돈을 빌려준다. 결과적으로 위험한 신용거품이 만들어지고 금융시스템에 불필요한 취약성이 들어온다. 세계경제의 기반을 갉아먹음으로써, 극단적인 금융적 위험에 대한 그러한 대규모 국유화_이는 영국에서만큼이나 이미 미국이나 프랑스에서도 사실상 국가정책의 상당한 부분이 되었다_, 잠재적으로 이번주 노던록의 국유화 결정보다 훨씬 더 큰 재앙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2 21 ::: Brown is wrong even when he is right (Martin Wolf, Financial Times)

... 브라운 총리의 문제는 종종 그가 옳은 일을 하긴 하지만, 잘못된 동기에 의해, 잘못된 시점에, 그리고 잘못된 방식으로 한다는 것이다. ...

시장에서 자력갱생할 수 없는 기업은 어떤 식으로도 "사적"(private)일 수 없다. 따라서 노던록을 사적 투자자에게 파는 것은 사적영역해법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랬을 경우] 공공영역이 모든 위험을 떠안고 반대로 사적영역은 단물만 빼먹었을 것이다.

그래서 국유화는 올바른 결정이었다. 그럼 뭐가 잘못됐단 얘긴가? 너무 늦게 이뤄졌다는 거다. 그것은 1억 파운드 정도롤 불필요한 컨설팅을 받는 데 허비한 뒤에 취해졌다. 또 뭣보다, 그것은 노던록을 정리하기 위해 취해진 게 아니라, 그것을 계속해서 살려내는 데 돈을 허비하기 위해 취해졌다.

왜 정부가 노던록 예금주들을 구제하기로 결정을 내렸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쉽다. 채권자들을 구제한다는 결정의 경우엔 최소한 이해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노던록을 은행으로서 남겨두기로 한 결정을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에 대한 납득 가능한] 유일한 설명은 정치적이다. 즉 공금을 사용해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영역에 있는 수천개의 일자리를 지켜내고자 하는 욕망 말이다. 국유화가 끔찍한 것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짓거리를 하고자 하는 유혹이 거기엔 있기 때문이다.

노던록은 오직 [제대로] 정리되기 위해 국유화되어야 한다. 그것이 정리되어야 하는 까닭은 그것을 계속해서 남겨두는 것은 다른 은행들 입장에서는 불공정한 경쟁을 야기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다른 은행들도 재빨리 노던록처럼 되려 할 것이기 때문이고, 이 나라에 필요없는 은행을 되살리기 위해 경영진에게 엄청난 돈을 지불하는 것은 웃기는 짓이기 때문이다.

대신 정부는 예금자 및 기타 채권자들에게 변제를 해주고, 공공부채로 자산을 보전해 주며, 은행을 닫고 새로운 산업으로 그것을 돌려야 한다. 만약 마지막에 가서, 불만에 찬 주주들이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이 경우 주주는 보상받지 못하므로] 가져갈 만한 일말의 가치가 남아있다면, 그들더러 그냥 그것을 가지라고 하면 된다. 다행히도, 정부가 다 잘못한 것은 아니다. 정부가 쏟아부은 부채 덕분에 새롭게 창출된 주식가치에 대해 주주에게 보상해 주지 않기로 한 것은 잘 한 일이다.



2 21 ::: Now make it work (The Economist)

[노던록을 살릴 것이냐, 죽일 것이냐. 현재 브라운 정부는 살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 같지만, 죽이는 편이 낫다. 역시 여기서도 정부가 노던록의 주인으로 행세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불공정한 경쟁 및 시장의 왜곡을 걱정하고 있다.]



2 21 ::: In the state's tender hands (The Economist)

[브라운 총리는 국유화 결정을 하면서, 납세자들의 돈을 조속히 회수할 것일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그들의 손에 이익(profit)을 쥐어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익을 내기는커녕 정상화하는 것조차 어려울 수도 있다.]



2 21 ::: A bank by any other name (The Economist)

[이번 국유화 결정이 총리인 브라운에게 얼마나 많은 피해를 미칠 것인가?]

... "신노동당"(New Labour)의 사전에 국유화란 감히 입에 올려서도 안 되는 경제정책이다. 이 단어는, 노동당이 기울어져가던 국유기업과 비통한 파업들을 관장해야만 했던, 그래서 결국 선거에서 져서 18년 동안이나 밀려나 있어야만 했던, 1970년대의 암울한 시기를 연상시킨다. 당내 우파는 수십년 동안 국유화를 강령에서 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그들이 "생산수단의 공공소유"(common ownership of the means of production)에의 헌신을 집어던진건 토니 블레어가 당수가 되고 나서였다. 브라운 총리 세대의 노동당 정치인들은 바로 이런 경험에 의해 유별나게 상처를 입은 세대다. [그래서] 그가 재무장관으로 있을 때의 경제정책도 강력하게 시장 본위(market-oriented)였던 것이다. ...

[결국 이번 국유화는 브라운의 이런 노력도 헛되게 만들었고, 또 현재로서는 그것이 그에게 심각한 타격을 안겨줬다고 볼 수는 없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으며, 전망은 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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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화! 국유화! (시장의 수호자로서의 국유화)




국유화!



- 지난 9월부터 문제가 됐던 영국의 은행 노던록(Northern Rock)의 국유화가 어제 발표됐다.

- 완전히 예상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지금 영국은 충격에 휩싸였다. 국유화... 한동안 유령처럼 배회하던 이 무시무시한 단어가, 드디어 현실화된 것이다. 10년전 New Labour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 시장 친화적인 이미지를 강화해오던 노동당 정부는 자칫 과거의 Old Labour로 여겨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동안 국유화를 망설였지만, 이제는 더이상의 선택도, 기다릴 시간도 없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 이에 대해 찬반 양론이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당연히 우파들의 공세가 매우 거세다.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이번 국유화로 영국은 다시 1970년대로 뒷걸음질 쳤다면서 치를 떨었다. 그들로서는 1970년대 말부터 일궈낸 그들 나름의 "혁명"이 일순간에 무너지는 기분이리라.

- 언론들의 태도도 재밌다. 당연한 얘기지만 친 노동당 성향의 Guardian은 찬성, 반대로 The Times 등과 같은 보수 일간지들은 정부의 이번 결정에 결사 반대다. 하지만 이런 (어떤 면에서느) 뻔한 반응들은 별로 재미가 없다. 가장 재밌는 것은, 또 가장 배울 점이 많은 것은, 바로 Financial Times의 입장이다. 자, 여기서 문제 하나. 자본주의의 가장 충실한 옹호자이자 분석가 집단인 <파이낸셜 타임스>는 이번 국유화 결정에 대해 뭐라 말할까?

- 정답은 "늦은 감은 있지만 현재로서는 가장 훌륭한, 아니 가장 '덜 나쁜' 선택이다"라는 것. 그러나 이들은 이번 국유화가 과거의 실패한(!) 국유화들과 차별화되는 것임을, 아니 차별화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한마디로, 이번 국유화는 과거와 같은 그 자체가 목적인 국유화가 아니라 "시장의 원활한 작동을 보장하기 위한 국유화"라는 것. 또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 그러면서 그들은, 이번 국유화는 한시적일 것, 정부가 지나치게 많이 개입하지 말 것과 같은 매우 강력한 유보조항을 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런 뜻에서 <파이낸셜 타임스>의 수석 경제학자 마틴 울프Martin Wolf는, "이번 국유화를 두고 1970년대로의 회귀니 뭐니 떠드는 인간들은 바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 사실 이번 결정을 내린 노동당 정부의 입장도 위와 같은 <파이낸셜 타임스>의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재무장관 알리스테어 달링(Alistair Darling)은 이번 결정이 "통상적인 비지니스" 중 하나임을 애써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국유화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였을 때, 여러 가지 이슈들이 떠오를 수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주주"와 "납세자" 사이의 관계다. 세금을 내는 영국 시민들 중에도 노던록의 주주는 꽤 있을 것이므로, 어떤 경우엔 "주주=납세자"라는 등식도 성립하겠지만, 일반적으로 납세자의 범위가 더 크다고 볼 수 있겠다. 사실 지난 9월에 문제가 발생한 뒤로 지금까지 노던록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영국의 중앙은행인 Bank of England가 납세자들이 낸 돈으로 수습을 해왔기 때문이다. 즉 이때 납세자들이 주주를 구해준 꼴이다.

- 이런 상황에서 국유화 결정은 주주에겐 매우 슬픈 소식일 테다. 그들은 노던록이 새로운 주인을 만나 계속 민간의 손에 남아있기를 바란다. (이번 결정이 있기 전까지 두 곳에서 노던록의 인수를 위해 정부를 상대로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왜인가? 노던록이 정부의 손에 있는 이상, 정부는 주주보다는 납세자의 눈치를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민간의 손에 계속해서 남아 있다면, 노던록은 자신의 "시장가치" 즉 "주가"를 높이는 방향으로 운영될 것이다.

- 하지만 정부가 실제로 주주를 희생시킬 수 있겠는가? 만약 현재의 문제가 "양자 택일"의 문제라면 정부는 당연히 납세자의 손을 들어줘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런 게 아니라면? 즉 납세자도 실망시키지 않고 주주에게도 섭섭치 않게 사안을 무마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 그런데 과연 그런 길이 있는가? 있다. 바로 국유화한 기업을 마치 민간기업인 것처럼 운영하면 된다! 즉 계속해서 사업 확장하고 예금 끌어들이는 것. 비록 노던록 자체로 보면 신용이 땅에 떨어졌겠지만, 정부가 뒤를 받치고 있는 한 투자자들도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러는 과정에서 정체 불명의 위험은 더욱 커질 것이고, 정부의 역할와 관련해 이른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가 발생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시장은 더욱더 왜곡되고 말 것이다.

- <파이낸셜 타임스>가 가장 걱정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문한다. "주주를 죽여라!", "긴축적인 그러나 내실있는 경영을 통해, 지금까지 꼴아박은 납세자들의 돈은 납세자들에게 돌려줄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준엄하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장이 무엇인지를, 시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줘라!"

- 정말 멋지지 않은가!




*** 덧. (좀 더 발전시킬 부분)

(1) 이번 문제, 특히 이번 국유화 결정은, 결국 금융이라는 것은 사회적 기구임을 다시 한 번 증명하고 있다. 사실 그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분석은 매우 날카롭고, 안일한 좌파들의 허를 찌르는 것이지만, 그들이 "자본주의적 한계"에 갇혀있는 한 "사회적 기구로서의 금융"이라는 사고가 그들 머리에서 나오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금융이란 불안정하고 무정부적인 시장에 전적으로 맡겨질 수는 없는 것이다.

(2) 영국의 정부가 이번 일을 처리하는 방식과 1997년 외환금융위기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방식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밌겠다. 당시 "국유화"를 외치는 목소리도 별로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국유화"가 마치 온나라의 "공산주의화"라도 되는 듯이 금기시했던 보수파들의 오류. 세상에, 납세자들의 권리를 지켜주지 않는 보수파가 과연 보수파인가?!

(3) <파이낸셜 타임스>가 말하는 "과거와는 다른 국유화"라는 게 사실은 그리 새로운 게 아니다. 과거 노동당 정부들에 의해 단행된 국유화들이 분명 사회주의적 지향을 가지고 이뤄진 것이기야 하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 경제를 구출해내는 노릇밖에 한 게 없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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