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사회주의와 한국에서의 좌파운동?

2006/11/03 12:46

새벽에 [현장에서 미래를] 제124호의 기획기사 중 박영균의 글을 읽었다. 시간도 없고, 글이 상당히 긴 까닭에 나중에 읽으려고 했는데, 글의 중간에 전진을 비롯한 좌파 정치조직에 대해 언급해 놓은 것이 보여 마저 읽게 된 것이다.

 

읽은 소감은 나름의 얻은 것이 있었다는 점이다. 좌파들의 동향을 파악했다는, 그런 점이 아니라, 21세기 사회주의 모색에 있어서 생각할 꺼리를 얻은 것이 그 성과이다. 아래에 발췌한 것은 의미있는 것으로 생각되어 옮겨온 것이다. 

 

좌파들에 대해 소개해놓은 것을 보면 전진은 맨 오른쪽에 있다. 그래도 그 틀 안에 넣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하긴 나중에 결론부분에서는 전진은 빼고 나머지 세력들을 가지고 논하고 있다. 한줌도 안되는 그런 세력들을 가지고...

  

각 세력의 영향력이나 현장장악력, 또는 활동성 등을 기준으로 할 필요는 없지만, 이러한 사항을 무시하고 글을 쓰다보니 스스로 좌파라고 주장하는 써클들까지 모두 호명하여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각 조직의 개별 성원들을 인터뷰하는 등의 노력 없이 단지 제출된 문건만을 중심으로 파악하다보니 그 정체성을 엉뚱하게 파악하고 있거나 잘못 분류하는 오류를 보이고 있다. 사회진보연대나 전진이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정파운동의 분석을 제외하고 원론적인 입장은 유의미해 보인다. 이런 식의 모색을 전진에서도 하고 있고... 하지만, 원론을 제출함에 있어서 제기되는 문제들은 간과하고 있지 않나 싶다.

  

인터넷에 올려진 [현장에서 미래를] 원고만을 보다 보니 각주 처리나 분류 등을 제대로 알 수 없다. 현재 형성되어 있는 좌파의 전반적인 정치적 정체성의 도식화는 지나치게 도식적인데다가 제대로 오해에 기반해 있으며, 웹상으로는 잘 구분되지 않아 이해하기 어려웠다.

 

길어도 한번쯤은 읽어볼 만한 글이다.  



21세기 사회주의와 한국에서의 좌파운동

박영균 / 연구원, 건국대 강사, 현장에서 미래를 제124호(2006년 11월호)

정치학적 문제 설정은 스탈린주의에 대한 두 가지 문제의 지점을 보여준다. 첫째, 스탈린주의에서의 국가=당독재라는 전체주의적 권력의 형성은 ‘계획’이라는 근대적인 이성의 권력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근대적 이성이 추구하는 합리주의와 계몽적 사고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그것은 근대 계몽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반민주적이며 엘리트주의적이다. 둘째, 이행의 본질적 문제는 계획의 산술적 합리성이 아니라 이미 정치화된 경제의 정치적 성격에 근거한 국가권력을 수립하는 문제라는 점이다. 스탈린적 정당은 이와 같은 경제의 정치적 성격을 엘리트적인 이성들의 합리적 계획으로 바꾸어 놓았다.

  

혁명 이후 국가권력이 부르주아 국가장치라는 물질성에 근거한 국가권력이 되지 않기 위해서, 실질적인 인민적 권력, 또는 생산자들의 권력이 되기 위해서는 이미 혁명 당시에 부르주아 국가장치를 대체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권력 장치, 프롤레타리아의 이해와 이데올로기가 각인되어 있는 장치들이 사회 곳곳에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기존의 낡은 부르주아적 국가장치를 완전히 대체하고 새로운 권력을 구축해야 한다. 그것은 곧 사회화된 생산자들의 직접 통치 형태로 물질화된 국가장치의 맹아들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산자들은 자기 스스로 사회 전체의 생산-유통-분배를 장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산자들 자신이 자기의 생산 근거지와 생활 근거지를 자율적으로 통치하는 코뮌을 구축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국가 권력은 사회적 권력으로 전화할 수 있으며 생산자 자신에 의한 물질적 토대의 장악이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곧 생산자들이 경제를 정치로 전화시키며 그들 자신이 이 정치의 주체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 각각의 코뮌들은 경제를 정치화하는 생산단위이자 생활단위이며 국가는 이런 코뮌들의 자치적 통치 권력이 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에서의 권력은 ‘자본’이라는 물질적 힘과 사법기관, 경찰, 군대의 물리력에 의존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에서의 권력은 인민들 자신에 의해서 주어진다. 따라서 사회주의 하에서 가장 중요한 물리력은 인민들이 그 스스로 사회화된 생산력에 기초한 권력을 향유하는 진정한 인민 권력, 생산자들의 권력으로 전화시키는 데에서 발생한다.

  

사회주의 이행에서 ‘민주주의’가 핵심적인 문제 중에 하나인 것은 ‘생산의 사회화’를 이룩하고 사회 전체의 공동체를 운영하는 핵심이 산술적이거나 기계적인 회계가 아니라 민주적인 의사소통과 의견조율, 그리고 상호 이해에 기초한 민주적 합의의 도출이기 때문이다. 최종 결정은 ‘정치’이며 ‘행정공학’과 ‘과학’은 이것에 복무하는 자료 또는 수단에 불과하다.

  

① 탈스탈린주의와 관련하여 ‘국가화’하지 않는 이행 전략을 사고해야 하며 ② 정치변혁에 대하여 사회변혁의 중요성을 포착하여 이 접합의 지점을 찾아내야 하며 ③ 신자유주의 지구화와 함께 형성된 ‘보편성’과 ‘복수화한 다중의 접합’, 그리고 ‘시민·사회운동’을 어떻게 ‘적색화’시키는가 하는 ‘주체형성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사유해야 한다. 반면 기존의 변혁이론에서 해체되어야 할 것은 ① 시장/계획경제의 문제설정, ② ‘선정치변혁 후사회변혁’이라는 문제 설정과 더불어 국가에 대한 도구적 관점, ③ 노-농동맹과 같은 계급동맹만으로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사고하는 관점이다. 그리고 ‘신좌파적 경향을 가지는 좌파’에서 기각되어야 할 것은 ① 맑스의 변증법을 ‘차이’의 철학으로 대체하는 관점이며 ② 국가권력을 본질적으로 억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당적으로 반국가적 사회변혁 전략만을 취하는 관점이며 ③ ‘탈’계급적, 노동자계급 중심성 없는, 그래서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의 관점 없는 ‘대중운동’과 ‘보편성’만을 중심으로 변혁을 사고하는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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