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파에 대한 단상

2008/01/02 23:48

요새 민주노동당 내부의 논란을 보고 정파다툼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이들이 꽤 있습니다.

엔엘은 그 실체를 가시적으로 드러낸 적은 없지만,  민주노동당 내외의 여러 사안들에서 그 존재감을 과시한 바 있으니 말할 필요가 없지요. 다만 엔엘에 대해 자주파, 종북파, 자민통세력, 주사파, 친북파, 전국연합 등 여러가지 호칭이 있긴 합니다만, 이를 제대로 말해주는 용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모두 주사파인 것도 아니고, 북한에 대한 입장을 따져볼 때 자주적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근엔 종북파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종북주의라는 게 별도의 이념적 지향 같은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행태를 지칭하는 것이라서 이것도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엔엘에 대칭되는 정파가 좌파입니다. 언론에서는 8-90년대의 학생운동의 지형을 가져와서 피디(민중민주)파라고 하지만, 요즘 자신이 피디라고 하는 정파나 활동가는 전혀 없습니다. 실체도 없는 피디를 끌어와서 호명하는 이유는 관성 탓도 있지만, 비엔엘을 딱히 부르기 어렵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고 좌파라는 개념이 정확하냐고 하면 그건 아닙니다. 종북주의에 반대한다고 하여 모두 좌파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최근에 나오고 있는 진보신당 논의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단지 종북주의 청산만을 공유한 채 건설되는 진보신당을 좌파정당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종북주의에서 자유로운 정당은 대통합민주신당, 창조한국당, 한나라당 정도로 충분하게 존재합니다.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지요.

 

민주노동당 내의 좌파, 평등파의 대표적인 정파로 언급되는 게 전진(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준))입니다. 다함께, 해방연대, 자율과 연대, 혁신네트워크 등이 존재하지만, 현실적으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정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 좌파 정파에 속하는 이들을 다 합쳐도 당권자 5만여명 중에서 1000명이 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엔엘과 담합하여 당을 좌지우지한다고 얘기합니다. 보통 엔엘만 문제냐, 전진으로 대표되는 좌파도 똑같이 정파담합행태를 보였고, 기득권을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당을 말아먹은 거 아니냐라고 얘기합니다. 그런 측면이 없다고 할 수는 없기에 어느 정도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정파 내지 의견그룹이라는 게 자신의 활동에 대해 책임을 지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진이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겁니다. 나름대로 한다고 했지만, 자신이 차지하는 위상에 비추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고, 대부분의 사안에서 한박자 느린 행보를 보였습니다. 그래서 실망을 준 경우가 많았지요.

 

엔엘들이 패권을 휘두를 때, 중앙당과 지역을 갉아먹을 때 전진 등의 정파는 뭐했는가 질문할 수 있습니다. 담합한 경우도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안에서 거기에 개입할 역량도 되지 않았고, 개입한 경우에도 자신의 활동을 당원들에게 제대로 설득해내지 못했다는 것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봅니다. 사실 엔엘의 종북주의, 패권주의가 문제된 사안들에게 좌파 정파가 이에 저항하지 않은 적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이를 당 전체의 혁신 사안으로 부각시키지 못했고(또는 않았고), 그에 대해 제출된 근본적인 처방과 제도적 대안을 관철하지 못한 무능력이 문제겠지요.

 

이번 12월 29일 중앙위원회는 전진이 일간지까지 진출하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신화의 전진보다 더 크게 부각된 적은 없었거든요. 이 중앙위원회의 결과에 대해 말이 많습니다. 대부분은 그렇게까지 단호한 모습을 보여줄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지만, 처음부터 분당하고자 하는 의도하에 작정하고 저질렀다는 말도 합니다. 당 혁신을 해야 한다는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고 종북주의 청산이라는 전혀 수용될 수 없는 요구를 내세워 비대위 구성조차 가로막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장발의된 원안 지지자들이 요구한 것은 종북주의 및 패권주의를 포함한 근본적 쇄신이었고, 이것이 비대위에서 논의되지 않는 한 당 혁신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 2시간 넘게 진행된 확대간부회의에서 심상정 의원의 동의를 얻어 도출된 합의안은 비대위 권한에 대해 자주 말이 나왔지만, 그 핵심은 비례대표 추천권이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종북주의와 패권주의에 관한 한 논의될 여지가 전혀 없음이 확인된 상태에서 그냥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을까요? 비례대표 문제는 모든 정파가 함께 포기해야할 기득권의 문제일 뿐, 당 혁신의 핵심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의 근본적 혁신을 제외한 채 구성되는 비대위가 답일 수는 없지요.

 

그날 퇴장한 중앙위원 중에는 분당에 동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대로 합의안에 동의할 경우에는 당 혁신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함께 한 이들도 있었고, 퇴장하지 않고 남은 중앙위원 중에는 전진 소속의 이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다 나름의 논리가 있겠지만, 퇴장하였던 것이 당 혁신을 위한 올바른 방식이었다고 봅니다.

 

나아가 이대로 당이 쪼개질 것인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저는 신당의 조속창당론자이지만(분당론은 잘못된 표현이라고 생각하여 바꾸었습니다. 진보신당은 단지 민주노동당 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 밖의 진보정치세력을 규합하여 새로운 질의 정당 건설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까지 당 혁신 시도가 멈추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철저한 대선평가 및 당 쇄신을 위한 임시당대회 소집 요구가 그것이고, 당 혁신을 위한 당원대회가 그것입니다. 여전히 민주노동당에 일말의 희망을 갖고 당 개조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동지들과 함부로 절연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게 분당을 위한 요식행위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이를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마지막으로 정파에 속하지 않은 이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생각해보면 정파에 속하지 않는 이들은 민주노동당이 이 꼬라지가 된 것에서 자유로울까요? 자신들은 비판의 권리만 부여된 양 떠드는데, 도대체 이 지경이 되도록 뭘 했을까요? 평당원으로는 힘이 부쳤다고요? 그렇다면 자신과 비슷한 의견을 가진 이들을 규합하여 이를 관철시킬 수 있도록 노력했어야 하지요.

 

정파담합구조 탓을 하면서 자신은 고결한 척 하는 넘들도 조금 역겹습니다. 자신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이들이 민주노동당 내에서든, 아니면 밖에서든 제대로된 진보정당을 만들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페이퍼 당원이라면 모르되, 자신이 나름대로 활동하고 있는 이라고 한다면, 그런 식으로 책임회피하는 모습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들과는 솔직히 함께 당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구요.

 

제가 전진이라는 정파에 속해 있지만, 제 활동의 대부분은 그와 무관하게 이루어집니다. 정파라는 규정력이 그리 강하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그 활동이라는 것도 그리 적극적이지 않지만요. 정파의 속한 이들도 평당원이라는 것도 무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의견그룹이 활발하게 제 역할을 할 때 진보정당은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북주의 청산과 관련된 것은 토론할 사항이라는 점도 밝혀둡니다. 저는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이것만으로 제대로 된 정당의 조건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좌파정당을 위한 새로운 주체형성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 시기에는 종북주의, 패권주의 청산등의 근본적 혁신이 대립의 주된 지점입니다. 이것만은 아니지만, 이것을 빼놓고 혁신을 말하기는 어려우며, 말해서도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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