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더 선전에 신경쓰면 안되나

2006/07/28 13:08

- 자본주의 말고 그 대안사회에서는 박노자가 말하는 문제들이 해결될까.

그렇더라도 그런 세상을 꿈꾸어야 하겠지만...

  

- 다음에서 메일을 확인하려다 눈에 띠는 핫이슈에서 현대차노조의 파업에 관한 글이 보여 클릭했고, 그와 관련된 댓글와 엮인글들을 보면서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왜 이렇게 생각이 없는 것인지... 자신이 비정규직 노동자라고, 하청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라고 밝힌 넘들이 현대차노조의 파업은 너무한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나서 하는 얘기가 보수언론에서 떠들어대는 논리이다.

 

박노자는 "생산수단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 자신들의 진정한 존재로부터도 소외되어 인간으로서의 ‘나’를 상실"하고 마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글을 썼지만, 오히려 자본의 논리에 틀어박혀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 더 문제가 아닐까 싶다.

  

물론 자신의 일상에서, 경험을 통해 현대차노조의 파업을 비판할 수는 있다. 이에 대해서는 상당부분 진보진영 내지 민주노조운동의 책임이 있다. 이를테면 포털 등에서 선전, 홍보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그렇다. (이렇게 말하니 정부에 대한 비판여론이 높은 것은 홍보가 잘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면서 국정브리핑을 강화한 노무현 정부가 생각나네.)

  

언론에서 왜곡을 하기 때문에 아예 상대를 하지 않는다지만, 노조원들만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바로 주위에 있는 이들부터 현대차의 파업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을 해야 할 일이다. 양적으로 밀리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려면 차근차근 해나가야 한다. 

  

현대자동차노조는

 

사측과 협상을 한지 몇개월이 지났지만 사측은 정몽구 회장의 구속을 이유로 단체협상을 계속 미뤄왔고, 어쩔 수 없어서 한 파업이라는 것을,

현대차노조의 파업손실액이 2조가 넘는다고 뻥치는 자본과 언론에 대해 한달 정도의 재고물량이 남아있는데다가 추후에 야근, 특근을 통해 보충을 하기 때문에 많아야 800억이 넘지 않으며, 기껏 100-200억 정도라는 것을, (물론 이것도 적은 것은 아님을 밝혀야 할 것이다)

한해 순이익이 2조가량인데, 그렇다면 이제 올해는 적자인 것이냐고 반문하면서 매년 현대차는 조가 넘는 순이익을 봐왔다는 사실을,

금속연맹에 속해 있으면서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투쟁하고 있으며, 산별전환이 바로 비정규직을 포함하여 함께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만약에 자기 노조의 단기적인 이해만을 생각했다면 산별전환을 하지도 않았을 것임을,

현대차가 올스톱하면 하청업체도 놀 수밖에 없기에 함께 투쟁하여 쟁취하는 파업이 되도록 노력해왔다는 것을,

상당부분 부분파업이 이루어졌음에도 전면파업으로 왜곡되고 있다는 것을,

하청업체의 노동자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현대차노조가 벌여왔던 사업이 무엇인지를,

자신들을 노동귀족으로 몰아세우고 있는 사측의 연봉이 얼마인지, 그리고 조중동의 보수는 어느 정도인지를,

그 연봉을 얻기 위해 매년 몇명의 노동자들이 죽어나가고 잔업, 철야, 특근을 얼마나 해대는지를, 

이번 파업의 쟁점은 무엇이고, 이것이 왜 중요한가를,

   

이해하기 쉽게 선전했어야 한다.

포털로 여론이 몰리는 현실에서(포털저널리즘이 가진 문제는 별개로 한다) 포털을 이용할 생각을 왜 못하는가.

당당하게 현대차노조원임을 밝히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여유가 된다면 엮인글로, 댓글로 헛소리를 해대며 달라붙는 넘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주면 된다. '친절한 현자노조'는 불가능한가.

포털에 뉴스를 공급하는 참세상, 프레시안, 오마이뉴스, 민중의소리 등의 인터넷언론을 활용하면 안되는가.     

 

물론 이런 것들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으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포털에 널부러져 있는 쓰레기글들을 보면서 열받아서 옆길로 샜다. 젠장...

     

[박노자칼럼] 내가 자본주의를 혐오하는 까닭 (한겨레 2006-07-25)

 

많은 경우 ‘좋아서’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어서’ 가게 되는 직장에서의 고된 근무가 끝난다고 해도, 체제가 강요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은 그들에게 찾아오지 않는다. 가정에서는 ‘말 잘 듣는 것’이 ‘착하다’는 것을 익히고, 학교에서는 세상에서 출세하려면 꼭 외워야 할 정답이 하나씩만 있다는 것을 터득하고, 군대에서는 ‘튀는 행동’이 신체적인 고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익힌 이들은, 자본이 강요하는 노역의 시간이 끝나고도 곧바로 자본이 제공하는 달콤한 중독에 빠져든다.

   

소비의 대상은 재벌이 만들고 파는 소주·맥주나 백화점의 상품이 되든, 아니면 재벌이 협찬해주고 재벌의 광고가 계속 눈에 띄는 텔레비전 속의 운동 경기가 되든, 우리를 노역시켜주고 돈 쓰는 기쁨을 안겨주는 우리의 주인들, 곧 재벌들의 손을 벗어나는 시간이란 우리에게 거의 없다. 바보상자의 화면에서 국가·재벌이 고용한 현대판 검투사들이 자신의 몸값을 높이려는 처절한 싸움을 보지 않는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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