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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2
    최선을 다하는 자유
  2. 2005/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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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선을 다하는 자유
  3. 2005/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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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선을 다하는 자유

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2

세계노동운동사 [6장] 사회주의 대 파시즘 (1917~1945) 2

파시즘에 패배하는 유럽 사회주의 운동

이탈리아 사회당과 노동자 운동이 공장 평의회로 결합하여 혁명적 정세를 만든다.

파업의 물결이 1917년부터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노동자 운동에 새로운 흐름이 생겨난다. 노동자들이 1918년부터 관료화된 산별노조의 통제에서 벗어나 ‘내부 위원회’라는 새로운 현장 조직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당에서도 새로운 흐름이 생겨난다. 사회당 토리노시 지부(당원 1000명)의 젊은 활동가인 안토니오 그람시와 팔미로 톨리아티는 1919년 메이데이에 [새 질서]라는 주간지를 창간하고 ‘공장의 전체 노동자가 생산 활동을 직접 통제하는 것이 대안 사회의 진정한 출발점’이라고 역설하면서 공장 평의회를 건설할 것을 주창한다. [새 질서]그룹의 노력으로 1919년 9월 초 피아트사를 비롯해 토리노의 30개 공장에서 5만 노동자가 내부 위원회를 공장 평의회로 전환할 것을 결의한다. 두 개의 새로운 흐름이 하나로 멋지게 통일된 것이다. 그리고 사회당은 10월 당 대회에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1919년 3월 창설, 코민테른 또는 제3인터내셔널이라고 부른다―에 가입할 것을 결의한다.

이때 이탈리아는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실업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이탈리아는 1차 세계대전에서 60만 이상의 희생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연합국으로부터 받은 보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에 이탈리아의 여론은 연합국과 자국 정부 모두를 성토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1919년 11월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진다. 좌파인 보르디가가 선거 불참을 주장했으나 사회당은 선거에 참여하여 총 508석 중 156석을 얻으며 가장 강력한 정당으로 급부상한다. 소농을 주요 기반으로 하는 가톨릭 계열의 신생 정당인 인민당도 농촌 지역에서 100석을 차지한다. 정당 조직조차 갖추지 못한 집권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재앙에 가까운 결과다. 사회당의 당원 수는 전전(戰前) 2만에서 18만으로 늘어난다. 이런 상황을 타고 노동총동맹의 조합원은 25만에서 200만으로 급속히 증대한다.

토리노에서는 공장 평의회 회원이 15만 명으로 늘어난다. 그러자 사회당 토리노시 지부와 토리노 노동회의소는 12월에 공장 평의회를 공식 노선으로 승인한다. (그러나 당권파인 세라티는 ‘혁명의 주역은 조직 노동자이지 미조직 노동자가 아니다’라며 공장 평의회 노선을 맹렬히 반대한다.) 토리노시지부가 12월 3일 집회 명령을 내리자 공장 평의회 체계를 통해 12만의 노동자가 1시간 만에 집회장으로 모여든다. 사회당의 역사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조직력이고 행동력이다. 토리노시 지부는 공장 평의원들을 대상으로 12월 한 달 동안 대대적인 정치 교육을 벌인다.

자본가들이 1920년 3월 갑자기 섬머타임제를 실시하고 이에 반대하는 내부 위원들을 해고하면서 선제공격을 가한다. 이에 맞서 토리노의 공장 평의회들은 공장 점거 파업에 돌입한다. 이어서 금속 노조가 즉각 총파업을 선포하고 노동총동맹도 4월 13일 형식적으로나마 총파업을 선언한다. 그러자 총파업의 중심을 깨기 위해 전국의 헌병대가 토리노로 몰려든다. 반면에 세라티 등의 당권파는 토리노가 고립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다른 지역의 행동을 이끌어내기보다는 오히려 토리노 노동자들의 자제를 촉구한다.

6월에 다시 수상이 된 지올리티는 ‘경영 참여’를 약속하면서 파업 지도부를 협상장으로 이끌어낸다. 정부와 노동총동맹 사이에 여름 내내 지루한 협상이 계속된다. 참다못한 노동자들이 8월 31일 공장 점거 파업을 재개한다. 공장에는 적기가 휘날리고 노동자들은 경영권까지 요구하면서 일부는 무장까지 갖춘다. 9월 9일 노동총동맹과 사회당의 합동 회의에서 좌익들은 권력 투쟁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고 노조를 중심으로 대규모 투쟁을 벌이자고 주장한다. 아무튼 50만 노동자들이 4주 동안이나 공장 점거 파업을 벌이는 열기를 타고 전국에서 공장 평의회가 건설된다.

토리노에서는 피아트의 파업 노동자들이 직접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하여 매일 37대의 자동차가 생산된다. 생산에서 철수하는 고전적인 파업과는 다르게 파업 중에 노동자가 직접 생산을 장악하고 스스로 운영하는 놀라운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것은 사회당 토리노시 지부의 의식적인 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한편 남부의 빈농들은 토지 개혁을 요구하며 토지 점거 운동을 벌이고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토지의 완전 집단화까지 요구한다. 지올리티 정부는 사태가 더 발전하기 전에 서둘러 노사 협상을 타결한다.

사회당은 11월 지방 선거에서 파업의 성과를 이어받으며 약진한다. 하지만 파업 지도부의 타협은 혁명을 기대하던 노동자들에게는 배신으로 비쳤기에 노동자들의 투쟁 전열은 오히려 흐트러져 있었다. 이런 틈을 놓치지 않고 자본가·지주계급은 극우 파시스트들을 부추겨 노동자 세력에 대한 테러를 자행한다. 페라라 시청에 사회당의 붉은 깃발이 게양되는 그 시간, 볼로냐 시청 광장의 사회당 승리 기념 대회에는 파시스트 테러단의 폭탄이 투척돼 10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는다.

보르디가의 선거불참파와 그람시의 [새 질서] 그룹은 1921년 1월 사회당 당 대회 도중에 대회에서 철수하여 전광석화처럼 이탈리아공산당을 창당한다. 4만 명이 공산당으로 당적을 옮긴다. 그리고 500명의 국회의원을 뽑는 5월 총선에서 공산당은 29만 표를 얻어 15석을 획득한다. 사회당은 150만 표를 얻어 123석을 확보한다. 그러나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도 35석을 확보한다. 1919~20년의 혁명적 정세는 이제 반동이 우세한 국면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무솔리니가 중간 계층의 광범한 지지를 얻으며 독재 권력을 구축한다.

무솔리니는 초등학교 교사 출신으로서 한때 사회주의자였으나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열렬한 민족주의자로 전향한다. 무솔리니는 전쟁이 끝나고 떠돌이 제대 군인을 모아 1919년에 ‘전투단’을 조직하고 사회·경제·정치적 위기를 이용하여 파시즘 운동을 전개한다.

무솔리니 추종자들은 검은 셔츠를 입고 해골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 로마군대식 행진에 맞춰 투쟁가를 부르면서 퍼레이드를 벌인다. 상징과 의식을 이용한 이 새로운 행동은 인간의 원시적인 힘과 고대 풍속, 종족 우월성을 환기시키면서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 검은 파시스트들은 볼셰비즘에 대항하는 보루로 자처하면서 사회주의자들과 파업 노동자들에게 조직적인 테러를 가하고 노조 건물을 방화하고 사회주의자 지방 관리들을 집무실에서 몰아내는 만행을 자행한다.

파시스트는 국가·법률·질서·사유재산의 보호자로 각광받기 시작한다. 파시즘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버무린 이데올로기와 무솔리니의 개성에서 풍기는 매력이 함께 작용하여 단기간에 대중 운동으로서 성공한다. 앞서 보았듯이 파시스트당은 1921년 총선에서 35석을 얻는다.

이에 철도 노조는 1922년에 모든 노동자 세력을 모아 파시스트들에 대항할 노동동맹을 결성하자고 제안한다. 여기에는 자유주의자들과의 제휴를 통해 파시스트들을 제압할 방안을 모색하던 노동총동맹 지도부도 동참한다. 그러나 공산당은 끝내 불참한다. 이렇게 파시즘을 물리칠 좋은 기회는 흘러가 버린다. 그 후 파시스트들의 테러 공세 속에서 노동총동맹의 조합원은 200만에서 80만으로 급감하고 사회당 당원 수는 2만 5천으로 감소한다. 공산당 당원 수는 5천 명까지 감소한다.

무솔리니는 10월에 왕국을 구할 것을 선포하고 파시스트 민병대를 이끌고 ‘로마 진격’을 감행한다. 파시스트를 볼셰비즘에 대한 보루로 활용해왔던 자유주의 연립 내각은 10월 28일 검은 셔츠의 행렬이 수도에 다다르자 당황하여 계엄령을 선포하려한다. 그러나 국왕이 선포를 거부함으로써 내각은 물러나고 무솔리니가 수상으로 임명된다. 무솔리니는 수상으로 임명된 후 몇 달 사이에 전권을 장악하고 자신의 민병대를 국가 기관으로 만든다.

이에 대해 총파업으로 대항하자는 호소는 사회당과 노동총동맹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무산된다. 공산당의 보르디가는 “파시즘은 단순히 부르주아 지배의 연장(延長)일 뿐이며 반혁명은 필연적으로 실패하게 돼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그람시는 “파시즘의 성공은 중간 계층의 지지와 동원에 기반하고 있는 점을 주목하자”고 주장한다. 무솔리니의 탄압으로 공산당은 지도자인 보르디가와 면책 특권이 없는 지방 의원과 당원의 1/4이 검거된다. 의원단만 유일한 합법 공간으로 남는다.

무솔리니는 “민주주의는 계급투쟁을 부추기고 국민에게 공론을 일삼게 함으로써 수없이 많은 당파로 분열시키는 역사적으로 낡은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장기적인 안목과 대담성을 지닌 강력한 지도자 밑에서 정열적으로 행동할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스스로를 ‘두체(지도자)’로 지칭한다. 이러한 ‘지도자의 원칙’은 적지 않은 대중에게 능률적이고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무솔리니는 적어도 나태한 이탈리아인들을 움직여 기차가 제시간에 떠나도록 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파시스트는 1924년 선거에서 60%를 득표한다. 공산당은 4%를 득표하여 그람시를 포함하여 19명이 당선된다. 코민테른 대회에 참가했다가 러시아에 남아있던 그람시는 의원 면책 특권을 이용하여 파시즘 치하의 고국에 돌아온다. 무솔리니는 1925년 1월 독재를 선언하고 탄압을 강화한다. 이에 대해 공산당은 국내가 아닌 프랑스 리용에서 당 대회를 갖고 반파시즘 공동 전선과 노농동맹을 전략 노선으로 확정한다. 무솔리니는 1926년 11월 파시스트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 활동을 불법화하고 사회당과 공산당의 의원단까지 체포한다. (이때 같이 체포된 그람시는 1935년 4월 27일 감옥에서 사망한다.)

무솔리니는 정당이나 지역 선거구가 아니라 경제적 직능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대의체를 구성한 ‘조합 국가’가 민주주의의 맹점인 계급투쟁으로 인한 무정부 상태를 해결한 진보된 경제 사회라고 선전한다. 이에 따라 전국의 경제생활이 22개 분야로 구분되고 각 경제 분야마다 노동자·자본가·정부 3자가 공동으로 참가하는 조합이 결성되어 3자 대표들이 노동조건·임금·가격·산업정책을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대표로 이루어지는 국가 회의가 이탈리아 경제의 자급자족을 공동으로 수립하게 된다. 그러나 종국에 이르러서는 각 조합의 경제 회의는 모두 정부로 통합되고 이 회의의 대표는 정부에 의해 임명된다. 뿐만 아니라 1925년에는 파시스트 노조가 노동자의 유일한 대표 기관으로 인정되고 기업가들은 공장 내에서 무제한의 권위를 행사하게 된다.

파시스트는 이후 몇 년 동안 신문을 검열하고, 노조를 해체하고, 선거권을 축소하고, 다른 모든 정당을 해산시키고,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모든 반대 의사 표명을 금지시키고, 정적들을 처벌하기 위해 특별 재판소와 비밀경찰을 만든다.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단일 정당을 통해 국가 기구와 관료들을 완전히 통제하면서 독재 체제를 구축한다.

독일 사회민주당이 노동자계급의 혁명을 배신한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1917년 11월 3일 혁명을 일으키고 노동자·병사 소비에트를 건설한다. 사회민주당의 샤이데만은 11월 9일 공화국을 선포한다. 노동자·병사 평의회는 12월 16일 전국 대회를 열고 기간산업의 사회화,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 해체, 국가 기구의 민주화를 촉구한다.

그런데 바로 하루 전날, 사회민주당 지도부가 독점 자본가 대표들과 만나 비밀 협정을 맺으며 “한 사발의 죽에 혁명을 팔아넘긴다.” 혁명을 마치 단순한 노동쟁의인 것처럼 다룬 것이다. 물론 자본가들은 그 대가로 상당한 양보를 한다. 평상시에는 장기간의 총파업으로도 이룰 수 없는 성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극우파인 아돌프 히틀러는 이를 보고 차갑게 비웃는다. “11월의 권력자들이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는 것을 누가 방해라도 했단 말인가? 그들은 그럴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던 상황과는 아주 다르게 독일 사회민주당은 실제 평의회 의원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 리프크네히트는 이런 급박한 시기에 독립사회민주당이 적절한 행동을 취하지 못하자 12월 30일 독일공산당을 새로 창당한다. 그러나 가장 영향력 있는 좌익 분파였던 혁명적 노조 간부 그룹은 독립사회민주당에 잔류한다. 그리하여 20대의 무정부주의 청년들이 다수를 이루는 ‘국제 공산주의 그룹’이 독일공산당의 주류를 차지하게 된다. 이들은 “우리에게는 1000표의 투표보다 가두에 있는 10명이 훨씬 가치 있다”고 호기롭게 외친다.

바로 이때 독립사회민주당원인 아이호른이 베를린 경찰서장에서 해임되자 베를린의 노동자들이 무작정 반란을 일으킨다. 며칠 사이에 무장한 노동자들이 베를린의 철도역·전화국·가스·수도·전기공장·주요건물들을 점령한다. 혁명은 다른 도시로도 확산된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의 임시 정부는 노스케(사회민주당원)를 내세워 2주일 만에 혁명 운동을 진압한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1919년 1월 15일에 체포되어 살해된다. 노동자·병사 평의회는 해체 당한다. 세계 최대의 독일사회민주당이 1차 세계대전을 찬성한 데 이어 두 번째로 민중을 배신한 것이다.

일주일 뒤인 1월 21일 국민의회 선거가 실시된다. 사회민주당이 1111만 표를 획득하고, 독립사회민주당은 218만 표를 얻는다. 제1정당이 된 사회민주당의 에베르트와 샤이데만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과 수상으로 선출된다. 그렇지만 진정한 승자는 의원수의 54%를 차지한 부르주아 정당들이다. 독일공산당은 이 선거에 불참하고 여름까지 독일 곳곳에서 무장 봉기를 일으키고 실패하기를 반복한다.

노동자들은 3월 3일 ‘노스케·샤이데만·에베르트의 체포, 소련과의 외교 재개,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단행한다. 그러나 1주일도 못되어 노스케와 폰 루트비츠 장군의 군대에게 진압된다. 투쟁의 주요 거점인 뮌헨에서는 노동자들이 5월 1일까지 도시를 장악하고 항전하지만 역시 피비린내 나는 진압을 당한다.

8월 11일 바이마르 헌법이 통과되어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된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동지이자 애인이었으며 그녀의 노선을 계승한 독일공산당의 새 지도자 파울 레비와 스파르타쿠스동맹 출신 지도부는 10월에 당 대회―시간과 장소도 가르쳐주지 않는 편법까지 쓰면서―를 열고 극좌 맹동주의자들을 당에서 쫓아낸다. 10만 7천여 명의 당원 중 절반 이상이 축출된다. 레비는 독일공산당과 독립사회민주당의 재통합을 강력하게 추진한다.

노동자계급이 우익 쿠데타를 총파업으로 막아낸다.

1920년 3월 12일, 볼프강 카프 박사와 폰 루트비츠 장군이 이끄는 세력이 베를린으로 진격하여 도시를 점령하고 왕조를 재건하려는 정부를 세운다.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바이마르정부는 야간에 드레스덴으로 도피한다.

노동자들은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3월 14일 총파업에 들어간다. 자유노동조합―사회민주당을 지지하던 최대 노조연맹―의 주도 아래 기독교 노동조합,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당이 조직한 허시-둔커조합, 심지어 ‘황색’(어용)노조까지도 파업에 가담하여 총 1200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벌인다. 총파업은 독일의 구석구석까지 마비시킨다.

폰 루트비츠 장군이 군대를 동원하여 파업을 분쇄하려 했으나 노동자들은 전혀 위축되지 않는다. 그러자 카프는 3월 17일 스웨덴으로 도피하고 루트비츠는 다음날 장군직에서 물러난다.

그런데도 루르의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령하고 파업을 계속한다. 그리고 3월 22일 정부와 노조간의 협정 체결, 카프 일당 처벌, 특정 산업 즉각 사회화, 반동적인 군사 조직 해체, 노스케의 퇴임을 약속 받고서야 파업을 끝낸다. 총파업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자유노동조합의 칼 레기엔이 사회민주당과 독립사회민주당에 ‘노동자 정부’의 수립을 제안한다. 그러나 두 당의 연정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후 진행된 총선에서 독립사회민주당의 지지율은 18.8%까지 상승한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의 지지율은 1/3이 줄어든다. 그 결과 부르주아 정부가 들어선다.

독일 공산당은 사회민주당 좌파와 공동 전선을 형성한다.

독일공산당은 10월에 독립사회민주당과 합당(당원 45만 명)한다. 코민테른에 가입한 정당으로서는 서유럽 최대의 대중 정당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름은 독일공산당을 그대로 계승한다.

독일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시로 1921년 3월 만스펠드 광산에서 다시 봉기를 감행한다. 그러나 역시 실패로 끝난다. 이 여파로 당의 지역 조직들이 파괴되고 당원은 절반으로 줄어든다. 레비는 ‘폭동주의에 반대하는 우리의 노선’이라는 문건을 통해 코민테른을 격렬히 비판한다. 그리고 사회민주당 지도부에 공세적인 투쟁을 제안하고 기층 당원들과 적극적으로 공동 투쟁을 전개하여 지도부에 비판적인 사회민주당 당원들을 견인하자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레비는 당에서 쫓겨난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1년 뒤에 당의 정식 노선으로 채택된다. 코민테른이 1922년 11월 4차 대회에서 파시즘의 대두에 대항하여 ‘노동자계급의 통일 전선’을 전술로 결정한 것이다. 독일공산당은 자유주의자인 라테나우 외무상이 극우파에 의해 암살당하자 파시즘 반대 시위운동을 주도한다. 그리고 사회민주당 노동자들과 함께 공장 평의회 건설 운동을 전개한다. 이때는 살인적 인플레이션이 막 절정으로 치닫던 상황이라 정세는 1923년에 혁명 전야로까지 발전한다. 공산당과 사회민주당 좌파는 작센 주와 튀링겐 주에서 연립 정부를 수립한다. 그러나 부르주아 연방 정부가 불법 군사 행동으로 이 연립 정부를 무너뜨린다. 그렇지만 공산당은 1924년 총선에서 12.6%의 지지율을 획득하며 운동의 성과를 유지한다. 공산당은 1926년 구 독일제국 군주 재산을 몰수하는 데에 대한 국민 투표를 제안하면서 사회민주당과 공동 전선 전술을 펼쳐 1500만 표의 찬성을 얻어낸다. 이처럼 통일 전선 전술은 사회주의 세력이 약진하는 발판이 된다.

이러한 성과를 기반으로 사회민주당은 1928년 총선에서 “학교 급식이냐 군함이냐”는 공격적인 구호를 내걸어 모처럼 다수 의석을 확보하고 다시 연정을 이끌게 된다. 그러나 막상 군함 건조 예산안이 논의되자 우파 정당들과 협력해야 한다며 ‘학교 급식이 아니라 군함’을 선택한다. 더 나아가 사회민주당이 연정을 이끄는 프로이센 주 정부는 1929년 일체의 시위를 금지한다는 명목으로 공산당의 메이데이 기념 시위를 탄압하여 33명의 ‘형제’를 살해하는 참극을 빚기까지 한다. 이는 사회민주당을 공격하는 당 지도부의 극좌적 전술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바라보던 의식 있는 공산당 당원들까지 사회민주당을 증오하도록 만든다.

이처럼 사회민주당은 두 번째로 권력에 오른 시점에서 노쇠 현상을 보인다. 사회민주당의 당원은 80~100만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고령화가 심해 40세 미만의 의원은 10%, 25세 이하 당원은 8%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는 의원의 60%가 40세 미만이었던 나치나 당원의 1/3이 20대였던 공산당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는 별 인기를 끌지 못한다.

히틀러는 어린 시절 고아가 되어 비엔나에서 무명 화가로 궁핍한 시절을 보낸다. 여기서 비엔나의 풍경인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과 유태계 지식인, 맑스주의(국제주의)에 탐닉한 노동자들에 대해 증오감을 갖게 된다. 그 후 남부 독일 바바리아로 옮겨가 그림물감을 팔며 연명하다가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독일 군대에 입대하여 피 끓는 민족주의에서 숭고함과 해방감, 생의 의미를 확인한다.

전쟁이 끝나고 1919년 11월 혁명기에 바바리아에서 소비에트 공화국이 수립된다. 수다한 경향의 비밀 정치 조직들이 들끓는 바라리아에서 히틀러는 독일노동당에 일곱 번째 당원으로 가입한다. 이 당은 1920년에 ‘국가사회주의노동당’으로 개칭된다. 나치(Nazi)는 ‘국가적(National)''의 앞 글자와 ‘사회주의(Sozialismus)’의 중간 글자 둘을 합한 용어다.

1923년 프랑스군이 ‘전쟁 배상금 지불 불이행’에 대한 보복 조치로 독일 공업의 심장부인 루르 지방을 점령하자 이미 상당한 추종자를 확보한 국가사회주의자들은 굴욕적인 항복을 한 바이마르 정부를 격렬하게 비판한다. 히틀러는 1년 전에 있었던 무솔리니의 로마 진격을 모방하여 나치 행동대인 ‘갈색셔츠단’을 이끌고 뮌헨의 ‘비어홀’(맥주 집) 무대에 뛰어올라가 권총을 발사하면서 ‘국가 혁명의 발발’을 선포한다.

그러나 이 폭동은 한판의 우스갯거리로 끝나고 히틀러는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는다. 히틀러는 복역 기간 중 인종주의·민족주의·집산주의·역사이론·정치평론이 뒤범벅된 [나의 투쟁]을 출간한다. 무능한 바이마르 정부는 ‘관대하게도’ 1년도 못되어 히틀러를 석방한다.

한편 프랑스군이 루르 점령 지역에서 철수하고 미국의 차관이 들어오면서 독일의 경제는 급속히 부흥한다. 그러자 국가사회주의는 호소력을 잃고 히틀러는 ‘정신이상자’로 취급받는다. 이런 상황은 1929년 대공황이 독일을 강타하고서야 변화된다.

히틀러가 경제 대공황의 혼란을 타고 권력을 잡는다.

1929년 11월 뉴욕 주식 시장의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하면서 미국은 유럽에 대부했던 단기 차관을 회수하기 시작한다. 독일 경제는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하고 이에 따라 파시즘이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나치는 1930년 12월 총선에서 12석이던 의석을 107석으로 늘리며 제2당으로 급부상한다. 반면에 공산당도 기존 의석에 23석을 추가한다.

그러자 독일의 정치 상황에 대해 불안을 느낀 외국 자본들이 서둘러 독일에서 철수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차관에 상당한 정도로 의존해 있던 독일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수많은 공장이 문을 닫고 실업자는 1932년 1월 전체 국민의 1/5인 600만에 육박한다. 1929년에 135억 마르크에 이르던 대외 무역은 1932년에 57억으로 감소한다.

사회민주당은 불행하게도 재집권한 지 1년 만에 터진 대공황에 대해 속수무책으로 무능력을 드러낸다. 공산당은 “나치가 집권해 부르주아 정당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싹쓸이하면 권력은 이제 우리 차례”라며 사회민주당의 무능력에 대해 사정없이 비판하고 나치당과는 거리에서 사실상 내전과 같은 투쟁을 전개한다.

공산당은 1932년에 당원 중 실업자가 85%에 이르게 되면서 노동 현장과 동떨어진 가두 정당으로 변해간다. 나치는 모든 혼란의 책임을 사회주의자들에게 전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점세력·토지투기업자·고리대금업자·불로소득·과세불평등에 대해 맹렬히 비난한다. 나치는 모든 선전 수단을 동원하여 불안과 공포에 질려있는 대중들의 감정을 격앙시키고 반유태주의를 부추기면서 혁명에 대해 공포감을 가지고 있는 중산층뿐만 아니라 유태인 자본가를 증오하는 노동자들까지 끌어들인다.

나치는 1932년 4월 총선에서 230석을 획득하면서 과반수는 넘지 못했지만 최대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된다. 나치당의 득표수는 1928년 80만 표에서 1932년 1341만 표로 증가한다. 공산당도 498만 표를 얻어 100석이라는 사상 최대 의석을 확보한다. 사회민주당은 노조의 지지를 기반으로 800만 표 이상을 획득한다. 독일민주당이나 독일통합국민당과 같은 중도파나 우파 정당들은 지지 기반을 상실한다. 이러한 선거 결과는 중간 계층이 공산당의 세력 확대에 불안을 느끼고 파시즘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사회민주당이 자신들을 따르는 노조를 총동원하여 히틀러보다 ‘비교적 덜 사악’하다고 생각되는 지난날의 반동 힌덴부르그 장군을 지지하여 당선시킨다. 힌덴부르그 대통령은 5월에 군부 실권자인 슐라이허 장군의 지원을 받는 파펜을 수상으로 임명한다. 그런데 파펜은 7월 20일 군대를 동원하여 사회민주당의 거점인 프로이센 주 정부를 해산시킨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은 열흘 뒤의 주 총선에서 심판하면 된다며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다. 공산당이 호소한 총파업은 공산당의 노동 현장 기반이 취약하여 공문구에 그친다. 나치당 베를린 지부장 괴벨스는 “붉은 무리들은 그들의 호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그 시간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조롱한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1933년 1월 10일 나치 당수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한다. 히틀러는 다른 정당과 권력을 나누어 갖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집권 즉시 국회의원 재선거를 준비한다. 히틀러는 2월 1일 제국의회를 해산하고 2월 4일에는 언론과 의사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신문과 집회를 금지하는 긴급조치를 발표한다. 공교롭게도 투표 1주일 전인 2월 27일 밤에 제국의사당 방화 사건이 발생하는데 나치는 이 사건을 빌미로―공산주의자의 소행이라며―한 달 사이에 1만 명을 체포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돌격대(SA: Sturmabteilung)나 친위대(SS: Schutzstaffel)가 운영하는 강제수용소로 보낸다. 그래놓고도 나치는 43.9%밖에 얻지 못해 독립국민당과 연립 내각을 구성해서야 간신히 과반수를 넘는 52%를 확보한다. 그러나 히틀러는 공산당 출신 의원들이 제거된 약해빠진 의회로부터 독재권을 부여받고 이어서 자신이 수립한 새 체제를 제1제국(신성 로마제국)과 제2제국(비스마르크가 창건한 호엔촐레른 제국)을 계승한 제3제국으로 명명한다.

나치스 정권은 노동자 조직을 어용 기관으로 만든다.

라이파르트가 이끄는 노동총동맹의 기관지는 4월 29일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메이데이를 환영하는 논문을 발표하고 노동자들에게 나치의 경축일에 참가하라고 호소한다. 라이파르트는 이탈리아 유형(파시즘)에 따라 노조를 재조직하는 일에 응하겠다고 성명을 발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 돌격대원들은 5월 2일 전국에서 노조 사무소를 습격하여 지도자들을 모두 체포한다. 나치당의 레이 박사는 5월 11일 노동자 조직인 ‘노동전선’을 결성하고 자신이 대표로 앉는다. 정부는 5월 13일 노조의 재산을 전부 몰수한다.

수백만의 세력을 가진 노조는 단 한 번의 투쟁조차 조직하지 못하고 참담하게 패퇴한다. 대부분 노조 지도자였던 사회민주당의 국회의원단은 5월 17일 파시스트 정부의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짐으로써 노예처럼 굴종한다. 그런데도 나치는 6월 23일 사회민주당을 폐쇄하고 최고 지도자들을 체포한다. 그래도 저항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잔혹하게 탄압한다. 사회주의적·혁명적 성향을 지닌 ‘나치당 초기 대중 운동 지도자들’도 1934년 반체제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나치는 1934년 6월 노동전선을 노동자, 고용된 봉급자, 직인, 그리고 자본가까지 포함하여 4개 부분으로 이루어지는 조직으로 재편성하고 노동자계급을 ‘원자화’하는 일에 착수한다. 노동전선은 2700만 명의 의무 가맹자를 갖고 있지만 단체협약을 체결할 권한도 없고 파업도 금지된다. 노동전선 내에서 노동자들은 ‘경영 지도자’로 불리는 기업가들에 종속된다. 노동자들은 꼭 소지해야 하는 ‘노동 수첩’을 통해 통제되면서 순종을 강요받고 많은 분야에서 직업이나 공장을 바꾸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히틀러가 전쟁 준비를 위해 군수 생산 증강에 박차를 가하면서 노동 시간은 점차 연장되고 실질 임금은 격감한다. 1939년에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 노동자의 생활수준은 1/3 정도 하락한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공포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만족하면서 살아간다. 1936년 올림픽 경기가 열린 베를린을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독일은 ‘권위적인 지배 아래 있지만 대다수의 국민이 만족하면서 살고 있는 나라’로 비쳐진다. 나치 정부는 ‘기쁨을 얻는 힘’이라는 대규모의 국영 오락 기관을 만들어 다채로운 연극 프로그램에서부터 대중 바캉스에 이르기까지 대중의 여가 생활을 조장한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39년까지 총 3900만 명이 이 기관을 통하여 주말여행이나 해외여행의 혜택을 누린다. 특히 나치가 박차를 가한 대중 바캉스 붐은 오늘날까지 유럽 노동자 생활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남는다.

히틀러는 민중의 수상을 자처하면서 “나도 어린 시절에는 여러분과 같은 노동자였음”을 강조한다. 나치는 ‘나치 청소년 운동’을 통해 각급 학교와 대학의 자라나는 세대를 나치 이데올로기로 무장시킨다. 그리고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을 당시에는 실업자가 600만 명이었으나 1938년부터는 노동력이 부족해진다.

프랑스에서는 공산당이 창당되어 사회당과 노동총동맹의 조직이 분리된다.

프랑스에서는 1916년부터 반전 파업과 군대 내의 항명 폭동이 빈발한다. 이러한 급진적 분위기는 1918년 11월에 전쟁이 끝나자 곧바로 사회당의 당세 신장과 노동총동맹의 조합원 증가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사회당은 1919년에는 종전 후 처음 입당한 청년 당원들이 3/4을 차지하게 되고 11월 총선에서는 득표율이 기존의 17%에서 21%로 성장한다. 하지만 새로 도입된 결선 투표에서 보수파와 자유주의자들이 연합하는 바람에 의석은 오히려 102석에서 68석으로 줄어든다.

철도 노동자들은 1920년 5월 1일 철도 ‘국유화’를 요구하며 총파업을 전개한다. 금속·건축·소매업·운수·부두·광부·가스 노동자들은 노동총동맹의 계획에 따라 10일 동안 ‘3회 연속 파업’으로 철도 노동자의 투쟁을 지원한다. 그러나 이 연대 파업은 초기에 좌익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지도부의 준비 부족으로 효과적으로 전개되지 못하다가 5월 22일 무조건 취소된다. 이 영향으로 1912년 40만에서 1918년 120만, 1919년 말 200만으로 증가하던 노동총동맹의 조합원 수는 파업 철회 후 1년도 못되어 조합원의 2/3 이상이 탈퇴하여 60만으로 감소한다.

사회당은 1920년 12월 당 대회에서 대의원의 68.7%의 찬성으로 코민테른 가입을 결정한다. 그리고 다음해 5월 프랑스 공산당―정식명칭은 ‘공산주의인터내셔널 프랑스지부’―으로 당명을 바꾼다. 그러나 당 대회 소수파는 사회당이라는 이름으로 잔류하고 68명의 의원 중 55명이 사회당을 선택한다.

이에 따라 노조 운동도 분열된다. 공산당은 1922년 사회당과 가까운 노동총동맹에서 분리하여 새로운 노총인 통일노동총동맹을 창립한다. 공산당과 통일노동총동맹은 1927년 ‘프랑스의 모로코 개입 전쟁’에 반대하여 총파업을 주도한다. 보수파 정부의 혹독한 탄압을 받아오던 공산당은 이 총파업 때문에 심지어 의원들까지 면책 특권을 박탈당하고 구속된다.

그렇지만 공산당은 신흥 금속 산업의 노동자, 파리 교외의 노동자 밀집 지역, 북부 산업 지대에서 확고한 지지 기반을 마련하여 이들 지역에서 지자체를 장악하고 1920년대 말에는 총선에서 100만 표 가까이 득표할 정도로 성장한다. 그러나 결선 투표 때문에 의원 수는 최대 14명을 넘지 못한다. 반면에 사회당은 전통적 소규모 산업 노동자들에게 지지를 얻으며 150~200만 표 정도를 획득하지만 결선 투표에서 중도 우파인 급진사회당과 곧잘 선거 연합을 펼치면서 공산당보다 훨씬 많은 의석을 얻는다.

통일 전선으로 인민전선 정부가 창출되고 노동자 운동이 급성장한다.

프랑스에서는 대공황이 뒤늦게 찾아와서 더 오래 지속된다. 프랑스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금융계의 큰손들이 금융 자산 가치를 보장하는 금본위제와 디플레이션 정책을 고집하는 바람에 공황이 더 악화된 탓이다. 이런 상황을 타고 ‘불의 십자가''와 같은 극우 단체들이 급격히 대두한다. 유대인 금융사기꾼 스타비스키가 자살한 의문의 사건(1933년 말)에 급진사회당의 고위 정치인들이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자 의회는 1934년 2월 6일 급진사회당 정부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킨다. 극우파들은 바로 이날을 의회 정치를 전복하고 파시스트 체제를 수립할 호기로 보고 대규모 시위를 전개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탈리아와 독일의 경험을 통해 파시스트 정부의 수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노동자 2만 5천 명이 누구의 명령이랄 것도 없이 당일 즉시 거리로 쏟아져 나와 극우파 시위대와 맞붙어 싸우기 시작한다. 2월 12일에는 노동총동맹과 통일노동총동맹이 함께 24시간 총파업을 벌이면서 450만 노동자가 작업장을 나와 시위에 참여한다. 이처럼 먼저 행동에 나선 대중들은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반파쇼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연일 시위를 전개하면서 사회당과 공산당에게 반파쇼 통일 전선을 구성하라고 촉구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공산당 당원이 급증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사실 공산당은 1930년에 토레즈가 사무총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당내 극좌파를 숙청하고 1932년 암스테르담 반전 국제 대회, 1933년 플레이엘 홀의 반파쇼 유럽 대회 등을 통해 아래로부터 사회당과의 교류를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2년 코민테른 4차 대회의 공동 전선 전술을 폐기하고 사회민주주의를 ‘사회파시즘’으로 규정하고 맹공격한다는 1928년 코민테른 6차 대회의 결정이 발목을 붙잡고 있어서 공산당은 대중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사회당과의 공동 행동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지 못한다. 그러나 1934년 7월 코민테른 13차 집행위원회 간부 회의는 불가리아 출신의 새로운 지도자 디미트로프의 강력한 주창으로 공동 전선 전술을 채택한다. 물론 여기에는 스탈린이 히틀러의 독일과 맞서 싸우기 위해 프랑스를 동맹국으로 필요로 하고 있던 상황도 작용한다. 아무튼 이에 따라 프랑스 공산당과 사회당이 7월 27일 역사적인 행동 통일 협정에 서명한다. 공산당 사무총장 토레즈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10월 9일 처음으로 급진사회당과의 협력을 주장하면서 ‘빵과 자유와 평화를 위한 인민 전선’을 제시한다. 노동자계급의 통일을 넘어 중간층을 포함하는 계급 연합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좌파 공동 전선과 급진사회당은 1935년 5월 지방 선거에서 곳곳에서 암묵적인 선거 연합을 맺어 승리를 거둔다. 전통적으로 보수 우파의 아성이었던 파리의 대학가 라탱구에서도 반파쇼투쟁위원회 활동가인 폴 리베 교수가 당선된다. 이는 프랑스에서 우파의 중요한 사회적 기반이었던 지식인·대학생들이 좌파로 대거 이동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이런 성과를 기반으로 한 달 뒤인 6월에 급진사회당·사회당·공산당이 어렵사리 선거 강령에 합의한다. 더구나 급진사회당 내 청년터키파가 7월 14일 대혁명 기념일에 깃발을 들고 좌파의 시위에 합류함으로써 이 날은 반파시즘 인민 전선이 시작된 날로 역사에 기록된다. 8월에는 코민테른이 7차 세계 대회를 통해 반파시즘 인민 전선을 코민테른의 공식 노선으로 확정하고 그 동안 사회민주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으로 분열되었던 노조 운동의 통일과 노동자계급 단일 정당 건설까지 주창하고 나선다.

노동총동맹과 통일노동총동맹은 성공적인 공동 총파업(1934년)의 기세를 몰아 1936년 3월 툴루즈에서 개최한 전국 노조 대회에서 통합을 달성한다. 대회는 노동자계급이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의견을 갖는 것은 묵인하지만 총동맹 내부에서 정치적 분파를 형성하는 것은 금지하기로 결정한다. 통합된 노동총동맹의 강령은 ‘기간산업과 신용 기관의 국유화’와 ‘최고 경제 회의에서의 계획적인 생산과 분배’를 명시한다.

1936년 4월 총선에서는 라디오 방송을 국정 홍보 수단으로 사용한 미국의 루즈벨트 민주당 정부의 영향으로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라디오 방송 연설이 도입된다. 이에 따라 “파시즘의 뒤에는 금융계와 산업계를 좌지우지하는 200대 가문이 있습니다. 200대 가문을 타도합시다!”라는 공산당 사무총장 토레즈의 힘찬 발언이 전파를 타고 전국의 가정에 전달된다. 선거 결과 196만 표를 얻은 사회당의 의석은 97석에서 146석으로 증가하고 150만 표를 얻은 공산당의 의석은 10석에서 72석으로 증가한다. 반면에 142만 표를 얻은 급진사회당은 158석에서 116석으로 42석이나 상실한다. 그 동안 중도 우파 급진사회당을 지지한 유권자의 상당수가 사회당으로 이동하고 노동자들의 표가 공산당으로 집중되면서 프랑스 사회 전체가 왼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이때부터 “프랑스 지식인은 좌파 편이다”라는 말이 상식으로 자리 잡는다. 공산당 당원 수는 1931년 3만 명에서 1937년 34만 명으로까지 급증한다. 어쨌든 전체로는 공산당·사회당·급진사회당·(통합)노동총동맹이 결집한 인민전선이 367석을 획득해 원내 다수파가 된다. 군소 정당인 공산당이 통일 전선을 추진하여 정치판 전체를 바꿔놓은 것이다.

선거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5월 11일, 지방 도시 르 아브르의 브레게 비행기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간다. 그런데도 경찰이 출동하지 않자 노동자들은 정권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몸으로 실감한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이 ‘기회’가 아닌가! 우리의 권리와 존엄성을 되찾을 기회! 이에 따라 노동자들의 투쟁은 5~6월에 프랑스 전역에서 무서운 기세로 발전한다. 5월 24일 파리코뮌 기념일에는 파리에 60만 노동자가 집결한다. 투쟁 소식이 시위 노동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노동자들은 이웃 공장의 정보를 듣기 위해 좌파 지자체 사무실을 찾아들고 공산당의 공장 세포들은 자발적으로 파업 선동에 나서기 시작한다. 5월 26일 파리 근교에 있는 뉴폴 비행기 공장에서 처음으로 공장 점거 파업이 시작된다. 이틀 뒤에는 프랑스 산업의 중추인 르노 자동차 공장에서 3만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고 작업장을 점거한다. 6월 첫째 주까지 파업 대오는 수백만으로 늘어나고 금속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사무직·서비스직 노동자들까지 가세한다. 노동자들이 점거한 공장은 비장함이 아니라 해방감에 들뜬 축제의 분위기가 만발한다.

이런 와중에 출범(6월 4일)한 블룸 인민전선 내각은 바로 다음날 파업 대표자들과 파리 마티뇽 호텔에서 협상을 벌인다. 그 결과 임금 7~15% 인상, 모든 노동자가 노조에 가입할 권리, (처음으로 실시되는) 산업별 단체 교섭, 직장 위원(산업별 노조의 작업장별 대표) 제도의 확립을 약속하는 ‘마티뇽 협정’이 체결된다. 이에 인민전선 정부는 프랑스은행·철도·군수공업을 서둘러 국유화한다. 의회는 40시간 노동과 유급 휴가 등의 노동법안을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며칠 만에 통과시킨다.

하지만 파업 노동자들은 이 정도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나아갈 것을 요구한다. 반면에 급진사회당 출신 장관들은 군대의 동원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공산당 사무총장 토레즈가 6월 11일 집회에서 “파업을 끝내는 법도 알아야 한다”고 외친다. 여러 곳에서 격론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토레즈의 호소는 파업의 종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다음날 금속 노조가 자본가들과 협상을 체결한다. 그 다음날은 르노의 2만 노동자가 블룸과 토레즈의 사진, 당 깃발을 들고 공장에서 나와 노동자 주거 지역을 행진한다. 이 여름 동안에 노동총동맹 가입자는 100만에서 530만으로 늘어나고 단체 협약은 1936년 29건에서 1938년 3월 5700건으로 급증한다.

자본가들은 자본 해외 유출로 반격을 가하며 인민전선 정부를 내려 앉힌다.

그러나 승리의 분위기는 오래 가지 못한다. 국경을 접하고 있는 스페인에서 작년에 집권한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에 대해 프랑코가 7월에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블룸 정부가 일찌감치 시련에 닥친 것이다. 영국과의 동맹을 히틀러의 독일에 대항할 유일한 방안으로 보고 있던 블룸 정부는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면 동맹 관계를 끊겠다는 영국 보수당 정부의 협박에 굴복하여 7월 25일 무기 수출 금지를 선포한다. 이로써 이웃 나라 파시스트들의 기선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 반면에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은 프랑코의 반군에게 무기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7월 31일 장 조레스 추모 대회에서 블룸의 면전에 대고 “스페인에 비행기를!”이라고 외친다. 뜻있는 노동자들은 처음 얻은 여름 유급 휴가를 스페인 정부를 지원하는 국제여단 활동에 바친다. 그리고 공산당은 하부 집회에서 선출된 대표들이 참여하는 인민전선 전국 대회를 개최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 중요한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인민전선은 상층에서의 단순한 협정에 머문다. 이처럼 인민전선 정부의 개혁을 추동하고 감시할 힘을 만들어내지 못함으로써 총선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후 선거 강령의 대부분이 사문화되어 버린다.

자본가들은 자본을 해외로 유출하며 블룸 정부에 압력을 가한다. 그러나 블룸 정부는 연립 정부 파트너인 급진사회당의 반대 때문에 선거 강령에 명시되어 있는 ‘자본 유출에 대한 통제’를 단행하지 못한다. 그리고 무역 수지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프랑화 평가절하를 실시하고 인상된 임금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방지하기 위해 물가 연동 임금제를 도입하려 하지만 상원의 반대로 무산된다. 이처럼 좌파가 다수인 하원에서의 결정은 우파들이 장악하고 있는 상원에서 번번이 발목을 잡힌다. 그러더니 10월에는 공장 점거 노동자들에 대해 최초로 경찰력을 동원하고 1937년 1월에는 잠정적으로 개혁을 중단한다고 선언한다.

이때부터 극우파 ‘불의 십자가’가 프랑스사회당―여기서 ‘사회’는 ‘사회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이라는 합법 정당을 만들어 활동을 재개한다. 3월 16일 파리 외곽의 클리시에서 이 프랑스사회당 시위대와 클리시 인민전선 위원회 소속 노동자들이 충돌하고 경찰 발포로 6명의 노동자가 사망한다. 이틀 뒤 숨진 노동자들을 기리는 장례 집회에는 100만이 넘는 노동자들이 참여한다. 그 관속에는 인민 전선 정부에 건 희망과 기대 또한 누워 있었다.

6월에 자본 유출이 6백억 프랑에 달하자 블룸은 정부에 강력한 외환 통제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제출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상원이 거부하고 나선다. 결국 블룸은 6월 20일 수상 자리에서 물러난다. 자유주의 부르주아 세력까지 포괄했던 인민전선 정부는 이렇게 1년 만에 내려앉는다. 이후에도 인민전선 자체는 유지되지만 급진사회당이 주도하게 된 새 정부는 어떤 진보 정책도 시행하지 않는다. 1938년 3월 잠시 2차 블룸 내각이 시도되지만 단 3주 만에 다시 실각한다. 이 때는 이미 인민전선 정부를 지탱해줄 노동자계급의 힘이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헤게모니를 되찾은 부르주아 세력은 이제 “블룸보다는 히틀러가 낫다”며 공공연하게 외치고 다닌다.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는 쿠데타에 무너진다.

스페인에서는 1931년에 공화국이 수립된다. 공산당·사회당·무정부생디칼리즘·농민·민족주의자·가톨릭교도·자유주의자로 구성된 민주주의 세력은 1936년 2월 총선에서 253석의 의석을 차지하면서 압도적으로 승리한다. 로블레스가 이끄는 반동 세력은 153석을 얻는 데 그친다.

공산당은 정부기관·군대·경찰·공장·은행·학교 등에서 반동 세력을 조속히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회당과 자유주의자들은 그러한 혁명적 방책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자 파시스트들은 자유롭게 반동 책동을 일삼는다. 결국 프랑코 장군이 1936년 7월 모로코에서 폭동을 일으키면서 내전이 시작된다.

공산당과 사회당은 그때서야 공동 행동 강령에 합의하고 파시즘 반대 투쟁을 공동으로 전개한다. 무정부 생디칼리즘 경향의 전국노동자연맹(170만)과 사회민주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지도하는 노조총동맹(190만)도 반파시즘 투쟁에 앞장선다. 그리고 프랑스·이탈리아·독일·폴란드·영국·캐나다·미국 등 세계에서 자원한 의용병들(국제여단)이 파시즘의 반동으로부터 스페인의 인민전선 정부를 구하기 위해 몰려온다. 스페인 내전은 민주 세력과 파시즘 세력간의 ‘전쟁’으로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인민전선 정부는 스페인 노동자·민중의 영웅적인 투쟁과 자발적인 세계 민중의 광범한 연대 투쟁에 힘입어 1938년 3월 내전에서 ‘일단’ 승리한다. 그러나 프랑코 군대는 히틀러와 무솔리니로부터 다량의 군대와 군수 물자를 원조 받으며 다시 반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반면에 인민전선 정부는 지도부가 분열―공산당(스탈린주의)은 무정부주의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킨다―되면서 점점 열세에 놓인다. 결국 1939년 3월 마드리드가 함락된다.

프랑코는 팔랑헤당(Falangist Party)을 기초로 파시즘 제도 건설에 착수한다. 프랑코는 23개의 산별노조로 노조전국대표자회의를 구성하고 여기에 노동자와 자본가를 함께 참가시킨다. 조합원은 의무 가입으로 1천만 명에 달한다. 프랑코는 각급 조합의 고위 간부를 직접 임명하고 조합을 허가 없이 조직하면 소요죄로 취급하여 무거운 금고형에 처한다.

불법화된 노조총동맹과 전국노동자연맹은 상당한 기간을 거쳐 기간 조직을 재건하고 지하활동을 전개한다. 그리하여 소극적이지만 저항 운동이 크게 발전하고 공공연한 저항에 대해서는 잔인한 형벌이 부과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파업이 일어난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완만한 혁명’은 완만하게 좌절한다.

오스트리아는 1918년 11월 공화국을 수립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주요 산업 기지가 있는 슬라브어권 지역들이 따로 독립해나가고 이에 따라 기존의 제국 군대도 철저히 해체되는 바람에 극도의 혼란에 빠진다. 이런 상황에서 병사 평의회 집행위원회가 군을 장악한다. 사회민주노동당은 ‘반전의 상징’인 아들러의 후광을 배경으로 노동자계급을 하나로 단결시킨다. 노동자 평의회는 계속 유지된다.

그런데도 사회민주노동당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지 않고 민주공화국에서 멈춘다. 농촌 지역이 여전히 우파인 기독교사회당에 장악되어 있고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유럽의 한 가운데에 자리 잡은 작은 나라여서 연합국이 무력으로 개입하거나 식량과 자원을 끊기만 해도 쉽게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국제 사회주의 혁명 없이 오스트리아의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하며 민주공화국 안에서 급진 개혁을 추진해나가는 게 최상책이라는 판단에서다. (반면에 볼셰비키는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결론은 ‘일국 혁명으로 세계 혁명을 촉진한다’는 관점에서 러시아 혁명을 수행했다.)

사회민주노동당은 1919년 2월 처음으로 실시된 총선에서 총 159석 중 69석을 차지하면서 제1당이 되어 좌우연정을 주도한다. 렌너가 초대 수상이 되고 바우어는 외무상을, 율리우스 도이치는 국방상을 맡는다. 정부는 소국으로서의 한계를 돌파하는 방편으로 독일과의 통일을 추진한다. 하지만 연합국의 반대로 무산된다.

그러자 사회민주노동당은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계획적인 조직 활동’이 노동 현장과 지역 사회에서 굳건히 자리잡아나가야 한다며 “완만한 혁명”의 장도(長途)에 나선다. 바우어는 사회화위원회를 만들어 공동 소유와 이윤 분배를 추진하는데 헝가리에서 혁명이 진행되고 있던 때라 우파도 이에 동조한다.

하지만 1920년 3월에 헝가리 혁명이 진압되자마자 우파는 사회화위원회를 무력화시킨다. 노동자 평의회는 권력 기관으로서의 역할이 계속 축소되다가 선진 노동자 투쟁 조직인 ‘공화국 방어동맹’으로 재편된다.
우파들의 반발로 좌우연정은 6월에 깨지고 기독교사회당이 10월 총선에서 제1당으로 부상하여 우파연정이 들어선다. 우파 정권은 집권하자마자 국가기구·경찰·군대를 우경화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게다가 ‘향토방위단’이라는 파시스트 정당이 농촌을 거점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사회민주노동당은 지방 정부에서 개혁을 계속 추진한다. 특히 비엔나에서는 ‘붉은 비엔나’, ‘비엔나의 기적’이라는 말들이 널리 회자될 정도로 놀라운 성과를 거둔다. 그 결과 비엔나 시민 200만 명 중 50만 명이 사회민주노동당에 ‘당비를 내는’ 당원이 되고 비엔나 유권자의 2/3가 사회민주노동당을 지지한다. 전국적으로도 1923년 총선부터 지지도가 다시 상승하기 시작하여 1927년 총선에서는 42%를 획득한다. 하지만 사회민주노동당을 제외한 모든 부르주아 정치 세력이 총 단결하는 바람에 여전히 권력에서 소외된다.

이런 대치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먼저 파시즘 반대 투쟁에 나선다. 3명의 파시스트가 사회민주노동당 집회장을 습격하여 1명의 병약자와 1명의 어린이를 살해한 샤텐도르프 사건에 대한 재판이 열리는 7월 14일, 비엔나의 노동자 대중이 당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총파업을 전개하고 수만 명의 파업 대오가 보수적인 사법부를 압박하기 위해 대법원 건물 앞에서 시위를 벌인 것이다. 그런데 우파 정부가 시위대에 발포를 명령하여 86명의 노동자가 사망한다. 그러나 사회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의사당 건물에서 이 참극을 목격하고서도 ‘방어동맹’에 어떠한 반격 명령도 내리지 않고 단지 ‘화해 정부’(대연정)을 구성해서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만 한다.

그러나 기독교사회당 우파는 ‘방어적 폭력’―사회민주노동당이 1926년 린츠 당 대회에서 채택한 전술―이 얼마나 ‘방어적’인지를 이미 확인한 터라 대연정 구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더 나아가 향토방위단과 함께 파시스트 정권을 수립하려는 행보를 드러내놓고 진행한다.

반면에 무장 반격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던 방어동맹의 8만 선진 노동자들은 D-데이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다가 오히려 일상 투쟁에서 괴리된다. 또한 1929년 세계 대공황이 오스트리아에 불어 닥치면서 노조원 수는 1920년의 절반 수준으로 감소한다. 그런데 사회민주노동당은 긴축 재정을 실시하라는 국제 자본의 요구에 손을 들어주는 등 원내에서도 여전히 소극적 태도로 일관한다. 그러자 사회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의 관심과 열의도 점차 식어간다.

돌푸스 수상의 기독교사회당 정부는 1933년 3월 의회를 해산하고 공산당과 방어동맹을 불법화한다. 이 지경까지 이르러서도 원내 1당인 사회민주노동당은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않는다. ‘보다 극악한’ 오스트리아 나치당과 대결하기 위해서는 ‘덜 사악한’ 기독교사회당의 조치를 묵인할 수도 있다는 당 지도부의 판단 때문이다. 사회민주노동당은 9월 당 대회에서 “파시스트 헌법의 강행, 당 해산, 노조 해산, 비엔나 시청 점령 등의 4개 조건” 중 하나가 감행될 때만 무장 반격에 나선다는 결정을 내린다. 후에 바우어는 “3월에 총파업과 원외 투쟁으로 맞섰어야 했다”고 통렬하게 자기비판 한다.

다음해 1934년 2월 프랑스에서마저도 파시스트가 파리의 거리를 점거하자 기독교사회당 정부는 3월 12일 바우어의 국외 추방과 방어동맹 간부의 일제 검거를 명령한다. 이에 빈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고 총파업이 선포된다. 파업은 파시스트 부대의 무력 공격을 받고 폭동으로 변하고 각지에서 방어동맹이 산발로 봉기한다. 4일 동안 벌어진 내전에서 노동자들은 용감하게 투쟁하다가 1200명이 사망하고 2만 명이 투옥된다. 사회민주노동당은 불법화되고 지도자들은 망명한다.

한편 오스트리아와 하나의 제국을 이루고 있던 헝가리에서는 1918년 10월에 합스부르크 왕조가 전복되자 12월에 공산주의자들이 공산당을 창당한다. 공산당은 사회주의 정당들과 연합하여 사회당을 만들고 1919년 3월 21일 노조(72만 명)의 힘을 기반으로 카롤라이 부르주아 정부를 붕괴시키고 노동자 정부를 수립한다. 공산당 지도자 벨라 쿤은 새 정부의 수상이 된다. 그러나 내부 갈등으로 8월에 쿤 정부가 물러나고 사회민주주의 정부가 뒤를 잇는다. 그러나 이 정부도 반동적인 루마니아·체코슬로바키아·프랑스 군대의 연합 공격으로 붕괴된다.

영국 노동자들의 총파업은 노동당 정부와 노조 지도부에게 배신당한다.

클라이드 조선 노동자들이 1919년 1월 전후 최초로 파업을 일으켜 승리를 쟁취한다. 9월엔 철도 노동자들이 단기간 파업으로 승리를 쟁취한다. 곧 이어 10월 중순에 100만의 탄광 광부들이 임금 인상과 탄광 국유화를 요구하면서 전국 파업에 들어간다. 그런데 지원 요청을 받은 ‘삼각동맹’의 운수·철도 노조의 지도부는 약속한 파업 날짜를 두 번씩이나 미루더니 광부들이 안정을 되찾았다는 거짓 구실로 투쟁 계획 전체를 취소한다. 그 결과 광부들만 13주 동안이나 외롭게 투쟁한다.

1914년 100만, 1919년 650만, 1920년 834만으로 급속히 성장하던 노조는 지도부의 배신으로 인해 삼각동맹이 붕괴한 후 2년 만에 200만의 조합원을 잃는다. 그리고 600만 이상의 노동자들이 1921년 말까지 주급이 8실링 이상 삭감되어 생활에 고통을 겪는다.

영국 경제는 세계 시장에서 미국·독일·일본 같은 경쟁자들에게 통상의 우위를 계속 빼앗기면서 위기를 맞는다. 석탄 수출은 1913년 8900만 톤에서 1924년 6165만 톤으로 감소한다. 선박 건조는 같은 기간에 189만 톤에서 116만 톤으로 감소한다. 강철 생산은 1924년에 1913년의 수준을 약간 상회하는 정도에 그친다. 그리하여 실업자가 1920년 2.4%에서 1921년 16.6%로 급증한다. 그 후 실업자는 1939년에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1927(9.6%)년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10%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 1925년에 석탄 산업의 실업률은 25%로 증가하고 캐낸 석탄은 산더미처럼 쌓인다. (이런 현상은 영국뿐만 아니라 가까운 독일과 벨기에에서도 벌어진다.) 정부의 사회 보장은 극히 인색하여 노동자들은 참담한 빈곤 상태에 빠진다.

노동자들의 불만이 고조되는 상황에 힘입어 램지 맥도널드가 지도하는 노동당이 1924년 총선에서 승리하고 처음으로 집권한다. 그런데도 탄광 자본가들은 1921년의 협약이 1925년 7월로 만료되자 평균 13%에서 48%까지의 임금인하, 7시간 노동일의 폐지(8시간으로), 전국 협정을 일련의 지역 협정으로 바꿀 것 등을 요구하면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7월 30일을 기해 탄광을 폐쇄하겠다고 협박한다. 이에 노동자들은 곧바로 파업으로 대항한다. 그러자 정부는 황급히 왕립위원회를 구성하여 진상 조사에 나서고 자본가들은 폐쇄 경고를 철회한다.

일단 시간을 번 볼드윈 정부는 이후 8개월 동안 맹렬하게 파업 파괴 공작을 진행한다. 정부는 공급 확보 기구를 통해 트럭을 동원하고, 기관차의 특별 차고를 설치하고, 비상시에 이용할 자동차를 준비하고, 파업 파괴 계획을 작성하고, 산업의 중요 위치에 배치할 요원을 훈련시키고, 전국을 10개 지역으로 분할하여 각 지역에 비상 경제·정치 기구를 설치하고, 많은 군대를 전략 요지에 배치한다. 간단히 말하면 정부는 혁명이라도 격퇴시킬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석탄 산업 왕립위원회가 1926년 3월 11일에 보고서를 제출한다. 그러나 그 내용은 탄광 경영자의 입장을 확실하게 반영한 것이어서 수주일 동안에 걸친 교섭은 알맹이 없이 진행된다. 그러자 전국소수파운동(1924년 8월 발족)이 3월에 전국 회의를 개최한다. 여기에 참석한 100만 이상의 조합원을 대표하는 883명의 대의원들은 적극적인 투쟁을 결의한다. 마침내 노조전국회의가 5월 2일 찬성 360만 표(반대 5만 표)로 파업을 결의하고 다음날부터 일제히 직장에 출근하지 않음으로써 총파업에 들어간다. 전국소수파운동이 투쟁을 적극 선도하여 500만 노동자가 총파업에 참가함으로써 기차·버스·전차·신문·상점·전기·탄광·제철·화학공장 등 사회 전체가 마비된다.

그러나 파업 지도부인 총평의회는 처음부터 공포 속에서 크게 당황한다. 그들의 계급협조주의 세계가 바로 목전에서 뒤집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전략은 단호한 전술을 통하여 파업에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진행 상황이 보여주듯이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파업을 진정시키는 것이다. 총평의회의 지도자들은 소련 노동자들이 보내준 35만 파운드의 원조금을 거부할 정도로 소심하게 행동하고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이 선두에 서게 된 거대한 총파업에 압도되어 크게 위축된다. 그래서 5월 12일 볼드윈 수상을 방문하여 무조건 항복한다. 이로써 총파업은 9일 만에 중단된다. 그러나 탄광 노동자들은 11월까지 수개월 동안이나 파업을 계속한다. 그렇지만 지도부의 배신으로 인한 총파업 중단은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자본가들은 총파업을 격파함으로써 노조에 일대 타격을 가했음을 알고는 전면적인 임금 인하 등 노동 조건을 악화시켜 노조를 무력화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런데 이것이 즉각 노동자들의 투지에 불을 붙일 가능성을 낳자 임금 삭감 예고를 황급히 취소한다. 그러나 총파업의 열기가 가라앉자 의회는 1927년에 악명 높은 ‘노동쟁의·노조법’을 통과시켜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획득한 권리들을 모조리 박탈한다. 이제 총파업과 동맹 파업은 엄격히 금지되고 불법 파업을 지도하거나 거기에 참가한 자는 벌금이나 2년 이상의 금고형에 처해지고 노조는 ‘파업 파괴에 대한 처벌권’을 박탈당한다. 대중 피케팅은 금지되고 보통의 피케팅도 엄격히 제한된다. 또한 산업 손실액을 부담할 조합 기금을 의무적으로 조성하게 된다. 공공시설의 노조는 노조전국회의와 노동당에 가입할 수 없게 되고 노조가 노동당을 위해서 자금을 모집할 권리도 엄격히 제한된다.

노조 지도부는 자본가와 작당하여 노동악법이 통과된 지 한 달도 안 되어 이전부터 세워놓았던 ‘몬디즘’이라는 계급 협조 계획을 내놓는다. 이것은 악명 높은 미국의 생산 증대 강령인 ‘볼티모어-오하이오 계획’의 영국 판이다. 몬디즘으로 인해 노동자들이 생산 증대에 내몰리고 노사 협약이 침해되면서 전 산업에서 노동 조건이 악화된다. 이로 인해 노조전국회의는 다음해에 조합원 50만 명을 잃고 650만이던 조합원이 1930년 370만으로 감소한다.

코민테른은 파시즘 반대 투쟁에서 좌우편향의 오류를 범한다.

전쟁이 낳은 폐해가 파시즘을 성장시키는 온상이 된다. 민족주의에 열광하여 영웅적인 애국심으로 전선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던 젊은이들이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산업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본주의 반대’와 ‘사회주의 반대’를 동시에 표방하는 파시즘에서 자신들의 좌절을 치유할 희망을 찾는다.

더구나 자유주의 정부가 전후의 경제 침체, 정치 불안, 사회주의 확산, 민족주의의 좌절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무능함을 드러냄으로써 시민들은 위기의 시대에 굼뜨게 진행되는 의회를 통한 민주적 절차와 토론에 대해 인내심을 잃는다. 이로 인해 생겨난 갈등은 전쟁에서 패배한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와 승전국임에도 전리품을 챙기지 못한 이탈리아·루마니아에서 특히 사회적 긴장을 초래한다.

이들 국가에서 독점 자본의 횡포, 사회주의의 책동, 자유주의 정부의 무능에 진저리치는 다양한 계층―소시민·중산층·노동자―의 사람들이 사회의 안정과 민족의 영광을 위해 파시즘을 선택한다. 그리하여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채 10년이 지나지 않아 유럽 대륙의 20여 개 국가에서 파시스트 운동이 성장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반대와 사회주의 반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에 결국 파시즘은 자본가들과 손을 잡는다. 독점 자본가들은 파시즘에 자금을 대는 대신 거대한 이윤을 챙김으로써 밀월 관계를 맺는다. 여러 계층의 지지를 기반으로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파시스트들이 의회 선거를 통해 권력의 정상에 도달한다.

이렇게 파시즘이 다양한 계층으로부터 대중들을 획득해 가고 있을 때 좌파 정당들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알아보자.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좌파 정당들은 크게 세 가지 흐름의 국제 조직으로 나뉜다. 먼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1919년 2월 베른에서 제2인터내셔널을 재건한다. 이들을 기회주의라고 비판하는 공산주의 정당들은 한 달 뒤인 3월에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 제3인터내셔널)을 창립한다. ‘혁명적 개혁’을 표방하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은 1921년 2월 빈에서 중도파들로 ‘2.5인터내셔널’을 결성한다. 2.5인터내셔널은 1923년 5월에 제2인터내셔널로 합류한다.

코민테른은 1차 세계대전에 찬성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배신행위를 뼈아프게 경험했고 전쟁이 끝나고는 ‘계급 협조’의 관점에서 공산주의를 배척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경쟁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회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맹렬히 공격한다. 그리고 고립된 러시아 혁명을 유럽 혁명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독일공산당으로 하여금 무장 봉기를 일으키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독일공산당의 무분별한 여러 차례의 무장 봉기는 참담한 패배로 끝난다.

그러나 유럽 전역에서 파시즘이 세력을 급속히 확장하고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가 1922년 10월에 수상에까지 오르는 사태가 벌어지자 코민테른은 바로 다음달 11월에 열린 4차 대회에서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통일 전선’을 전술로 채택한다.

코민테른은 1924년 6월 5차 대회에서 가입 정당들의 사상을 강화하고 대중 조직으로 성장시키자는 ‘볼셰비키화’를 전술로 채택한다. 이때부터 서유럽의 코민테른 정당들에서도 소련 공산당처럼 중앙위원회 부설기관인 정치부·조직부·서기국이 당의 전권을 장악하고 당내 반대파들을 함부로 내쫓는 게 관행으로 되고 이에 따라 당내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한다. 특히 소련의 관심이 집중된 독일공산당에 대해서는 사실상 코민테른이 당 지도부를 임명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공산당들은 소련 공산당의 권위에 눌려서 자기 나라의 실정에 맞는 창조적인 전술 개발이 어렵게 된다.

코민테른은 1928년 6차 대회에서 ‘노동자계급의 통일 전선’ 전술을 폐기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사회 파시스트’로 규정하여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단호하게 비판하는 전술을 채택한다. 유럽과 중국에서 혁명이 완전히 실패로 끝났고 자본주의가 안정기에 들어선 상황에서는 노동자계급을 개량주의로 물들이는 사회민주주의가 더 위험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코민테른은 1935년 7~8월 7차 대회에서 파시즘에 반대하고 평화를 희망하는 노동자·농민·인텔리겐치아·소상인 등 모든 계층의 세력들로 구성되는 인민 전선(식민지에서는 민족 전선)을 전술로 채택한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히틀러가 독일에서 집권(1933년)하고 난 한참 뒤이다. 아무튼 코민테른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정당들과도 협력을 모색한다. 게다가 전쟁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전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을 자제한다.

이처럼 코민테른은 상황보다 뒤늦게 전술을 바꿈으로써 각 나라 공산당들이 패배하는 데에 하나의 원인을 제공한다. 그 밑바닥에는 코민테른을 지배하는 소련공산당의 자국 중심의 사고가 깔려 있고 혁명에 성공한 소련의 권위에 눌려 자주적이지 못했던 다른 나라 공산당들의 잘못이 있다.

코민테른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5월 각 나라의 진보 세력들의 통일을 쉽게 하기 위해 집행위원회의 결정으로 스스로 해산한다.

한편 1928년에 소련에서 추방당한 트로츠키와 좌익 반대파들은 스탈린의 코민테른에 대항하는 국제 조직을 건설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인다. 1933년에 독일공산당이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총 한방 쏘지 않은 채 히틀러의 집권을 허용한 것을 계기로, 트로츠키는 코민테른이 프롤레타리아 세계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구상한다. 그리하여 1933년 7월에 ‘국제 공산주의자 동맹’이 파리에서 결성되고 첫 대회가 1936년 7월 유럽에서 열린다. 이 흐름은 1938년 9월 제4인터내셔널의 창립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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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3

세계노동운동사 [6장] 사회주의 대 파시즘 (1917~1945) 3

미국 노동자들의 산별노조 건설

미국이 세계 경제를 선도하는 기관차가 된다.

미국은 79억 달러의 빚을 진 채무국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세계에서 으뜸가는 채권국이 되어 종전을 맞는다. 반면에 유럽 국가들은 4년 이상 지속된 세계대전으로 경제에 심대한 타격을 입고 총 160억 달러의 빚을 진 채무국으로 전락한다. 세계대전이 세계 경제의 중심을 유럽에서 미국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또한 미국에서는 자동차 산업이 이미 경제의 기관차 역할을 하고 있었다. 헨리 포드는 1907년부터 대중적인 ‘T모델’ 자동차를 개발·양산하여 자동차 보급 속도를 놀랄 만큼 빠르게 만든다. 1930년까지 등록된 자동차 수가 유럽 전역에서 520만 대인데 비해 미국에서는 2650만 대나 된다. 포드는 대량 생산을 위해 부품을 규격화하고 작업을 기계화하여 표준화된 제품을 생산하고 컨베이어로 상징되는 자동 운반 장치를 도입해서 모든 부문의 생산 활동을 일관 조립 작업으로 통합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노동 강도가 높아진 노동자들에게 높은 임금을 제공하여 그들의 구매력을 증대시킴으로써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가능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자동차 산업과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강철·기계·유리·고무·전기·석유·건설 산업이 1920년대의 산업 발전을 선도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투기 열풍이 엄청나게 일어난다.

미국에 이어 독일·영국·프랑스에서도 1920년대부터 포드주의가 확산된다. 이에 따라 유럽 주요 국가의 산업은 1925년에 전쟁 전의 수준으로 회복하고 1920년대 후반에는 패전국 독일까지도 경제가 빠르게 성장한다.

1920년대에는 중요한 기술 발전은 일어나지 않지만 이전에 발명했던 기술들을 완성하고 상품 생산에 응용함으로써 경제가 더욱 발전한다. 라디오는 이미 1차 세계대전 중에 군대에서 사용되었지만, 1920년대 초에 와서 일반인을 위한 오락 프로그램이 정규 방송의 전파를 타면서 곧 값싸고 다루기 쉬운 제품으로 되어 영국과 독일에서는 10년도 안 되는 기간에 200만 대씩 보급된다.

자본주의 예언가들은 경제 발전에 도취되어 “포드가 사회주의를 격퇴시켰다. 사회주의는 난센스다”라고 호언장담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발전에 있어서 다음의 두 시대를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국자본주의 시대, 이 시대에는 확장의 가능성에 한계가 있었다. 그 뒤의 미국자본주의 시대, 이 시대에는 최신의 기술 진보를 토대로 무한한 확장과 발전이 가능하다. 제1의 시대에는 맑스와 라살레가 상징적이었다. 제2의 시대에는 포드가 상징적이다.” “맑스와 엥겔스가 논한 번영과 공황이 주기적으로 교대하는 순환적 발전이 들어맞는 것은 초기 자본주의뿐이다.” “우리는 자유 경쟁과 시장의 맹목성이 지배하던 자본주의 시대를 대체로 극복한 시기에 있으며, 경제의 자본주의적 조직화에 도달하고 있다.”

이러한 일반적 경향을 총괄하여 렌쯔는 이렇게 비판한다. “개량주의 이론가들은 노동 조건에 대한 국가 통제의 증대, 국가자본주의로의 경향, 노조가 자본주의 국가의 보조 조직 또는 자본주의 사회의 집행 기관으로 변모한 것들을 가지고 경제상의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로 접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노조 지도부는 영원한 번영이라는 환상에 빠져 생산 증대에만 몰두한다.

노동자들은 1차 세계대전 동안에 손실된 실질 임금을 만회하기 위해 투쟁에 나선다. 시애틀 노동자들이 1919년 2월에 먼저 파업에 나서자 5월에는 위니펙에서도 파업이 일어나고 9월에는 철강 노동자 36만 명이 전국 파업을 전개한다. 그러나 미국노동총동맹의 지도자들은 이 파업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사보타지 한다.

1922년 말 50만 철도원의 파업이 패배로 끝날 즈음, 볼티모어-오하이오 철도는 ‘노동자가 생산성을 높이는데 협력한다면 노동자에게 큰 이익을 분배하겠다’고 제안한다. 생산성이 높아지면 결국 임금이 자동으로 증대하고 노동 조건도 개선되며 노동 시간이 단축되고 실업도 사라지리라는 것이다.

노동총동맹은 1925년 대회에서 이 제안을 ‘새로운 임금 정책’으로 결정한다. 노조 관료들은 자본가와 손잡고 전진하는 노동자의 미래는 장밋빛이라며 ‘파업은 낡아빠진 방식으로서 노동자의 이익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규정하고 이제 계급투쟁은 끝났다고 목청을 높인다. 심지어 부르주아 경제학자인 카버는 노동자들이 높은 임금을 저축하여 산업을 점점 사들이고 있으며 그리하여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노조 지도부는 ‘영원한 번영’이라는 환상에 푹 빠져 오직 생산 증대에만 몰두한다. 그러나 노동 생산성이 증가하고 자본가의 이윤이 대폭 증대하는데도 실질 임금은 1923~26년 사이에 조금(2포인트) 밖에 오르지 않는다. 임금 상승의 혜택도 거의 숙련 노동자에게만 돌아가고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임금·노동시간·노동강도가 오히려 악화된다.

더 나아가 자본가들은 산업 합리화를 강력하게 추진한다. 그런데 자본가에게 ‘산업 합리화’란 전투적인 활동가들을 대량 축출하고 해고를 자유롭게 하고 임금 총액을 끊임없이 삭감하고 파업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또한 자본가들은 회사가 자금을 대어 노조를 조직하고 회사편인 사람을 간부 자리에 앉히는 ‘회사조합’을 대규모로 육성한다. 회사조합은 트러스트(독점) 산업을 미조직 상태로 두려는 술책의 하나로서 주로 기간산업에서 만들어진다. 회사조합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에는 200개뿐이었는데 1927년에는 900개(100만 명)로 증가한다. 이들 회사조합들은 밀정과 깡패들을 고용하여 체계적으로 노조 운동을 파괴하는 데에 앞장선다.

미국에서부터 세계 대공황이 시작된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의 주식 시장에는 1600만 주가 넘는 매물이 쏟아져 나온다. 주가는 불과 3주 만에 50% 이상 폭락한다. 대공황이 시작된 것이다. 1932년 말까지 1600억 달러 이상의 주식이 휴지조각으로 변하고, 기간산업의 생산이 50% 감소하고, 5761개의 은행이 파산하고, 농업 생산물의 가격은 85억 달러에서 40억 달러로 하락한다. 자본가들이 공황으로 인한 손실을 임금 인하나 대량 해고를 통해 노동자에게 전가시킴으로써 모든 산업에서 임금의 45% 이상이 삭감되고 1933년 초까지 1700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한다.

공황은 전 세계로 확산된다. 이웃한 캐나다의 산업도 마비되어 100만 노동자가 실직한다. 독일에서는 공업 생산이 45%나 감소하고, 주급은 1929년 42마르크에서 1932년 21마르크(최저 생활비는 38마르크)로 하락하고, 1932년 8월에 완전 실업자만 522만 명에 달하고, 한 달에 3~4달러의 구제 기금만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1700만 명에 이르면서, 국민 경제 전체가 마비 상태에 빠진다. 영국에서는 공업 생산이 25% 감소하고 실업자는 1929년 116만 명에서 1932년 297만 명으로 증가한다. 영국의 공업 생산이 비교적 적게 감소한 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 계속 불황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1932년에 완전 실업자가 284만 명, 반실업자가 100만 명에 이르게 된다. 프랑스 역시 1932년 6월에 실업자가 230만 명, 반실업자가 561만 명에 달한다. 이탈리아·오스트리아·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스페인·스칸디나비아국가들·오스트레일리아 등도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

공황은 (반)식민지에는 더 큰 충격을 미친다.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 국가에서는 실업자 수가 기록적으로 증가하고 농업이 크게 파괴되고 기아가 도처에 확산된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산업과 외국 무역은 50~80%까지 감소한다. 이들 나라에서는 사회 보장 제도도 없어 인민들이 더욱 비참한 상태에 처한다.

국제 산업 생산은 1929년의 2/4분기에서 1932년의 2/4분기 사이에 42%나 하락한다. 이 기간 동안 많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금본위제가 파탄 나고 자본 수출이 정지된다. 국제 금융은 무질서에 빠지고 국제 무역은 65%나 감소한다. 세계의 실업자 수는 유례없이 증가하여 3~5천만 명으로 추산된다. 세계 대공황은 1933년부터 심각한 상태에서 서서히 벗어나지만 그 여파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1939년까지 지속된다.

이 세계 대공황은 부분적인 원인에 의한 일시적인 경기 후퇴가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자본주의의 생산력 발전과 구조 변화의 산물이다. 자본주의 중심부의 생산력은 1890년 이래 과학적 연구에 기초한 기술 혁신과 생산 과정의 재조직에 힘입어 크게 발전했고 그래서 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산업의 연평균 성장률은 높은 수준(미국은 5.9%, 독일은 4.3%)을 기록했다. 전쟁의 피해에서 유럽 국가들이 회복된 이후에 성장률이 크게 둔화되기는 했지만 산업 생산고는 꾸준히 증가했다.

그러나 상품의 소비는 생산만큼 빨리 증가하지 않았다. 각 나라에서 국내 수요와 해외 수출은 이 기간을 통해 늘어나던 상품 생산량을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특히 심각한 빈부 격차가 개선되지 않음으로써 노동자의 구매력은 별로 증가하지 않았다. 생산력이 가장 빨리 발전했던 미국에서는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이 1890~1914년 사이에 매년 1.3%씩 밖에 증가하지 않은 데 비해 산업 생산고는 그보다 4배가 넘는 속도로 성장했고 이런 사정은 ‘번영’을 구가하던 192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그 결과는 상품의 공급 과잉으로 나타났다.

더구나 장기간에 걸친 생산력의 발전은 산업 부문 사이의 불균형 위에서 진행된 것이어서, 강철·기계·자동차·전기·석유·화학 같은 새로운 산업이 높은 비율로 성장한 반면에 광업·조선·방직 같이 오래된 산업은 정체 내지 위축되었다. 농업은 과잉 생산으로 인한 가격 하락에 시달리고 있었다.

1920년대 미국을 풍미했던 주식 투기는 이와 같은 불균형 성장을 토대로 했을 뿐 아니라 금융 기관의 신용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이 장기간 누적되어 주가 폭락을 계기로 한꺼번에 대공황으로 폭발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무자비한 대량 해고와 임금 인하에 반대하고 실업 구제와 사회 보장을 요구하면서 적극 투쟁에 나선다. 이에 따라 파업이 급증한다. 1929~32년 사이에 15개 나라에서 1만 8794건의 파업에 851만 명의 노동자가 참가한다. 이 가운데 1468건은 영국, 2700건은 미국, 3601건은 프랑스, 1304건은 독일, 688건은 체코슬로바키아, 1889건은 일본, 1333건은 중국, 480건은 인도에서 발생한다.

루즈벨트가 서민들의 고통을 끌어안으며 대통령에 당선된다.

미국의 수백만 노동자들이 일자리와 집을 빼앗기고 거리로 내몰린다. 포드자동차에서만 8만 5천 명이 해고되고 오하이오 주의 5대 공업 도시에서만 1930년 1월부터 2년 반 동안 10만 가구가 퇴거 명령을 받는다. 자연 재해와는 달리 이들에게는 적십자 구호 같은 구원의 손길도 오지 않는다.

좌파가 주도하는 노조통일연맹과 공산당은 1930년 3월 6일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125만 명이 참가한 집회를 열어 ‘기아 행진’을 벌이고 7월 4일 시카고에서 전국실업자위원회를 조직한다. 전국실업자위원회는 주요한 활동의 하나로 집에서 쫓겨나는 것을 막는 활동을 벌인다. 이 활동으로 뉴욕의 경우 1932년 6월 30일까지 여덟 달 동안에 퇴거 명령을 받은 18만 5784가구 중에서 7만 7천 가구를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정부는 이 경제 위기의 원인을 빨갱이들의 소행으로 돌리려고 애쓰고 의회는 1930년에 공산당을 조사한답시고 ‘피시 위원회’를 만든다. 자본가들의 폭력도 도를 넘어선다. 포드자동차 해고자들이 1932년 3월 7일 재고용을 요구하며 디어본시 공장으로 행진하자 공장 담 뒤에 숨어있던 포드 폭력단과 총잡이들이 기관총을 난사하여 수명이 죽고 수십 명이 중경상을 입는다.

재향군인노동자연맹은 4월부터 ‘1차 세계대전 퇴역군인에 대한 연금 지불을 1945년까지 보류한다’는 정부의 방침에 항의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이에 따라 재향군인의 무리가 국가의 심장부인 워싱턴의 의사당과 백악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 아나코시아 저지대의 황무지로 몰려든다. 이들은 동굴·땅굴·오두막집·천막집에서 담요만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 수가 7월에는 2만 5천 명에 다다른다. 그러자 후버 대통령은 군대를 동원한다. 맥아더 참모장의 지휘에 따라 기병들이 총검을 휘두르며 공격하고 이어서 방독면을 쓴 보병이 최루탄을 던지며 진격하여 퇴역군인들의 무리를 해산시킨다.

뉴욕 주지사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1932년 여름부터 시작된 대통령 예비 선거에서 서민들의 고통을 끌어안으며 압도적인 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러자 이때까지 사기와 요행으로 근근이 버티던 미국 경제가 완전히 침몰한다. 은행들이 잇달아 파산하면서 주 전체의 3/4이 은행을 폐쇄하고 예금 인출을 연기시킨다. 대통령 취임식(1933년 3월 2일)이 있기까지 행정 기관 자금도 동결된다. 돈은 사라지고 임금도 지불되지 않는다. 학교도 문을 닫는다. 파산한 군중들이 텅 빈 예금기관 앞에서 울부짖고 식량조차 살 수 없어 대소동이 일어난다.

민중을 위한 뉴딜 정책이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를 구한다.

루즈벨트는 대통령에 취임하자 구제·부흥·개혁을 내세우고 뉴딜 정책을 추진한다. 이에 따라 연방 정부의 승인이나 감독 아래 다시 설립될 때까지 모든 은행을 폐쇄하는 긴급은행법, 증권 시장에 광범하게 퍼져있는 사기·부정과 타인의 돈으로 투기하는 행위를 막는 법률들, 공정 거래 기준을 설정하여 산업의 극심한 경쟁을 막고 구매력 증대를 위해 최저 임금과 노동 시간을 합의하도록 규정한 전국산업부흥법 등이 만들어진다.

특히 전국산업부흥법 7조 (A)항은 노동자들의 자주적 단결권을 보장하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선택한 대표자를 통해 단체 교섭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공정노동기준법은 최대 노동 시간과 최저 임금을 규정하고 소년 노동을 규제한다. 그리고 농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농업조정법이 제정되고 농촌의 가난한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한 ‘민간 식림 치수단(民間植林治水團)’이 만들어진다. 거대한 공공사업으로 수만 명이 일자리를 찾으면서 흥분과 기쁨이 나라를 채우기 시작한다.

루즈벨트는 전쟁이 아닌 평화를, 나라 사이의 우호를, 정복과 제국주의의 중지를, 독일·이탈리아·일본의 파시즘을 억제하기 위한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집단 안보를 주장한다. 루즈벨트는 라디오를 통해 자주 국민과 대화를 나누며 국민의 친숙한 이웃이자 세계적인 인물이 된다.

노동자들은 자주적 단결권과 단체 교섭권을 쟁취하기 위해 총파업을 전개한다.

샌프란시스코와 태평양 연안 부두 노동자들이 전국산업부흥법 7조에 고무 받아 노동총동맹 산하 국제부두노동자연맹이란 단체로 모이기 시작한다. 그러자 자본가들은 1933년 9월 노조 간부 4명을 해고하고 노조와의 단체 교섭을 아예 거부한다.

이에 샌프란시스코·시애틀·포틀랜드·샌디에이고 등 모든 태평양 연안 항구의 부두 노동자 1만 2천 명이 1934년 5월 9일 일제히 파업에 들어간다. 5월 25일에는 8개 해운 노조의 3만 5천 노동자가 연이어 파업에 들어간다. 미국 노동자계급이 대약진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경찰들은 이 파업을 잔인하게 진압한다.

이에 격분한 샌프란시스코 노동자 12만 7천 명이 총파업을 전개하여 시 전체가 유령 도시로 변한다. 파업이 계속되면서 7월 3일에는 경찰과 파업 노동자들이 충돌하여 유혈 사태가 발생한다. 7월 5일에는 완전 무장한 2천 명의 주 방위군이 출동하여 최루 가스 대신 구토 가스를 사용하고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후려치고 수십 발의 총알을 발사한다. 하루 종일 총성이 울리고 실제 전투와 같은 상황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쓰러진다. 이에 도장공 노조 1158 지방 지부가 총파업을 선언하고 곧이어 기계공 노조도 투쟁에 나선다. 7월 10일에는 ‘알라메다 노조 협의회’가 총파업을 정식 승인하고 7월 12일에는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 트럭 운전수 노조 지부가 총파업을 지지한다.

노동총동맹 지도자 윌리엄 그린이 파업 금지 전문을 보냈으나 노동총동맹의 160여 개 지부(12만 7천 조합원)가 그 다음날 총파업에 대한 찬반 투표를 실시하여 압도적인 찬성으로 파업을 결의한다. 모든 노조원들이 7월 16일 아침에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인쇄공과 전기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연좌 농성을 벌인다. 모든 산업이 정지되고 거리의 전차도 멈추고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다. 그러나 7월 19일 노동총동맹의 보수적인 간부들은 호명 투표를 거부하고 기립 투표를 통해 191 대 174로 총파업을 끝내기로 결정한다. 3만 5천 해운 노동자들은 7월 30일에야 국제선원노동조합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일터로 돌아간다. 몇 주일 후에 부두 노동자들은 하루 6시간 노동과 주30시간 노동을 쟁취한다.

들불 같이 타오르는 투쟁의 과정에서 새로운 노조(지부)들이 수없이 건설된다. 이 새로운 노조들은 (세계산업노동자동맹과 노조통일연맹이 사용한 투쟁 방식을 따라) 대대적인 피케팅, 노래, 연설, 토론, 회합, 연좌농성, 태업, 시위, 확성기 사용, 여자들을 파업 참가자로 조직하기, 빠른 속도로 차를 몰아대기 등 새롭고 다양한 방식으로 투쟁을 전개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용자를 고발하고, 라디오를 이용하고, 신문에 전면 광고를 내고, 파업 후원회를 조직하고, 파업의 쟁점을 대중에게 알리고, 조합 정책을 결정하기에 앞서 대대적인 집회를 열어 민주적으로 다수의 의견을 물으면서 아주 공세적으로 투쟁을 펼쳐나간다. 처음으로 거세게 터져 나온 노동자들의 투쟁은 1935년에 1만 8천여 명이 체포·구금되고 1934~36년 사이에 88명이 파업 중에 목숨을 잃을 정도로 아주 격렬하게 전개된다.

결국 처음으로 단체 교섭권과 파업권을 보장하고 사용자 측의 노조 방해 활동을 금지하는 전국노동관계법(와그너법)이 1935년 7월 5일에 제정된다.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자신의 권리를 쟁취한 것이다.

한편 위기의식을 느낀 대기업들은 전례 없이 대대적으로 노조 파괴 활동을 전개한다. 밀정을 고용하여 노조 움직임을 일일이 감시하고 요주의 인물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노조 간부들을 매수하고 때로는 폭력을 동원하여 노조를 파괴하기까지 한다. ‘라 폴레트 상원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대기업들이 230개의 사설탐정회사를 통해 10만 명의 밀정을 고용하여 전국 4만 8천 개의 노조 지부에 침투시켜 적극적인 조합원들을 밀고하여 해고되게 하고 밀정의 상당수가 노조 간부가 된 것으로 드러난다. 대기업 자본가들은 1934년에 노조 파괴 공작에 8천만 달러나 쓰고 ‘반공’을 내세워 오픈 숍―노조 가입과 탈퇴가 개인의 의사에 달려있는 제도―을 확립하고 뉴딜 정책을 파괴할 목적으로 미국자유연맹을 만든다. 또 제너럴모터스·스탠더드석유·웨스팅하우스 등 전국 12대 대기업은 특별위원회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하고 스스로를 노동자와 뉴딜 정책에 대해 반격 작전을 벌이는 신비스러운 비밀 지휘부로 자처한다. 더군다나 재벌들은 루즈벨트 대통령을 소련의 끄나풀이라고 매도하기까지 한다.

대기업 노동자들이 산별노조를 건설하며 대약진 한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고양되는 분위기를 타고 관료적인 노동총동맹 지도부에 비판적인 좌파들이 1935년 11월 워싱턴에서 산업별조직위원회를 결성한다. 새로운 조직의 결성은 수백만 노동자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온다. 노동자대중이 투쟁을 경험하면서 여러 개의 경쟁적인 직업별 조합으로 자신들을 쪼개서 한 공장 내의 힘을 약화시키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 2~3년의 투쟁에서 가장 앞장섰던 사람들이 산업별조직위원회를 이끌고 있어서 산업별조직위원회는 겨우 여섯 달 만에 2백만 명의 회원을 확보한다.

산업별조직위원회는 단결된 행동으로 거침없이 전진하여 1936년 3월에 ‘미국 전기·라디오·기계노동자 연합회(UE)’라는 거대한 노조를 조직한다. 그리고 자동차노조가 5월에 노동총동맹을 탈퇴하고 미국자동차노조연합이란 이름으로 산업별조직위원회에 가입한다. 9월에는 UE와 조선소 노동자들이 산업별조직위원회에 가입한다. 곧이어 판유리노조, 철·강철·주석노동자연합회, 고무노동자연합도 가입한다. 노동총동맹 소속 전국기계공조합과 총동맹 산하 지부들 그리고 독립 노조들도 단결의 물결에 합류한다. UE는 연말이 되기 전에 셰넥테디에 있는 제너럴일렉트릭 공장에도 노조를 조직한다. 이처럼 산업별조직위원회는 새롭게 한창 성장해 나가는 대규모 노조들을 끌어들이며 기세 좋게 뻗어나간다.

그러자 노동총동맹 집행위원회는 1936년 8월 4일 산업별조직위원회에 가담한 노조들의 회원 자격을 정지시키고 얼마 뒤에는 그 노조들을 제명한다. 그리고 산업별조직위원회가 노조를 둘로 분열시키고 다수결에 따르지 않는다고 공식 비난한다. 더구나 산업별조직위원회가 소련과 내통하여 공산주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며 쉬지 않고 떠들어댄다.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의 제너럴모터스 노동자들이 12월 28일 파업에 들어간다. 다음해 1937년 1월 4일에는 오하이오 주의 노오우드, 조지아 주의 애틀랜타, 인디애나 주의 앤더슨과 캔자스시티, 회사 심장부인 미시간 주의 플린트에서 제너럴모터스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연좌 농성 파업을 전개한다. 자동차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40만 명 가운데 26만 명이 일하고 있고 연간 211만 대(1937년)의 차를 생산하는, 잠자던 사자가 뒤늦게 잠을 깬 것이다. 자본가들과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하겠다고 위협하면서 ‘거대한 제너럴모터스의 파업은 자동차 산업을 소비에트로 만들려는 음모’라고 맹렬히 비난한다. 공장 바깥에서는 수천 명의 동료 노동자들과 아내와 아이들이 피켓을 들고 응원하면서 추운 겨울인데도 밤낮으로 방송차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파도처럼 움직인다. 결국 파업 44일째인 2월 11일, 제너럴모터스는 노조를 인정하고 전국 단위의 단체 협상을 하겠다고 발표한다. 이것은 아주 큰 승리였다. 마침내 오픈 숍의 대들보가 무너져 내린 것이다.

아크론 파업을 본받은 제너럴모터스의 ‘연좌 농성’ 파업―미국 노동자들에게는 새로운 투쟁 방식이다―은 곧 들불처럼 퍼져나간다. 세계에서 제일 큰 강철 회사인 ‘US강철’은 파업 경고조차 없었는데 임금 10% 인상, 주 40시간 노동, 노조 승인을 ‘강철노동자조직위원회’에 약속하며 갑자기 항복한다. 노동자들이 거대한 제너럴모터스를 꺾고 승리한 순간에 ‘강철노동자조직위원회’의 조합원이 15만 명으로 늘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웨스팅하우스와 필코 등 거대 회사에서 노조가 연이어 조직된다. 이로부터 비록 4년 이상이나 걸리긴 해도 ‘포드’에서도 노조가 설립된다.

나아가 흑인 노동자들―노동총동맹은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이 백인과 평등한 조건으로 수천 명씩 산업별조직위원회에 가입하고 (섬유·봉재 노조를 제외하고는) 역사상 최초로 수천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전기노동자연합과 식품가공노조 등에 가입한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산업별조직위원회는 1938년에 명칭을 산별노조회의로 바꾼다.

산별노조회의는 철강·자동차·고무·유리·전기·수송·식품가공·통신 등 모든 기간산업에서 오픈 숍을 몰아낸다. 그리고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공장과 지역들에서도 유급 휴가, 유급 휴일, 시간외 근무 수당, 노동 강도 완화, 주 5일 40시간 노동과 같은 값진 성과를 쟁취한다.

산별노조회의의 성장에 자극 받은 노동총동맹은 기계공·트럭운전수·호텔·식당종업원·보일러제작공들을 적극 조직하여 조합원을 100만 명 이상 증가시킨다. 1940년까지 노동총동맹 소속 조합원은 424만 명으로 늘어나고, 산별노조회의는 381만 명, 독립노동조합은 200만 명에 이른다. 그리하여 전체 조합원은 불과 4년 만에 3배나 늘어나 1천만 명에 이르게 된다. 더욱이 1866년부터 수많은 노동자들이 목숨을 바치며 외쳐 온 ‘하루 8시간 노동제’가 마침내 많은 산업에서 실현된다.

이처럼 미국 노동자계급은 루즈벨트 시대에 최대의 승리를 거둔다. 이에 발맞추어 미국의 노동자·민중은 1932·1936·1940·1944년에 네 차례나 연속해서 루즈벨트를 지지하여 대통령으로 당선시킨다. 이리하여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은 노동자·농민·흑인들의 투쟁과 단결이 추진력으로 작용한 대중 운동의 요구에 대한 답변이자 미국 민주주의 운동의 정점(민중주의)으로서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 체제를 (노동자계급의 혁명에서) 구원한다.

독점 자본가들은 전투적인 노동자 운동을 빨갱이들의 소행이라고 공격한다.

독점 자본가들은 노동자계급의 대약진의 기세를 꺾기 위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한다. 하원은 ‘비미국 활동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디이즈 하원의원의 주도 아래 노조 요시찰 인물들의 명단을 작성한다. 이 위원회는 1938년 노조 간부 선거가 전국에서 실시되기 직전에 노동계에 빨갱이들이 준동하고 있다고 떠들며 청문회를 개최하고 매일같이 산별노조회의가 공산주의 폭동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이에 장단을 맞추어 신문·라디오·잡지 같은 대중매체의 98%가 쉴 새 없이 산별노조회의를 비난하며 융단폭격을 퍼붓는다. 게다가 자경단원들은 빨갱이로부터 국가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산별노조회의의 피켓 대열에 테러를 가한다.

전국제조업자연합은 “산별노조회의에 가입해 공산주의 미국 건설을 도웁시다”는 전단 220만 장을 만들어 뿌리는 교활한 술책까지 부린다. 전국제조업자연합의 회장을 지낸 프렌티스는 “미국 실업계는 어떤 형태의 위장된 파쇼 독재 체제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며 우익 세력을 부추긴다. 독일에서 집권한 뒤 노조를 깡그리 없애버린 히틀러가 수많은 미국 실업가들의 영웅으로 추앙되면서 포드자동차 사장 포드와 국제사무기계회사 사장 와트슨 등 상당수의 대기업 우두머리들이 히틀러가 주는 훈장을 영광스럽게 받는다. 1940년에는 강력한 친 히틀러 조직인 ‘미국 제1위원회’가 생겨나고 여기에 상당히 많은 미국 산업계 대표들이 참가한다. 자본가들은 탁월한 노동자들마저도 ‘빨갱이’라는 소리 한마디에 절절 매던 쿨리지 대통령이나 후버 대통령 시대를 그리워한다.

한편 대기업들은 공황을 이용해 자본을 집중시키며 회사 규모를 확장한다. 그리하여 1935년에는 미국 기업의 0.1%에 불과한 거대 기업이 전체 순이익의 50%를 차지하고 4%도 채 안 되는 알짜 대기업들이 총 이윤 가운데 84%를 차지한다.

이에 따라 빈부 격차도 심화된다. 미국 총 세대수의 47%가 1년 동안 1천 달러도 안 되는 소득을 얻는 데 비해 1.5%도 안 되는 상류층은 밑바닥 47%의 세대와 같은 액수의 총 수입을 얻는다.

미국 경제는 뉴딜 정책으로 잠시 회복되었다가 1938년에 다시 불경기가 시작된다. 이 불경기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계속된다. 이는 다르게 표현하면 대량의 무기와 전투장비를 소비하는 2차 세계대전이 미국 경제를 구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이 생산한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전쟁이 자본주의 경제를 구제한다는 말이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하지만 제대로 알면 이상할 것도 없다. 자본은 그 속에 언제나 폭력을 본성으로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들은 자유 경쟁으로 인한 대공황을 혹독하게 경험하고서는 경제에 더욱 깊이 개입하게 된다. 정부는 파국을 막기 위해 공공 부문을 확대하고 복지 정책을 시행하며, 사기업의 투자와 생산에 대해 재정을 지원하고, 경제 성장 계획에 따라 조세·국채·신용규제를 이용하여 화폐의 순환에 개입한다. 이는 국가 권력과 독점 자본의 유착으로 정치 지배와 경제 착취가 단일한 메커니즘으로 통합되었음을 뜻한다. 이런 현상을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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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4

세계노동운동사 [6장] 사회주의 대 파시즘 (1917~1945) 4

중국 노동자 혁명의 패배와 농민 혁명으로의 전환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제2 정부’를 구성하고 제국주의 반대 투쟁으로 나아간다.

청나라는 1909년부터 입헌군주정으로의 개혁을 시작한다. 그러나 1911년 5월 철도 건설을 외국 차관단에 위임하자 이에 반대하는 봉기가 10월에 여러 성에서 일어난다. 쑨원은 삼민주의―민족주의·민권주의·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국민당을 조직한다. 북양군을 이끄는 위안스카이는 부의 황제를 퇴임시키고 1912년 1월 각 성의 대표들을 난징에 모아 중화민국(공화정)을 수립하고 쑨원을 임시 대총통에 앉힌다. 쑨원의 국민당은 1913년 선거에서 승리한다. 그러자 위안스카이는 국민당을 해산시키고 자신이 대통총의 자리에 앉는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1915년 1월 중국의 칭다오를 점령하고 중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하는 ‘21개조의 요구’를 위안스카이에게 강요한다. 위안스카이가 1916년에 죽자 지방의 군벌들이 각 열강들의 지원을 받으며 할거하는 시대가 된다.

중국 경제는 1차 세계대전 중에 ‘전쟁 특수’로 급속히 발전한다. 수출은 1913~19년 사이에 40%나 증가하고 공업 기계류의 수입은 1915~21년 사이에 13배나 증가한다. 이에 비례해서 산업 노동자도 증가한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주요 도시들에 총 150만 명의 산업 노동자가 존재하게 된다.

중국 대표단은 전쟁이 끝나고 열린 1919년 베르사유 회의에 참석하여 일본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취소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베르사유 회의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영토 재분할로 끝난다. 그러자 3천 명의 학생들이 5월 4일 베이징 중심부에 있는 천안문 광장에서 집회를 열고 중국 역사상 최초로 민족주의 시위를 벌인다. 이 5·4운동은 전국 규모의 항의 운동으로 발전한다. 베이징 정부가 무력 진압에 나서 수백 명의 학생들을 체포하자 주요 공업 중심지인 상하이에서는 6~9만 명의 노동자들이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1일 파업’에 들어가고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다.

천두슈·리다자오·취추바이·마오쩌뚱 등 12인의 대표가 1921년 7월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으며 중국공산당을 결성한다. 그리고 1921년부터 시작된 불황의 영향으로 1922년에는 100회 이상의 파업이 일어나고 연인원 30만 명이 파업에 참가한다. 이러한 상황을 타고 공산당은 1922년 5월 광저우에서 제1회 전 중국 노동자 대회를 개최한다. 여기에는 12개 도시에 있는 200개 노조의 30만 노동자를 대표하는 162명의 대의원이 참석한다. 나아가 공산당은 농민 협회들을 조직하기 시작한다. 철도 노동자들은 1924년 중국 최초로 전국 노조를 설립한다.

국민당은 1924년 1월 소련과 긴밀하게 협력하고 공산주의 운동과 연대한다는 ‘연소용공(連蘇容共)’의 원칙을 명확히 한다. 이에 따라 공산당이 개별로 국민당에 입당함으로써 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진다. 국민당은 9월에 반동적인 봉건 군벌을 타파하고 전국을 통일하여 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해 ‘북벌’을 시작한다. 그런데 자유주의자 쑨원이 1925년 3월 베이징에서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는 말을 남기고 숨진다. 그 뒤를 이어 쑨원의 동서―쑨원의 부인 쑹칭링의 동생인 쑹메이링의 남편―인 장제스가 국민당을 장악한다.

상하이에 있는 일본 자본의 직물 공장들에서 노동자들이 5월에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간다. 그런데 파업 노동자들과 공안 부대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한 젊은 노동자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노동자·학생 수천 명이 5월 30일 항의 행진을 벌인다. 조계 당국은 영국·미국·일본·이탈리아의 육군 전투 부대를 상륙시켜 진압한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에 발포하여 12명이 숨진다. 그러자 이틀 후인 6월 1일 공산당이 이끄는 상하이 노조총연맹이 외국인 소유 공장과 부두를 시작으로 총파업을 단행한다. 6월 13일에는 16만 명의 노동자가 가두 투쟁을 벌인다.

파업과 가두시위가 다른 도시로 급속히 확산된다. 6월 23일 광저우에서는 영국·프랑스 군대의 발포로 시위대 52명이 사망한다. 영국 식민지인 홍콩에서도 총파업이 벌어져 6월 말에 이르러 5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홍콩을 떠난다. 13명으로 구성된 파업위원회와 800여 명의 파업노동자대표자회의가 투쟁 전체를 총괄한다. 이 파업위원회는 이후 벗과 적 모두로부터 ‘제2 정부’로 불리게 된다. 총파업은 1926년 10월까지 16개월 동안이나 계속된다.

국민당은 1925년 7월 전국으로 확산된 노동자들의 투쟁의 성과를 기반으로 광저우에서 국민 정부 수립을 선언하고 장개석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국민혁명군을 조직한다. 국민당 군대는 1926년 7월 북벌을 재개하여 11월에는 근거지를 광저우에서 우한으로 옮긴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은 선발 정찰대 역할을 하면서 가는 곳마다 농민 반란을 고무하고 노동자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한다. 그리하여 1926년 초에 1천 명도 안 되던 당원이 불과 1년 만에 3만 명 이상으로 증가한다.

상하이의 섬유·금속·철도 노동자들은 1927년 2월 다시 총파업을 일으킨다. 경제적 요구로 시작된 총파업은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전국으로 확대되어 수개월 동안 계속된다.

공산당의 좌우편향으로 노동자들의 조직과 투쟁이 붕괴된다.

대지주·고리대금업자·제국주의세력을 대표하는 장제스는 국민당 북벌군을 상하이로 집결시킨다. 위기를 직감한 파업 노동자 70만 명은 파업을 계속하면서도 잘 훈련된 노동자 민병대로 도시 전 지역의 전략 요충지를 장악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다. 상황이 이러 하자 국민당 군대는 상하이 외곽에 이미 도착하고서도 5일 후인 3월 26일에야 상하이로 들어온다. 공산당은 장제스를 환영하는 시위를 조직한다.

장제스는 상하이의 자본가들 및 지하 갱단의 두목들과 일련의 회합을 갖고서 노동자들의 파업을 파괴할 세력을 규합해나간다. 드디어 4월 12일 새벽 암흑가의 암살단이 도시 전 지역에서 노조 사무실을 습격하여 하루 동안 400~700명을 살해한다. 장제스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공산당의 훈령에 따라 거의 모든 무기를 땅에 파묻거나 장제스 군대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궤멸 당한다.

이 잔혹한 습격이 있기 바로 일주일 전인 4월 5일에 스탈린은 중국에서의 국공합작에 대해 “우익들은 군대를 지휘할 능력 있는 사람을 보유하고 있고 부유한 상인들에게서 자금을 끌어 모을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을 레몬처럼 다 쥐어짜고 나서 내던져 버리면 된다”라고 연설했다. 그러나 쥐어 짜인 것은 오히려 노동자들이었다. 그런데도 스탈린은 국민당 정부를 돕는 것이 공산당의 임무라며 운동의 ‘과도함’을 자제하라고 명령한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는 혁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농민 소비에트를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권력자는 스탈린이었다.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두 명의 공산당원이 국민당 정부의 노동부 장관과 농업부 장관으로 입각한다. 그런데 다음날 창사를 지배하던 군벌이 노조와 농민 조직들을 파괴하면서 대규모 처형을 자행하기 시작한다. 분노한 지방의 지도자들이 창사를 공격하기 위해 수천 명의 농민 군대를 동원한다. 그러나 공산당은 이번에도 (5월 27일) “더 이상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정부 관리들을 기다려주기 바란다”는 전보를 타전하며 농민들의 투쟁 의지를 눌러버린다. 그렇지만 학살은 다른 성으로까지 계속 퍼져나가고 7월에는 국민당 정부까지 이 학살에 가담한다. 그리하여 총 2만 명 이상의 노동자·농민이 목숨을 잃는다. 7월 말에는 모든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이 불법화된다. 이로써 국공합작이 끝장나고 반혁명이 도시와 농촌을 완전히 지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은 역량을 상당히 손실한다.

그러자 스탈린은 이번에는 “새로운 혁명적 고조!”를 선언한다. 코민테른은 전국 공세에 착수하기 위해 농민 군대가 전략 도시들을 공격한다는 계획 아래 ‘추수 봉기’로 알려진 일련의 무장 봉기를 명령한다. 이에 따라 공산당은 8월 1일 허룽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3개 군단을 편성하고 주더로 하여금 2만 명을 이끌고 난창에서 봉기를 일으키게 한다. 공산당은 이후에 이날을 인민해방군 건군 기념일로 삼는다. 마오쩌뚱은 2천 명의 부대를 이끌고 창사를 공격하다가 한 차례의 전투에서 부대의 절반을 잃고 바로 후퇴한다. 일부 다른 부대들도 겨우 탈출하지만 대부분의 부대가 금새 몰살당하고 봉기는 7일 만에 실패로 끝난다. 마오쩌뚱은 9월에 자기 부대를 이끌고 후난성과 장시성 접경의 황량한 후진 지역인 징강산으로 퇴각한다.

이후로도 계속된 11월 하이루펑 소비에트 건설, 12월 ‘광둥 코뮌’ 건설, 1928년 8월 후난성 남부 대도시들에서의 봉기는 모조리 실패로 돌아간다. 이 ‘도시 봉기’들은 노동자들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한 채 진행됨으로써 무자비한 학살만 초래하고 끝난다. 공산당은 1928년 8월 7일 장시성 회의에서 무모한 봉기를 일으킨 좌편향 노선을 스스로 비판한다. 이에 따라 천두슈가 당 서기장에서 물러나고 취추바이가 주요 책임자가 된다.

그러나 1930년 5월 장제스·풍옥산·옌시산 사이에 전쟁이 발생하자 리리산으로 대표되는 좌익 모험주의가 다시 당의 지도기관을 지배하게 된다. 이들은 6월에 전국의 홍군을 동원하여 난창을 공격하다가 패배하고 7월에는 장시에서 소비에트를 건설하지만 불과 9일 만에 무너진다. 9월 당 전체회의는 리리산의 노선을 (노선상의 오류가 아닌) 전술상의 오류라고 비판한다.

마오쩌뚱은 농촌을 근거지로 삼고 국공합작으로 반제국주의 투쟁을 전개한다.

마오쩌뚱은 무리한 공격을 피하면서 징강산에서 역량을 보존하여 1만 명으로 노농홍군 4군단을 편성한다. 그리고 ‘농촌에서 혁명 근거지를 확대하여 도시를 포위한다’는 전략을 수립하고 ‘3대 규율’과 ‘6항주의’라는 생활 규율을 세운다. 3대 규율이란 일체의 행동은 반드시 지휘를 따른다, 인민에게서 바늘 한 개나 실 한 오라기도 뺐지 않는다, 지방 유지로부터 거두어들인 물건은 반드시 전체의 소유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6항주의란 매매는 공정하게, 대화는 부드럽게, 잠잘 때 사용하던 문짝은 원래 제자리에 갖다놓고 바닥에 깔았던 짚은 묶어놓는다, 빌린 것은 반드시 돌려주고 부서진 것은 반드시 보상한다, 아무 데나 대소변을 보지 않는다, 포로의 지갑에 손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오쩌뚱은 1928년 12월 근거지 주변의 농촌에서 모든 토지를 몰수하여 가족 수에 따라 분배하는 토지 개혁을 실시한다. 홍군 4군단은 규율 엄수와 토지 개혁을 기반으로 농민들과 공고한 관계를 형성한다.

장제스는 1930년 말부터 1931년 6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장시성 남부를 중심으로 공산당 토벌 작전을 실시한다. 그러나 홍군은 적이 진격해오면 우리는 후퇴한다, 적이 멈추면 우리가 그들을 교란시킨다, 적이 전투를 피하면 우리가 공격한다, 적이 후퇴하면 우리는 진격한다는 네 가지 게릴라 전술로 유격전을 펼쳐 장제스 군대를 괴롭힌다.

1931년 9월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한다. 그러자 10월에 상하이에서 80만 노동자가 항일구국연합회와 의용군을 조직하여 항일 투쟁에 나선다. 민중들은 일본 상품 불매 운동과 경제 절교 운동을 전개한다. 1932년 상하이 항전 때는 상하이의 상공회의소와 은행협회가 자발적으로 영업을 중단하는 등 민족 부르주아까지 투쟁에 참가한다.

장제스는 1933년 10월 일본과의 전투는 접어둔 채 100만 대군을 동원하여 홍군을 포위 공격한다. 1934년 10월이 되자 ‘해방구’의 중심부까지 심각한 위협에 놓이게 된다. 홍군은 포위를 뚫고 국민당 군대의 공격을 피해 점점 더 중국 서부의 오지로 깊숙이 들어간다. 결국엔 산시성에 있는 ‘소비에트 구(區)들’을 향해 나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방안으로 남는다. 마오쩌뚱은 이 방안을 집요하게 주장함으로써 공산당의 확고부동한 지도자로 자리를 굳힌다.

출발할 때 8~9만 명이었던 부대는 중국횡단 2만 5천 리(1만㎞)의 대장정을 마치고 1년 후에 구이저우성 준이에 도착했을 때는 겨우 4천 명만 남는다. 새로운 게릴라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일부 사람들이 거쳐 가는 지역들에 남았지만 이틀에 한번 꼴로 전투를 치르는 도중에 5만 명이 넘게 죽었으니 대장정은 그야말로 인간 인내심의 대서사시다.

공산당은 1935년 1월 준이에서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열고 저우언라이의 중앙군사위 주석 직을 마오쩌뚱에 넘기고 장원텐을 당 총서기로 선출하면서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한다. 중앙위원회는 8월에 항일 구국 통일 전선을 전술로 채택한다. 일본과 싸우기 위해 힘을 뭉치자는 주장은 전국 인민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

동북군의 장쉐량과 서북군의 양후청은 공산당과 연대하여 일본에 대항하자는 ‘연공항일(聯共抗日)’을 장제스에게 제안한다. 그러나 장제스는 여전히 공산당을 박살내야 한다는 ‘초공(剿共)’의 입장을 취하면서 장쉐량과 양후청을 해직시키려 한다. 이에 장쉐량은 1936년 12월 12일 전투를 격려하러 시안에 온 장제스를 억류하여 망국적인 반공 내전을 중지하고 연공항일의 조건을 수락하게 한다.

일본 군대는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를 습격하면서부터 한 달여 동안 11세 소녀에서부터 60세 노파까지도 마구잡이로 폭행·유린하면서 무자비하게 30만 명이 넘는 중국 인민을 학살―난징 학살이 대표적이다―한다. 이에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일제히 대일 항전에 합류한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발전하자 국민당 중앙위원회가 9월 23일 (공산당이 7월에 제안한) 국공합작을 정식으로 공포한다. 장제스도 할 수 없이 공산당의 합법적 지위를 승인하는 취지의 담화를 발표한다. 이로써 항일 민족 통일 전선이 정식으로 성립된다.

공산당은 통일 전선을 펼치면서도 독자적인 유격전과 항일 근거지 건설에 주력한다. 그런데 항일 투쟁이 진척되면서 왕징웨이 집단의 패배주의적 망국론과 근거 없이 낙관적인 속승론(速勝論)이 대두한다. 이에 마오쩌뚱은 1938년 5월 항일 전쟁의 올바른 길을 제시하기 위해 ‘지구전에 대하여’를 발표한다. 이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은 일본군에게 점령된 지역과 산업에서 비밀 노조를 조직하면서 끈기 있게 활동한다.

그러나 장제스 일파는 1938년 자신들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에서 노동자협회를 만들어 노동자들을 강제로 가입시키고 파업 반대와 공산주의 반대를 표방하면서 엄중히 통제한다. 그리고 국민당 대부르주아 친일파 왕징웨이 집단은 1939년 적에게 투항한다. 이 때문에 국공합작으로 고조되던 인민의 항전 분위기가 다시 침체된다.

이런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마오쩌뚱은 1940년 1월 신민주주의 강령을 발표한다. 신민주주의 강령은 중국 혁명의 임무를 자본주의 일반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반제 반봉건이라고 규정하고 1단계에서는 반(半)식민지·반(半)봉건사회를 독립된 민주주의 사회로 바꾸고 2단계에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이에 따라 공산당은 근거지에 항일 민주 정권을 세우고 정부 기관과 민간 기관에서 공산당원·진보분자(소부르주아계급)·중간분자(중산계급·노동자·농민)가 각각 1/3을 차지하게 한다.

마오쩌뚱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긴박한 시기에도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학풍에서의 주관주의, 당풍에서의 분파주의, 문풍에서의 공론을 배격하자는 정풍 운동을 전개한다.

공산당은 항일 전쟁에서 가장 선두에 섬으로써 급속히 세력을 확대하여 권력에 도전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다. 1937년에 3만 명이던 당원과 4만 명이던 홍군은 1940년에 이르러서는 각각 80만 명과 50만 명으로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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