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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2
    최선을 다하는 자유
  2.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3
    최선을 다하는 자유
  3.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4
    최선을 다하는 자유
  4.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5
    최선을 다하는 자유
  5.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1
    최선을 다하는 자유
  6.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2
    최선을 다하는 자유
  7.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3(1)
    최선을 다하는 자유
  8.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4
    최선을 다하는 자유
  9. 2005/01/15
    <공산당선언>과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 김수행1998
    최선을 다하는 자유
  10. 2005/01/15
    임금노동과 자본, 칼 맑스
    최선을 다하는 자유

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4

세계노동운동사 [5장] 제국주의 (1876~1916) 4

사회주의 대중 정당의 등장과 발전

독일 사회민주당은 합법 의회 활동에 매몰된다.

사회민주노동당과 노동자총연맹은 1875년 고타에서 합당 대회를 열고 세계 최초의 노동자계급의 대중 정당인 독일사회주의노동당을 새로 창당한다. 사회주의노동당은 베를린·함부르크 같은 대도시에서는 창당 3년 만에 선거에서 40%까지 득표할 정도로 급성장한다.

이에 비스마르크 정권은 1878년에 ‘독일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을 계기로 의회를 해산하는 강수를 두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모든 조직·집회·출판물을 금지하는 사회주의자단속법을 통과시킨다. 이에 사회주의노동당은 지하 활동에 들어가고 천 명 가량의 활동가들이 해외로 망명하거나 추방된다.

그런데 사회주의자단속법은 조직·집회·출판물만을 금지하는 것이어서 선거에서 당선되기만 하면 ‘원내’에서의 합법 활동은 가능하다. 아무튼 사회주의노동당은 착실한 성장을 계속하여 1884년 총선에서 기존 12석의 의석을 24석으로 늘린다. 그런데 다수 의원이 자기 지역구 유권자들의 경제적 이해를 중시하여 정부가 추진하는 식민 정책의 하나인 ‘증기선 보조금 법’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을 보이면서 당은 한 차례 홍역을 겪는다.

그래도 당은 성장을 계속하여 사회주의자단속법이 폐지된 1980년의 총선에서 143만 표(19.7%)를 득표하여 35명의 의원을 당선시키는 커다란 성공을 거둔다. 그렇지만 당은 단속법 시기의 공포스런 탄압에 대한 기억 때문에 ‘조직을 지키면서 착실하게 표를 늘려나가는’ 합법 활동에만 치중하고 대규모 대중 투쟁을 두려워하는 체질로 변해간다. 이에 “청년파”들이 제도 정치권 철수와 선거 보이콧 등을 주장하다가 1890년에 당에서 쫓겨나고 독립사회주의당이라는 소규모 정당을 창당했다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다.

사회주의노동당은 1891년 에르푸르트에서 당 대회를 열어 독일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밝힌 새 강령을 채택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선언한다. 그리고 해외에서 발행하던 비합법 신문 [사회민주주의자] 대신 국내에서 발간하는 합법 신문 [전진]을 창간한다.

그런데 활동 과정에서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최종 목표와 민주화·개혁이라는 당면한 실천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면서 시간이 갈수록 혁명은 하나의 ‘신앙’으로만 남고 실천은 제도 정치에 치중하게 된다. 제국주의로 성장해 가고 있는 독일 경제의 발전과 사회민주당의 급속한 성장, 특히 의석수의 증가는 이러한 경향을 더욱 부채질한다. 그러자 베른슈타인은 “내게는 운동이 전부다. 궁극 목표란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주장하며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1899년)라는 책을 통해 혁명 이론에 ‘수정’을 가한다. 이로써 베른슈타인은 ‘수정주의’의 원조가 된다. 이에 대해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침묵과 무시로 대응한다.

그러나 이제 막 당 활동을 시작한 스물일곱 살의 폴란드 계 여성 운동가 로자 룩셈부르크만은 사태의 본질을 직시하고 ‘일상 개혁 투쟁은 당장의 이익보다는 노동자계급의 의식과 조직을 성장시켜 혁명 운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반박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하자 고향인 폴란드―이때는 러시아 영토였다―로 돌아가 혁명을 직접 경험하고 돌아와서는 (1891년 벨기에 총파업 때부터 대두한) 정치총파업 전술을 적극 제기하기 시작한다. 이때까지 독일 사회주의자들에게 총파업은 경제 투쟁의 한 전술로서만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정치 투쟁이란 의회 진출 아니면 무장 봉기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세 농노의 사촌뻘로 여겨졌던 ‘미숙한’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봉기는 1905년 1년 내내 유럽의 신문지상을 달구며 유럽의 노동자계급을 밑에서부터 뒤흔들어 놓는다. 그러나 노조 지도자들은 5월의 쾰른 노조 대회에서 총파업 전술을 의제에 올리는 것조차 거부한다. 반면에 사회민주당의 9월 당 대회는 총파업 투쟁을 당 전술의 하나로 채택한다. 하지만 당 지도부는 노조 측의 압력에 밀려 다음해 2월에 노조 지도부와 비밀회의를 열어 총파업을 선동하지 않겠다고 확약하고 9월 당 대회에서는 노조의 전술적 자율성을 보장함으로써 당 대회 결의에 대한 노조 지도부의 책임을 면제해준다.

러시아 혁명의 패배와 함께 독일 노동자들의 오랜만의 투쟁의 물결도 다시 퇴조기에 접어들고 있던 시기인 1907년의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은 이전의 81석의 절반에 불과한 43석만을 얻으며 대패한다. 그런데 1905~06년의 급진화가 선거의 패배를 가져왔다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당은 더욱 확실히 오른쪽으로 나아간다.

이 즈음부터 사회민주당의 최고 기관인 5인으로 구성된 간부회의의 인물도 바뀌기 시작한다. 사회민주당 창당 이후 당 상근 활동을 통해 성장한 첫 세대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이후에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된다―가 1906년에 은퇴한 아우어의 뒤를 이어 그 자리를 맡는다. 1911년 예나 당 대회에서는 ‘순수한’ 노동자계급 출신인 필립 샤이데만―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수상이 된다―과 오토 브라운이 간부회의 임원으로 선출된다. 그런데 이들은 ‘혁명가’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세대이고 이들에게 당이나 노조의 간부가 된다는 것은 노동자 출신으로서 유일한 출세의 기회를 잡는다는 의미가 더 크다.

1910년 2~3월에 시위와 파업이 잇달아 일어나지만 당 지도부는 2년 뒤의 총선을 준비하기 위해 대중 행동은 그 정도 수준에서 그쳐야 한다는 입장을 전개한다. 카우츠키는 대중파업은 발전이 덜된 동유럽 사회에나 적절한 투쟁 형태라며 지도부의 입장을 옹호한다.

사회민주당은 1912년 총선에서 처음으로 자유주의 정당들과 연합하는 전술을 편 끝에 425만 표(27.7%)에 110석을 얻으며 원내 제1당이 된다. 그러나 자유주의 정당들과의 연합이 깨져 사회민주당은 다시 주변 세력으로 밀려난다. 그리고 100명을 넘어선 국회의원들이 당을 완전히 좌지우지하게 된다. 다음 해 8월에는 베벨이 사망하여 당의 이상과 현실 정치를 봉합해주던 마지막 버팀목이 사라진다. 1차 세계대전 직전에 간부회의가 12인으로 늘어나지만 이 중에 좌파는 한 명도 없는 상황이 된다.

프랑스 사회당은 ‘혁명적 개혁’을 추진한다.

사회주의 세력은 파리코뮌 패배 이후 제도 정치에서 배제된다.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력이 서서히 복구되긴 하지만 사회주의 정당들이 여러 개의 경향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영국과 같은 대규모 노조 운동이나 독일 사회민주당 같은 강력한 사회주의 단일 정당은 아직 요원한 상태로 존재한다. 사회주의자들은 1884년에 도입된 지방자치제 선거에 참여하면서 제도 정치에 대한 경험과 실력을 쌓아간다.

사회주의자들은 1893년 총선에서 모두 50여명이 당선된다. 여러 정파로 찢겨 있는 상황이고 이전까지 사회주의자 국회의원이 한 명도 없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기적과도 같은 약진이다. 이러한 성공의 요인은 사상 최대의 부패 스캔들인 파나마운하 관련 뇌물 수수 사건이 터지면서 개혁파로 인식되어온 공화파 국회의원들에 대한 대중의 환멸이 극에 달하고, 이제 막 프랑스에 불어 닥친 불황으로 인해 계급 갈등이 치열해지고, 지방 행정을 장악한 사회주의자들이 선거를 지원한 데에 있다.

1898년에는 지배 세력이 ‘드레퓌스 사건’을 조작하여 군국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조장하는 바람에 반동 극우파가 다시 득세한다. 그러나 1년 후 상황이 반전되어 공화파 내에서 개혁성이 강한 급진파가 정부를 구성한다. 그러자 밀르랑이 반동에 대항하여 공화제를 방어하기 위해 단결해야 한다며 노동부 장관으로 입각한다. 역사상 최초로 사회주의자가 부르주아 정부에 참여한 것이다. 이로 인해 프랑스뿐만 아니라 제2인터내셔널 내에서 격심한 논쟁이 벌어진다. 특히 파리 코뮌을 잔인하게 진압한 장본인인 갈리페 장군이 내각의 국방상이라는 점이 크게 문제가 된다. 그런 사람과 마주앉아 국사를 논한다는 것은 사회주의자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독일 사회민주당 내의 수정주의 논쟁과 얽혀 더욱 복잡한 형국을 이룬다. 이로 인해 한참 무르익어 가던 사회주의 조직들의 통합은 뒤로 미뤄진다.

앞 절에서 본 것처럼 1902년에 결성된 노동총동맹은 사회주의 정당들과 관계를 단절한다. 이것은 사회주의 세력들에게 위기를 불러일으켜 통합으로 나아가게 한다. 밀르랑의 입각에 반대하는 사회주의 세력들은 합당하여 ‘프랑스의 사회당’을 만들고 나머지 세력들은 프랑스사회당을 창당한다. 그런데 밀르랑이 1903년부터 드러내놓고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입장으로 변절하자 프랑스사회당도 밀르랑에게 등을 돌린다. 1904년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 대회는 프랑스의사회당과 프랑스사회당의 통합을 재촉한다. 여기에 1905년 러시아 혁명이 강한 충격파를 던진다. 결국 1905년 4월에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라는 이름으로 통합 사회당이 창당된다.

그러나 통합 사회당은 유기적인 당이라기보다는 사실상 분파 연합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1908년 툴루즈 당 대회에서는 우파의 개혁 노선과 좌파의 혁명 노선이 첨예하게 맞붙는다. “카르모 광부들의 대표”라는 말이 늘 수식어로 따라붙는 조레스는 대회 막바지에 ‘혁명적 개혁주의’를 당 노선으로 제시하며 회심의 열변을 토한다. 당이 제대로 된 개혁을 추진하는 것은 오직 당이 혁명적 성격을 잃지 않을 때만 가능하고 역으로 개혁의 주체가 되는 노동자계급이야말로 비로소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으며 개혁과 혁명 사이에는 ‘충돌과 위기, 파탄과 도약’이 있을 거라고 역설한 것이다. 툴루즈 당 대회 이후 조레스는 더욱더 급진적인 행보를 취하면서 차츰 통합 사회당의 중심으로 부상한다.

당내 통합에 일단 성공한 조레스는 총파업 전술의 유효성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며 노동총동맹과의 화합에 나선다. 사회당은 1910년 철도파업 때 당 기관지 사무실을 파업 투쟁 본부로 사용하게 하면서 행동으로 연대하여 정부로부터 모진 탄압을 당하던 노동총동맹의 마음을 열게 만든다. 이런 노력의 결과 사회당과 노동총동맹은 1913년 파리의 프레 생-제르베에서 파리 코뮌을 기념하고 정부의 병역 3년 연장 기도에 대항하는 최초의 대규모 연합 집회를 개최한다. 그리고 조레스는 드레퓌스 사건 때부터 군부의 영향력 증대에 맞서 거리낌 없이 정면 대결을 벌임으로써 반군국주의·반전평화 투쟁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이러한 성과들을 바탕으로 사회당은 1914년 총선에서 98명을 국회의원에 당선시키는 압승을 거둔다.

이탈리아 사회당은 격렬한 대중 투쟁의 영향으로 급진화한다.

각 지역의 정치 세력들이 1892년에 모여 이탈리아노동자당을 창당하고 3년 후에 이탈리아사회당으로 이름을 바꾼다. 사회당에는 노동조합·협동조합·노동자공제회 등이 집단으로 가입한다. 앞 절에서 보았던 노동회의소가 당의 발전에 핵심 역할을 한다.

그러나 사회당은 의원단·공장조직·기관지가 따로 따로 독자 행동을 한다. 당 대회와 기관지 [전진]이 당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유일한 버팀목 노릇을 한다. 게다가 개혁주의 노선의 가장 철저한 신봉자인 필리포 투라티가 주도하는 사회당 의원단은 의회를 지배하는 남부 지주와 북부 자본가 사이의 담합에 감히 도전하려 하지 않고 북부 산업 지역의 일부 조직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해를 얻어내는 데만 관심을 기울인다. 1890년대에 남부 시칠리아에서 빈농들이 대중 운동을 일으켰을 때에도 사회당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런데도 1898년 밀라노에서 일어난 격렬한 대중 투쟁에 힘입어 사회당은 1900년 총선에서 13%의 지지를 받아 33명을 당선시킨다. 아직 보통 선거가 실시되고 있지 않았기에 이는 놀라운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인 1904~06년에 이탈리아에서도 파업의 물결이 일어난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타고 당 기관지 [전진]을 중심으로 당의 최대 목표인 사회주의 혁명을 견지하자는 ‘최대강령파’가 등장한다. 이들은 1900년대 내내 의원단의 개혁주의자들과 엎치락뒤치락하는 당내 투쟁을 계속하다가 1912년 당 대회에서 당권을 장악한다. 그리고 최초의 ‘성인 남성 보통 선거’로 치러진 이 해의 총선에서 사회당은 79석을 획득한다.

영국 노동당은 순수한 의회 정치를 추구한다.

◀ 창당 당시 영국 노동당의 포스터 : “노동당이 길을 연다”

1889년부터 비공인 파업으로 떨쳐 일어서기 시작한 노동자 운동의 성장을 바탕으로 노조와 소규모 좌파 정당·단체의 대표들이 1900년 2월에 ‘노조 활동의 자유를 법으로 보장받으려는 목적으로 제도 정치권 진출을 추진하는’ 노동자대표위원회를 건설한다. 이 대표위원회는 1906년에 ‘노동당’―노동자 정당의 건설로는 유럽에서 가장 늦다―으로 전환한다. 노동당은 1906년 총선에서 29명을 당선시킨다.

그런데 노동당은 노조가 만든 당이기 때문에 유럽의 다른 노동자 정당들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들이 나타난다. 노동당은 지지자들이 개별 입당하는 게 아니라 노동당을 지지하는 노조의 조합원들이 곧바로 당원으로 인정되는 집단 가입 제도로 운영된다. 물론 유럽의 다른 좌파 정당들에서도 이런 식의 집단 가입 제도는 존재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노동자들의 개별 입당을 독려하기 위한 보조 수단일 뿐이다.

당 대회에서 노조 측 대의원의 표는 자신이 대표하는 조합원의 수에 따라 수만 표, 수십만 표로 환산―블록 투표―하여 집계된다. 그러니 노동자들은 당과 직접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노조 간부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교류하게 된다. 노조는 일종의 이익 단체 역할을 하고 당은 원내에서 이를 대변한다. 이런 점에서 노동당의 당 구조야말로 노조의 과제는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고 당의 임무는 이를 의회 내에서 대변하는 것이라는 의회주의 정치의 가장 순수한 발현이라 할 수 있다.

당의 일상 활동은 하원 의원단이 모두 결정한다. 이후에 노동당이 집권하게 될 때는 내각, 그리고 야당으로 있을 경우에는 그림자 내각(Shadow Cabinet)이 실질적인 당 지도부 역할을 하는데 내각은 모두 하원 의원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흔히 ‘당수’로 불리는 당 최고 지도자(수상 혹은 차기 수상)는 의원단 내 선거로 뽑힌다. 이런 점에서 노동당은 의원단에 의한 순수한 의회주의 정당이다.

사실 영국은 지난 200년 동안 한 번도 정치적 격변이 없었고 토지 귀족과 산업 자본가들 사이의 세력 교체는 의회라는 사교 클럽에서 지루하고 조용하게 이루어져옴으로써 의회가 ‘정치’의 모든 것이 되어온 나라다.

노동당은 1차 세계대전 직후 산별노조 운동이 활성화되자 1918년 당 대회에서 창당 이후 최대의 탈바꿈을 단행한다. 당 대회에서 ‘생산수단·분배·교환에 대한 공동 소유와 산업·서비스에 대한 민중의 통제’(당헌 4조)를 명시한 당헌이 통과됨으로써 노동당은 비로소 ‘사회주의’ 정당이 된다.

또한 이 당 대회에서 처음으로 개인 입당 제도가 도입된다. 하지만 창당 당시의 구조가 크게 변하지는 않는다. 당의 주된 기반은 여전히 노조의 집단 가입이다. 개별 입당 당원은 아무리 많아도 60만 수준에 그친 반면 집단 가입한 당원의 수는 600만을 넘어선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노동자계급의 단일 정당을 추구한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황가는 1차 세계대전 전만 해도 ‘오스트리아-헝가리 공동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독일어권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폴란드 일부를 포함하는 중부 유럽의 광활한 지역을 통치한다.

노동자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은 1848년 유럽 혁명의 실패 이후 수십 년 동안 급진파와 온건파로 분열되어 고통 받다가 1889년에 통합 대회를 열어 노동자계급 단일 정당으로서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을 창당한다. 사회민주노동당은 1890년대의 급속한 산업화를 배경으로 빠르게 성장한다. 노동자들이 1906년에 총파업을 경고하여 성인 남성의 보통 선거권을 획득한다. 사회민주노동당은 다음해 1907년 총선에서 87명의 의원을 당선시켜 원내 제1당으로 부상한다.

그리고 비엔나 대학을 중심으로 결성된 ‘사회주의 학생·교수 자유 조합’과 세계 역사상 최초의 ‘맑스주의자’ 교수인 칼 그륀베르크의 영향 아래 일급의 사회과학도들이 당과 노동자 운동 주위에 포진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청년 세대의 대표자들인 칼 렌너, 막스 아들러, 루돌프 힐퍼딩, 오토 바우어 등은 1904년에 나온 이론지 [맑스 연구], 1907년에 창간한 월간 [투쟁], 일간지 [노동자 신문]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 맑스주의 학파’를 구성하고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와 카우츠키의 교조주의를 모두 비판하면서 1차 세계대전 직전의 사상계를 주름 잡는다. 그러나 이 최초의 맑스주의 ‘학파’는 1차 세계대전에 대한 입장 차이로 분열된다.

사회민주노동당 내에서도 전쟁을 둘러싸고 의견이 갈리지만 강력한 전통으로 이어져온 ‘노동자계급 단일 정당’이라는 이념 때문에 분당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좌파는 새로운 당(공산당)을 건설하기보다는 당의 좌익화를 지향하고 우파는 좌파에게 당권을 빼앗겼을 때(1917년)도 당을 떠나기보다는 소수파로 잔존하는 길을 택한다. 좌파인 바우어는 “오스트리아 맑스주의는 통일의 사상이다. 이는 노동자계급 단일 정당의 이념이다”라고 주장하고 공산주의자들만의 특수한 당을 건설함으로써 유럽 노동자 운동을 분열시킨 코민테른의 방침은 [공산당 선언]의 정신에 어긋난 것이라고 비판한다.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혁명과 맞닥뜨린다.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는 고통 받는 민중에 대한 부채 의식으로 인해 체제 변혁을 강렬하게 지향한다. 이들은 인민에게 고통만 주는 자본주의 단계―서구적 경로―를 거치지 않고 소생산자들이 토지를 평등하게 소유하는 촌락 공동체를 통해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함으로써 바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소명의식을 가지고 1870년대 중반부터 ‘브나로드(인민 속으로)’ 운동을 전개한다. 이들을 인민주의자라고 부른다.

인민주의자였던 플레하노프는 유럽으로 망명하여 생활하는 동안 노동자 운동과 사회주의 정당들의 활발한 활동에 큰 감명을 받고 1880년대 초에 맑스주의로 전향하여 러시아 맑스주의 운동의 창시자가 된다. 플레하노프는 자본주의는 가혹하기는 하되 노동자계급의 의식을 각성시키고 사회주의를 위한 물적 기반을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반드시 거칠 필요가 있는 단계이며, 농민층의 우매한 정치의식을 각성시키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정치 투쟁이 필요하고, 차르 전제정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이 아직 힘이 미약하기 때문에 자유주의 부르주아들과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플레하노프가 주도하는 노동해방단은 외국에서 글을 써서 비밀리에 러시아로 반입하는 선전 활동을 통해 러시아 지식인들에게 점점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한편 인민주의자들의 활동은 심각한 한계에 부딪힌다. 농민들이 차르 숭배에 젖어 있어서 혁명을 선동하는 지식인들을 경계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경찰에 고발하기까지 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결과 농민들에 대한 선전·선동 활동을 포기하고 테러를 통한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인민주의자들이 늘어난다. 이들은 1901~02년에 사회혁명당을 결성하고 테러를 주요 전술로 채택한다. 사회혁명당의 테러리스트들은 차르 정부의 초강경파 요인들을 여러 차례에 걸쳐 암살함으로써 일반인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맑스주의자들은 1898년 민스크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창당한다. 그러나 분파들의 대표자 8명이 모인 이 대회는 창당을 결의한 수준이고 실질적인 창당대회는 되지 못한다. 게다가 무수한 운동 조직들이 비밀경찰에게 추적되어 수시로 깨져나간다. 그래서 레닌은 강한 규율과 민주집중제로 운영되는 비합법 혁명가 조직이 필요하며 또한 이것은 ‘전국 정치 신문’을 통해 단련된 활동가들을 기반으로 해서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편집진을 해외에 두고 [이스크라(불꽃)]라는 ‘신문’을 발간한다.

이러한 노력들의 성과로 1903년 런던에서 사회민주노동당 2차 당 대회가 열린다. 그런데 조직 노선을 반영하는 규약 1조의 당원 규정을 두고 레닌과 마르토프가 날카롭게 대립한다. 레닌은 당 조직에서 활동하는 사람으로 엄격하게 제한하자고 주장하고 마르토프는 지지자들까지 폭넓게 당원으로 인정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아무튼 편집국 구성에서 이스크라 진영이 다수를 차지함으로써 레닌을 중심으로 볼셰비키―‘다수파’라는 러시아 말이다―가 형성되고 마르토프를 중심으로 멘셰비키(소수파)가 형성된다.

2년 후인 1905년에 혁명이 일어나자 사회민주노동당은 때 이르게 러시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사회민주당 내의 여러 분파들은 당면한 혁명의 성격이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혁명의 주체가 누구이고 노동자계급이 누구와 동맹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레닌의 볼셰비키는 노동자·농민의 임시 혁명 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한다. 부르주아지가 너무나 허약하여 차르를 지지하는 지주와 타협함으로써 혁명을 배반할 것이기 때문에 부르주아 혁명을 과감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농민이 임시 혁명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볼셰비키는 농민층을 노동자계급의 확고한 동맹 세력으로 확보하기 위해 토지 국유화를 강령에 넣자고 제안한다.

멘셰비키는 부르주아와 나란히 그리고 주도적으로 투쟁하되 혁명적 야당으로 남자고 주장한다. 부르주아 혁명 단계에서 사회민주주의자가 집권하게 되면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을 주도적으로 조직해내지 못하면서 결국 혁명의 진전을 가로막게 된다는 것이다. 다만 서부 유럽에서 혁명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고 본다. 멘셰비키는 노동자계급만을 중시한 나머지 농민층과 소시민층에 대해서는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트로츠키는 멘셰비키 진영에 속해 있었지만 연속 혁명을 주장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그 자체의 동력에 의해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전환’되는데 오직 노동자계급만이 그 혁명적 전환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연속 혁명으로 수립되는 사회주의 권력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서부 유럽 프롤레타리아들의 도움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서부 유럽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러시아 혁명은 비극적인 상황으로 빠져들 것으로 예상한다.

이런 치열한 논쟁이 있었지만 창당한 지 이제 겨우 2년밖에 안 된 사회민주노동당은 노선을 현실화시킬만한 세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비록 사회민주노동당이 노동자들의 투쟁에 적극 결합하고 혁명으로 발전해 가는 상황에 힘입어 한때 15만 명 규모의 대중 정당으로 성장하기는 하지만 처음 겪는 혁명이라는 성난 파도 속에서 마치 방향키만 있는 돛단배와 같은 처지다. 그렇지만 그 방향키가 있었기에 1905년 혁명은 1917년 혁명을 성공으로 이끄는 전초전이 된다.

그런데 1905년 5월 불리긴 수상이 ‘의회 신설’을 타협책으로 내놓자 멘셰비키는 의회 선거가 실시된다면 참가하겠다는 입장을 밝힌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혁명이 고양되고 있기 때문에 적극 보이콧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1906년에 혁명의 패배가 분명해지자 레닌은 4월 당 대회에서 입장을 바꾼다. 지독히 불평등한 간접 선거임에도 불구하고 대중과의 접촉면을 늘이기 위해 선거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 대회는 ‘선거 불참’으로 결론이 난다. 그런데도 당원 일부가 개별적으로 선거에 참여하여 14명이 의원으로 당선된다. 이는 당 규율을 명백히 위반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레닌은 이들이 의회에 남아 당 의원단으로서 활동할 것을 지지한다. 이후 레닌은 볼셰비키 내에서 선거 불참과 의원단 해체를 주장하는 ‘소환파’들과 지난한 투쟁을 벌인다.

레나 학살이 일어난 바로 그 1912년 4월에 볼셰비키는 [프라우다(진실)]라는 신문을 창간한다. 이 신문은 정부의 탄압으로 8번이나 이름을 바꾸게 되지만 1914년 7월에 지령 645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기까지 꾸준히 발간된다. 당은 이외에도 이론지를 따로 발간하고 합법 출판사도 운영한다.

볼셰비키는 전국에서 2중 간선제를 통해 단 6명의 의원만 선출하는 노동자 선거구―지주·농민·도시 등으로 선거구가 나뉘어 있다―모두에 후보를 내보낸다. 앞 절에서 보았듯이 선거일인 10월 5일의 아침은 공장 대표자들의 자격 박탈에 항의하는 페체르스부르크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시작된다. 이처럼 정부의 극악한 탄압으로 인해 선거와 대중 행동이 자연스럽게 결합되면서 전투적인 볼셰비키 후보에게 유리한 상황이 조성된다. 선거 결과 전체 442개 의석 중에서 사회민주당이 14석을 차지하는데 노동자 선거구 6곳에서는 모두 볼셰비키가 당선된다. 노동자계급이 250만인 나라에서 볼셰비키가 114만 4천 명의 노동자 유권자를 대변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14명의 사회민주노동당 의원단에게는 대정부 질의를 하는 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의회활동인데 그나마도 33인 이상의 서명을 받아야 하니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 의원들은 원내 활동과 [프라우다] 그리고 활발한 노동자 투쟁을 결합해서 효과적인 정치 활동의 전형을 만들어낸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사회 보험(의료 보험) 투쟁이다. 볼셰비키 의원들은 사회 보험―6월에 처음 도입되었다―의 확대와 완전한 노동자 통제를 줄기차게 주장하여 대정부 질의를 하는 12월 14일에는 노동자 6만 6천 명의 지지 파업을 이끌어낸다. 볼셰비키 의원들은 [프라우다]와 그 사무실을 매개로 노동자 조직들과 긴밀히 협력한다. 또한 대정부 질의에서 노동 탄압에 항의하거나 장관 항의 면담을 주도하고 공장 정문과 거리에서 연설을 통해 투쟁 상황을 알리고 파업 기금을 모금하면서 앞 절에서 서술한 수많은 투쟁들에 적극 연대한다.

[프라우다]는 이러한 투쟁들을 즉각 보도하여 노동자들에게 진실을 폭로하고 반대로 노동자들은 매일 35개가량의 투고를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게 한다. [프라우다]는 하루 4만~6만 부가 판매되는데 절반이 공장에서 팔린다. [프라우다]는 정기구독자 조직과 후원회원 조직을 만들어 운영하면서 사실상 합법 대중 정당의 기능을 한다. 이제까지 당이나 노조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노동자들이 [프라우다]의 기사를 보고 사무실에 찾아와 노동자 의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각종 조직에 가입한다. 그리고 페체르스부르크의 노조 18개 중 15개, 모스크바의 노조 13개 중 10개가 [프라우다]를 적극 지원한다. [프라우다]의 영향력을 놓고 보면 볼셰비키는 250만의 노동자계급 중 수천 명의 간부와 3만~5만의 당원을 거느린 대중 정당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멘셰비키 신문 [루취(빛)]는 [프라우다]와 비교 상대가 되지 않는다.

볼셰비키 의원들은 당의 방침에 따라 의회가 휴회하는 동안은 지역구를 순회하면서 공장과 지역에서 의정 활동을 설명하고 지방의 노동자 운동을 활성화시키는 데 보낸다. 노동자 의원들이 방문한 후에는 대개 파업 투쟁이 분출하고 [프라우다] 구독자가 늘고 당 조직이 강화된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투쟁이 혁명을 향해 치달아가던 1914년 7월 8일 경찰은 [프라우다] 사무실을 급습하여 강제 폐간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 의원단은 전시 동원령이 선포되자마자 곧바로 반전 성명서를 채택하고 전쟁 예산 투표에 반대해 전원 퇴장한다. 이는 세르비아 사회당과 함께 제2인터내셔널 소속 정당의 의원단이 전쟁에 반대한 단 두 개의 사례에 속한다. 볼셰비키 의원단은 이후 원외 투쟁에 주력하다가 11월에 결국 체포돼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다. 이로써 볼셰비키의 합법 활동은 또다시 중단된다. 그러나 [프라우다]를 통해 계급의식을 자각한, 그리하여 이후 혁명의 주체가 될 수천 명의 선진 노동자들이 이미 대중 속에 튼튼하게 뿌리를 박고 난 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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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5

세계노동운동사 [5장] 제국주의 (1876~1916) 5

1차 세계대전

제국주의 국가들이 영토 재분할을 둘러싸고 충돌로 나아간다.

1876년 이후 30여 년 동안 급속하게 성장해온 제국주의 국가들의 독점 자본은 넘쳐나는 과잉 자본을 투자할 새로운 시장을 필요로 한다. 자본의 축적에는 ‘자연스런 경계선’이란 없으며 자본의 팽창 능력이 그 한계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균등 발전으로 인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변화된 세력 관계는 기존의 ‘세력권’을 요동치게 만든다. 결국 해결책은 식민지 영토의 재분할이며 따라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충돌은 필연이다. 남은 것은 누가 먼저 도발하는가이며 그 충돌이 어디까지 나아가는가 하는 것뿐이다.

프랑스는 1905년에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만들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이에 대해 독일은 외교 수단을 총동원하여 공세를 편다. 반면에 영국은 프랑스를 지지한다.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한 독일을 가장 위험한 잠재적 적대국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는 1907년에 영국과 식민지 세력권을 둘러싼 이견을 해결한다. 이로써 영국·프랑스·러시아 사이에 ‘삼국 협상’이 맺어진다. 반면에 독일은 영국의 수준을 능가하는 해군 증강을 결정한다. 이를 계기로 유럽 열강들은 경쟁하듯이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한다.

1908년 터키에서 혁명이 발생한다. 그러자 오스트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는 발칸 지역에서 고조되고 있던 민족주의 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한다. 이에 대해 삼국 협상 회원국인 러시아·영국·프랑스가 반대를 표명하자 독일은 동맹국인 오스트리아를 군사적으로 지지하겠다고 위협함으로써 사태를 해결한다.

1911년에 모로코를 둘러싸고 다시 위기가 도래하자 독일은 모로코의 아가디르 항에 전함을 파견해 무력시위를 감행한다.

오스만제국이 급속히 약화되는 틈을 타고 이 지역의 국가들―세르비아·몬테네그로·루마니아·불가리아·그리스―은 저마다 상치되는 영토권을 요구한다. 그 결과 1912년과 1913년에 두 차례의 발칸 전쟁이 일어나 세르비아가 꽤 영토를 확보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압력으로 그 중 얼마를 포기하게 된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더욱 고조된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사회민주당이 1912년 총선에서 원내 제1당으로 부상하여 권력 장악을 목전에 바라보게 된다. 게다가 러시아에서는 노동자의 파업이 1912년부터 다시 터져 나오기 시작하여 봉기를 향해 치닫는다. 이러한 제국주의 국가 내의 혼란한 상황은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모험을 감행하도록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살해한 세르비아 청년

때마침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왕위 계승자인 페르디난트 대공이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하던 중에 보스니아의 한 학생 테러리스트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오스트리아가 이를 빌미로 7월 28일 세르비아를 침공한다. 독일은 동맹국 오스트리아를 전폭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세르비아를 지원하던 러시아도 군사 동원령을 내려 전쟁 태세에 돌입한다. 독일·프랑스·영국도 8월 1~4일 사이에 차례로 군사 동원령을 내리며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른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독일은 속전속결을 계획했지만 새로운 전술로 등장한 참호전으로 인해 서부 전선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교착 상태의 늪에 빠진다. 중립을 지켜오던 이탈리아가 1915년 5월 삼국 협상 편에 서서 참전한다. 독일이 국적을 가리지 않고 잠수함으로 선박들을 무차별 공격함으로써, 미국이 1917년 4월 독일에게 선전포고하고 참전한다.

사회주의 정당과 노조 지도자들이 제국주의 전쟁에 찬성한다.

제2인터내셔널(1889년 결성)은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강령―레닌이 작성했다―을 채택한다. 그리고 전쟁의 위기가 고조된 1912년에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대회에서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들은 전쟁 위기가 닥치면 동시 총파업을 포함한 반전 투쟁에 돌입하기로 결의한다. 그 동안 정치 총파업 전술을 거부해온 독일 사회민주당도 이번에는 마지못해 받아들인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되면서 전쟁이 현실로 다가온다. 그러자 프랑스 사회당은 7월 16~17일에 곧바로 임시 당 대회를 열어 군수 산업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반전 총파업을 벌일 것을 결의한다. 그런데 세계 반전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던 조레스가 7월 31일 극우파 청년에게 바로 등 뒤에서 쏜 총을 맞고 즉사한다. 그리고 마치 기다린 것처럼 다음날 국민 총동원령이 내려진다. 8월 4일 조레스의 장례식에서 사회당과 노동총동맹의 지도자들은 전쟁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연설한다. 그리고 며칠 안 돼서 사회당은 독일과의 전쟁을 적극 지지하며 전시 내각에 합류한다. 제2인터내셔널의 가장 혁명적인 지도자라던 쥘 게드가 전쟁 내각의 장관이 되는 판이다. 벨기에에서는 제2인터내셔널 서기국 의장인 에밀 반더벨드가 부르주아 정부의 내각에 참가한다.

독일이 선전포고를 한 바로 다음날인 8월 2일, 전국노조연맹을 좌우하고 있던 레기엔 일파는 자본가들과 산업 평화 협정을 맺으며 전쟁 지지의 물꼬를 튼다. 또 바로 다음날 독일사회민주당 의원들은 전원이 전쟁 예산안에 찬성표를 던지고 ‘조국 방위’의 신성한 임무를 수행할 용의가 있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칼 리프크네히트 의원은 이 해 말의 전쟁 예산안 표결에서는 홀로 반대표를 던진다. 이를 계기로 그는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반전 운동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당내의 반전 좌파가 다시 결집한다.

러시아에서는 플레하노프를 포함한 상당수의 멘셰비키와 다수의 사회혁명당원들이 열렬한 조국방위파로 변절하여 그 동안 타도 대상으로 삼아 격렬히 투쟁해왔던 차르 정부의 제국주의 전쟁을 지원한다.

노조의 관료적인 지도부들도 전쟁을 지지한다. 영국의 노조회의와 노동당은 ‘산업 휴전’을 선언하고 파업권과 같은 노동자의 권리들을 포기하는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군수 생산을 최대한으로 증대하는 데 협조한다. 독일의 노조 관료들은 만약 전쟁에 반대한다면 오랜 기간 고생해서 쌓아올린 노조를 정부가 파괴할 거라는 핑계를 대며 정부에 협력한다. 생디칼리즘 운동이 지도부를 장악하고 있는 프랑스의 노동총동맹도 전쟁을 공식 지지한다. 미국에서는 곰퍼스 일파가 정부와 복잡한 계급 협조 협약을 체결하고 조직 노동자의 정치 발언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과 노조는 전쟁을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전쟁 전해에 제2인터내셔널은 22개 나라의 27개 사회주의 정당을 포괄하면서 득표수 합계 1200만 표에다가 거의 모든 나라의 의회에서 의원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의원 수는 독일 110, 프랑스 103, 핀란드 90, 오스트리아 82, 이탈리아 80, 스웨덴 73, 영국 42, 벨기에 34, 덴마크 32, 노르웨이 23, 러시아 13, 네덜란드 16명이었다. 또한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를 받는 노조의 조합원수는 국제노동조합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인원을 포함하여 적어도 1천만 명이 넘고 따라서 유럽의 노조는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유럽의 주요 산업을 한꺼번에 정지시킬 수 있는 전략적 힘을 갖고 있었다. 더구나 사회민주당은 거대한 협동조합 운동도 장악하고 있었고 전쟁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는 수백 만 명의 지지자를 규합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 시대는 노동자계급의 승리가 역사적으로 불가피하다는 신념이 넘쳐나던 시대였다. 이러한 모든 호조건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정당과 노조의 간부들은 수천만 명의 노동자와 민중을 죽음의 전쟁터로 몰아넣는 배신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어쨌건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민족주의 정서가 대중을 휘감는다. 대중들은 무언가 다른 것이 도래할 것 같은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국가의 깃발을 따라 전쟁터로 향한다. 징병제가 없는 영국에서도 1914년 8월에서 1915년 6월 사이에 200만 명이 군대 복무를 자원한다. 이것은 제국주의 정치가 국민들을 동원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니, 사회주의 운동이 대중들의 가득 찬 불만을 혁명을 향한 계급적 분노로 조직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를 배신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노동자 파업과 민중 봉기가 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다.

영국 식민지 아일랜드에서는 1916년의 부활제 주간에 영국의 억압에 반대하여 반란이 일어난다. 이 반란의 지도자는 노동자이자 매우 뛰어난 맑스주의자로서 1905년 미국에서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을 조직한 제임스 코널리이다. 대부분이 노동자인 애국자들이 4월 24일 반란을 일으켜 더블린을 장악하였으나 4월 29일에 진압되고 반란 주모자들은 5월 12일 사형에 처해진다.

프랑스에서는 1916년부터 반전 파업과 군대 내의 항명 폭동이 빈발한다. 1917년에는 영국 본토에서 30만 명 이상이 파업에 참가한다. 미국에서도 이전의 어느 해보다 가장 많은 1233건의 파업이 발생한다.

이탈리아 사회당은 최대강령파가 당권을 장악하여 전쟁 발발 당시부터 줄곧 반전 입장을 견지한다. 그리고 식량난과 물가 인상으로 노동자·민중의 생활수준이 급락하면서 1917년 초부터 전쟁 직전의 투쟁 양상이 다시 나타난다. 토리노 섬유 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물가인상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는 것을 시작으로 파업의 물결이 되살아난 것이다. 이때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에 대한 소식은 대중들의 변화에 대한 열망을 부채질하여 파업은 더욱 고양된다. 그리고 사회당은 러시아 혁명을 지지한다.

독일사회민주당의 칼 리프크네히트와 그의 절친한 친구인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5년 4월 고대 로마의 노예 반란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스파르타쿠스동맹’이라는 당내 분파를 만들고 반전 투쟁에 돌입한다. 반전 의원도 18명으로 늘어난다. 이들은 1916년 3월 지도부에 대항해 탈당을 결행하고 1917년 4월 ‘독립사회민주당’을 창당한다.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독립사회민주당 내의 좌익 분파로 활동한다. 노동자들의 투쟁도 다시 불붙기 시작한다. 4월에 30만 명이 파업에 참가하고 12월 말에는 탄광 노동자들이 격렬한 파업 투쟁을 전개한다. 다음해인 1918년 1월에는 탄약 공장을 중심으로 100만 명이 전쟁에 반대하는 정치 총파업을 전개한다. 1월 6일 회담이 열리고 있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는 러시아 국민의 막대한 희생을 강요하는 강화 조약에 반대하여 대규모 대중 집회가 열린다. 그러자 스파르타쿠스동맹은 파업위원회를 러시아 혁명에서 등장한 것과 같은 노동자·병사 평의회로 발전시켜 대안 권력을 수립하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독립사회민주당에 속한 베를린의 좌파 노조 간부들은 ‘혁명적 노조 간부 그룹’이라는 또 다른 분파를 결성해 은밀하게 무장 봉기를 준비한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정부는 10월에 타협책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개혁을 단행한다. 황제가 수상을 임명하는 게 아니라 원내 다수당이 내각을 구성하는 정당 내각제가 약속되고 사회민주당의 오랜 숙원이었던 프로이센 주 의회의 3계급 선거 폐지가 이뤄진다. 사회민주당은 여기서 집권의 길을 발견하고 주춤거린다. 그러나 민중은 전쟁의 즉각 중지를 원하고 있었고 그렇게 행동한다. 킬의 해군 사병들은 11월 3일 패배가 뻔한 출항 명령을 거부하고 노동자·병사 평의회를 건설한다.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혁명은 일주일 사이에 독일 전역의 도시들로 확산되고 11월 9일 수도 베를린에서는 노동자·병사 평의회가 건설된다. 이 날 샤이데만은 공화국을 선포한다. 사회민주당 지도부로서도 더 이상 의회 안에서의 개혁만을 고집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아무튼 이로써 독일 혁명의 첫 단계가 성공한다. 정부는 11월 11일 전쟁 중단을 선언한다.

오스트리아 반전 좌파의 핵심 인물인 프리드리히 아들러―아인슈타인의 막역한 친구로서 아인슈타인을 사회주의로 이끈 장본인이다―는 1916년 10월 전쟁의 즉각 중지를 부르짖으며 수상인 슈튀르크 백작을 암살한다. 테러임에도 불구하고 아들러의 행동은 전쟁에 지친 대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다. 1917년 5월에 열린 재판은 “우리의 프리드리히를 구출하자”는 비엔나 시민들의 함성에 파묻히고 결국 황제는 대사면령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된다. 아들러와 바우어가 주도하는 좌파는 반전 운동의 도덕적 권위를 업고 가을에 사회민주노동당의 당권을 장악한다. 다음해인 1918년에는 100만 노동자가 총파업을 벌이고 노동자 평의회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총파업의 요구 사항은 아들러의 석방, 즉각적·전면적 강화, 혁명 러시아와 독일·오스트리아의 강화 회담에 노동자 대표 파견 등이다. 결국 가을에 접어들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붕괴한다. 그러자 제국 곳곳에서 각 민족이 저마다 임시 정부를 건설한다. 독일어권 오스트리아에서는 사회민주노동당·기독교사회당·범게르만당 3당이 주도하여 10월 30일에 임시 국민회의를 소집하고 11월 12일에 공화국을 선포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다음해 3월 과거에는 한 나라였던 헝가리에서 소비에트(평의회) 권력이 수립된다.

결국 제국주의 전쟁을 종결시킨 것은 노동자·민중들의 반전 투쟁과 혁명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일어난 혁명,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 이외에도 수많은 파업과 반전 시위들, 그리고 이 모든 투쟁들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제국주의 전쟁으로 고통 받는 유럽 민중을 구한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세력 지형이 크게 바뀐다.

◀ 파리에서 만난 4거두, 좌측부터 로이드 조지(영국), 올란도(이탈리아), 끌레망소(프랑스), 윌슨(미국)

4년이 넘게 지속된 전쟁 기간 동안 인류가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생산해낸 엄청난 물자가 파괴된다. 게다가 기아와 질병으로 죽은 민간인들과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은 태아들을 제외하고서도 900만 명이 죽고 2200만 명이 부상당한다. 이런 끔찍한 파괴력은 과학과 기술의 산물인 탓에 서양 세계의 이념인 진보와 합리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된다.

이 기간 동안 노동자들은 전쟁 물자를 생산하느라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고 물가 폭등으로 실질 임금이 하락하여 더욱 고통 받는다. 반면에 자본가들은 전쟁 상황을 이용하여 노동력을 가혹하게 착취하여 엄청난 이윤을 챙긴다. 미국에서만 새로운 백만장자가 1만 8천 명 이상 생겨난다. 승전국에서도 전쟁으로 인한 이득은 지배계급에게만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전쟁 기간에도 자본의 착취 구조는 어김없이, 아니 더 맹렬하게 작동했던 것이다. 이 전쟁을 고비로 자본주의 경제의 중심이 서서히 미국으로 이동하기 시작하고 유럽의 힘은 상대적인 하락의 길로 들어선다.

1919년 6월에 베르사유 조약이 조인된다. 이 조약은 전쟁의 책임을 오로지 독일과 그 동맹국에 전가한다. 승전국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 식민지 대부분을 왕창 갈라먹고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독일에 부과한다. 이런 과도한 조치는 2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된다. 아무튼 전쟁으로 인해 4개 제국―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오스만·러시아―이 붕괴된다.

국민을 총동원한 최초의 ‘총력전’은 인적·물적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동원하고 통제할 수 있는 사회 체제를 만든다. 이제 국가는 경제에 더욱 깊이 개입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민 사회에까지 깊숙이 개입하게 된다.

여러모로 1차 세계대전은 유럽사에서 하나의 큰 분수령이다. 무엇보다 세계 최초로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다음 장은 세계를 뒤흔든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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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1

세계노동운동사 [6장] 사회주의 대 파시즘 (1917~1945) 1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

노동자들이 정치 총파업으로 민주주의 혁명을 성공하고 ‘이중 권력’을 형성한다.

◀ 사망자들을 공동으로 매장하는 러시아 병사들

러시아 군대는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1917년까지 전사자 170만, 포로 250만, 부상자 500만 명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그리고 농민들이 병력으로 차출되고 쟁기를 끌 말이 기마대에 징발되는 바람에 수많은 토지가 경작되지 못한 채 황폐해진다. 대부분의 산업이 군수 산업으로 전환되면서 생활필수품을 비롯한 소비재의 생산이 크게 줄어든다. 그래서 민중들―전체 인구는 1억 6600만 명이다―은 극심한 고난을 겪는다.
(잠깐, 지금부터 1918년 2월까지의 날짜는 당시 러시아에서 사용되고 있던 율리우스력에 의한 것이다. 율리우스력은 우리가 쓰고 있는 그레고리력에 비해 13일이 늦다.)

지난 시절 가장 많은 투쟁을 경험한 페트로그라드(옛 페체르스부르크)와 모스크바의 노동자들이 1917년 1월 대규모 파업을 전개한다. 그리고 2월 18일 수도인 페트로그라드의 푸틸로프 금속 공장에서 시작된 파업은 곧 무장 봉기의 성격을 띤 정치 총파업으로 발전한다. 전제정 타도와 전쟁 중지를 외치는 민중의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다.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전시라서 페트로그라드에는 군대로 가득 차있었지만 병사들은 2월 27일 혁명적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발포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에 합류한다. 다음날에는 페트로그라드의 모든 병사들과 모스크바의 많은 부대가 혁명 진영으로 넘어온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민중들의 압력에 밀려 3월 2일 퇴위 선언문에 서명한다. 다음 날 두마(의회)의 지도부는 자유주의자인 르보프 공을 수반으로 하는 ‘부르주아’ 임시 정부를 수립한다. 변호사이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부의장인 케렌스키는 법무장관으로 입각한다.

그러나 민중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새로운 상황에 필요한 새로운 조직을 건설하면서 계속 전진한다.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들은 1000명 당 1명의 비율로 대기업 공장에서 424명의 대표와 중소기업 공장에서 422명의 대표를 선출하여 노동자 소비에트(평의회)를 건설한다. 페트로그라드 전체 노동자의 87%가 선거에 참여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아래에서부터 스스로 조직한 것이다. 농민과 병사들도 소비에트를 건설한다. 그리고 이러한 민중 평의회는 페트로그라드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건설된다. 대도시들에서는 소비에트, 민병대, 공장위원회, 노동조합, 공제조합, 교육·문화 서클 같은 조직들이 자연발생적으로 무수히 생겨난다.

공장위원회는 3월에 벌써 전국 공장 노동자의 75%인 200만 명을 끌어들이며 소비에트 다음으로 큰 조직으로 성장한다. 공장위원회는 경영인에 대한 감시, 원료와 자재의 유출 방지, 공장 안의 치안 유지를 위한 민병대 조직, 식량 확보와 배급, 교육과 문화 등의 각종 행사, 정치 문제에 대한 토론과 선전, 심지어 봉기 시기에는 행동 방향을 결정하고 무기를 조달하는 역할까지 수행한다. 이런 다양한 활동 중에서 공장을 계속 가동하고 혁명을 수호하는 데에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인다. 공장위원회의 활동은 ‘노동자 관리’라고 불린다.

노동자들은 3월 10~14일 페트로그라드에서 기업인 협회와 협정을 맺고 8시간 노동제와 결사의 자유를 획득한다. 이로써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갈등은 타협 국면으로 들어선다. 그렇지만 여전히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민중 평의회)가 정세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도 소비에트는 권력을 장악하려 하지 않는다. 지도부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인민주의자)이 광활한 러시아를 운영해나갈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소비에트와 임시 정부가 공존하는 ‘이중 권력’ 상태가 만들어진다. 게다가 소비에트는 독일군의 공격과 반혁명으로부터 러시아와 혁명을 방어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어서 임시 정부의 ‘전쟁 지속 정책’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 볼셰비키 또한 ‘혁명적 조국방위’에 사실상 동의하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인다.

사회주의자들이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부르주아와 연립 내각을 구성한다.

이렇게 혁명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때인 4월 3일에 레닌이 오랜 망명 생활을 접고 귀국한다. 레닌은 다음날 소비에트 볼셰비키 집회와 볼셰비키·멘셰비키 합동 집회에 연이어 참석하여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혁명)으로” 바꾸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집중하자는 ‘4월 테제’를 발표한다.

너무나 획기적인 내용이라 멘셰비키들은 ‘터무니없는 잠꼬대’로 조롱하고 대부분의 볼셰비키조차 깜짝 놀란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5월에 망명에서 귀환하는 즉시 레닌의 입장을 전폭 지지한다. 트로츠키의 가세로 레닌의 당 내 영향력은 현저히 강화된다. 트로츠키는 이때까지 레닌의 ‘협소한’ 당 조직론에 반대하여 볼셰비키에 합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해오고 있었다.

한편 외무장관 밀류코프는 4월 18일에 러시아는 최종 승리 때까지 싸우겠다는 각서를 연합국 측에 보낸다. 그러자 이 사실을 알게 된 수도의 노동자·병사들이 전쟁 중지와 밀류코프 사퇴, 무병합·무배상의 민주적 강화(講和)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에 들어간다. 시위는 다른 도시로 급속히 퍼져나간다.

다급해진 임시 정부는 소비에트 측에 내각에 참여할 것을 요청한다. 권력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한 것이다. 상황에 떠밀린 멘셰비키는 1905년 이래 계속 고수해온 ‘임시 정부 불참여’ 입장을 철회하고 임시 정부에 참여한다. 그러나 정국의 주도권을 쥐는 것은 여전히 회피한다. 멘셰비키가 임시 정부에 참여한 목적은 반혁명 세력과 레닌으로 대표되는 과격한 혁명 세력 양쪽으로부터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구출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한편 농민들을 대표하는 사회혁명당도 임시 정부에 같이 참여한다. 이로써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연립 정부가 처음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토지 재분배 문제를 다루기로 한 헌법제정회의 선거가 계속 미루어지자 농민들은 늦봄 이후부터 다시 지주들의 토지를 장악하여 분배하기 시작한다. 농민들의 봉기는 여름 내내 계속된다. 임시 정부에 참가하고 있는 사회혁명당이 이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볼셰비키는 농민들의 행동을 전폭 지지함으로써 농민들의 지지를 받기 시작한다.

5월에 들어서면서 생산성이 급격하게 하락하고 경제가 악화되자 노사간의 협조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부르주아들은 공장위원회의 비대해진 권한과 8시간 노동제 때문에 생산성이 하락하고 있다며 경영인이 자율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노동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온건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조합은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해서는 부르주아지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주도해야 하고 임시 정부는 경제 정책을 통해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운다.

공장위원회가 봉기를 일으키지만 실패한다.

이처럼 대결 국면이 조성되자 페트로그라드의 공장위원회들은 혁명이 직면하고 있는 주요 문제들에 대해 결정하기 위해 5월 30일~6월 5일에 ‘1차 전 페트로그라드시 공장위원회 총회’를 개최한다. 전체 노동자계급의 투쟁 방향을 판가름할 이 총회에는 수도의 367개 공장에서 총 33만 7천 명을 대표하는 568명의 공장위원회 대표들이 참가한다. 치열한 토론 끝에 소비에트의 권력 참여 문제에 대해서는 일단 거부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한다. 공장 경영에 대해서는 임시 정부에 의한 ‘국가 관리’가 아닌 자주적인 ‘노동자 관리’를 85대 336이라는 압도적인 표 차이로 채택한다.

이 총회에서 볼셰비키 노동자가 적극 주장한 ‘전쟁 즉각 중지’와 ‘노동자 관리’가 상당한 지지를 받는다. 그만큼 공장위원회에 대한 볼셰비키의 영향력이 강화된다. 그러나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볼셰비키의 주장이 거부된 데에서 보듯이 볼셰비키의 영향력은 아직 미약하다. 반면에 농업·토지 문제에 대해서는 사회혁명당이 여전히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다. 따라서 공장위원회와 정치 세력과의 관계는 아주 유동적이다.

공장위원회는 총파업과 시위를 조직하기 위해 연일 분주하게 회의를 소집한다. 그런데 6월 10일의 소비에트 총회에서 볼셰비키조차 총파업과 시위를 만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장위원회는 6월 13~20일에 대파업을 전개한다. 푸틸로프 금속 공장 노동자들이 선봉이 되어 가두시위를 벌이자 곧 미숙련공들이 대거 합류하면서 거리에서 유혈 투쟁이 전개된다. 임금과 식량 배급 문제에만 관심을 보이던 미숙련공들이 대거 정치 투쟁에 합류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은 단결이 더욱 강화되고 정치의식도 급성장한다. 나아가 18일에는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구호가 가두시위에서 공공연하게 외쳐진다. 이런 상황을 타고 농촌에서도 봉기의 물결이 확산된다.

겁에 질린 자본가들은 직장폐쇄로 대응한다. 특히 대부분 국영 기업이거나 외국 기업과의 합자 회사인 대기업에서는 경영을 맡고 있던 전제정 시대의 고급 장교나 외국인 기술자들이 아예 도피하거나 작업을 거부한다. 이 바람에 공장 가동이 중단되는 사태가 속출한다.

반면에 그런 만큼 공포에 가까운 절망감으로 자본가들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노동자 관리’만이 반혁명에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하는 노동자들이 급속히 늘어난다. 그리고 반혁명에 저항하는 투쟁에 소극적인 소비에트와 온건한 사회주의자들과 임시 정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진다. 하지만 노조는 공장위원회의 활동에 불안감을 표시하면서 노조가 국가 행정 기구의 기능을 맡을 수 없다고 결의한다. 이처럼 소비에트·공장위원회·노조는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갈등을 일으킨다.

한편 다급해진 케렌스키는 관심을 바깥으로 돌리기 위해 6월 말에 독일군에 대해 총공세를 감행한다. 그러나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개시한 총공세는 러시아 군의 참패를 초래한다. 게다가 7월 초에 징집령까지 내리자 노동자들은 배신감과 위기감에 휩싸인다.

7월 4일 여름궁전 앞에는 사회주의자들의 연설을 듣기 위해 7만 명이 운집한다. 환호와 야유가 교차하던 집회는 부르주아 임시 정부 타도와 ‘소비에트 권력’을 외치는 정치 시위로 발전한다. 시위대는 정부군과 격렬한 대치 끝에 4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진압된다. 마침내 민중의 분노가 폭발한다. 스스로 무장한 노동자들은 소비에트로 권력을 이양할 것, 부르주아 내각과 결별할 것, 노동자 관리를 실시할 것, 토지를 재분배할 것, 기아를 구제할 것 등을 요구하며 기업인들의 선적 물자를 압수하거나 무력으로 공장을 점거하면서 봉기를 일으킨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70%가 유혈 가두 투쟁에 참가하고 수도에 있던 병사 10만 명 가운데 5만 명이 여기에 가세한다. 무정부주의자들이 가장 먼저 봉기를 적극 지지하고 나서고 볼셰비키는 명확한 태도를 표명하지 않고 있다가 봉기가 확산된 뒤에야 뒤늦게 봉기에 합류한다.

임시 정부는 까자끼 기병대와 기관총 부대를 동원하여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한다. 소비에트는 임시 정부의 시위 진압을 승인하고 볼셰비키를 희생양으로 삼아 탄압하는 데에 동의한다. 레닌의 볼셰비키는 독일의 첩자로서 돈을 받고 러시아를 원수에게 팔아넘기기 위해 반전 책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 ‘7월 위기’로 인해 볼셰비키 조직은 막대한 손상을 입는다. 레닌은 지하로 잠적했다가 핀란드로 피신한다. 트로츠키는 체포되었다가 한참 만에 풀려난다. 그렇지만 임시 정부의 위상도 극도로 불안정해져 르보프가 사퇴하고 케렌스키가 새로운 내각 수반이 된다.

노동자들이 반혁명을 분쇄하고 민중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케렌스키는 소비에트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고 독재자 스타일로 정국을 운영하면서 극우파 출신인 꼬르닐로프 장군을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대독전쟁을 재개한다고 선포한다. 자본가들은 반격할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공장위원회와 노동자 관리 운동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대독전선에서 리가가 함락 당했다(8월 20일)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인데도 멘셰비키 출신의 노동부 장관 스꼬벨레프는 8월 23일 생산성 하락의 책임을 공장위원회 탓으로 돌리는 공문을 발표한다. 이처럼 임시 정부는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이나 하층 민중의 관심사나 행동 동기를 고려하지 않고 정책을 집행함으로써 급속히 지지를 상실한다.

한편 꼬르닐로프는 8월 26일 전권을 자신에게 이양할 것을 케렌스키에게 최후통첩하고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진군한다. 경악한 케렌스키는 소비에트 측에 다시 도움을 청하고 심지어 볼셰비키에게까지 협력을 요청한다. 이런 상황인데도 부르주아지는 군부의 쿠데타가 조국을 수호하기 위한 것으로서 이해할 만한 행동이라는 입장을 천명하고 임시 정부는 8월 28일 멍청하게도 노동자 탄압령을 결의한다.

역시, 혁명을 시작했던 노동자들이 혁명 수호에 가장 앞장선다.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기차를 세우고 무전송신을 차단하면서 쿠데타군의 진격을 방해한다. 그리고 마침내 사회주의 세력과 수도의 수백 만 노동자·민중이 페트로그라드까지 진군한 쿠데타군을 격퇴하고 코르닐로프를 체포한다. 이로써 우익 세력의 정치력은 완전히 무력해지고 군대의 지휘 체계는 심각하게 붕괴된다. 사회는 무정부 상태로 빠져든다.

노동자들은 7월 봉기와 8월 쿠데타를 경험하면서 유산자들에 대해 적개심을 갖게 되고 임시 정부를 극도로 불신하게 되고 소비에트 집행부까지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공장위원회 지도부와 적위대(노동자 민병대)와 소비에트 산하의 군사혁명위원회를 더욱 지지하면서 유일한 대안으로서 볼셰비키를 동맹 세력으로 선택하게 된다. 노동자들의 연설에서 민주주의나 입헌 체제라는 단어가 점차 사라지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노동자 국가’라는 말이 새로운 용어로 등장하여 자주 쓰이게 되면서 노동자들에게 ‘소비에트 권력’은 자연스럽고 평범한 일상어가 된다.

급기야 볼셰비키가 8월 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서 그리고 9월 초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연이어 다수 의석을 차지하면서 집행부의 지도권을 넘겨받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지난 7월에 볼셰비키에 정식으로 입당한 트로츠키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부 의장에 선출된다.

노동자들은 7월 이후로 광범위하게 자행되고 있는 직장폐쇄에 항의하여 9월에 사상 최대의 파업을 전개한다. 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는 9월 10일 3차 대표자 회의를 열고 ‘고용·해고·생산·분배에 대한 노동자들의 전면적이고 직접적인 관리’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직장폐쇄에 대항해 싸우는 과정에서 ‘노동자 관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전국의 노동자가 단결해야 하고 민중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9월부터 농민 봉기가 다시 격화되고 지방 민족들의 독립·자치 운동 또한 더욱 치열해진다. 이즈음 이탈리아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대량 체포되고 독일에서는 해군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러한 소식은 러시아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는 교전국에서 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고 유럽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세계 혁명이 임박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볼셰비키가 무장 봉기로 권력을 잡고 소비에트 공화국을 창건한다.

핀란드에 있던 레닌은 9월 12일과 14일에 봉기의 조건이 무르익었기 때문에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두 통의 편지를 볼셰비키 당중앙위원회에 보낸다. 중앙위원회에서 편지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10월 10일에는 중앙위원회의 지시로 핀란드에서 돌아온 레닌도 참석한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에프는 볼셰비키 세력이 아직 너무 미약하다며 봉기를 격렬히 반대한다. 하지만 중앙위원회는 다수의 찬성으로 봉기 안을 통과시키고 당 조직에 봉기를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따라 소비에트는 다음날 바로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봉기를 조직하는 작업을 공공연하게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트로츠키는 군사 전술가로서 탁월한 조직 능력을 발휘한다.

역사적인 제1차 ‘전 러시아 공장위원회 총회’가 10월 17~22일 새로운 권력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다. 볼셰비키의 ‘소비에트 권력’이 많은 지지를 받는다. 멘셰비키 국제파인 밀류찐과 라린도 볼셰비키의 무장 봉기 안을 지지한다.

‘노동자 관리’에 대해서는 의견이 크게 갈린다. 볼셰비키는 ‘노동자 국가’가 생산 과정을 감독하고 통제할 것을 주장한 반면 무정부주의자들은 아래서부터 위로 조직된 ‘생산자 연합’이 전체 생산 과정에 대해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라린은 제헌의회를 통한 노동자 관리를 주장한다. 공장위원회 대표들은 치열한 토론 끝에 (이상적인 생산자 연합 안이 아닌) 현실적인 노동자 국가 안을 채택한다.

◀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회의하는 모습

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특히 금속 노동자들은 권력을 즉각 인수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선동하면서 임시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무장하자고 호소한다. 그리고 무장 봉기에 필요한 기술자·수송차량·탄약·장비를 지원하는 데에 앞장선다. 이후 봉기에서도 혁명의 핵심 주체가 된다. 모스크바·중부지대·도네쯔유전지대·우랄탄광지역의 노조와 군사혁명위원회도 봉기를 돕기 위해 요원들을 페트로그라드에 파견한다. 그리고 10월에는 상당수 노조가 이전과 달리 정치 중립 노선을 버리고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하는 입장을 채택한다. 이렇게 되자 소비에트 지도부가 아니라 공장위원회가 노동자들의 행동 방향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이 시점에서 레닌은 기민하게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모든 권력을 노동자·빈농의 소비에트로”로 바꾼다.

볼셰비키의 무장 봉기가 눈앞에 닥치자 임시 정부는 10월 24일 아침 볼셰비키의 인쇄소를 폐쇄하는 결정을 내리며 선수를 친다. 레닌은 우물쭈물 하다가 오늘을 넘기면 봉기가 실패할 수 있다며 오늘 바로 거사를 일으킬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수십 년을 압축해놓은 듯한 혁명적 시기에는 시시각각으로 상황이 요동치기 때문이다. 내일 저녁에 예정대로 제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열리면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곧바로 붉은 군대, 발틱 함대의 수병, 페트로그라드 수비대 연대를 동원하여 24일 저녁부터 계획했던 대로 신속하게 모든 주요 기관들을 점령하고 겨울궁전을 포위한다. 그리하여 25일 밤에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은 채 겨울궁전을 함락시키고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남아있던 정부 각료들을 체포한다. 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네바 강에서 공격에 합세한 순양함 ‘아부로라’ 호가 겨울궁전을 향해 쏘아 올린 포성은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세계의 막을 최초로 여는 민중들의 환희에 찬 함성으로 울려 퍼진다.

겨울궁전이 함락되기 직전인 25일 저녁 스몰니에서 개최된 2차 소비에트 대회는 소비에트 공화국과 인민위원회의―레닌을 의장으로 하는 임시 혁명 정부―가 창건되었음을 선포한다. 페트로그라드에서 혁명이 성공하고 나서 일주일 후 모스크바에서도 소비에트가 권력을 인수한다. 이 기세를 타고 볼셰비키의 권력 기반은 각 지역으로 확산된다.

새로운 정부는 먼저 모든 교전국에 대해 무병합 무배상의 즉각 강화를 촉구하면서 평화 협상을 위하여 최소한 3개월 동안 휴전할 것을 제의한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조치들을 공표하고 바로 법률로 제정한다. 농민에게는 지주·황실·수도원·교회의 모든 토지를 인민의 소유로 전환하고 노동과 소비를 기준으로 평등하게 분배하겠다고 약속한다. 노동자들에게는 8시간 노동과 ‘노동자 관리’ 제도를 실시하겠다고 천명한다. 러시아의 모든 민족에게는 자치를 약속한다. 그리고 신분제를 철폐하고 국가와 교회를 분리하고 교회법이 아닌 민법에 따라 결혼할 수 있도록 한다.

볼셰비키는 제헌의회를 해산시키고 소비에트 정부로 권력을 집중한다.

소비에트 혁명 정부는 11월 12일 오랜 세월 모든 혁명 세력의 공통된 요구였던 ‘헌법제정회의’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를 실시한다. 레닌은 선거 실시에 반대한다. 보통·평등·직접·비밀투표로 실시된 이 선거에서 볼셰비키는 혁명의 진원지였던 대도시·공업중심지·군대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는다. 하지만 농민들 대부분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지지해왔던 사회혁명당에 투표한다. 그 결과 사회혁명당 우파가 50% 이상, 볼셰비키가 24%, 부르주아·지주정당이 13%, 멘셰비키가 3%를 득표하여 제헌의회에서 옛 소비에트파 사회주의자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

11~12월에는 사회혁명당에서 완전히 분리하여 독립된 정당을 이루고 있던 사회혁명당 좌파가 정부에 참여한다. 그러나 제헌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우파는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사회주의자들만으로 정부를 구성하자’는 안도 수용하지 않는다.

그러자 가급적 중립을 지키려던 노조마저도 이들에 대해 실망하고 등을 돌린다. 1월 20일에는 분노한 노동자들이 반혁명 세력의 타도를 외치며 시위까지 벌인다. 이 사이에 소비에트 정부는 온건파 사회주의자들이 은거하고 있던 제헌의회를 기습하여 강제 해산시킨다.

그런데도 민중들은 이를 지지하거나 방관한다. 러시아 민중은 경험한 적이 없는 서구식 의회 민주주의에 대해 아무런 애정과 집착을 가지고 있지 않고 무엇보다 볼셰비키 정권이 자신들을 차르의 압제에서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레닌의 ‘국가 자본주의’ 정책과 노동자들의 ‘자주 관리’가 충돌한다.

공장위원회는 혁명 직후부터 모든 산업에서 공장을 강제 점거하고 스스로 운영하는 ‘노동자 관리’ 운동을 전개하면서 자본가들과 격심한 계급투쟁을 전개한다. 그리고 노조가 제안한 ‘전 러시아 노동자 관리 회의’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자본가들과 멘셰비키는 기업 몰수 행위에 대해 무정부적인 처사로 맹렬히 비난한다. 그런데 소비에트 정부가 중앙 산업 관리를 위해 구성한 ‘중앙·주 노동자관리기구’ 역시 경영에 대한 노동자들의 직접 개입을 금지하는 결의문을 제출한다. 레닌은 자연발생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노동자 관리’ 운동에 대해 침묵하고 있었지만 내심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1차 전 러시아 노조 대회가 1918년 1월 7~14일에 열린다. 대회는 공장위원회를 노조로 통합하고, 국민 경제를 위해 개별 공장들의 분권 생산보다 중앙 관리를 옹호하며, 지방 경제 기구는 정책 결정 기구가 아니라 집행 기구로 운영한다고 결의한다. 생산의 효율성을 위해 중앙 관리 기구를 선호하는 세력이 아래로부터 형성된 공장위원회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세력에게 승리한 것이다. 이에 대해 사회혁명당 좌파는 생산 수단과 사유권이 폐지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레닌식의 계급 협조나 중앙 정부에 타협적인 노동자 관리는 오히려 노동자를 착취하는 데 이바지 할 것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래도 레닌은 공장위원회를 노조의 통제 아래에 두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 때문에 돈바스의 무정부주의자들과 모스크바의 철도 노동자들과 에까쩨리노다르의 항구 노동자들은 노조로 관리권을 이양하기를 거부하면서 격렬한 시위까지 벌인다.

레닌은 생산력을 빠르게 향상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자본가는 재산권과 의사결정권을 유지하면서 경영에 대해 책임을 지고 노동자들은 회계를 감독하면서 노동 규율을 책임지는 ‘국가 자본주의’를 제안한다. 그리고 스쩨빠노프는 ‘노동자 관리’가 소임을 다했기 때문에 이제 ‘노동자 행정’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당내 좌파들은 ‘국가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노동자 행정’은 관료주의화를 초래하는 이중적인 계급 협조 체제라면서 신랄하게 비판한다. 하여간 생산과 유통이 마비되는 사태가 속출한다.

이에 레닌은 공장위원회의 노동자 관리를 소부르주아적이며 무정부적이고도 반혁명적인 생디칼리즘이라고 비난하면서 국가 자본주의가 점진적인 사회화 과정에서 필수적인 단계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통박한다. 그리고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국유화를 무기한 연기하고 테일러 시스템과 전문 경영인 제도를 도입하자고 역설한다. 그러나 ‘국가 자본주의’ 정책은 전문 경영인들과 노동자들 쌍방으로부터 반발을 받으면서 중단된다.

당내의 좌파는 ‘노동자 반대파’라는 이름으로 분파를 형성하여 노동자들의 자율권 확대를 요구하면서 레닌의 중앙집중식 노동 정책을 전면 비판하기 시작한다. 또한 점증하는 식량난과 생산고 하락으로 5~6월에 일부 대기업 노조에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인기가 오르면서 ‘볼셰비키 타도’라는 구호가 나돌기 시작한다. 철도 노동자들은 ‘노동자 관리’를 외치며 상부의 지시를 드러내놓고 거부한다. 푸틸로프 공장과 오부꼬프 공장에서는 ‘노동자 관리’를 위하여 정부에 저항하는 파업을 시도하거나 생산을 거부하기까지 한다. 식량난과 노동 정책에 대한 불만이 겹치면서 1918년 상반기 중에 페트로그라드에서만 총 인구의 57%에 해당하는 100만 명 이상이 농촌으로 빠져나간다. 마찬가지로 모스크바에서도 인구의 44%가 감소한다. 그에 비례하여 노동자의 수가 감소하고 질도 하락한다.

볼셰비키 정권은 전시 공산주의 체제로 반혁명을 이겨낸다.

소비에트 정권은 1918년 3월 3일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조약을 체결하고 가까스로 전쟁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그 대가로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한 산업 중심지와 곡창 지대를 잃는다. 그러나 이렇게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얻은 평화도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사회혁명당 좌파는 굴욕적인 강화에 격분하여 연립 정권에서 탈퇴하고 볼셰비키 내에서도 트로츠키와 부하린 등이 강하게 반발한다. 게다가 미국·영국·프랑스·일본 등 14개 나라가 ‘대외 채무 소멸’을 선언한 소비에트 정권에 대해 5월에 ‘간섭 전쟁’을 일으킨다. 6월에는 반혁명 세력도 반격을 개시하여 동서남북 사방에서 공격을 가해온다. 레닌은 내전이 일어나자 당 지도부에서 좌파인 오신스끼·부하린·스미르노프를 경질하고 ‘노동자 관리’를 옹호하던 무정부주의자들과 사회혁명당 좌파를 탄압하면서 일부는 체포하도록 지시한다.

혁명 러시아는 곡창 지대를 상실한 탓에 도시에는 식량 위기가 닥치고, 농촌으로 보낼 공산품은 크게 부족하며, 루블화는 교화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여 유통 체계는 거의 마비상태에 빠지고, 사방이 완전히 봉쇄되어 식량·의류·총기·연료·원료 등 모든 물자가 부족하여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다. 철도가 발달하지 못해 군대 이동이 신속하지 못한 것도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결국 소비에트 정권은 난국을 돌파하기 위한 방안으로 ‘전시 공산주의’ 체제를 구축한다.

그런데 전시 공산주의는 혁명 시기의 원칙들을 하나씩 폐기하게 만든다. 소비에트 정권은 ‘자원제에 의한 민병대’ 대신 ‘징병제에 의한 정규군’을 편성한다. 붉은 군대의 토대인 노동자계급은 수도 적은데다가 이미 전쟁에서 많은 목숨을 잃었고 농촌 출신의 병사들은 자신의 마을을 떠나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투를 지휘한 경험이 있는 차르 군대 장교들을 다시 수만 명이나 충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장교를 선거로 뽑는 원칙도 포기하게 된다.

권력 구조도 상당한 변화를 겪는다. 소비에트는 자신이 선출한 기관인 인민위원회의에 대한 통제력을 점차 상실해 가는 반면 공산당(원)은 공장위원회·노조·소비에트·국가기구·적군에 관료로 진출하여 모든 의사결정권을 장악한다. 내전으로 인해 신속하고 엄격한 명령 체계를 필요로 하게 됨에 따라 정책 논쟁은 뒷전으로 밀리고 각종 직책은 선출이 아니라 임명에 의해 충원된다. 업무에서는 정치나 이념 문제보다 행정이나 군사 활동이 중시된다. 이에 따라 당내 민주주의는 쇠퇴하고 관료주의가 확산된다.

계급 관계도 변화한다. 정부는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빈농위원회를 구성하고 중농의 협력을 얻어 부농에 대한 계급투쟁을 벌인다. 그러나 10월 혁명 이후의 토지 분배로 부농과 빈농이 격감하고 중농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 식량 공출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자 정부는 노동자·병사·관리로 식량공출대를 구성하여 식량을 강제로 공출한다. 이에 대해 일부 농민은 조직적으로 대항한다. 우크라이나의 마흐노는 볼셰비키의 적군(赤軍)도 반혁명 세력의 백군(白軍)도 아닌 녹군(綠軍)을 자처하면서 중앙의 간섭이 없는 농민 자치를 이루겠다며 반란을 일으킨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농민은 토지를 빼앗겠다는 백군보다는 토지를 분배해준 적군을 선택한다. 특히 노동자들은 소비에트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결사적으로 항전한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반혁명군은 정치적 분열과 지리적 분산으로 효과적인 공세를 취하지 못한다. 게다가 프랑스 정부가 1919년 4월 흑해에 정박 중이던 자기 나라 수병들의 반란으로 소련 남부에서 진행하던 군사 개입을 중단한다. 영국 정부 역시 9월에 자국 노동자들의 파업 때문에 소련 북부로부터 원정군을 철수시킨다.

그리하여 1920년부터 전세가 역전되고, 러시아는 이 해 말 옛 제국의 영토를 거의 회복한다. 이전에 러시아 혁명이 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유럽 민중을 구했다면 이번에는 유럽 민중들의 반란과 투쟁이 제국주의 국가들의 간섭 전쟁으로부터 혁명 러시아를 구한 것이다.

당과 국가가 중앙집권화하면서 공장위원회는 하부 통제 기구로 전락한다.

다음 시기로 넘어가기 전에 전시 공산주의 아래서의 노동 정책을 살펴보자. 볼셰비키는 전시 공산주의 체제에서 당과 국가의 권력을 중앙집권화하고 노동자들의 자율적인 조직인 공장위원회를 중앙 권력에 종속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내전이 일어난 직후인 1918년 6월 28일 정부는 국유화령을 포고하고 ‘노동자 관리’를 폐기하는 조치들을 시행한다. 이에 따라 경영권은 최고국민경제회의에 귀속된다. 정부는 그 동안 저항이 가장 심했던 철도·석탄 산업들에서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관리위원회들을 강제로 폐쇄하고 공장위원회의 선거 제도도 폐지한다. 또한 노조에서 볼셰비키가 다수를 확보하게 하기 위해 정부의 정책에 저항해온 인쇄·은행·모스크바공무원 노조 등을 강제로 해산시킨다.

정부는 노동자 개인의 자유도 상당히 억압한다. 노동 규율에 저항하는 경우에는 공장을 폐쇄하고 강제 징집하거나 다른 작업장이나 강제 노역장으로 배치한다. 국유화령 이후에는 모든 노동자가 개인 노동 장부를 지니고 다녀야 하고 이주의 자유가 제한되며 직업 선택과 일상생활까지 노조의 감시를 받게 된다. 또한 이 해 연말에 새 노동법이 제정되어 의무(강제) 노동과 노동 업적 카드제가 신설되고 작업장 이탈과 파업은 반역 행위로 규정된다.

최고국민경제회의는 1919년 3월 특별상여제·추가배급제·돌격노동제를 시행한다. 더 나아가 전러시아인민경제회의는 4월에 총 노동 동원령을 선포하고 “노동이야말로 사회주의 혁명을 살리는 열쇠임”을 강조하면서 노동카드·배급카드·여행허가서·직업증명서를 의무적으로 지니고 다니게 한다. 트로츠키는 11월 9차 당 대표자 회의에서 ‘일사불란하게 조직된 의무노동이 자유노동보다 생산성이 더 높고 더 사회주의적이다’라며 붉은 군대의 열성 부대를 노동에 동원하고 모든 노동 이탈자를 군사 재판에 회부하여 징계하거나 강제 노역장에 배치하는 방안을 제출한다. 당 대회는 트로츠키의 제안을 채택하고 아울러 경영인은 노동자나 전문가 출신이 아닌 당성에 따라 결정하기로 결의한다. 트로츠키는 더 나아가 1920년 1월 제3차 전 러시아 노조 대회에서 토요일 무보수 노동제와 일인 관리제를 도입할 것을 촉구한다. 노조 대회는 앞서의 당 대표자 회의의 결의와 트로츠키의 제안을 수용하여 노조에게 단지 노동 조건과 노동 복지에 관해 건의할 수 있는 기능만을 허용한다고 결의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노동자들의 심한 반발과 이탈을 초래한다. 특히 철도 노동자들은 노동 군사화를 실시하는 데에 반대하여 8월에 파업에 들어가 10월에는 거의 모든 철도를 마비시킨다. 연말에는 모스크바 전역에서 노동자 소요가 확산된다. 심지어 국영 기업에서도 파업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노동 군사화에 반발하고 부족한 식량을 구하러 돌아다니는 통에 전체 노동자의 평균 결근율이 50% 이상에 이르게 된다. 노동 군사화 정책을 실시한 후에는 노동자들의 혁명 의식이 급격히 퇴조하고 당원의 수도 격감한다. 또한 엄밀한 계획 없이 위에서 강제로 실시한 식량 징발, 상품의 집단 교환, 빈농위원회의 계급투쟁, 의무노동, 국가 관리 등은 정부에 대한 적대감을 초래한다.

그럴 때마다 볼셰비키 정권은 백군의 위협을 과장하거나 혁명을 사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로 이 무렵부터 볼셰비키 당원 사이에는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이 확산되고 국가가 중앙집권으로 통제하는 체제만을 사회주의의 유일한 대안으로 보는 인식이 뿌리내리기 시작한다.

내전의 승리가 확실해질 즈음 정부는 노동 군사화 정책을 철회하는 대신에 중앙의 특별 행정 기구로서 산업중추부를 창설하고 산업과 노동에 대한 의사결정권을 독점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산업 경영 체계는 당 정치국→산업중추부→인민위원회의→노동인민위원회→최고국민경제회의→소비에트 집행부→소비에트 상부기구→소비에트 하부기구→노동조합의 순서로 권력 서열이 정해진다. 이에 따라 공장위원회는 완전히 노조의 하위 기구로 전락하여 노동자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기구로 변해간다. 이리하여 내전기 동안 노동자계급의 자율적 조직은 완전히 파괴된다.

게다가 헌신적이고 뛰어난 선진 노동자들이 내전에서 무수히 목숨을 잃음으로써, 즉 노동자들의 자율적 행동을 이끌 소중한 역량들이 손실됨으로써 문제 해결은 더욱 어렵게 된다. 그리고 혁명 이후 대거 당과 국가 기구에 선발되어 간 노동자 출신 간부들은 전시 공산주의 아래서 노동자 대중의 이익을 대변하기보다는 국가 정책을 수행하거나 노동자를 감독하는 행정 관료로 변질되어 간다. 내전 말기에 당 조직 역시 완전히 중앙집권 체제로 재편성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심화된다. 이에 따라 당원들은 하위 기관에서 혁명에 헌신하거나 의식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오히려 상부의 지시에 복종하거나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들로 채워진다. 그리고 ‘노동자국가 관리’는 혁명 당시에는 계급 철폐, 자치권 확보, 직접 관리를 쟁취하기 위한 구호였으나 내전 말기부터는 볼셰비키의 중앙집권을 정당화하는 데에 이용된다.

그러나 제국주의 전쟁과 내전으로 7년 동안이나 경제가 황폐해지고―1920년의 농사 수확은 전쟁 전의 60% 수준에 그친다―전시 공산주의 정책에 대한 인민들의 불만이 누적되어 내전 말기에는 인민들의 투쟁이 폭발하기 시작한다. 농민들은 1920년 가을에 강제 식량공출에 항의하여 파종량을 줄이고 연말에는 도처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도시에서는 노동자들이 배급제와 강제 노동 동원령에 항의하여 파업을 전개한다. 1921년 초에 산업 생산성은 혁명 이전에 비해 16% 이하로 떨어진다. 여기에 또 다시 식량 배급량의 1/3이 감소하자 2월부터는 볼셰비키 정권을 비판하는 노동자들의 시위가 모스크바에서 각 도시와 농촌 지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을 타고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자 볼셰비키 정부는 이 두 당을 불법화한다. 이로써 러시아는 일당 국가가 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발틱 해의 크론슈타트 섬의 수병 1만 6천 명이 1921년 3월 초 “권력을 소비에트로! 볼셰비키에게 권력을 넘기지 말자!”를 외치며 반란을 일으킨다. 여기에는 볼셰비키 당원과 노동자들도 상당수 가담한다. 그러나 이들의 요구는 ‘볼셰비키 반대’라기보다는 ‘더 나은 볼셰비키’다. 그렇지만 크론슈타트 반란은 16일 만인 3월 18일에 1000여명의 사망자와 수천 명의 부상자를 내고 진압된다. 그리고 2500여명이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가 사라진다.

이전에는 볼셰비키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고 수도 방어 지역으로서 의미가 매우 큰 크론슈타트에서의 반란은 레닌에게 큰 충격을 준다. 결국 레닌도 볼셰비키 정권에 대한 불만이 넓게 퍼져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대대적인 정책 전환을 시도한다.

시장 경제가 도입되고 1당 독재 관료화가 심화된다.

공산당 10차 당 대회가 3월 8일에 열린다. 그런데 바로 직전에 일어난 크론슈타트 반란에 초조해진 볼셰비키는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이라며 ‘당내 분파 금지’와 ‘국가에서 당으로의 권력 집중’을 결정한다. 이후 ‘노동자 반대파’는 반혁명 세력으로 규정되어 대대적으로 숙청된다. 또한 대회는 노조를 당의 하위에 복속시키고 임금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박탈하면서 평등임금제도를 공식 폐지한다. 노조 문제에 대해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노조의 독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전위대에 의한 독재’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당 대회는 자본주의적인 개인영업을 대폭 자유화하는 ‘신 경제 정책(NEF)’을 채택한다. 민중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에 이름에 따라 철저한 계획에 따라 운용하던 전시 공산주의 경제를 혼합 경제로 후퇴시킨 것이다. 이로써 곡물 공출은 고정 세금으로 대체되고 잉여 곡물은 시장에 내다 팔 수 있게 된다. 국유화되었던 많은 중소기업이 매각·대여되고 대기업은 공공 소유를 유지하되 생산·가격·임금은 시장 원리에 맡겨진다. 신 경제 정책이 시행되자 경제에 활기가 되살아나면서 극히 불안했던 정치 상황은 서서히 가라앉는다.

이 시기의 노동 정책은 고도의 중앙집권적 국유화, 전문적 ‘일인 관리제’, 기술자 우대, 차등임금제, 성과급제, 생필품 배급, 각종 특혜 부여 등인데 이것은 물질적 혜택을 주면서 노동자들 사이에 경쟁을 유발시켜서 산업 생산력을 향상시키는 데에 목적이 있다. 그러니 노조 지도부에는 노동자들의 참여와 권리보다도 생산력 향상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람들이 들어서게 된다. 게다가 정책이 시행된 지 채 2년도 되지 않은 1923년 1월에 임금 격차가 80:1에 이를 정도로 모순과 혼란이 발생한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의 처지는 오히려 더 악화된다. 그리고 노동자로서의 유대감보다 서로간의 경쟁과 갈등이 더 커지면서 노동자‘계급’은 해체된다.

한편 물품 부족은 만성적인 현상이 되어 물품을 구매하기 위해 길다랗게 늘어선 줄이 일상생활의 하나가 된다. 이에 따라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경찰이나 행정관이 늘어나고 이 경찰과 행정관을 임명하거나 물품을 배급하는 자리에 있는 관료들은 권력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관료의 권력이 강해지는 만큼 민중 위에 군림하는 관료화도 심화된다. 또한 ‘분파 금지’가 관료화를 더욱 확대시키는 작용을 한다. 관료들이 행정의 편리함만으로 분파 금지를 바라보게 되면서 분파 금지에 의한 당의 통일성은 민주집중제를 관료집중제로 전화시키고 관료 집단의 전횡을 낳는다. 레닌은 당 관료 기구의 위협적인 성장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제대로 투쟁을 전개하지 못한다.

1922년 3월 11차 당 대회가 선출한 중앙위원회의 1차 회의에서 스탈린이 서기장으로 선출된다. 그리고 12월 30일 소비에트 연방 1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 연방’(소련)이 출범한다. 레닌은 1924년 1월 21일 두 번째 뇌일혈을 일으켜 사망한다.

당은 ‘레닌 서거 추모 입당’ 운동을 벌여 당원 수를 대폭 확대한다. 불과 수개월 사이에 수십 만 명이 새로 입당한다. 이로 인해 당은 경계가 느슨해지고 규모가 비대해지면서 관료화가 더욱 심화된다. 또한 이에 따라 당 관료들이 평당원의 통제를 벗어나게 되고 도덕적 부패가 진행되어 특권 관료층을 지칭하는 “sovbour"―소비에트 부르주아지라는 뜻이다―라는 냉소적인 말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기 시작한다.

스탈린이 분파 투쟁에서 승리하고 중공업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한다.

스탈린이 총서기로 있는 서기국은 신 경제 정책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노멘클라투라―각종 정책 수행에 적합한 인물들의 명부―를 매개로 주요 보직에 대한 임명권을 장악하고 이어서 정치국 구성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권력을 집중한다. 이제 승진은 서기국에 대한 충성에 따라 좌우된다. 스탈린은 전후 유럽에서 일어난 혁명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1924년 말에 처음으로 한 나라만으로도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일국사회주의론’을 언급한다.

그러나 공산당원들 사이에는 신 경제 정책으로 인해 혁명의 이상이 손상되고 있다는 좌절감이 퍼져나간다. 그리고 높은 실업률, 임금과 노동 조건 개선의 부진, 경영자와 전문가 위주의 임금 체계 등으로 당의 존재 이유에 대해 회의하는 분위기가 확산된다. 결국 적대 세력과 맞서는 팽팽한 긴장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면서 피로감과 실망이 소련 대중을 엄습한다. ‘인민의 긍지’는 썰물처럼 밀려나고 소심함과 출세주의가 득세한다.

이런 상황에서 공업화의 속도와 재원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진다. 부하린은 농민이 압도적 다수이기 때문에 먼저 농업을 발전시켜 공산품 수요를 자극하고 소비재 산업에서 잉여가 발생하면 과세와 가격 정책으로 중공업화 재원을 충당하여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을 유지하면서 농업·소비재공업·중공업의 균형 잡힌 발전을 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트로츠키와 경제이론가인 프레오브라젠스키는 부하린의 이론에 대해 자본주의에 영합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공업화를 가속하기 위해서는 농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투자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트로츠키는 레닌이 유언장에서 표한 존경심으로 인해 레닌 이후의 최고 지도자로 손꼽히지만 멘셰비키의 전력이 있는 탓에 원로 볼셰비키에게는 경계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중앙당 총서기인 스탈린, 레닌그라드 당 총서기인 지노비예프, 모스크바 당 총서기인 카메네프가 반트로츠키 동맹을 형성한다. 이들은 좌익 반대파가 노농동맹의 기조를 위협한다고 비판하면서 당 지도부에 대한 좌익의 접근을 차단한다. 결국 트로츠키는 1925년 1월 군사인민위원직에서 물러난다. 그러자 스탈린은 레닌의 사도로 행동하면서 자기 세력을 엄청나게 확장한다.

이에 경악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좌익 반대파의 노선을 차용하여 스탈린에 대항한다. 부하린이 농민들을 지나치게 배려한 탓에 정권이 부농의 인질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도 서기국의 장벽에 걸려 1926년 초에 양대 수도의 당직에서 물러난다.

이제 이 두 사람은 트로츠키와 함께 합동 반대파를 결성한다. 트로츠키는 유럽 혁명 이전이라도 유럽과의 교역이나 유럽의 자본 투자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때가 좋지 않았다. 1926년에 신 경제 정책이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데다 1927년에는 중국에서 1차 국공합작이 결렬되고 5월에는 영국과의 국교가 단절되고 프랑스와의 관계도 나빠지는 등 국제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합동 반대파는 오히려 자본주의 적들에 영합하고 소련에 대한 신념이 부족하며 반역 행위를 일삼는다는 공격을 받는다. 트로츠키는 러시아에 대한 신념 부족과 급격한 산업화론자라는 양면 공격이 모순이라고 항변하지만 언론에 대한 접근이 봉쇄되고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려는 시도도 비밀경찰에 의해 봉쇄된다. 결국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는 분파 활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중앙위원직을 박탈당하고 이어서 11월에는 당에서도 제명되고 모스크바에서 추방된다.

한편 국가계획위원회가 1927년에 1차 경제 5개년 계획 초안을 내놓는다. 그런데 최고국민경제회의가 이 초안에 대해 설정 목표가 낮다고 비판하자 양 기관 사이에 목표를 상향 수정하는 경쟁이 벌어진다. 그리하여 1929년에 확정된 최종 계획의 목표―좌익 반대파가 제시했던 것보다 훨씬 높다―는 아주 비현실적이게 잡힌다. 계획 기간 중에 노동생산성을 110% 상승시키고 농업 생산을 55% 증가시키겠다는 목표는 지나치게 높게 설정된 것이며 생활수준의 하락 없이도 중공업 투자가 가능하다는 전제는 허황된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건 정부는 계획이 완성되기도 전인 1928년부터 경제 5개년 계획을 시작하여 공업화에 박차를 가한다. 그리고 이에 발맞추어 노동법규도 개정한다. 2월에 제정된 ‘공업 기업의 행정·기술·경영 담당자들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기본 법규’는 공장위원회·전문경영인·당세포 3자가 공동 운영하던 ‘트로이카 체제’에 완전히 종지부를 찍고 경영자가 공장 운영을 독점하게 한다. 이것은 현실에서는 이미 유명무실해져 있는 ‘현장 노동자들의 생산에 대한 통제 권한’을 법률에서까지 박탈한 것으로서 소련이 노동자 정부라는 껍데기(법)조차 벗어버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농민들이 공업화 우선 정책과 강제 농업 집단화 정책에 희생된다.

정부는 공업화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곡물 가격을 인하한다. 그러나 농민들은 이에 반발하여 국가기관의 수매를 거부한다. 이로 인해 이 해 겨울의 곡물조달은 아주 저조해지고 이는 곧바로 도시의 식량 위기로 나타난다.

당 지도부는 비상조치로 곡물 공출을 재개하고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농업 집단화를 추진한다. 몇몇 지역의 당 기구가 1929년 초에 벌써 집단화를 시작하고 가을에는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전면적인 농업 집단화를 결정한다. 집단화는 당 관료, 콤소몰(공산주의 청년동맹), 군대, 경찰, 특별히 선발된 노동자대오를 동원하여 아주 강력히 추진된다. 그리하여 불과 1년만인 다음 해 3월에 무려 50%의 집단화가 이뤄진다.

소수 민족들은 강제 이주를 당한다. 그리고 부농에 대한 모호한 규정으로 500만 명에 이르는 농민이 필요 이상으로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어 고통을 겪는다. 그리하여 신 경제 정책이 실행되던 시기에 농민 인구 중 4~5%를 차지하던 부농계급과 그 비율에 약간 미치지 못하던 도시 부르주아지는 1930년대 초에 이르러 완전히 사라진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국가가 빼앗는 것으로 생각하고 농업 집단화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농민들은 내전 이후 조직과 무기를 박탈당한 상태였으므로 대규모 도축과 파종 거부로 저항한다. 가축 도살로 인해 가축에 의한 견인력, 비료로 쓸 배설물, 고기와 낙농 제품이 극심하게 부족해진다. 기계화가 이루어지기 전이라 소련의 농업은 장기간 침체하게 된다. 1931년과 1932년에는 연속으로 대흉작이 발생해 수백만 명이 질병과 기근으로 목숨을 잃는다.

이에 정부는 텃밭을 인정하면서 농민에게 양보 정책을 취하지만 집단화는 계속 추진한다. 중공업 우선 정책으로 인해 농촌의 수공업과 사적 상업도 붕괴되어 농민들은 각종 물품 부족에 시달린다. 집단 농장의 의장에는 대개 농업과 무관한 노동자가 임명되어 농민보다는 당의 이익을 우선한다. 게다가 수매가는 유명무실하여 농민들은 농업 생산성 향상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공업화를 위한 강제 저축에서도 농민이 첫 번째 희생양이 된다. 그래서 많은 농민들이 집단화의 재앙이 덮친 농촌을 떠나 도시로 흘러들어 간다. 그 수는 1930년대 초 3년 동안 해마다 300만 명에 이른다.

1936년에 가서야 농업 생산은 집단화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고 농민들의 생활도 어느 정도 나아지기 시작한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동 통제가 강화되고 ‘상여금 경쟁’과 ‘돌격대 노동’이 장려된다.

공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신종 공업이 등장하고 신흥 공업 도시들에 여러 종합 공업 단지가 건설된다. 특히 중공업·토목·금속·연료·수송 분야가 두드러지게 발전한다. 그리고 기계 영농이 도입되면서 농업 생산력도 크게 증대된다. 급속한 공업화는 수백 만 명에 달하던 도시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농촌에서 해마다 수백 만 명씩 흘러 들어오는 산업 예비군들까지 흡수한다. 정부는 하층 인텔리겐치아보다 육체노동자를 더 우대하는 정책을 편다. 이 때문에 정부의 공업화 정책은 노동자·민중에게 많은 지지를 받는다.
그런데 대개 공업과 관련된 기술이나 경험이 없는 농민 출신의 새로운 노동자는 거칠고 낯선 노동 조건에 적응하지 못하고 음주·결근·불복종·이직 등의 문제를 일으킨다. 이로 인해 당의 최대 관심사였던 노동 생산성과 효율성이 상당히 떨어진다.

그래서 정부는 공장 규율을 확립하기 위해 노동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다. 1930년 12월에 모든 공업 기업들은 허가 없이 자신의 원래 근무지를 떠난 사람들을 고용하는 것이 금지된다. 1931년 2월에는 근무 기록부 제도가 도입되어 공업·운송 노동자들은 근무 기록부를 제시하지 않으면 이직이나 재취업을 할 수 없게 된다. 1932년에는 경영자와 기술자가 노동자에 대해 해고, 배급 카드 회수, 공장 숙소 제공과 같은 혜택 박탈 등의 권한을 갖게 된다. 8월에 제정된 ‘국영기업·집단농장·협동조합 재산의 보호와 사회주의적 소유 제도에 관하여’라는 법령은 국가·콜호즈·협동조합·철로·수로에 속하는 재산의 절도는 전 재산의 몰수와 함께 총살형에 처할 수 있도록 한다. 11월에는 정당한 이유 없이 하루 동안 직장을 결근하면 해고할 수 있게 하는 법령이 제정된다. 그리고 그 노동자의 집이 근무지와 붙어 있을 경우에는 퇴거 조치를 내릴 수도 있게 된다. 12월에는 누구든지 허가 없이 자신의 거주지를 바꾸지 못하도록 하는 국내 통행 허가제가 도입된다.

체제의 부속물로 전락한 노조 대회지만 그조차 1932년 이후 17년 동안이나 열리지 않는다. 단체 협약도 1934년 이후로는 더 이상 체결되지 않는다. “계획이 경제 발전의 결정적인 요소가 될 때 임금 문제는 그것과 관계없이 따로 결정될 수 없고 임금 조정의 한 형태로서 단체 협약은 그 유용성을 상실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관료들의 권한과 노동자에 대한 억압은 갈수록 강화된다. 1940년 10월에는 산업 경영진이 인력을 다른 기업이나 기관으로 강제로 전근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 1941년 12월에는 허가 없이 군수 업체를 이탈한 노동자에게 5~8년형까지 벌칙을 부과하는 법령이 만들어진다. 강제 노동 수용소의 죄수는 1928년 단 3만 명에서 1930년 66만, 1931년 200만, 1935년 500만, 1942년 1000만 명으로 급증한다.

정부는 채찍 정책(노동 통제)과 더불어 당근 정책을 다함께 시행한다. 정부는 1931년에 노동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사회주의적 경쟁”이라고 명명된―그러나 자본주의에 가장 적합한―‘실적에 따른 누진적인 성과급제도’를 도입한다. 이 때문에 소득 격차가 빠르게 확대되면서 평등주의는 계속 뒷걸음친다.

특히 관리자들은 계획된 목표 이상을 달성하면 높은 상여금을 받는다. 그러고도 노동자를 위한 주택·회관·매점·탁아소·유치원을 세우는 데 쓸 ‘기업장 기금’(1936년 제정)까지 전용해서 쓴다. 그리하여 정부의 상급 관리, 기업장, 성공한 작가는 모스크바의 저택, 크리미아의 별장, 한두 대의 자가용, 수명의 하인을 가지고 있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1만 루블 이상의 상속 재산은 모두 몰수하던 상속세는 이제 10%를 넘지 않는다. 이것은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이나 미국의 상속세보다도 매우 낮은 비율이다.

탄광 노동자인 스타하노프는 1935년에 1일 6시간 교대제에서 하루 102톤의 석탄을 채굴함으로써 노동 생산성을 높인 기적의 ‘노동 영웅’으로 선정된다. 이어서 개인의 모범을 따라 배우자는 선동이 뒤따르고 성과를 달성한 사람들에게는 집단 포상과 특권이 주어진다. 그러나 새로운 생산량의 기준은 “스타하노프제 포상 노동자들의 생산을 다른 노동자들의 평균치와 합산하여 평균”한 것으로 높아진다. 그리고 목표 달성을 닦달하는 관리자들의 압력은 더욱 가중된다. 스타하노프 운동원들은 ‘업무 외 시간’에도 작업장과 도구·원자재를 정리정돈하고 조장들은 조원들에게 교육을 실시하는 일들이 진행되면서 노동 강도는 강화되고 노동 시간은 연장된다. 이에 대해 노동자들은 태업으로 저항하고 스타하노프 운동원을 살해하기까지 한다. 그러자 관리자들은 ‘정치적 저항’이라고 비난하며 대대적으로 탄압한다.

노동자들은 강제 저축, 모든 물품의 배급제, 목표의 절반에 불과한 주택 건설로 인해 생활수준이 하락한다. 조그만 주택 한 채에 심한 경우 7~8가구가 입주함으로써 가정생활이나 사생활이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중공업 우선 정책과 수공업의 소멸로 생필품이 늘 부족하여 암시장이 성행한다.

그렇지만 1934년 이후 경공업에 대한 투자가 증대되고 1935년에 상거래 체계가 일정 정도 도입되면서 인민들의 생활도 조금씩 개선된다. 노동자들은 공장을 통해 최소한의 생활필수품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실질 임금이 하락하기는 하지만 고용 기회가 확대되어 여성들의 취업이 쉬워짐으로써 가계 수입은 오히려 늘어난다. 공업화가 한창이던 시절에도 하루 8시간 노동이 원칙으로 지켜진다. 실업은 급속한 공업화로 인해 사실상 완전히 사라진다. 제도와 현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질병에 걸린 노동자는 무료 의료 혜택과 함께 통상 임금의 100%를 보장받는다. 그렇지만 공업화에도 불구하고 소비재 공업과 농업에 대한 파급 효과는 아직 별로 나타나고 있지 않아서 인민의 생활은 절대 빈곤에서 탈피해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을 뿐이다. 한편 정부는 엄청난 비용을 교육과 훈련에 투자하여 노동자·농민 출신의 ‘붉은’ 전문가를 양산함으로써 체제에 우호적인 전문가 집단을 확보한다.

관료 기구가 엄청나게 비대해지면서 노동자의 창발성이 소진된다.

모든 생산 수단이 국가의 통제 아래 들어옴으로써 주요 산업에 대한 투자 집중과 중앙 계획이 가능해진다. 사회가 당 지도부→국가계획위원회→경제담당 인민위원부들→지역→도시→공장으로 이어지는 어마어마한 산업 피라미드로 구축되면서 관료기구가 엄청나게 비대해진다.

그런데 관료들이 현실에 근거한 면밀한 계획보다 상부의 지령을 우선함으로써 관료들의 계획과 예측은 종종 터무니없이 빗나간다. 이로 인해 한쪽에서는 물품이 남아도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부품이 모자라 공장 가동이 중단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그리고 관료들이 제품 가격을 자의적으로 결정함으로써 똑 같은 제품을 생산하는데도 공장마다 관리비와 생산 가격이 서너 배 이상씩 차이가 나기도 한다. 제 맘대로 날뛰는 가격은 합리적인 계획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그러니 계획은 수시로 변경된다. 그러면 중도에 포기하는 사업이 생겨나고 그만큼 물자는 낭비된다. 그런데 관료 자신이 결정한 계획과 활동으로 인해 생겨난 지역·부문간의 혼돈과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해 더 많은 관료가 충원된다. 그러나 결과는 문제만 하나 더 늘어난 꼴이 된다.

그러다 보니 일단 자신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보자는 식으로 된다. 이제 현장 책임자들은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기 위해 목표치는 낮추고 성과는 실제보다 부풀려 보고한다. 이 때문에 중앙의 경제 책임자와 일선의 기업 책임자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다. 그러다 문제가 생기면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이로 인해 수많은 소송이 제기된다.

소송의 주요 항목을 차지하는 것은 품질 문제인데 이것은 관료들이 수치로 나타나는 양을 중요시하고 질을 무시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때는 무엇이든 기술 수준에 상관없이 규모가 클수록 좋다는 것이 신앙으로 되어있던 상황이니 그럴 만하다. 예를 들어 1928~37년 사이에는 거대 기업 열풍이 불었고 1930년에는 50개의 촌락과 8만 4000ha, 29개의 촌락과 3만 3533ha―1ha는 1만㎡다―를 포괄하는 두 개의 대규모 콜호즈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거대기업이나 콜호즈 둘 다 실패로 돌아간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관료주의가 사회 전반에 팽배해질수록 품질 개선을 가능케 할 노동자의 창발성과 책임 의식이 더욱 파괴된다는 것이다. 노동 생산성을 높이려는 이러저러한 노력들은 관료주의에 짓눌려 별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스탈린은 정적을 숙청하며 1인 독재 체제를 구축한다.

당의 지도 체제는 당 대회가 중앙위원회를 선출하고 중앙위원회가 13~14명의 정치국원을 선출하며 정치국이 서기장과 서기국원을 선출하는 민주적인 방식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관료층이 공고화되고 당의 위계질서가 강화될수록 권력은 자연스럽게 서기장에게 집중되어 간다. 더구나 스탈린은 경찰 조직인 내무인민위원부를 이용하여 정적들을 숙청하기까지 한다.

내무인민위원부는 1928년 샤흐티 사건, 1930년 근로농민당 사건과 공업당 사건, 1931년 멘셰비키 동맹 ‘뷰로 사건’, 1936~38년 대숙청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계급의 적’을 만들어낸다. 내무인민위원부는 1936년 8월 지노비에프·카메네프·부하린 등 볼셰비키 중앙위원 16명을 ‘소련을 전복하기 위해 트로츠키와 협력하여 제국주의 세력의 첩자 노릇을 했다’는 혐의로 기소한다. 다음해까지 모스크바에서 대규모 재판이 수차례 열려 지노비에프·카메네프·부하린 등 다수가 사형 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숙청당한다.

이러한 일련의 숙청으로 인해 수많은 지도자들이 지위를 박탈당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다. 1917년 10월 혁명 직후 최초로 조직된 볼셰비키 정부의 구성원 15인 가운데 단 한 사람 스탈린만이 대숙청 이후까지 생존한다. 각종 인민위원부의 모든 최고 관리들은 차례대로 숙청당한다. 1935년에 임명된 군사령관 15명 가운데 14명이 배반자로 낙인찍혀 숙청당한다. 거의 모든 소련 대사들이 숙청당한다. 대숙청 기간 동안 소련 내의 30개 공화국 정부 지도자들의 대다수가 소연방 탈퇴를 도모했다는 혐의로 숙청된다. 이런 피비린내 나는 과정을 거쳐 ‘수령의 1인 독재’가 완성된다. 이것은 정치만 보면 차르의 전제 시대로 되돌아 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사회 비판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당내 비판 기능이 마비되면서 인간관계는 폐쇄적으로 변해간다. 1920년대 말이래 소비에트 대회와 최고소비에트에서는 모든 결정이 단 하나의 기권표나 수정 제의나 반대 연설도 없이 만장일치로 통과된다. 1937년 총선 때 수백 개의 선거구 모두에서 후보자는 오직 한 사람씩만 나온다. 투표율은 98% 이상, 찬성률은 99.9%를 기록한다. 스탈린은 놀랍게도 100% 이상을 득표한다. 유권자가 1617명인데 2122표를 얻은 것이다.

그런데 ‘스탈린주의’는 스탈린 개인의 성격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거꾸로 스탈린의 정치적 성격은 관료 집단에 의해 규정된 것이다. 관료 집단은 자신들의 지위와 권리를 위협하는 세력을 가차 없이 제거할 수 있는 무자비한 사람을 필요로 했고 따라서 관료 집단의 인격화로서 스탈린이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스탈린이 1922년부터 30년 동안 서기장이라는 권력의 정점에서 점점 신격화 되어간 것은 관료 집단으로 권력이 집중되어 가는 현상을 반영한 것이다. 정치의 형태와 구조는 그 시대의 생산 양식과 생산 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관료 집단으로의 권력 집중은 다른 한편에 서있는 민중들의 권력 상실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따라서 스탈린주의는 생산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혁하지 못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이루지 못한 근본적 결함에 기인한 것이자 생산력 향상을 위해 계급투쟁을 포기한 결과이다.

소련 사회는 불평등이 심화되고 관료계급이 형성된다.

소련은 계급투쟁이 아닌 평화 공존을 외교 정책으로 취한다. 소련은 1929년에 영국 노동당 정부와 1931년에는 프랑스와 1933년에는 미국과 국교를 수립한다. 1934년에는 국제연맹에 가입하고 1935년에는 프랑스와 상호 원조 조약을 맺는다.

그러면서도 정부는 전쟁의 위험성을 끊임없이 선전하여 인민에게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킨다. 인민들은 정부가 무너지면 자본주의로 복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정부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쉽게 저버리지 못한다. 전쟁에 대한 공포는 인민에게 엄청난 선전 효과를 일으키면서 내부의 정적을 소탕할 구실과 급속한 공업화의 명분을 만들어준다. 정부는 선진국에 비해 50~100년이 뒤진 소련으로서는 길어도 10년 이내에 이들을 따라잡아야 생존도 가능하고 사회주의 건설도 가능하다며 경제 성장을 독려한다.

소련 사회의 불평등은 더욱 심화된다. 소련 군대는 1935년에 혁명에 의해 철폐되었던 장교 제도를 18년 만에 부활시킨다. 이는 사회가 통치자들과 피통치자로 갈라져 있는 상황을 반영한다. 그리고 1936년 6월에 새로 만들어진 헌법은 계급과 산업 그룹별로 이루어지던 선거를 무차별 개인들의 보편·평등·직접·비밀 선거로 바꾼다. 이는 소비에트 민주주의 체제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로 회귀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법적으로 청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정부는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사명, 사회주의의 대의, 자본주의보다 평등한 사회, 높은 경제 성장률, 서민을 위한 의료 제도와 사회 보장, 교육에 대한 엄청난 투자를 일상적으로 강조하여 낙관주의를 고취시킨다. 더군다나 이 시기에 자본주의 국가들은 유례없는 경제 대공황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고 또한 외국의 공산당과 인민들이 소련을 동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 인민들은 체제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급속한 공업화에 따르는 희생을 감내한다. 당 지도부는 노동자에게 입당의 문턱을 낮추고 일선 경영자에게 거친 대접을 받는 현장 노동자들에게 온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당에 대한 충성심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당·정부·경찰 기구가 비대해짐에 따라 인텔리겐치아―사무·전문직 노동자―층이 증대한다. 인텔리겐치아는 1928년에 전체 노동 인구의 5.2%에서 1939년에는 16.5%(1100만 명)로 늘어난다. 인텔리겐치아는 공업화 초기에 우익의 지지 세력으로 간주되어 격렬한 공격의 대상이 되었지만 급격한 공업화에 이들의 전문 지식이 필요해지면서 이들에 대한 공격은 1931년 중엽부터 중단된다. 인텔리겐치아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단순 사무직은 육체노동자보다 불리한 대우를 받는다.

그렇지만 공업경영자·기술전문가·상급행정가인 수십 만 명의 상층 인텔리겐치아는 여러 혜택을 받으며 사회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대졸 기술자는 1928년 4만 7천 명에서 1941년 28만 9천 명으로 증가하고 대졸 취업자 수는 75만 명에 이른다. 같은 직책을 맡고 있는 비대졸자의 수가 여전히 몇 배나 더 많기는 하지만 점차 학력이 중시된다. 숙청이 완화되는 1938년 이후부터는 방대하게 형성된 인텔리겐치아 층이 공업화의 최대 수혜자로서 기득권을 누리며 체제의 핵심적인 지지 세력으로 등장한다.

소련 경제는 급속히 성장했지만 질적 도약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소련 경제는 인민들의 헌신, 계획 경제의 장점, 광활한 영토, 풍부한 천연 자원, 노동력의 대규모 투입으로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한다. 소련은 1928~40년까지의 13년 동안 연평균 16%―서방에서는 최저 8.4%에서 최고 13.6%로 추산―에 이르는 경제 발전을 이룩하면서 강력한 공업 국가로 성장한다. 이 기간 동안 산업은 거의 국유화되고 유통 분야는 국유화되거나 협동조합이 장악하게 되며 농업의 집단화 비율은 90%에 이른다.

노동자는 전체 노동 인구 가운데 차지하는 비율이 1928년 12.4%에서 1939년 33.7%로 증가한다. 그리고 농민들이 공업 도시로 몰려들면서 그 기간 동안 도시 인구는 3천만 명이나 증가한다. 문맹률은 제정 말기의 75% 이상에서 1939년 23%(여성은 33%)로 격감한다. 노동자들의 문맹은 완전 일소된다.

그러나 소련 경제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생산 수단이 국유화되고 농업이 집단화되었지만 생산력은 여전히 낙후한 편이다. 중공업 분야는 급속히 발전한 반면 경공업이나 사회 기간 시설 분야에서는 후진성이 여전하다.

계획 경제의 지도부는 사회주의를 건설할 능력이 부족하고 관료 기구는 점점 비대해져 부패해 가고 있다. 또한 많은 인력이 개인 축재자와 소비자들을 통제하는 일에 낭비되고 있다. 그리고 산업의 여러 요소들 사이에 여전히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특히 노동자의 기술 수준과 문화 수준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들보다 많이 뒤쳐져 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생산력인 노동자계급이 여전히 지시 받는 수동적 인간으로 머물러 있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나가는 ‘자유로운 인간으로의 해방’이라는 욕구는 비용 절감과 효율성 증대라는 생산력 발전에 종속되고 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노동 생산성이 여전히 낮다. 그 결과 제품의 생산비용은 대단히 높은데도 제품의 품질은 떨어진다. 그만큼 국민 소득과 인민의 생활수준도 아직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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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2

세계노동운동사 [6장] 사회주의 대 파시즘 (1917~1945) 2

파시즘에 패배하는 유럽 사회주의 운동

이탈리아 사회당과 노동자 운동이 공장 평의회로 결합하여 혁명적 정세를 만든다.

파업의 물결이 1917년부터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노동자 운동에 새로운 흐름이 생겨난다. 노동자들이 1918년부터 관료화된 산별노조의 통제에서 벗어나 ‘내부 위원회’라는 새로운 현장 조직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당에서도 새로운 흐름이 생겨난다. 사회당 토리노시 지부(당원 1000명)의 젊은 활동가인 안토니오 그람시와 팔미로 톨리아티는 1919년 메이데이에 [새 질서]라는 주간지를 창간하고 ‘공장의 전체 노동자가 생산 활동을 직접 통제하는 것이 대안 사회의 진정한 출발점’이라고 역설하면서 공장 평의회를 건설할 것을 주창한다. [새 질서]그룹의 노력으로 1919년 9월 초 피아트사를 비롯해 토리노의 30개 공장에서 5만 노동자가 내부 위원회를 공장 평의회로 전환할 것을 결의한다. 두 개의 새로운 흐름이 하나로 멋지게 통일된 것이다. 그리고 사회당은 10월 당 대회에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1919년 3월 창설, 코민테른 또는 제3인터내셔널이라고 부른다―에 가입할 것을 결의한다.

이때 이탈리아는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실업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이탈리아는 1차 세계대전에서 60만 이상의 희생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연합국으로부터 받은 보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에 이탈리아의 여론은 연합국과 자국 정부 모두를 성토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1919년 11월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진다. 좌파인 보르디가가 선거 불참을 주장했으나 사회당은 선거에 참여하여 총 508석 중 156석을 얻으며 가장 강력한 정당으로 급부상한다. 소농을 주요 기반으로 하는 가톨릭 계열의 신생 정당인 인민당도 농촌 지역에서 100석을 차지한다. 정당 조직조차 갖추지 못한 집권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재앙에 가까운 결과다. 사회당의 당원 수는 전전(戰前) 2만에서 18만으로 늘어난다. 이런 상황을 타고 노동총동맹의 조합원은 25만에서 200만으로 급속히 증대한다.

토리노에서는 공장 평의회 회원이 15만 명으로 늘어난다. 그러자 사회당 토리노시 지부와 토리노 노동회의소는 12월에 공장 평의회를 공식 노선으로 승인한다. (그러나 당권파인 세라티는 ‘혁명의 주역은 조직 노동자이지 미조직 노동자가 아니다’라며 공장 평의회 노선을 맹렬히 반대한다.) 토리노시지부가 12월 3일 집회 명령을 내리자 공장 평의회 체계를 통해 12만의 노동자가 1시간 만에 집회장으로 모여든다. 사회당의 역사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조직력이고 행동력이다. 토리노시 지부는 공장 평의원들을 대상으로 12월 한 달 동안 대대적인 정치 교육을 벌인다.

자본가들이 1920년 3월 갑자기 섬머타임제를 실시하고 이에 반대하는 내부 위원들을 해고하면서 선제공격을 가한다. 이에 맞서 토리노의 공장 평의회들은 공장 점거 파업에 돌입한다. 이어서 금속 노조가 즉각 총파업을 선포하고 노동총동맹도 4월 13일 형식적으로나마 총파업을 선언한다. 그러자 총파업의 중심을 깨기 위해 전국의 헌병대가 토리노로 몰려든다. 반면에 세라티 등의 당권파는 토리노가 고립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다른 지역의 행동을 이끌어내기보다는 오히려 토리노 노동자들의 자제를 촉구한다.

6월에 다시 수상이 된 지올리티는 ‘경영 참여’를 약속하면서 파업 지도부를 협상장으로 이끌어낸다. 정부와 노동총동맹 사이에 여름 내내 지루한 협상이 계속된다. 참다못한 노동자들이 8월 31일 공장 점거 파업을 재개한다. 공장에는 적기가 휘날리고 노동자들은 경영권까지 요구하면서 일부는 무장까지 갖춘다. 9월 9일 노동총동맹과 사회당의 합동 회의에서 좌익들은 권력 투쟁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고 노조를 중심으로 대규모 투쟁을 벌이자고 주장한다. 아무튼 50만 노동자들이 4주 동안이나 공장 점거 파업을 벌이는 열기를 타고 전국에서 공장 평의회가 건설된다.

토리노에서는 피아트의 파업 노동자들이 직접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하여 매일 37대의 자동차가 생산된다. 생산에서 철수하는 고전적인 파업과는 다르게 파업 중에 노동자가 직접 생산을 장악하고 스스로 운영하는 놀라운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것은 사회당 토리노시 지부의 의식적인 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한편 남부의 빈농들은 토지 개혁을 요구하며 토지 점거 운동을 벌이고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토지의 완전 집단화까지 요구한다. 지올리티 정부는 사태가 더 발전하기 전에 서둘러 노사 협상을 타결한다.

사회당은 11월 지방 선거에서 파업의 성과를 이어받으며 약진한다. 하지만 파업 지도부의 타협은 혁명을 기대하던 노동자들에게는 배신으로 비쳤기에 노동자들의 투쟁 전열은 오히려 흐트러져 있었다. 이런 틈을 놓치지 않고 자본가·지주계급은 극우 파시스트들을 부추겨 노동자 세력에 대한 테러를 자행한다. 페라라 시청에 사회당의 붉은 깃발이 게양되는 그 시간, 볼로냐 시청 광장의 사회당 승리 기념 대회에는 파시스트 테러단의 폭탄이 투척돼 10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는다.

보르디가의 선거불참파와 그람시의 [새 질서] 그룹은 1921년 1월 사회당 당 대회 도중에 대회에서 철수하여 전광석화처럼 이탈리아공산당을 창당한다. 4만 명이 공산당으로 당적을 옮긴다. 그리고 500명의 국회의원을 뽑는 5월 총선에서 공산당은 29만 표를 얻어 15석을 획득한다. 사회당은 150만 표를 얻어 123석을 확보한다. 그러나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도 35석을 확보한다. 1919~20년의 혁명적 정세는 이제 반동이 우세한 국면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무솔리니가 중간 계층의 광범한 지지를 얻으며 독재 권력을 구축한다.

무솔리니는 초등학교 교사 출신으로서 한때 사회주의자였으나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열렬한 민족주의자로 전향한다. 무솔리니는 전쟁이 끝나고 떠돌이 제대 군인을 모아 1919년에 ‘전투단’을 조직하고 사회·경제·정치적 위기를 이용하여 파시즘 운동을 전개한다.

무솔리니 추종자들은 검은 셔츠를 입고 해골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 로마군대식 행진에 맞춰 투쟁가를 부르면서 퍼레이드를 벌인다. 상징과 의식을 이용한 이 새로운 행동은 인간의 원시적인 힘과 고대 풍속, 종족 우월성을 환기시키면서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 검은 파시스트들은 볼셰비즘에 대항하는 보루로 자처하면서 사회주의자들과 파업 노동자들에게 조직적인 테러를 가하고 노조 건물을 방화하고 사회주의자 지방 관리들을 집무실에서 몰아내는 만행을 자행한다.

파시스트는 국가·법률·질서·사유재산의 보호자로 각광받기 시작한다. 파시즘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버무린 이데올로기와 무솔리니의 개성에서 풍기는 매력이 함께 작용하여 단기간에 대중 운동으로서 성공한다. 앞서 보았듯이 파시스트당은 1921년 총선에서 35석을 얻는다.

이에 철도 노조는 1922년에 모든 노동자 세력을 모아 파시스트들에 대항할 노동동맹을 결성하자고 제안한다. 여기에는 자유주의자들과의 제휴를 통해 파시스트들을 제압할 방안을 모색하던 노동총동맹 지도부도 동참한다. 그러나 공산당은 끝내 불참한다. 이렇게 파시즘을 물리칠 좋은 기회는 흘러가 버린다. 그 후 파시스트들의 테러 공세 속에서 노동총동맹의 조합원은 200만에서 80만으로 급감하고 사회당 당원 수는 2만 5천으로 감소한다. 공산당 당원 수는 5천 명까지 감소한다.

무솔리니는 10월에 왕국을 구할 것을 선포하고 파시스트 민병대를 이끌고 ‘로마 진격’을 감행한다. 파시스트를 볼셰비즘에 대한 보루로 활용해왔던 자유주의 연립 내각은 10월 28일 검은 셔츠의 행렬이 수도에 다다르자 당황하여 계엄령을 선포하려한다. 그러나 국왕이 선포를 거부함으로써 내각은 물러나고 무솔리니가 수상으로 임명된다. 무솔리니는 수상으로 임명된 후 몇 달 사이에 전권을 장악하고 자신의 민병대를 국가 기관으로 만든다.

이에 대해 총파업으로 대항하자는 호소는 사회당과 노동총동맹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무산된다. 공산당의 보르디가는 “파시즘은 단순히 부르주아 지배의 연장(延長)일 뿐이며 반혁명은 필연적으로 실패하게 돼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그람시는 “파시즘의 성공은 중간 계층의 지지와 동원에 기반하고 있는 점을 주목하자”고 주장한다. 무솔리니의 탄압으로 공산당은 지도자인 보르디가와 면책 특권이 없는 지방 의원과 당원의 1/4이 검거된다. 의원단만 유일한 합법 공간으로 남는다.

무솔리니는 “민주주의는 계급투쟁을 부추기고 국민에게 공론을 일삼게 함으로써 수없이 많은 당파로 분열시키는 역사적으로 낡은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장기적인 안목과 대담성을 지닌 강력한 지도자 밑에서 정열적으로 행동할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스스로를 ‘두체(지도자)’로 지칭한다. 이러한 ‘지도자의 원칙’은 적지 않은 대중에게 능률적이고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무솔리니는 적어도 나태한 이탈리아인들을 움직여 기차가 제시간에 떠나도록 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파시스트는 1924년 선거에서 60%를 득표한다. 공산당은 4%를 득표하여 그람시를 포함하여 19명이 당선된다. 코민테른 대회에 참가했다가 러시아에 남아있던 그람시는 의원 면책 특권을 이용하여 파시즘 치하의 고국에 돌아온다. 무솔리니는 1925년 1월 독재를 선언하고 탄압을 강화한다. 이에 대해 공산당은 국내가 아닌 프랑스 리용에서 당 대회를 갖고 반파시즘 공동 전선과 노농동맹을 전략 노선으로 확정한다. 무솔리니는 1926년 11월 파시스트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 활동을 불법화하고 사회당과 공산당의 의원단까지 체포한다. (이때 같이 체포된 그람시는 1935년 4월 27일 감옥에서 사망한다.)

무솔리니는 정당이나 지역 선거구가 아니라 경제적 직능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대의체를 구성한 ‘조합 국가’가 민주주의의 맹점인 계급투쟁으로 인한 무정부 상태를 해결한 진보된 경제 사회라고 선전한다. 이에 따라 전국의 경제생활이 22개 분야로 구분되고 각 경제 분야마다 노동자·자본가·정부 3자가 공동으로 참가하는 조합이 결성되어 3자 대표들이 노동조건·임금·가격·산업정책을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대표로 이루어지는 국가 회의가 이탈리아 경제의 자급자족을 공동으로 수립하게 된다. 그러나 종국에 이르러서는 각 조합의 경제 회의는 모두 정부로 통합되고 이 회의의 대표는 정부에 의해 임명된다. 뿐만 아니라 1925년에는 파시스트 노조가 노동자의 유일한 대표 기관으로 인정되고 기업가들은 공장 내에서 무제한의 권위를 행사하게 된다.

파시스트는 이후 몇 년 동안 신문을 검열하고, 노조를 해체하고, 선거권을 축소하고, 다른 모든 정당을 해산시키고,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모든 반대 의사 표명을 금지시키고, 정적들을 처벌하기 위해 특별 재판소와 비밀경찰을 만든다.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단일 정당을 통해 국가 기구와 관료들을 완전히 통제하면서 독재 체제를 구축한다.

독일 사회민주당이 노동자계급의 혁명을 배신한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1917년 11월 3일 혁명을 일으키고 노동자·병사 소비에트를 건설한다. 사회민주당의 샤이데만은 11월 9일 공화국을 선포한다. 노동자·병사 평의회는 12월 16일 전국 대회를 열고 기간산업의 사회화,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 해체, 국가 기구의 민주화를 촉구한다.

그런데 바로 하루 전날, 사회민주당 지도부가 독점 자본가 대표들과 만나 비밀 협정을 맺으며 “한 사발의 죽에 혁명을 팔아넘긴다.” 혁명을 마치 단순한 노동쟁의인 것처럼 다룬 것이다. 물론 자본가들은 그 대가로 상당한 양보를 한다. 평상시에는 장기간의 총파업으로도 이룰 수 없는 성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극우파인 아돌프 히틀러는 이를 보고 차갑게 비웃는다. “11월의 권력자들이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는 것을 누가 방해라도 했단 말인가? 그들은 그럴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던 상황과는 아주 다르게 독일 사회민주당은 실제 평의회 의원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 리프크네히트는 이런 급박한 시기에 독립사회민주당이 적절한 행동을 취하지 못하자 12월 30일 독일공산당을 새로 창당한다. 그러나 가장 영향력 있는 좌익 분파였던 혁명적 노조 간부 그룹은 독립사회민주당에 잔류한다. 그리하여 20대의 무정부주의 청년들이 다수를 이루는 ‘국제 공산주의 그룹’이 독일공산당의 주류를 차지하게 된다. 이들은 “우리에게는 1000표의 투표보다 가두에 있는 10명이 훨씬 가치 있다”고 호기롭게 외친다.

바로 이때 독립사회민주당원인 아이호른이 베를린 경찰서장에서 해임되자 베를린의 노동자들이 무작정 반란을 일으킨다. 며칠 사이에 무장한 노동자들이 베를린의 철도역·전화국·가스·수도·전기공장·주요건물들을 점령한다. 혁명은 다른 도시로도 확산된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의 임시 정부는 노스케(사회민주당원)를 내세워 2주일 만에 혁명 운동을 진압한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1919년 1월 15일에 체포되어 살해된다. 노동자·병사 평의회는 해체 당한다. 세계 최대의 독일사회민주당이 1차 세계대전을 찬성한 데 이어 두 번째로 민중을 배신한 것이다.

일주일 뒤인 1월 21일 국민의회 선거가 실시된다. 사회민주당이 1111만 표를 획득하고, 독립사회민주당은 218만 표를 얻는다. 제1정당이 된 사회민주당의 에베르트와 샤이데만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과 수상으로 선출된다. 그렇지만 진정한 승자는 의원수의 54%를 차지한 부르주아 정당들이다. 독일공산당은 이 선거에 불참하고 여름까지 독일 곳곳에서 무장 봉기를 일으키고 실패하기를 반복한다.

노동자들은 3월 3일 ‘노스케·샤이데만·에베르트의 체포, 소련과의 외교 재개,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단행한다. 그러나 1주일도 못되어 노스케와 폰 루트비츠 장군의 군대에게 진압된다. 투쟁의 주요 거점인 뮌헨에서는 노동자들이 5월 1일까지 도시를 장악하고 항전하지만 역시 피비린내 나는 진압을 당한다.

8월 11일 바이마르 헌법이 통과되어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된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동지이자 애인이었으며 그녀의 노선을 계승한 독일공산당의 새 지도자 파울 레비와 스파르타쿠스동맹 출신 지도부는 10월에 당 대회―시간과 장소도 가르쳐주지 않는 편법까지 쓰면서―를 열고 극좌 맹동주의자들을 당에서 쫓아낸다. 10만 7천여 명의 당원 중 절반 이상이 축출된다. 레비는 독일공산당과 독립사회민주당의 재통합을 강력하게 추진한다.

노동자계급이 우익 쿠데타를 총파업으로 막아낸다.

1920년 3월 12일, 볼프강 카프 박사와 폰 루트비츠 장군이 이끄는 세력이 베를린으로 진격하여 도시를 점령하고 왕조를 재건하려는 정부를 세운다.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바이마르정부는 야간에 드레스덴으로 도피한다.

노동자들은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3월 14일 총파업에 들어간다. 자유노동조합―사회민주당을 지지하던 최대 노조연맹―의 주도 아래 기독교 노동조합,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당이 조직한 허시-둔커조합, 심지어 ‘황색’(어용)노조까지도 파업에 가담하여 총 1200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벌인다. 총파업은 독일의 구석구석까지 마비시킨다.

폰 루트비츠 장군이 군대를 동원하여 파업을 분쇄하려 했으나 노동자들은 전혀 위축되지 않는다. 그러자 카프는 3월 17일 스웨덴으로 도피하고 루트비츠는 다음날 장군직에서 물러난다.

그런데도 루르의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령하고 파업을 계속한다. 그리고 3월 22일 정부와 노조간의 협정 체결, 카프 일당 처벌, 특정 산업 즉각 사회화, 반동적인 군사 조직 해체, 노스케의 퇴임을 약속 받고서야 파업을 끝낸다. 총파업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자유노동조합의 칼 레기엔이 사회민주당과 독립사회민주당에 ‘노동자 정부’의 수립을 제안한다. 그러나 두 당의 연정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후 진행된 총선에서 독립사회민주당의 지지율은 18.8%까지 상승한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의 지지율은 1/3이 줄어든다. 그 결과 부르주아 정부가 들어선다.

독일 공산당은 사회민주당 좌파와 공동 전선을 형성한다.

독일공산당은 10월에 독립사회민주당과 합당(당원 45만 명)한다. 코민테른에 가입한 정당으로서는 서유럽 최대의 대중 정당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름은 독일공산당을 그대로 계승한다.

독일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시로 1921년 3월 만스펠드 광산에서 다시 봉기를 감행한다. 그러나 역시 실패로 끝난다. 이 여파로 당의 지역 조직들이 파괴되고 당원은 절반으로 줄어든다. 레비는 ‘폭동주의에 반대하는 우리의 노선’이라는 문건을 통해 코민테른을 격렬히 비판한다. 그리고 사회민주당 지도부에 공세적인 투쟁을 제안하고 기층 당원들과 적극적으로 공동 투쟁을 전개하여 지도부에 비판적인 사회민주당 당원들을 견인하자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레비는 당에서 쫓겨난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1년 뒤에 당의 정식 노선으로 채택된다. 코민테른이 1922년 11월 4차 대회에서 파시즘의 대두에 대항하여 ‘노동자계급의 통일 전선’을 전술로 결정한 것이다. 독일공산당은 자유주의자인 라테나우 외무상이 극우파에 의해 암살당하자 파시즘 반대 시위운동을 주도한다. 그리고 사회민주당 노동자들과 함께 공장 평의회 건설 운동을 전개한다. 이때는 살인적 인플레이션이 막 절정으로 치닫던 상황이라 정세는 1923년에 혁명 전야로까지 발전한다. 공산당과 사회민주당 좌파는 작센 주와 튀링겐 주에서 연립 정부를 수립한다. 그러나 부르주아 연방 정부가 불법 군사 행동으로 이 연립 정부를 무너뜨린다. 그렇지만 공산당은 1924년 총선에서 12.6%의 지지율을 획득하며 운동의 성과를 유지한다. 공산당은 1926년 구 독일제국 군주 재산을 몰수하는 데에 대한 국민 투표를 제안하면서 사회민주당과 공동 전선 전술을 펼쳐 1500만 표의 찬성을 얻어낸다. 이처럼 통일 전선 전술은 사회주의 세력이 약진하는 발판이 된다.

이러한 성과를 기반으로 사회민주당은 1928년 총선에서 “학교 급식이냐 군함이냐”는 공격적인 구호를 내걸어 모처럼 다수 의석을 확보하고 다시 연정을 이끌게 된다. 그러나 막상 군함 건조 예산안이 논의되자 우파 정당들과 협력해야 한다며 ‘학교 급식이 아니라 군함’을 선택한다. 더 나아가 사회민주당이 연정을 이끄는 프로이센 주 정부는 1929년 일체의 시위를 금지한다는 명목으로 공산당의 메이데이 기념 시위를 탄압하여 33명의 ‘형제’를 살해하는 참극을 빚기까지 한다. 이는 사회민주당을 공격하는 당 지도부의 극좌적 전술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바라보던 의식 있는 공산당 당원들까지 사회민주당을 증오하도록 만든다.

이처럼 사회민주당은 두 번째로 권력에 오른 시점에서 노쇠 현상을 보인다. 사회민주당의 당원은 80~100만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고령화가 심해 40세 미만의 의원은 10%, 25세 이하 당원은 8%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는 의원의 60%가 40세 미만이었던 나치나 당원의 1/3이 20대였던 공산당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는 별 인기를 끌지 못한다.

히틀러는 어린 시절 고아가 되어 비엔나에서 무명 화가로 궁핍한 시절을 보낸다. 여기서 비엔나의 풍경인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과 유태계 지식인, 맑스주의(국제주의)에 탐닉한 노동자들에 대해 증오감을 갖게 된다. 그 후 남부 독일 바바리아로 옮겨가 그림물감을 팔며 연명하다가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독일 군대에 입대하여 피 끓는 민족주의에서 숭고함과 해방감, 생의 의미를 확인한다.

전쟁이 끝나고 1919년 11월 혁명기에 바바리아에서 소비에트 공화국이 수립된다. 수다한 경향의 비밀 정치 조직들이 들끓는 바라리아에서 히틀러는 독일노동당에 일곱 번째 당원으로 가입한다. 이 당은 1920년에 ‘국가사회주의노동당’으로 개칭된다. 나치(Nazi)는 ‘국가적(National)''의 앞 글자와 ‘사회주의(Sozialismus)’의 중간 글자 둘을 합한 용어다.

1923년 프랑스군이 ‘전쟁 배상금 지불 불이행’에 대한 보복 조치로 독일 공업의 심장부인 루르 지방을 점령하자 이미 상당한 추종자를 확보한 국가사회주의자들은 굴욕적인 항복을 한 바이마르 정부를 격렬하게 비판한다. 히틀러는 1년 전에 있었던 무솔리니의 로마 진격을 모방하여 나치 행동대인 ‘갈색셔츠단’을 이끌고 뮌헨의 ‘비어홀’(맥주 집) 무대에 뛰어올라가 권총을 발사하면서 ‘국가 혁명의 발발’을 선포한다.

그러나 이 폭동은 한판의 우스갯거리로 끝나고 히틀러는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는다. 히틀러는 복역 기간 중 인종주의·민족주의·집산주의·역사이론·정치평론이 뒤범벅된 [나의 투쟁]을 출간한다. 무능한 바이마르 정부는 ‘관대하게도’ 1년도 못되어 히틀러를 석방한다.

한편 프랑스군이 루르 점령 지역에서 철수하고 미국의 차관이 들어오면서 독일의 경제는 급속히 부흥한다. 그러자 국가사회주의는 호소력을 잃고 히틀러는 ‘정신이상자’로 취급받는다. 이런 상황은 1929년 대공황이 독일을 강타하고서야 변화된다.

히틀러가 경제 대공황의 혼란을 타고 권력을 잡는다.

1929년 11월 뉴욕 주식 시장의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하면서 미국은 유럽에 대부했던 단기 차관을 회수하기 시작한다. 독일 경제는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하고 이에 따라 파시즘이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나치는 1930년 12월 총선에서 12석이던 의석을 107석으로 늘리며 제2당으로 급부상한다. 반면에 공산당도 기존 의석에 23석을 추가한다.

그러자 독일의 정치 상황에 대해 불안을 느낀 외국 자본들이 서둘러 독일에서 철수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차관에 상당한 정도로 의존해 있던 독일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수많은 공장이 문을 닫고 실업자는 1932년 1월 전체 국민의 1/5인 600만에 육박한다. 1929년에 135억 마르크에 이르던 대외 무역은 1932년에 57억으로 감소한다.

사회민주당은 불행하게도 재집권한 지 1년 만에 터진 대공황에 대해 속수무책으로 무능력을 드러낸다. 공산당은 “나치가 집권해 부르주아 정당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싹쓸이하면 권력은 이제 우리 차례”라며 사회민주당의 무능력에 대해 사정없이 비판하고 나치당과는 거리에서 사실상 내전과 같은 투쟁을 전개한다.

공산당은 1932년에 당원 중 실업자가 85%에 이르게 되면서 노동 현장과 동떨어진 가두 정당으로 변해간다. 나치는 모든 혼란의 책임을 사회주의자들에게 전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점세력·토지투기업자·고리대금업자·불로소득·과세불평등에 대해 맹렬히 비난한다. 나치는 모든 선전 수단을 동원하여 불안과 공포에 질려있는 대중들의 감정을 격앙시키고 반유태주의를 부추기면서 혁명에 대해 공포감을 가지고 있는 중산층뿐만 아니라 유태인 자본가를 증오하는 노동자들까지 끌어들인다.

나치는 1932년 4월 총선에서 230석을 획득하면서 과반수는 넘지 못했지만 최대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된다. 나치당의 득표수는 1928년 80만 표에서 1932년 1341만 표로 증가한다. 공산당도 498만 표를 얻어 100석이라는 사상 최대 의석을 확보한다. 사회민주당은 노조의 지지를 기반으로 800만 표 이상을 획득한다. 독일민주당이나 독일통합국민당과 같은 중도파나 우파 정당들은 지지 기반을 상실한다. 이러한 선거 결과는 중간 계층이 공산당의 세력 확대에 불안을 느끼고 파시즘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사회민주당이 자신들을 따르는 노조를 총동원하여 히틀러보다 ‘비교적 덜 사악’하다고 생각되는 지난날의 반동 힌덴부르그 장군을 지지하여 당선시킨다. 힌덴부르그 대통령은 5월에 군부 실권자인 슐라이허 장군의 지원을 받는 파펜을 수상으로 임명한다. 그런데 파펜은 7월 20일 군대를 동원하여 사회민주당의 거점인 프로이센 주 정부를 해산시킨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은 열흘 뒤의 주 총선에서 심판하면 된다며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다. 공산당이 호소한 총파업은 공산당의 노동 현장 기반이 취약하여 공문구에 그친다. 나치당 베를린 지부장 괴벨스는 “붉은 무리들은 그들의 호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그 시간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조롱한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1933년 1월 10일 나치 당수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한다. 히틀러는 다른 정당과 권력을 나누어 갖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집권 즉시 국회의원 재선거를 준비한다. 히틀러는 2월 1일 제국의회를 해산하고 2월 4일에는 언론과 의사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신문과 집회를 금지하는 긴급조치를 발표한다. 공교롭게도 투표 1주일 전인 2월 27일 밤에 제국의사당 방화 사건이 발생하는데 나치는 이 사건을 빌미로―공산주의자의 소행이라며―한 달 사이에 1만 명을 체포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돌격대(SA: Sturmabteilung)나 친위대(SS: Schutzstaffel)가 운영하는 강제수용소로 보낸다. 그래놓고도 나치는 43.9%밖에 얻지 못해 독립국민당과 연립 내각을 구성해서야 간신히 과반수를 넘는 52%를 확보한다. 그러나 히틀러는 공산당 출신 의원들이 제거된 약해빠진 의회로부터 독재권을 부여받고 이어서 자신이 수립한 새 체제를 제1제국(신성 로마제국)과 제2제국(비스마르크가 창건한 호엔촐레른 제국)을 계승한 제3제국으로 명명한다.

나치스 정권은 노동자 조직을 어용 기관으로 만든다.

라이파르트가 이끄는 노동총동맹의 기관지는 4월 29일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메이데이를 환영하는 논문을 발표하고 노동자들에게 나치의 경축일에 참가하라고 호소한다. 라이파르트는 이탈리아 유형(파시즘)에 따라 노조를 재조직하는 일에 응하겠다고 성명을 발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 돌격대원들은 5월 2일 전국에서 노조 사무소를 습격하여 지도자들을 모두 체포한다. 나치당의 레이 박사는 5월 11일 노동자 조직인 ‘노동전선’을 결성하고 자신이 대표로 앉는다. 정부는 5월 13일 노조의 재산을 전부 몰수한다.

수백만의 세력을 가진 노조는 단 한 번의 투쟁조차 조직하지 못하고 참담하게 패퇴한다. 대부분 노조 지도자였던 사회민주당의 국회의원단은 5월 17일 파시스트 정부의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짐으로써 노예처럼 굴종한다. 그런데도 나치는 6월 23일 사회민주당을 폐쇄하고 최고 지도자들을 체포한다. 그래도 저항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잔혹하게 탄압한다. 사회주의적·혁명적 성향을 지닌 ‘나치당 초기 대중 운동 지도자들’도 1934년 반체제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나치는 1934년 6월 노동전선을 노동자, 고용된 봉급자, 직인, 그리고 자본가까지 포함하여 4개 부분으로 이루어지는 조직으로 재편성하고 노동자계급을 ‘원자화’하는 일에 착수한다. 노동전선은 2700만 명의 의무 가맹자를 갖고 있지만 단체협약을 체결할 권한도 없고 파업도 금지된다. 노동전선 내에서 노동자들은 ‘경영 지도자’로 불리는 기업가들에 종속된다. 노동자들은 꼭 소지해야 하는 ‘노동 수첩’을 통해 통제되면서 순종을 강요받고 많은 분야에서 직업이나 공장을 바꾸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히틀러가 전쟁 준비를 위해 군수 생산 증강에 박차를 가하면서 노동 시간은 점차 연장되고 실질 임금은 격감한다. 1939년에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 노동자의 생활수준은 1/3 정도 하락한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공포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만족하면서 살아간다. 1936년 올림픽 경기가 열린 베를린을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독일은 ‘권위적인 지배 아래 있지만 대다수의 국민이 만족하면서 살고 있는 나라’로 비쳐진다. 나치 정부는 ‘기쁨을 얻는 힘’이라는 대규모의 국영 오락 기관을 만들어 다채로운 연극 프로그램에서부터 대중 바캉스에 이르기까지 대중의 여가 생활을 조장한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39년까지 총 3900만 명이 이 기관을 통하여 주말여행이나 해외여행의 혜택을 누린다. 특히 나치가 박차를 가한 대중 바캉스 붐은 오늘날까지 유럽 노동자 생활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남는다.

히틀러는 민중의 수상을 자처하면서 “나도 어린 시절에는 여러분과 같은 노동자였음”을 강조한다. 나치는 ‘나치 청소년 운동’을 통해 각급 학교와 대학의 자라나는 세대를 나치 이데올로기로 무장시킨다. 그리고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을 당시에는 실업자가 600만 명이었으나 1938년부터는 노동력이 부족해진다.

프랑스에서는 공산당이 창당되어 사회당과 노동총동맹의 조직이 분리된다.

프랑스에서는 1916년부터 반전 파업과 군대 내의 항명 폭동이 빈발한다. 이러한 급진적 분위기는 1918년 11월에 전쟁이 끝나자 곧바로 사회당의 당세 신장과 노동총동맹의 조합원 증가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사회당은 1919년에는 종전 후 처음 입당한 청년 당원들이 3/4을 차지하게 되고 11월 총선에서는 득표율이 기존의 17%에서 21%로 성장한다. 하지만 새로 도입된 결선 투표에서 보수파와 자유주의자들이 연합하는 바람에 의석은 오히려 102석에서 68석으로 줄어든다.

철도 노동자들은 1920년 5월 1일 철도 ‘국유화’를 요구하며 총파업을 전개한다. 금속·건축·소매업·운수·부두·광부·가스 노동자들은 노동총동맹의 계획에 따라 10일 동안 ‘3회 연속 파업’으로 철도 노동자의 투쟁을 지원한다. 그러나 이 연대 파업은 초기에 좌익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지도부의 준비 부족으로 효과적으로 전개되지 못하다가 5월 22일 무조건 취소된다. 이 영향으로 1912년 40만에서 1918년 120만, 1919년 말 200만으로 증가하던 노동총동맹의 조합원 수는 파업 철회 후 1년도 못되어 조합원의 2/3 이상이 탈퇴하여 60만으로 감소한다.

사회당은 1920년 12월 당 대회에서 대의원의 68.7%의 찬성으로 코민테른 가입을 결정한다. 그리고 다음해 5월 프랑스 공산당―정식명칭은 ‘공산주의인터내셔널 프랑스지부’―으로 당명을 바꾼다. 그러나 당 대회 소수파는 사회당이라는 이름으로 잔류하고 68명의 의원 중 55명이 사회당을 선택한다.

이에 따라 노조 운동도 분열된다. 공산당은 1922년 사회당과 가까운 노동총동맹에서 분리하여 새로운 노총인 통일노동총동맹을 창립한다. 공산당과 통일노동총동맹은 1927년 ‘프랑스의 모로코 개입 전쟁’에 반대하여 총파업을 주도한다. 보수파 정부의 혹독한 탄압을 받아오던 공산당은 이 총파업 때문에 심지어 의원들까지 면책 특권을 박탈당하고 구속된다.

그렇지만 공산당은 신흥 금속 산업의 노동자, 파리 교외의 노동자 밀집 지역, 북부 산업 지대에서 확고한 지지 기반을 마련하여 이들 지역에서 지자체를 장악하고 1920년대 말에는 총선에서 100만 표 가까이 득표할 정도로 성장한다. 그러나 결선 투표 때문에 의원 수는 최대 14명을 넘지 못한다. 반면에 사회당은 전통적 소규모 산업 노동자들에게 지지를 얻으며 150~200만 표 정도를 획득하지만 결선 투표에서 중도 우파인 급진사회당과 곧잘 선거 연합을 펼치면서 공산당보다 훨씬 많은 의석을 얻는다.

통일 전선으로 인민전선 정부가 창출되고 노동자 운동이 급성장한다.

프랑스에서는 대공황이 뒤늦게 찾아와서 더 오래 지속된다. 프랑스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금융계의 큰손들이 금융 자산 가치를 보장하는 금본위제와 디플레이션 정책을 고집하는 바람에 공황이 더 악화된 탓이다. 이런 상황을 타고 ‘불의 십자가''와 같은 극우 단체들이 급격히 대두한다. 유대인 금융사기꾼 스타비스키가 자살한 의문의 사건(1933년 말)에 급진사회당의 고위 정치인들이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자 의회는 1934년 2월 6일 급진사회당 정부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킨다. 극우파들은 바로 이날을 의회 정치를 전복하고 파시스트 체제를 수립할 호기로 보고 대규모 시위를 전개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탈리아와 독일의 경험을 통해 파시스트 정부의 수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노동자 2만 5천 명이 누구의 명령이랄 것도 없이 당일 즉시 거리로 쏟아져 나와 극우파 시위대와 맞붙어 싸우기 시작한다. 2월 12일에는 노동총동맹과 통일노동총동맹이 함께 24시간 총파업을 벌이면서 450만 노동자가 작업장을 나와 시위에 참여한다. 이처럼 먼저 행동에 나선 대중들은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반파쇼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연일 시위를 전개하면서 사회당과 공산당에게 반파쇼 통일 전선을 구성하라고 촉구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공산당 당원이 급증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사실 공산당은 1930년에 토레즈가 사무총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당내 극좌파를 숙청하고 1932년 암스테르담 반전 국제 대회, 1933년 플레이엘 홀의 반파쇼 유럽 대회 등을 통해 아래로부터 사회당과의 교류를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2년 코민테른 4차 대회의 공동 전선 전술을 폐기하고 사회민주주의를 ‘사회파시즘’으로 규정하고 맹공격한다는 1928년 코민테른 6차 대회의 결정이 발목을 붙잡고 있어서 공산당은 대중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사회당과의 공동 행동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지 못한다. 그러나 1934년 7월 코민테른 13차 집행위원회 간부 회의는 불가리아 출신의 새로운 지도자 디미트로프의 강력한 주창으로 공동 전선 전술을 채택한다. 물론 여기에는 스탈린이 히틀러의 독일과 맞서 싸우기 위해 프랑스를 동맹국으로 필요로 하고 있던 상황도 작용한다. 아무튼 이에 따라 프랑스 공산당과 사회당이 7월 27일 역사적인 행동 통일 협정에 서명한다. 공산당 사무총장 토레즈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10월 9일 처음으로 급진사회당과의 협력을 주장하면서 ‘빵과 자유와 평화를 위한 인민 전선’을 제시한다. 노동자계급의 통일을 넘어 중간층을 포함하는 계급 연합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좌파 공동 전선과 급진사회당은 1935년 5월 지방 선거에서 곳곳에서 암묵적인 선거 연합을 맺어 승리를 거둔다. 전통적으로 보수 우파의 아성이었던 파리의 대학가 라탱구에서도 반파쇼투쟁위원회 활동가인 폴 리베 교수가 당선된다. 이는 프랑스에서 우파의 중요한 사회적 기반이었던 지식인·대학생들이 좌파로 대거 이동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이런 성과를 기반으로 한 달 뒤인 6월에 급진사회당·사회당·공산당이 어렵사리 선거 강령에 합의한다. 더구나 급진사회당 내 청년터키파가 7월 14일 대혁명 기념일에 깃발을 들고 좌파의 시위에 합류함으로써 이 날은 반파시즘 인민 전선이 시작된 날로 역사에 기록된다. 8월에는 코민테른이 7차 세계 대회를 통해 반파시즘 인민 전선을 코민테른의 공식 노선으로 확정하고 그 동안 사회민주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으로 분열되었던 노조 운동의 통일과 노동자계급 단일 정당 건설까지 주창하고 나선다.

노동총동맹과 통일노동총동맹은 성공적인 공동 총파업(1934년)의 기세를 몰아 1936년 3월 툴루즈에서 개최한 전국 노조 대회에서 통합을 달성한다. 대회는 노동자계급이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의견을 갖는 것은 묵인하지만 총동맹 내부에서 정치적 분파를 형성하는 것은 금지하기로 결정한다. 통합된 노동총동맹의 강령은 ‘기간산업과 신용 기관의 국유화’와 ‘최고 경제 회의에서의 계획적인 생산과 분배’를 명시한다.

1936년 4월 총선에서는 라디오 방송을 국정 홍보 수단으로 사용한 미국의 루즈벨트 민주당 정부의 영향으로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라디오 방송 연설이 도입된다. 이에 따라 “파시즘의 뒤에는 금융계와 산업계를 좌지우지하는 200대 가문이 있습니다. 200대 가문을 타도합시다!”라는 공산당 사무총장 토레즈의 힘찬 발언이 전파를 타고 전국의 가정에 전달된다. 선거 결과 196만 표를 얻은 사회당의 의석은 97석에서 146석으로 증가하고 150만 표를 얻은 공산당의 의석은 10석에서 72석으로 증가한다. 반면에 142만 표를 얻은 급진사회당은 158석에서 116석으로 42석이나 상실한다. 그 동안 중도 우파 급진사회당을 지지한 유권자의 상당수가 사회당으로 이동하고 노동자들의 표가 공산당으로 집중되면서 프랑스 사회 전체가 왼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이때부터 “프랑스 지식인은 좌파 편이다”라는 말이 상식으로 자리 잡는다. 공산당 당원 수는 1931년 3만 명에서 1937년 34만 명으로까지 급증한다. 어쨌든 전체로는 공산당·사회당·급진사회당·(통합)노동총동맹이 결집한 인민전선이 367석을 획득해 원내 다수파가 된다. 군소 정당인 공산당이 통일 전선을 추진하여 정치판 전체를 바꿔놓은 것이다.

선거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5월 11일, 지방 도시 르 아브르의 브레게 비행기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간다. 그런데도 경찰이 출동하지 않자 노동자들은 정권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몸으로 실감한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이 ‘기회’가 아닌가! 우리의 권리와 존엄성을 되찾을 기회! 이에 따라 노동자들의 투쟁은 5~6월에 프랑스 전역에서 무서운 기세로 발전한다. 5월 24일 파리코뮌 기념일에는 파리에 60만 노동자가 집결한다. 투쟁 소식이 시위 노동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노동자들은 이웃 공장의 정보를 듣기 위해 좌파 지자체 사무실을 찾아들고 공산당의 공장 세포들은 자발적으로 파업 선동에 나서기 시작한다. 5월 26일 파리 근교에 있는 뉴폴 비행기 공장에서 처음으로 공장 점거 파업이 시작된다. 이틀 뒤에는 프랑스 산업의 중추인 르노 자동차 공장에서 3만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고 작업장을 점거한다. 6월 첫째 주까지 파업 대오는 수백만으로 늘어나고 금속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사무직·서비스직 노동자들까지 가세한다. 노동자들이 점거한 공장은 비장함이 아니라 해방감에 들뜬 축제의 분위기가 만발한다.

이런 와중에 출범(6월 4일)한 블룸 인민전선 내각은 바로 다음날 파업 대표자들과 파리 마티뇽 호텔에서 협상을 벌인다. 그 결과 임금 7~15% 인상, 모든 노동자가 노조에 가입할 권리, (처음으로 실시되는) 산업별 단체 교섭, 직장 위원(산업별 노조의 작업장별 대표) 제도의 확립을 약속하는 ‘마티뇽 협정’이 체결된다. 이에 인민전선 정부는 프랑스은행·철도·군수공업을 서둘러 국유화한다. 의회는 40시간 노동과 유급 휴가 등의 노동법안을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며칠 만에 통과시킨다.

하지만 파업 노동자들은 이 정도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나아갈 것을 요구한다. 반면에 급진사회당 출신 장관들은 군대의 동원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공산당 사무총장 토레즈가 6월 11일 집회에서 “파업을 끝내는 법도 알아야 한다”고 외친다. 여러 곳에서 격론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토레즈의 호소는 파업의 종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다음날 금속 노조가 자본가들과 협상을 체결한다. 그 다음날은 르노의 2만 노동자가 블룸과 토레즈의 사진, 당 깃발을 들고 공장에서 나와 노동자 주거 지역을 행진한다. 이 여름 동안에 노동총동맹 가입자는 100만에서 530만으로 늘어나고 단체 협약은 1936년 29건에서 1938년 3월 5700건으로 급증한다.

자본가들은 자본 해외 유출로 반격을 가하며 인민전선 정부를 내려 앉힌다.

그러나 승리의 분위기는 오래 가지 못한다. 국경을 접하고 있는 스페인에서 작년에 집권한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에 대해 프랑코가 7월에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블룸 정부가 일찌감치 시련에 닥친 것이다. 영국과의 동맹을 히틀러의 독일에 대항할 유일한 방안으로 보고 있던 블룸 정부는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면 동맹 관계를 끊겠다는 영국 보수당 정부의 협박에 굴복하여 7월 25일 무기 수출 금지를 선포한다. 이로써 이웃 나라 파시스트들의 기선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 반면에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은 프랑코의 반군에게 무기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7월 31일 장 조레스 추모 대회에서 블룸의 면전에 대고 “스페인에 비행기를!”이라고 외친다. 뜻있는 노동자들은 처음 얻은 여름 유급 휴가를 스페인 정부를 지원하는 국제여단 활동에 바친다. 그리고 공산당은 하부 집회에서 선출된 대표들이 참여하는 인민전선 전국 대회를 개최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 중요한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인민전선은 상층에서의 단순한 협정에 머문다. 이처럼 인민전선 정부의 개혁을 추동하고 감시할 힘을 만들어내지 못함으로써 총선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후 선거 강령의 대부분이 사문화되어 버린다.

자본가들은 자본을 해외로 유출하며 블룸 정부에 압력을 가한다. 그러나 블룸 정부는 연립 정부 파트너인 급진사회당의 반대 때문에 선거 강령에 명시되어 있는 ‘자본 유출에 대한 통제’를 단행하지 못한다. 그리고 무역 수지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프랑화 평가절하를 실시하고 인상된 임금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방지하기 위해 물가 연동 임금제를 도입하려 하지만 상원의 반대로 무산된다. 이처럼 좌파가 다수인 하원에서의 결정은 우파들이 장악하고 있는 상원에서 번번이 발목을 잡힌다. 그러더니 10월에는 공장 점거 노동자들에 대해 최초로 경찰력을 동원하고 1937년 1월에는 잠정적으로 개혁을 중단한다고 선언한다.

이때부터 극우파 ‘불의 십자가’가 프랑스사회당―여기서 ‘사회’는 ‘사회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이라는 합법 정당을 만들어 활동을 재개한다. 3월 16일 파리 외곽의 클리시에서 이 프랑스사회당 시위대와 클리시 인민전선 위원회 소속 노동자들이 충돌하고 경찰 발포로 6명의 노동자가 사망한다. 이틀 뒤 숨진 노동자들을 기리는 장례 집회에는 100만이 넘는 노동자들이 참여한다. 그 관속에는 인민 전선 정부에 건 희망과 기대 또한 누워 있었다.

6월에 자본 유출이 6백억 프랑에 달하자 블룸은 정부에 강력한 외환 통제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제출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상원이 거부하고 나선다. 결국 블룸은 6월 20일 수상 자리에서 물러난다. 자유주의 부르주아 세력까지 포괄했던 인민전선 정부는 이렇게 1년 만에 내려앉는다. 이후에도 인민전선 자체는 유지되지만 급진사회당이 주도하게 된 새 정부는 어떤 진보 정책도 시행하지 않는다. 1938년 3월 잠시 2차 블룸 내각이 시도되지만 단 3주 만에 다시 실각한다. 이 때는 이미 인민전선 정부를 지탱해줄 노동자계급의 힘이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헤게모니를 되찾은 부르주아 세력은 이제 “블룸보다는 히틀러가 낫다”며 공공연하게 외치고 다닌다.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는 쿠데타에 무너진다.

스페인에서는 1931년에 공화국이 수립된다. 공산당·사회당·무정부생디칼리즘·농민·민족주의자·가톨릭교도·자유주의자로 구성된 민주주의 세력은 1936년 2월 총선에서 253석의 의석을 차지하면서 압도적으로 승리한다. 로블레스가 이끄는 반동 세력은 153석을 얻는 데 그친다.

공산당은 정부기관·군대·경찰·공장·은행·학교 등에서 반동 세력을 조속히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회당과 자유주의자들은 그러한 혁명적 방책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자 파시스트들은 자유롭게 반동 책동을 일삼는다. 결국 프랑코 장군이 1936년 7월 모로코에서 폭동을 일으키면서 내전이 시작된다.

공산당과 사회당은 그때서야 공동 행동 강령에 합의하고 파시즘 반대 투쟁을 공동으로 전개한다. 무정부 생디칼리즘 경향의 전국노동자연맹(170만)과 사회민주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지도하는 노조총동맹(190만)도 반파시즘 투쟁에 앞장선다. 그리고 프랑스·이탈리아·독일·폴란드·영국·캐나다·미국 등 세계에서 자원한 의용병들(국제여단)이 파시즘의 반동으로부터 스페인의 인민전선 정부를 구하기 위해 몰려온다. 스페인 내전은 민주 세력과 파시즘 세력간의 ‘전쟁’으로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인민전선 정부는 스페인 노동자·민중의 영웅적인 투쟁과 자발적인 세계 민중의 광범한 연대 투쟁에 힘입어 1938년 3월 내전에서 ‘일단’ 승리한다. 그러나 프랑코 군대는 히틀러와 무솔리니로부터 다량의 군대와 군수 물자를 원조 받으며 다시 반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반면에 인민전선 정부는 지도부가 분열―공산당(스탈린주의)은 무정부주의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킨다―되면서 점점 열세에 놓인다. 결국 1939년 3월 마드리드가 함락된다.

프랑코는 팔랑헤당(Falangist Party)을 기초로 파시즘 제도 건설에 착수한다. 프랑코는 23개의 산별노조로 노조전국대표자회의를 구성하고 여기에 노동자와 자본가를 함께 참가시킨다. 조합원은 의무 가입으로 1천만 명에 달한다. 프랑코는 각급 조합의 고위 간부를 직접 임명하고 조합을 허가 없이 조직하면 소요죄로 취급하여 무거운 금고형에 처한다.

불법화된 노조총동맹과 전국노동자연맹은 상당한 기간을 거쳐 기간 조직을 재건하고 지하활동을 전개한다. 그리하여 소극적이지만 저항 운동이 크게 발전하고 공공연한 저항에 대해서는 잔인한 형벌이 부과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파업이 일어난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완만한 혁명’은 완만하게 좌절한다.

오스트리아는 1918년 11월 공화국을 수립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주요 산업 기지가 있는 슬라브어권 지역들이 따로 독립해나가고 이에 따라 기존의 제국 군대도 철저히 해체되는 바람에 극도의 혼란에 빠진다. 이런 상황에서 병사 평의회 집행위원회가 군을 장악한다. 사회민주노동당은 ‘반전의 상징’인 아들러의 후광을 배경으로 노동자계급을 하나로 단결시킨다. 노동자 평의회는 계속 유지된다.

그런데도 사회민주노동당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지 않고 민주공화국에서 멈춘다. 농촌 지역이 여전히 우파인 기독교사회당에 장악되어 있고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유럽의 한 가운데에 자리 잡은 작은 나라여서 연합국이 무력으로 개입하거나 식량과 자원을 끊기만 해도 쉽게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국제 사회주의 혁명 없이 오스트리아의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하며 민주공화국 안에서 급진 개혁을 추진해나가는 게 최상책이라는 판단에서다. (반면에 볼셰비키는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결론은 ‘일국 혁명으로 세계 혁명을 촉진한다’는 관점에서 러시아 혁명을 수행했다.)

사회민주노동당은 1919년 2월 처음으로 실시된 총선에서 총 159석 중 69석을 차지하면서 제1당이 되어 좌우연정을 주도한다. 렌너가 초대 수상이 되고 바우어는 외무상을, 율리우스 도이치는 국방상을 맡는다. 정부는 소국으로서의 한계를 돌파하는 방편으로 독일과의 통일을 추진한다. 하지만 연합국의 반대로 무산된다.

그러자 사회민주노동당은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계획적인 조직 활동’이 노동 현장과 지역 사회에서 굳건히 자리잡아나가야 한다며 “완만한 혁명”의 장도(長途)에 나선다. 바우어는 사회화위원회를 만들어 공동 소유와 이윤 분배를 추진하는데 헝가리에서 혁명이 진행되고 있던 때라 우파도 이에 동조한다.

하지만 1920년 3월에 헝가리 혁명이 진압되자마자 우파는 사회화위원회를 무력화시킨다. 노동자 평의회는 권력 기관으로서의 역할이 계속 축소되다가 선진 노동자 투쟁 조직인 ‘공화국 방어동맹’으로 재편된다.
우파들의 반발로 좌우연정은 6월에 깨지고 기독교사회당이 10월 총선에서 제1당으로 부상하여 우파연정이 들어선다. 우파 정권은 집권하자마자 국가기구·경찰·군대를 우경화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게다가 ‘향토방위단’이라는 파시스트 정당이 농촌을 거점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사회민주노동당은 지방 정부에서 개혁을 계속 추진한다. 특히 비엔나에서는 ‘붉은 비엔나’, ‘비엔나의 기적’이라는 말들이 널리 회자될 정도로 놀라운 성과를 거둔다. 그 결과 비엔나 시민 200만 명 중 50만 명이 사회민주노동당에 ‘당비를 내는’ 당원이 되고 비엔나 유권자의 2/3가 사회민주노동당을 지지한다. 전국적으로도 1923년 총선부터 지지도가 다시 상승하기 시작하여 1927년 총선에서는 42%를 획득한다. 하지만 사회민주노동당을 제외한 모든 부르주아 정치 세력이 총 단결하는 바람에 여전히 권력에서 소외된다.

이런 대치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먼저 파시즘 반대 투쟁에 나선다. 3명의 파시스트가 사회민주노동당 집회장을 습격하여 1명의 병약자와 1명의 어린이를 살해한 샤텐도르프 사건에 대한 재판이 열리는 7월 14일, 비엔나의 노동자 대중이 당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총파업을 전개하고 수만 명의 파업 대오가 보수적인 사법부를 압박하기 위해 대법원 건물 앞에서 시위를 벌인 것이다. 그런데 우파 정부가 시위대에 발포를 명령하여 86명의 노동자가 사망한다. 그러나 사회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의사당 건물에서 이 참극을 목격하고서도 ‘방어동맹’에 어떠한 반격 명령도 내리지 않고 단지 ‘화해 정부’(대연정)을 구성해서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만 한다.

그러나 기독교사회당 우파는 ‘방어적 폭력’―사회민주노동당이 1926년 린츠 당 대회에서 채택한 전술―이 얼마나 ‘방어적’인지를 이미 확인한 터라 대연정 구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더 나아가 향토방위단과 함께 파시스트 정권을 수립하려는 행보를 드러내놓고 진행한다.

반면에 무장 반격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던 방어동맹의 8만 선진 노동자들은 D-데이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다가 오히려 일상 투쟁에서 괴리된다. 또한 1929년 세계 대공황이 오스트리아에 불어 닥치면서 노조원 수는 1920년의 절반 수준으로 감소한다. 그런데 사회민주노동당은 긴축 재정을 실시하라는 국제 자본의 요구에 손을 들어주는 등 원내에서도 여전히 소극적 태도로 일관한다. 그러자 사회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의 관심과 열의도 점차 식어간다.

돌푸스 수상의 기독교사회당 정부는 1933년 3월 의회를 해산하고 공산당과 방어동맹을 불법화한다. 이 지경까지 이르러서도 원내 1당인 사회민주노동당은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않는다. ‘보다 극악한’ 오스트리아 나치당과 대결하기 위해서는 ‘덜 사악한’ 기독교사회당의 조치를 묵인할 수도 있다는 당 지도부의 판단 때문이다. 사회민주노동당은 9월 당 대회에서 “파시스트 헌법의 강행, 당 해산, 노조 해산, 비엔나 시청 점령 등의 4개 조건” 중 하나가 감행될 때만 무장 반격에 나선다는 결정을 내린다. 후에 바우어는 “3월에 총파업과 원외 투쟁으로 맞섰어야 했다”고 통렬하게 자기비판 한다.

다음해 1934년 2월 프랑스에서마저도 파시스트가 파리의 거리를 점거하자 기독교사회당 정부는 3월 12일 바우어의 국외 추방과 방어동맹 간부의 일제 검거를 명령한다. 이에 빈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고 총파업이 선포된다. 파업은 파시스트 부대의 무력 공격을 받고 폭동으로 변하고 각지에서 방어동맹이 산발로 봉기한다. 4일 동안 벌어진 내전에서 노동자들은 용감하게 투쟁하다가 1200명이 사망하고 2만 명이 투옥된다. 사회민주노동당은 불법화되고 지도자들은 망명한다.

한편 오스트리아와 하나의 제국을 이루고 있던 헝가리에서는 1918년 10월에 합스부르크 왕조가 전복되자 12월에 공산주의자들이 공산당을 창당한다. 공산당은 사회주의 정당들과 연합하여 사회당을 만들고 1919년 3월 21일 노조(72만 명)의 힘을 기반으로 카롤라이 부르주아 정부를 붕괴시키고 노동자 정부를 수립한다. 공산당 지도자 벨라 쿤은 새 정부의 수상이 된다. 그러나 내부 갈등으로 8월에 쿤 정부가 물러나고 사회민주주의 정부가 뒤를 잇는다. 그러나 이 정부도 반동적인 루마니아·체코슬로바키아·프랑스 군대의 연합 공격으로 붕괴된다.

영국 노동자들의 총파업은 노동당 정부와 노조 지도부에게 배신당한다.

클라이드 조선 노동자들이 1919년 1월 전후 최초로 파업을 일으켜 승리를 쟁취한다. 9월엔 철도 노동자들이 단기간 파업으로 승리를 쟁취한다. 곧 이어 10월 중순에 100만의 탄광 광부들이 임금 인상과 탄광 국유화를 요구하면서 전국 파업에 들어간다. 그런데 지원 요청을 받은 ‘삼각동맹’의 운수·철도 노조의 지도부는 약속한 파업 날짜를 두 번씩이나 미루더니 광부들이 안정을 되찾았다는 거짓 구실로 투쟁 계획 전체를 취소한다. 그 결과 광부들만 13주 동안이나 외롭게 투쟁한다.

1914년 100만, 1919년 650만, 1920년 834만으로 급속히 성장하던 노조는 지도부의 배신으로 인해 삼각동맹이 붕괴한 후 2년 만에 200만의 조합원을 잃는다. 그리고 600만 이상의 노동자들이 1921년 말까지 주급이 8실링 이상 삭감되어 생활에 고통을 겪는다.

영국 경제는 세계 시장에서 미국·독일·일본 같은 경쟁자들에게 통상의 우위를 계속 빼앗기면서 위기를 맞는다. 석탄 수출은 1913년 8900만 톤에서 1924년 6165만 톤으로 감소한다. 선박 건조는 같은 기간에 189만 톤에서 116만 톤으로 감소한다. 강철 생산은 1924년에 1913년의 수준을 약간 상회하는 정도에 그친다. 그리하여 실업자가 1920년 2.4%에서 1921년 16.6%로 급증한다. 그 후 실업자는 1939년에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1927(9.6%)년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10%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 1925년에 석탄 산업의 실업률은 25%로 증가하고 캐낸 석탄은 산더미처럼 쌓인다. (이런 현상은 영국뿐만 아니라 가까운 독일과 벨기에에서도 벌어진다.) 정부의 사회 보장은 극히 인색하여 노동자들은 참담한 빈곤 상태에 빠진다.

노동자들의 불만이 고조되는 상황에 힘입어 램지 맥도널드가 지도하는 노동당이 1924년 총선에서 승리하고 처음으로 집권한다. 그런데도 탄광 자본가들은 1921년의 협약이 1925년 7월로 만료되자 평균 13%에서 48%까지의 임금인하, 7시간 노동일의 폐지(8시간으로), 전국 협정을 일련의 지역 협정으로 바꿀 것 등을 요구하면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7월 30일을 기해 탄광을 폐쇄하겠다고 협박한다. 이에 노동자들은 곧바로 파업으로 대항한다. 그러자 정부는 황급히 왕립위원회를 구성하여 진상 조사에 나서고 자본가들은 폐쇄 경고를 철회한다.

일단 시간을 번 볼드윈 정부는 이후 8개월 동안 맹렬하게 파업 파괴 공작을 진행한다. 정부는 공급 확보 기구를 통해 트럭을 동원하고, 기관차의 특별 차고를 설치하고, 비상시에 이용할 자동차를 준비하고, 파업 파괴 계획을 작성하고, 산업의 중요 위치에 배치할 요원을 훈련시키고, 전국을 10개 지역으로 분할하여 각 지역에 비상 경제·정치 기구를 설치하고, 많은 군대를 전략 요지에 배치한다. 간단히 말하면 정부는 혁명이라도 격퇴시킬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석탄 산업 왕립위원회가 1926년 3월 11일에 보고서를 제출한다. 그러나 그 내용은 탄광 경영자의 입장을 확실하게 반영한 것이어서 수주일 동안에 걸친 교섭은 알맹이 없이 진행된다. 그러자 전국소수파운동(1924년 8월 발족)이 3월에 전국 회의를 개최한다. 여기에 참석한 100만 이상의 조합원을 대표하는 883명의 대의원들은 적극적인 투쟁을 결의한다. 마침내 노조전국회의가 5월 2일 찬성 360만 표(반대 5만 표)로 파업을 결의하고 다음날부터 일제히 직장에 출근하지 않음으로써 총파업에 들어간다. 전국소수파운동이 투쟁을 적극 선도하여 500만 노동자가 총파업에 참가함으로써 기차·버스·전차·신문·상점·전기·탄광·제철·화학공장 등 사회 전체가 마비된다.

그러나 파업 지도부인 총평의회는 처음부터 공포 속에서 크게 당황한다. 그들의 계급협조주의 세계가 바로 목전에서 뒤집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전략은 단호한 전술을 통하여 파업에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진행 상황이 보여주듯이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파업을 진정시키는 것이다. 총평의회의 지도자들은 소련 노동자들이 보내준 35만 파운드의 원조금을 거부할 정도로 소심하게 행동하고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이 선두에 서게 된 거대한 총파업에 압도되어 크게 위축된다. 그래서 5월 12일 볼드윈 수상을 방문하여 무조건 항복한다. 이로써 총파업은 9일 만에 중단된다. 그러나 탄광 노동자들은 11월까지 수개월 동안이나 파업을 계속한다. 그렇지만 지도부의 배신으로 인한 총파업 중단은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자본가들은 총파업을 격파함으로써 노조에 일대 타격을 가했음을 알고는 전면적인 임금 인하 등 노동 조건을 악화시켜 노조를 무력화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런데 이것이 즉각 노동자들의 투지에 불을 붙일 가능성을 낳자 임금 삭감 예고를 황급히 취소한다. 그러나 총파업의 열기가 가라앉자 의회는 1927년에 악명 높은 ‘노동쟁의·노조법’을 통과시켜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획득한 권리들을 모조리 박탈한다. 이제 총파업과 동맹 파업은 엄격히 금지되고 불법 파업을 지도하거나 거기에 참가한 자는 벌금이나 2년 이상의 금고형에 처해지고 노조는 ‘파업 파괴에 대한 처벌권’을 박탈당한다. 대중 피케팅은 금지되고 보통의 피케팅도 엄격히 제한된다. 또한 산업 손실액을 부담할 조합 기금을 의무적으로 조성하게 된다. 공공시설의 노조는 노조전국회의와 노동당에 가입할 수 없게 되고 노조가 노동당을 위해서 자금을 모집할 권리도 엄격히 제한된다.

노조 지도부는 자본가와 작당하여 노동악법이 통과된 지 한 달도 안 되어 이전부터 세워놓았던 ‘몬디즘’이라는 계급 협조 계획을 내놓는다. 이것은 악명 높은 미국의 생산 증대 강령인 ‘볼티모어-오하이오 계획’의 영국 판이다. 몬디즘으로 인해 노동자들이 생산 증대에 내몰리고 노사 협약이 침해되면서 전 산업에서 노동 조건이 악화된다. 이로 인해 노조전국회의는 다음해에 조합원 50만 명을 잃고 650만이던 조합원이 1930년 370만으로 감소한다.

코민테른은 파시즘 반대 투쟁에서 좌우편향의 오류를 범한다.

전쟁이 낳은 폐해가 파시즘을 성장시키는 온상이 된다. 민족주의에 열광하여 영웅적인 애국심으로 전선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던 젊은이들이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산업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본주의 반대’와 ‘사회주의 반대’를 동시에 표방하는 파시즘에서 자신들의 좌절을 치유할 희망을 찾는다.

더구나 자유주의 정부가 전후의 경제 침체, 정치 불안, 사회주의 확산, 민족주의의 좌절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무능함을 드러냄으로써 시민들은 위기의 시대에 굼뜨게 진행되는 의회를 통한 민주적 절차와 토론에 대해 인내심을 잃는다. 이로 인해 생겨난 갈등은 전쟁에서 패배한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와 승전국임에도 전리품을 챙기지 못한 이탈리아·루마니아에서 특히 사회적 긴장을 초래한다.

이들 국가에서 독점 자본의 횡포, 사회주의의 책동, 자유주의 정부의 무능에 진저리치는 다양한 계층―소시민·중산층·노동자―의 사람들이 사회의 안정과 민족의 영광을 위해 파시즘을 선택한다. 그리하여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채 10년이 지나지 않아 유럽 대륙의 20여 개 국가에서 파시스트 운동이 성장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반대와 사회주의 반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에 결국 파시즘은 자본가들과 손을 잡는다. 독점 자본가들은 파시즘에 자금을 대는 대신 거대한 이윤을 챙김으로써 밀월 관계를 맺는다. 여러 계층의 지지를 기반으로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파시스트들이 의회 선거를 통해 권력의 정상에 도달한다.

이렇게 파시즘이 다양한 계층으로부터 대중들을 획득해 가고 있을 때 좌파 정당들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알아보자.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좌파 정당들은 크게 세 가지 흐름의 국제 조직으로 나뉜다. 먼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1919년 2월 베른에서 제2인터내셔널을 재건한다. 이들을 기회주의라고 비판하는 공산주의 정당들은 한 달 뒤인 3월에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 제3인터내셔널)을 창립한다. ‘혁명적 개혁’을 표방하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은 1921년 2월 빈에서 중도파들로 ‘2.5인터내셔널’을 결성한다. 2.5인터내셔널은 1923년 5월에 제2인터내셔널로 합류한다.

코민테른은 1차 세계대전에 찬성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배신행위를 뼈아프게 경험했고 전쟁이 끝나고는 ‘계급 협조’의 관점에서 공산주의를 배척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경쟁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회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맹렬히 공격한다. 그리고 고립된 러시아 혁명을 유럽 혁명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독일공산당으로 하여금 무장 봉기를 일으키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독일공산당의 무분별한 여러 차례의 무장 봉기는 참담한 패배로 끝난다.

그러나 유럽 전역에서 파시즘이 세력을 급속히 확장하고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가 1922년 10월에 수상에까지 오르는 사태가 벌어지자 코민테른은 바로 다음달 11월에 열린 4차 대회에서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통일 전선’을 전술로 채택한다.

코민테른은 1924년 6월 5차 대회에서 가입 정당들의 사상을 강화하고 대중 조직으로 성장시키자는 ‘볼셰비키화’를 전술로 채택한다. 이때부터 서유럽의 코민테른 정당들에서도 소련 공산당처럼 중앙위원회 부설기관인 정치부·조직부·서기국이 당의 전권을 장악하고 당내 반대파들을 함부로 내쫓는 게 관행으로 되고 이에 따라 당내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한다. 특히 소련의 관심이 집중된 독일공산당에 대해서는 사실상 코민테른이 당 지도부를 임명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공산당들은 소련 공산당의 권위에 눌려서 자기 나라의 실정에 맞는 창조적인 전술 개발이 어렵게 된다.

코민테른은 1928년 6차 대회에서 ‘노동자계급의 통일 전선’ 전술을 폐기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사회 파시스트’로 규정하여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단호하게 비판하는 전술을 채택한다. 유럽과 중국에서 혁명이 완전히 실패로 끝났고 자본주의가 안정기에 들어선 상황에서는 노동자계급을 개량주의로 물들이는 사회민주주의가 더 위험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코민테른은 1935년 7~8월 7차 대회에서 파시즘에 반대하고 평화를 희망하는 노동자·농민·인텔리겐치아·소상인 등 모든 계층의 세력들로 구성되는 인민 전선(식민지에서는 민족 전선)을 전술로 채택한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히틀러가 독일에서 집권(1933년)하고 난 한참 뒤이다. 아무튼 코민테른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정당들과도 협력을 모색한다. 게다가 전쟁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전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을 자제한다.

이처럼 코민테른은 상황보다 뒤늦게 전술을 바꿈으로써 각 나라 공산당들이 패배하는 데에 하나의 원인을 제공한다. 그 밑바닥에는 코민테른을 지배하는 소련공산당의 자국 중심의 사고가 깔려 있고 혁명에 성공한 소련의 권위에 눌려 자주적이지 못했던 다른 나라 공산당들의 잘못이 있다.

코민테른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5월 각 나라의 진보 세력들의 통일을 쉽게 하기 위해 집행위원회의 결정으로 스스로 해산한다.

한편 1928년에 소련에서 추방당한 트로츠키와 좌익 반대파들은 스탈린의 코민테른에 대항하는 국제 조직을 건설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인다. 1933년에 독일공산당이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총 한방 쏘지 않은 채 히틀러의 집권을 허용한 것을 계기로, 트로츠키는 코민테른이 프롤레타리아 세계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구상한다. 그리하여 1933년 7월에 ‘국제 공산주의자 동맹’이 파리에서 결성되고 첫 대회가 1936년 7월 유럽에서 열린다. 이 흐름은 1938년 9월 제4인터내셔널의 창립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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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3

세계노동운동사 [6장] 사회주의 대 파시즘 (1917~1945) 3

미국 노동자들의 산별노조 건설

미국이 세계 경제를 선도하는 기관차가 된다.

미국은 79억 달러의 빚을 진 채무국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세계에서 으뜸가는 채권국이 되어 종전을 맞는다. 반면에 유럽 국가들은 4년 이상 지속된 세계대전으로 경제에 심대한 타격을 입고 총 160억 달러의 빚을 진 채무국으로 전락한다. 세계대전이 세계 경제의 중심을 유럽에서 미국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또한 미국에서는 자동차 산업이 이미 경제의 기관차 역할을 하고 있었다. 헨리 포드는 1907년부터 대중적인 ‘T모델’ 자동차를 개발·양산하여 자동차 보급 속도를 놀랄 만큼 빠르게 만든다. 1930년까지 등록된 자동차 수가 유럽 전역에서 520만 대인데 비해 미국에서는 2650만 대나 된다. 포드는 대량 생산을 위해 부품을 규격화하고 작업을 기계화하여 표준화된 제품을 생산하고 컨베이어로 상징되는 자동 운반 장치를 도입해서 모든 부문의 생산 활동을 일관 조립 작업으로 통합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노동 강도가 높아진 노동자들에게 높은 임금을 제공하여 그들의 구매력을 증대시킴으로써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가능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자동차 산업과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강철·기계·유리·고무·전기·석유·건설 산업이 1920년대의 산업 발전을 선도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투기 열풍이 엄청나게 일어난다.

미국에 이어 독일·영국·프랑스에서도 1920년대부터 포드주의가 확산된다. 이에 따라 유럽 주요 국가의 산업은 1925년에 전쟁 전의 수준으로 회복하고 1920년대 후반에는 패전국 독일까지도 경제가 빠르게 성장한다.

1920년대에는 중요한 기술 발전은 일어나지 않지만 이전에 발명했던 기술들을 완성하고 상품 생산에 응용함으로써 경제가 더욱 발전한다. 라디오는 이미 1차 세계대전 중에 군대에서 사용되었지만, 1920년대 초에 와서 일반인을 위한 오락 프로그램이 정규 방송의 전파를 타면서 곧 값싸고 다루기 쉬운 제품으로 되어 영국과 독일에서는 10년도 안 되는 기간에 200만 대씩 보급된다.

자본주의 예언가들은 경제 발전에 도취되어 “포드가 사회주의를 격퇴시켰다. 사회주의는 난센스다”라고 호언장담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발전에 있어서 다음의 두 시대를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국자본주의 시대, 이 시대에는 확장의 가능성에 한계가 있었다. 그 뒤의 미국자본주의 시대, 이 시대에는 최신의 기술 진보를 토대로 무한한 확장과 발전이 가능하다. 제1의 시대에는 맑스와 라살레가 상징적이었다. 제2의 시대에는 포드가 상징적이다.” “맑스와 엥겔스가 논한 번영과 공황이 주기적으로 교대하는 순환적 발전이 들어맞는 것은 초기 자본주의뿐이다.” “우리는 자유 경쟁과 시장의 맹목성이 지배하던 자본주의 시대를 대체로 극복한 시기에 있으며, 경제의 자본주의적 조직화에 도달하고 있다.”

이러한 일반적 경향을 총괄하여 렌쯔는 이렇게 비판한다. “개량주의 이론가들은 노동 조건에 대한 국가 통제의 증대, 국가자본주의로의 경향, 노조가 자본주의 국가의 보조 조직 또는 자본주의 사회의 집행 기관으로 변모한 것들을 가지고 경제상의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로 접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노조 지도부는 영원한 번영이라는 환상에 빠져 생산 증대에만 몰두한다.

노동자들은 1차 세계대전 동안에 손실된 실질 임금을 만회하기 위해 투쟁에 나선다. 시애틀 노동자들이 1919년 2월에 먼저 파업에 나서자 5월에는 위니펙에서도 파업이 일어나고 9월에는 철강 노동자 36만 명이 전국 파업을 전개한다. 그러나 미국노동총동맹의 지도자들은 이 파업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사보타지 한다.

1922년 말 50만 철도원의 파업이 패배로 끝날 즈음, 볼티모어-오하이오 철도는 ‘노동자가 생산성을 높이는데 협력한다면 노동자에게 큰 이익을 분배하겠다’고 제안한다. 생산성이 높아지면 결국 임금이 자동으로 증대하고 노동 조건도 개선되며 노동 시간이 단축되고 실업도 사라지리라는 것이다.

노동총동맹은 1925년 대회에서 이 제안을 ‘새로운 임금 정책’으로 결정한다. 노조 관료들은 자본가와 손잡고 전진하는 노동자의 미래는 장밋빛이라며 ‘파업은 낡아빠진 방식으로서 노동자의 이익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규정하고 이제 계급투쟁은 끝났다고 목청을 높인다. 심지어 부르주아 경제학자인 카버는 노동자들이 높은 임금을 저축하여 산업을 점점 사들이고 있으며 그리하여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노조 지도부는 ‘영원한 번영’이라는 환상에 푹 빠져 오직 생산 증대에만 몰두한다. 그러나 노동 생산성이 증가하고 자본가의 이윤이 대폭 증대하는데도 실질 임금은 1923~26년 사이에 조금(2포인트) 밖에 오르지 않는다. 임금 상승의 혜택도 거의 숙련 노동자에게만 돌아가고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임금·노동시간·노동강도가 오히려 악화된다.

더 나아가 자본가들은 산업 합리화를 강력하게 추진한다. 그런데 자본가에게 ‘산업 합리화’란 전투적인 활동가들을 대량 축출하고 해고를 자유롭게 하고 임금 총액을 끊임없이 삭감하고 파업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또한 자본가들은 회사가 자금을 대어 노조를 조직하고 회사편인 사람을 간부 자리에 앉히는 ‘회사조합’을 대규모로 육성한다. 회사조합은 트러스트(독점) 산업을 미조직 상태로 두려는 술책의 하나로서 주로 기간산업에서 만들어진다. 회사조합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에는 200개뿐이었는데 1927년에는 900개(100만 명)로 증가한다. 이들 회사조합들은 밀정과 깡패들을 고용하여 체계적으로 노조 운동을 파괴하는 데에 앞장선다.

미국에서부터 세계 대공황이 시작된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의 주식 시장에는 1600만 주가 넘는 매물이 쏟아져 나온다. 주가는 불과 3주 만에 50% 이상 폭락한다. 대공황이 시작된 것이다. 1932년 말까지 1600억 달러 이상의 주식이 휴지조각으로 변하고, 기간산업의 생산이 50% 감소하고, 5761개의 은행이 파산하고, 농업 생산물의 가격은 85억 달러에서 40억 달러로 하락한다. 자본가들이 공황으로 인한 손실을 임금 인하나 대량 해고를 통해 노동자에게 전가시킴으로써 모든 산업에서 임금의 45% 이상이 삭감되고 1933년 초까지 1700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한다.

공황은 전 세계로 확산된다. 이웃한 캐나다의 산업도 마비되어 100만 노동자가 실직한다. 독일에서는 공업 생산이 45%나 감소하고, 주급은 1929년 42마르크에서 1932년 21마르크(최저 생활비는 38마르크)로 하락하고, 1932년 8월에 완전 실업자만 522만 명에 달하고, 한 달에 3~4달러의 구제 기금만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1700만 명에 이르면서, 국민 경제 전체가 마비 상태에 빠진다. 영국에서는 공업 생산이 25% 감소하고 실업자는 1929년 116만 명에서 1932년 297만 명으로 증가한다. 영국의 공업 생산이 비교적 적게 감소한 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 계속 불황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1932년에 완전 실업자가 284만 명, 반실업자가 100만 명에 이르게 된다. 프랑스 역시 1932년 6월에 실업자가 230만 명, 반실업자가 561만 명에 달한다. 이탈리아·오스트리아·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스페인·스칸디나비아국가들·오스트레일리아 등도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

공황은 (반)식민지에는 더 큰 충격을 미친다.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 국가에서는 실업자 수가 기록적으로 증가하고 농업이 크게 파괴되고 기아가 도처에 확산된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산업과 외국 무역은 50~80%까지 감소한다. 이들 나라에서는 사회 보장 제도도 없어 인민들이 더욱 비참한 상태에 처한다.

국제 산업 생산은 1929년의 2/4분기에서 1932년의 2/4분기 사이에 42%나 하락한다. 이 기간 동안 많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금본위제가 파탄 나고 자본 수출이 정지된다. 국제 금융은 무질서에 빠지고 국제 무역은 65%나 감소한다. 세계의 실업자 수는 유례없이 증가하여 3~5천만 명으로 추산된다. 세계 대공황은 1933년부터 심각한 상태에서 서서히 벗어나지만 그 여파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1939년까지 지속된다.

이 세계 대공황은 부분적인 원인에 의한 일시적인 경기 후퇴가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자본주의의 생산력 발전과 구조 변화의 산물이다. 자본주의 중심부의 생산력은 1890년 이래 과학적 연구에 기초한 기술 혁신과 생산 과정의 재조직에 힘입어 크게 발전했고 그래서 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산업의 연평균 성장률은 높은 수준(미국은 5.9%, 독일은 4.3%)을 기록했다. 전쟁의 피해에서 유럽 국가들이 회복된 이후에 성장률이 크게 둔화되기는 했지만 산업 생산고는 꾸준히 증가했다.

그러나 상품의 소비는 생산만큼 빨리 증가하지 않았다. 각 나라에서 국내 수요와 해외 수출은 이 기간을 통해 늘어나던 상품 생산량을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특히 심각한 빈부 격차가 개선되지 않음으로써 노동자의 구매력은 별로 증가하지 않았다. 생산력이 가장 빨리 발전했던 미국에서는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이 1890~1914년 사이에 매년 1.3%씩 밖에 증가하지 않은 데 비해 산업 생산고는 그보다 4배가 넘는 속도로 성장했고 이런 사정은 ‘번영’을 구가하던 192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그 결과는 상품의 공급 과잉으로 나타났다.

더구나 장기간에 걸친 생산력의 발전은 산업 부문 사이의 불균형 위에서 진행된 것이어서, 강철·기계·자동차·전기·석유·화학 같은 새로운 산업이 높은 비율로 성장한 반면에 광업·조선·방직 같이 오래된 산업은 정체 내지 위축되었다. 농업은 과잉 생산으로 인한 가격 하락에 시달리고 있었다.

1920년대 미국을 풍미했던 주식 투기는 이와 같은 불균형 성장을 토대로 했을 뿐 아니라 금융 기관의 신용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이 장기간 누적되어 주가 폭락을 계기로 한꺼번에 대공황으로 폭발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무자비한 대량 해고와 임금 인하에 반대하고 실업 구제와 사회 보장을 요구하면서 적극 투쟁에 나선다. 이에 따라 파업이 급증한다. 1929~32년 사이에 15개 나라에서 1만 8794건의 파업에 851만 명의 노동자가 참가한다. 이 가운데 1468건은 영국, 2700건은 미국, 3601건은 프랑스, 1304건은 독일, 688건은 체코슬로바키아, 1889건은 일본, 1333건은 중국, 480건은 인도에서 발생한다.

루즈벨트가 서민들의 고통을 끌어안으며 대통령에 당선된다.

미국의 수백만 노동자들이 일자리와 집을 빼앗기고 거리로 내몰린다. 포드자동차에서만 8만 5천 명이 해고되고 오하이오 주의 5대 공업 도시에서만 1930년 1월부터 2년 반 동안 10만 가구가 퇴거 명령을 받는다. 자연 재해와는 달리 이들에게는 적십자 구호 같은 구원의 손길도 오지 않는다.

좌파가 주도하는 노조통일연맹과 공산당은 1930년 3월 6일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125만 명이 참가한 집회를 열어 ‘기아 행진’을 벌이고 7월 4일 시카고에서 전국실업자위원회를 조직한다. 전국실업자위원회는 주요한 활동의 하나로 집에서 쫓겨나는 것을 막는 활동을 벌인다. 이 활동으로 뉴욕의 경우 1932년 6월 30일까지 여덟 달 동안에 퇴거 명령을 받은 18만 5784가구 중에서 7만 7천 가구를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정부는 이 경제 위기의 원인을 빨갱이들의 소행으로 돌리려고 애쓰고 의회는 1930년에 공산당을 조사한답시고 ‘피시 위원회’를 만든다. 자본가들의 폭력도 도를 넘어선다. 포드자동차 해고자들이 1932년 3월 7일 재고용을 요구하며 디어본시 공장으로 행진하자 공장 담 뒤에 숨어있던 포드 폭력단과 총잡이들이 기관총을 난사하여 수명이 죽고 수십 명이 중경상을 입는다.

재향군인노동자연맹은 4월부터 ‘1차 세계대전 퇴역군인에 대한 연금 지불을 1945년까지 보류한다’는 정부의 방침에 항의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이에 따라 재향군인의 무리가 국가의 심장부인 워싱턴의 의사당과 백악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 아나코시아 저지대의 황무지로 몰려든다. 이들은 동굴·땅굴·오두막집·천막집에서 담요만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 수가 7월에는 2만 5천 명에 다다른다. 그러자 후버 대통령은 군대를 동원한다. 맥아더 참모장의 지휘에 따라 기병들이 총검을 휘두르며 공격하고 이어서 방독면을 쓴 보병이 최루탄을 던지며 진격하여 퇴역군인들의 무리를 해산시킨다.

뉴욕 주지사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1932년 여름부터 시작된 대통령 예비 선거에서 서민들의 고통을 끌어안으며 압도적인 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러자 이때까지 사기와 요행으로 근근이 버티던 미국 경제가 완전히 침몰한다. 은행들이 잇달아 파산하면서 주 전체의 3/4이 은행을 폐쇄하고 예금 인출을 연기시킨다. 대통령 취임식(1933년 3월 2일)이 있기까지 행정 기관 자금도 동결된다. 돈은 사라지고 임금도 지불되지 않는다. 학교도 문을 닫는다. 파산한 군중들이 텅 빈 예금기관 앞에서 울부짖고 식량조차 살 수 없어 대소동이 일어난다.

민중을 위한 뉴딜 정책이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를 구한다.

루즈벨트는 대통령에 취임하자 구제·부흥·개혁을 내세우고 뉴딜 정책을 추진한다. 이에 따라 연방 정부의 승인이나 감독 아래 다시 설립될 때까지 모든 은행을 폐쇄하는 긴급은행법, 증권 시장에 광범하게 퍼져있는 사기·부정과 타인의 돈으로 투기하는 행위를 막는 법률들, 공정 거래 기준을 설정하여 산업의 극심한 경쟁을 막고 구매력 증대를 위해 최저 임금과 노동 시간을 합의하도록 규정한 전국산업부흥법 등이 만들어진다.

특히 전국산업부흥법 7조 (A)항은 노동자들의 자주적 단결권을 보장하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선택한 대표자를 통해 단체 교섭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공정노동기준법은 최대 노동 시간과 최저 임금을 규정하고 소년 노동을 규제한다. 그리고 농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농업조정법이 제정되고 농촌의 가난한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한 ‘민간 식림 치수단(民間植林治水團)’이 만들어진다. 거대한 공공사업으로 수만 명이 일자리를 찾으면서 흥분과 기쁨이 나라를 채우기 시작한다.

루즈벨트는 전쟁이 아닌 평화를, 나라 사이의 우호를, 정복과 제국주의의 중지를, 독일·이탈리아·일본의 파시즘을 억제하기 위한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집단 안보를 주장한다. 루즈벨트는 라디오를 통해 자주 국민과 대화를 나누며 국민의 친숙한 이웃이자 세계적인 인물이 된다.

노동자들은 자주적 단결권과 단체 교섭권을 쟁취하기 위해 총파업을 전개한다.

샌프란시스코와 태평양 연안 부두 노동자들이 전국산업부흥법 7조에 고무 받아 노동총동맹 산하 국제부두노동자연맹이란 단체로 모이기 시작한다. 그러자 자본가들은 1933년 9월 노조 간부 4명을 해고하고 노조와의 단체 교섭을 아예 거부한다.

이에 샌프란시스코·시애틀·포틀랜드·샌디에이고 등 모든 태평양 연안 항구의 부두 노동자 1만 2천 명이 1934년 5월 9일 일제히 파업에 들어간다. 5월 25일에는 8개 해운 노조의 3만 5천 노동자가 연이어 파업에 들어간다. 미국 노동자계급이 대약진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경찰들은 이 파업을 잔인하게 진압한다.

이에 격분한 샌프란시스코 노동자 12만 7천 명이 총파업을 전개하여 시 전체가 유령 도시로 변한다. 파업이 계속되면서 7월 3일에는 경찰과 파업 노동자들이 충돌하여 유혈 사태가 발생한다. 7월 5일에는 완전 무장한 2천 명의 주 방위군이 출동하여 최루 가스 대신 구토 가스를 사용하고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후려치고 수십 발의 총알을 발사한다. 하루 종일 총성이 울리고 실제 전투와 같은 상황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쓰러진다. 이에 도장공 노조 1158 지방 지부가 총파업을 선언하고 곧이어 기계공 노조도 투쟁에 나선다. 7월 10일에는 ‘알라메다 노조 협의회’가 총파업을 정식 승인하고 7월 12일에는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 트럭 운전수 노조 지부가 총파업을 지지한다.

노동총동맹 지도자 윌리엄 그린이 파업 금지 전문을 보냈으나 노동총동맹의 160여 개 지부(12만 7천 조합원)가 그 다음날 총파업에 대한 찬반 투표를 실시하여 압도적인 찬성으로 파업을 결의한다. 모든 노조원들이 7월 16일 아침에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인쇄공과 전기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연좌 농성을 벌인다. 모든 산업이 정지되고 거리의 전차도 멈추고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다. 그러나 7월 19일 노동총동맹의 보수적인 간부들은 호명 투표를 거부하고 기립 투표를 통해 191 대 174로 총파업을 끝내기로 결정한다. 3만 5천 해운 노동자들은 7월 30일에야 국제선원노동조합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일터로 돌아간다. 몇 주일 후에 부두 노동자들은 하루 6시간 노동과 주30시간 노동을 쟁취한다.

들불 같이 타오르는 투쟁의 과정에서 새로운 노조(지부)들이 수없이 건설된다. 이 새로운 노조들은 (세계산업노동자동맹과 노조통일연맹이 사용한 투쟁 방식을 따라) 대대적인 피케팅, 노래, 연설, 토론, 회합, 연좌농성, 태업, 시위, 확성기 사용, 여자들을 파업 참가자로 조직하기, 빠른 속도로 차를 몰아대기 등 새롭고 다양한 방식으로 투쟁을 전개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용자를 고발하고, 라디오를 이용하고, 신문에 전면 광고를 내고, 파업 후원회를 조직하고, 파업의 쟁점을 대중에게 알리고, 조합 정책을 결정하기에 앞서 대대적인 집회를 열어 민주적으로 다수의 의견을 물으면서 아주 공세적으로 투쟁을 펼쳐나간다. 처음으로 거세게 터져 나온 노동자들의 투쟁은 1935년에 1만 8천여 명이 체포·구금되고 1934~36년 사이에 88명이 파업 중에 목숨을 잃을 정도로 아주 격렬하게 전개된다.

결국 처음으로 단체 교섭권과 파업권을 보장하고 사용자 측의 노조 방해 활동을 금지하는 전국노동관계법(와그너법)이 1935년 7월 5일에 제정된다.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자신의 권리를 쟁취한 것이다.

한편 위기의식을 느낀 대기업들은 전례 없이 대대적으로 노조 파괴 활동을 전개한다. 밀정을 고용하여 노조 움직임을 일일이 감시하고 요주의 인물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노조 간부들을 매수하고 때로는 폭력을 동원하여 노조를 파괴하기까지 한다. ‘라 폴레트 상원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대기업들이 230개의 사설탐정회사를 통해 10만 명의 밀정을 고용하여 전국 4만 8천 개의 노조 지부에 침투시켜 적극적인 조합원들을 밀고하여 해고되게 하고 밀정의 상당수가 노조 간부가 된 것으로 드러난다. 대기업 자본가들은 1934년에 노조 파괴 공작에 8천만 달러나 쓰고 ‘반공’을 내세워 오픈 숍―노조 가입과 탈퇴가 개인의 의사에 달려있는 제도―을 확립하고 뉴딜 정책을 파괴할 목적으로 미국자유연맹을 만든다. 또 제너럴모터스·스탠더드석유·웨스팅하우스 등 전국 12대 대기업은 특별위원회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하고 스스로를 노동자와 뉴딜 정책에 대해 반격 작전을 벌이는 신비스러운 비밀 지휘부로 자처한다. 더군다나 재벌들은 루즈벨트 대통령을 소련의 끄나풀이라고 매도하기까지 한다.

대기업 노동자들이 산별노조를 건설하며 대약진 한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고양되는 분위기를 타고 관료적인 노동총동맹 지도부에 비판적인 좌파들이 1935년 11월 워싱턴에서 산업별조직위원회를 결성한다. 새로운 조직의 결성은 수백만 노동자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온다. 노동자대중이 투쟁을 경험하면서 여러 개의 경쟁적인 직업별 조합으로 자신들을 쪼개서 한 공장 내의 힘을 약화시키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 2~3년의 투쟁에서 가장 앞장섰던 사람들이 산업별조직위원회를 이끌고 있어서 산업별조직위원회는 겨우 여섯 달 만에 2백만 명의 회원을 확보한다.

산업별조직위원회는 단결된 행동으로 거침없이 전진하여 1936년 3월에 ‘미국 전기·라디오·기계노동자 연합회(UE)’라는 거대한 노조를 조직한다. 그리고 자동차노조가 5월에 노동총동맹을 탈퇴하고 미국자동차노조연합이란 이름으로 산업별조직위원회에 가입한다. 9월에는 UE와 조선소 노동자들이 산업별조직위원회에 가입한다. 곧이어 판유리노조, 철·강철·주석노동자연합회, 고무노동자연합도 가입한다. 노동총동맹 소속 전국기계공조합과 총동맹 산하 지부들 그리고 독립 노조들도 단결의 물결에 합류한다. UE는 연말이 되기 전에 셰넥테디에 있는 제너럴일렉트릭 공장에도 노조를 조직한다. 이처럼 산업별조직위원회는 새롭게 한창 성장해 나가는 대규모 노조들을 끌어들이며 기세 좋게 뻗어나간다.

그러자 노동총동맹 집행위원회는 1936년 8월 4일 산업별조직위원회에 가담한 노조들의 회원 자격을 정지시키고 얼마 뒤에는 그 노조들을 제명한다. 그리고 산업별조직위원회가 노조를 둘로 분열시키고 다수결에 따르지 않는다고 공식 비난한다. 더구나 산업별조직위원회가 소련과 내통하여 공산주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며 쉬지 않고 떠들어댄다.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의 제너럴모터스 노동자들이 12월 28일 파업에 들어간다. 다음해 1937년 1월 4일에는 오하이오 주의 노오우드, 조지아 주의 애틀랜타, 인디애나 주의 앤더슨과 캔자스시티, 회사 심장부인 미시간 주의 플린트에서 제너럴모터스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연좌 농성 파업을 전개한다. 자동차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40만 명 가운데 26만 명이 일하고 있고 연간 211만 대(1937년)의 차를 생산하는, 잠자던 사자가 뒤늦게 잠을 깬 것이다. 자본가들과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하겠다고 위협하면서 ‘거대한 제너럴모터스의 파업은 자동차 산업을 소비에트로 만들려는 음모’라고 맹렬히 비난한다. 공장 바깥에서는 수천 명의 동료 노동자들과 아내와 아이들이 피켓을 들고 응원하면서 추운 겨울인데도 밤낮으로 방송차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파도처럼 움직인다. 결국 파업 44일째인 2월 11일, 제너럴모터스는 노조를 인정하고 전국 단위의 단체 협상을 하겠다고 발표한다. 이것은 아주 큰 승리였다. 마침내 오픈 숍의 대들보가 무너져 내린 것이다.

아크론 파업을 본받은 제너럴모터스의 ‘연좌 농성’ 파업―미국 노동자들에게는 새로운 투쟁 방식이다―은 곧 들불처럼 퍼져나간다. 세계에서 제일 큰 강철 회사인 ‘US강철’은 파업 경고조차 없었는데 임금 10% 인상, 주 40시간 노동, 노조 승인을 ‘강철노동자조직위원회’에 약속하며 갑자기 항복한다. 노동자들이 거대한 제너럴모터스를 꺾고 승리한 순간에 ‘강철노동자조직위원회’의 조합원이 15만 명으로 늘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웨스팅하우스와 필코 등 거대 회사에서 노조가 연이어 조직된다. 이로부터 비록 4년 이상이나 걸리긴 해도 ‘포드’에서도 노조가 설립된다.

나아가 흑인 노동자들―노동총동맹은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이 백인과 평등한 조건으로 수천 명씩 산업별조직위원회에 가입하고 (섬유·봉재 노조를 제외하고는) 역사상 최초로 수천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전기노동자연합과 식품가공노조 등에 가입한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산업별조직위원회는 1938년에 명칭을 산별노조회의로 바꾼다.

산별노조회의는 철강·자동차·고무·유리·전기·수송·식품가공·통신 등 모든 기간산업에서 오픈 숍을 몰아낸다. 그리고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공장과 지역들에서도 유급 휴가, 유급 휴일, 시간외 근무 수당, 노동 강도 완화, 주 5일 40시간 노동과 같은 값진 성과를 쟁취한다.

산별노조회의의 성장에 자극 받은 노동총동맹은 기계공·트럭운전수·호텔·식당종업원·보일러제작공들을 적극 조직하여 조합원을 100만 명 이상 증가시킨다. 1940년까지 노동총동맹 소속 조합원은 424만 명으로 늘어나고, 산별노조회의는 381만 명, 독립노동조합은 200만 명에 이른다. 그리하여 전체 조합원은 불과 4년 만에 3배나 늘어나 1천만 명에 이르게 된다. 더욱이 1866년부터 수많은 노동자들이 목숨을 바치며 외쳐 온 ‘하루 8시간 노동제’가 마침내 많은 산업에서 실현된다.

이처럼 미국 노동자계급은 루즈벨트 시대에 최대의 승리를 거둔다. 이에 발맞추어 미국의 노동자·민중은 1932·1936·1940·1944년에 네 차례나 연속해서 루즈벨트를 지지하여 대통령으로 당선시킨다. 이리하여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은 노동자·농민·흑인들의 투쟁과 단결이 추진력으로 작용한 대중 운동의 요구에 대한 답변이자 미국 민주주의 운동의 정점(민중주의)으로서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 체제를 (노동자계급의 혁명에서) 구원한다.

독점 자본가들은 전투적인 노동자 운동을 빨갱이들의 소행이라고 공격한다.

독점 자본가들은 노동자계급의 대약진의 기세를 꺾기 위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한다. 하원은 ‘비미국 활동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디이즈 하원의원의 주도 아래 노조 요시찰 인물들의 명단을 작성한다. 이 위원회는 1938년 노조 간부 선거가 전국에서 실시되기 직전에 노동계에 빨갱이들이 준동하고 있다고 떠들며 청문회를 개최하고 매일같이 산별노조회의가 공산주의 폭동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이에 장단을 맞추어 신문·라디오·잡지 같은 대중매체의 98%가 쉴 새 없이 산별노조회의를 비난하며 융단폭격을 퍼붓는다. 게다가 자경단원들은 빨갱이로부터 국가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산별노조회의의 피켓 대열에 테러를 가한다.

전국제조업자연합은 “산별노조회의에 가입해 공산주의 미국 건설을 도웁시다”는 전단 220만 장을 만들어 뿌리는 교활한 술책까지 부린다. 전국제조업자연합의 회장을 지낸 프렌티스는 “미국 실업계는 어떤 형태의 위장된 파쇼 독재 체제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며 우익 세력을 부추긴다. 독일에서 집권한 뒤 노조를 깡그리 없애버린 히틀러가 수많은 미국 실업가들의 영웅으로 추앙되면서 포드자동차 사장 포드와 국제사무기계회사 사장 와트슨 등 상당수의 대기업 우두머리들이 히틀러가 주는 훈장을 영광스럽게 받는다. 1940년에는 강력한 친 히틀러 조직인 ‘미국 제1위원회’가 생겨나고 여기에 상당히 많은 미국 산업계 대표들이 참가한다. 자본가들은 탁월한 노동자들마저도 ‘빨갱이’라는 소리 한마디에 절절 매던 쿨리지 대통령이나 후버 대통령 시대를 그리워한다.

한편 대기업들은 공황을 이용해 자본을 집중시키며 회사 규모를 확장한다. 그리하여 1935년에는 미국 기업의 0.1%에 불과한 거대 기업이 전체 순이익의 50%를 차지하고 4%도 채 안 되는 알짜 대기업들이 총 이윤 가운데 84%를 차지한다.

이에 따라 빈부 격차도 심화된다. 미국 총 세대수의 47%가 1년 동안 1천 달러도 안 되는 소득을 얻는 데 비해 1.5%도 안 되는 상류층은 밑바닥 47%의 세대와 같은 액수의 총 수입을 얻는다.

미국 경제는 뉴딜 정책으로 잠시 회복되었다가 1938년에 다시 불경기가 시작된다. 이 불경기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계속된다. 이는 다르게 표현하면 대량의 무기와 전투장비를 소비하는 2차 세계대전이 미국 경제를 구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이 생산한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전쟁이 자본주의 경제를 구제한다는 말이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하지만 제대로 알면 이상할 것도 없다. 자본은 그 속에 언제나 폭력을 본성으로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들은 자유 경쟁으로 인한 대공황을 혹독하게 경험하고서는 경제에 더욱 깊이 개입하게 된다. 정부는 파국을 막기 위해 공공 부문을 확대하고 복지 정책을 시행하며, 사기업의 투자와 생산에 대해 재정을 지원하고, 경제 성장 계획에 따라 조세·국채·신용규제를 이용하여 화폐의 순환에 개입한다. 이는 국가 권력과 독점 자본의 유착으로 정치 지배와 경제 착취가 단일한 메커니즘으로 통합되었음을 뜻한다. 이런 현상을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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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4

세계노동운동사 [6장] 사회주의 대 파시즘 (1917~1945) 4

중국 노동자 혁명의 패배와 농민 혁명으로의 전환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제2 정부’를 구성하고 제국주의 반대 투쟁으로 나아간다.

청나라는 1909년부터 입헌군주정으로의 개혁을 시작한다. 그러나 1911년 5월 철도 건설을 외국 차관단에 위임하자 이에 반대하는 봉기가 10월에 여러 성에서 일어난다. 쑨원은 삼민주의―민족주의·민권주의·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국민당을 조직한다. 북양군을 이끄는 위안스카이는 부의 황제를 퇴임시키고 1912년 1월 각 성의 대표들을 난징에 모아 중화민국(공화정)을 수립하고 쑨원을 임시 대총통에 앉힌다. 쑨원의 국민당은 1913년 선거에서 승리한다. 그러자 위안스카이는 국민당을 해산시키고 자신이 대통총의 자리에 앉는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1915년 1월 중국의 칭다오를 점령하고 중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하는 ‘21개조의 요구’를 위안스카이에게 강요한다. 위안스카이가 1916년에 죽자 지방의 군벌들이 각 열강들의 지원을 받으며 할거하는 시대가 된다.

중국 경제는 1차 세계대전 중에 ‘전쟁 특수’로 급속히 발전한다. 수출은 1913~19년 사이에 40%나 증가하고 공업 기계류의 수입은 1915~21년 사이에 13배나 증가한다. 이에 비례해서 산업 노동자도 증가한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주요 도시들에 총 150만 명의 산업 노동자가 존재하게 된다.

중국 대표단은 전쟁이 끝나고 열린 1919년 베르사유 회의에 참석하여 일본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취소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베르사유 회의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영토 재분할로 끝난다. 그러자 3천 명의 학생들이 5월 4일 베이징 중심부에 있는 천안문 광장에서 집회를 열고 중국 역사상 최초로 민족주의 시위를 벌인다. 이 5·4운동은 전국 규모의 항의 운동으로 발전한다. 베이징 정부가 무력 진압에 나서 수백 명의 학생들을 체포하자 주요 공업 중심지인 상하이에서는 6~9만 명의 노동자들이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1일 파업’에 들어가고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다.

천두슈·리다자오·취추바이·마오쩌뚱 등 12인의 대표가 1921년 7월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으며 중국공산당을 결성한다. 그리고 1921년부터 시작된 불황의 영향으로 1922년에는 100회 이상의 파업이 일어나고 연인원 30만 명이 파업에 참가한다. 이러한 상황을 타고 공산당은 1922년 5월 광저우에서 제1회 전 중국 노동자 대회를 개최한다. 여기에는 12개 도시에 있는 200개 노조의 30만 노동자를 대표하는 162명의 대의원이 참석한다. 나아가 공산당은 농민 협회들을 조직하기 시작한다. 철도 노동자들은 1924년 중국 최초로 전국 노조를 설립한다.

국민당은 1924년 1월 소련과 긴밀하게 협력하고 공산주의 운동과 연대한다는 ‘연소용공(連蘇容共)’의 원칙을 명확히 한다. 이에 따라 공산당이 개별로 국민당에 입당함으로써 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진다. 국민당은 9월에 반동적인 봉건 군벌을 타파하고 전국을 통일하여 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해 ‘북벌’을 시작한다. 그런데 자유주의자 쑨원이 1925년 3월 베이징에서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는 말을 남기고 숨진다. 그 뒤를 이어 쑨원의 동서―쑨원의 부인 쑹칭링의 동생인 쑹메이링의 남편―인 장제스가 국민당을 장악한다.

상하이에 있는 일본 자본의 직물 공장들에서 노동자들이 5월에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간다. 그런데 파업 노동자들과 공안 부대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한 젊은 노동자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노동자·학생 수천 명이 5월 30일 항의 행진을 벌인다. 조계 당국은 영국·미국·일본·이탈리아의 육군 전투 부대를 상륙시켜 진압한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에 발포하여 12명이 숨진다. 그러자 이틀 후인 6월 1일 공산당이 이끄는 상하이 노조총연맹이 외국인 소유 공장과 부두를 시작으로 총파업을 단행한다. 6월 13일에는 16만 명의 노동자가 가두 투쟁을 벌인다.

파업과 가두시위가 다른 도시로 급속히 확산된다. 6월 23일 광저우에서는 영국·프랑스 군대의 발포로 시위대 52명이 사망한다. 영국 식민지인 홍콩에서도 총파업이 벌어져 6월 말에 이르러 5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홍콩을 떠난다. 13명으로 구성된 파업위원회와 800여 명의 파업노동자대표자회의가 투쟁 전체를 총괄한다. 이 파업위원회는 이후 벗과 적 모두로부터 ‘제2 정부’로 불리게 된다. 총파업은 1926년 10월까지 16개월 동안이나 계속된다.

국민당은 1925년 7월 전국으로 확산된 노동자들의 투쟁의 성과를 기반으로 광저우에서 국민 정부 수립을 선언하고 장개석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국민혁명군을 조직한다. 국민당 군대는 1926년 7월 북벌을 재개하여 11월에는 근거지를 광저우에서 우한으로 옮긴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은 선발 정찰대 역할을 하면서 가는 곳마다 농민 반란을 고무하고 노동자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한다. 그리하여 1926년 초에 1천 명도 안 되던 당원이 불과 1년 만에 3만 명 이상으로 증가한다.

상하이의 섬유·금속·철도 노동자들은 1927년 2월 다시 총파업을 일으킨다. 경제적 요구로 시작된 총파업은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전국으로 확대되어 수개월 동안 계속된다.

공산당의 좌우편향으로 노동자들의 조직과 투쟁이 붕괴된다.

대지주·고리대금업자·제국주의세력을 대표하는 장제스는 국민당 북벌군을 상하이로 집결시킨다. 위기를 직감한 파업 노동자 70만 명은 파업을 계속하면서도 잘 훈련된 노동자 민병대로 도시 전 지역의 전략 요충지를 장악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다. 상황이 이러 하자 국민당 군대는 상하이 외곽에 이미 도착하고서도 5일 후인 3월 26일에야 상하이로 들어온다. 공산당은 장제스를 환영하는 시위를 조직한다.

장제스는 상하이의 자본가들 및 지하 갱단의 두목들과 일련의 회합을 갖고서 노동자들의 파업을 파괴할 세력을 규합해나간다. 드디어 4월 12일 새벽 암흑가의 암살단이 도시 전 지역에서 노조 사무실을 습격하여 하루 동안 400~700명을 살해한다. 장제스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공산당의 훈령에 따라 거의 모든 무기를 땅에 파묻거나 장제스 군대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궤멸 당한다.

이 잔혹한 습격이 있기 바로 일주일 전인 4월 5일에 스탈린은 중국에서의 국공합작에 대해 “우익들은 군대를 지휘할 능력 있는 사람을 보유하고 있고 부유한 상인들에게서 자금을 끌어 모을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을 레몬처럼 다 쥐어짜고 나서 내던져 버리면 된다”라고 연설했다. 그러나 쥐어 짜인 것은 오히려 노동자들이었다. 그런데도 스탈린은 국민당 정부를 돕는 것이 공산당의 임무라며 운동의 ‘과도함’을 자제하라고 명령한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는 혁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농민 소비에트를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권력자는 스탈린이었다.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두 명의 공산당원이 국민당 정부의 노동부 장관과 농업부 장관으로 입각한다. 그런데 다음날 창사를 지배하던 군벌이 노조와 농민 조직들을 파괴하면서 대규모 처형을 자행하기 시작한다. 분노한 지방의 지도자들이 창사를 공격하기 위해 수천 명의 농민 군대를 동원한다. 그러나 공산당은 이번에도 (5월 27일) “더 이상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정부 관리들을 기다려주기 바란다”는 전보를 타전하며 농민들의 투쟁 의지를 눌러버린다. 그렇지만 학살은 다른 성으로까지 계속 퍼져나가고 7월에는 국민당 정부까지 이 학살에 가담한다. 그리하여 총 2만 명 이상의 노동자·농민이 목숨을 잃는다. 7월 말에는 모든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이 불법화된다. 이로써 국공합작이 끝장나고 반혁명이 도시와 농촌을 완전히 지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은 역량을 상당히 손실한다.

그러자 스탈린은 이번에는 “새로운 혁명적 고조!”를 선언한다. 코민테른은 전국 공세에 착수하기 위해 농민 군대가 전략 도시들을 공격한다는 계획 아래 ‘추수 봉기’로 알려진 일련의 무장 봉기를 명령한다. 이에 따라 공산당은 8월 1일 허룽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3개 군단을 편성하고 주더로 하여금 2만 명을 이끌고 난창에서 봉기를 일으키게 한다. 공산당은 이후에 이날을 인민해방군 건군 기념일로 삼는다. 마오쩌뚱은 2천 명의 부대를 이끌고 창사를 공격하다가 한 차례의 전투에서 부대의 절반을 잃고 바로 후퇴한다. 일부 다른 부대들도 겨우 탈출하지만 대부분의 부대가 금새 몰살당하고 봉기는 7일 만에 실패로 끝난다. 마오쩌뚱은 9월에 자기 부대를 이끌고 후난성과 장시성 접경의 황량한 후진 지역인 징강산으로 퇴각한다.

이후로도 계속된 11월 하이루펑 소비에트 건설, 12월 ‘광둥 코뮌’ 건설, 1928년 8월 후난성 남부 대도시들에서의 봉기는 모조리 실패로 돌아간다. 이 ‘도시 봉기’들은 노동자들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한 채 진행됨으로써 무자비한 학살만 초래하고 끝난다. 공산당은 1928년 8월 7일 장시성 회의에서 무모한 봉기를 일으킨 좌편향 노선을 스스로 비판한다. 이에 따라 천두슈가 당 서기장에서 물러나고 취추바이가 주요 책임자가 된다.

그러나 1930년 5월 장제스·풍옥산·옌시산 사이에 전쟁이 발생하자 리리산으로 대표되는 좌익 모험주의가 다시 당의 지도기관을 지배하게 된다. 이들은 6월에 전국의 홍군을 동원하여 난창을 공격하다가 패배하고 7월에는 장시에서 소비에트를 건설하지만 불과 9일 만에 무너진다. 9월 당 전체회의는 리리산의 노선을 (노선상의 오류가 아닌) 전술상의 오류라고 비판한다.

마오쩌뚱은 농촌을 근거지로 삼고 국공합작으로 반제국주의 투쟁을 전개한다.

마오쩌뚱은 무리한 공격을 피하면서 징강산에서 역량을 보존하여 1만 명으로 노농홍군 4군단을 편성한다. 그리고 ‘농촌에서 혁명 근거지를 확대하여 도시를 포위한다’는 전략을 수립하고 ‘3대 규율’과 ‘6항주의’라는 생활 규율을 세운다. 3대 규율이란 일체의 행동은 반드시 지휘를 따른다, 인민에게서 바늘 한 개나 실 한 오라기도 뺐지 않는다, 지방 유지로부터 거두어들인 물건은 반드시 전체의 소유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6항주의란 매매는 공정하게, 대화는 부드럽게, 잠잘 때 사용하던 문짝은 원래 제자리에 갖다놓고 바닥에 깔았던 짚은 묶어놓는다, 빌린 것은 반드시 돌려주고 부서진 것은 반드시 보상한다, 아무 데나 대소변을 보지 않는다, 포로의 지갑에 손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오쩌뚱은 1928년 12월 근거지 주변의 농촌에서 모든 토지를 몰수하여 가족 수에 따라 분배하는 토지 개혁을 실시한다. 홍군 4군단은 규율 엄수와 토지 개혁을 기반으로 농민들과 공고한 관계를 형성한다.

장제스는 1930년 말부터 1931년 6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장시성 남부를 중심으로 공산당 토벌 작전을 실시한다. 그러나 홍군은 적이 진격해오면 우리는 후퇴한다, 적이 멈추면 우리가 그들을 교란시킨다, 적이 전투를 피하면 우리가 공격한다, 적이 후퇴하면 우리는 진격한다는 네 가지 게릴라 전술로 유격전을 펼쳐 장제스 군대를 괴롭힌다.

1931년 9월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한다. 그러자 10월에 상하이에서 80만 노동자가 항일구국연합회와 의용군을 조직하여 항일 투쟁에 나선다. 민중들은 일본 상품 불매 운동과 경제 절교 운동을 전개한다. 1932년 상하이 항전 때는 상하이의 상공회의소와 은행협회가 자발적으로 영업을 중단하는 등 민족 부르주아까지 투쟁에 참가한다.

장제스는 1933년 10월 일본과의 전투는 접어둔 채 100만 대군을 동원하여 홍군을 포위 공격한다. 1934년 10월이 되자 ‘해방구’의 중심부까지 심각한 위협에 놓이게 된다. 홍군은 포위를 뚫고 국민당 군대의 공격을 피해 점점 더 중국 서부의 오지로 깊숙이 들어간다. 결국엔 산시성에 있는 ‘소비에트 구(區)들’을 향해 나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방안으로 남는다. 마오쩌뚱은 이 방안을 집요하게 주장함으로써 공산당의 확고부동한 지도자로 자리를 굳힌다.

출발할 때 8~9만 명이었던 부대는 중국횡단 2만 5천 리(1만㎞)의 대장정을 마치고 1년 후에 구이저우성 준이에 도착했을 때는 겨우 4천 명만 남는다. 새로운 게릴라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일부 사람들이 거쳐 가는 지역들에 남았지만 이틀에 한번 꼴로 전투를 치르는 도중에 5만 명이 넘게 죽었으니 대장정은 그야말로 인간 인내심의 대서사시다.

공산당은 1935년 1월 준이에서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열고 저우언라이의 중앙군사위 주석 직을 마오쩌뚱에 넘기고 장원텐을 당 총서기로 선출하면서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한다. 중앙위원회는 8월에 항일 구국 통일 전선을 전술로 채택한다. 일본과 싸우기 위해 힘을 뭉치자는 주장은 전국 인민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

동북군의 장쉐량과 서북군의 양후청은 공산당과 연대하여 일본에 대항하자는 ‘연공항일(聯共抗日)’을 장제스에게 제안한다. 그러나 장제스는 여전히 공산당을 박살내야 한다는 ‘초공(剿共)’의 입장을 취하면서 장쉐량과 양후청을 해직시키려 한다. 이에 장쉐량은 1936년 12월 12일 전투를 격려하러 시안에 온 장제스를 억류하여 망국적인 반공 내전을 중지하고 연공항일의 조건을 수락하게 한다.

일본 군대는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를 습격하면서부터 한 달여 동안 11세 소녀에서부터 60세 노파까지도 마구잡이로 폭행·유린하면서 무자비하게 30만 명이 넘는 중국 인민을 학살―난징 학살이 대표적이다―한다. 이에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일제히 대일 항전에 합류한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발전하자 국민당 중앙위원회가 9월 23일 (공산당이 7월에 제안한) 국공합작을 정식으로 공포한다. 장제스도 할 수 없이 공산당의 합법적 지위를 승인하는 취지의 담화를 발표한다. 이로써 항일 민족 통일 전선이 정식으로 성립된다.

공산당은 통일 전선을 펼치면서도 독자적인 유격전과 항일 근거지 건설에 주력한다. 그런데 항일 투쟁이 진척되면서 왕징웨이 집단의 패배주의적 망국론과 근거 없이 낙관적인 속승론(速勝論)이 대두한다. 이에 마오쩌뚱은 1938년 5월 항일 전쟁의 올바른 길을 제시하기 위해 ‘지구전에 대하여’를 발표한다. 이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은 일본군에게 점령된 지역과 산업에서 비밀 노조를 조직하면서 끈기 있게 활동한다.

그러나 장제스 일파는 1938년 자신들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에서 노동자협회를 만들어 노동자들을 강제로 가입시키고 파업 반대와 공산주의 반대를 표방하면서 엄중히 통제한다. 그리고 국민당 대부르주아 친일파 왕징웨이 집단은 1939년 적에게 투항한다. 이 때문에 국공합작으로 고조되던 인민의 항전 분위기가 다시 침체된다.

이런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마오쩌뚱은 1940년 1월 신민주주의 강령을 발표한다. 신민주주의 강령은 중국 혁명의 임무를 자본주의 일반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반제 반봉건이라고 규정하고 1단계에서는 반(半)식민지·반(半)봉건사회를 독립된 민주주의 사회로 바꾸고 2단계에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이에 따라 공산당은 근거지에 항일 민주 정권을 세우고 정부 기관과 민간 기관에서 공산당원·진보분자(소부르주아계급)·중간분자(중산계급·노동자·농민)가 각각 1/3을 차지하게 한다.

마오쩌뚱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긴박한 시기에도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학풍에서의 주관주의, 당풍에서의 분파주의, 문풍에서의 공론을 배격하자는 정풍 운동을 전개한다.

공산당은 항일 전쟁에서 가장 선두에 섬으로써 급속히 세력을 확대하여 권력에 도전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다. 1937년에 3만 명이던 당원과 4만 명이던 홍군은 1940년에 이르러서는 각각 80만 명과 50만 명으로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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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선언>과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 김수행1998

<공산당선언>과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 『뉴스플러스』, 1998년 6월 18일호, 동아일보사

김 수 행 (서울대 교수. 경제학)

 『공산당선언』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주의자 동맹'의 이론적 실천적 강령으로서 1847 년 12월에서 1848년 1월 사이에 쓴 글이다. 마르크스가 30살이고 엥겔스가 28살 때의 일이다. 비록 길이는 짧지만 (우리말 번역서는 35쪽 안팎), 이 책만큼 마르크스 사상을 널리 그리고 정확하게 전달한 책은 없다.

 

 『선언』은 다음과 같은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2.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들, 3.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문헌, 4. 각종 반정부당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입장.

 

 『선언』은 자본주의가 사적 소유, 경쟁, 이윤 추구에 힘입어 끊임없이 기술을 혁신하고 시장을 개척함으로써 생산력을 놀랄만큼 발달시키고 있다는 점을 올바르게 인정한다.

 

  "부르주아지는 100년도 채 못되는 그들의 계급 지배 동안 과거의 모든 세대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고 더 거대한 생산력들을 창조했다. 인간을 위해 자연력들을 정복한 것, 기계류, 화학을 공업과 농업에 응용한 것, 기선 항해, 철도, 전신, 농업경작을 위해 대륙 전체를 개간한 것, 하천의 운하화, 거대한 주민들".

 

  그러나 『선언』은 자본주의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로 자본주의는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의 투쟁은 자본주의를 멸망시키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억압자와 피억압자는 끊임없는 대립 속에서 서로 마주섰으며,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공연하게 투쟁을 끊임없이 계속했는데, 이 투쟁으로 말미암아 사회 전체가 혁명적으로 재편되었든지 투쟁하는 계급들이 함께 몰락했다".

 

  둘째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노동자계급이 점점더 숫적으로 증가할 뿐 아니라 단결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곤 임금노예라는

'쇠사슬'뿐이지만 얻을 것은 새로운 세계 전체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자본주의에서는 주기적

으로 반복하여 경제위기 또는 공황이 발생하며, 이 경제위기에서는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함

으로써 공장과 기계는 일을 멈추고 쉬지 않을 수 없고 노동자는 대규모로 실직하여 생존을

위협받게 되는데, 이것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와 경쟁 및 이윤 추구가 더 이상 생산력을

발달시키거나 주민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지 못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

지배계급은 공장이나 기계나 토지 등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전환시키

고, 생산의 목적을 자본가들의 이윤 추구로부터 주민들의 욕구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변경시키며, 무정부적인 경쟁 대신에 계획을 도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선언』은 비밀결사인 '공산주의자 동맹'의 이론적 실천적 강령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타도라는 궁극목표를 천명할 뿐 아니라 매일매일의 당면과제도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토지 소유의 철폐. 2. 고율의 누진세. 3. 상속권의 폐지. 4. 국가자본과 배타

적인 독점권을 가진 국립은행을 통해 신용을 국가의 수중에 집중시킬 것. 5. 통신수단과 수

송수단을 국가의 수중에 집중시킬 것. 6. 국가가 소유하는 공장과 생산수단을 증가시킬 것.

7. 모든 사람에게 노동할 의무를 부여할 것. 8. 농업과 공업의 결합. 농촌과 도시의 차이를

점차로 철폐할 것. 9. 모든 어린이에게 공공의 무상교육을 제공할 것. 등등.

이상이 『선언』의 내용이다. 비록 30살에 쓴 글이지만, 그 내용은 49살에 쓴 『자본론』

제1권이나 67살에 쓴 『고타강령 비판』에서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선언』의 내용은 마

르크스의 생애 전체를 대표하는 사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문제는 『선언』이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를 이해하고 비판하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을

줄 수 있는가이다. 70여년 동안 유지되던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함으로써, 자본주의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TINA: There is no alternative.)든가 역사는 자본주의와 함께 종말을 고

한다는 사상이 널리 퍼지고 있는 지금,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자본주의의 타도를 외친

『선언』은 아무런 가치도 가질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먼저 소련과 동구 등 현실 사회주의가 『선언』에서 이야기하는 공산주의였는가라는 질문

을 던질 수 있다. 마르크스가 생산수단의 국유와 계획경제를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

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나 억압을 철폐하고 주민들의 욕망이나 필요를 충족시켜야 한다

는 지상 목표에 종속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고 경제를 계획적으

로 운영했지만, 정부 관료나 기업 경영자가 모든 주민이나 일반 근로자를 억압하고 지배했

던 현실 사회주의는 마르크스가 생각한 공산주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선언』의

공산주의(또는 '새로운 사회')는 여전히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우리에게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면서 『선언』의 현재적 의의를 살펴 보자.

첫째로 선진자본주의국에서는 1980년대 이래 복지국가의 제도들이 점점더 해체되고 있다.

학교와 병원이 모든 주민들에게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했는데, 이제는 무료 서비스가 크게

줄어 들면서 사설 학교와 사설 병원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모든 주민들의 욕망

이나 필요를 충족시킨다는 원리가 퇴보하고 자본가의 이윤 추구가 더욱 확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새로운 사회'로부터 더욱 멀어지는 것이다.

둘째로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는 주기적으로 반복하여 경제위기나 공황에 부닥치고 있다.

1974-75년에는 제1차 석유가격 폭등으로 세계 전체가 위기에 빠졌고, 1981-82년에는 제2차

석유가격 폭등으로 위기에 빠졌으며, 1987년 10월에는 세계 전체의 증권시장이 1929년의 주

가폭락보다 더 큰 폭락에 직면했다. 그리고 1997년에는 타이, 인도네시아, 한국이 경제위기

에 빠졌고, 일본은 장기적인 불황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자본주의 나라들

이 모두 경제위기를 경험했을 뿐 아니라 반복하여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은 『선언』의 관점

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한국의 경제위기를 해명하는 데 있어서도 경제위기가 재벌 때문에 발생했다든지,

노동운동 때문에 발생했다든지, 정경유착 때문에 발생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

해 한국의 경제위기는 한국적인 특수사정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가 지닌

일반적 속성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한국적인 특수사정이 경제위기의 발생시

기나 발생형태나 계속기간이나 탈출형태를 규정하는 것은 사실이다.

셋째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계급투쟁이 자본주의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

이라는 『선언』의 관점은 현재 더욱 분명히 증명되고 있다. 만약 지금과 같은 어려운 시기

에 노동자계급의 세력이 매우 강력하여 정리해고제와 변형근로제를 철폐하고, 노동시간을

단축함으로써 고용을 보장하며, 실업자의 생존과 인간적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사회보장제도를 확립할 수 있다면, 한국의 자본주의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자본주의'로 변

혁될 것이다. 사실상 1950-80년의 스웨덴이 그러한 유형이었다. 그러나 지금 노동운동이 패

배하고 IMF와 정부 및 재벌이 일방적으로 승리한다면, 한국의 자본주의는 실업자의 격증,

빈부격차의 심화, 마약과 범죄의 격증, 정치적 사회적 불안정, 폭동에 의해 지배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넷째로 현재 자본은 세계 각국을 자유롭게 이동하기 때문에, 1848년의 『선언』은 자본의

세계화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이 주장은 전혀 잘못된 것이다. 마르크스

는 자본의 가치증식욕이 무한하기 때문에 자본은 모든 나라들에 침투할 뿐 아니라 모든 나

라들의 법률이나 조세제도를 동일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블루라운드나 그린라운드 등도 예측한 것이다. 또한 자본의 세계화가 진행하면 노동운동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서도,『선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각국의 노동자계급

은 당연히 맨 먼저 자기 나라의 지배계급을 끝장내야 한다", 그리고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

하라".

『공산당선언』은 150년전의 유물이 아니라, 공황이 빈발하고 대량실업이 발생하며 소수

의 초국적 금융자본이 거대한 투기이득을 얻고 있는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를 이해하고 비판

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최갑수, "[공산당선언]의 현재적 의의" 내용요약

{공산당선언}은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지침서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당장에 기대한 것은 독일에서의 부르주아혁명이었다. 그러나 1848년의 '유럽혁명'은 {선언}이 예상했던 부르주아혁명은 아니었고, 그 과정에서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망각하고 끝내 혁명을 배신했다. {선언}과 1848년의 경험과의 괴리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우선 그것은 {선언}의 역사적 분석의 배경이 자본주의사회가 아니라 전자본주의적인 사회구성인 데서 비롯하였다. {선언}은 세 가지 내지 네 가지 각기 다른 차원의 시간성을 가지며, 따라서 '먼 미래'(프롤레타리아혁명)와 '근접 미래'(독일의 자본주의적 미래) 그리고 '근접 과거'(영국과 프랑스에서의 자본주의로의 이행)가 {선언}의 '현재'에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그 괴리는 저자들의 거시적인 역사관의 핵심인 이중혁명관 자체로부터 말미암았다. 영국은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분석의 본보기였고 그들은 영국에서 자본주의의 미래를 보았다. 하지만 이 자본주의 세계의 주인공이라고 하는 부르주아지의 상(像)을 그들이 얻어낸 곳은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 그들은 영국의 자본주의 발전과 프랑스혁명의 역사적 성과를 겹쳐놓음으로써 부르주아지와 자본가계급을 동일시하고 혁명적 부르주아지라는 신화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바로 이러한 측면이 {선언}의 현재적 의미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제대로 부르주아혁명을 경험하지 못한 우리에게 {선언}은 부르주아지를 위한 '송가(頌歌)'로, 자본주의의 역동성은 사회주의의 미래를 위해 포기해서는 안될 역사적 담보물로 보인다. {선언}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르주아혁명의 역사적 과제를 맡아줄 것을 부탁하고 있으며, 그것이 오직 계급투쟁을 통해 이룩될 것임을 웅변하고 있다. 세기말의 혼돈을 넘어 {선언}은 21세기가, 외적 팽창의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가 내부로부터 '지양(止揚)의 해체력'을 발견하게 될 것임을 새롭게 전망하고 있는 것이다.




<공산당선언> 150주년 : '잊기 위하여'!

이해영(연구위원)




인간은 단순히 말만을 할 수 있는 동물은 아니다. 그들은 쓰고 읽을 수 있는 존재이다. 문자가 있음으로 해서 인간은 먹고 사는 일이 아무리 엄혹하다 하더라도 다른 동물과 구분되고 나아가 함께 세상을 바꾸는 일도 가능해 진다. 문자는 물론 밥이 아니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 아니 좀 더 인간답게 잘 살기 위해서는 밥만으로 충분치 않다. 이런 의미에서 문자는 존재 필수품이다.

이 고마운 문자로 쓰여진 지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 가운데, '인간답게 잘 살기'에 보탬이 되는 것들이 있다. 단연 여러 경전(經典)이 첫손에 꼽힌다. 그러나 성인의 경서에서 오늘날의 노동자가 어떻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지를 읽어 내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좀 더 노동자의 처지에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또 세상 어디에 문제가 있으며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지를 좀 쉽게 알려 주는 문자들이 필요하다. 더불어 '노동자 세상'에 대한 소중한 꿈도 담겨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을 게다. 말하자면 노동자용 모험소설이라고 할 까?

청년기의 열정과 도전의식으로 가득찬 맑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 세상에 나온 것은 지금부터 150년 전이다. 사실 이런 류의 구조 개혁을 촉구하는 선언서는 역사적으로도 처음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당시 그 어떤 요즘 식의 공산당이 존재했던 것도 아니다. 좀 '쫀쫀하게' 평하자면 급진적인 국제 지식인 써클 내지 정파가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선언>은 새 세상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고,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이긴 하지만 한 때 세상을 바꾸어 보기도 하였다. 어쩌면 근대 이후 역사에서 이 짧은 팜플렛만큼 세상을 뿌리채 흔든 글도 드물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선언>의 중심사상에 그 이유가 있다.

첫째, <선언>은 사회의 경제적 토대가 역사발전의 기초라는 데에서 출발한다. 이후 오늘날까지도 - 부당하게도 - 무슨 결정론이니 하는 욕을 먹고 있지만, 이 명제는 세상살이에 먹고 사는 문제의 엄중함과 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말만의 또는 머리속의 좋은 세상이 허구라는 것을 알려주는 '구조' 개혁의 사상이 확립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소유관계의 재편을 포함한 사회의 발본적인 혁신 또는 구조 - 요즘말로 '시스템' - 의 개혁 과 교체 없이 노동자 생활의 근본적 변화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둘째, <선언>은 지금까지의 역사란 것이 그 어떤 달콤한 상부상조의 목가적 꿈의 세계가 아니라, 먹고 먹히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그것도 먹는 계급과 먹히는 계급사이의 갈등과 투쟁의 세계였음을 보여준다. 이 서늘한 현실주의는 '노동자의 세상'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얻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고 <선언>은 주장하는 것이다.

셋째, <선언>은 노동자들이 어떻게 싸워야 하는 지를 제시한다. 요즘의 우리 말로 하면 한마디로 '정치세력화'이다. 그것도 단순히 군중이나 몇 몇 집단이 아니라, 전체 계급으로 조직된 정당의 불가피성을 주창한다. 그리고 모든 억압받는 계급과 사회 전체가 해방되지 않은 채, 노동자 자신만의 해방이 가능하지 않음을 <선언>은 강조한다. 이는 노동자운동이 계급이기주의나 혹은 계급 로비주의와 무관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선언>이 오늘날 다시 읽히는 이유는 단순히 정치적이거나 기념행사적인 데에 있지 않다. <선언>은 최근의 자본의 '세계화' 또는 이른바 '지구화'의 불가피성과 그 효과를 법칙적인 것으로 본다. 그 동안 체제경쟁으로 가리워 졌던 상황이 그 장막이 걷히면서 - 비교될 수 없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 150년전과 같은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선언>의 대안은 바로 국제적인 노동자 연대투쟁, 곧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것이었다. 지구적인 자본운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국적인 노동운동의 현실에 비추어 다시금 주목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누구나 알듯이 <선언>과 '우리'사이에는 단지 150년이라는 시간적 거리뿐만 아니라, 좌절한 현존사회주의의 실험과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의 노동자 정당의 경험이라는 역사적 거리가 가로 놓여 있다. 하지만 그 거리는 이승과 저승처럼 결코 넘지 못할 그 무엇은 아닐게다.

<선언>이 발표된지 150년, 이제 잊혀 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잊기 위하여', 먼저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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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노동과 자본, 칼 맑스

임금 노동과 자본

 

사람들은 우리가 요즘의 계급 투쟁과 민족 투쟁의 물질적 토대를 이루는 경제 관계들을 설명하지 않았다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비판해 왔다. 우리는 경제 관계가 정치적 충돌 속에서 직접 떠오를 때에만 의도적으로 언급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매일매일 벌어지는 계급 투쟁을 추적하는 일, 또 날마다 새로 만들어지는 역사적 자료를 경험적으로 입증하는 일이 중요했다. 2월 혁명과 3월 혁명을 일으킨 노동자 계급이 진압됨과 동시에, 그들의 적들, 즉 프랑스의 부르주아 공화파, 유럽 대륙 어디서나 봉건적 절대주의에 맞서 투쟁했던 부르주아와 농민 계급도 패배했다는 사실, 프랑스에서 '점잖은 공화제'가 승리한 것은 동시에 영웅적인 독립 전쟁으로 2월 혁명에 응답한 여러 민족이 몰락한 것이기도 했다는 사실, 끝으로 혁명적 노동자들의 패배와 함께 유럽은 다시 그 옛날의 이중 노예제, 즉 영국--러시아의 노예제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는 사실 등을 입증해야 했던 것이다. 파리에서의 6월 투쟁, 빈 함락, 1848년 11월에 벌어진 베를린의 희비극, 폴란드와 이탈리아와 헝가리에서의 필사적인 노력, 아일랜드의 대기근, 이 모두가 유럽에서 벌어진 부르주아지와 노동자 계급 사이의 투쟁을 집약해 놓은 주요 계기들이었으며, 우리는 이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입증했다. 모든 혁명적 봉기는 비록 그 목표가 계급 투쟁과는 동떨어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혁명적 노동자 계급이 승리하지 않는 한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 또 모든 사회 개혁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봉건적 반(反)혁명이 무기를 들고 세계 대전을 치르지 않는 한에는 하나의 공상에 그친다는 것을 입증했던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지만 우리들의 서술에서는 벨기에스위스가 역사의 거대한 화폭에 담긴 희비극적이고 희화적인 풍속화였는데, 전자는 전형적인 부르주아 군주국이고 후자는 전형적인 부르주아 공화국으로 이 두 국가는 자신들이 계급 투쟁과도 관계없고 유럽의 혁명과도 관계없다고 생각한다.

  1848년의 계급 투쟁이 대규모 정치 투쟁의 형태로 벌어진 것을 우리 독자들도 지켜 보았으므로, 이제 부르주아지의 존립과 그 계급 지배의 토대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 노예 제도의 토대이기도 한 경제 관계 그 자체를 좀더 상세히 파고들 때가 되었다.

  우리는 크게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서술하려고 한다. 1) 임금 노동과 자본의 관계, 노동자들의 노예 상태, 자본가들의 지배, 2) 현체제 밑에서는 피할 수 없는 중간 부르주아 계급들과 이른바 시민층의 파멸, 3) 세계 시장의 전제 군주인 영국에 의해 유럽 여러 민족의 부르주아 계급들이 겪는 상업적 예속착취.

  우리는 독자들이 정치 경제학의 가장 초보적인 개념조차 모르는 것으로 전제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하고 쉽게 서술하고자 한다. 우리는 노동자들이 잘 이해하기를 바란다. 게다가 독일에서는 기존 상태를 옹호하는 특허 변호사들을 비롯하여 자칭 사회주의적 사기꾼들과, 사람들에게서 인정받지 못하는 정치적 천재들---분열된 독일에는 이런 자들이 나랏님들보다도 더 많은데---에 이르기까지, 가장 간단한 경제 관계에 대해서도 그냥 보아넘길 수 없는 극심한 무지와 개념적 혼란이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우선 첫번째 문제를 살펴보자.

  임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노동자들에게 "당신의 임금은 얼마나 되느냐?"고 묻는다면,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나는 나의 부르주아로부터 일당 1마르크를 받는다."고 대답할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나는 2마르크를 받는다."등등의 대답을 할 것이다. 그들이 속해 있는 다양한 노동 부문에서 노동을 한 대가로, 예를 들면 아마포 한 자를 짜거나 전지(全紙) 한 장 분량을 조판하는 데 대한 보수로 그때그때마다 부르주아에게서 받는 다양한 금액을 제시할 것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금액이 다양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한 점에 귀착한다. 즉 임금이란 자본가가 정해진 노동 시간 또는 정해진 노동을 제공하는 데 대해 지불하는 금액인 것이다.

  따라서 마치 자본가는 돈으로 노동자의 노동을 사고, 또 노동자들은 돈을 받고 그에게 자신의 노동을 파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겉모습일 뿐이다. 그들이 돈을 받고 자본가에게 파는 것은 사실상 자신의 노동력이다(승수의 도움말 노동과 노동력을 구분하는 이유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을 한다. 노동은 시간이라는 단위로 잴수 있는 양을 뜻하며 노동력은 어떤 대상에 노동이라는 행위를 가할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 둘의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고용된 노동자가 잉여 노동을 하기 때문이다. 잉여 노동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보자. 한국의 노동자들의 평균적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 자신들이 하루에 일해야 할 평균 노동 시간이 4시간이라고 가정하자. 이것을 필요 노동이라고 한다. 그리고 한국의 노동자들이 하루에 평균 8시간을 일한다고 가정하면 나머지 4시간은 자신들의 생활과는 무관한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노동을 잉여 노동이라고 하고, 이 노동에 의해 창출되는 가치를 잉여 가치라고 한다. 한마디로 한국의 노동자들은 4시간의 잉여 노동에 대해서는 그 대가를 지불 받지 못한 셈인 것이다. 그래서 잉여 노동을 불불(不拂) 노동이라고도 한다.). 자본가는 이 노동력을 하루, 한 주일, 한 달 등의 단위로 산다. 그리고 노동력을 산 뒤에 그는 계약 기간에 노동자를 부림으로써 그것을 쓴다. 자본가는 자신이 노동자의 노동력을 산 바로 그 금액, 예를 들면 2마르크로 2파운드의 설탕이나 정해진 분량의 다른 어떤 상품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가 2파운드의 설탕을 사는 데 쓴 2마르크는 설탕 2파운드의 가격이다. 그가 12시간 동안 쓸 노동력을 사는 데 쓴 2마르크는 12시간 노동의 가격이다. 따라서 노동력은 설탕보다 나을 것도 없고 못할 것도 없는 하나의 상품이다. 전자는 시계로, 후자는 저울로 측정된다.

  노동자는 자신의 숭품인 노동력을 자본가의 상품인 화폐와 교환하며, 이 교환은 정해진 비율에 따라 이루어진다. 즉 정해진 시간 동안 사용될 노동력이 정해진 양의 화폐와 교환되는 것이다. 12시간 동안 베를 짜는 작업은 2마르크와 교환된다. 그런데 이 2마르크는 내가 2마르크로 살 수 있는 다른 모든 상품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사실상 노동자는 자신의 상품인 노동력을 모든 종류의 상품과, 그것도 정해진 비율로 교환해 왔던 것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2마르크를 줌으로써 그에게 그만큼의 고기, 그만큼의 옷, 그만큼의 땔감, 그만큼의 등잔불 등등을 그의 노동일(勞動日)과 교환해 준 셈이다. 따라서 이 2마르크는 노동력이 다른 상품들과 교환되는 비율, 즉 그의 노동력의 교환 가치를 나타낸다. 화폐로 표현된 상품의 교환 가치가 바로 상품의 가격인 것이다. 따라서 임금이란 사람들이 보통 노동의 가격이라고 부르는 노동력의 가격을 가리키는, 즉 인간의 피와 살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이 독특한 상품의 가격을 가리키는 특별한 이름일 뿐이다.

  한 노동자, 예를 들어 직조공을 생각해 보자. 자본가는 그에게 직조기와 실을 제공한다. 직조공은 일에 착수하며, 실은 아마포가 된다. 자본가는 그 아마포를 차지하고 그것을 예컨대 20마르크에 판다. 그러면 직조공의 임금은 아마포 가운데 한 부분, 20마르크 가운데 한 부분, 그의 노동 새산물 가운데 한 부분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아마포가 팔리기 훨씬 전에, 어쩌면 그것이 완성되기 훨씬 전에 직조공은 자신의 임금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본가는 아마포를 팔아서 생기는 돈으로 임금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된 돈으로 지불한다. 부르주아가 제공한 직조기와 실이 족조공의 생산물이 아니듯이, 그가 자신의 상품인 노동력과 교환하여 받은 삼품들도 그의 생산물이 아니다. 부르주아는 자신의 아마포를 살 사람을 전혀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또 그가 그것을 판다고 하더라도 임금조차 뽑아내지 못할 수도 있다. 또 그는 그것을 직조공의 임금에 비해 아주 많은 이윤을 남기고 팔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직조공과 아무 상관도 없다. 자본가는 자신이 이미 지니고 있던 재산, 즉 자기 자본의 일부분으로 직조공의 노동력을 사며, 이것은 그가 자기 재산의 다른 부분으로 원료---실---와 노동 도구---직조기---를 사는 것과 꼭 마찬가지다. 아마포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을 포함해 이것들을 다 산 뒤에 자본가는 생산을 하게 되며, 이때 원자재와 노동 도구는 단지 그의 것일 뿐이다. 물론 우리의 착한 직조공도 후자(노동도구--역자)에 속하는데, 그는 직조기와 마찬가지로 생산물이나 생산물의 가격 가운데에 자기 몫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임금은 노동자가 생산한 상품 속에 들어 있는 노동자의 몫이 아니다. 임금은 자본가가 얼마만큼의 생산적 노동력을 사들이는 데 사용하는 기존 상품의 일부다.

  따라서 노동력은 그 소유자인 임금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파는 하나의 상품이다. 그는 왜 그것을 파는가? 살기 위해서다.

  그러나 노동력의 활용, 즉 노동은 노동자 자신의 생명 활동이며 자기 삶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필요한 생활 수단을 확보하려고 이 생명 활동을 제3자에게 파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생명 활동이 그에게는 생존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살려고 일하는 것이다. 그는 노동이 자기 삶의 일부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은 그의 삶을 희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제3자에게 내맡긴 하나의 상품이다. 따라서 그가 활동해 낳는 산물도 그가 활동하는 목적이 아니다. 그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생산하는 것은 그가 짜는 비단도 아니고, 그가 광산에서 캐 내는 금도 아니며, 그가 짓는 궁전도 아니다. 그가 자기 자신을 위해 생산하는 것은 임금이며, 비단·금·궁전이 그에게 오면 정해진 양의 생활 수단으로, 아마 면재킷이나 동전이나 지하실 주택으로 변할 것이다. 그런데 12시간 동안 천을 짜고, 실을 뽑고, 구멍을 뚫고, 선반을 돌리고, 집을 짓고, 땅을 파고, 돌을 깨고, 짐을 나르는 등등의 일을 하는 노동자가 이 12시간 동안의 옷감짜기, 실뽑기, 구멍뚫기, 선반 작업, 집짓기, 삽질, 돌깨기를 자기 삶을 드러내는 것으로, 즉 삶으로 여기겠는가? 정반대다. 그의 삶은 이러한 활동이 멈출 때, 이를테면 식탁에서, 선술집 의자에서, 잠자리에서 시작된다. 반면에 12시간의 노동이 그에게 뜻 있는 이유는 그것이 옷감짜기, 실뽑기, 구멍뚫기 등등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식탁으로, 선술집 의자로, 잠자리로 데려다 주는 벌이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에가 애벌레로 근근이 목숨을 부지하려고 실을 뽑는다면, 그 누에는 틀림없는 임금 노동자일 것이다. 노동력이 늘 상품이었던 것은 아니다. 노동은 늘 임금 노동, 다시 말해서 자유로운 노동이었던 것이 아니다.황소가 자신의 능력을 농부에게 팔지 않듯이, 노예도 자신의 노동력을 노예 소유주에게 팔지 않았다. 노예는 자신의 노동력과 함께 통째로 그 소유자에게 영원히 팔리기 때문이다. 그는 한 소유자의 손에서 다른 소유자의 손으로 넘어갈 수 있는 상품이다. 그 자신이 상품이며, 노동력이 그의 상품인 것은 아니다. 농노는 자기 노동력의 일부만을 판다. 그가 지주에게서 임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지주가 그에게서 공납을 받아 낸다.

  농노는 토지에 딸려 있으며 토지의 주인에게 수확물을 바친다. 반면에 자유로운 노동자는 자기 자신을 팔며, 그것도 토막으로 나누어서 판다. 그는 날마다 자기 삶에서 8·10·12·15시간은 그것을 산 사람의 것이다. 노동자는 그가 바라면 언제라도 자신을 고용한 자본가에게서 떠나며, 또 자본가도 그가 적절하다고 생각하면 언제라도 곧바로 노동자를 해고한다. 즉 그가 노동자에게서 이득을 보지 못하거나 기대했던 것만큼 이득을 보지 못하면 곧 해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력 판매가 유일한 소득원인 노동자는 굶어 죽지 않으려면 구매자 계급 전체, 즉 자본가 계급을 떠날 수가 없다. 그는 이 자본가 또는 저 자본가의 소유물은 아니지만 자본가 계급의 소유물인 셈이다. 따라서 그가 할 일은 주인을 찾는 것, 즉 이 자본가 계급 속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살 사람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자본과 임금 노동의 관계를 좀더 상세히 다루기 전에, 임금 결정에 영향을 주는 가장 일반적인 사정들을 간단히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미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임금이란 상품, 즉 노동력의 가격이다. 따라서 임금은 다른 모든 상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법칙과 똑같은 법칙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면 상품의 가격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하는 물음이 나온다.
 
 
 

 

상품의 가격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 사이의 경쟁에 의해, 공급에 대한 수요의 관계, 수요에 대한 공급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상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경쟁은 세 측면을 갖는다.

  똑같은 상품을 서로 다른 판매자들이 공급한다. 똑같은 품질의 상품을 가장 싸게 파는 사람이 나머지 판매자들을 누르고 최대의 판로를 확보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처럼 판매자들은 판로, 즉 시장을 찾아서 앞다투어 투쟁한다. 그들은 모두 팔기를 바라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팔기를 바라며, 될 수만 있다면 나머지 판매자들을 밀어내고 혼자서 팔기를 바란다. 따라서 제각기 다른 사람보다 싸게 판다. 그래서 판매자들 사이에 경쟁이 일어나고, 그 경쟁은 공급하는 상품의 가격을 떨어뜨린다.

  그러나 구매자들 사이에서도 경쟁이 일어나며, 이것은 다시 공급되는 상품의 가격을 올린다.

  끝으로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의 경쟁이 일어난다. 전자는 될 수 있는대로 싸게 사려고 하고, 후자는 될 수 있는 대로 비싸게 팔려고 한다.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경쟁의 결과는 앞에서 제시된 경쟁의 두 측면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즉 경쟁이 구매자 진영에서 더 심한가, 아니면 판매자 진영에서 더 심한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산업은 두 진영의 군대를 싸움터에 끌어들여 서로 싸우게 하며, 그들 각자는 또 자기 군대의 대열 안에서도 전투를 치른다. 자기 대열 안에서 난투극을 가장 적게 벌이는 군대가 상대를 누르고 승리한다.

  시장에 100꾸러미의 면화가 나와 있는데, 살 사람은 1000꾸러미를 바란다고 생각해 보자. 이 경우에는 수요가 공급의 10배나 된다. 따라서 구매자들 사이의 경쟁이 아주 치열할 것이며, 그들은 각각 한 꾸러미라도, 될 수만 있다면 100꾸러미 모두를 혼자서 차지하려 할 것이다. 이 예는 멋대로 꾸며 낸 것이 아니다. 상업의 역사를 보면 면화가 흉작일 때 서로 동맹을 맺은 몇몇 자본가들이 100꾸러미가 아니라 지구상의 면화 재고량 모두를 다 사들이려고 한 시기가 있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경우에는 어떤 한 구매자가 면화 꾸러미를 비교적 더 비싼 값에 사들임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물리치려고 할 것이다. 적군의 대열 속에서 치열한 격투가 벌어지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100꾸러미가 모두 팔릴 것을 확신한 판매자들은 상대편에서 앞다투어 가격을 올리고 있는 순간에 내분을 일으켜 상품 가격을 떨어뜨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할 것이다. 따라서 판매자 진영 안에는 갑자기 평화가 찾아온다. 그들은 냉철하게 팔짱을 끼고 마치 사람처럼 단결하여 구매자들과 대립한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사야겠다는 사람들조차 그 이상은 더 못 내겠다는 명확한 한도를 제시하지 않는 한, 그들의 요구에는 한도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한 상품의 공급이 이 상품에 대한 수요보다 적을 때에는, 판매자들 사이의 경쟁이 아주 미약하거나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판매자들 사이의 경쟁이 줄어드는 만큼, 그것에 비례해서 구매자들 사이의 경쟁은 심해진다. 그 결과 상품 가격은 많든 적든 뚜렷하게 올라간다.

  잘 알려진 대로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는 정반대의 경우가 더 자주 일어난다. 공급이 수요를 훨씬 더 넘어서는 경우에는 판매자들 사이의 필사적인 경쟁, 구매자의 부족, 상품을 헐값으로 팔아 치우는 사태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가격의 오름과 내림이란 무엇을 뜻하며, 높은 가격과 낮은 가격은 무엇을 뜻하는가? 모래알도 현미경으로 보면 커 보이고 탑도 산과 비교하면 낮은 것이다. 그리고 가격이 수요와 공급의 관계로써 결정된다면, 수요와 공급의 관계는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길 가는 부르주아 가운데 아무나 붙잡고 한번 물어 보자. 그는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마치 또 하나의 알렉산더 대왕처럼 이 형이상학적 매듭을 구구단으로 끊어 버릴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만일 내가 파는 상품을 생산하는 데 100 마르크가 들었고 내가 이 상품을 팔아서 110 마르크를 받는다면, ---물론 1년이 지난 뒤에---그것은 얼마 안 되는 공정하고 적절한 이득이다. 만일 내가 교환을 통해서 120, 130 마르크를 받는다면, 그것은 높은 이득이다. 그리고 만일 내가 200 마르크씩이나 받는다면, 그것은 엄청나고도 굉장한 이득이다. 그러면 부르주아에게 이윤의 척도 노릇을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상품의 생산비다. 그가 이 상품을 정해진 양의 다른 상품들, 생산하는 데 더 적은 비용이 들어간 상품들과 교환했다면, 그는 손해를 본 셈이다. 또 자기 상품을 정해진 양의 다른 상품들, 생산하는 데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간 상품들과 교환했다면, 그는 이득을 본 셈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상품의 교환 가치가 영(零)---생산비---보다 낮은가 높은가 하는 정도에 따라 이득의 오르내림을 계산한다.

  우리는 이미 수요와 공급 사이의 변동 관계가 때로는 가격을 올리고 때로는 내리며, 때로는 낮은 가격, 때로는 높은 가격을 형성하게 한다는 사실을 보았다. 만일 공급이 부족하거나 수요가 지나치게 늘어나서 어떤 상품의 가격이 올라간다면, 어떤 다른 상품의 가격이 반드시 그만큼 떨어진다. 왜냐하면 상품의 가격이란 그것이 다른 상품들과 교환되는 비율을 화폐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단 한 자의 가격이 5마르크에서 6마르크로 올랐다면 은의 가격은 비단에 비해 떨어진 것이며, 또 그와 마찬가지로 예전 가격에 묶여 있는 다른 모든 상품들의 가격도 비단에 비해 떨어질 것이다. 이제 똑같은 양의 비단을 얻으려면 교환할 때 더 많은 양의 다른 상품을 주어야 한다. 한 상품의 가격이 오르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는가? 많은 양의 자본이 번창하는 산업 부문에 몰릴 것이며, 자본이 이처럼 더 유리한 산업 영역으로 몰려드는 사태는 그 부문에서 얻는 이득이 보통 수준으로 떨어질 때까지, 아니 오히려 그 생산물의 가격이 과잉 생산 때문에 생산비 밑으로 떨어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반대로 한 상품의 가격이 그 생산비 밑으로 떨어지면, 자본은 이 상품을 생산하는 데서 손을 뗄 것이다. 한 산업 부문이 더 이상 시대에 맞지 않아서 몰락할 수밖에 없는 경우를 빼면, 자본의 이 같은 도피는 그 상품의 생산, 즉 공급을 줄일 것이며, 이것은 그 공급이 수요와 맞아떨어질 때까지, 따라서 그 가격이 다시 생산비 수준으로 오를 때까지, 아니 오히려 공급이 수요보다 더 적어질 때까지, 즉 그 가격이 다시 생산비보다 더 오를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한 상품의 시가(時價)는 늘 생산비보다 높거나 낮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본이 한 산업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끊임없이 흘러 들어가거나 흘러 들어오는 것을 본다. 높은 가격은 지나치게 심한 유입을 낳고, 낮은 가격은 지나치게 심한 유출을 낳는다.

  우리가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볼 경우, 공급뿐만 아니라 수요도 생산비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보여 줄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되면 우리가 다루는 주제에서 너무 멀어지게 된다.

  우리가 방금 본 바와 같이 수요와 공급의 변동은 한 상품의 가격을 늘 다시 생산비로 되돌려 보낸다. 상품의 실제 가격은 늘 생산비보다 높거나 낮다. 그러나 오르내림은 서로 상쇄되므로, 얼마 동안 산업에서 나타난 썰물과 밀물을 합산해 보면 상품은 그 생산비에 따라 교환되며, 따라서 그 생산비에 의해 결정된다.

  이처럼 생산비에 의해 가격이 결정된다는 것을 경제학자들과 같은 의미로 이해하면 안 된다. 경제학자들은 상품의 평균 가격이 생산비와 같다고 말하며, 이것은 법칙이라는 것이다. 가격의 오름은 내림으로 또 내림은 오름으로 서로 상쇄되는 이 무정부적인 운동을 그들은 우연으로 여긴다. 그러나 다른 경제학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듯이, 똑같은 권리로 가격의 변동을 법칙으로 여기고 생산비에 의한 가격 결정을 우연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동, 즉 자세히 살펴보면 끔찍하기 짝이 없는 황폐화를 수반하며 마치 지진처럼 부르주아 사회를 기초에서부터 뒤흔드는 이 변동 과정 속에서만 생산비에 의한 가격 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무질서 운동 전체가 부르주아 사회의 질서다. 이 같은 산업의 무정부 상태의 과정 속에서, 즉 이 같은 순환 운동 속에서 경쟁은 말하자면 한 극단을 다른 극단으로써 상쇄한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생산비에 의한 상품 가격의 결정은 그 상품의 가격이 생산비 이상으로 오르는 시기가 그것이 생산비 이하로 떨어지는 시기에 의해 상쇄되는 방식으로, 또는 그 반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이것은 공산품 하나하나마다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산업 부문 전체에만 해당한다. 따라서 이것은 개별 산업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가 계급 전체에만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생산비에 의한 가격 결정은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에 의한 가격 결정과 똑같다. 왜냐하면 생산비는 첫째, 원자재와 도구의 마모분으로, 즉 그 생산에 얼마만큼의 노동일이 들었고 따라서 얼마만큼의 노동 시간을 나타내는 공산품으로 이루어지며, 둘째, 바로 시간이 그 척도가 되는 직접적 노동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상품의 가격을 일반적으로 규제하는 바로 그 일반 법칙이 당연히 임금, 즉 노동의 가격도 규제한다.

  노동의 임금은 수요와 공급의 관계에 따라, 즉 노동력의 구매자인 자본가와 노동력의 판매자인 노동자 사이의 경쟁이 어떠냐에 따라 때로는 오르고 때로는 내릴 것이다. 임금의 변동은 대체로 상품 가격의 변동에 상응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동 속에서 노동의 가격은 생산비에 의해, 즉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만들어 내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면 노동력의 생산비란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자를 노동자로 유지시키고 또 그를 노동자로 길러 내는 데 필요한 비용이다.

  따라서 어떤 노동을 길러 내는 기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그 노동의 가격, 즉 임금도 낮아진다. 숙련 기간이 거의 필요하지 않고 단지 노동자의 육체적 존재만으로도 충분한 산업 부문에서는 노동자를 만들어 내는 데 필요한 생산비가 거의 생명과 노동 능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상품에만 국한된다. 그러므로 그의 노동의 가격은 필요한 생활 수단의 가격으로 결정된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공장주는 자기 생산비와 이에 따른 생산물 가격을 계산할 때, 노동 도구의 소모분을 계산에 넣는다. 예를 들어 그가 어떤 기계를 사는 데 1000마르크를 들였고 또 이 기계는 10년 동안 쓰고 나면 닳아 없어진다면, 그는 10년 뒤에 이 기계를 새 것으로 바꾸려고 해마다 100마르크를 상품 가격에 포함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단순한 노동력의 생산비 속에는 노동자 종족이 번식하고 또 닳아 없어진 노동자들을 새로운 사람들로 교체할 수 있기 위한 비용, 즉 대를 이어 가는 비용이 포함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기계의 마모와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의 마모 또한 계산에 포함된다.

  따라서 단순한 노동력의 생산비는 노동자의 생존비와 대를 이어 가는 비용으로 귀착한다. 이러한 생존비와 대를 이어 가는 비용의 가격이 임금을 이루는 것이다. 이렇게 결정되는 임금을 최저 임금이라고 한다. 생산비에 의한 상품 가격의 결정이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이 최저 임금은 개별적인 개인이 아니라 유(類) 전체에 대해서 타당한 것이다. 노동자 개개인,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생존하고 대를 이어 갈 수 있을 만큼의 보수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 전체의 임금은 변동 속에서도 이 최저치에 일치하게 된다.

  임금과 다른 모든 상품의 가격을 규제하는 가장 일반적인 법칙을 알아 보았으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의 주제를 좀더 자세히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은 새로운 원자재와 새로운 노동 도구와 새로운 생활 수단을 생산하려고 사용되는 원자재와 노동 도구와 각종 생활 수단으로 이루어진다. 이 모든 구성 부분은 노동의 창조물이고, 노동의 산물이며, 축적된 노동이다. 축적된 노동, 즉 새로운 생산에 도구로 쓰이는 노동이 곧 자본이다.

  경제학자들은 위와 같이 말하고 있다.

  흑인 노예란 무엇인가? 흑인종에 속하는 한 인간이다. 위의 설명은 이런 식의 설명이나 마찬가지다.

  흑인은 흑인이다. 어떤 관계를 맺을 때에만 그는 비로소 노예가 된다. 면방적기는 면화에서 실을 뽑는 기계다. 어떤 관계 속에서만 그것은 자본이 된다. 이 관계에서 떼어 냈을 때 그것은 자본이 아니다. 이는 마치 금이 그 자체로는 화폐가 아니며, 설탕이 설탕 가격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생산 속에서 인간은 자연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서로서로에 대해서도 영향을 끼친다.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협력하고 자신들의 활동을 서로 교환함으로써만 생산을 하게 된다. 생산하려고 인간은 어떤 관계와 관련을 맺으며, 또 그들은 이러한 사회 관계와 관련 속에서만 자연에 대해 작용을 가하고 생산을 하게 된다.

  생산자들 서로간에 맺는 이러한 사회적 관계, 즉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활동을 교환하고 생산이라는 공동 행위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조건은 생산 수단의 성격에 따라서 당연히 달라질 것이다. 총포라는 새로운 전쟁 도구가 발명되면서 군대의 내부 조직 전체가 반드시 바뀔 수밖에 없었고, 각 개인을 군대의 일원으로 만들고 군인으로서 활동할 수 있게 만드는 조건이 바뀌었으며, 다양한 병과(兵科)들 사이의 관계도 바뀌었다.

  개인들로 하여금 생산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사회 관계, 즉 사회적 생산 관계는 따라서 물질적 생산 수단과 생산력의 변화 발전과 더불어 변화하며 변모한다. 총체로서의 생산 관계는 사람들이 사회라고 부르는 사회 관계를 형성하며, 좀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역사적 발전 단계에 있는 사회, 다른 것과 구별되는 독특한 특성을 지닌 사회를 형성한다. 고대 사회, 봉건 사회, 부르주아 사회는 그러한 생산 관계의 총체이며, 각 생산 관계는 동시에 인류 역사 발전의 특수한 한 단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자본도 사회적인 생산 관계다. 그것은 부르주아적인 생산 관계, 즉 부르주아 사회의 생산 관계다. 자본을 이루는 생활 수단·노동 도구·원자재 등 모든 것은 주어진 사회적 조건에서, 즉 어떤 사회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축적된 것이 아닌가? 그것들은 주어진 사회적 조건에서, 어떤 사회 관계 속에서 새로운 생산에 쓰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바로 이 사회적 성격이 새로운 생산을 위해 쓰이는 생산물들을 자본으로 바꾸지 않는가?

  자본은 생활 수단·노동 도구·원자재로만, 즉 물질적 생산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환 가치로도 이루어진다.

  그것을 이루는 모든 생산물은 상품이다. 따라서 자본은 일정한 양의 물질적 생산물일 뿐만 아니라, 일정한 양의 상품, 교환 가치, 즉 사회적 크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양털 대신에 면화를, 밀 대신에 쌀을, 철도 대신에 기선을 갖다 놓는다고 하더라도, 면화·쌀·기선---자본의 육체---이 예전에 그것의 육체 노릇을 했던 양털·밀·철도와 똑같은 교환 가치, 즉 똑같은 가격을 갖고 있기만 하다면, 그 자본은 여전히 그대로다. 자본은 조금도 바뀌지 않으면서도 자본의 육체는 끊임없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자본이 일정한 양의 상품, 즉 교환 가치라 하더라도, 일정한 양의 상품, 즉 교환 가치가 다 자본은 아니다.

  일정한 양의 교환 가치는 모두 하나의 교환 가치다. 개별적인 교환 가치는 모두 일정한 양의 교환 가치다. 예를 들어 1000마르크짜리 집은 1000마르크의 교환 가치다. 1페니히짜리 종이 한 장은 100/100페니히라는 일정한 양의 교환 가치다. 다른 생산물과 교환할 수 있는 생산물은 상품이다. 생산물이 교환되는 정해진 비율이 그것의 교환 가치를 이루며, 또 이를 화폐로 표현하면 그 가격이다. 이 생산물의 양은 그것의 본분, 즉 상품이 되거나 교환 가치를 나타내거나 어떤 가격을 갖거나 하는 본분을 결코 바꿀 수 없다. 크든 작든간에 나무는 여전히 나무인 것이다. 철을 다른 생산물들과 교환할 때 근(斤)으로 하든 관(貫)으로 하든, 그것 때문에 철의 성격, 즉 교환 가치인 상품으로서의 성격이 바뀌겠는가? 양에 따라서 철은 더 많거나 더 적은 가치를 지닌 상품, 더 높거나 더 낮은 가격의 상품이 될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일정한 양의 상품, 일정한 양의 교환 가치가 자본이 되는가?

  그것이 자립적인 사회적 으로서, 즉 사회의 일부분이 갖는 힘으로서, 직접적인 산 노동력과의 교환을 통해 보존되고 늘어나는 것에 의해서다. 노동 능력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있는 계곱의 존재가 자본의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다.

  직접적인 산 노동을 축적된 과거의 대상화한 노동이 지배함으로써 비로소 축적된 노동이 자본으로 바뀐다.

  자본의 본질은 축적된 노동이 새로운 생산을 위한 수단으로서 산 노동에 봉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본질은 산 노동이 축적된 노동의 교환 가치를 유지하고 늘리는 수단으로서 축적된 노동에 봉사하는 데 있는 것이다.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 사이에서 교환이 이루어질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과 교환하여 생활 수단을 얻는다. 그러나 자본가는 자신의 생활 수단과 교환하여 노동, 노동자의 생산 활동, 창조적인 힘을 얻는데, 이 힘을 통해 노동자는 자신이 소비하는 것을 보상할 뿐만 아니라 축적된 노동에 그것이 원래 갖고 있던 것보다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본가로부터 당장 쓸 생활 수단의 일부를 받는다. 그는 이 생활 수단을 어디에 쓰는가? 직접적인 소비에 쓴다. 그러나 내가 생활 수단을 써 버리자마자, 나는 그것을 잃어버리며 다시는 되찾을 수 없게 된다. 즉 이 수단이 나의 생명을 유지해 주는 시간을 이용해 내가 새로운 생활 수단을 생산하지 않는 한, 소비하는 동안에 써서 없애 버리는 가치 대신에 새로운 가치를 나의 노동으로 창조하지 않는 한에는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는 바로 이 귀중한 재생산의 힘을 자신이 받은 생활 수단과 교환하여 자본가에게 넘겨준다. 따라서 그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이 힘을 잃어버린 셈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차지(借地) 농업가가 자신의 날품팔이 노동자에게 일당으로 은화 5그로쉔을 준다고 하자. 은화 5그로쉔을 받고 이 노동자는 차지 농업가의 밭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여 결국 그에게 10그로쉔만큼의 수입을 확보해 준다. 차지 농업가는 자신이 날품팔이 노동자에게 건네주어야 하는 가치만을 보상받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를 2배로 늘리게 된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날품팔이 노동자에게 준 은화 5그로쉔을 실속 있게 생산적으로 사용하고 소비한 셈이다. 이 은화 5그로쉔을 가지고 그는, 2배의 가치를 갖는 농산물을 생산하여 5그로쉔을 10그로쉔으로 만드는 날품팔이 노동자의 바로 그 노동과 힘을 샀던 것이다. 반면에 날품팔이 노동자는 그가 바로 차지 농업가에게 그 작용의 결과를 넘겨주어 버린 자신의 노동력 대신에 은화 5그로쉔을 얻는다. 그는 이 돈을 생활 수단과 교환하며, 얼마 안 있어 그것을 다 써 버린다. 따라서 이 5그로쉔은 이중으로 소비된 셈이다. 그 자본을 위해서는 재생산에 쓰였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비생산적으로 쓰였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한번 쓰면--역자)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생활 수단과 교환되었고, 노동자는 차지 농업가와 똑같은 교환을 되풀이함으로써만 그 가치를 다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은 임금 노동을 전제로 하며 임금 노동은 자본을 전제로 한다. 둘은 서로서로 제약하며, 서로를 산출해 낸다.

  면방직 공장의 노동자가 면직물만을 생산하는가? 아니다. 그는 자본을 생산한다. 그는, 자신의 노동을 지휘하고 이를 매개로 다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데 쓰이는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다.

  자본은 노동력과 교환됨으로써만, 즉 임금 노동을 가동함으로써만 늘어날 수 있다. 임금 노동자의 노동력은 자본을 늘림으로써만, 즉 자신을 노예로 삼고 있는 힘을 강화함으로써만 자본과 교환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자본을 늘리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 즉 노동자 계급을 늘리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가들의 이해 관계와 노동자의 이해 관계는 똑같다고 부르주아들과 그 경제학자들은 주장한다. 사실 그렇다! 노동자는 자본이 고용하지 않으면 파멸하게 된다. 자본은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으면 파멸하게 되며, 착취하려면 그것을 사야만 한다. 생산을 위해 쓰이는 자본인 생산 자본이 급속히 늘어날수록, 따라서 산업이 번창할수록, 다시 말해 부르주아지가 부유해질수록, 사업이 잘되면 잘될수록 자본가에게는 더욱더 노동자가 필요하게 되며, 노동자는 더욱더 비싼 값에 팔리게 된다.

  따라서 노동자의 상태를 그럭저럭 살 만하게 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조건은 생산 자본이 될 수 있는 대로 급속히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산 자본의 성장이란 무엇인가? 산 노동에 대한 축적된 노동의 힘이 성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노동자 계급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지배가 성장하는 것이다. 만일 임금 노동이 자신을 지배하는 다른 사람의 부(富)이자 자신의 적대 세력인 자본을 생산한다면, 임금 노동이 다시 자본의 일부가 된다는 조건, 즉 자본을 가속화하는 성장 운동 속에 다시 투입하는 지렛대가 된다는 조건에서 일거리, 즉 생활 수단이 자본으로부터 다시 흘러 나오게 된다.

  자본의 이해 관계와 노동자의 이해 관계가 똑같다는 말은 자본과 임금 노동이 한 관계의 두 측면이라는 뜻일 뿐이다. 한 쪽이 다른 쪽을 제약하는 것은 마치 고리 대음업자와 방탕한 인간이 서로서로 제약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임금 노동자가 임금 노동자인 한, 그의 운명은 자본에 달려 있다. 이것이 그토록 칭송받고 있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이해 관계의 공통성이다.

 

자본이 커지면 임금 노동의 양도 그만큼 늘어나며, 노동자의 수도 그만큼 많아진다. 한마디로 말해, 자본이 더 많은 수의 개인들까지 지배하게 된다. 가장 좋은 경우를 생각해 보자. 생산 자본이 성장하면, 노동에 대한 수요도 커진다. 따라서 노동자의 가격인 임금도 올라간다.

  어떤 집이 아무리 작더라도 이 집을 둘러싸고 있는 집들이 한결같이 작다면, 그 집은 주택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채워 준다. 그러나 작은 집 옆에 궁전이 하나 있다면, 그 작은 집은 오두막집처럼 오그라들고 말 것이다. 이제 이 작은 집은 그 소유자가 요구하는 바가 전혀 없거나 아주 작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또 문염ㅇ이 진보함에 따라 집이 아무리 커진다 하더라도, 옆에 있는 궁전이 똑같은 정도로 또는 더 높이 치솟는다면 상대적으로 작은 집에 사는 사람은 자신의 울 안에서 더욱더 불쾌하고 물만스러복 짓눌린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임금이 조금이라도 눈에 띄게 오르려면 생산 자본의 급속한 성장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생산 자본의 급속한 성장은 부, 사치, 사회적 욕구와 쾌락의 급속한 성장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노동자의 쾌락이 늘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는 사회적 만족은 노동자가 넘볼 수 없는 자본가의 늘어난 쾌락에 비하면, 사회의 발전 상태 일반에 비하면 줄어드는 셈이다. 우리의 욕구와 쾌락은 사회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를 기준으로 그것을 재는 것이지 그것을 채워 주는 대상을 기준으로 재는 것은 아니다. 욕구는 사회적 본성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본성이다.

  임금은 일반적을오 그것과 교환할 수 있는 상품의 양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관계들을 포함하고 있다.

  우선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력의 대가로 받는 것은 정해진 양의 화폐다. 임금은 단지 화폐 가격에 의해서만 결정되는가?

  16세기에 아메리카에서 더 풍부하고 더 쉽게 가공할 수 있는 광산들이 발견된 결과, 유럽에서 유통되는 금과 은이 늘어났다. 그러므로 금과 은의 가치가 나머지 상품들에 비해 떨어졌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동력의 대가로 예전과 똑같은 양의 은화를 받았다. 그들의 노동의 화폐 가격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그들의 임금은 떨어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똑같은 양의 은과 교환하여 더 적은 양의 다른 상품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16세기에 자본의 성장, 즉 부르주아지의 대두를 촉진한 사정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또 다른 경우를 들어 보자. 1847년 겨울에 흉작으로 말미암아 없어서는 안 될 생활 수단들, 이를테면 곡물·고기·버터·치즈 등의 가격이 눈에 띄게 올랐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력의 대가로 예전과 같은 양의 화폐를 받았다고 해 보자. 그들의 임금은 떨어지지 않았는가? 물론 떨어졌다. 교환을 할 때 그들은 똑같은 돈을 주고도 더 적은 빵과 고기 등등을 얻었으니까 말이다. 그들의 임금이 떨어진 것은 은의 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생활 수단의 가치가 커졌기 대문이다.

  끝으로, 노동의 화폐 가격은 그대로인 반면에 모든 농산물과 공산품의 가격은 새로운 기계의 사용, 좋은 날씨 등으로 말미암아 떨어졌다고 해 보자. 이제 노동자들은 똑같은 돈을 주고 모든 종류의 상품을 더 많이 살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의 임금은 화폐 가치가 변하지 않았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오른 셈이다.

  따라서 노동의 화폐 가격인 명목 임금은 실질 임금, 즉 임금과 교환하여 실제로 받는 상품의 양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임금의 오르내림에 대해 논할 때 노동의 화폐 가격인 명목 임금만을 주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명목 임금, 즉 노동자가 자기 자신을 자본가에게 파는 대가인 화폐 액수도, 또 실질 임금, 즉 이 화폐로 그가 살 수 있는 상품의 양도 임금 속에 포함된 관계들을 남김없이 다 설명하지는 못한다.

  임금은 무엇보다도 자본가의 이득인 이윤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도 한데, 이것이 비교·상대적 임금이다.

  실질 임금이 노동의 가격을 나머지 상품들의 가격과의 관계로 표현하는 반면에, 상대적 임금은 노동에 의해 새로 만들어진 가치 가운데서 직접적인 노동이 받는 몫을 축적된 노동, 즉 자본이 차지하는 몫과의 관계로 표현한다.

  우리는 위 14쪽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임금은 노동자가 생산한 상품 속에 들어 있는 노동자의 몫이 아니다. 임금은 자본가가 얼마 만큼의 생산적 노동력을 사들이는 데 사용하는 기존 상품의 일부다." 그러나 자본가는 노동자가 만든 생산물을 파는 가격에서 다시 이 임금을 보상해 주어야 한다. 그는 이것을 보상할 때 보통 자신이 지출한 생산비를 초과하는 잉여분, 즉 이윤이 남을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노동자가 만든 상품의 판매 가격은 자본가 쪽에서 보면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로 그가 미리 지불한 원자재 가격에 대한 보상, 이어서 또한 그가 미리 지불한 도구·기계와 다른 노동 수단들의 마모분에 대한 보상, 둘째로 그가 미리 지불한 임금에 대한 보상, 셋째로 이것을 초과하는 잉여분, 즉 자본가의 이윤이 그것이다. 첫째 부분이 예전부터 존재하고 있던 가치만을 보상하는 반면에, 임금에 대한 보상이나 자본가의 잉여분, 즉 이윤은 대체로 노동자의 노동으로 창조된 가치, 원자재에 덧붙은 새로운 가치에서 나오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임금과 이윤을 서로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둘 모두를 노동자가 만든 생산물의 몫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실질 임금은 그대로인 채, 심지어 오르기까지 하면서도, 상대적 임금은 떨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생활 수단의 가격이 2/3씩 내렸는데, 하루치 임금은 1/3만, 예를 들어 3마르크에서 2마르크로 내렸다고 하자. 비록 노동자가 2마르크를 가지고, 예전에 3마르크를 주고 살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상품을 살 수 있다 하더라도, 그의 임금은 자본가의 이윤에 비해 줄어든 셈이다. 자본가(예를 들어 공장주)의 이윤은 1마르크 늘어났다. 다시 말해서 노동자는 이제 자본가에게서 적은 액수의 교환 가치를 받고 전보다 더 많은 액수의 교환 가치를 생산해야만 한다. 자본의 몫은 노동의 몫에 비해 늘어났다. 사회적 부가 자본과 노동 사이에 분배되는 비율이 더욱 불평등해졌다. 자본가는 똑같은 자몬으로 더 많은 양의 노동을 지배한다. 노동자 계급을 지배하는 자본가 계급의 힘은 더 커진 반면에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는 더욱 나빠졌으며 자본가의 지위 아래로 한 단계 더 떨어진 것이다.

  그러면 임금과 이윤의 관계에서 그 오르내림을 결정하는 일반 법칙은 무엇인가?

  둘은 서로 반비례한다. 자본의 몫인 이윤은 임금의 몫인 하루치 임금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비율로 올라가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윤은 임금이 떨어지는 만큼 올라가며, 임금이 올라가는 만큼 떨어진다.

  아마 다음과 같이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자본가는 그의 생산물을 유리한 조건으로 다른 자본가들과 교환하여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거나 예전 시장에서 수요가 갑자기 늘어나거나 한 결과, 그의 상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 이득을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자본가의 이윤은 임금, 즉 노동력의 교환 가치의 오르내림과는 상관없이 다른 자본가들을 속임으로써 늘어날 수도 있다. 또는 자본가의 이윤은 노동 도구의 개선, 자연력의 새로운 이용 등등을 통해 늘어날 수도 있다고 말이다.

  먼저 우리는 비록 정반대의 과정을 거쳐 생겨난 것이라고 하더라도 결과는 똑같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윤이 늘어난 것은 임금이 떨어졌기 때문에 아니지만, 임금이 떨어진 것은 이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똑같은 양의 다른 사람의 노동으로 더 많은 양의 교환 가치를 사들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동에게 더 높은 액수를 지불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노동이 자본가에게 가져다 준 순이익에 비해 노동은 더 낮은 액수를 지불받은 것이다.

  게다가 상품의 가격은 변동하는데도 각 상품의 평균 가격, 즉 그것이 다른 상품들과 교환되는 비율은 그 생산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러므로 자본가 계급 안에서 저희들끼리 속이고 속는 것은 반드시 상쇄될 수밖에 없다. 기계를 개량하거나 생산을 위해 자연력을 새롭게 이용하는 것은 같은 노동 시간에 같은 양의 노동과 자본을 가지고 더 많은 양의 생산물을 창조할 수 있게 해 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많은 양의 교환 가치를 창조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일 내가 방적기를 사용해 그 기계를 발명하기 전보다 시간당 2배의 실, 예를 들어 50파운드 대신에 100파운드의 실을 생산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길게 보면 나는 이 100파운드와 교환해 예전에 50파운드를 주고 얻었던 것보다 더 많은 상품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생산비가 절반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며, 다시 말하면 같은 비용으로 2배의 생산물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한 나라 또는 전세계 시장의 자본가 계급, 즉 부르주아지가 생산의 순이익을 저희들끼리 어떤 비율로 나누든간에 이 순이익의 총액은 언제나 대체로 직접 노동에 의해 늘어난 축적된 노동의 총량일 뿐이다. 따라서 이 총액은 노동이 자본을 늘리는 것과 같은 비율로, 즉 이윤이 임금에 비해 높아지는 것과 같은 비율로 늘어난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과 임금 노동의 관계 안에서만 보더라도 자본의 이해 관계와 임금 노동의 이해 관계가 정면으로 대립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본이 급속히 늘어나는 것은 이윤이 급속히 늘어나는 것과 똑같다. 이윤은 노동의 가격, 즉 상대적 임금이 그만큼 급속히 줄어들 때에만 급속히 늘어날 수 있다. 명목 임금, 즉 노동의 화폐 가치와 더불어 실질 임금까지 오르는 경우에도, 실질 임금이 이윤과 같은 비율로 오르지 않는 한에는 상대적 임금은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호경기 때에 임금이 5% 오르고 이윤은 30% 오른다면, 비교·상대적 임금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줄어든다.

  이처럼 자본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노동자의 수입도 늘어나지만, 동시에 노동자와 자본가를 가르는 사회적 간격도 커지며, 또 노동에 대한 자본의 힘, 즉 자본에 대한 노동의 예속도 커지는 것이다.

  노동자가 자본의 급속한 성장과 이해 관계를 같이 한다는 이야기는 단지 다음과 같은 뜻일 뿐이다. 즉 노동자가 다른 사람의 부를 급속히 늘려 줄수록 그만큼 더 큰 빵 덩어리가 그에게 떨어진다는 것, 그만큼 더 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얻고 살아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자본에 예속된 노예들의 수가 그만큼 더 늘어난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노동자 계급에게 가장 좋은 상황, 즉 자본이 될 수 있는 대로 급속히 성장하는 것조차도, 그것이 아무리 노동자의 물질적 삶을 개선해 준다하더라도 노동자의 이해 관계와 자본가의 이해 관계, 즉 부르주아지의 이해 관계 사이의 대립을 없애지는 못한다. 이윤과 임금은 예나 지금이나 반비례하는 것이다.

  만일 자본이 급속히 성장한다면 임금이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의 이윤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더 빨리 올라간다. 노동자의 물질적 상태는 좋아졌지만, 그것은 그의 사회적 처지를 희생한 대가일 뿐이다. 노동자와 자본가를 떼어 놓는 사회적 간격은 더 넓어졌다.

  결국 임금 노동에 가장 좋은 조건은 생산 자본이 될 수 있는 대로 급속히 성장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뜻일 뿐이다. 노동자 계급이 자신의 적대 세력, 자기 위에 군림하는 다른 사람의 부를 급속히 늘리고 키워 줄수록, 그만큼 더 좋아진 조건에서 그들은 부르주아지가 자신들을 묶어서 끌고 가는 황금 사슬을 자기 손으로 만든다는 사실에 만족해하면서, 또다시 부르주아의 부를 늘려 주고 자본의 힘을 키워 주러고 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생산 자본의 성장과 임금의 상승, 이 두 가지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정말 뗄 수 없도록 결합되어 있는가? 우리는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또 자본이 살찔수록 그 노예도 살찌게 된다는 말도 믿어서는 안 된다. 부르주아지는 너무 계몽되어 있고 계산에 밝기 때문에, 봉건 영주처럼 자기 하인들이 화려하다고 뽐내는 따위의 편견을 갖고 있지는 않다. 부르주아지의 존재 조건이 그들을 계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 문제를 좀더 자세히 탐구해야 할 것이다. 생산 자본의 성장은 임금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부르주아 사회의 생산 자본이 전체적으로 성장하면, 노동의 축적은 한층 더 다양한 측면에서 이루어진다. 자본의 수와 규모가 늘어난다.

  자본의 증가로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이 심해진다. 자본 규모가 커짐으로써 좀더 거대한 무기를 지닌 좀더 강력한 노동자 군대를 산업의 싸움터로 끌어내는 수단이 주어진다.

  한 자본가가 다른 자본가를 물리치고 그의 자본을 빼앗으려면 더 싸게 파는 도리밖에 없다. 파산하지 않고 더 싸게 팔려면 더 싸게 생산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노동 생산력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올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 생산력은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분업을 진전시키고 기계를 더 전면적으로 들여오고 계속 개선함으로써 높아진다. 분업에 편입되는 노동자 군대가 커질수록, 기계를 들여오는 규모가 거대해질수록 생산비는 비례해서 줄어들며, 노동은 더욱 실속있게 된다. 따라서 자본가들 사이에서는 더 전면적인 경쟁, 즉 분업과 기계를 늘리고 그것을 될 수 있는 대로 대규모로 이용하려는 경쟁이 일어난다.

  그러나 자본가가 분업을 진전시키고 새로운 기계를 사용하고 개선하여 자연력을 더 값싸게 더 대규모로 이용함으로써, 같은 양의 노동이나 축적된 노동으로 다른 경쟁자들보다 더 많은 양의 생산물, 즉 상품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면, 예컨대 그가 다른 경쟁자들이 아마포 반 자를 짜는 데 걸리는 시간과 똑같은 노동 시간에 아마포 한 자를 생산할 수 있다면, 이 자본가는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그는 아마포 반 자를 지금까지의 시장 가격대로 계속 팔 수도 있겠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자신의 적들을 물리치고 자기만의 판로를 넓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산이 늘어나는 만큼 판로에 대한 그의 요구도 커진다. 그가 활용하게 된 더 강력하고 더 값비싼 생산 수단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상품을 더 싸게 팔 수 있도록 해 주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로 하여금 더 많은 상품을 팔고 또 자신의 상품을 위해 훨씬 더 큰 시장을 정복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의 자본가는 반 자의 아마포를 그의 경쟁자들보다 싸게 팔 것이다.

  그러나 이 자본가가 한 자를 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이 다른 자본가들이 반 자를 생산하는 데 드는 것보다 많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경쟁자들이 반 자를 파는 것만큼 싼값에 한 자를 팔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판다면 그는 아무 이득도 얻지 못한 채, 단지 교환을 통해 생산비를 되찾을 뿐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그의 수입이 조금 늘어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가 더 많은 자본을 가동했기 때문이지 그의 자본이 다른 자본보다 더 많은 가치 증식을 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기 상품의 가격을 자신이ㅡ 경쟁자들보다 몇 퍼센트 낮게 정하기만 해도 이루려는 목적을 이루게 된다. 가격을 내려 판매함으로써, 그는 경쟁자들을 물리치거나 적어도 그들의 판로의 일부를 빼앗는다. 그리고 끝으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한 상품을 팔 때 산업이 호황이냐 불황이냐에 따라 시가는 늘 생산비 이상이거나 이하라는 사실이다. 아마포 한 자의 시장 가격이 지금까지의 평균 생산비보다 낮으냐 높으냐에 따라서, 더 능률적인 새 생산 수단을 사용한 자본가가 실제 생산비 이상으로 파는 비율, 즉 퍼센트도 변동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자본가의 특권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자본가들도 똑같은 기계와 똑같은 분업을 같은 규모나 더 큰 규모로 도입한다. 그리고 이러한 도입은 아마포 가격이 예전의 생산비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산비 이하로 떨어질 때까지 일반화할 것이다.

  따라서 자본가들은 서로서로 새로운 생산 수단이 도입되기 과 똑같은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이 생산 수단을 이용해 똑같은 가격으로 2배의 생산물을 제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새로운 생산비를 기초로 똑같은 과정이 다시 시작된다. 분업이 더욱 진전되고 기계가 늘어나며, 분업과 기계의 이용 규모가 더욱 커진다. 그리고 경쟁은 이 결과에 대해 다시 똑같은 반작용을 가하게 된다.

  우리는 생산 양식, 생산 수단이 어떻게 계속 변혁되고 혁신되는가, 즉 어떻게 해서 분업이 더 큰 분업을 가져오고, 기계 사용이 기계 사용을 확대하며, 대규모 노동이 더욱더 큰 규모의 노동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가를 보고 있다.

  이것이 부르주아적 생산을 낡은 궤도에서 계속 벗어나게 하며, 자본으로 하여금 자신이 긴장시켜 놓은 노동 생산력을 계속 긴장시키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법칙이다. 이 법칙은 자본에게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으며, '앞으로! 앞으로!'라고 계속 속삭인다.

  이것은 상업 경기의 변동 내에서 한 상품의 가격을 반드시 그 생산비와 일치시키는 바로 그 법칙이다.

  자본가가 아무리 강력한 생산 수단을 싸움터에 들여온다 하더라도 경쟁은 이 생산 수단을 일반화할 것이며, 또 그것이 일반화하는 순간부터 그의 자본의 더 큰 효율성이 낳는 유일한 결과는 그가 이제 똑같은 가격으로 예전보다 10·20·100배나 많이 공급해야 한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나 그가 판매품의 양을 늘림으로써 낮아진 판매 가격을 보충하려면 아마 1000배 정도를 더 팔아야 할 것이기 때문에, 즉 더 많은 이득을 올리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생산비를 보상받기 위해서라도---우리가 보았듯이 생산 도구 자체가 점점 비싸진다.---이제 대량 판매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 대량 판매는 그에게뿐만 아니라 경쟁자들에게도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예전의 투쟁은 이미 발명된 생산 수단이 좀더 능률적일수록 점점 더 격해지기 시작한다. 따라서 분업과 기계의 사용은 훨씬 더 큰 규모로 또다시 진행될 것이다.

  사용되는 생산 수단의 힘이 어떻든간에 경쟁은 상품 가격을 생산비 수준으로 떨어뜨려 얼마나 더 싸게 생산할 수 있느냐, 같은 양의 노동으로 얼마나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느냐에 따라 값싼 생산, 즉 똑같은 가격으로 더욱더 많은 양의 생산물을 공급하는 것을 일종의 강제 법칙이 되게 함으로써, 이 힘이 낳은 황금의 열매를 자본에게서 빼앗으려고 한다. 그리하여 자본가가 자신의 노력을 통해 얻은 것이라고는 똑같은 노동 시간에 더 많이 생산해야 할 의무, 한마디로 그의 자본의 증식 조건이 나빠지는 것 외에는 전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경쟁이 생산비 법칙으로 그를 계속 뒤쫓고 또 그가 경쟁자들을 겨누어 만든 무기가 자신에게로 되돌려진다. 반면에 자본가는 경쟁 때문에 새것이 낡은 것으로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낡은 기계와 낡은 분업 대신에 값은 더 비싸지만 좀더 싸게 생산해 내는 새로운 기계와 분업을 계속 도입함으로써 경쟁을 계속 속여 보려 한다.

  이제 이 열병 같은 동요가 전세계 시장을 동시에 휩쓸었다고 가정한다면, 자본의 성장, 축적과 집중의 결과로 어떻게 하여 끊임없이,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빠르게, 또 더욱 거대한 규모로 분업, 새 기계의 사용과 낡은 기계의 개량이 이루어지는가가 이해될 수 있다.

  그러면 생산 자본의 성장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이러한 사정들은 임금을 결정하는 데 어떤 영향을 주는가?

  분업이 진전되면 노동자가 5·10·20명분의 노동을 할 수 있게 되며, 따라서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도 5·10·20배만큼 늘어난다. 노동자들은 한 노동자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싸게 자신을 판매함으로써 서로 경쟁할 뿐만 아니라 한 노동자가 5·10·20명분의 노동을 함으로써 서로 경쟁한다. 그리고 자본이 도입하여 점점 더 확대되는 분업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이런 종류의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한 발 더 나아가 분업이 늘어나는 만큼, 노동은 단순화한다. 노동자의 특수한 숙련은 가치 없는 것이 된다. 그는 육체적 능력도 정신적 능력도 활용할 필요가 없는 간단하고 단조로운 생산력으로 변질된다. 그의 노동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노동이 된다. 따라서 사방에서 경쟁자들이 그에게 육박해 오며, 게다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어떤 노동이 단순할수록, 즉 그것을 배우기가 쉬울수록 습득하는 데 필요한 생산비는 더욱 적어지며, 임금은 더욱 아래로 내려간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상품의 가격과 마찬가지로 임금도 생산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이 불만스럽고 지긋지긋해지는 정도에 따라, 그만큼 경쟁은 늘어나고 임금은 내려간다. 노동자는 더 많이 일함으로써, 즉 더 많은 시간을 일하거나 같은 시간에 더 많이 생산함으로써, 자기 임금의 양을 지켜 내려고 한다. 이처럼 그는 가난에 못 이겨 분업의 해로운 효과를 더욱 키워 간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그가 많이 일하면 할수록 그는 더 적은 임금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간단하다. 왜냐하면 그는 그만큼 자신의 동료들에게 경쟁을 불러일으키고, 따라서 그만큼 자신의 동료들을 자신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나쁜 조건에 놓이는 경쟁자로 만들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결국 그는 자기 자신이 노동자 계급의 일원이면서도 자신에 대해 경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기계는 이와 똑같은 효과를 훨씬 더 큰 규모로 불러일어킨다. 기계는 숙련 노동자를 미숙련 노동자로, 남자를 여자로, 성인을 아이들로 대체하기 때문에 기계가 새로 도입되는 경우에는 수공 노동자들이 무더기로 해고당하며, 또 기계가 완성되고 개량되고 더 효율적인 것으로 대체되는 경우에는 노동자의 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상으로 우리는 자본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산업 전쟁의 윤곽을 대략 묘사한 셈이다. 이 전쟁의 독특한 특징을 살펴보면, 여기서는 노동자 군대를 징집하는 것이 아니라 줄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된다. 사령관인 자본가들은 누가 가장 많은 산업 전사를 내쫓을 수 있는가를 놓고 서로 경쟁한다.

  물론 경제학자들은 기계 때문에 남아돌아가게 된 노동자들이 새로운 부문에서 일자리를 얻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그들도 감히 쫓겨난 바로 그 노동자들이 새로운 노동 부문에 취직한다고 직접 주장하지는 못한다. 사실들이 외치는 소리는 이러한 거짓말을 너무나도 우렁차게 반박하고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본뜻은 노동자 계급의 다른 구성 부분, 예를 들면 쇠퇴한 그 산업 부문에 들어가려고 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젊은 세대의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취업의 길이 열린다는 뜻일 뿐이다. 이것은 물론 몰락한 노동자들에게 하나의 큰 보상이 된다. 자본가 나으리들은 착취하기 좋은 싱싱한 살과 피에 부족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시체를 파묻게 할 것이다. 이것은 부르주아가 노동자들에게 주는 위안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주는 위안이다. 만일 기계가 임금 노동자 계급 전체를 없앤다면, 그것은 임금 노동 없이는 자본일 수 없는 자본에게 얼마나 무시무시할 것인가?

  그러나 기계 때문에 직접 쫓겨난 노동자들과 전부터 이 자리에서 일하기를 기다리고 있던 새로운 세대 전체가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다고 가정해 보자. 새 일자리에서 잃어버린 자리에서만큼 높은 보수를 받으리라고 볼 수 있는가? 이것은 경제의 모든 법칙에 어긋날 것이다. 우리는 현대 산업이 어떻게 더 복잡하고 더 차원 높은 일을 더 간단하고 더 차원 낮은 일로 계속 바꿔 놓는가를 살펴본 바 있다.

  따라서 기계 때문에 한 산업 부문에서 쫓겨난 노동자 대중이 더 낮고 더 나쁜 보수를 받지 않고서야 어떻게 다른 산업 부문에서 안식처를 찾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기계 자체를 제작하는 데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예외로 거론해 왔다. 산업에서 기계가 더 많이 요구되고 소비되자마자 기계는 반드시 늘어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기계 제작, 동시에 기계 제작과 관련된 노동자들의 일자리도 늘어나지 않을 수 없으며, 또 이 산업 부문에 쓰이는 노동자들은 숙련 노동자일 뿐만 아니라 교양 있는 노동자이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예전에도 절반만 옳았던 이 주장은 1840년 이래 그 반 조각 진실마저 잃어버렸다. 왜냐하면 기계 제작에서도 면사 제조에서와 마찬가지로 기계가 점점 더 전면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이리하여 기계 제작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아주 정교한 기계에 비하면 아주 타박한 기계 노릇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계 때문에 해고된 남자 대신에 아마 세 명의 아이와 한 명의 여자가 공장에 취직할 것이다! 그런데 한 남자의 임금은 세 명의 아이와 한 명의 여자를 먹여 살릴 만큼 충분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부르주아들이 늘 즐겨 사용하는 이 상투적인 이야기는 무엇을 증명하는가? 이제는 노동자 가족의 생활비를 벌려고 전보다 4배나 많은 노동자들의 삶이 소비되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는다.

  요약해 보자. 생산 자본이 성장할수록 분업과 기계 사용은 더욱더 확대된다. 분업과 기계 사용이 확대될수록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은 더욱더 심해지며, 그들의 임금은 더욱더 줄어든다.

  게다가 또 노동자 계급은 더 높은 사회 계층으로부터도 메워진다. 많은 소산업가와 소금리 생활자가 노동자 계급으로 전락하는데, 그들에게는 노동자들의 팔과 나란히 자신들의 팔을 쳐드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이 없다. 이리하여 일거리를 ㄹ요구하며 높이 치켜 올린 팔들의 수풀은 점점 더 울창해지지만, 팔 그 자체는 점점 더 야위어 간다.

  더욱더 대규모로 생산하는 것, 바로 대산업가가 되고 소산업가가 되지 않은 것이 투쟁의 일차적 조건 가운데 하나이며 이러한 투쟁에서 소산업가가 견뎌 낼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일이다.

  자본이 성장하고 자본의 양과 수가 늘어나는 만큼 자본의 이자는 줄어든다는 사실, 따라서 소금리 생활자는 더 이상 자신의 금리로 살 수 없게 되므로 산업에 투신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즉 소산업가의 대열을 키우고 그럼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 후보를 늘리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은 정말이지 더 이상 논의할 필요조차 없다.

  끝으로, 위에서 묘사한 운동 때문에 자본가들은 어쩔 수 없이 거대한 생산 수단을 더욱더 대규모로 이용하고 또 이런 목적으로 신용의 모든 용수철을 작동하게 되는데, 이럴수록 그만큼 산업 지진이 늘어나며, 그때 상업계는 부의 일부, 생산물의 일부, 심지어는 생산력의 일부까지도 저승의 염라 대왕에게 제물로 바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 한마디로 공황이 늘어나는 것이다. 공황이 좀더 자주 일어나고 격렬해지는 것은 생산물의 양, 즉 시장을 넓히려는 욕구가 커질수록 그만큼 세계 시장은 점점 더 줄어들어 이용할 수 있는 새 시장이 점점 더 작아진다는 바로 그 점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다시 앞서 지나간 모든 공황이, 정복되지 않았던 새 시장이나 지금까지 상업이 표면적으로만 착취했던 시장을 이미 세계 시장에 예속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은 노동으로 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고상하면서도 야만적인 주인인 자본은 자기 노예들의 시체를, 즉 공황으로 몰락하는 희생된 노동자 전체를 무덤으로 함께 끌고 간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자본이 급속히 성장하면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은 훨씬 더 급속히 심해진다. 다시 말해서 노동자 계급의 일자리인 생활 수단은 이에 비례해서 줄어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급속한 성장이 임금 노동에 가장 유리한 조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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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실업과 관련된 대중이데올로기의 대표적사례

청년실업이 계속적으로 늘어나는 원인은 무엇이있나요~?

 

 

    

2004년 6월말 현재 청년 실업자 수는 38만7000명. 전체 실업자 76만여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경기 침체가 지속되면서 지난 2002년 이후 증가세에 있는 청년 실업률은 현재 7.8%이다. 수치상으로 보면 전체적으로 청년 실업률이 높은 OECD 국가에 비해 심각한 수준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실업률 통계에는 학원이나 직업훈련기관에 다니면서 개별적으로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청년들은 제외돼 있다. 따라서 실제 취업 노력 중인 비경제 활동인구 30만6000명과 공식적인 실업자 수 38만7000명을 합할 경우 실제 체감하고 있는 청년 실업자 수는 69만3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실상 청년 실업자 수가 70만에 육박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학교를 졸업해서 취업난을 더 심각하게 경험하고 있는 청년층은 최고 54만7000명인 것으로 노동부는 추정했다.

최근 청년실업(15∼29세)이 심화되고 있는 것은 기업의 일자리 감소와 경력직 선호, 구직자의 고학력화 등의 주요 원인이 복합적으 로 작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19일 노동부에 따르면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등을 통해 청년실업 발생원인을 분석한 결과, 수요 측면에서는 기업의 일자리 감소와 경력직 선호 등이, 공급 측면 에서는 대학진학률 증가에 따른 고학력화와 구직자의 눈높이 조정 실패, 청년층의 가족 의존성 등이 주요 원인으로 분석됐다
◆청년 일자리 감소와 경력직 선호도 증가 =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 조사에 따 르면 청년층 취업자는 96년 542만1천명에서 지난해 460만6천명으로 81만5천명 줄었 으며, 청년층 고용률(취업자/생산가능인구)도 96년 46.2%에서 지난해 44.4%로 청년 층 일자리가 상대적으로 감소했다.
반면 주요 기업들의 경력자 채용 비중은 96년 39.6%에서 98년 61.9%, 2000년 77. 0%, 올해 79.0% 등으로 신규 졸업자보다 즉시 활용 가능한 경력직 채용 경향이 급 증했다.
청년층 임금근로자 가운데 임시.일용직 비중이 96년 41.7%에서 2000년 54.4%, 지난해 49.7%로 증가, 고용의 질도 악화됐다.
◆구직자 고학력화와 눈높이 조정 실패 = 대학 진학률이 80년 27.2%에서 90년 3 3.2%, 2000년 68.0%, 지난해 79.7%로 늘어나 95년부터 지난해까지 대졸자수가 18만 명이나 증가한 반면 교육이 노동시장의 수요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인력 수급의 양적. 질적 불일치가 발생했다는 게 노동부의 분석이다. 학교교육을 마친 뒤 처음 취업할 때까지의 소요기간은 평균 11개월이며, 청년층 취업 경험자 가운데 67.4%만이 6개월 이내에 처음 직장에 들어갔을 뿐 19.1%는 6개 월∼2년 미만, 13.4%는 2년 이상 장기 미취업 상태를 경험한 것으로 조사됐다.
대기업 대비 중소기업의 임금은 66%, 법정외 복리비는 56% 수준으로, 기업간 임 금.근로조건이 커다란 격차를 보이면서 청년층의 중소기업 기피현상이 이어지고 있 다. 전체 구직자의 희망 임금은 131만원인 데 비해 청년 임금근로자의 실제 평균 임 금은 116만원으로 13.1%의 눈높이 차이도 발생했다.
최근 청년실업(15∼29세)이 심화되고 있는 것은 기업의 일자리 감소와 경력직 선호, 구직자의 고학력화 등의 주요 원인이 복합적으 로 작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19일 노동부에 따르면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등을 통해 청년실업 발생원인을 분석한 결과, 수요 측면에서는 기업의 일자리 감소와 경력직 선호 등이, 공급 측면 에서는 대학진학률 증가에 따른 고학력화와 구직자의 눈높이 조정 실패, 청년층의 가족 의존성 등이 주요 원인으로 분석됐다
◆독립한 청년층 취업률 높아 = 우리나라 특유의 가족의존 전통도 청년실업의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로 지적됐다. 경제활동인구조사의 미혼남자 취업률을 비교하면 부모와 함께 거주하는 경우가 68.4%로, 분가해서 독립한 가구주의87.2%보다 크게 낮았다. 청년층 취업경험자의 취업경로를 조사한 결과, 연고에 의한 경우가 50.6%, 이 가운데 가족이나 친지 소개에 의한 취업이 27.6%에 달한 반면 직업안정기관이나 취 업박람회를 통한 취업은 2.0%, 학교내 취업소개기관을 통한 경우는 1.6%에 지나지 않는 등 진로지도나 직업안정 기능이 취약한 것도 청년실업의 원인으로 꼽혔다.

 

큰 원인 중 하나는 경기침체 겠지요.

하지만 취업하려는 당사자 자신들에게도 문제점은 있다고 보여집니다.

취업난이 어렵다, 취업할 곳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맘에 들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여겨지는건 아닐까요?

대기업을 가려는 지원자는 셀 수 없이 많고, 채용하려는 인원은 그에 비해 극소수입니다. 그래서 진부한 말이지만 낙타 바늘구멍 들어가기라 하죠.

하지만 중소기업은 사정이 다릅니다.
오히려 중소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 찾기가 쉽지 않으며, 대기업에 빼앗기고 있죠.

대다수의 취업생들은 명성과 조건 등 따지는것이 많습니다. 물론 따져야 하죠.
하지만 눈이 높다고 해야 할까요?
4년제, 서울의 소위 이름있는 대학을 나온 학생들의 눈은 더욱 높다고 느낍니다.

내가 이걸 해야되? 이 일은 내 적성이 아닌데, 더 나은 조건의 자리에 취직할 수도 있는데...


이렇게 생각하기보다는 다르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너무 이상적인 말처럼 느끼나요?

 

 

선진국들의 경우 청년 실업자의 고용가능성 제고를 위해 직업능력 배양 및 근로기회 확대에 중점을 둔 종합적인 취업지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선진국의 경험으로부터 우리 실정에 적합한 청년실업 대책을 찾아본다.
1. 직업훈련 및 직장체험 프로그램을 강화하라
최근 청년실업의 원인으로 가장 많이 지적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인력수급의 불일치 문제이다. 학력수준의 급격한 상승에도 불구하고 기업이 원하는 인력수요와 노동시장에서 공급되는 인력 간에 불균형이 생겨 결국 실업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실업자 구제라는 사후적 시각보다는 직업훈련과 연수를 통한 실업 예방이라는 사전적 시각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함을 의미한다.
2. 청년층에 특화된 취업알선 프로그램을 제공하라
청년 실업난을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효과적인 취업정보망의 미비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주요 선진국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90년대 초반부터 효과적으로 구직자와 기업을 연결해 주는 연계망 구축에 나서고 있다. 방대한 양의 직업정보 검색을 통해 청년 구직자의 특성에 맞는 일자리를 제공해 주고 있는 영국의 직업센터(Job Center)와 미국의 원스톱 센터(One-Stop Center)가 대표적인 취업알선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3. 청년 실업자의 특성에 따른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라
모든 청년 실업자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정책은 실업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청년 실업자의 연령, 근로능력의 유무, 지원 필요성 등을 고려하여 각자의 상황에 맞는 대책을 실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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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자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실업자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금속노조 금속노조웹진 (http://metalunion.nodong.org/new/maynews/)
기사원문: http://metalunion.nodong.org/new/maynews/readview.php?table=newspaper&no=1361
첨부사진/동영상: 5-신명호.JPG
사람사는 세상

실업자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일자리가 있는 노동자와 그렇지 못한 실업자의 경계는 어디쯤일까?1997년 말부터 이듬해에 걸쳐 프랑스 전역을 뜨겁게 달구었던 실업자 대투쟁은, 당시 실업자들은 정부기관을 점거했고 현직 노동자들이 가담했으며 마침내 학생과 지식인들이 가세했다. 가두시위는 전국 20개 주요 도시로 번졌고 파리 시위에는 무려 2만 명이 참가했다. 국민 70%의 지지 속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끝난 이 사건의 배경에는 무려 16%를 넘어서는 살인적인 실업률이 있었다.

프랑스의 한 실업운동가는 이렇게 말한다. “실업률이 10%의 문턱을 넘게 되면 직장을 가진 사람들도 자신이 언제 실업자로 전락할지 모르기 때문에 심각한 불안감을 느끼게 되고 남의 일이 아니라는 인식을 하게 된다. 프랑스에서도 실업률이 5% 이하일 때는 이런 연대가 일어나지 않았다.”그렇다면 공식 실업률이 4% 미만에 머무르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노동자와 실업자가 연대하려면 실업률이 더 높아지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실업과 빈곤문제의 근본 원인은 범지구화와 신자유주의라는 세계경제질서의 일방적 흐름 속에 있다. 그로 인해 노동비용을 줄이기 위한 구조조정이 상시화되고, 산업구조가 바뀌면서 이른바 ‘노동 없는 세계’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소득분배의 양극화 현상 역시 여기에 원인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원인을 제거하거나 그 흐름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통상 여러 선진국에서 쓰고 있는 실업정책은 크게 ①실업자에게 생계비를 보조하는 실업부조제도, ②실업자의 노동시장 진입을 촉진하는 정책(취업알선, 직업훈련), ③사회적 일자리 창출 프로그램, ④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①과 ②는 정부의 결단으로 추진할 수 있는 정책이고, 따라서 더 많은 예산과 개선된 제도가 수립되도록 요구하고 압박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끝으로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가 남는데, 이것은 정부의 결단만으로 시행이 불가능한 제도이다. 정규직 노동자와 자본가 모두로부터의 일정한 양보가 있어야 도입이 가능한 정책이다.

지금 실업의 문제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안고 있는 고용불안정의 문제와 맞닿아 있고, 만약 이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구조조정의 칼날은 또 다시 정규직 노동자의 목줄을 겨누게 될 것이다. 일자리 나누기의 문제는 현재의 실업자에게만 필요한 방안이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의 안정된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한 제도이다. 일자리 나누기 모두가 진지하게 고민해보았으면 싶다.

신명호/ 전국실업극복단체연대 정책위원장

교선실 2004-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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