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없음 2022/11/20 15:59

2022/11/20 해가 지는 곳으로, 내가 되는 꿈

36쪽. 가족을 잃고 피난민이 된 우리는 웃을 수 없는 자들.

농담과 웃음을 고향에 버리고 온 사람들.

어른들은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지않았다. 그들에게 말이란 감정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 같았다. 말이 길어질수록 비난과 원망처럼 차디찬 감정이 찰랑찰랑 흘러 넘쳤다. 언성 높여 싸우거나 흉한 말을 내뱉는 것도 아닌데 대화의 끝은 자꾸 서늘해졌다. 살아남은 것도 죄고 살겠다고 도맟치는 것도 죄라는, 너나 나나 몹쓸 인간이라는 자조와 책망이 눈빛에도 말투에도 깃들어 있었다. 안다. 불행해서 그렇다는 걸. 죽음에 억눌려 있다는 걸. 그래서 난 더더욱 불행을 닮아 가고 싶지 않았다. 삶을 업신여기고 싶지 않았다. 죽음이나 삶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지만, 적어도 그것을 어떤 잘못이나 벌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생각으로는 엄마의 죽음도 나의 삶을 견뎌 낼 수 없다. 

55쪽. 불행이 바라는 건 내가 나를 홀대하는 거야. 내가 나를 하찮게 여기고 망가트리는 거지. 난 절대 이 재앙을 닮아 가진 않을 거야. 재앙이 원하는 대로 살진 않을 거야.

58쪽. 오늘은 며칠이나 되었을까. 새해는 이미 시작되었을까. 더는 그런 것 아무 의미 없지. 우리는 겨울의 심장을 걷고 있다. 여기선 아무도 나이 들지 않고, 시간은 하루나 1년 단위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러다 갑자기 봄이 오고 여름이 되어 말간 호수에 비친 내 얼굴이 늙은 마녀처럼 보이더라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있다. 카드에 적혀 있는 러시아 글자를 보며 이젠 잊고 살아야 할 메리 크리스마스와 해피 뉴 이어를 떠올렸다. 지나라면 다를 것이다. 소중한 날을 소중하게 보낼 것이다. 

60쪽. 그들은 자기들 나라에서도 멀고 전쟁에서도 먼 곳에서 외로이 죽었다.(크리스토퍼 바타이유,이 화영 옮김. '다다를 수 없는 나라'(문학동네, 42쪽)

89쪽. 열심히 버는데도 늘 쪼들렸다. 중요한 일을 다음으로 미루거나 대충 처리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가족 여행, 가족사진, 생일파티, 칭찬과 위로, 오늘은 어땠어? 키가 이만큼이나 컸네, 안아주고 사랑한다 말하는 것, 오늘을 기억하고 내일을 기대하는 것,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 잘 자라고 말해주는 것.

정신을 차려 보면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이러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아도 소용없었다. 아이들이 아니면 개수대의 그릇에게 화를 냈다. 세탁기 속 뒤엉켜 있는 빨래에게 화를 냈다. 소음이 심한 청소기를 돌리며 화를 냈다. 허공을 떠도는 먼지를 향해 화를 냈다. 화장품 살 시간을 따로 내지 못해 아이들 로션을 같이 발랐고 세탁소에 겨울 외투 맡길 시간이 없어 가을 점퍼를 연말까지 입고 다니다 몸살을 앓기도 했다...... 집은 점점 좁아졌고 아이들의 비밀은 늘어났고 단은 말이 줄었고 나는 비쩍 말라 건조해졌다. 분명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데, 최선이 답은 아니란 생각이 세금 고지서처럼 주기적으로 날아들었다. 삶이 마디마디 분절되어 흘렀다. 직장에서의 나와 아이들 앞에서 나와 단을 대할 때의 나와 혼자 있을 때의 내가 징그러울 만큼 달랐다. 나라는 사람이 흐트러진 퍼즐 같았다. 애초의 내가 어땠는지 밑그림은 기억나지 않았고 퍼즐은 흩어진 채 여기저기 떠돌았다. 무언가 미세하게 어긋나고 있어서 먼 훗날 완벽하게 분리될 것만 같았다. 나와 내가, 나와 단이, 나와 아이들이.

92쪽. 가족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가족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하지만 가족과 함께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일을 하지 않으면 금방 가난해졌다. 가난하면 아이들은 상처를 받았다. 친구도 사귀기 힘들어했다. 버젓한 브랜드 아파트에 살지 않으면, 다들 다니는 학원에 다니지 않으면 따돌림을 당했다. 그 상처를 부모의 사랑만으로 치유할 수 있었을까? 사람들의 눈총과 무시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나는 몰랐다. 몰라서 아이들에게 가르쳐 줄 수도 없었다. 책이나 교양 프로그램에서 종종 그런 방법을 알려 줬다. 그건 글자로만 배우는 요리와 비슷했다. 차라리 돈을 버는 게 쉬웠다. 돈으로 아이들의 조건을 평균까지 끌어올려 주는게. 그러려면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을 포기해야 했다. 

128쪽.그러니 내가 권지나 아니 누구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권지나 없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느냔 말이다. 우린 반드시 다시 만날 것이다. 묵묵히 맞으면서도 나름 삐뚤어지지 않고 지낸 세월이 있으니까 하느님이 내게 그 정도 행운은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나요 하느님?

148쪽. 우린 이제 어떡하지. 여보, 우리 어디로 가지. 어디로 갈 수 있지.

물이 뚝뚝 떨어졌다. 단은 울고 있었다. 이 남자가 사랑했던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 사람에게는 사랑한다고 말해 봤을까. 정말 사랑했을까. 아직도 사랑할까. 우리가 대체 사랑이란 걸 알긴 아는가. 피로나 자괴감, 분노나 질투가 사라진 궁금증이었다. 물어보고 싶었다. 당신은 사랑이 어떤 건지 정말 아느냐고. 우리가 해림과 해림에게 느끼는 그런 사랑이 아닌, 완전한 타인에게 느끼는 사랑이란 감정을 당신은 경험을 해 보았느냐고.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올려 입었다. 단도 콧물을 훌쩍이며 바지를 입었다.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물었다. 단이 얼굴을 훔치며 나를 쳐다봤다. 5년 전쯤에 당신이 만나던 여자 말이야. 단의 얼굴이 굳었다. 한 번은 물어보려고 했어.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진지한 관계였는지, 그때 왜 나와 헤어지지 않았는지 그런 것들. 알면서 가만있었던 거냐고 단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단이 별로 할 말이 없다고 했다.

그래도 말해 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한테 어떻게 그런 얘길 해. 내가 아무리 개자식이어도......

난 아무렇지도 않아.

.....

알잖아.

몰라. 모르겠어. 어떻게 아무렇지가 않아?

사랑하지 않으니까.

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당신도 그렇잖아.

왜 그런 말을 해?

여보, 그딴 사랑 아니어도 우린 정말 많은 것으로 이어져 있어. 지금껏 힘든 일을 같이 겪었고 여기까지 함께 왔어. 그게 사랑이라면 사랑이지만, 아니어도 상관없잖아.

......

......

그래도 그렇게 말하지 마.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가 되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이해할 수 없어.

...... 궁금해.

그럼 그 때 물어봤어야지.

그땐 궁금하지 않았어.

어째서.

여유가 없었어.

지금은 여유가 있어?

나는 피식 웃었다.

그렇잖아. 우리한테 남아도는 건 시간뿐이잖아.

한국에서였다면 물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이가 들고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각자의 가정을 꾸릴 때까지 미루고 미루다가 어느 날 문득 깨달았을지도.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 버렸다는 걸. 아니, 어쩌면 나조차 생각지 못한 어느 때 폭발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느라 이렇게 힘든데 당신은 양심도 없이 여자나 만나고 다닌 거냐고 무조건 화를 냈을지도. 그때 우리가 함께 해내야 했던 것들, 아이들 교육과 적금과 내 집 마련과 챙겨야할 경조사와 집안 행사들, 주변의 시선과 뒷말과 참견과 편견....... 이젠 그런 것이 없다. 오직 서로의 목숨만이 남아 있다. 그것에만 골몰하면 되는 것이다.하지 못한 말을 하고, 듣지 못한 말을 들어야 한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나니 그 말에는 사실 아무 뜻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는 걸 확인하고 인정하자 오히려 단순하고 개운해졌다. 우린 서로에게 해민의 엄마이고 해민의 아빠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166쪽. 단의 생사를 알 수 없었다. 단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져 버리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사랑이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사랑한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면 내겐 당신의 생명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어야 했다. 사랑한다는 말 없이도 충분하다고, 당신이 필요하다고 말했어야 했다. 그렇게만 말했어도 단은 알아들었을 것이다. 내가 미처 전하지 못한 마음을. 언어로 나타낼 수 없는 진심을. 함께 보낸 무수한 어제가 직조해 낸 우리만의 문양을 확인하고 간직했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에 남은 한 마디가 위험으로 굴러 떨어지는 단을 붙잡아 줄 마찰력이 되었을지도. 

170쪽. 돌아가야 한다. 더 멀어지기 전에 만나야 한다.

안 돼. 언니. 위험해.

지금이 아니면 영영 못 만나.

언니. 민이는. 애를 데리고 저기로 다시 돌아갈 순 없잖아.

지나가 하얗게 트고 갈라진 손으로 내 얼굴을 닦았다. 지나가 눈물을 닦아 줘서 내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흐느낌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내 얼굴을 닦아 주는 지나도 울고 있었다. 단과 나는 너무 무난하고 뻔해서 위태로웠다. 그래서 충분히 생각해 보지 못했다. 우리의 사랑에 제대로 헌신하지 못했다. 이대로 멀어진다면 살아남더라도 평생 후회할 것이다. 그런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지나가 나를 부둥켜안으며 중얼거렸다. 

언니, 일단 살아야지. 살아야 만나지. 

......저절로 만날 수는 없어.

도리가 말했다.

만나기도 전에 죽을지도 몰라.

지나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알면서도 가겠다는 거죠. 죽고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으니까.

도리가 나를 부며 말했다. 우리 중 가장 작고도 단단한 도리의 음성. 그렇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제발 언니, 우리랑 같이 가.

우리와 함께 간다고 목숨이 보장되는 건 아니야, 지나. 이들에겐 이들의 기적이 있어.

우리의 기적. 그런 것이 아직 남아 있을까. 평생에 단 한 사람은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의 A,B,C가 아니라 완벽한 고유명사로 기억될 사람이. 어떤 이는 지름길로 나타나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가장 먼 길을 지난하게 지나고 모든 것에 무감해진 때에야 비로소 거기 있는 풍경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사람도 있다. 기적을 만나려면 그곳까지 가야 한다. 멀어지며 그것을 갈구할 수는 없다. 그곳으로 돌아가 다시 노예가 되더라도, 그렇게라도 단을 만나 또 다른 탈출을 기대할 수 있다면....... 나는 지나를 끌어안고 가만히 다독였다. 꼭 살겠다고 다짐했다. 동쪽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부지런히 자라는 나의 또 다른 기적, 해민이 먼저 발을 떼었다.

살아야 해, 꼭 살아.

지나가 말했다.

매일 생각할께요.

도리가 말했다. 

우리 아무도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지 못했다. 

191쪽. 돌고 돌아 오래전 그 자리 근처에 닿은 느낌이다. 느낌만 있을 뿐 그때의 나도 당신도 여기 없다. 나를 지우고 오직 당신의 기쁨에만 몰두하던 시절이 있었다. 잊지 않았으니 그처럼 살아갈 여지가 있다. 삶을 흐름이 아니라 덩어리도 볼 때 '뒤늦게 알게 되는 것'은 없다는 걸,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으며, 그럼에도 알 수 없다고 여겼던 많은 것들은 당신이 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듣지 않고 보지 않았기 때문임을...... 돌고 돌아 다시 이 근처에 닿는다면 그때에도 어렴풋이 기억할 수 있길. 부디 당신이 기쁘길 바란다. 

.....

언젠가 인류가 멸망하고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것이 한 줌 재로 돌아갈 그날에도 사람들은, 당신은, 우리는 사랑을 할 것이다. 아주 많은 이들이 남긴 사랑의 말은 고요해진 지구를 유령처럼 바람처럼 떠돌 것이다. 사랑은 남는다. 사라지고 사라져도 여기 있을 우주처럼. 

205쪽. 돌이켜보면 최진여잉 오래 지켜 온 이야기들에는 사라지는 빛에 붙들린 당신의 얼굴을 발견하려는 의지가 있었고, 당신의 서글픔을 놓치지 않으려는 절박함이 있었고, 닮은 마음의 무늬로 머뭇거리는 우리의 만남을 그려 내려는 다감한 시도가 있었다. 그 의지와 절박함과 다감한 시도를 빠짐없이 담기 위해 그의 소설들은 자주 '인간적인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날을 세워 '인간적'이라는 수사가 무색해진 시대를 겨누어야 했을 것이다. 공들여 빚어진 문장과 표현으로 소설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정서적 교감의 가능성을 두드렸을 것이다. 사람에 대한, 소설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비어져 나온 최진영 소설만의 어떤 사랑의 방식이라 해도 좋겠다.

이제 짐작해 본다. 이 소설을 떠나는 우리가 겪어 낼 삶에는 분명 시차가 있겠지만, 하여 우리가 바로 오늘 견뎌야 할 어둠 역시 결 다른 것이겠지만, 밤이 온전히 우리를 장악하기 전 그 사랑이 나에게, 당신에게 건너갈 수 있을 것이라고. 비로소 사랑하는 자들의 노래가 깨어난다.(프리드리히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문예출판사 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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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0 15:59 2022/11/20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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