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달 19일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했던 5명의 노동자들이 제출한 산업재해승인 신청이 불허되었다는 뉴스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백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산업재해승인 신청에 참여한 여성노동자의 인터뷰가 실린 기사를 보았습니다. 급성골수성백혈병을 앓고 있는 그녀는 “치료비 걱정만이라도 안하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라면서 인터뷰 중에도 가족들에게 연신 “미안하다”라고 말합니다.
성실한 노동자로 살다가, 원치 않은 질병으로 환자가 되어 맞닥뜨린 또 하나의 신산스러운 현실이 그 분에게 더 깊은 절망을 가져다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 땅에서 환자가 되는 것은 반도체공장의 열악한 노동환경만큼이나 견디기 힘든 삶의 조건을 새롭게 추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1세기 최고의 신약,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
십여 년 전만 해도 백혈병 환자들의 치료를 위해 주로 쓰이던 치료제는 항암제였습니다. 몸속의 비정상적인 세포 덩어리인 암 조직을 없애듯이, 과다하게 증식한 비정상적인 백혈구를 없애기 위해 항암제가 쓰입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항암치료는 건장한 성인 남성들도 견디기 힘들어 합니다. 올 해 저희 아버지께서도 항암치료를 받으셨습니다. 무척 건강하신 분인데도 어지러움으로 힘들어 하셨고, 항암제 주사를 맞고 나면 혈관 쪽 피부가 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을 보고 많이 속상해 하셨습니다. 항암치료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도 못할 것 같습니다.
이처럼 고통스러운 치료를 피할 수 없었던 백혈병 환자들에게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낭보가 들려옵니다. 금세기 최고의 신약기술이라 칭송받는 백혈병 치료제가 40여 년의 연구·개발 과정 끝에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약의 이름은 ‘글리벡(Gleevec)’이라고 합니다. 보통 항암제는 암 세포 뿐만 아니라 몸 속의 정상적인 세포를 파괴하면서 심각한 부작용을 야기합니다. 그러나 ‘최초의 표적 항암제’라 불리는 글리벡은 정상적인 세포는 건드리지 않고 오직 암세포, 즉 비정상적인 백혈구만을 제거합니다. 부작용은 줄이고 치료의 효과는 비약적으로 높인 이 약은 더군다나 간편하게 입으로 먹을 수 있는 알약입니다. 글리벡의 등장 이후 최소한 만성골수성백혈병의 경우, 더 이상 TV 드라마 속 주인공을 시한부 생명으로만 이끄는 병이 되지 못했습니다. 당뇨나 고혈압처럼 하루 세 번의 투약으로 다스릴 수 있는 만성 질환이 되었던 것이죠.
환자들이 얼마나 기뻐했을까요? 2001년 5월 10일 미국 식약청에서 글리벡의 시판 허가가 떨어지기 무섭게, 국내의 백혈병 환자들은 글리벡의 조속한 국내 공급, 즉 건강보험 등재를 요구하는 민원과 서명운동을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 식약청은 6월 20일, 이례적으로 아직 국내에서 임상실험이 완료되지 않은 글리벡의 시판 허가를 내립니다. 그리고 몇몇의 환자들에 한하여 우선적으로 글리벡이 무상공급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글리벡의 조속한 공급여부는 생사를 가르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식약청에서 약에 대한 시판 허가가 내려지면, 약제전문위원회에서 여러 기준에 근거하여 건강보험 적용 여부와 함께 약값을 결정합니다. 이 절차를 거친 후, 해당 의약품은 국내에서 정상적인 유통과 판매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했습니다.
의약품의 생산, 판매 및 유통에 관한 모든 권리는 지적재산권의 한 형태인 ‘특허’로 보호를 받습니다. 특허가 부여된 의약품에 대해서는 20년 동안 독점적 권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글리벡의 특허권자는 다국적 제약회사인 ‘노바티스(Novartis)’입니다. 노바티스는 식약청의 시판 허가가 내려진 직후, 글리벡 한 캅셀 당 25,000원의 가격을 요구합니다. 이는 성인 환자 한 사람 당 매월 300만원이 넘는 비용을 부담시키는 가격입니다. 당시 보건복지부는 이 가격을 거부하고 17,862원으로 약가를 고시합니다. 이에 반발한 노바티스는 결국 글리벡의 무상공급 중단을 선언합니다. 협상장 밖에서 글리벡의 약가 인하를 요구하던 백혈병 환자들은 경악했습니다. 글리벡이 없으면 살 수 없는 환자들의 생명을 가격협상의 도구로 이용한 것이었으니까요.
8,000원을 양보할 수 없었던 이유
보건복지부가 노바티스의 요구를 그냥 들어주면 될 것 아니냐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기껏해야 8,000원의 약값만 더 주면, 많지도 않은 백혈병 환자들에게 안정적으로 약을 공급할 수도 있고, 획기적인 신약을 개발하기 위해 쏟아 부은 노바티스의 노고를 치하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건복지부 뿐만 아니라 백혈병 환자들까지 노바티스의 가격을 수용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환자들이 경제적으로 부담 없이 약을 구할 수 있는 지의 여부는 정부의 지원이나 보험제도가 어느 정도 뒷받침되는 지에 달려있습니다. 똑같이 감기에 걸려도 전 국민이 아무 조건 없이 가입하는 국민건강보험이 있는 우리나라와 엄격한 가입 요건을 따지는 민간 보험만이 넘쳐나는 미국 사람들이 느끼는 부담감은 천양지차입니다. ‘성인 암환자 의료비 지원제도’의 대상이 되는 암환자(위암, 유방암, 대장암, 자궁경부암, 간암)와 그렇지 못한 암환자가 느끼는 치료비 부담 차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의약품 가격이 지나치게 높다는 것은 전 세계적인 공통점입니다. 의약품의 높은 가격은 건강보험을 비롯한 각종 보건의료 정책에 막대한 부담을 주며 제도의 원활한 운영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이는 선진국, 후진국을 가리지 않고 전 세계 모든 정부가 고민하는 문제입니다. 즉, 높은 의약품 가격이야말로 약에 대한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근본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의약품의 가격이 높은 이유는 연구·개발 과정에서 드는 비용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노바티스를 비롯한 수많은 제약회사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과 국제기구가 공개한 데이터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매출액을 기록하고 있는 10대 제약회사들의 매출액 대비 평균적인 연구개발 비용(14%)은 마케팅비용에 지출하는 비용(31%)의 절반 수준입니다. 제약회사의 보편적인 마케팅 방식인 리베이트 비용만 줄여도 대부분의 약값들은 큰 폭으로 인하될 것입니다.
또한, 글리벡과 같은 희귀난치성 질환 치료제의 경우 대부분 정부와 공공연구소 또는 비영리기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습니다. 글리벡 역시 미국의 ‘희귀의약품지원법(Orphan Drug Act)’의 대상이 되어 임상시험비용에 대한 50%의 세액공제 등 막대한 혜택을 받으며 개발된 약입니다. 글리벡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지금까지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 약들의 개발과정에 투여된 공적 자금 비율은 77%에서 많게는 95%에 이를 정도입니다.
의약품의 연구·개발 과정에 있어서 제약회사의 역할이 그다지 크지 않음에도, 그들이 고가의 가격을 고집할 수 있는 이유는 제약회사가 약에 대해 가지고 있는 독점적인 권리, 즉 특허 때문입니다. 특허제도의 본래 취지는 발명의 이용을 도모함으로써 기술의 발전을 촉진하여 산업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수단으로서 20년이라는 보호기간 동안 독점적인 권리를 보장합니다. 그러나 의약품을 생산하는 제약회사는 독점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독점은 언제나 최대한의 이윤을 보장해주기 때문입니다.
보험제도나 정부의 지원제도에 따른 약값 부담의 차이는 의약품의 높은 가격을 유지시켜주는 특허 유무에 따른 가격 차이에 비하면 새 발의 피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20년이라는 특허 보호기간 만료 전후의 가격차이나, 특허를 보호하는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 사이의 의약품 가격 차이가 100배가 넘는 것도 있습니다.
오르는 약값, 무너지는 건강보험
고가의 의약품은 각국의 보건의료 정책에 엄청난 비용 부담을 야기합니다. 미국에서는 제약회사의 신약에 대한 특허 보호 기간을 1년 씩 증가할 때마다 미국인들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60억 달러에 이른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습니다. 미국 의회예산처는 2007년 GDP의 16%이었던 총 의료비용이 2025년 25%, 2082년 49%까지 증가할 것이라고 예측하였으며, 이 속도가 그대로 유지될 경우 2082년 총 의료비용은 GDP의 100%가 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전체 건강보험 재정의 30%에 달하는 금액이 모두 제약회사에 지불하는 약제비입니다. 누구나 한 번 쯤은 매년 꼬박 꼬박 오르는 건강보험료에 짜증을 내본 적이 있습니다. 제약회사가 요구하는 약값을 모두 받아들인다면 건강보험제도는 국민의 신뢰를 잃고, 재정적으로도 파산할 수 있는 심각한 수준에 도달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2003년 1월 보건복지부는 결국 노바티스의 요구를 수용하여 23,045원의 가격으로 글리벡을 건강보험에 등재하였습니다. 6년이 지난 2008년 한 해 동안, 글리벡은 국내에서만 600억 원이 넘는 매출액을 기록했습니다. 국내에서 유통되는 의약품 중, 매출액 순위로는 5위입니다. 그 600억 원은 여러분이 내고 있는 건강보험료로 지불합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글리벡은 지난 한 해에만 37억 달러(5조원)나 되는 판매실적을 올렸으며, 이는 2007년과 비교해도 20%가 증가한 수치입니다. 글리벡의 개발비용이라 알려진 8억 달러는 이미 글리벡 판매 첫 해에 모두 회수되었습니다. 백혈병 환자들의 살려는 의지는 제약회사의 경이로운 이윤 창출의 무기가 되었습니다.
“치료비 걱정만이라도 안 하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반도체공장의 노동자이자, 백혈병 환자인 그녀의 바람이 가슴을 무겁게 합니다. 떳떳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의지와 기대들은 항상 지난하고 괴로운 투쟁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가진 것 없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은 어느 하나 녹록치 않은 것이 없습니다. 노동, 그리고 그 이전의 생명마저도 자본의 이윤 창출 수단으로 전락한 현실이 그녀와 우리의 소원을 그저 넋두리로 만들어버릴까 두렵습니다. 곁에 있는 이들의 손길과 눈짓 하나 하나가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끝)
* 전국여성노동조합(http://www.kwunion.or.kr/) '이달의 노보 104호(?)'에 실릴(?)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