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닉 다이어-위데포드의 공통적인 것의 유통 2006

출처 : http://www.fims.uwo.ca/people/faculty/dyerwitheford/Commons2006.pdf

[Commons2006.pdf (117.80 KB) 다운받기]

 

------

 

[20111104_공통적인 것의 유통 2006.hwp (57.01 KB) 다운받기]

 

------

 

THE CIRCULATION OF THE COMMON

공통적인 것의 유통

 

Nick Dyer-Witheford [University of Western Ontario]

닉 다이어-위데포드(웨스턴 온타리오 대학)

 

Paper presented at IMMATERIAL LABOUR, MULTITUDES AND NEW SOCIAL SUBJECTS: CLASS COMPOSITION IN COGNITIVE CAPITALISM, Saturday 29th and Sunday 30th April 2006, King’s College, University of Cambridge

발표 논문, 비물질적 노동, 다중 그리고 새로운 사회 주체 : 인지 자본주의에서 계급 구성, 2006년 4월 29일 토요일과 30일 일요일, 킹스 칼리지, 케임브리지 대학

 

Introduction

도입

 

This paper makes theoretical propositions to assist conceive an emergent communism, a “coming community” that is neither capitalist, socialist nor anarchic, and the place within it of “immaterial labor.” [1] Its argument, in brief, is as follows.

이 논문은 이론적 제안들이 떠오르는 코뮤니즘, 자본주의적이지도, 사회주의적이지도, 아나키즘적이지도 않은 “다가오는 공동체”, 그리고 그것 내부에 “비물질적 노동”[1]의 장소를 마음 속에 그리는 데에 조력한다. 요컨대, 그것의 논의는 다음과 같다.

 

Marx deemed the cellular form of capitalism to be the commodity, a good produced for exchange between private owners. His model of the circulation of capital traced the metamorphosis of the commodity into money, which commands the acquisition of further resources to be transformed into more commodities. The theorists of autonomist Marxism demonstrated how this circulation of capital is also a circulation of struggles, meeting resistances at every point. But although this concept proved important for understanding the multiplicity of contemporary anti-capital, it says very little about the kind of society towards which these struggles move, a point on which the autonomist tradition has mainly been mute. Today, new theorizations about multitude and biopolitics should to reconsider this silence.

맑스(Marx)는 자본주의의 세포 형식이 상품, 사적인 소유자 사이에 교환을 위해 생산된 재화임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자본의 유통 모델은 상품의 화폐로의 변신을 추적했고, 그리고 그것은 더 많은 상품으로 변형될 그 이상의 자원의 취득을 명령한다.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의 이론가들은 어떻게 이 자본의 유통이 또한 투쟁의 유통인지를 증명했다, 모든 점에서 저항에 대처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비록 이 개념이 동시대의 반(反)자본주의의 다양체를 이해하는 데 중요했을지라도, 그것은 이 투쟁들이 향해 움직이는 사회의 종류, 자율주의적 전통에서 대개 말이 없었던 지점에 대하여 정말 거의 말하지 않는다. 오늘날, 다중과 삶정치에 관한 새로운 이론화는 이 침묵을 재고해야 한다.

 

I suggest that the cellular form of communism is the common, a good produced to be shared in association. The circuit of the common traces how shared resources generate forms of social cooperation—associations-- that coordinate the conversion of further resources into expanded commons. On the basis of the circuit of capital, Marx identified different kinds of capital—mercantile, industrial and financial—unfolding at different historical moments yet together contributing to an overall societal subsumption. By analogy, we should recognise differing moments in the circulation of the common. These include terrestrial commons (the customary sharing of natural resources in traditional societies); planner commons (for example, command socialism and the liberal democratic welfare state); and networked commons, (the free associations open source software, peer-to-peer networks, grid computing and the numerous other socializations of technoscience).

나는 코뮤니즘의 세포 형태가 공통적인 것, 연합에서 공유되기 위해 생산된 재화라고 제안한다. 공통적인 것의 순환은 공유된 자원이 확장된 공유지로 그 이상의 자원의 전환을 조정하는 사회적 협력-연합-의 형태를 낳는 방식의 경로를 밟는다. 자본의 유통에 기초해서, 맑스는 다른 역사적 순간들에 펼쳐지지만 함께 전반적인 사회의 포섭에 기여하는 자본의 다른 종류들 - 상인적, 산업적 그리고 금융적 - 을 확인한다. 유추를 통해, 우리는 공통적인 것의 유통에서 다른 순간들을 인식화해야 한다. 이것들은 대지적 공유지 (전통 사회에서 자연 자원의 관습적 공유지); 계획자 공유지 (예를 들어, 통제 사회주의와 자유 민주주의 복지 국가); 그리고 네트워크 공유지, (무료 연합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피투피 네트워크, 망상(網狀) 컴퓨팅과 기술과학의 다수의 다른 사회화).

 

Capital today operates as a systemic unity of mercantile, industrial and financial moments, but the commanding point in its contemporary, neoliberal, phase is financial capital. A twenty-first century communism can, again by analogy, be envisioned as a complex unity of terrestrial, state and networked commons, but the strategic and enabling point in this ensemble is the networked commons. These must however, also be seen in their dependency on, and even potential contradiction, with the other commons sectors. The concept of a complex, composite communism based on the circulation between multiple but commons forms is opens possibilities for new combinations of convivial custom, planetary planning and autonomous association. What follows expand on these cryptic observations.

자본은 오늘날 상인적, 산업적 그리고 금융적 순간의 체계적 통일체로서 작용하나, 그것의 신자유주의적인 동시대의 국면에서 유리한 장소를 차지한 지점은 금융 자본이다. 다시 유추에 의해서, 21세기 코뮤니즘은 대지적, 국가적 그리고 네트워크적 공유지의 복합 통일체로 상상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종합적 효과에서 전략적이고 가능적인 지점은 네트워크적 공유지이다. 이것들은 하지만, 또한 그것들이 의존물과, 심지어 잠재적 모순에서, 다른 공유지 분야들과 함께 보여야 한다. 복합적, 합성적 코뮤니즘의 개념은 다양체 사이의 유통에 근거하나, 공유지 형태들은 연회 관습, 지구상의 계획 그리고 자율적인 연합의 결합들에 대한 가능성에 열려 있다. 따라오는 것은 이 숨은 관찰에 의하여 확장된다.

 

The Circulation of Capital

자본의 유통

 

Marx famously described the commodity, a good produced for exchange between private owners, as the “cell-form” of capital, the primordial point from which grew all its more complex and composite manifestations.

맑스는 상품, 사적 소유주들 사이의 교환을 위한 재화를 자본의 “세포-형태”, 보다 모든 그것의 복합적이고 합성적인 명시가 성장하는 근본적인 지점으로 묘사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The wealth of societies in which the capitalist mode of production prevails appears as an ‘immense collection of commodities; the individual commodity appears as its elementary form. Our investigation therefore begins with the analysis of the commodity.”[2]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는 ‘상품의 막대한 집적’으로 나타난다; 개개의 상품은 이러한 부의 기본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의 연구는 상품의 분석으로부터 시작한다.”[2]

 

The processes of this growth were however, not fully described until Volume Two of Capital, which outlines a model of the circulation of capital. This model traces the metamorphosis of the commodity into money and back again. This cycle is expressed in the classic formulae M ─ C (LP/MP) . . . P . . .C' ─ M'. Money (M) is used to purchase as commodities (C), including labor power (LP), and the machinery and raw materials that are the means of production (MP). These are thrown into production (P) to create new commodities (C') that are sold for more money (M'), part of which is retained as profit, part of which is used to purchase more means of production to make more commodities. The money at the end of the process is greater than that at the beginning and the value of the commodity produced is greater than the value of the commodities used as inputs: repeat ad infinitum.

이 성장의 과정은 그러나, 자본의 유통 모델을 개괄하는 자본론 2권까지 완전히 묘사되지 않았다. 이 모델은 화폐로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상품의 대변모를 추적한다. 이 주기는 고전적 공식들 M ─ C(LP/MP) . . . P . . .C' ─ M'로 표현된다. 화폐(M, money)는 노동력(LP, labor power), 그리고 생산의 수단인 기계와 가공되지 않은 재료들을 포함하며, 상품 구입에 사용된다. 이것들은 새로운 상품을 창조하는 생산에 던져지고, 상품은 더 많은 화폐로 팔리고, 더 많은 화폐의 일부는 이윤으로서 보유되고 일부는 더 많은 상품을 만들기 위한 더 많은 생산 수단들을 구입하는 데에 사용된다. 화폐는 그 과정의 끝에서 시작에서의 그것보다 크고 생산된 상품의 가치는 투입물로서 사용된 상품의 가치보다 크다 : 무한대로 반복.

 

This circuit could, both in any specific instance or in general, fail. A C may not find its M if a seller does not meet a buyer, nor M tryst with C, if a buyer lacks a seller, and all may fall completely apart in the ugly abode of P. But if it surmounted these hazards, the circulation of capital becomes an auto-catalytic, self-generating, boot-strapping growth process, a “constantly revolving circle” in which every point is simultaneously a point of departure and a point of return.”[3]

이 순환은, 어떤 특정한 순간 또는 일반적으로 둘 다, 실패할 수 있다. 만약 판매자가 구매자에 응하지 않는다면 A C는 아마도 그것의 M을 찾아내지 않을 수도 있고, 만약 구매자가 판매자에게 부족하다면 M이 C와 회합의 약속을 지킬지 않을 수도 있고 모든 것은 P의 추한 장소와 완전히 떨어져서 실패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이 위험들을 넘는다면, 자본의 유통은 그 안에서 모든 지점이 동시적으로 출발과 복귀의 지점이 되는 자동-촉매적, 자기-산출적, 부트 스트래핑(boot-strapping) 성장 과정, “끊임없이 회전하는 궤도”가 된다.[3]

 

This circuit is the dynamic process that converts the cell form of the commodity into what Marx termed more “complex and composite” forms, a process of organ-creation, forming an entire capitalist metabolism, that subsumes previous forms of the social body. It is, to use a different language, the path from capital’s molecular level to its molar manifestation.

이 순환은 상품의 세포 형태가 완전한 자본주의적 변모를 형성하면서, 맑스가 더 많은 “복합적이고 합성적인” 형태라고 말했던 것, 기관-창조의 과정으로 전환하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그것은 사회적 몸의 이전 형태를 포섭한다.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적 분자 수준에서부터 그것의 몰적 명시까지의 경로이다.

 

The circulation process that begins with money and ends with more money is a never ending process, but it can be punctuated in different ways. We could look at it beginning and ending with the act of production or with capital in a commodity state, or in its money state. As David Harvey puts its, “We can create three separate windows to look in on the overall characteristics of the circulation of capital. From each window we can see something different. . . .In the end, of course, we are interested in the circulation of capital as a whole, but we cannot understand this . . . without first examining the differentiations within it.”[4] So, for example, the transformation of commodities into money (C-M) is the role of mercantile capital; that of the production of commodities by means of commodities (P) is mediated by industrial capital, and the conversion of money capital into productive capital is the ostensible task of financial capital (M-C). While all have an interest in the expansion of surplus value, they do not necessarily always agree about how to divide it up.

화폐와 함께 시작하고 더 많은 화폐와 함께 끝나는 그 유통 과정은 절대로 끝나지 않으나, 그것은 서로 다른 방식들로 구두점을 찍는다. 우리는 생산의 행동과 함께, 또는 상품 국가에서나 그것의 화폐 국가에서 자본과 함께 시작하고 끝나는 그것을 볼 수 있었다.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가 그것의 것을 “우리는 자본유통의 전체 특성들을 살펴볼 수 있는 세 개의 분리된 창문들을 만들 수 있다. 각 창문으로부터 우리는 상이한 어떤 것을 볼 수 있다 ······· 물론 궁극적으로 우리는 자본 전체의 유통에 관심이 있지만, 자본 전체의 순환을 이해할 수 없다 ······ 먼저 그 내부의 상이성들을 고찰하지 않고서는.”[4] 예를 들어, 그래서, 상품의 화폐로의(C-M) 변형은 상인 자본의 역할이다; 상품들의 수단들(P)을 통해 상품 생산의 그것은 산업 자본에 의해 조정되고, 화폐 자본의 생산적인 자본으로의 전환은 금융 자본의 외면적 임무이다(M-C). 모든 것이 공급 가치의 팽창에 관심을 갖는 동안에, 그들은 그것을 분할하는 방식에 대하여 필연적으로 언제나 합의하는 것은 아니다.

 

hese different sectors are both synchronic and diachronic aspect. That is to say, while they are simultaneously necessary for the fully actualised operations of capitalist society, each has assumed preeminence at different times. So, for example, the growth of mercantile capital from 16th to 18th century is often seen as the precondition for the emergence of industrial capital in the 19th century, which in turn has generated an increasing preeminence to financial capital in the late 20th century. None of these different subsets of capital replace each other, but at specific historical moments one or other sounds a keynote or takes the lead for the entire ensemble.

이 다른 부문들은 공시적이고 동시에 통시적인 양상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충분하게 실현된 작용에 동시적으로 필연적이라고는 하나, 각각은 다른 시간들에서 걸출함을 취했다. 예를 들면, 그래서 16세기로부터 상인 자본의 성장은 자주 19세기에 산업 자본의 출현에 대한 선결조건으로 자주 보이고, 그리고 그것은 차례로 20세기 후반에 금융자본에 점점 증가하는 걸출함을 낳았다. 자본의 이 서로 다른 부분집합의 어떤 것도 서로 서로를 대신하지 않는다, 그러나 특정한 역사적 순간들에 하나나 다른 것은 으뜸을 소리가 나거나 전부의 종합적 효과에 대한 리드를 가진다.

 

The ramifying elaborations arising from these circuits have been depicted by theorists who have developed Marx’s model into intricate diagrams showing our current deep entanglement in the commodity-form. If we think of a rotating sphere not only accelerating in velocity around its circumference but expanding in diameter as it fills more and more space we have the image of global capital, aka “empire.”

이 순환들로부터 일어난 그 분지한 동화는 상품-형태에서 우리의 현행의 깊은 얽힘을 보여주는 뒤얽힌 다이어그램으로 맑스의 모델을 발전시켰던 이론가들에 의해 그려졌다. 만약 우리가 회전하는 구체(球體)를 그것의 원주 주위 속도에서의 가속화뿐만 아니라 그것이 점점 더 큰 공간을 채울 때 지름에서의 팽창 또한 생각한다면 우리는 전지구적 자본의, 별칭으로는 “제국”인 것의 이미지를 가진다.

 

The Circulation of Struggles

투쟁의 유통

 

It was the great rediscovery of autonomist theory that the circulation of capital was also a circulation of struggles. Each node in the circuit of capital is a potential site of conflict where the productive subjectivities capital requires may contest its imperatives. If not all, at least many of the breakdowns in capital’s circulation occur because LP (labor-power) refuses to remain LP: it resists and re-appropriates.

자본의 유통이 또한 투쟁의 유통이기도 했다는 것은 바로 자율주의 이론의 위대한 재발견이었다. 자본의 순환에서 각각의 마디는 생산적인 주체성 자본의 필요들이 그것의 명령과 경쟁할지도 모르는 충돌의 잠재적인 장소이다. 만약 모두는 아니라할지라도, 어쨌든 자본의 유통에서 붕괴는 LP(노동력, labor-power)가 LP로 남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것은 저항하고 재전유한다.

 

Although this insight was given many expressions, perhaps the most complete English language version is the essay by Peter Bell and Harry Cleaver, “Marx’s Theory of Crisis as a Theory of Class Struggle.” [5]This proceeds systematically around the circuit of capital showing the range of insurgent interruptions possible at each phase. Thus the attempt to purchase the commodity labor, M-C (LP), could be interrupted by struggles over dispossession of populations necessary to create a proletarian workforce, or the maintenance of that workforce in a suitable condition of precarity. The purchase of raw materials, M-C (MP), might be frustrated by eco-struggles. The moment of production (P) was the site of classic work place resistances to exploitation, from strikes, occupations and sabotage. The sale of commodities, C-M, was menaced by dangers from theft to boycotts to public reappropriation.

많은 표현들에 이 통찰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마 가장 완벽한 영어 버전은 피터 벨(Peter Bell)과 해리 클리버(Harry Cleaver)에 의한 에세이, “계급 투쟁의 이론으로서 위기의 맑스 이론”[5]이다. 이것은 각각의 국면에서 반역적인 방해의 범위를 보여주면서 자본의 순환을 둘러싸고 체계적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상품 노동력을 구입하려는 시도{M-P (LP)}는 프롤레타리아의 노동력을 창조하는 데 필요한 주민의 내쫓음에 대한, 또는 불안정성이라는 적당한 조건에서 그 노동력의 유지에 대한 투쟁에 의해 방해될 수 있었다. 가공되지 않은 재료의 구입{M-C (MP)}은 생태 투쟁에 의해 좌절되었을지도 모른다. 생산(P)의 순간은 고전적 노동이 착취에 대한 저항 - 파업, 점거, 그리고 사보타주 -을 벌이는 장소였다. 상품의 판매(C-M)는, 도둑질부터 공적인 재전유에 대한 보이콧까지의 위험들에 의해 위협받았다.

 

Furthermore, each of these flashpoints might ignite others. This knock-on effect might happen as it were unconsciously—if, for example, capitalists exposed to heightened costs for raw materials caused by “resource wars” responded by intensifying the rate of exploitation in production, thereby precipitating strikes, or responds to strikes by technological innovations that then overproduce so much that goods cannot be sold, generating recessions, unemployment and militant movements of the immiserated. But the connection could also be a conscious process, as subjects contesting capital at different points linked or allied one with another. The concept of the circulation of struggles underlies much of the richest thought about the use of means of communication, old and new, to link together these variegated agencies into new combinations, a line of analysis running from Romano Alquati’s reflections on “radiating the operational information of struggle” to Cleaver’s concept of the “electronic fabric of struggle.”[6]

더군다나, 이 발화점들의 각각이 다른 것들에 불을 붙였을지도 모른다. 이 연쇄 효과는 그것이 무의식적이었을 때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 예를 들어, 만약 자본가가 생산에서 착취율의 강력함에 대응된 “자원 전쟁”에 의해 야기된 가공되지 않은 재료에 대한 증대된 비용에 노출된다면, 그것에 의해 파업을 촉진하면서, 또는 재화가 팔릴 수 있지 않을 정도로 너무 많이 그때 과잉생산하는 기술적 혁신에 의한 파업에 대한 대응을 촉진하면서,  점점 비참해진 사람들의 후퇴, 미고용, 그리고 군사적 운동을 낳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연결은 또한 의식적 과정일 수도 있었다, 다른 지점에서 자본을 다투는 주체가 하나가 다른 하나와 연결되거나 동맹했을 때. 투쟁의 유통 개념은 낡게 그리고 새롭게, 이 얼룩덜룩한 기능들을 새로운 결합 안으로 연결하는  소통 수단의 사용에 대하여, “투쟁의 발열적 작용 정보”에 관한 로마노 알꽈띠(Romano Alquati)의 성찰로부터 “투쟁의 전자적 직조”라는 클리버의 개념까지 달리는 분석의 라인에 대하여 가장 풍부한 사고의 많은 부분 근저에 있다.[6]

 

In its intention, Bell and Cleaver’s analysis of the circulation of struggle was an attack on objectivist Marxism that saw capital proceeding to crisis according to teleological laws: what they showed was that most of these “laws” were the outcome of colliding vectors of struggles waged by collective subjects. But ultimately, the concept of the circulation of struggles had even wider implications. In its various autonomist articulations it decentered traditional Marxist concerns with conflict at the immediate point of production. A focus on factory resistance became displaced to a multiplicitous view of contestation throughout a circuitously interconnected social factory. Marx’s singular old mole of the proletariat digging through the factory floor became the ”tribe of moles”, burrowing a network of tunnels through schools, households, and welfare offices. [7] This view of a widening circulation of struggles, occurring at different nodes all along the circuit of capital, all potentially interlinked, is part of the genealogy of transversal politics and of the multitude, concepts which have become part of the theoretical lexicon of the contemporary movement of movements.

그것의 의도에서, 투쟁의 유통이라는 벨과 클리버의 분석은 기술적 법칙에 따라 자본 과정을 보는 객관적 맑스주의에 관한 공격이었다: 그들이 보여주었던 것은 이 “법칙들”이 집단적인 주체들에 의해 수행된 투쟁들이라는 충돌하는 힘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투쟁의 유통 개념은 암시를 한층 더 넓혀주었다. 그것의 다양한 자율주의 절합에서 그것은 생산의 즉각적인 지점에서의 갈등과의 전통적 맑스주의의 관심사들을 분산시켰다. 공장 저항에 대한 포커스는 우회적으로 상호연결된 사회적 공장을 관통하여 논쟁하는 다양한 관점으로 대체되었다. 공장 바닥을 통하여 파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맑스의 특이한 오래된 두더지는 학교, 가정, 그리고 복지 사무실을 통하여 터널의 네트워크를 뚫는 "두더지 떼"가 되었다.[7] 투쟁의 유통을 넓힌다는, 자본의 유통을 모두 따라, 잠재적으로 모두 이어 붙여진 다른 마디들에서 일어난다는 이 관점은 횡단적 정치학에 관한 그리고 운동의 동시대 운동의 이론적 사전의 부분이 되었던 개념인 다중에 관한 계보의 부분이다.

 

Yet if the theory of the circulation of struggle both subverted objectivist Marxist accounts of crisis, and de-centered the classic Marxian focus on the immediate point of production, it also, in a very classically Marxian way, has little to say about the long term outcome of these struggles. Yes, sufficient proliferation of such struggles will bring capital to breakdown. Yes, in the struggles subjects self-valorise, reappropriating use-values from the sphere of exchange, winning back time and life. Bell and Cleaver’s wonderful essay ends by remarking that what “defines a revolutionary subject” is “not only the negative power to abolish capital but the positive power to increasingly define its own needs, to carve out an expanding sphere of its own movement and to create a new world in place of capitalism.”[8] But the organizational or institutional forms this “expanding sphere” might take are unnamed. If today the concept of circulation of struggles speaks well to the multiple voices declaring “another world is possible,” to the begging question “but which world?” –or even, if one wishes to emphasise a potential diversity of arrangements, “which worlds?”-- it does not answer.

하지만, 투쟁의 유통 이론은 위기 객관적 맑스주의적 기술을 뒤엎었고, 그리고 생산의 즉각적 지점에 대한 고전적 맑스주의의 포커스를 탈중심화했다면, 맑스주의적 방식으로 매우 고전적으로, 그것은 또한 이 투쟁들의 장기적 결과에 대하여 거의 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 그러한 투쟁들의 충분한 증식이 자본을 붕괴로 가져갈 것이다. 그렇다, 투쟁에서 주체는 교환의 영역에서 자기 안정화한다, 사용가치를 재전유하고, 시간과 삶을 확보하면서 말이다. 벨과 클리버의 훌륭한 에세이는 “혁명적 주체를 정의하는” 것이 “자본을 폐지하는 부정적인 힘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필요를 점점 정의하고, 그 자신의 운동의 확장하는 영역을 개척하는 그리고 자본주의의 장소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긍정적인 힘”이라는 언급으로 끝맺었다.[8] 그러나 이 “확장하는 영역”이 가졌을 지도 모르는 조직적이고 제도적인 형태는 이름 지어지지 않는다. 만약 오늘날 투쟁의 유통 개념이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고 선언하는 다양한 목소리에게, “그러나 다른 세계를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 또는 심지어, 만약 누군가, “어떤 세계를?”이라며 배치의 잠재적 차이점을 강조화하기를 바란다면 - 유효하려면, 그것은 답이 되지 못한다.

 

The Circulation of the Common

공통적인 것의 유통

 

Because the practical struggles of a multiplicitous movement, and the theoretical reflections that arise in tandem with them, have over the last decade and a half reached quite a high level, we might now be able to take another step. Having gone from the circulation of capital to the circulation of struggles, we can proceed from the circulation of struggles to the circulation of the common.

다원적인 운동의 실제적인 투쟁과 그것들에 협력하여 일어나는 이론적 반영이 높은 수준에 완벽하게 도달했던 최근 십오 년보다 우위에 섰기 때문에, 우리는 또 다른 단계를 지금 취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본의 유통부터 투쟁의 유통까지 가버리면서, 우리는 투쟁의 유통에서 공통적인 것의 유통까지 나아갈 수 있다.  

 

The common, and the commons, are terms that have amongst activists recently become, well, common. The usual point of reference is the lands collectively used for subsistence purposes by pre-capitalist agricultural communities and destroyed by enclosure in the process of primitive accumulation.[9] Although enclosure was resisted by overt and clandestine insurrections whose full dimensions were only recently disclosed by Peter Linebaugh and Maurice Rediker’s account of a “hydra-headed” rebellion, these struggles were lost.[10] But interest in the commons has been revived by opponents of global capital seeking a vantage from which to criticise the “new enclosures” privatizing of natural and social resources across the planet.[11] Some accounts romanticise the historical commons as a pre-capitalist utopia, rather than a marginal supplement to a hierarchic feudal order. Others invoke the commons only the better to plan their commercialization. But the concept remain an important lever for rethinking issues of collective production and ownership, and it is to this end, and with a profound debt to theorists such as John McMurtry and Massimo de Angelis who have already thought along these lines, that it is deployed here.[12]

공통적인 것, 그리고 공유지는 활동가들 중에서 최근, 글쎄, 공통적이 되었던 용어이다. 언급의 보통의 관점은 전자본주의 농업 공동체에 의해 생존 목적으로 집합적으로 사용된 그리고 원시 축적의 과정에서 인클로저(enclosure)에 의해 파괴된 땅이다.[9] 인클러저가 “히드라의 머리를 한” 모반에 대한 피터 라인보우(Peter Linebaugh)와 마커스 레디커(Maurice Rediker)의 기술에 의해 단지 최근에 그것의 완전한 차원이 드러났던 공공연하고 은밀한 반란에 의해 저항 받았을지라도, 이 투쟁은 사라졌다.[10] 그러나 공유지에 대한 관심은 전지구적 자본의 적들에 의해 소생했다, 그들은 행성을 가로질러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자원을 사유화하는 “새로운 인클로저”를 비평하는 우월한 지위를 추구한다. 일부 기술은 역사적 공유지를 전자본주의적 유토피아로 낭만화 한다, 차라리 위계적 봉건 제도에 대한 가장자리의 보충이라기보다 말이다. 다른 것들은 그것의 상품화를 단지 더 많이 계획하기 위해 공유지를 예로 든다. 그러나 그 개념은 집합적인 생산과 소유권의 문제를 재사고하는 데 중요한 지렛대로 남고, 그리고 그것이 여기에서 전개되는 것은 바로 이 끝으로이고, 이 선을 따라 이미 생각했던 존 맥머트리(John McMurtry)와 맛시모 데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 같은 그러한 이론가들에 대한 깊은 빚과 함께이다.[11]

 

If the cellular form of capitalism is the commodity, the cellular form of communism is the common. A commodity is a good produced for exchange. A common is a good produced for shared use. Capital is an immense heap of commodities. Communism is a multiplication of commons.

만약 자본주의의 세포 형태가 상품이라면, 공산주의의 세포 형태는 공통적인 것이다. 상품은 교환을 위해 생산된 재화이다. 공유물은 공유된 사용을 위해 생산된 재화이다. 자본은 상품의 막대한 퇴적이다. 공산주의는 공유지의 증식이다.

 

The commodity, a good produced for exchange, presupposes private owners between whom such exchange occurs. The common presupposes collectivities within which sharing occurs, collectivities that coordinate, organise and plan this sharing. I will call these collectivities Associations.

교환을 위해 생산된 재화, 상품은 그러한 교환이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적인 소유자들을 미리 가정한다. 공통적인 것은 공유가 일어나는 집합성을, 이 공유지를 조정하고, 유기적으로 조직하고 그리고 계획하는 집합성을 미리 가정한다. 나는 이 집합성을 연합이라고 부를 것이다.

 

We can thus postulate a circulation of the common. This traces how associations of various types, from tribal assemblies to socialist cooperatives or open source networks organise shared resources into productive ensembles that create more shared resources which in turn provide the basis for the formation of new associations. If C here represents not a Commodity but Commons, and A stands for Association the basic formulae is therefore: A ─ C ─ A'. This can then be elaborated as:

A ─ C . . . P . . . C' ─ A'; repeat ad infinitum.

우리는 따라서 공통적인 것의 유통을 가정할 수 있다. 이것은 다양한 유형의 연합, 부족적(部族的) 모임부터 사회주의적 협동조합 또는 오픈 소스 네트워크까지가 공유된 자원을 새로운 연합의 형성을 위한 기초를 다음으로 제공할 더 많은 공유된 자원을 창조할 생산적 종합적 효과로 유기적으로 조직하는 길을 밟는다. 만약 C가 여기서 상품(Commodity)가 아니라 공유지(Commons)를 말한다면, 그리고 A가 연합(Association)을 나타낸다면 기본 공식은 그러므로  : A - C - A`. 이것은 그 다음에 다음과 같이 정교화 될 수 있다 : 

A ─ C . . . P . . . C' ─ A'; 무한대로 반복.

 

Two notes on this formulae. First: we are dealing not only with Commons instead of Commodities, but with Associations instead of Money. The implication is that collective organization, not market exchange, governs the distribution of Commons, whether through mutual aid, public planning or gift economies. We will discuss this later. Second: in this formulation, the resources organised by Association into Commons production cannot be described as Labor Power and Means of Production, because these terms imply precisely the reductive abstraction and alienation that is inherent to commodity accumulation. To indicate that human creativity and ecological riches become something other than just factors of production when organized through Association , they are labeled here as GI, General Intellect and NM, Natural Metabolism. These may be the wrong terms, but we won’t discuss this further, because it is the topic for another paper.

이 공식에 대한 두 가지 노트. 첫째 : 우리는 상품(Commodities) 대신의 공유지(Commons)뿐만 아니라 화폐(Money) 대신의 연합(Associations)을 다루고 있다. 그 함축은 시장 교환이 아니라, 집합적인 조직이 공유지의 분배를 통치한다, 상호 부조, 공공 계획 또는 선물 경제(gift economies)를 통하든지 어떤지를. 우리는 이것을 뒤에 토론할  것이다. 둘째 : 이 공식에서, 연합(Association)에 의해 공유지(Commons) 생산으로 조직화된 자원은 노동력(Labor Power)과 생산 수단(Means of Production)으로서 묘사될 수 없는데, 이 용어들은 상품 축적에 고유한 환원적 추상과 소격(疏隔)을 엄밀하게 암시하기 때문이다. 연합을 통해 조직될 때 인간적 창조성과 생태적 풍부함이 생산의 단지 요인보다 다른 무언가가 된다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 그들은 GI, 일반지성(General Intellect)과 NM, 자연 물질대사(Natural Metabolism)라는 명칭이 붙여진다. 이것들은 잘못된 용어일지도 모르나, 우리는 이것을 더 많이 토론하지 않는데, 그것이 또 다른 논문을 위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If an agricultural Association (A) on the basis of its successful cultivation of a Common banana plantation (C) joins together with other such Associations, first to place more lands under cultivation, and then to form a industrial packing plant which then provides the nucleus for further cooperatively conducted activities, we have a circulation of commons. If the Associative organization of a publicly funded education system researches collectively created software that provides the basis for open source associations (A’) we have a circulation of commons. And if these open source software is then made freely available to our initial agricultural cooperative to enable its planning activities, we have a further circulation. The circulation of the common is thus a dynamic in which commons grow, elaborate, proliferate and diversify in a movement of counter-subsumption against capital, generating the “complex and composite” forms of communism.

만약 (A) 공동(Common) 바나나 플랜테이션에 대한 그것의 성공적 경작에 기초한 농업적 연합이 (C) 다른 그러한 연합들과 함께 한다면, 첫째로 보다 많은 땅들을 경작 하에 두기 위해서, 그리고 그 다음에 그 이상 협력적으로 집행된 활동들을 위한 핵들을 그 다음에 제공할 산업적 포장 공장을 형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공유지의 유통을 가진다. 만약 공적으로 자금이 조달된 교육 체계 연구들의 연합 조직이 집합적으로 오픈 소스 연합을 위한 소프트웨어를 창조했다면 (A') 우리는 공유지의 유통을 가진다. 그리고 만약 이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가 그것의 계획 활동들을 가능케 하는 우리의 처음의 농업적 협력에 무료로 이용가능하게 그 다름에 만들어진다면, 우리는 그 이상의 유통을 가진다. 공통적인 것의 유통은 따라서 공유지가 자본에 맞서 대항-포섭의 운동에서 자라고, 잘 다듬어지고, 증식하고 그리고 다양한 것을 만드는 원동력이다, 공산주의의 “복합적이고 혼성적인” 형태를 낳으면서 말이다.

 

We can describe this composite complexity by analogy with Marx’s differentiation of specific sub-circuits within the circulation of capital. Similarly we can differentiate specific moments in the circuit of the common, moments which give varied priorities in the basic relation of Associations and Commons, and which also have, at varying historical moments had a different weight or importance. So, we might speak of:

우리는 이 혼성적인 복합성을 자본의 유통 내에서의 특유한 하위 순환에 대한 맑스의 구분과의 유사성을 통해 묘사할 수 있다. 비슷하게 우리는 공통적인 것의 순환에서 특유한 순간을, 연합(Associations)과 공유지(Commons)의 기초적 관계에서 변화된 우선권을 주는 순간들을 구별할 수 있고, 그리고 그것은 또한 가진다, 변화하는 역사적 순간에 다른 무게 또는 중요성을 가졌다. 그래서, 우리는 말했을 지도 모른다 :

 

Primitive communism (so called), based on a terrestrial commons that involves the sharing of natural resources, such as land, game, firewood and water, on the basis of associations shaped by custom. In  so as these associations take as their foundation the apparently given quality of natural resources, we can say they proceed from Commons to Association (C-A).

원시 공산주의는 땅, 사냥감, 땔감 그리고 물과 같은 자연 자원의 공유를 수반한 대지적 공유지에, 관습에 의해 공유된 연합의 기본에 (이른 바) 기초했다. 이 연합이 자연 자원의 명백히 주어진 질을 그들의 기초로 다루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그들이 공유지(Commons)로부터 연합(Association)으로 나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C-A).  

 

In contrast, various forms of planner commons emerged as radical project for the public ownership and state management in the factories and urban conurbations of the industrial revolution. Insofar as these centered on the marshalling of new industrial capacities of production into forms of collectivity, they proceeded from Production to Commons (P-C). The main examples are the command economies of authoritarian socialism and the welfare state of liberal capitalism, bit there are also the important minoritarian traditions of the cooperative and self-management movements.

대조적으로, 계획자 공유지의 다양한 형태들은 공적인 소유를 위한 급진적인 프로젝트와 공장에서의 상태 관리와 산업 혁명의 도시의 집합화로서 출현했다. 이것이 생산의 새로운 산업 능력을 집합성의 형태로 정렬하는 것에 집중했던 한에서는, 그들은 생산(Production)으로부터 공유지(Commons)로 나아갔다 (P-C). 주요한 보기는 권위주의적 사회주의의 통제 경제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복지 국가이다, 협력적인 것의 중요한 소수주의적 전통과 자주 관리 운동이 있다 조금.

 

Finally, a networked commons proceeds on the basis of social communicative capacities, from language on up, that enable Associative practices to occur. So the movement here is from A-C. Today we are seeing an explosion of new developments in this sub-circuit, including open source software, peer-to-peer networks, grid computing and other socializations of labor intrinsic to high technoscience, which we will discuss further in the next section.

마침내, 네트워크 공유지는 협력적 실천이 일어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사회적인 소통적 능력에 기초해서 나아간다, 언어로부터  계속 위로. 그래서 여기에서 운동은 A-C로부터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하위 순환에서 새로운 발전의 폭발을 보고 있는 중이다,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피어 투 피어 네트워크, 기술과학에 본질적인 망상(網狀) 컴퓨팅와 노동의 사회화를 포함하면서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다음 부문에서 더 많이 토론할 것이다.

 

Like the different types of capital, these different forms of commons have blossomed or blazed at distinct historical epochs. Indeed, the varying forms of capital and commons should be seen as each summoning each other, or provoking one another into being. Thus terrestrial commons were attacked by the forces of mercantile capital, which in doing so lay the basis for the industrial capitalism to which the planner commons was a response. The temporary success of these largely state based commons was then undermined by the fluid mobility of finance capital, whose appearance is however, inextricably tied up with the development of a means of communication—the Internet—which provided the basis for the ergence of networked commons. The concept of the cycle of struggles can be re-written as the story of this antagonistic spiral, between the circulation of capital and the circulation of the commons.

자본의 다른 유형과 같이, 공유지의 이 다른 형태들은 별개의 역사적 시대에 꽃이 피거나 타올랐다. 참으로, 자본과 공유지의 변화하는 형태는 서로서로 각각 소환되거나, 또 다른 하나를 자극하여 존재하게 시키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따라서 대지적 공유지는 상인 자본의 힘에 의해 공격 받았다, 그것은 그렇게 하면서 계획자 공유지가 대응이었던 산업 자본주의의 기초를 놓았다. 이 크게 상태가 공유지에 기초한 일시적 성공은 그 다음에 금융 자본의 유동적인 가변성에 의해 토대가 침식되었다, 그것의 외관이 하지만, 네트워크 공유지의 출현을 위한 기초를 제공하는 소통 - 인터넷 - 의 수단의 발달에 탈출할 수 없게 묶여 있다. 투쟁의 주기라는 개념은 적대적인 나선으로 다시 쓰여질 수 있다, 자본의 유통과 공유지의 유통 사이에 말이다.

 

Because to date capital has mainly retained the initiative in this contest, many forms of commons have been partially destroyed. Although terrestrial commons persist, however imperiled, in some peasant and indigenous communities, we have only a fragmentary understanding of how they worked in their heyday. To a great extent planner commons have been conceived under conditions guaranteeing great malformation, and then yet further attacked and degraded. We are dealing often with an archeology of the commons, a set of ruins. But these ruins can also be, to use Fredric Jameson’s fine phrase, an “archeology of the future.”[13]

자본의 날짜를 정하는 것이 이 논쟁에서 발의를 보류했기 때문에, 공유지의 많은 형태들은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 비록 대지적 공유지가 지속되었을지라도, 하지만 위태롭게 되었다, 몇몇 소작농의 토착적인 공동체에서, 우리는 그들의 그들의 전성기에 일했던 방식에 대한 파편적 이해를 단지 가진다. 대부분 계획자 공유지는 큰 기형을 보증하는 조건 하에서 품어졌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하지만 더 많이 공격받았고 지위가 낮춰졌다. 우리는 자주 공유지의 고고학을, 파멸의 한 세트를 다루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이 파멸은 또한, 프레데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휼륭한 구를, “미래의 고고학”을 사용하는 것일 수 있다.

 

Complex Communism

복합적인 공산주의

 

A twenty-first century communism can be envisioned as a complex unity of terrestrial, planner and networked commons, in which each reinforces and enables the other. As capital today operates as a systemic but differentiated unity of the mercantile, industrial and financial moments of its circuit, so a contemporary communism would from the cellular forms of the common grow complex, composite forms that combine the logic of mutual aid customs, governmental planning and free and open-source peer to peer networks.

21세기 공산주의는 대지적, 계획자, 그리고 네트워크 공유지의 복합적인 통일로서 구상될 수 있다, 그 속에서 각각은 나머지를 강화하고 가능케 한다. 자본이 오늘날 그것의 순환의 상인, 산업적 그리고 금융 운동의 체계적이나 미분화된 통일로서 작용하기 때문에, 그래서 동시대의 공산주의는 공통적인 것의 세포적 형태로부터 상호 부조 관습, 통치적 계획 그리고 무료이고 오픈 소스인 피어 투 피어 네트워크를 결합시키는 복합적이고, 혼성적인 형태로 자랄 것이다.

 

The terrestrial commons today reappear today as the requirement for a set of ecological arrangements preserving the biosphere from exhaustion. The imperative of new habits and norms and daily practices in regard to production and consumption is the great message of the green movement. But the need for a commons biopolitics extends beyond environmental questions to issues of climate control, epidemiology, and administering the biotechnologies which are in effect producing a common global social body. The generation of new customs in common adequate to the reality of this shared corporeality, on everything from safe sex to recycle ing to emissions and cloning, is the issue of the production of subjectivity today.

대지적 공유지는 오늘날 고갈로부터 생물권을 보전하는 한 세트의 생태학적 배열을 위한 요구물로 오늘날 다시 나타난다. 생산과 소비와 관련된 새로운 습관과 기준과 매일의 실천의 명령이 녹색 운동의 큰 메시지이다. 그러나 공유지 삶정치에 대한 필요는 환경 문제를 넘어서 기후 조절의 문제까지 뻗는다. 이 공유된 유형의 사실에 적당한 공유에서의 새로운 관습의 발생은, 안전한 성관계부터 배기가스 순환과 유전자복제까지의 모든 것에 관해, 오늘날 주체성의 생산의 문제이다.

 

Such customs can neither be implanted, germinate nor flourish without new forms of planning. Despite all libertarian objections, it seems to me impossible to envisage address of global poverty, disease, or climate change without the restoration of an ethic of public ownership and coordinated resource allocation, and at all levels, municipal, national, and global. And at this last level, it will have to be on a scale that would in fact make some of the efforts of the planner states of the past look quit modest and circumspect. One basis of twenty-first century communism is the return, possibly too late, of the plan, to redress the ruination of the planet from phantasmagoria of neoliberalism laissez-faire.

그러한 관습은 계획의 새로운 형태 없이 심어질 수도, 싹이 틀 수도 번영할 수도 없다. 모든 자유론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적 소유와 조정된 자원 할당의 윤리적 회복 없이 전지구적 가난의, 병의, 또는 기후 변화의 주소를 구상하는 것은 나에게 불가능해보인다, 모든 수준에서, 시의, 국가적, 그리고 전지구적 수준에서 말이다. 그리고 이 마지막 수준에서, 그것은 사실상 과거 계획자 국가의 노력의 일부가 단념을 겸손하고 신중하게 보게 만들곤 했던 규모에 있어야 한다. 21세기 공산주의의 한 가지 기초는 자유 방임적 신자유주의의 환등상으로부터 행성을 멸망을 고치기 위한 계획의, 어쩌면 너무 늦은, 복귀이다. 

 

That such planning could, however, be a nightmare is all too apparent from a legacy of catastrophic socialist experiments. The only way such planetary co-ordinations can take a radical-democratic, rather than a despotic-technocratic one, is through a mobilizing the capacities of the networked commons to open forms of collective ownership and planning participation. It is in this context that we can locate the issue of immaterial labor, which I loosely interpret as those forms of communicational and affective production associated, not exclusively but strongly, with digital networks. Here I make three propositions.

그러한 계획이, 하지만, 악몽일 수 있다는 것은 파국적 사회주의 경험으로부터 너무 명백하다. 그러한 행성적 조정이 독재적이고 테크노크라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급진 민주주의적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집합적인 소유와 계획적인 참가의 형태를 여는 네트워크 공유지의 능력을 가변화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그것은 우리가 비물질적 노동의 문제를 위치지을 수 있는 이 전후 관계의 안에 있다, 그것은 내가 디지털 네트워크와 연합된 소통적이고 정동적인 생산의 그 형태로서 느슨하게 이해한다. 그러므로 나는 세 가지 제안을 만든다.

 

First, such immaterial labor is bringing into being a post-scarcity software economy whose commons logic troubles the commodity form. Free and open source” and “peer to peer networks” are the twenty first century’s way of saying what Marx in 1844 called “free association.”[14] Such experiments are not immune to commercial capture, but in their non-rivalrous plenitude and instantaneous circulation of goods they create acute problems private ownership and market rationing. Contra the “tragedy of the commons” hypothesis favored by market advocates, foretelling the inevitable degeneration of resources outside individual ownership, such immaterial practices explore the possibilities of a “cornucopia of the commons” in which collaborative creation and shared use generate most robust and abundant goods. [15] In this sense, then, the construction of a network commons has already been raised to a very high level.

첫째로, 그러나 비물질적 노동이 그것의 공유지 논리가 상품 형태를 교란하는 포스트 스캐서티(post-scarcity) 소프트웨어 경제의 존재를 초래하고 있다. 무료이고 열린 소스 그리고 “피어 투 피어 네크워크”는 맑스가 1994년에 “자유로운 연합”이라고 불렀던 것을 말하는 21세기의 방식이다.[14] 그러한 실험은 상업적 포획에 면역되어 있지 않으나, 그들의 비경쟁적 충분과 재화의 즉시적 유통에서 그들은 사적인 소유권과 시장 배급에 날카로운 문제를 일으킨다. 시장 옹호자들에 의해 지지를 받는 “공유지의 비극” 가설, 사적인 소유권 외부 자원의 피할 수 없는 퇴보를 예언하는 가설에 반하여, 자원의 그러한 비물질적 실천이 협력적인 창조와 공유된 사용이 가장 튼튼하고 풍부한 재화를 낳는 “공유지의 풍요의 뿔{cornucopia : 그리스 신화에서 어린 제우스(Zeus)에게 젖을 먹였다는 염소의 뿔에서 유래한다. 뿔 속에 과일, 곡물 따위를 가득히 담은 모양으로 표현되는 뿔 모양의 장식 또는 풍요의 상징이다. - 한역자}”이라는 가능성을 탐구한다.[15]    

 

Second, the consequence of this development are flowing back through other commons sectors—those of the terrestrial and planner commons. If the network effects was simply to stay in the realm of immaterial goods—music, films, games, intellectual production—it might be contained as an aberrant and ghettoised sub-sector of an otherwise un-impeached capital. But such containment is increasingly difficult. This is because the circulation of software is a “traffic in tools” that distributes, as code, instruments for production and planning. [16] This has profound implications for the reinvigoration of a planner commons of public ownership and governmental coordination.

둘째로, 발전의 결과는 다른 공유지 부문 - 대지적 그리고 계획자 공유지의 것 - 을 통하여 뒤로 흐르고 있는 중이다. 만약 네트워크 효과가 비물질적 재화 - 음악, 영화, 게임, 지적 생산물 - 의 영역에 단순히 머무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만약 그렇지 않다면 탄핵되지 않은 자본인 정도(正道)를 벗어나고 게토화된 하위 부문을 억눌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억누름은 점점 어렵다. 이것은 소트프웨어의 유통이 생산과 계획을 위한 도구를, 코드로서, 분배하는 도구에서의 교통량이기 때문이다.[16] 이것은 공적인 소유권과 통치적 조정의 계획자 공유지의 재활성화에 대한 깊은 함축을 갖는다.

 

The creation of the personal computer was arguably a major step in the socialization of production. But this step is already being extended by the creation of microfabricators. low cost, programmable machine tools that can “print out” what were formerly thought of as large scale industrial artifacts, and also the tools to make even larger ones promises to bring manufacturing the same informational logic that pervades the cultural field.[17] If one starts to think of peer to peer networks of microfabricators running on open-source software one sees the possibility for a decentralised collective dispersion of industrial capacity to make the pioneers of workers’ cooperatives delirious.

개인용 컴퓨터의 창조는 생산의 사회화에서 아마 틀림없이 주요한 걸음이었다. 그러나 이 걸음은 이미 마이크로페브리케이터의 창조에 의해 확대되고 있는 중이다. 이전에는 큰 규모의 산업적 인공물로 생각되었던 것을 “프린트 아웃”(print out)할 수 있는 낮은 가격의, 프로그램할 수 있는 기계 도구와, 문화적 장에 널리 퍼져 있는 같은 정보 논리의 제조를 가져오기 위해 한층 더 큰 누군가에게 약속이 되어주는 도구. [17] 만약 누군가가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에서 쓰이는 마이크로페브리케이터의 피어 투 피어 네트워크를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누군가는 노동자들의 협력의 개척자들을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 산업적 능력의 탈집중화된 집합적 분산을 위한 가능성을 본다.      

 

Something of the same process is affecting even the politics of governmental planning projects. The electronic fabric of struggle is today made up not just by the circulation of e-alerts, communiqué, and guerilla news but equally importantly by a circulation of research instruments, cyber-geographical tools, search capacities, accountancy packages, data banks, knowledge aggregators, spreadsheets and simulators. This is effecting dissemination down to levels of molecular activism of administration, management and planning capacities that were once the possession of the great molar concatenations of governmental and corporate power. In this sense Lenin’s aphorism that “every cook should learn to govern the state”, so bitterly ironic after of a Soviet experiment where “the state governed every cook,” is being obliquely renewed. [18]

같은 과정의 무언가가 심지어 통치적 계획 프로젝트의 정치에도 영향을 심지어 주고 있는 중이다. 투쟁의 전자적 직조는 오늘날 전자 경보, 코뮈니케, 그리고 게릴라 뉴스 뿐만 아니라 동등하게 중요한 연구 도구, 사이버 지형적 도구, 검색 능력, 회계 패키지, 자료 은행, 지식 집합소, 스프레드시트와 시뮬레이터의 유동에 의해 구성된다. 이것은 한때 통치적이고 법인적 권력의 큰 몰적 연쇄의 소유였던 행정, 관리 그리고 계획 능력의 분자적 행동주의의 수준에 대한 아래로의 파종을 초래하고 있다. 이 점에서 “모든 요리사는 국가를 통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라는 레닌의 금언은, 그래서 “모든 요리사에 의해 통치된 국가”가, 비스듬히 재개되고 있는 중인 소비에트 경험 히우에 모질게 역설적이다.

 

Some of the most dramatic implications of this networked socialization of production tools bear on the new terrestrial commons of eco- and bio-spherical concerns. Large scale research projects such as the 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 global warming and climate change prediction and epidemic control, requiring vast calculative capacities, are being realised through the myriad singular donations of unused computing cycles from individuals. Adopted on a very large scale, this would amount to vote ing with one screensaver as to which programs of research to support-- a massive re-socialization of collective knowledge, an exercise of general intellect.

생산 도구의 이 네크워크화된 사회화라는 가장 극적인 함축의 일부는 생태 - 그리고 바이오 - 환경적 관심의 새로운 대지적 공유지에 영향이 있다. 여분의 대지적 지성에 대한 탐색, 전지구적 온난화와 기후 변화 예언와 유행병 통제와 같은 큰 규모의 연구 계획, 광대한 계산상의 능력을 요구하는 연구 계획은, 개인들로부터의 쓰지 않은 컴퓨팅 주기의 무수한 특이한 증여를 통하여 실현되고 있는 중이다. 큰 규모로 채택되면서, 이것은 집합적 지식의 대량의 재사회화, 일반적 지성의 연습을 지지하는 연구의 어떤 프로그램에 관하여 한 화면보호기와 함께 투표에 이를 것이다.

 

Let us take it as understood that the these radical potentials can be actualised, not according to any automatic technology determinist progression, but only via struggles about not just the ownership but the most basic design and architecture of networks, struggles that have to be not only fought, but fought out in detail, with great particularity. With that undertanding—and only with that understanding--there are grounds for suggesting that while a twenty-first century communism should be envisioned as a complex unity of terrestrial, state and networked commons, the strategic and enabling point in this ensemble is the networked commons of immaterial labor.

이 급진적인 잠재력들이 현실화될 수 있고, 어떤 자동적 기술 결정론적 과정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러나 오직 소유권 뿐만 아니라 네트워크의 가장 기초적인 디자인과 건축술 또한에 대하여 투쟁을 거쳐서만이, 그러나 큰 특이함과 함께 세부에서 싸워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 하자. 그 이해와 함께 - 그리고 오직 그 이해와 함께 - 21세기 공산주의가 대지적, 국가적 그리고 네트워크 공유지의 복합적 통일체로서 마음 속에 그려질 동안, 이 종합적 효과에서 전략적이고 가능성을 주는 점은 비물질적 노동의 네트워크 공유지라고 제시하는 근거가 있다.

 

The third proposition is, however, more cautionary. While the expansion of networked commons created by immaterial labor can circulate through other commons sectors, the actualization of network potentials is also dependent on—perhaps sometimes even in contradiction with—transformations in these other sectors. Thus, whether or not the democratizing capacities of networked commons are realised will depend on planner commons in constructing free or cheap access communication infrastructures, from municipal wi-fi hot spots to mass distribution of ultra-cheap laptops; in building educational and literacy programs; in rolling back corporate IP regimes; and in establishing open source standards for public institutions. It is true also that digitally networked commons, dependent as they are electrical supplies, on resource intensive and computer fabrication, and on the generation of e-wastes places its own ecological load on the terrestrial commons. These types of interconnections, interdependencies, and possible contradictions between different sectors are, however, precisely what a model of the circulation of the commons highlights, and as an invitation to grounded utopianism.

하지만, 세 번째 제안은 더 많이 경계적이다. 비물질적 노동에 의해 창조된 네크워크 공유지의 확장이 다른 공유지 부문을 통하여 유통을 창조할 수 있다, 네트워크 잠재적의 현실화는 또한 의존적이다 - 아마 때때로 심지어 모순적으로 - 이 다른 부문들에서 변형에. 따라서, 네트워크 공유지의 민주화하는 능력이 실현될지 아닐지는 무료 또는 싼 접근 소통 구조를 건설하는 데에서 계획자 공유지에 의존할 것이다, 다의 와이파이 핫스팟부터 초저가 노트북의 대량 보급까지 말이다; 교육적이고 식자적 프로그램을 건설하는 데에서; 법인의 IP 체제를 격퇴시키는 데에서; 그리고 공적인 기관에 대한 오픈 소스 표준을 설립하는 데에서. 그들이 전기적 공급일 때, 집중적인 자원과 컴퓨터 직조에, 그리고 전자 쓰레기에 의존적인, 디지털적 네트워크 공유지는 그것 자신의 생태학적 부담을 대지적 공유지에 놓는다. 하지만, 다른 부문들 사이의 상호연결, 상호의존, 그리고 가능한 모순의 이 형태는 정확하게 공유지의 유통 모델이 유토피아주의에 근거된 초대장으로서 강조하는 것이다.

 

Conclusion: Pre-Cogs

결론 : 예지자

 

This long-sealed issue of left utopianism has in fact over the last decade been reopened from numerous directions. This resurgence has taken its impetus from both the streets of Berlin and the jungles of Chiapas—from the fall of command socialism, and the revival of anti-capitalist activism. It is, I suggest, an important move. In Milan, precarious entrants to the cognitariat or immaterial labor force have, using the metaphor of Minority Report, refrrred to themselves as “pre-cogs.” Taking that metaphor seriously, let us see into the future to perceive not just its dangers, but its hope. This paper has attempted such a glance, while avoiding the locked gaze of the abstract utopianism Marx so famously criticised. Just as the idea of a circulation of struggles arises, methodologically, from the concept of the circulation of capital, so the notion of a circulation of the commons arises that of the circulation of struggle. Fights for commons--terrestrial, planned and networked-- are happening, now. Complex communism is a forward projection of these aspirations.

좌익 유토피아주의의 이 길게 봉인된 문제는 사실상 지난 10년에 걸쳐 수많은 지도로부터 다시 열렸다. 이 재유행은 그것의 힘을 베를린의 거리와 치아빠스의 정글 둘 다로부터 - 통제 사회주의의 붕괴, 그리고 반자본주의 행동주의의 소생으로부터 - 가져갔다. 나는 제시한다, 그것이 중요한 움직임이라고. 밀라노에서, 코그니타리아트 또는 비물질적 노동력에 대한 불안정 신참자들은,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의 은유를 사용하면서, 그들 자신을 “예지자”로서 언급했다. 그 은유를 진지하게 다루면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의 위험뿐만 아니라, 그것의 희망 또한 지각하는 미래를 볼 수 있게 하자. 이 논문은 그러한 일별을 시도했다, 맑스가 너무 그렇게 유명하게 비판했던 추상적 유토피아주의의 자물쇠가 채워진 시선을 피하는 동안 말이다. 꼭 투쟁의 유통이라는 생각이 자본의 유통 개념으로부터, 방법론적으로, 일어난 것처럼, 그래서 공유지의 유통이라는 관념은 투쟁의 유통의 그것을 일으킨다. 공유지 - 대지적, 계획된 그리고 네트워크 - 를 위한 싸움은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지금. 복합적 공산주의는 이 열망의 전진의 계획이다.  

 

It is a concept of emergence. Postulating the common as its cellular form, and the circular generation of common goods and associative organization as its dynamic of growth, it envisages a composite communism built from the aggregation and interlinking of such cells and cycles. Unlike the top down, seamless blueprints of some other current left utopias, it envisages a communism bubbling from below. We might think by analogy with shifts in artificial intelligence research. Here emphasis has over recent decades shifted from the programming of comprehensive and impeccable logic-models to the assembly of many small units of code that can in their interaction bootstrap themselves, albeit unpredictably, to higher levels of complexity. The motto of such research is “Fast, cheap and out of control.” [19]

그것은 출현의 개념이다. 공통적인 것을 그것의 세포 형태와, 그리고 성장의 그것의 역동으로서 공통재와 연합적인 조직의 순환적 산출로서 가정하면서, 그것은 그러한 세포와 주기의 집합과 상호연결로부터 건설된 혼성적 공산주의를 구상한다. 탑 다운, 일부 다른 현행의 좌익 유토피아와의 이음매 없는 청사진과 달리, 그것은 아래로부터 거품처럼 이는 공산주의를 구상한다. 우리는 인공 지능 연구에서의 이동과 함께 유추를 통해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강조는 최근 10년에 걸쳐 포괄적이고 결함 없는 논리 모델로부터 그들의 상호작용에서 그들 자신을, 비록 예언할 수 없게, 복합성의 높은 수준으로 독력으로 밀고나갈 수 있는 코드의 많은 작은 단위의 집합까지 이동했다. 그러한 연구의 모토는 “빠르게, 싸게 그리고 통제 밖으로.”[19]

 

Commons may be fast or slow; even better than cheap is free; but out of control—out of the control of the society of control, out of control from global capital—that is indeed the aim. By moving from a cellular model of commons and association that is simple, even rudimentary, this paper has aimed to suggest a process that is scalable, thinkable at levels from the domestic to municipal to the planetary, and terms of the interconnections between these levels. And by speaking of a communism composed by a circulation of distinctive modalities—terrestrial, planner, networked--that nonetheless can be linked and reinforce on another it has tried to wake from the hallucination--dream-world or nightmare--of a uniform utopia, of which Soviet style socialism was the only the most notorious, in favor of a heterogeneous communism built from multiple forms of common logic, a communism of singularities. Under such conditions it may be possible once again to say: “Omnia sunt communia.”

공유지는 빠르거나 또는 느렸을지도 모른다; 싸기 보다는 한층 좋게 무료다; 그러나 참으로 목적인 통제 밖으로 - 통제 사회의 통제 밖으로, 전지구적 자본으로부터의 통제 밖으로 - 이다. 단순한, 심지어 잔유한 공유지와 연합의 세포 모델로부터 움직임으로써, 이 논문은 시정에 내부적인 것으로부터 행성적인 것에까지의 수준에서 달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과정을 암시하기 위해 목표했다. 그리고 다른 하나에 대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결될 수 있고 강화할 수 있는 독특한 양식 - 대지적, 계획자, 네트워크 - 의 유통에 의해 합성된 공산주의를 말함으로써 그것은 그것의 소비에트 스타일 사회주의가 가장 유명한 유일한 것인 한결같은 유토피아의 환각 - 꿈 - 세계로부터 또는 악몽으로부터 깨려고 노력했다, 공통 논리의 복합적 형태로부터 건설된 이종적 공산주의를, 특이성의 공산주의를 찬성하면서 말이다. 그러한 조건 하에서 그것은 다시 한번 말할 가능성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공통의 소유이다.”

 

NOTES 

 

1. Giorgio Agamben, The Coming Community.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Empire, Harvard: Harvard University press, 2000.

2. Karl Marx. Capital. Volume 1. New York: Vintage, 1977, 125.

3. Karl Marx, Capital Vol. II. New York: Vintage, 1981, 180.

4. David Harvey, The Limits to Capital. Oxford: Blackwell, 1982. 69-71

5. Peter Bell, and Harry Cleaver. “Marx’s Theory of Crisis as a Theory of Class Struggle.” Research in Political Economy 5 (1982). Available online The Commoner: A Journal for Other Values 5 (2002). http://www.commoner.org.uk/cleaver05.pdf

6. Romano Alquati, “The Network of Struggles in Italy,” Unpublished Paper, 1974. Red Notes Archive: London.

7. Sergio Bologna, “The Tribe of Moles.” In Italy: Autonomia—Post-Political Politics, ed. Sylvere Lottringer and Christian Marazzi. New York: Semiotext(e), 1980, 36-61.

8. Bell and Cleaver, 60.

9. See E.P. Thompson, Customs in Common. Merlin, London, 1991; Michael Perelman, The Invention of Capitalism: Classical Political Economy and the Secret History of Primitive Accumulation.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1992.

10. Peter Linebaugh & Maurice Rediker, The Many Headed Hydra: Sailors, Slaves, Commoners and the Hidden History of the Revolutionary Atlantic. Beacon, Boston, 2000.

11. Midnight Notes Collective, Midnight Oil: Work, Energy. War 1973-1992. New York: Autonomedia, 1992.

12. John McMurtry, Value Wars: The Global Market Versus the Life Economy. London: Pluto, 2002; Massimo De Angelis, The Beginning of History: Global Capital and Value Struggles. London: Pluto. Forthcoming.

13. Fredric Jameson, Archaeologies of the Future: The Desire Called Utopia and Other Science Fictions. London: Verso, 2005.

14. Karl Marx, Economic and Philosophical Manuscripts.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64.

15. Garrett Hardin, “The Tragedy of the Commons”, Science. 162 (1965) pp. 1343- 48; Eric Raymond, The Cathedral and the Bazaar: Musings on Linux and Open Source by an Accidental Revolutionary, O’Reilly Media, New York, 2001.

16. Peter Lunenfeld, Snap to Grid: A User’s Guide to Digital Arts, Media and Cultures. Cambridge, MA: MIT Press, 2001.

17. Neil Gershenfeld, Fab: The Coming Revolution on Your Desktop—from Personal Computers to Personal Fabrication. New York: Basic 2005.

18. V.I. Lenin, State and Revolution; Spunk Library: An Anarchist Library and Archive, “The Bolsheviks and Workers Control 1921.” Available on-line: http://www.spunk.org/texts/places/russia/sp001861/1921.html

19. Rodney Brooks and Anita Flynn, “Fast, Cheap and Out of Control: A Robot Invasion of the Solar System,” Journal of the British interplanetary Society 48 (1989), pp. 472-485.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