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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부 정씨
이름을 정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단지 대상을 지칭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의 정체성과 지향성을 규정하기 때문이다.새로이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이름에 대한 고민을 또다시 하게 된다. 참세상에 있을 때, 저마다 호적상의 이름외에 자신이 불리길 원하고 또 사람들이 자연스레 부르던 별명(애칭, 별칭) 이 있었다. 어떤이는 정서가 부족하다고 하여 '정서' 누구는 성명의 발음에 연유해 '랄라(그러나 신기하게 그이는 늘 발랄하고 씩씩하다)', 또 한 이는 본래 이름 그대로 '삼권'으로 하였으나 이는 '노동 3권'이라 할 때 그 '삼권'의 의미이기도 했다. '배트'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그는 덩치가 좋고 시원시원하고 무척 재미있는(물론 이게 오래가지 못한다는게 그를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중론이다. 좀더 날카롭게 하자면, '지겨워'진다나..) 남자였다. 그래서 배트라는 별명은 내게 '배트맨'이나 혹 '야구 배트'와 같은 것들을, 그에 대한 인상이나 인생 노정 등을 고려할 때, 먼저 떠올리게 했다. 알고보니 "배가 트더질 것 같아서.." '배트(!)'였다. (그를)알고보면 이게 가장 적확한 표현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예전부터 나는 딱히 불리웠던 별명이 없다. 우리 사회가 개인의 특성보다는 한 방향의 목표에 매진할 것을 요구해 온, 그런 폭력적 획일성으로 가득 채워진 곳이었기에 그러했겠지만 한번도 부모가 내게 부여한 이름 이외의 것으로, 나는 타인에게 그들이 발견한 '누구'로 불리운적이 없다. 내가 누구인지 보일 기회도 용기도 부족했을터지만, 그걸 발견할 관찰자 자체도 부재했던 터였다.
진보블로그에는 '오른어깨'라는 별칭을 만들어 보았다. 어려서 빙판에 넘어지면서 오른쪽 어깨를 짓이긴 이후 몸이 피곤하거나 힘에 부치면 늘 오른어깨가 욱신거렸다. 피로와 건강에 대한 일종의 경고이기도 한 것이다. 블로그 제목이 "진지한 예수따름의 모색"인 만큼, 내 영혼뿐 아니라 삶 전체를 통해 예수를 따르고자하고 또 따르겠다고 말했던 만큼, 이에 반하는 불안한 행로를 경고해 줄 '오른어깨'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자 다짐에서 정한 바였다.
그러나 이는 '나'를 규정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어떤이가 기사 댓글에 자신을 '잡부'로 소개한 것을 보았다. 비로소 나를 꼭 맞는 말을 찾았다. 그렇다 나는 '잡부'다.
잡부는 노동판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자리 지워져있어 허드렛일부터 일손이 부족한 급한 작업의 땜빵까지 원치않아도 모든 일감을 두루두루 거쳐야 한다. 가장 분주히 움직이고 땀을 흘려가며 건축을 도와도 급료는 항상 상대적으로 적다. 노동일은 알고보면 매 공정이 철저히 분화된 전문작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축물의 기초를 놓는 일부터 창문을 다는 일까지 모두 일하는 순서가 정해져 있고 그에 따라 전문인들이 팀을 꾸려 작업을 진행한다. 잡부는 이런 노동판에서 전문분야가 없다보니 팀도 없고, 육체노동으로 이루어진 건축일에서 가장 육체적으로 해야하는 일이 맞겨진다. 그래서 잡부는 새벽 인력시장을 통해 그날 그날 필요한 인원만큼 수급되는 것이다. 이러하다보니 잡부는 전문분야만 없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없다. 그는 단지 '이씨, 정씨, 박씨'일 뿐이다.
내 아버지는 평생을 잡부로 살았다. 순박해서일까 무능해서일까. 평생을 매일 하던 일, 그까짓거 어찌됐든 노동판에서 어깨너머로 기술 익히고 왠만한 깡다구만 있으면, '기술자'입네 하고 '잡부'딱지를 뗄 수 있었을 것을. 그는 평생을 그 잡부 딱지를 안고 살았고, 일터에서는 이름없는 '정씨'로 통했다. 난 늘 그런 '잡부 정씨'가 싫었다.
그러나 지내놓고보니 이제는 그의 순박함과 무능함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아니 공감하게 되는 것 같다. 나의 노동판에서 나 역시 별 수 없는 '잡부'이기 때문이다. 패배자의 자괴로가 아니다. 도대체 기술을 가졌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저 어깨너머로 쉽게 얻는 실상은 아무런 내용도 없고, 더욱이 실력도 없는 그런 기술들. 도대체 그것의 권위는 누가 부여하는가? 그것을 가졌다한들 자부하는 것은 가능한가? 혹 그것으로 내가 더 나은 대우를 받는 것은 합당한가? 그 기술이 나의 이름을 대체할 '직함'으로 기능하고 '나의 노동판'에서 '나'를 규정하도록 두고, 더 나아가 그것으로 즐거워 하는 것은 온당한가? 그 기술이 나를 오야지요, 사장, 대표, 교수, 선생, 목사, 변호사, 의사 등등 무엇으로 부르든 그게 다 무엇이며, 과연 그 기술로 나를 명명할 수 있는가?
난 별 수 없는 잡부다. 난 오히려 어줍잖게 기술을 익히고 행세할 수 있는 이런 나의 노동판에서 언제까지나 이름없는 '잡부 정씨'가 되고싶다. 다만 그 '순박함과 무능함'이 언제까지나 발휘되길 바랄 뿐이다.
내가 여전히 잡부 정씨로 남는다면 '주의 나라'의 노동판에서는 또 얼마나 구석구석 손 댈 일이 많을런지. 이제 잡부인 나를 다만 '정씨'라고 불러주길 바란다. "어이~ 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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