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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
나는 어떤 후원회에 가는 길이었다. 그 행사는 신촌의 어떤 술집에서 열렸고, 나는 신촌역에서 내려 연세대 쪽을 향한 긴 길을 걸어 올라갔다.
어둡고, 춥고, 비가 내렸으며,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였다.
네온은 찬란했으나, 밤을 거두어내기에는 부족했고, 더욱이 내 눈 앞에 드리워진 검은 우산을 걷어내기에는 그 불빛은 너무 작았다.
무겁고 질척한 발걸음을 옮기면서 그 술집을 찾으려고 애썼으나, 골목을 돌고, 신호등을 건너고 갔던 길을 돌아가도, 같은 LG 25시를 열 번은 넘게 지나쳐도 나는 그 술집을 찾을 수가 없었고, 그 사람이 온다던 8시는 한참이 지나 시계는 9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그 사람에게 전화를 했고, 그 사람은 술집을 나와서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했다.
나는 그 사람에게 왜 이렇게 빨리 가냐고 물을 수도 없었고, 그럴 자격도 없었고,
지하철 역에서 기다리라도 말할 깡도 없었고, 다시 돌아오라고 꼬실 친분도 없었다.
그 사람은 내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고 했고, 나는 감히 '나는 당신을 만나러 왔는데.'라는 말을 할 수 없어, 무슨 말을 뱉으면 목소리에 눈물이 묻어날 거 같아, 그냥 우물우물 '응, 응.'이라고 대답하곤, 잘 가라든지, 날 못 보고 가서 아쉽지 않냐든지, 그런 실없는 농담 한 마디 못하고 목이 메어서 가슴이 아려서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나도 농담을 잘 하는 사람이고 싶었는데, 재미있는 사람이고 싶었는데,
나랑 같이 있을 때 당신이 편하고 즐거우면 좋겠는데.
어색한 얼굴에 일그러진 미소만 띄고 돌아서
합정역 근처 어딘가의 지하철 안에서 차가울 한강을 보며
창문에 입김만 불었더랬다.
마음을 문지를 수가 없으니, 창문만 뽀득뽀득 문질렀더랬다.
가슴이 뻐근해서 숨이 막혔더랬다.
10시가 넘어, 무거운 가슴만 안고 지하철 역에서 내려 지갑을 열어보니 5천 원 짜리 한 장과 천 원 짜리 몇 장이 있었다. 집에는 휴지도 없고, 쌀도 없고, 물도 없고, 사실 아무것도 없고, 친구가 준 녹차 티백 몇 장이나, 담배 꽁초 몇 개만이 있을 텐데. 셔터를 내리려는 슈퍼로 뛰어가서 휴지와 라면, 담배 이런 것들을 있는 돈을 다 털어서 사고, 비닐봉투를 껴안은 채 집으로 기어들었다.
불을 켜니, 엄마가 집에 들러서 휴지, 쌀, 라면 이런 것들을 잔뜩 사놓고 갔더라.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엄마는 돈도 많으니까 휴지도 커다란 한 팩을 사고, 쌀도 4kg를 사고, 나는 휴지 한 롤, 쌀 500g 이렇게 겨우 샀는데, 내 모든 걸 털어서 겨우 샀는데, 엄마가 사놓은 물건들 앞에서 내가 털어낸 지갑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살 필요도 없었던 거다. 나는 나를 다 털어서 간신히 간신히 산 건데.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걸로 만들어 버리다니. 이렇게 쉬운 일로 만들어 버리다니. 당신은 나보다 돈이 많으니까, 그래, 이런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겠지.
나는 살아보겠다고 내 마음을 다 털었는데.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내 마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걸로 만들어버렸지.
울컥울컥 눈물이 쏟아지는데
누가 볼까 부끄러워서 어두운 화장실에서 문을 잠그고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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