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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 이 만화의 훌륭한 점은 이 장면에서 드러난다.
독자로 하여금, 누가 더 세고 더 강한지 아니면, 누가 더 선하고 악한지를 견주게 하면서
흥미를 돋구게 하다가도,
문득 그 이분법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를 저 장면으로 상기시켜준다.
작가는 자극적이고 선명한 대립구도로 독자의 엔돌핀을 솟구치게 하다가,
그 엔돌핀을 복잡다단한 심경의 엇갈림으로 되돌려버린다.
프리즘에 투과되어 보여지는 "현실" 이전에,
한 인간에게 중첩적으로 쌓여있는 복잡한 "실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것도, 구구절절한 설명이나 계몽이 아닌, 단지 저 하나의 '상징'으로 말이다.
바로 앞장면에서 발락의 승리와 또다른 성장을 지켜보며 흐뭇해하다가,
점돌이의 아픔을 대비시켜 보여주는 저 장면.
덴마의 명장면 중 하나다.
진짜 '실재'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그냥 동굴 속 햇불에 비쳐진 '현실'에 불과함을 보여주는,
그 반전에서 독자는 지적 쾌락을 느끼는 것이며,
덴마는 그 반전을 장면 곳곳에 숨겨두고 있다.
은교 보다.
영화 보는 내내 입속에서 머물다가,
영화 끝나자마자 나온 첫마디.
"진짜 재미없다"
그리고, 속았다는 느낌.
늙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도 있을 줄 알았더니만,
육체적으로 늙은 남성이, 젊은 여성을 만나면서 생기를 되찾고 새로운 창작욕구를 느낀다는,
그렇고 그런 진부하고 통속적인 내용 그대로다.
요즘 사람들은 너도 나도 식스팩과 베이글에 열광하고 있고,
자본은 그에 발맞추어 젊음을 마케팅하며, 젊음지상주의를 조장한다.
모두가 조금이라도 젊어져 보일려고 환장인 이 시대에,
이 영화가 '젊음과는 또다른 늙음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를 기대했던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
1. 일단 대사의 유치함.
이적요와 은교가 처음 만나면서 연필에 대해서 얘기하는 장면에서,
초등학교 교과서에나 나올법한 닭살 돋는 유치한 말들의 나열에 깜짝 놀랬다.
2. 침대 속에서, 그리고 문신을 그릴 때, 이적요가 은교의 속살을 엿보는 장면은,
남성 관음증을 자극하는 삼류 에로물에서나 나올법한 카메라 샷과 별반 다르지 않다.
누구는, 그 장면에서 영화적인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왜 하필 그 영화적 상상력을,
젊은 여성의 몸을 엿보며 흥분하는 남성의 성적 판타지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지, 불쾌함만 남았을 뿐이었다.
3. 메시지의 일관성도 없다.
이적요가 그의 제자의 이상문학상 수상에 축사를 하면서,
"늙음은 벌은 아니다'라고 말한 뜻은, 젊음과는 뭔가 다른 늙음의 또다른 의미가 있다는거 아닌가?
그러나 실상 영화의 표현기법은 젊은 여성에 대한 포르노적인 판타지만 있었을 뿐이다.
은교는 상상 속에서 항상 밝은 햇살을 받은 채 순백의 티셔츠와 팬티를 입고 있다.
생각해보니, 영화가 짜증났던 이유는,
나의 뜻에 영화가 맞춰주지 않아서 기분 나빴던건가싶기도 하다.
나의 과한 생각인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이 영화가 젊음을 욕망하는 노인의 애절함?정도밖에 표현하지 못한채, 남성의 통속적이고 왜곡된? 성욕망만 보여줘서 지루했다.
영화라면 현실의 숨은 리얼리티를 보여주고, 그 현실을 비유하고 풍자함으로써 그 재미와 자극이 있는 것이지,
이 영화는 그냥 뭐 표면에 드러나있는 진부한 현실만 재현하고 있으니 당연히 재미가 없는 것 아닌가.
더군다나 젊음을 욕망하는 걸 부추기며 마케팅의 수단으로 삼는 자본과도 이해가 딱 맞으니,
더 말할 필요 없이 따분하고 싫증나는 영화.
이번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사찰을 두고서,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떠올리며 사태의 심각성을 얘기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건이 얼마나 심각한 사건인지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이런 사건에 대해서, 자유주의적인 전통이 강한 미국에서는,
국가가 개인의 사생활을 엿보았다는 그 자체로 국민들의 무조건적이고 강력한 반감을 살 수 있는 사건이 되었겠지만,
중앙집권적이고 오랜 관료적 전통 속에서 살아온 한국 국민들은 미국의 국민들과 같은 반응은 나타나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한국인들은,
"국가의 효율적인 정책 수행을 위해서 일부 요주의자들의 동향을 파악할 수도 있지 않는가?"
이런 반응들이 무/의식 중에 깔려 있는 듯 하다.
한국인들은 미국인과 같이 무조건적인 반감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왜 국가가 그랬을까라고 이해할려고 한다.
이번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사건의 자초지종은 차치하고,
일단 이 사건이 드러났다는 그 자체로,
이명박은 제 임기를 다 할 생각하지 말고 바로 물러나야 한다.
또한 이명박이 그만 두도록, 국민들은 이명박정부의 야만성을 맹비난해야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국가의 규율과 질서에 온순하게 잘 길들여져 있으며,
자신과 상관없는 국가의 의지를 마치 자신과 똑같은 것처럼 국가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한다.
한번도 국가의 존재 이유와 필요성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못한 국민들이다.
이런 국민들인데, 어떻게 미국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이 중도퇴임하게 된 이유를 알 수 있겠으며,
국가의 민간인 사찰이 뭐 그리 대수라고 떠들겠는가.
사찰을 실시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명박을 비롯해서, 그 측근과 국무총리실의 공무원들... 그들은 아마도 이런 사찰을 하면서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겁내하지 않고 당당히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일이라며 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명박이 그만 두겠는가? 제 잘못이 뭔지도 모르는 편협한 자이데...
이명박이 물러나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수준, 나의 수준이 딱 이명박 수준이기 때문이다.
전자주민증에 반대하고, 강정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면서 국가의 폭력에 대항하고 있는 활동가와 활동단체들에게 경의와 죄송함을 표할 뿐이다.
어느날부터인가 뉴스라든지 정치 관련 얘기들이 너무나 보기 싫어졌다.
그건 아마도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에 너무도 열광적으로 환호하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보였던 한계에 실망감과 함께 나 스스로 무기력함에 빠졌었던... 그 언저리였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나마 노무현 정부때의 최소한의 상식과 합리성 조차 사라진 지금...
어쩌다 공중파 방송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이건 뭐.. 정부기관과 검찰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옮기는 앵무새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
그러니 점점 정치에는 무심해질 수 밖에...
그런데 요즘 다시 뉴스를 듣기 시작했다.
뉴스타파...
거기에는, 그들 스스로의 취재에 기반한 삐딱하고 의심스러운 시선들이 있다.
근래에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뉴스다운 뉴스를 보지 못했다.
1. 뿌리깊은 나무
책보다는 드라마가 더 낫다.
6년여만에 처음으로 티비 드라마를 봤고, 이후에 책까지 찾아서 봤다.
책이 왕권(개혁, 실용주의, 경세치용)과 신권(전통, 경학)이라는 구도로만 전개되었다면,
드라마는 거기에 덧붙여 무협, 사랑, 정치관, 트라우마 등등이 겹겹이 쌓여있다.
특히 구성원 각자가 제 위치에서 자기 역할을 다한다는,
군군(君君) 신신(臣臣) 부부(夫婦) 자자(子子)라는 성리학적 국가관을 마방진으로 표현한 PD의 상상력이 놀라웠다.
문자가 대중의 힘으로 연결된다는 것은 근대 이후에 인쇄술의 보급으로 생겨난 해석이라서,
세종이 글자를 만든 이유와는 다소 맞지 않고 억지스럽긴 하지만,
그것 역시 과거의 역사를 현재의 시각으로 재구성한 PD의 놀라운 창작인 것을.
은유로 철학과 역사를 얘기하는 이 시대의 감독들의 상상력이 놀라울 뿐이다.
2. 밀레니엄 1부(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책과 영화 모두 재밌었다.
책은 책 나름대로 내용의 풍부함과 깊이가 있었고,
영화는 영화 나름대로 압축감과 속도감이 있었다.
책을 쓴 이는 너무나 글을 재밌게 잘 썼다.
그야말로 술술 읽힌다.
특히 책에서는 추리소설의 재미 이외에,
투기적인 금융자본주의보다는 1, 2차산업 위주의 실물경제가 더 중요함을,
그리고 여성의 상시적인 불안 등 작가의 정치성향을 계몽적이지 않게 적당한 직설과 은유로 표현하고 있다.
영화도 정말 재밌다.
영화를 만든 이는 텍스트를 너무나 훌륭하게 이미지로 변형시켰다.
만약 영화를 먼저 보지 않고 책을 읽었다면, 책이 과연 재밌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소설 속 캐릭터를 완벽하게 이미지화 시켰으며,
소설의 산만함은 과감히 생략하고, 텍스트의 건조함은 강렬한 영상으로 표현했다.
혹자는 책만한 영화가 없다고 하지만,
밀레니엄은 책과 영화 둘다 재밌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서로를 신뢰하며 일하는 사람들"
그리 잘 아는 분은 아니지만,
이춘자 대표님과 그와 같이 일하는 분들을 보았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곤 했었다.
그냥 참 부러운 사람이었다.
오늘 그 분의 장례식장에서 본 추모제는,
우리 마음 속에 '죄의식'을 심어주는 자리였다.
그 분의 진실한 마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마음을 제대로 함께 나누지 못했던 우리의 '미안함'들은 이 순간 '죄'가 되었다.
그 '죄의식'으로 우리는 보다 더 치열하게 살 것이고,
그 과정에 겪는 고통과 시련들은 기꺼이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과 시련은 또다른 누군가의 무의식에 '죄의식'으로 심어지게 될 것이다.
어쩌면 비극을 숭고시 여기는 마조키즘적 생각들일지도 모른다.
오늘 난 매우 가슴 아프고 슬펐지만, 그 '죄의식'으로 살아가고 싶진 않다.
그냥 참 부러웠던 한 사람과 헤어진 날로 기억할 것이다.
미안함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저 이 순간을 그냥 재밌고 기쁘게, 내 감정이 말하는 데로 그저그냥 열심히 살 것이다.
그래도 눈물은 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10042149555&code=940702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저 기사를 보다가,
눈물이 왈칵 쏟아져 참으로 민망하였다.
동료를 잃은 미안한 마음에,
한겨울에도 보일러를 틀지 않았다는 그 사람에게,
'같이 영화를 보고 싶다'는 영화인의 말 한마디가 너무나 뭉클하다.
희망버스로 인해 부산영화제가 망친다고 말하는 자 누구이겠는가.
영화제의 당사자인 영화인이겠는가? 아니면 영화를 즐기려는 보통의 시민들이겠는가?
그렇게 말하는 자들은 그냥 영화제 한건으로 치적 올리려는 정치인이나 관료들 아닌가?
만약 영화란 것이 세상의 리얼리티를 예술적 상상력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면,
타워크레인 위의 그녀는 더욱 영화제와 어울리는 것 아닌가?
왜 사람들은,
8년간 한겨울에도 보일러 틀지 않은 냉방에서 지낸 저이의 마음에는 공감하지 못하고,
지극히 이기적인 몇몇 정치인들에게 자기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는가말이다.
희망버스를 반대한다는 시민들의 기사에 요즘 매우 불편했던 찰나에,
'희망버스를 환영해야하는 것이 영화인들의 "상식적 견해"입니다'라는,
말을 오늘 아침 보니, 한낱 내가 다 고맙고 고맙다.
지난주 집에 내려가서 쉬는 중에,
아버지가 무상급식을 해서는 안된다고 열변을 토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요 며칠 서너번씩,
무상급식 투표를 해야된다는 문자도 받았고, 해서는 안된다는 문자도 받았다.
그들의 문자에는,
무상급식을 꼭 해야된다는, 또는 해서는 절대 안된다는,
다급함이 느껴진다.
나는 무상급식에 찬성하는 입장이지만,
이번 투표의 결과가 투표율 33%를 넘겨 무상급식 반대로 결정되더라도,
화를 내거나 안타까워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투표율이 33%를 넘는다면,
그건 아직까지 한번도 "자신의 진짜 현실"을 돌아보지 못하고,
"정체없는 국가"에 자기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 순진한 국민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무지몽매하고 계몽을 시켜야되는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들을 계몽시킨다는 것은 그들이 살아온 삶의 가치들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생을 살아오면서 익히고 경험했던 가치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옳은 것이든 옳지 못한 것이든 상관없이 그냥 그들의 삶에서 나온 결정일 뿐이다.
나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지난 주 아버지의 열변을 들으면서, 하고 싶은 말도 많았고, 열불도 났었지만,
나의 아버지에게 무상급식을 해야된다고 반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나 혼자 속으로만 부글부글 끓었다.
33%가 넘으면 그것이 우리의 일반적 생각 수준인 것을...
이번 투표에서 자신이 원하는데로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인정해야되지 않겠는가.
다만 오세훈과 기타 수구꼴통들이 좋아서 날뛰는 꼴은 정말 보기 싫을 것이다.
저 꼴을 어떻게 참고 볼 것인가.
방법은 있다.
티비 보지 말고, 신문 안 보면 된다.
단지 그 순간일 뿐이다.
투표라는 쇼가 다가 오고 있다.
미디어는 이 쇼가 흥행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이런저런 결과가 나오면 어떡하나 걱정하고 다급해 하지 말자.
쇼일뿐이다. 저 쇼를 안보면 된다.
저런 열불나는 쇼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거리감을 유지한 채,
남을 설득하려 하지 않고, 내 일상부터 고쳐나가는 것이,
내 정신건강에도 좋고, 미래의 진짜 변화를 만들 수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주민투표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다른 상황, 다른 시기에서는 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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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자기가 쓴 단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어 있는지필자를 제외하곤 누구도 확인 할 수 없는 모호한 글일 뿐이다.
화려한 지적 단어들의 나열이 그럴듯 하나 알맹이는 없고
단어에 대한 경외심이나 두려움 때문에 어려운 글이구나 생각하게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단어만 있고 이해하기 힘든 그런 글이다.
왜 이해하기 힘든 글이냐면 내 독해력이 떨어지기 때문은 아닌 거 같고
글 자체가 어려운 것도 아니며 그저, 이해할 수 없는 글이기 때문이다.
글의 소통 가능성을 배제했기 때문인 것 같지만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닌 거 같다.
일단 만화에 대한 취향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할 건 없다고 본다.
허나 영화와 현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에서 만화라는 다른 장르의 예술과 현실이라는 화제로 바뀐 것은 좀 아쉽다.
먼저 단어의 정의를 공유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현실, 실재, 이데아, 상징, 지적쾌락 등등
지금 사용 된 단어들은 상당히 불명확하고 자의적, 폐쇄적이다.
'복잡다단한 심경의 엇갈림'이 무엇이고
판타지-만화에서 보여지는 '현실'은 무엇이고
그려지지 않으며 숨긴 채로 독자에게 다가오는 '실제'는 무엇인지
보여지고 표현되는 '실재'는 무엇이고 '숨겨져 읽히는 '현실'은 무엇인지
단어를 적어놓았을 뿐 그게 무엇인지에 대한 기술은 없다.
더구나 이런 유치한 판타지-만화에서 이데아론이라니... -_-
적어도 이데아론을 끌어올 거라면 자기가 생각하는 이데아론이란 무엇이고
만화의 어떤 부분이 부합하는지 기술되어야 하는데 그것도 없다.
이건 그저 개인적 감상과. 자의적인 '어떤감성'에 대한 기술인 것 같다.
위 단어들의 정의를 공유해야 논의가 진전되겠지만 이타심을 발휘하여
이 글을 독해,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은 감상평이 추측되는데
사실 이런 감상은 너무도 자의적이고 판타지와 꿈의 한계를 넘지 못하기에, 이 지점에서 인간을 찾는 것도 무모한 도전으로 보인다. 나는 반론을 위해 반론하는 것은 아니고, 오늘 처음으로 덴마의 최근 두 가지 챕터를 봤으며 이 감상평의 어불성설을 말하고 싶을 분임을 먼저 밝힌다.
이 감상평을 간단히 정리하면
'서로 강함을 위해 싸웠지만 실제 개인의 삶은 절망과 아픔이 있는 삶이다'
더 줄이면
'약육강식의 이면에는 패배의 절망감이 있다' 정도로 요약된다.
첨부된 이미지는 부상을 입고 자기 능력을 영구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실망'한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전투의 결과' 즉 '서사의 진행과 결과' 개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프리즘에 투과되어 보여지는 현실' 이라는 것은 싸움과 전투 따위고
인간의 복잡 다단한 실재는 개개인의 감성이 있다는 것으로 가정하고 읽어내면
(내가 잘못 읽었다면 현실과 실재에 대해 논해봐라)
싸우는 파이터 (외형) // 파이터들 개개인의 감성 (내면) 의 개념을
현실과 실재라는 단어로 바꿔 말하는 것으로 밖에 말 할 수 없고 이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저 파이터들은 인간이 아니다. 환타지 속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캐릭터일 뿐이다.
환타지의 세계에 철학적 사고를 접목할 수 있을 만큼 이 만화의 컨택스트는 풍부하지 않다. 이 만화는 작가의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현실세계 에서 볼 수 있는 것에 대한 변용. 두 세컷으로 중간중간 삽입되는 깨알재미에 그 힘이 있는 것이지 중간장르로서 만화의 매력을 살리는 것도 아니고 어떤 비평이나 평론을 시도해도 공상과학 이상에 도달하지 못한다.
상단의 이미지를 '상징' 이라 말하기에도 엄청난 독단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저 장면이 아주 냉정하게 이야기 해서 '절망감' 그 이상을 가르키기 힘들기 때문이다. 상징이란 것은 표현하려는 캐릭터나 성격, 주제 따위를 전혀 다른 오브제로 치환시키는 것이지. 저렇게 직접적으로 실망한 장면을 보여주는 것을 상징이 아니다.
단지 저 이미지는 실망한 캐릭터의 심경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만화 커트일 뿐이다. 만약 저 캐릭터의 엄마가 저 캐릭터로 부터 거울을 선물받았다. 어느날 반대세력의 침공을 피해 도망가다가 그 거울이 깨졌다. 깨진 거울을 바라보는 엄마의 걱정스런 표정이 그려진다면. 저 캐릭터의 신변문제를 거울이란 상징으로 나타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저건 그냥 페인팅으로 실망감을 그려냈 것 뿐이다. 그 이상의 의미나 컨택스트는 독자가 저 캐릭터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관념에 의존되어 있을 뿐, 순수하게 저 이미지를 두고 상징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저기 적혀있는 '심경의 엇갈림'이란 '능력을 잃은 절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복잡 다단한 심경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그 복잡 다단한 심경이란 무엇인지 좀 더 확실히 해야 했다. 두루뭉술한 감상으로 복잡다단한 심경이라는 단어를 써버린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저 이미지가 절망했다는 것 이외의 무엇을 상징한 것인지 정도는 기술하지 않는가.
생각보다 이 만화는 구구절절 설명하는 부분이 많다. .
작가의 상상력에서 나온 '능력'들은 당연히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판타지의 당연한 특성이다. 만화 속 능력은 일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독자를 작가의 세계로 들어오게 하고 이제 이 만화을 감상하게 하기 위한 '현실유보작업'을 벌이기 위해선 판타지의 룰이 필요하기 때문에 당연히 능력을 보여주기 이전에 능력을 설명하는 부분이 수반되어야 한다. 영화는 움직이기 때문에 그 능력과 효과를 그대로 사용하고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만화는 정지된 화면이기에 지루하게 설명해야 하는 부분이 불가결하다. 그래서 덴마는 그림보다는 대사로 표현되는 성향이 강하다고 본다.
바로 앞장면에서 발락의 승리와 또 다른 성장을 지켜보며 흐뭇하다가
점돌이의 아픔을 대비시켜 보여준다. 여기서 흐뭇하다는 독자 소감을 제외하고 정리하면 바로 앞장면에서 발락은 승리하지만 어떤 죄책감을 느끼고 파괴본능이나 공격성에 대해 자기반성을 한다. 그리고 점돌은 발락에게 공격받아 자신의 능력을 잃고 상심한다.
이 이상의 텍스트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두 인물의 내면적 흐름은 너무도 당연할 뿐 더러.
싸움의 결과라는 인과관계가 너무 명징해서 독자가 예측 못할 반전이 발생하지도 않았다. 이것이 명장면이고 강한 임프레션으로 독자에게 다가 간 것은 100% 해당 독자 개인의 감상일 뿐. 왜 그렇게 느끼는지 알 수 없지만 이 감상문에 기초했을 때, 그 감상의 설득력은 너무 떨어진다.
자 이제 두 캐릭터의 상반된 감정. 그 차이와 대비를 이데아론으로 연결시켜보자.
진짜 실제는 만화 속 세계에서의 전투. 환타지 '능력'의 충돌.
헌데 알고보니 이 전투와 능력의 충돌 이면도 아니고 이후에는 현실 그러니까 절망, 자기성찰이 있었다는 게 반전이고 지적 쾌락을 느끼는 지점이라는 것인데...
거친 캐릭터가 자기반성을 통해 한단 계 성장하는 것을 보고 흐뭇함을 느꼈다.
그에게 피해를 받은 다른 캐릭터는 능력을 잃은 상실감에서 슬픔을 느꼈다.
이 감상의 흐름에선 반전은 없고 캐릭터가 느낀 감정에 대한 차이만 있다.
작가는 그것을 의도적으로 대비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전투 결과를 각각 그려냈을 뿐이고
이 두 가지에 대해 어떤 개입도 하지 않는다.
대게 작품에서 반전이라 함은 그동안 진행되온 서사를 독자가 읽고 어떤 것을 예상했는데 그것과 전혀 다른 예측치 못한 이야기가 전개될 때 반전이 있다고 한다.
단순히 캐릭터의 내면상태가 대비된다고 해서 반전이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무리가 있고 이건 '지적 쾌락'이라기 보단 두 캐릭터에서 독자가 느낀 두 가지 감상의 공존이란 표현이 적합하다. 혹은 저 이미지를 본 독자에게 느껴지는 캐릭터의 절망감. 그것을 봐야만 하는 안타까움이지 이것이 '지적인 무엇'이 될 수 있는지도 역시 무리가 있다.
재밌네. 앞으론 카톡말고 여기서 만나지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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