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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정치신문 72호] TV영상 속 이주노동자와 현장에서 만난 그들 -촛불연행자모임 점좀빼 (2011.02.28)

  • 분류
    잡기장
  • 등록일
    2011/06/08 00:32
  • 수정일
    2011/06/08 00:32
  • 글쓴이
    Liberation
  • 응답 R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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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영상 속 이주노동자와 현장에서 만난 그들

  

 

 촛불연행자모임 점좀빼




2004년 추석연휴. 광장에서 일군의 이주노동자들이 백화점 건물을 배경으로 소란스럽게 사진을 찍고 있다. 이 친구들을 바라보며 순간 묘한 감정에 빠지게 된다. 프레임 안엔 웅장한 백화점, 광장, 이들을 흘깃 쳐다보는 행인들, '코리아드림'을 품은 이주노동자들의 미소 그리고 이 미소의 이면들. 행복해 하는 얼굴들을 보면 물론 흐뭇하지만, 씁쓸함을 지울 수 없는 것은 04년 약 6개월간의 기억에서 연유한다. <1박 2일>이란 예능프로나 다문화를 설파하는 명절 프로그램에서 이주민들을 보는 것이 조금은 불편한 것도 같은 이유가 되겠다. <1박 2일>에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출연시켜 애틋한 인간애를 자극하는 감정적 호소란 기획 의도가 아무리 좋다고 하여도 TV속 영상의 이면인 이주노동자의 처절한 현실이나 적대적인 사회분위기를 너무 쉽게 넘기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호주 원주민 스포츠 선수가 올림픽을 통해 국가로부터 이용당했던 사건을 떠올린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정서적 호소를 통해 늘어나는 이주민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처참한 현실을 은폐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사진을 전공하던 학생 시절 남들 다 간다는 배낭여행을 위해 휴학을 하고 찾은 인천의 한 공장, 노동자 80% 이상이 비정규직인 냉각탑 제조 공장의 생산품은 국내시장 점유율 70%, 매일매일 나와 같은 비숙련공들이 제품 내부로 떨어뜨리는 볼트와 너트, 항상 엉성한 그라인딩을 생각하면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했던 곳. 이곳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어 같은 비정규직인 이주민들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얼근히 취하면 3살 난 아들 사진을 꺼내 들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며, 마치 주술사처럼 사진을 쓰다듬는 우즈벡 출신 아크바르형, 버려진 고물자전거를 함께 수리해서 도로를 질주할 땐 우린 국제폭주족이 된다. 회사에선 형에게 군말 없이 일 잘 한다고, 연장시켜준다고 말하지만, 최선의 대우는 그저 “밥 많이 먹고, 잔업 많이 해”란 말 뿐이다. 피골이 상접한 형의 얼굴만 보다가 처음 여권사진을 봤을 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전혀 다른 사람의 사진이었다. 고국의 아들만을 생각하던 형의 몸은 쇠약해져 있었고, 병원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 요통, 몸살 등으로 병원에 가야할 때엔 사무실 직원이 아닌 나와 동반하길 항상 원했기에 공장장의 불편한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형이 원하면 나는 언제나 하라셔~(괜찮아)다. 8월 폭염 어느 날, 난 한주에 두 번째 지각하게 되었고, 공장장에게 직접 해고 통보를 받았다. 이때엔 하라셔~라고 말 할 수 없었다.

공손한 표도르라고 해야 할까? 항상 존댓말을 쓰고 넉넉한 웃음을 지닌, 취기가 오르면 자전거를 타고 방 안으로 들어오던 덩치 핫산형. 객기를 부린 다음 날이면 “미안해요”를 연발하는 큰 덩치의 형 모습이 때때로 귀엽기까지 했다. 그리던 어느 날, 형은 “내일 출근 안 해요”란 농담 같은 인사말로 남기고 떠났다. 불법전락, 미등록이주노동자. 반년이 지나 경기도 어디선가에서 보고 싶다고 와달라고 귀찮을 정도로 전화를 걸어왔는데 끝내 찾아가진 않았다.

계란 후라이 두 개만 먹고 출근해서 오전 내내 기력이 없는, 자주 책을 보고 싶어 했던 컴퓨터전공의 파키스탄출신 청년 아시팍. 공학도답게 머리회전이 빨랐고, 호흡도 잘 맞는 내 파트너다. 상사가 일감을 던져주면 아시팍을 불러 함께 이글거리는 H-빔을 피해 그늘에서 농땡이를 부리기도 했고, 둘 다 미숙련공이니 일의 방식을 두고 서로 우기기도 참 많이 했다.

기숙사, 공장 모두 집에서 가까웠기에 이주노동자 친구들과 함께 할 시간이 자연 많았고, 간헐적으로 친구들의 불안과 눈물도 확인 할 수 있었다. 짧은 기간이었으나 나름 정도 들었고, 동료이자 동네이웃이자 아웃사이더란 일종의 연대감 지니게 된 것도 같았다. 비정규직이란 신분의 피착취성을 느꼈지만 구조적인 문제나 음모들엔 집중하진 않았다. 배낭여행을 떠나면 모든 문제들로부터 해방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다만 가슴 한 구석엔 이주노동자의 조금은 어두운, 알듯 모를 듯한 어색한 표정들이 남아 있었고, 점증하는 이주민들에 대한 다양한 시선들을 접하며 04년에 대한 일종의 가벼운 청문회를 이어가게 된다.

때는 08년 한반도 난리부르스 촛불정국, 들불처럼 일어나 거리로 쏟아진 시민들의 모습은 숭고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촛불 그리고 그 이후, 사분오열의 모습들. 자기 전망의 부재라고 하더라. 나 또한 당시 거리에 서 있었고, 물대포 직접살수로 반정신을 잃은 상태로 연행이 되었다. 내 자신의 연행 모습을 속보를 통해서 겨우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후 촛불연행자모임에 가입 활동하며, ‘촛불 그리고 그 이후’를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된다. 촛불투쟁에 함께 했던 사람들의 스펙트럼 자체가 넓었기에,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런 분화 그리고 분열의 모습을 보였다. 그때와 같은 대중동원력은 그 어느 조직도 이끌어 내기 쉽지 않은 것이고,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참여, 연대투쟁은 놀라운 시민권자의 노동자의 힘이었으나, 시간의 흐름과 함께 쉽게 너무 쉽게 꺼지고 말았다. 지역화, 생활밀착형으로 재편되기도 했지만 방향을 상실한 채 표류하고, 분열의 모습들이 나타난다. 촛불에게 자본권력과 제국주의는 조금은 먼 이야기가 아닌가 싶었다. 거리엔 서 있었지만 허탈함의 연속의 나날들이었다.
바로 이때 이주노동자들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내 홈피엔 04년에 기록된 이주민을 조명한 사진작업 컨셉 ‘추석특집’이 있었고, 결과 발표도 없던 가벼운 청문회엔 무게감이 실리고 있었으며, 졸업 후 막막한 생계란 현실적 문제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파견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어 이주노동자들과 접촉이 쉬운 공장을 찾아 옮겨 다녔고, 동시에 한국이주인권센터의 후원회원으로 등록을 한다.

이주민의 현실은 학생신분이던 04년보다 심각하게 다가왔다. 과거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고, 이것은 간헐적인 통증이 되었다. 이주노동자를 포함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은 마치 중세의 농노처럼 느껴지게 된다. 종종 이주인권센터에 전화를 걸어 뚜렷한 해결책이 없음에도 이주노동자 현실에 대해 따지듯 묻기도 하였다.

차이가 차별이 되고 계급이 되어 노동자가 같은 노동자 위에 군림하는 자해적인 모습들의 현장. 대표적인 현대차, GM대우, 홍익대를 통해서 본 비정규직의 삶은 분할통치 바로 그 모습이기도 했고, 노동자 노동조직은 자본권력에 길들여져 있었다. 울산에서 목격한 마이크 잡은 현대차 정규직 이경훈지부장의 모습은 말 그대로 한 마리의 미친 개였다. 그는 ‘아름다운 연대’란 장송곡을 부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비정규직 중에서도 가장 하층 대우를 받는 이주노동자들은 어떠하겠는가? 한층 더 비참한 현실 그 자체라고 하겠다. 이름이 분명 있음에도 ‘씨발놈’이 이름이었다는 인도네시아출신 이주노동자. 작은아버지뻘정도 되는 이주노동자의 엉덩이를 툭툭 치며 일을 지시하는, 외국인노동자니깐 반말해도 된다고 말하는 철없는 어린 정규직 직원들, 부르면 졸졸졸 달려오길 기대하는 사무실 꼰대들은 언제나 밉상이었다. 솔직히 이런 광경을 목격하면서 때론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지만, 항의 하거나 싸운 일이 없던 것이 당시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싸움은 결국 나와 가깝던 네팔 이주노동자에게서 일어났다. 정규직 직원의 멱살을 잡았고, 서툰 한국말로 쌓이고 쌓였던 분노를 표출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한국인 직원들은 싸움의 원인엔 관심도 없었고, 이 네팔 친구를 비난했다.

키도 크고 잘생긴 친구라서 나중에 모델해도 되겠다고 진담 반 농담 반 말을 건네면, 수줍음에 노~노를 연발하던 친구. “일 괜찮아, 사람 나빠”란 말을 자주 했고, 싸움 이후 몇몇 네팔 동료들과 함께 공장을 떠났다. 내가 이 친구들을 잡을 수 있었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남아있던 이주노동자들에게 몽골 이주민들처럼 집단행동으로 대응하는 것이 대우받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음을 편지에 전한 것이 고작이었다. 나는 참 모자란 사람이었고 급히 공장을 그만두고 만다.

한국 IT신화의 그림자인 이주노동자의 34시간 연속근무는 따지고 보면 불법은 아니라고 한다. 글로벌 삼성전자 하청업체의 자본권력의 실상이고 대한민국의 음흉한 법치주의의 일면이겠다. 관료사회는 또 어떠할까. 귀족들의 사냥놀이를 방불케 하는 단속반, 수갑 수십 개를 칼처럼 차고 돌아다니며 폭언 폭행을 일삼고, 도망가는 이주노동자를 결국투신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 살인행위다. 갓난아기를 보호소에서 키우는 이주민은 정부의 단속반의 훈훈한 미덕일까? 여수보호소 화재를 상기한다면, 유럽의 어두운 그림자인 구빈원과 비교한다면, 보호소는 말 그대로 철의 감옥이다.

일상에선 이주노동자가 한국노동자의 임금을 깎아먹고, 일자리를 빼앗으며, 서민경제를 해친다고 외치는 자들도 있다. 그렇다면, 한국인 비정규직은 정규직 대비 약 46%의 임금을 받으며 정규직 임금과 일자리를 위협하고 서민경제를 왜곡시키고 있는 것일까? 진정 그렇다면 이런 구조적 문제를 야기한 지배층에 직접행동으로 타격을 주는 것이 바른 일은 아닐까? 귀족노동자로까지 묘사하며 비정규직노동자 투쟁을 악의적으로 보도한 언론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최근 호주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이 착취당하고 있다고 분개했던 뉴데일리 등 언론의 해프닝을 돌아보자. 이주노동자들을 성폭행범, 테리리스트 등의 범죄자로 몰고, 서민경제 파탄의 주범으로 보며, 추방의 대상으로 규정하면서도, 호주 현지의 이주노동자인 한국인들의 피착취 상황을 성토하는 건 어떤 논리란 말인가? 같은 이주노동자에 대한 이중적 잣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호주 사건의 진상은 망신스럽게도 같은 한국인 고용주의 착취였다.

국내 이주노동자들 중에서 언론의 반응이 조금은 다른 경우도 있다. 바로 백인계 노동자들이다. 일례로 강남 어학원의 백인 영어강사 4~5인은 노조를 결성하여, 학원 측과 노사교섭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글로벌 이미지로 포장하여 보도가 되기도 하였다.

이태원 해방촌에서의 실제 경험이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 덕에 잉여스럽게 살아가는 미국 국적의 백인과 다퉈 경찰까지 출동한 일이 있었다. 영어강사를 한다는 이 노동자는 밤을 즐길 일명 Yellow Taxi, Easy Girl을 찾는 듯 했고, 나의 지인들에게까지 술을 강권하고, 급기야 무력까지 행사하였다. 이주민노조나 이태원의 소수 잉여들의 문제는 위 언론들에겐 ‘때려잡자 김일성‘ 레토릭을 구사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경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흰 피부와 영어는 또 하나의 권력이고, 우리의 역사 속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거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주노동자 친구들과 택시를 타면 창문부터 내리며 반말을 하는 기사를 마주했을 때엔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흔히들 말하는 민족주의가 문제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구한말 이래 발효된 사회진화론이란 균에서부터 답을 찾아가야 할 듯 다. 아시아주의란 인종주의, 제국주의를 재생산 확대해 온 기득권층, 역대 정권들을 질타해야 할 것이다. 이들에게 훈육되어 온 시민권자들에게 유색인종의 이주노동자는 만만한 분노의 출구가 아닌가싶기도 하다. 동시에 일본이란 나라를 그토록 저주하면서도 일본이 전수해 준 파괴적 지향세계를 여전히 따른다는 것은 역설적인 일이기도 하겠다. 이런 태도는 서구를 상대론 더 노골적일 뿐이다.

한편, 세상을 SM으로 본다면 위의 작태들은 전형적인 사디즘이기도 하겠다. 예전 김영삼씨를 ‘공격에의 적응’으로 분석한 심리학자가 있었다. 대상에게 억압을 받으며, 이 억압에 길들여진 자는 위치가 바뀌면 똑같은 억압을 다른 대상에게 몸소 행한다고 한다. 지배계급의 '억압통치'라는 가학성에 교묘히 민족, 국가, 애국을 첨가한다면 치열한 경쟁과 약육강식을 신봉하는 첨단신자유주의 나라의 피지배층에게 이주노동자는 너무 쉬운 억압의 분출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선봉엔 뉴데일리, 조중동 등의 극우언론과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생활 속의 관변단체들이 있다. 이것은 노르웨이도 피해갈 수 없다는 불균형의 균형이란 세상의 이치란 말인가?

이러한 모습들은 활동하는 촛불모임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최근 비정규 투쟁 지지 성명서를 내면서 노조운동 특히 이주노동자 문제로 성명 발표 자체를 반대하는 일이 있었다. 반대의 논리는 위에 언급한 사실들과 하나도 틀리지 않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극우민족주의의 전형이었다. 이러한 논란 자체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의 정확한 현실이겠다. 우리는 너무나 잘 훈육되어 있었다. 결국 GM대우의 반쪽짜리도 아닌 타결 소식이 전해지자 이주노동자 부분을 삭제한 상태로 발표하게 되었으니, 어찌 답답하고 않겠는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니 조금은 흥분한 것은 아닌가싶다. 후원회원이 아니라 현장 활동가, 투사가 내려 쓴 것 같아 갑자기 조심스럽기도 하다. 현실이란 거대한 철벽 앞에 선 자들의 심정을 아는 척만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활동가도 전문 지식인도 아닌 내게도 기본적인 생존권과 노동권이 너무 쉽게 유린당하는 현실은 부끄럽게 비참한 모습으로만 보인다. 아직까진 이주노동자들을 바라봄에 있어 감정적인 면이 크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다. ‘나는 되는데 저 사람은 왜?’ 이것이 시작이 될 순 있겠지만,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권센터와 관련단체들이 내게는 소중한 선생이고, 통로이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이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인 이주노동자들과 어깨를 걸고 함께 살아가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라고도 믿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종 내게 묻는다. 왜 사진이냐? 답한다. 사랑하고 받고 싶다고, 그저 사랑이라고. 모든 것은 여기서 출발한다고 나는 믿는다. 분명 난 특정의 이념을 체화하여 투쟁하는 사진노동자 일명 전기뱀장어는 아니다(예술, 예술가는 지배계급의 편협한 단어로 거부감이 강해 학생시절 이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 삶의 토대엔 ‘사랑‘, ‘인간애‘란 것이 분명 존재하고, 구체화의 과정 속에서 다양한 이론과 사상들로 예각화가 되는 것이라 본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이러한 과정 중에 놓여 있고, 여정 속에서 작은 이정표를 세우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트위터에서 본 패러디 문장이 하나가 있다. ‘우리는 한줌이고 저들은 전부다’ 비참한 현실에 대한 자조적인 말이겠다. 하지만 나는 다른 말에 더 주목한다.

전투는 지속될 것이고 우리의 적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더 많습니다.
언제나 우리가 더 많을 것입니다.
내일은 우리의 것 입니다. 동지여    
                                                 
                              영화 (Land and Freedom, 1995)


   학생시절, 자취방에서 소주를 홀짝이며 보다가 눈물을 쏟은 영화 중반 장례식 장면의 대사다. 그리고 이어지는 처음 듣는 인터내셔날가. 우연히 접한 이 영화의 소름 돋는 장례식 장면은 지금도 힘이 들거나 용기가 필요할 때 찾게 된다. 현실이 아닌 영화를 언급하는 게 조금 쑥스럽기도 하지만 여전히 이 영화를 기억하는 것은 언제나 생의 한 가운데 서있는 사람이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다. 상승과 전락의 그 한 가운데 있는 인간이야 말로 ‘생동‘하는 인간이고 인간적인 인간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삶의 한 가운데에 있는 이 땅의 비정규직 이주노동자들을 주목한다.

끝으로 동지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아크바르, 핫산, 아시팍, 티락, 게삽
아크바르, 핫산, 아시팍, 티락, 게삽!
<노/정/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