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단 "구원"이라는 단어에 감춰진 세계에 대한 논의가 먼저 선행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일단 "구원"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사후천국행만을 가르키지는 않는다는 전제아래에서 과연 "주류기독교"의 논리에는 구원이 있나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겠지요.(사실 그에 대한 반발로써 상황신학이 탄생한 것일까요..?)
2.요즘들어서 드는 생각은 성서의 많은 내용에 "약자에 대한 해방" 내지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섬세한 관심"이 요청되었고 또 나름 중요하게 다뤄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많은 성서학자, 신학자는 거기에 대해 무심했냐는 생각이 듭니다. 즉, [노예해방] 내지는 [인종차별]이라는 문제가 떠오르기전에 이미 성서의 증언은 왜 무시되었냐는 질문이지요.
3.결국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기록] 그 자체라기보다는 기록을 재해석할 수 있는 지평을 열어주는 [사건]이라는 생각도 듭니다.(아 여기서 또 판넨베르크에게 걸리나요?) 그런 맥락 위에서 어쩌면 민중신학의 경우에는 민중에 의해 성서의 해석지평이 새롭게 열렸다고 볼 수 있겠지요.
4.그러면 성서를 해석하던 소위 [전통]은 무오하고 불변하느냐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개혁주의에서도 보수진영이라 평가받는 진영의 논리는 불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가톨릭은 물론이거니와 개신교의 현대신학의 발전은 결국 [전통]의 변화가 아니었나 싶네요. 그런 전통의 변화는 결국 기존의 전통이 오독하고 있던 혹은 오도하고 있던 부분을 나름 밝히 드러내고 있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몰트만, 본회퍼의 신학적사유는 일종의 [해방신학]으로의 길을 제시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5.이런 맥락 위에서 제가 [상황신학]들에 제기하는 질문은, [새로움]만을 추구하려하지 않느냐는 질문입니다. 즉, 기존의 교회전통 위에서도 몇몇 개념의 재해석을 통한 풍성함으로 소외되었던 혹은 오도되었던 개념을 되살릴 수 있을텐데요.(이를테면 레오나르도 보프의 삼위일체개념이라던가, 언급하셨던 몰트만의 삼위일체 개념.)
6.결국 제 질문은 이것이죠. "너희는 왜 전통을 아예 싸그리 무시함?"
Gefällt mir · · Beitrag nicht mehr folgen · 11. April um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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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Hong 뭐 굳이 전통을 신격화시키는 것은 반대지만, 그렇다고 전통을 반대할 필요까지 있느냐는 의문입니다. 김강기명님 소환!
11. April um 15:20 · Gefällt mir
David Hong 조금 덧붙이자면, 민중 혹은 흑인 혹은 노예들에게 기존신학의 "논리"는 해방을 제공하지 못했을지라도 기존신학의 수정/보완을 통해 해방을 제공할 수 있을텐데 왜 굳이 "마이너한 접근"을 시도할까요? 라는 질문도 가능하겠습니다.
11. April um 15:21 · Gefällt mir
엔틸드 김강님도 이미 밝혔고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바였습니다만, 상황신학이라는 단어가 주는 오해와 부정적인 선입견은 의외로 상당합니다. 그리고 데이빗님이 남기신 글 속에는 그러한 오해와 부정적인 선입견이 묻어납니다.
글 속에서 말씀하셨듯이 몰트만이나 본회퍼는 기존의 "전통신학"을 가지고 해방적인 메시지를 이끌어 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해방신학 또한 이들과 비판적으로 대화해 왔습니다. 아래에서 김강님이 말씀하셨듯이, 해방신학 안에도 "전통신학"과 맺는 관계 양태는 다양합니다. 그들과 친밀하기도, 또한 거의 전복적인 입장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일단 해방신학을 상황신학이라고 하는 것도, 그들을 한데 묶어서 "전통신학을 무시한다"고 말하기에도 굉장한 무리가 따르고 폭력적인 접근입니다.
일례로, 민중신학이 기존 신학에 대해 "반신학"적인 입장을 취할 때 그것은 주로 신학적 방법론에 관한 것입니다. 연역적이고 하향적인 방법론에서 귀납적이고 상향적인 방법론으로의 전환을 주장합니다. (물론 이런 식으로 딱 갈라 구분하는 건 주장의 밀도가 떨어지는 일이고 오해의 여지도 있습니다. 쉽게 말해 그렇다는 것입니다.) "전통신학"에서 말하는 구원이나 계시 등등의 개념은 반신학적인 방법론에 따라 "재해석"됩니다. 그러므로 민중신학 또는 해방신학이 전통신학을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은 전적인 오해이고 무지입니다. 민중신학에 대한 괜찮은 논문 하나만 읽어도 해결될만한 문제죠. 물론 위에서 말했던 대로 민중신학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는 신학이라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에 조직신학의 영역을 모두 커버하려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민중신학의 주된 관심사가 아닙니다.
아마 남겨주신 글의 2번 부분의 질문은 오히려 해방신학을 하는 분들이 전통신학에 제기하고 싶은 질문일 겁니다. "니들은 성서에 이런 전통이 있는데 왜 개무시하니?" 실제로 주된 비판거리이기도 하지요.
11. April um 15:40 · Gefällt mir · 2
David Hong 사실 남길려고 고민하다가 안남긴 질문이긴 한데,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의 글을 읽어낼때에는 사실 별 꺼리낌을 못느꼈답니다. 어쩌면 제 삶의 지평과 얽혀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요. 반면, 퀴어신학이나 페미신학의 글들을 읽을때는 그런 생각을 더 깊이 가졌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뭐랄까요. 왜 굳이 "예수" 혹은 "기독교"의 언어를 빌려서 그런 주장을 펼치냐는 식의 의문일까요?
11. April um 15:43 · Gefällt mir
엔틸드 그건 신학을 하는 이들이 주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이기 때문일 겁니다. 정치사회적인 메시지야 성서에서 끌어오기 쉽지만 젠더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성서는 무관심하거나 가부장적이니까요. 기독교인이면서 동성애 지향을 가진 신학자가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신앙과 성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을 할 것이고, 성서가 가지는 시대적 한계에 대해 다양한 태도를 취하겠죠. 그런 그들에게 "전통신학 안에서 뭔가 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은 글쎄요....썩 성실해보이는 태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위에 언급한 민중신학, 남미해방신학 뿐만 아니라 젠더 관련 신학에서도 역시 성서와 전통신학에 대한 다양한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쪽으로 공부를 좀 더 해보시면 좋을 듯.
11. April um 15:48 · Gefällt mir · 1
David Hong 그렇군요. 제가 많이들 공부가 부족했군요 -0-
11. April um 15:49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준철씨가 많은 이야기를 해서 하나만 덧붙입니다. 신학은 다른 여러 학문들과 마찬가지로, 방법론적 차원에서 하나의 체계적이고 구성적인-대부분의 전통적 신학 및 틸리히, 카우프만, 과정신학-학문일 수도 있지만 맑스나 니체, 비판이론 등이 현대 철학에 대해 수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학 안에서 신학을 비판하는 것을 그 자체 방법론으로 하는 학문-여성신학, 민중신학 등-일 수도 있습니다.
두 종류의 학문 방법론은 목표하는 것이 다릅니다. 체계를 세우려는 목적의 학문과, 그것 자체를 성찰하게 하거나 비평하는 학문으로 구분되겠지요. 이런 맥락에선 퀴어신학이나 여성신학 민중신학 등은 기존 신학을 바로 그 분석과 비판의 텍스트로 하여 기존의 신학을 비판합니다.
11. April um 16:16 via Handy · Gefällt mir · 3
Ki-myoung KimKang 여성신학이나 퀴어신학이 단지 퀴어이론이나 페미니즘을 체계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라면 애초에 신학을 할 필요가 별로 없습니다. 기존의 신학과 교회를 비판과 분석의 텍스트로 해서 여성주의와 퀴어의 맥락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하려는 게 여성신학, 퀴어신학입니다.
11. April um 16:19 via Handy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민중신학의 경우는 민중신학 글타래에 적었지만, 신학이 포기할 수 없는 주-객의 문제, 구원하는 하느님과 구원받는 인간(세계)이라는 도식 자체를 문제시합니다. 이게 과연 체계적이고 구성적인 방식의 "신학"이 담아낼 수 있는 것일까요? 몰트만의 히스테리적 반응은 그 불가능성을 잘 보여줍니다. 단지 구원의 범위를 넓힌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민중신학이 기존의 신학에 개입하는 지점은 이런 "비평적 지점"입니다. 애초에 체계를 세우려는 신학이 아닌데 체계를 세우려 하지 않느냐는 비판은 큰 의미가 없겠죠?>_<
11. April um 16:23 via Handy · Gefällt mir · 2
David Hong 흠 일단 제 인식이 아직까지는 못미치는 것 같네요. 어쩌면 저의 "껄끄러움"은 제대로 사유되고 짜여져있으며 합리적인 상황신학을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생기는 "껄끄러움"이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11. April um 16:25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제대로 사유되고 짜여져 있으며 합리적인"이 이미 "구성적이고 체계적인"것만을 학문으로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이를테면 자끄 데리다는 그런 구성적이고 체계적인 학문을 하지 않지만 대가죠.
11. April um 16:27 via Handy · Gefällt mir
David Hong 어떤면에서 그렇다는 것인지 조금 추가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11. April um 16:28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아니 뭐 민중신학이 그렇게 정밀하게 발전했다는 건 아니고... 방향이 다르다고요. 방향이 다른 거에 대해 방향이 다르다고 비판하면 무의미하다고요. 애초에 그걸 추구하고 있는 게 아닌데.
11. April um 16:28 via Handy · Gefällt mir · 1
David Hong 흠 어떤 맥락인지는 알겠습니다. 물론 저도 체계적이고 짜임새있어야만 신학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의도"아래에서 성서텍스트의 맥락과 내용이 훼손되거나 혹은 무너지는 경우는 없어야 되지 않을까요? 아니면 이런 의문조차도 기존 정통신학의 질문인걸까요?
P.S 모든 상황신학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종종 그런 글들이 보여서 말입니다.
11. April um 16:30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제대로 사유되지만 그 '제대로'의 내용을 도발적으로 폭로하고 합리성의 이면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학문도 학문의 한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11. April um 16:30 via Handy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보통 상황신학 측면에서 대답이라면, "너희가 주관적이고 자의적이라고 부르는 이 새로운 해석은 사실 너희의 기존의 해석이야말로 똑같이 보편과 객관이 아니라 편향되고 주관적인, 모두를 품지 못하는 것이라는 걸 드러내는 거다" 정도가 있습니다…만 물론 학문이 되려면 주석의 정밀함은 양쪽 모두에 요구되는 거겠죠.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가장 최초의 신학은 구성적이고 체계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적-로마적 체계와의 논쟁이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체계적 학문은 사실 이런 이단적 혹은 비판자적 기원을 갖고 있는 셈이죠.
11. April um 16:36 via Handy · Gefällt mir · 4
Ki-myoung KimKang 결론: "전통신학을 무시하고 새로운 신학을 하는 게 아니라 바로 그 전통 신학을 텍스트로 하여 그것을 비판하고 성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11. April um 16:37 via Handy · Gefällt mir · 2
David Hong 어떤맥락인지는 알겠습니다만 뭔가 비평하고 싶은데 지속적으로 비평할 껀덕지가 아직 부족하군요 ㅠ_ㅠ
11. April um 16:42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상황신학은 기존의 신학을 대체하는 게 아닙니다. 기존신학이 없으면 상황신학도 필요가 없죠. "신학 속에서 신학자체를 비평하기"라 하겠습니다. 그러니 기존의 전통은 공격받으면서도 또한 동시에 소중한 텍스트입미다.
11. April um 16:46 via Handy · Gefällt mir · 1
David Hong 아 결국 저는 정용섭목사의 스텐스를 못벗어나는건가용 ㅠ_ㅠ 엉엉
11. April um 16:47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저는 왜 정용섭 목사님이 이 간단한 주장을 끝끝내 이해하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습미다. 애초에 보편적 신학을 하려 하지 않는 신학한테 보편적 신학이 아니다라고 비판하는 건 대체...@.@
11. April um 16:48 via Handy · Gefällt mir · 1
David Hong 그건 신학이 아니야. 라고 보는 것이지요. 신학을 신학되게 하는 도구정도로.. 마치 종교학이나 사회학처럼...(지금 저의 스탠스도 그러하다는;;;)
11. April um 16:49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다 비슷한 신학만 하믄 무슨 재민겨...
11. April um 16:49 via Handy · Gefällt mir · 3
차성훈 정 목사님의 스탠스를 넘어서기 위해선 오프라인 강의를 들어보시는게....... =ㅁ=;;;
11. April um 16:51 · Gefällt mir · 2
David Hong 하아..
11. April um 16:52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아니 신학도 다 고중세 철학과 법학 용어 기지고 처음에 시작했구만... 그럼 뭐 전통 신학은 그냥 서양 고대철학이고, 고대법학에 불과하다고 해도 되요.
11. April um 17:00 via Handy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역사의 산물인 게 아무리 오래되고 체계화되었다 한들 역사의 산물이 아닌 게 아니라면 왜 오늘날의 역사가 새롭게 기입되고 학문의 방향을 다시 묻고 하는 게 역사적 신학일 수 없겠습미까.
11. April um 17:03 via Handy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차라리 교회비판하는 너네가 교회돈으로 운영되는 학교에서 그런 신학으로 학자짓을 하다니! 한다면 수긍하겠습니다.
11. April um 17:04 via Handy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성공회 신부님들이 성공회대 교수들보고 자주 하는 이야기죠.
11. April um 17:05 via Handy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되둉. "일부 신부님들이"
11. April um 17:06 via Handy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하지만 아예 그건 신학이 아니라고 주장하면...@.@
11. April um 17:06 via Handy · Gefällt mir
Haeman Hong-Shin 저도 정용섭 목사님 좋아하는데, 민중신학과 흑인신학 여성신학에 대해 비판하신 글을 보고 좀 갸우뚱 했던...
11. April um 17:07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그리고 전 현대 신학이 이젠 철학한테, 심지어 사회학 한테도 학문 자체로는 완전히 밀리니까 그런 식으로 "신학의 고유성"을 추구하는 방어적인 방향으로 나가는 경향이 있지않나 싶습니다. 솔직히 1급의 신학자들이 던지는 질문들도 현대 철학이나 사회학에서 보면 "그거 뭐 우리가 다 하는 건데"하는 게 많죠.
11. April um 17:10 via Handy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그럴 때 신학이 신학임을 보증해 주는 것은 결국 "기독교 교회의 전통"밖에는 없게 되고.... 그건 물론 소중하고 좋은 거지만 학문의 모험을 왜 하면 안 되겠습니까. 그리고 교회와 기독교 전통만 신학의 주제가 되는 것도 아니라면.
11. April um 17:12 via Handy · Gefällt mir
David Hong 하아 이거 안드로메다까지 관광당하는 기분이네요
11. April um 17:13 · Gefällt mir
David Hong 0ㅠ0
11. April um 17:13 · Gefällt mir
Gyedo Jeon 저는 '상황신학'이 없었다면 과연 '전통신학'이 자기 반성을 했을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11. April um 17:23 via Handy · Gefällt mir nicht mehr · 2
David Hong 근데 김강센세.. 그럼 상황신학은 결국 메타신학으로만 존재되는 것이 아닙니까? 응슷응센세처럼 '민중신앙'이라는 개념이 허공에 붕 뜬 개념이 되는 건 아닙니까?
12. April um 01:07 via Handy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기독교 신학에 대해선 메타신학의 성격을 갖지만, 한편으론 기존의 신학은 바라보지 못하고, 담지 못했던 세상의 다양한 사건들과 이야기 속에서 "신학적인 것"을 찾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예를들면 "전태일은 오늘 이렇게 죽었지만, 노동자들의 투쟁 속에서 수많은 전태일들이 부활할 것이다" 라는 고백들, "광주의 봉기가 지금 죽었지만 끝나지 않았다"는 절망 속의 희망들. 이것이 신학적인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12. April um 01:18 · Bearbeitet · Gefällt mir · 2
Ki-myoung KimKang 오히려 사회적인 것, 정치적인 것 속에서 신학을 발견하고 증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게 바로 서남동이 말하는 "두 이야기의 합류"라고 부를만한 것들이죠. 기독교적 혹은 신학적 사유를 통해 기존의 철학이나 사회학으로는 해명되지 않는 사건의 어떤 측면, 곧 "신학적인 것"을 드러내는 것, 이것도 "신학"입니다.
12. April um 01:17 · Bearbeitet · Gefällt mir · 3
David Hong 하아..
12. April um 01:17 via Handy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조금 더 보충했습니다.;;
12. April um 01:18 · Gefällt mir
Jung Hoon Yeo 상황신학 아닌 신학이란게 있나요. 신학이란건 처음부터 번역과 대화와 타협이었는데..
12. April um 01:20 via Handy · Gefällt mir nicht mehr · 2
David Hong 보라. 서남동과 안병무는 김강센세에게서 부활하셨도다!
12. April um 01:21 via Handy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하지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2. April um 01:21 · Gefällt mir
David Hong 이것도 상황신학아닌가요?
12. April um 01:22 via Handy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하지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2. April um 01:25 · Gefällt mir
YongYeon Hwang 신학의, 아니 세상의 모든 담론치고 '보편'을 추구하지 않을 수 있는 담론이 있긴 할까요. 다만 그 '보편'을 어떻게 추구하느냐가 문제겠죠. 마치 정답지를 작성하는 것처럼 하느냐, 마치 모든 것을 흔들어 버릴 것처럼 하느냐(말로 표현하려니 아직 쉽지 않군요.)
12. April um 01:29 · Gefällt mir nicht mehr · 2
김성래 막판에 빵빵 터지네요...ㅋㅋㅋㅋ
12. April um 05:59 via Handy · Gefällt mir
저는 글쓴분이 이해가 안가네요;
일단 학생은 절차대로 신청을 했으나 늦었고 그래서 떨어졌어요.
일단 장학기구의 잘못은 없는 것 같고, 학교의 학사 일정이 빡빡한 문제는 있겠네요.
그러나 이번 학생의 구제는 어려워보입니다.
그러면 다른 학생들은 뭐가 되나요.
앞으로 학교의 학사일정을 유연하게 하도록 타협하는 게 관건이겠군요.
제가 보기엔 블로그 주인장이 불필요하게 날이 서있습니다.
감정을 죽이시죠.
본인이 실수를 했다 해도, 그 실수에 비하면 너무나도 큰 일을 겪을 때 아무도 구제해 주지 않고, 누구도 성의있게 그 고통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리고, 고통을 호소할 때 누군가 와서 굳이 지나치지 않고 이런 칼 꼽는 댓글을 달아 대도 아무런 마음의 요동이 없는 분이라면 굳이 이런 글을 이해하셔서 뭘 하겠어요. 경쟁사회에서 혼자 잘 살아남으시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그런 세상에선 못 살겠어서 이런 글을 쓴 거에요. 그리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불편한 게 있다면 이런 댓글, 지워주시길 부탁드리고 싶네요. 굳이 이런 댓글을 달면서 타인의 불행을 즐기면, 그 마음.. 병난답니다.
댓글을 보니 제 글은 읽지도 않고, 그냥 옹호하는 거구나 하고 쓰신 것 같습니다. 저는 이미 해명이 이뤄진 상황 이후에 그걸 다 읽어도 이 학생의 등록은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 글을 썼답니다. 이런 댓글을 다실려면 글은 읽고 반박을 하시던가 해주시면 좋겠네요.
그리고 원리 원칙이라니... 분명히 합격했고, 승인이 떨어졌고, 계속 민원 및 양해를 구하는 과정을 통해 그걸 모두가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입금'이 안 되었다는 이유로 합격 자체가 취소되는 '원리원칙', 제도가 각종 불편함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그 책임은 누구도 지지 않고 오롯이 가장 약자가 져야 하는 '원리원칙' 말씀이신가 봅니다. 그거 바꾸지 않고 지옥같은 세상에서 마하트마님께서는 잘 살 수 있으신가 봅니다. 저는 그런 세상에서 못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