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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전유죄’들의 연대

‘무전유죄’들의 연대

- 차별에 맞선 반빈곤 운동을 위한 조건 -

 

 

장난삼아 노숙인을 폭행하여 살해하다!

 

최근 노숙인 한명이 살해당한 사건이 보도되었다. 4월 초, 19살, 17살의 대학생, 고등학생 두 명이 지하철에서 돈을 구걸하던 정신지체 장애가 있는 한 노숙인의 돈을 빼앗고, 지하철 역 근처 인근야산에 끌고가 폭행해 숨지게 하였다. 이 노숙인은 갈비뼈 6개가 부러지고 온몸에 맞은 흔적이 남은 채로 숨져 있었는데, 피의자인 학생들은 스트레스를 풀기위해 장난삼아 폭행을 하여 숨지게 되었다고 진술하였다. "맨 처음에 장난으로 시작했다가 돌아보니까 돌이킬 수 없게 됐습니다." 너무나 황당하고 분노가 치밀었다. 죽음까지 이르게 한 이들의 폭행 동기는 장난 이였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였고 냄새가 났기 때문 이였다. 어떻게 이런 사건이 일어날 수 있을까?

 

IMF외환위기로, 원치 않은 가난으로, 사업이 망하거나 실직 당하거나 다양한 이유로 집이 아닌 거리로 나와 잠을 청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을 우리는 ‘노숙인’이라고 부른다. 노숙인이 된다는 것은 폭력과 인권침해에 노출되어 있는 거리에 몸을 누여야 하는 것이며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들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것을 구지 외면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매년 노숙인이 사회적 차별이나 질병 등으로 인해 거리에서 죽어가는 이들의 수만 해도 400명이다.

사회는 한 개인이 노숙까지 이르기 전에 복지나 경제적 지원을 통해 개인이 빈곤과 싸우는 것을 도와야 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복지라는 것은 죽지 않을 정도의 매우 최소한의 지원으로 빈곤에서 벗어나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빈곤층 인구에 비해 복지수혜자체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이 속에서 개인은 빈곤에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하며 홀로 빈곤과 싸워가며 계속적인 좌절을 겪게되고 끝내 노숙의 상황에서 느끼는 절망감은 매우 크다.

 

빈곤은 사람들을 경제적으로만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빈곤층을 고립, 배제 시킨다. 일단 빈곤의 상황에 놓이게 되면 주변의 시선도 곱지 않다. 그리고 노숙 생활까지 이르게 되면 경찰관들과 같은 국가공무원들 마저도 예비범죄자 혹은 더럽고 게으른 이들로 낙인이 찍혀 버리고 실제로 노숙인들의 인권침해도 공무원들에 의해 행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결국 노숙인의 어이없는 죽음은 노숙인을 비-인간, 비-시민, 그리고 유령으로 여기고 있는 이 사회의 차별적 시선에게 혐의를 두지 않을 수 없다.

 



 

가난하지만 가난하다 말할 수 없다?

 

철거민이 이사하면 이사한 지역에 다시 개발이 들어와 다시 철거민으로 되는 사례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리고 노점상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평생을 노점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만, 많은 노점상들이 평생을 노점상으로 남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이런 사례에서도 보여 주듯, 빈곤은 빈곤을 다시 재생산하고, 한번 빈곤 해 지면 빈곤에서 벗어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 같은 빈곤의 강한 고리를 끊는 것, 한 개인이 빈곤을 극복하기위해서는 전체 사회의 적극적이고 끈질긴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더욱 들게 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자신이 빈곤하든 그렇지 않든지 이 빈곤에 대해 완전히 사회적 책임을 무시하진 않겠지만 자신의 탓으로 돌리거나 자신의 노력여부의 문제로 돌리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빈곤으로 인해 사회적 차별을 받거나 이 가난을 벗어 날수 없는 현실에 절망하며 자연스럽게 ‘가난이 죄다!’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우리 사회는 IMF외환위기를 겪으며 빈곤을 사회구조적 문제로 돌리기도 하지만 여전히 빈곤의 원인을 개인에게서 찾고, 빈곤의 극복 또한 개인의 몫으로 돌리고 있어 빈곤하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부끄러운 일로 여전히 여겨지고 있다. 급기야 우리 사회는 빈곤을 한 개인의 게으름의 문제로 여기거나 빈곤한 이들에게 ‘도덕적 해이’라는 표현 까지 쓰기에 이르렀다.

 

가난한 사람들을 지칭하여 ‘빈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시민사회운동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내세울 때 자신을 '빈민'이라는 이름으로 정체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빈민’운동으로 지칭되는 노점상, 노숙인, 철거민 단체의 당사자들과 만나서 얘기하다보면, ‘빈민’이라는 말에 많은 거부감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자신은 빈민이 아니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오히려 ‘서민’이라는 말로 혹은 ‘자신은 빈곤하지만 조금만 이 사회가 도와주면 빈곤에서 극복이 가능한 사람’, ‘사회적으로 정당한 요구를 하는 억울한 사람’ 등으로 지칭되기를 원 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에게 ‘빈민’이라는 말이 사회적 낙인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빈곤은 부끄러운 것으로 되어있다. 내가 빈곤하다는 것을 입 밖에 내는 순간 현재 자신의 겪는 경제적 어려움 이상으로 사회적인 차별에 부딪칠 수 있다. 공적인 부분에서도 빈곤하다는 이유로 예비범죄자 취급하거나 제도적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재개발에 있어서 제도적으로 가옥주, 토지주의 소유권이 우선되다 보니 세입자들의 주거권은 철저히 무시되어 세입자들은 이사를 가거나 철거민이 되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빈곤, 저학력, 기술 없음, 실직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생존을 위해 노점을 선택하지만 지자체는 노점을 단지 불법으로만 여기고 단속, 척결의 대상으로 여긴다. 공적 부분에서의 차별 뿐 만 아니라 개인적인 인권침해와 폭력상황에의 노출, 차별대우, 노동시장 진입의 불이익 등 사회전반적인 측면에서 빈곤하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당하기 일쑤다. 이런 사회적 차별과 맞서기 위한 적극적인 반-빈곤운동들의 연대는 분명 절실하다.

 

 

빈곤이 빈곤을 차별하다?

 

하지만 사회적 차별에 맞선 저항을 위해 반-빈곤 운동에 있어 고려해야 할 매우 조심스런 얘기를 하나 더하고자 한다. 빈곤으로 인한 사회적 차별은 빈곤한 이들 서로 간에 갈등을 일으키고 서로를 차별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빈곤한 이들의 갈등은 한마디로 ‘누가 덜 빈곤 하느냐’는 것이다. 빈곤이라는 것이 사회적 차별로 이어지고 이에 대해 몸으로 체득한 개인들은 자신의 빈곤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자신보다 경제적으로 더 낮은 소득 이라고 여겨지는 이들과 자신을 분리시키고 이들보다 자신이 덜 빈곤하다는 것에 안도한다.

 

최근에 있었던 일이다. 과거 노숙경험이 있었지만 현재는 쪽방에 거주하고 계신 분이 자신과 노숙인을 철저히 분리시키며 노숙인들에 대해 불쾌 해 하거나 자신은 노숙인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쪽방은 대게 최후의 주거지로 불리는데 노숙의 전단계, 혹은 탈노숙을 위한 첫단계로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쪽방주민들은 노숙경험들을 가진 경우가 많다. 또한 철거민이 ‘우리는 집이 없는 노숙인들이 아니며 정당한 주거권욜 요구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위해 더 경제적으로 열악한 이들을 비난하는 말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빈곤층이 다른 빈곤층과 자신을 분리시키고 차별하는 모습은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다.

더불어 빈곤층 내에 여성이나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접할 때 도 마찬가지로 당혹스럽다. 또한 이 사회는 차별받는 이들 간의 갈등을 더욱 부추긴다. 재개발 현장이나 노점상 단속 현장에서는 일자리 창출이나 철거민들이 노숙인, 장애인 등이 용역으로 고용되기도 한다. 이로 인해 노섬장과 철거민들은 더욱 빈곤에 놓인 노숙인, 장애인들과 생존권/주거권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는 형편에 놓이게 된다. 이처럼 빈곤계층이 자신을 다른 빈곤계층과 분리하고, 빈곤으로 인한 차별의 피해자가 다른 차별의 피해자에게 가해자 위치에 놓일 수 있다. 이런 차별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반빈곤 운동의 연대는 형식적인 사업결합에 그칠 위험이 있다.

 

 

 

 

 

빈곤, 다르지만 같은 빈곤을 만나다!

 

이 사회는 빈곤계층들에게 경제적 차별 뿐 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차별 등을 행함으로 빈곤을 개인의 잘못, 개인의 부끄러운 문제로 만들고 있으며, 이런 차별의 메카니즘은 빈곤한 개인들 사이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하여 자신보다 빈곤하다고 여기는 이들을 차별하는 메카니즘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에 반-빈곤운동은 빈곤한 이들에 대한 억압하고 차별하는 사회적 요인들에 맞서야 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별을 그대로 답습하는 빈곤한 이들 간의 차별과도 맞서야 할 것이다. 반빈곤 운동은 빈곤계층의 절대빈곤의 문제, 생존의 문제가 시급하다보니 경제적 차별의 문제, 사회복지의 확충에 초점을 두고 대응해온 경향이 있다. 이는 현실적 필요에 의한 적절한 대응이었다고 보여 진다. 즉 빈곤층이 겪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차별의 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대응해오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빈곤운동의 진전을 위해서는 무수한 과제들이 산적하게 남아있다. 여전히 절대빈곤조차 해결 못하는 정부, 시혜적 관점에 그치고 있는 복지정책, 빈곤당사자들의 목소리의 미약함 등. 그래서 한국사회에서 빈곤은 여전히 차별의 이유가 되고 있어 이에 대한 저항들, 가난한 이들의 연대는 더욱 절실하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의 연대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들의 연대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빈곤의제와 다른 의제간의 만남과 충돌, 반빈곤운동 단위들 간의 소통 그리고 운동의 진전을 위한 갈등들이 더욱 필요할 것이다. 이런 연대 속에서 반빈곤 운동에서 아직 회자된 적조차 없는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여성노숙인의 문제라든지, 노점상들 중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 장애인 노점상들의 문제라든지, 빈곤층 내에 성소수자 문제, 빈곤으로 인한 차별에 대한 개선 등의 문제 등을 접근할 수 있는 고리들을 마련 해 줄 것이다.

경제위기 상황 속에 빈곤의 심화는 이미 예고된 듯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빈곤하다는 이유로 우리를 차별하는 것과의 싸움을 준비해야 할 것 이다. 그리고 우리 내부에 있는 차별의 문제와도 더욱 강항 소통과 갈등으로 차별과 맞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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