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크백 하산방담

2006/03/15 02:14 Tags »

<뒷산사태>라거나 <척추골절산>이라거나 하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묘한 애칭을 얻으며 장기적으로 인기몰이할 조짐이자 진보블로거들 사이에서도 초미의 관심(?)을 부르고 있(다고, 나는 이미 봤다는 이유로 목놓아 주장하고 있)는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을 지난 일요일에 봤다. 음화화화화화화홧!(아직 못본 사람들을 향한 거만한 웃음소리)

 

아름답고 아름답고 그저 아름다운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을 떼지어 본 8명(!)의 감상은 그저 달랐고, 명장면도 명대사도 평가도 모두 달랐지만 상당히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가령, 내가 극장을 나오자마자 내뱉은 말은 "게이들은 정말이지 제멋대로야!"다. <메종 드 히미코>에서의 사오리의 대사를 인용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오리와 마찬가지로 '조롱'보다는 '질투'에 무게가 실린 일갈이었다고나 할까.

 

 

 

 



1960년대 후반, 미국 서부, 카우보이, 로데오 등 '게이'와 어울리지 않는 저런 장치들이야말로 마초이즘을 꼬집는 이안 감독의 의도라거나 그와 비슷한 말들로 평가되는 것 같다. 십대 후반에 만나서 함께 양을 치게 된 잭 트위스트(제이크 질렌홀)에게 술을 좀 마신 과묵한 에니스 델마(히스 레저)가 (히스 레저는 말할때 입을 거의 벌리지 않고 웅얼웅얼댄다) 가족사를 이야기하며 조금 친근해진 듯 하더니 그날 밤 한 텐트 안에서 일을 치른다. 먼저 손을 잡아끈 것은 잭. "뭐하는 짓이야"라더니 곰새 잭의 바지를 벗기는 에니스. 뭐 기대했던 것 만큼 적나라한 섹스씬은 아니었지만 굉장히 거칠다는 느낌을 받았다.

 

"왜 하필 카우보이야? 소 안치고 양 치더만"
"둘이 자고 나서 아침에 하는 대사가 '없었던 일로 하자'인데 이성애자들도 주로 그렇게 말하잖아. 더구나 이어지는 말이 '나 게이 아니거든?', '나도 아니야'라고. 왠지 허탈한 웃음이 나더라고."
"두 사람 숨소리가 굉장히 크게 들렸어. 많이 부각되고. 나중엔 숨소리가 신경쓰여서 견딜수가 없는거야. 로데오 장면에서 소가 푸르르~하는 소리랑 겹쳐지는 것 같고."
"음... 그 (텐트 섹스씬)장면은... 좀 오버인 것 같긴 해요. 음... 아니아니 감독이 그 장면을 넣은게 오버 같다고."

 

여러 모로 '갇힌' 느낌을 주는 답답한 에니스는 어린 시절 동네에서 얼굴이 짓이기고 성기가 뽑힌 채 처참히 죽은 게이로 인한 트라우마가 있다. 헤어진 둘은 각자 다른 여자와 결혼식을 올리고 에니스는 딸 둘, 잭은 아들 하나를 낳고 산다. 4년만에 재회한 둘은 에니스의 집앞에서 격렬한 키스를 나누고 이 장면을 에니스의 부인 알마가 목격한다. 둘은 낚시를 핑계로 한달에 한번 정도 만나서 브로크백 마운틴에서의 휴가를 갖는다. 가끔 목장을 사서 함께 살자는 잭의 요구를 에니스는 아이들 핑계를 대며 거절한다. 이 때문에 가끔 싸운다.

 

"에니스가 잭하고 헤어지고 나서 막 토할 정도로 슬퍼했잖아. 그렇게까지 감정을 절제했다는 거지"
"결국 에니스는 잭을 사랑하지만 가족을 버릴 정도까지는 아니었단 거야? 그럴 용기가 없었던 건가"
"4년만에 만나도 그렇게까지 좋을수가 있을까? 둘이 집앞에서 키스하는데 '들키면 어쩌지'하는 마음에 완전 떨려서 죽을 뻔했어. 결국 들켰지"
"남자(동성애자)들이라 그런가, 사랑싸움이 왜그리 거칠어? 왜, 조선일보에 가끔 나는 기사 있잖아. <세상에 이런 일이, 동성'연'애자들 '헤어지자' 주먹다툼> 같은거"

 

에니스의 부정(?)을 알고 있는 알마는 결국 에니스와 이혼하고 이 소식을 들은 잭은 이제 에니스와 함께 살 수 있게 될거란 기대에 기뻐하며 한달음에 달려오지만, 에니스는 주말엔 딸들과 보내야 한다는 이유로 되돌려보낸다. 잭은 돌아가면서 차안에서 운다. 흑흑... 멕시코 사창가로 간 잭은 거리에서 남자를 산다. 어느덧 20년이 지났고 어느날, 잭이, 죽는다. 잭의 고향집에 찾아간 에니스는 20년전 브로크백 산에서 잃어버렸던 자신의 셔츠를 잭의 옷장에서 발견한다. 잭의 셔츠가 덧씌워진 채로.

 

"그 셔츠, 잭이 훔쳤던 거지?"
"나중에 에니스가 셔츠 위치 바꾸잖아. 자기 셔츠로 잭 셔츠를 감싸잖아.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 거겠지"
"에니스 딸이 결혼한다고 할때,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한다고 말하잖아. 에니스는 후회하는 것일까?"
"에니스는 잭한테 '그딴짓(남자를 돈주고 사는것)하면 죽여버린다'고 하잖아. 자기 가족은 포기 못하고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잭에 대한 집착도 굉장했던 것 같아"

 

내가 제기한 어떤 문제도 있었다. 에니스의 부인 알마는 아이 둘을 키우고 집안일도 하며 슈퍼마켓에서 일도 해야 했다. 주방일을 하면서 우는 아이 콧물좀 닦아달라고 부탁하는 알마에게 에니스는 "내가 손이 세 갠줄 알아?"라고 핀잔을 준다. 아이를 봐주기로 한 날에도 급한 일이 생겼다며 일터인 슈퍼마켓에 두 아이를 내려놓고 가버린다. 알마는 외도 상대인 잭과 여행을 떠나는 에니스에게 낚시 가방 등을 챙겨준다.(나중에 재혼한 알마가 '고기를 잡긴 잡았냐'고 그때서야 추궁하자 에니스는 막 때리려고까지 한다, 힝~) 또 에니스는 알마와의 잠자리에서 알마가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순 없다"고 하자 "그럼 너랑 잘 필요가 없네"라며 홱 돌아선다.

 

잭이라고 다를쏘냐? 로데오 경기에서 눈맞아 갑부집 딸 로린과 결혼한 잭은 그를 탐탁치 않아하는 장인어른에게 기가 죽어 살고, '이혼만 해주면 위자료를 듬뿍 주겠다'는 회유를 듣는 처지지만 어느 해의 추수감사절날 장인에게 욕설을 섞어가며 "내가 이집의 가장이야!"라고 억눌린 화를 폭발시켜 권위(?)를 되찾는다. 잭도 옷 하나하나를 아내가 다 챙겨주긴 마찬가지. 나중에 로린은 "자기 옷 하나도 못 찾아입어?"라고 핀잔을 준다.

 

물론 있을법하고, 사실적이고, 어울리는 설정들이었지만 이런 장면들이 눈에 밟히기 시작하자 잭과 에니스에게 감정을 이입하기 2프로 부족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평소완 달리(?) 잭과 에니스의 가부장성에는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보이는 언니들의 태도를 보는 것은 참으로 희한한 체험이었다. 8명 중 나보다 더 찜찜해한 동지가 한 명 있긴 했다.

 

"알마는 전형적인 순종적 여성상, 로린은 돈에 환장한 여자처럼 표현되는게 거슬렸어요. 잭 부부가 나중에 사귄 부부 중 부인은 굉장한 수다쟁이로 묘사되구요"
"음, 대충 인정해. 근데 거기에 촛점을 맞출 필요까진 없을 것 같아."
"로린은 말이지, 다른 사람들이 잭을 보잘것 없는 로데오 선수라고 욕하는게 싫어서 돈이라도 벌 심정으로 그렇게 된 거 아닌가 싶은데?"
"에니스가 그런 건 다 돈이 없기 때문이야. 직장에서 잘리면 가족을 먹여 살릴 수가 없잖아? 잭이 경제적으로 주고 싶어하던 도움도 받기 싫었을 거야. (알마의 일터에 강제로 애들을 떠맡기고 가버린 것은)경제적 곤궁에서 기인한 상황이었다고 보는 거지"
"음,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가족, 가족주의 때문이야. 알마도 안됐잖아. 가족을 철폐하자~~"

 

홀로 입맛을 쩝쩝 다시긴 했지만 두 게이 카우보이가 보여준 가부장성이 빛나는 이 영화의 흠결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5-6시간 정도 수다를 떨었고 기억나는 대화들도 많지 않지만 총평은 대략 이랬다.

 

"아... 난 정말 너무 감동적이었어. 눈물을 꾹 참고 봤어"
"그냥 잔잔하고.. 뭐, 괜찮은 사랑 영화야"
"게이도 예외없어, 가부장은 용서가 안돼"
"그나저나 브로크백 마운틴은 정말이지 아름답구나~ 내 생애 한번이라도 로키 산맥에 가볼 수 있으리"
"등장인물 중 누구도 행복하지가 않았어. 흑흑"
"음. 이성애자를 별로 고려하지 않은 동성애 영화라 좋았어"
"'이준기'나 '오다기리조'같은 꽃미남이 없었던 거?"
"잭(제이크 질렌홀)이 꽃미남이었잖아?"(좌중, 반은 끄덕, 반은 허걱)

 

남성 동지들은 말을 아꼈다. 한 남성 동지의 소감.

 

"학교 다닐 적에 좀 그런 애들(게이)이라고 소문난 두 명이 있었어. 난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별로 신경도 안썼었거든? 졸업하고서 거리를 지나는데 그애들이 열 몇명 정도 모여 있는 무리에 함께 서있었는데 분위기가 묘한 거야. 그 집단이 좀 그런 애들 모임 같은 거였나봐. 아는 척도 못하고 굉장히 어색하고 이질적이었어. 이 영화 보고 갑자기 그 일이 생각나더라"

 

 

죽은 잭은 차라리 나을 것 같다.
에니스는 알마, 또는 다른 여자친구를 온전히 선택하지도 못했고 가족에 대한 부담과 의무를 스스로 짊어졌지만 잭에 대한 사랑도 버리진 못했다. 둘 중 하나를 버렸더라면 '모든게 엉망'이 되진 않았을 텐데. 에니스의 인생은 잭이 망친 게 아니라 에니스 스스로 선택한 결과였다.
불쌍한 에니스. 인생에서 이것만은 놓쳐선 안되는 가치는 대체 뭔지, 나중에 후회하게 되진 않을지, 선택의 순간은 언제 오는지, 아니면 이미 지나간 것인지의 물음으로 늘 괴로운 사람들에게 에니스는 자신과 겹쳐져 보일 거다.
그래서 에니스가 밉고, 불쌍하고, 가슴이 아프고, 괴로울 거다.
난 그렇더라.

 

그리고 사족.


1. 그 자신이 '에니스 델마'인 듯 착각을 불러 일으키며, 원작자에게 "나보다 에니스를 더 잘 안다"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 '히스 레저'는 26살 호주 출신. 영화를 찍을 때마다 상대 여배우와 사귄다고 한다.(18살때 36살의 여배우를 사귄 것으로 유명) 현재는 '알마'역의 미셸 윌리엄스와 동거중이며 딸 하나를 두었다고.


2. <브로크백 마운틴>의 배급사는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때까지 상영관의 불을 켜지 말아달라고 각 극장에 공문을 보냈다는데 일부 몰지각한 멀티플렉스에서는 이를 잘 안지키는 모양이다. 난 다행히 씨네큐브에서 관람해 밥 딜런의 너무나 아름다운 'He was a friend of mine'을 끝까지 들을 수 있었다. 뒤이은 루퍼스 웨인라이트의 곡(제목이..?)도 반드시 감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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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15 02:14 2006/03/15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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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기다린다는 것

    Tracked from 2006/03/15 19:17  delete

    나름님의 [브로크백 하산방담] 에 관련된 글. 누군가에게 무언가 부탁을 해놓고 10분 있다 해 준다는 그녀의 말에 넋놓고 기다릴 순 없는 법. 나름의 브로크백마운틴 &quot;스포일러&quot;

  1. 노동의길 2006/03/15 12:21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역시 기자정신(?)이 있는지 대화 내용들을 다 기억해내다니 대단하오. 이거 거시기(?)에 실어도 좋을 듯하오.ㅎㅎ

  2. yyjoo 2006/03/15 13:28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거시기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이런 글은 참세상에 기고하는게 어울리지 않겠소

  3. 야스피스 2006/03/15 18:12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루퍼스 웨인라이트의 'The Maker Makes'요!

  4. 이슬이 2006/03/15 19:13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역시. 기대했던 바, 그대로야.

  5. derridr 2006/03/15 23:36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밥딜런이었꾸낭..옹..

  6. 나름 2006/03/15 23:48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야스피스) 아! 쌩유!
    이슬) 힘들었쏘
    준후) 응 좋아요

  7. 나름 2006/03/16 00:07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노동의길) 거시기는 안돼
    yyjoo) 상동

  8. derridr 2006/03/16 18:25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쥬느에여...준후도 조쿤화 야...

  9. 나름 2006/03/17 14:49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준후) 아라용

  10. 여우비 2006/03/19 11:27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글 쓰려고 블로그 뒤지다가,우연히 발견했음돠.
    어쩜 사람들 생각이 다 비슷한가봐라고 생각하다가
    너무 비슷해서 이상하다 싶어,같이 영화본 사람들을 세보니 8인이더라구요.
    헐...

  11. 나름 2006/03/22 22:45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우흐흐~ 같이 봐놓궁

  12. 안나푸르나 2006/03/25 02:53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He was a friend of mine을 실제 부른 가수는 윌리넬슨(Willie Nelson)이란다.

  13. leeus 2006/03/25 06:19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잼었겠따.. 글도 잼네... 노동길이 야그허는 그 거시기가 혹시 나랑 연루돼 있능겨? 여(h) 거시기 아니믄 저(p) 거시긴디... 딱 그러믄 좋갔구만... 음,,, 사리사욕은 팍 버리고,,, p쪽을 더 추천함...

  14. 나름 2006/03/25 17:32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안나) ㅋㅋㅋ 웬 자백성 덧글? 수고 안하고 집찾았네~
    리우스) p쪽은 여우비가 썼어요~

  15. 노동의길 2006/03/26 12:35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앗 이런 실수를...

  16. leeus 2006/03/26 18:45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그럼 여따(h) 올리장...

  17. derridr 2006/03/30 14:42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바쁘신가보네...업뎃은 은제..

  18. 나름 2006/04/05 12:28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주느) 그말을 기다렸죠!

  19. 쥬느 2006/04/07 01:28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덧글업뎃은 내가 하리다..ㅋㅋ

  20. 리우스 2006/04/07 10:05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이거 퍼갔는디... 왜 퍼가는 건지는 알지?? 괜챦지이...?

  21. 나름 2006/04/07 12:54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안괜찮아요 싣지 마셈!!!

  22. leeus 2006/04/07 13:29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웨~~~ 웨!!

  23. leeus 2006/04/09 05:34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이생각저생각하다보니 니말이 맞는 듯... 칫. 알었어....(침울)

  24. 나름 2006/04/11 19:54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요즘들어 닭살이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