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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도현 밴드 단상

  블로그에 대한 위키백과의 정의를 보면, "블로그(Blog 혹은 Weblog)란 Web(웹)과 Log(로그)를 합친 낱말로, 스스로가 가진 느낌이나 품어오던 생각, 알리고 싶은 견해나 주장 같은 것을 에다 일기(로그)처럼 차곡 차곡 적어 올려서, 남도 보고 읽을 수 있게끔 열어 놓은 글모음이다."고 되어있다.  남이 작성한 글에 동의해서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는 것을 탓할 일은 아니겠지만 남의 글로만 가득 찬 블로그를 보면 웬지 찡그려지곤 한다.  지금 나는 남의 글을 블로그에 올려 놓으려고 한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남의 글을 올려 놓는 일은 최소화 하겠다는 나의 다짐정도랄까? ㅎ

 아래 글은 오마이뉴스, 윤도현, 노래 없는 '국민밴드'는 이제 그만 기사에 달린  "조명(stryger)"이란 독자가 쓴 댓글이다.

윤도현밴드 단상 2006/08/30 오후 10:17:16
조명(stryger)   조회 281, 찬성 3, 반대 0
윤도현밴드 단상



윤도현은 노래 하나는 잘하는 젊은 친구였던 시절부터 지금 윤밴의 리더까지, 윤밴은 한국적 록의 자존심에서 월드컵 가수까지 적지 않은 부침과 굴곡의 역사를 갖고 있다.





우연히 지방의 ㅇㅇ축제 같은 곳의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윤도현을 발견한 유병열(윤밴의 초기 리더)은 강호정등과 함께 윤도현밴드를 결성한다. 유병열은 당시에도 유명한 기타리스트였고 메이데이라는 운동권 록밴드의 프로듀싱을 하기도 했었다. 어쨌든 이들은 유병열을 중심으로 모여서 윤도현이라는 목청하나는 끝내주는 젊은 가수(당시 데뷔 음반을 낸 상태였음)를 타이틀로 내걸어 밴드를 꾸린 것이다.






그래서 나온것이 윤도현밴드의 사실상 데뷔 앨범이 된 윤도현밴드 2집 And Band(1997)은 시인 박노해의 시에 곡을 붙인 이 땅에 살기위하여, 철문을 열어 등의 노래를 담고 있다.





윤밴의 리더인 유병열은 밴드 결성 당시 명확한 운동적 지향을 갖고 있었고 세상을 바꾸는 무기로서의 노래라는 신념을 모든 밴드 구성원이 공유하길 원했다. 모든 멤버들이 그런 신념으로 노래를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윤도현밴드 2집은 운동적 지향성과 한국적 록의 계승, 윤도현의 끝내주는 목청등이 잘 어우러져 SUB란 음악잡지(지금은 폐간)의 1998년 12월호에 실린 한국 대중음악사 100대음반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이후 3집 소외(1998)을 발표하며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 4집 한국 록 다시부르기(1999)를 끝으로 유병열, 강호정이 탈퇴를 하게 된다. 음악적 견해차 때문이었을 것이다.





4집 한국 록 다시부르기를 내놓고 한동안 쉬었던(윤밴은 항상 라이브무대를 중심으로 대중과 만났다. 그 당시에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방송에서 윤밴을 부르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분위기였다. 노찾사를 방송에서 부르기가 어려운 이유와 비슷한 이유로. 그렇게 라이브활동을 정열적으로 하던 그들이 한동안 무대에 서지 않았고 4집을 내면서 다시 라이브로 돌아왔다) 라이브무대에 모습을 나타낸 윤도현은 "그동안 정말 많이 싸웠다. 하지만 윤밴은 계속 간다"는 멘트로 그동안의 갈등이 얼마나 크고 깊었는지 그 일단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더이상 창작곡을 내놓지 못하고 결국 윤밴의 주축이었던 유병열, 강호정이 윤밴을 떠나면서 윤밴은 해체되는 듯 했으나 남은 멤버들이 윤도현을 중심으로 뭉쳐 새로운 기타리스트(재즈 기타를 전공한 허준)를 영입하여 윤도현밴드는 계속되지만 이전과는 완전히 단절된 다른 밴드가 되고 만다.








사운드적인 측면에서는 강한 비트의 하드한 메탈 사운드가 말랑말랑한 록발라드 중심의 사운드로 변해갔고 기타의 음색은 당연하게도 완전히 변했다. 또한 가장 큰 견해를 보였을 거라고 예상되는 운동적 지향성은 옅어졌다. 윤도현은 1집부터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일관되게 보이고 있었지만 세상을 바꾸는 무기로서의 노래라는 거창한 사명감은 완전히 벗어던졌다. 하지만 유병열이 없이 제작된 5집에서도 이땅에 살기 위하여를 재수록하는 등 사회비판적인 시각은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2002월드컵을 계기로 부른 오 필승 코리아가 월드컵 열풍과 함께 널리 불려지면서 느닷없이 월드컵을 대표하는 가수로 등극하게 된다. 하지만 윤도현밴드는 오 필승 코리아를 불렀다는 것 이외에는 월드컵과 아무런 인연이 없었다. 윤도현밴드가 축구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2002월드컵이 대한민국 전역에서 진행되고 있던 바로 그 6월에 윤도현밴드는 전국투어를 돌고 있었다. 그당시 오 필승 코리아를 불렀던 또 하나의 그룹인 크라잉넛이 일체의 라이브를 중단하고 거리 응원에 올인했던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하지만 오 필승 코리아는 윤밴의 대표곡이 되어버렸고 전국민이 윤밴을 월드컵 가수로 인식하게 되면서 윤밴은 누구나 다 아는 유명 가수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후 윤밴은 월드컵 공식 가수란 직함을 부담스러워 했다. 물론 록밴드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2002년 이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윤밴은 월드컵 공식 가수란 이미지를 피해가면서도 월드컵으로 인해 높아진 인지도를 통해 보다 대중들에게 가깝게 다가서게 된다. 그것은 분명 월드컵을 이용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웠다는 종류의 비난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일이다. 윤밴은 월드컵을 이용하려 한 적도 없고 월드컵을 통해 유명해지겠다는 의도를 가진 적도 없다. 단지 붉은 악마의 요청을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 노래를 부른 결과가 그렇게 이어진 것 뿐이었다.



그런데 2006년이 다가오자 그는 다시 월드컵 응원가를 부른다. 그것도 SK란 기업의 광고 모델로 월드컵 응원가가 넘쳐나는 2006년의 TV 광고시장의 한켠을 비집고 월드컵 공식 가수가 되기 위해 의도적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는 2002년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 되었다.



윤밴이 부른 "애국가" 응원가는 그 자체로 많은 논란을 낳고 있으며 또한 윤밴에게 많은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윤밴이 스스로 그렇게 상황을 만든 것이다.



월드컵 가수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 의도적으로 월드컵과 축구를 외면해왔던 윤밴이 SK의 광고모델로 월드컵 응원가를 불러대는 것은 명백한 상업주의, 대중영합주의란 딱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럼으로써 윤밴이 5집 이후부터 보여온 지금까지의 행보 자체가 상업주의, 대중영합주의였다는 일부 음악팬들의 의심을 보다 확고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댓글[3] 이 독자의견에 찬성합니다.이 독자의견에 반대합니다.
종이한장(jongi)  삭제하기 [2006-08-31 01:40]
개인적으로 2집을 가장 좋아했고 최근 앨범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이런 뒷 이야기가 있었군요. 새로운 사실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렇다면 그 초기 리더였던 유병열이란 분은 지금 무얼 하고 계신가
종이한장(jongi)  삭제하기 [2006-08-31 01:41]
요? 그 사람이 손 댔다고 하는 메이데이 앨범은 지금도 가끔씩 듣게되는데.... 1집 밖에 없어서 안타깝네요.
종이한장(jongi)  삭제하기 [2006-08-31 01:42]
아, 그리고 제 개인 블로그에도 퍼가겠습니다. (blog.jinbo.net/papy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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