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며 유관순 언니를 생각했다.


역사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만들라는 문제에 유관순을 택해서 썼던 적이 있다. 반응은 그닥이었는데 왠지 모르게 나는 꽤 애정이 갔던 기획이라 이후로도 몇 번 더 가다듬어 보기도 했다.

평범하게 자란 내 상식과 경험에서 열여섯 소녀가 목숨을 걸만큼 매혹될 만한 건 조국보다는 남자다. 낭설인지 모르나 유관순네 가족이 다 꿋꿋한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던가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럼 독립운동한다고 그 집에 드나들던 오라버니 친구라던지 하는 뭇 사내가 있었을 터. 열여섯 소녀의 세계란 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가벼운 눈빛에도 출렁대는 말랑하고 부드러운 것이다. 스물 여섯이 된 내겐 다시 없을 그것. 유치원때부터 숱한 연애를 경험하는 요새 애들을 생각하면 나는 구세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데.


유관순이 경애하던 그이는 순사에게 끌려가 고초를 겪다가 죽었다. 그러고 나면 삶은 비장해진다. 관순에게 조국과 애국은 계몽된 인식이 아니라 문광훈 선생님의 표현을 빌자면 '실존적 절실성'의 발현이었으리라. 그러나 고문과 고통 또한 실존적이라 관순이 옥에서 무엇을 느꼈을지는 차마 헤아리기 죄스럽다. 죽음을 앞둔 그녀가 사랑이고 독립이고 나발이고 그저 후회만 사무칠 때, 현대로 넘어오게 됐다면? 겨우 붙잡은 새 삶인데 정의? 애국?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오직 자기 안위만을 생각하리라 마음먹을 수 있다.


21세기에 독립국가라고 해서 압제가 없을까. 열여섯에게 대한민국의 학교는 식민지배와 비슷할 수 있다. 과거에서 와 촌스럽고 어리버리하고 이기적인 관순에게 다가와줬던 친구의 자살, 그 배후에는 폭력과 부자유와 힘있는 부모를 둔 병든 아이들, 은폐와 거래와 상처와... 관순은 관여하지 않으려 기를 쓰지만, 결국은 문제에 뛰어들고 한층 성숙해지는 소박한 해피엔딩을 맺는 식의 익숙한 이야기였다. 진부하지만 언제 봐도 감동적인 그런 얘기면 좋을 것 같았다.


근대사를 못 배운지라 유관순이 독립투사의 아이콘이 된 게 해방 이후라는 것 외에 당시의 역사적 맥락은 잘 모른다. 일제 치하의 감옥에서 죽은 열여섯 짜리 여자애가 우상화하기 안성맞춤인 소재일 것이라는 짐작만 한다. 유관순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에 우상화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전후 사정이 어떠하건 식민지 시대에 열여섯 소녀가 옥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숭고하다. 다만 그녀가 옥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던 독립투사로만 기억되는 게 안타까웠다. 이해하지 않고 이용하려고만 하면 미화도 제대로 못하는 거다. 그 나이다운 열여섯 인생의 결을 사람들이 좀 더 정확히 짚어봤으면 하는 소망이었다.


오늘 나만큼 유관순에 대해 많이 생각한 사람은 없을 것같다. 정말인데, 종일 내내 그녀를 생각했다. 철없고 이기적인 유관순을 상상하는 일도 즐겁지만 유관순에 자꾸 끌리는 건 그녀의 비극적인 삶과 비장미 때문일까. 비장이 우스워진 시대에 살자니 손톱만큼도 비웃을 구석이 없는 그런 비장함이 자주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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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1 21:21 2012/03/01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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