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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7/07
    한병철의 <피로사회> - 은폐된 '자기착취'를 전면화하다(2)
    프리에르

한병철의 <피로사회> - 은폐된 '자기착취'를 전면화하다

얼마 전 서점에서 읽을 만한 책을 찾던 중 <피로사회>란 책을 발견하고 읽게 되었습니다. 보라색 커버에 쪽수도 얼마 되지 않아 가볍게 읽으려 책을 계산하고 서점을 나왔습니다. 이 책은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가 쓴 책인데요, 한병철 교수는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후 독일로 넘어가서 철학과 독일 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한 독특한(?) 커리어의 소유자입니다.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영어로 먼저 쓰이고 나중에 한국어로 번역된 것 처럼 이 책 역시 독일어로 먼저 출판된 후 한국어로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성과사회, 나 스스로가 스스로를 착취하는 사회

 

이 책은 이러한 문구로 시작합니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그래서 이를테면 박테리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는 적어도 항생제의 발명과 함께 종언을 고했다. (중략)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한병철 교수는 면역학적인 질병(박테리아적, 바이러스적)과 신경증적 질병을 대치시키며 논의를 시작합니다. 그는 이러한 면역학적 질병을 나와 남을 구분하는 부정성에서 오는 것으로 보는 동시에 신경증적인 질병은 그 원인을 긍정성에서 찾습니다. 그가 말한 면역성에 대한 개념은 로베르토 에스포지토(Roberto Esposito)의 면역성 이론에서 기인하는데요, 한 교수는 그의 면역성 이론을 비판하며 오늘날세계화의 시대에는 더 이상 이질성이 영향을 끼치지 않는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전의 사회가 '다른 것', '낯섦'을 배척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다면 오늘날의 사회는 이러한 이질적인 것이 이국적인 것으로, 관광객의 소비 대상이 되어버린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외국인 노동자 역시 사회를 위협하는 대상으로 인식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위협이 되는 대상이라기보다는 단지 짐스러운 존재로 전락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부정성-긍정성은 사회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집니다. 그는 푸코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는 더 이상 오늘날의 사회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규율과 강제로 이루어진 규율사회가 오늘날에는 후기근대적 성과주체(오늘날의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성과를 내기 위해 자신을 착취하는 사회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자기 착취에 대한 그의 분석은 여기서 빛을 발합니다. "능력의 긍정성은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따라서 사회적 무의식은 당위에서 능력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규율과 통제보다 스스로 자신을 착취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효율적'이기 때문에 이렇게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한병철 교수의 이러한 분석에 대해서 상당히 평가가 엇갈렸는데요, 특히나 소설가 장정일 선생님께서는 시사인의 지면을 빌려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장정일 선생님은 "지은이에게 성과사회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자기를 향한 강박적인 착취가 벌어지는 사회다. 이러한 분석틀에서는 아예 시스템의 지배자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시스템에 대항할 '우리'가 형성되지 못하며, 따라서 저항이나 혁명도 불가능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다중지성의 정원 조정환 선생님은 그의 서술에는 저항과 반란의 기억, 사실, 사건들이 놀라울정도로 깨끗하게 삭제되어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한병철 철학이 신자유주의 옹호로 귀결되는 이유(조정환)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6186&ref=nav_search

 

화이트컬러는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인터넷 상에서도 반응이 엇갈렸는데요, <피로사회>에서 지적하는 자기착취에 공감하는 사람이 있는가한 반면에 또 어떤 사람들은 한병철이 바라보는 '성과사회'와 다르게 실제로는 여전히 타자에 의한 착취, 규율, 강제가 존재한다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성과사회'에 동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노동집약적 산업인 토목 업계에 종사하시는 아버지를 두고 있으며, 매일 매일 더 나은 성과를 위해 자신을 착취해야 하는 한국의 고등학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노조파괴, 강경진압은 노동계급의 다른 한편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일어난 갑을 오토텍 사건만 보아도 타자적 착취는 존재하고 있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피로사회>의 논의에 감명을 받은 것은 이 책이 규율과 강제에 의한 전통적 노동이 오늘날 인지적이고 경쟁적인 형태로 변할 수 밖에 없었던 필연성을 설명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경제적 효율성'이었습니다. 어제의 노동과 오늘의 노동사이의 빠진 연결고리가 연결되니 성과급과 무한 경쟁, 인사고과라는 현대사회의 '착취'들이 생겨나게된 맥락을 더 잘 설명할 수 있게 된 듯 합니다.

또한 <피로사회>의 논의는 오늘날 노동자들이 '자유로워졌다'라고 말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기만적이라는 것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봉건적 예속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지만 동시에 노동력을 제외한 모든 생산수단을 잃었다고 지적하며, 그러한 '생산수단으로부터의 자유'가 여전히 예속이라는 사실이 은폐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본의 임노동착취를 기본으로 하여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의 논지는 오늘날의 노동자들은 마르크스시대의 노동자들과 다르게 규율과 물리적 착취가 줄어 '자유롭게'되었으므로 더 이상 마르크스적 분석이 힘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착취의 형태가 변하였을 뿐 그러한 착취가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피로사회>가 지적하고 있습니다. 비록 한병철의 다른책에서 그가 마르크스에 그닥 호의적인 논지를 펼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피로사회>의 분석은 마르크스주의 사회분석에 다시 한번 생명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러한 분석은 변혁의 주체로 여겨지지 못하던 고소득 노동자들과 화이트컬러 노동계급이 오늘날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비록 장정일선생님이나 조정환선생님이 지적한바와 같이 한병철의 이론은 혁명가능성을 원천봉쇄하고 있긴 하지만, 한병철의 <피로사회>가 은폐되어있던 오늘날의 착취인 '자기착취'를 수면위로 드러냈고, 또 많은 직장인들이 이 책에 공감을 하며 신자유주의사회에 대해 부조리함을 느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물음을 던지되 답하지 못한 책

 

한병철 교수는 이러한 신자유주의 성과사회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심심함'과 '분노'라는 미시적 처방을 내립니다. 이런 '미시적 처방'에는 신자유주의가 너무도 공고한 체제이기에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지적된 바 있듯이, 그의 이론으로는 아랍의 봄, 오큐파이 운동, 사파티스타 봉기 등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그의 이론에서 분석은 받아들이되 처방은 우리 스스로 내릴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마르크스가 헤겔의 변증법과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듯이, <피로사회>에서 제기한 문제를 받아들이되 이를 바탕으로 하여 어떻게 변혁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우리 스스로 그 답을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제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댓글로 지적해주셨으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앞으로 더 좋은 글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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