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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빙기의 지상에서 --남진우
책을 펼치면
글자들이 한 자씩 녹아내린다
페이지를 넘겨도 이내 백지가 된다
내 망막을 스쳐지나가는 것들은 다
물이 되어 흘러내린다
영화를 봐도 자막에 씌어진
글씨들은 금세 증발해버리고
배우들이 뜻도 이해할 수 없는 동작만을
무의미하게 되풀이한다
내 머릿속에 가득 찬 얼음이
내가 읽어나가는 글을 따라
조금씩 녹아내리는 걸까
지상의 모든 책을 다 읽고 나면
얼음이 다 녹아 텅 비어내린 내 머리는
어떻게 될까
밤이면 헐은 위장에
쓰디쓴 술을 쏟아붓고
새벽엔 진통제와 카페인을 쏟아넣는다
몽롱한 몸이 땅 위를 떠다니는 간빙기의 나날들
책을 읽는다
영화를 본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하루 해를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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