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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 이야기

 

독일동화. 나는 이런 상큼한 제목의 전공수업을 하나 듣고 있다. 그 유명한 그림 형제의 동화들(Kinder und Hausmärchen)을 원어 텍스트로 강독하는 수업이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빨간 모자 소녀, 개구리 왕자, 헨젤과 그레텔 등등 우리가 알고 있는 대개의 서양 동화들은 모두 그림 형제의 작품이라 보면 된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 갖가지 민담(märchen)들이 그림 형제의 조사/수집/각색 작업을 거쳐 비로소 '동화'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이른바 Gattung Grimm.

본래 민담이란 것이 당대 민중들의 삶의 결과 욕망의 찌꺼기들을 여과 없이 반영하는 것이다 보니 그 안에는 차마 아이들에게 소개하기 힘든 다양한 성(性)적 비유와 각종 사회적 터부들에 대한 낯뜨거운 묘사들이 가득하다. 그림 형제가 백설공주의 어머니를 두 번째 개정판에서 ‘계모’로 둔갑시킨 것 역시 바로 그런 연유에서 비롯된 것. 동화라봐야 대부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인데다 비교적 단순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는지라 긴장감이 떨어져 독일어 해석에만 매몰되는건 아닐까 했던 우려는 이런 식으로 시대적 배경과 이런저런 뒷이야기들을 캐내는 재미 속에 말끔히 사라졌다.

그러던 중 발견하게 된 매우 흥미로운 책 한 권. 독일의 사회철학자 이링 페처가 쓴 <누가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깨웠는가>. 고전적인 문헌학적 텍스트 비판과 동시에 정신분석학과 사적 유물론의 방법을 동화 읽기에 끌어들임으로써 그림 형제의 동화들을 혁명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이를테면「신데렐라」는 그녀의 ‘의식화 과정’을 중심으로, 「브레멘의 악사들」은 ‘퇴직자 집단의 성공적인 주택 점거’로, 「헨젤과 그레텔」은 ‘파시즘 역사의 에피소드’,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처녀성 상실에 대한 공포 극복’, 뭐 이런 식이다. 자칭 ‘동화 혼란 놀이’ ^^

아무리 생각해봐도 학점과는 별 무관한 내용이건만, 한 번 펼쳐든 책은 쉽사리 덮지 못한다. 결국 3시간 만에 마지막 장까지 독파하고야 말았다. 물론 얼마간의 논리적 비약과 다분히 편파적(^^)인 해석의 흔적들이 더러 눈에 띄기도 하다만은, 그 누가 말했던가. “상상력(Einbildungskraft)에 의존하는 것이 바로 동화(Kunstmärchen)”라고. ㅎㅎ

본문 중 한 챕터를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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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백설공주


에른스트 블로흐는 1930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화는 시대와 그 내용의 복장에 얽매여 있지 않은 욕망의 충족을 이야기한다."
이것을 새로운 인식을 발견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예컨대 그림 형제에 의해 전래된 '백설공주'에 다른 원본이 그 토대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쉽사리 발견할 수 있다. 이 원본을 재구성하는 것은 그리 어렵게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백설공주'를 작업한 그림 형제의 동기도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옛날에 백설공주라고 불리우는 그림같이 예쁜 소녀가 양친의 성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소녀의 머리는 흑단나무처럼 까맣고, 뺨은 눈처럼 희고, 입술은 피빛처럼 빨갛습니다. 그렇지만 공주는 궁궐의 모든 부귀영화가 백성들의 가난과 착취를 토대로 한다는 것을 알고는 마음 속 깊이 매우 불행했습니다.

어느 날 말을 타고 숲 속을 가다가 거칠게 보이는 수염을 기른 젊은 청년을 만났습니다. 공주는 친절하게 청년에게 말을 걸어 청년이 전제정치와 착취로부터 민중을 해방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반란군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 내었습니다. 헤어질 때에 그 유격대원은 공주에게 조그맣고 빨간 책 하나를 선물하면서 몰래 그 책을 읽고 궁 안의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말라고 부탁했습니다.

백설공주는 일곱 밤 동안을 이 책을 읽어서 거의 외울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공주는 그 유격대원이 하고 있는 일이 정당하다고 확신을 하였습니다. 다음에 숲 속에 갔을 때에 공주는 몰래 몇 개의 무기를 가지고 갔습니다. 공주가 일곱 언덕을 넘어 유격대원들의 진영에 도착하자 그들은 열광적으로 환영을 했습니다. 물론 그들에게 유용한 무기를 가져왔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아름다운 공주가 반란군에 가세하였다는 소식은 산불처럼 왕국에 퍼져나가서 자유 해방군에 더 많은 추종자들이 생겼습니다.

여러 번 왕의 군대의 교활한 음모를 물리친 반란군들은 드디어 성을 함락시키고 왕정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는 백설공주가 가담한 혁명 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사악한 왕비는 민중군에 대한 음모죄로 처형당하였고, 폐위된 왕은 민중에게 행한 것을 적어도 보상하기 위하여 평범한 직책에서 민중에게 봉사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최근에 만주의 마지막 황제가 겪은 것과 마찬가지지요. 혁명 정부에서 백설공주는 여성해방을 위하여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라의 모든 백성들은 백설공주를 좋아하고 존경하였습니다. 아마 죽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아주 근본적인 것만 보면 백설공주의 원본은 위와 같을 것이다. 소시민적인 환경에서 자라난 겁 많은 작가들은 그림 형제와 같이 이러한 원본을 변형시키는데 온 정성을 다 쏟았다. 정치적 동기를 가진 백설공주의 자발적인 결의를 백설공주와 무자비한 아름다움의 경쟁을 하는 질투심 많은 왕비의 사적인 복수극의 결과로 만들어 놓았다. 일곱 언덕을 지나 살고 있던 용감한 반란군은 이제 '일곱 난쟁이'로 변했다. 여기에서 동화의 원본을 별탈 없이 만들고 우스꽝스럽게 만들려고 하는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유격대 집단과 같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백설공주는 이제 난쟁이 같은 총각들의 가정부로서의 역할을 맡게 된다. 험한 계급 투쟁 중에서 남은 것은 변장한 왕비가 교활하게 독살하려는 몇몇 시도들뿐이다. 다시금 정치적인 것이 사적인 것으로 변형되었다.

왜곡의 정점은 뭐니뭐니 해도 갑자기 신분에 맞는 신랑의 등장으로 끝나는 해피엔드일 것이다. 이 끝 마무리가 단지 위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난쟁이들의 당황함과 백설공주의 관을 내어주지 않으려고 하는 난쟁이들의 설득력 없는 자세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물론 몇 군데에서는 아직도 원본 백설공주의 흔적이 엿보인다. 위조되지 않은 것은 반란군(난쟁이들) 사이의 연대감과 계급적인 적(계모)에 대한 경계심이다. 백설공주가 프롤레타리아로(보따리 장수와 사과 장수로 변장한 왕비) 가장한 계급 투쟁의 적을 못 알아보는 것도 당연한 이치이다. 왜냐하면 다른 반란군에게는 변장한 왕비를 폭로하도록 할 수 있는 확실한 계급본능이 백설공주에게는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왕비의 교활한 대응책은 백성(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백설공주의 윤리적인 사랑을 바로 백성을 속이기 위하여 이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왕권이 반란군에 대한 투쟁에 있어서 음모술수(변장, 독이 묻은 빗과 사과)를 사용하는 것도 사실적인 묘사로서 원본 백설공주로부터 따 온 것이다.

끝으로 왕비에게 왕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믿을만한 정보를 그렇게 왕비에게 제공하는 '벽거울'은 구석구석마다 염탐꾼과 스파이를 두고 있는 비밀 경찰에 대한 동화적인 비유인 것이다. 이 경우에 있어서 거울과 거울의 매수되지 않는 강직함의 비유를 통한 사적인 변형은 특히 설득력 있고 정교하다고 할 수 있다. 반란군의 색출과 박해에 있어서 왕비의 주도적인 역할은 실제로 현실에 부합하고, 또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비슷한 행동방식이 발견된다.

물론 동화를 변형시킨 것이 그림 형제의 책임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림 형제는 아마 동화를 이미 형편 없이 변형된 형태로 발견하여서 단지 균형 있게 다듬었을 것이다. 그렇게 영웅적인 민중 봉기가 진부하고 조잡한 이야기로 되어 버렸는데, 이런 투의 이야기는 삼십 년대의 헐리우드 방식인 것이다 :'여자가 곤경에 처해 있다가 다시 벗어난다. (girl getting into trouble and out again.)'

민중들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진부한 이야기를 전해 왔겠는가? 기껏해야 종교가 위로해 주는 것보다는 오히려 스스로 위안을 삼기 위해서일 것이다. 종교가 저 세상에서의 보상적인 정의로 우리에게 손짓을 한다면, 동화는 벌써 이 세상에서 사악한 계모에게 정당한 벌을 주고 순박한 백설공주에게 정당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동화가 과연 민중의 아편인가? 원본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 반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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