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 목록
-
- 코뮨을 코뮤니케이팅 하는 ...(3)
- 살림
- 2010
-
- 공무도하가 4대강 버전(5)
- 살림
- 2009
-
- Language_Scott Matthew
- 살림
- 2009
-
- 땀 흘리고 땀 닦아요! - 대...(2)
- 살림
- 2009
-
- [공채] 녹색연합 월간 <작은...
- 살림
- 2009
사랑과 노동 - 꼬뮨을 꼬뮤니케이팅하는 뫼비우스의 띠
[출처] 사랑과 노동 사이의 공동체 | 작성자 demetre
수수께끼 하나. 마르크스가 다음과 같이 묘사한 것은 무엇일까? "나를 인간의 삶과 결합시키고 사회와 결합시키며, 자연과 또 다른 인간과 결합시키는 끈, 모든 끈을 풀기도 하고 다시 맬 수도 있게 하는 끈…."
답은 화폐다. 『경제학-철학 수고』의 세 번째 초고에서 마르크스는 화폐를 ‘보편적 연결수단이자 절연(絶緣)수단’이라고 쓰고 있다. 마르크스답다고? 진짜 마르크스다운 얘기는 이 대목 바로 뒤에 나온다. 청년 마르크스는 노트에 다음과 같은 알쏭달쏭한 문장을 끄적거려 놓았다. “화폐는 진정 ‘보조’수단일 뿐이며, 진정한 결합수단은 (…) 사회의 화학적 힘이다.”
인용문에서 (…)으로 표시된 부분은 악필로 유명한 마르크스의 초고에서 식별할 수 없는 어떤 단어(들)이다. 화폐를 ‘보조적’ 지위로 밀어내는 사회의 ‘진정한 화학적 힘’, 연결과 절연의 참된 끈을 마르크스는 도대체 무엇이라고 썼던 걸까? 마르크스주의 역사 동학(dynamics)인 유물론은 표면상 계급투쟁을 분석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혁명을 이끄는 이 ‘화학적’ 에너지에 대한 탐구가 지속되고 있다. 나는 그 ‘(…)’을 ‘사랑’ 혹은 ‘노동’, 보다 정확히 말해 사랑과 노동이 만드는 코뮤니케이팅(꼬뮨-하기), 즉 (주체의 행위에 의해, 그러나 주체의 의도로는 환원되지 않는) 동사형으로 존재하는 ‘꼬뮨’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사랑과 노동의 상호소외
오늘날 사랑과 노동에는 흥미로운 모순이 딸려 다닌다. 모두들 각론에 몰두하지만 누구도 총론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먼저 사랑의 각론들을 보자. 사람들은 우연하거나 운명적인 만남에서부터 뜻밖이거나 필연적인 이별에 이르기까지, 연애사의 온갖 세목과 정서적 요동들에 지나치다 싶을 만큼 관심을 쏟는다. 결혼을 둘러싼 각종 이벤트들에도 거의 목을 매는 분위기여서 ‘짝짓기’는 이제 ‘중매’라는 수공업적 단계에서 각광받는 전문산업(mating system)으로 격상되었다. 하지만 정작 ‘사랑’이란 말에는 다들 고개를 갸우뚱한다. 사랑? 아직도 그런 걸 믿느냐는 분위기다. 물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진지한 사랑과 헌신적 결혼―우리시대의 공식적 이데올로기―을 자기 삶이 지닌 진정성의 시험대로 간주하기는 한다. 그러나 모든 공식 이데올로기가 그러하듯 우리는 다만 믿는 척할 뿐이어서 아무도 그런 시험대에 자기 생을 올려놓는 모험을 하려들지는 않는다.
노동 쪽도 사정은 비슷하다. 일자리와 연봉의 등락은 언제나 초미의 관심사이나 노동 자체는 기피, 혐오, 염증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높은 연봉을 주는 일자리’이지 더 이상 일이나 노동은 아닌 것이다. 비정규직을 비롯한 각종 노동문제는 그저 ‘정치권’이 다뤄야 할 골칫덩어리처럼 여겨지고, 파업이나 노동운동이 벌어져도 ‘임금인상을 위한 집단이기주의’ 정도로 치부된다. 요컨대, 별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노동시간과 노동강도는 세계최고 수준에서 떨어질 줄 모르고 있고 ‘비정규직’으로 상징되는 노동환경은 악화일로를 벗어날 줄 모르고 있다. 그렇다면 사랑 없는 연애와 결혼, 노동 없는 일자리와 연봉의 추구는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사랑이나 노동이라는 이념과 사랑과 노동의 구체적 행위, 사건들 사이에는 누구나 알고 있는 커다란 간극이 놓여있으며 우리는 이 간극을 지배하는 연결과 절연의 매체가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다. 바로 돈이다. 사랑과 사랑-유사 행위들을 매개하는 것은 돈이고 노동과 노동-관련 사안들을 끊어놓는 것도 돈이며, 노동과 사랑을 연결하는 것도 돈이라는 일반적 등가물이다. 문제는 화폐라는 이 고약한 매체가 원활한 소통이 아니라 불통과 왜곡, 착복을 일삼는다는 데 있다. 하지만 손발도 마음도 없는 화폐가 절로 그런 짓을 저지를 수는 없다. 따라서 화폐라는 물신이 아니라, 그것을 작동시키는 사회의 물적, 정신적 구조―사랑과 노동을 제물로 삼는 ‘등가교환’이란 제의를 통해, ‘자본’이라는 모호한 신의 제단에 ‘잉여’라는 공물을 쌓는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신앙체제를 비판하지 않으면 안 된다.3)
3) 자본주의는 시장질서이거나 경제논리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뭔지 아직 잘 모르고 있다. 시장논자들은 왜 국가를 축소하라느니 말라느니 떠들기만 할 뿐, 국가를 폐절하자고는 감히 말하지 못하는가(심지어 그들은 국가의 행정이 경제의 원활한 운용과 기업의 이익을 도와주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라는 뻔뻔스런 요구를 하지 않는가. 최소한 전봇대라도 뽑아주는 성의를 보여야 만족하지 않는가). 국가라는 합법적 폭력이 화폐의 신용과 소유권의 신성함을 보장하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단 하루도 버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경제(를 굴리는)권력의 체제이고 국가는 이 권력의 필수불가결한 도구인 것이다. 국가에 대한 시장주의자들의 공격은 실상 국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도구를 장악하려는 위험함 대중의 힘, 즉 민주주의에 대한 도발에 불과하다.
자본주의, 사랑과 노동의 황무지
노동과 사랑은 사회적, 개인적 삶의 가장 큰 줄기여서 (‘노동이 사라졌다’느니 ‘사랑은 없다’느니 하는 헛소리들과 달리) 우리는 여전히, 일하고 사랑하며 살아간다. 우리 삶의 시간은 노동과 사랑으로 점철돼있고 지배적 현실과 이데올로기는 그걸 망치는 것으로 점철돼있다. 이를테면 이렇다.
경제생활을 소득과 지출로 나눌 때,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임금노동자들은 노동에서 소득을 얻고 (자기애와 가족애가 포함된)사랑 쪽에서 지출을 한다. 반면, 자본가와 기업은 사랑(을 미끼로 한 상품)을 팔아 소득을 얻고 노동을 열악하게 만듦으로써 지출을 줄인다. 그래서 자본과 기업이 헤게모니를 쥔 사회에선 자기애, 가족애, 성애 등등 사랑의 온갖 형태들이 이스트를 잔뜩 넣은 빵처럼 부풀려지고 이제 사랑은 초자아의 의무적 명령처럼 스트레스의 원천으로 변질된다(“너 아직 솔로니?” “인생을 즐겨라!”). 노동 또한 사회의 물적, 정신적 재생산 동력이라는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상실한 채 (사랑하는 나, 연인, 가족이 요구하는)상품 소비를 위한 돈을 버는 ‘고역의 장소’로 추락한다. 그 결과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사랑의 증거로 보험금만 남기고 지상에서 사라지는, 생명보험 광고의 가장(家長) 이미지다.
노동(사라진 가장)과 사랑(과장된 평화와 행복)이 돈(보험금)을 통해 연결되는 이 끔직한 광고는 우리시대의 가장의 욕망―‘가족이라는 짐을 벗고 훌훌 이 세상을 뜨고 싶구나’―과 가족의 욕망―‘돈만 남기고 꼰대는 사라져주었으면 좋겠어’―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양손으로 노동과 사랑을 지배하고픈 금융자본의 욕망과 자기 이미지(잘생긴 신사로 등장하는 자애로운 보험회사 직원)의 표현이다.
자본이 더 많은 잉여를 뽑아내려고 기를 쓰는 곳에서 사랑은 독버섯처럼 화려해지고 노동은 곰팡이처럼 음침해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사랑과 노동의 대지는 '황무지'로 변해가고 사람들은 잔인한 계절을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 누가 이것을 인간의 숙명이라 말하는가. 잔혹한 신처럼 군림하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와 보이지 않는 손의 주인들, 가야할 때를 모르고 버티는 노회한 왕과 그의 부패한 신하들이 아닌가. 우리가 요즘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아우르는) 총체적 권력체제는 바로 이 죽어가는 왕, 즉 자본주의 체제의 말기 증상이다.
노동과 사랑의 주고받음
노동은 인간의 사회적 존재방식이다. 공장이나 회사에서의 일, 임노동만을 노동이라 생각하는 상식적 노동 이미지와 달리 마르크스는 노동을 사회를 가능케 하는 인간적 매개활동의 총체로 이해했다. 이때 노동이란 자급자족을 위한 생계유지 활동이 아니다―그건 동물들도 다 하는 일이다. 노동이란 우선 그 산물이 타자에게 유용한 한에서 자신에게도 의미 있게 되는 그런 활동들을 가리킨다. 노동에는 그처럼 원초적으로 사랑의 계기(조건 없는 증여/수수)가 포함돼있다. 인간은 노동하는 인간이고 노동은 (의식하든 못하든) 타자들에 대한 일반화된 사랑의 표현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다른 모든 사회와 마찬가지로, 노동 없이는 유지될 수 없으며 노동은 사랑 없이는 시작될 수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사랑과 노동을, 보다 정확히 말해 ‘사랑의 노동’과 ‘노동 속의 사랑’을 사회의 일반질서이자 구성적 문법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어째서 그런가? 자본주의는 등가교환과 예외로서의 잉여만을 알뿐, 그 자체가 잉여인 교환, 즉 선물의 논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을 모른다.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타산적 개인주의자들은 더 많이 주고 더 적게 받음으로써, 또한 누구도 예외 없는 그 부등가의 질서에 의탁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성취되는 참된 등가(궁극적이고 인간적인 평등)의 풍요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늘 궁핍과 피해의식에 시달린다. 자본주의에게 사랑은 풀 수 없는 방정식이고 견딜 수 없는 무리수이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사랑에 젖줄을 대고서만 자신을 유지할 수 있으면서도 결코 그것을 일반적 질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착취하거나 악용하는 이유이다. 이것은 인간과 자연을 잉여가치를 뽑아내기 위한 ‘자원’으로만 보는, ‘더 많은 잉여의 산출, 더 많은 자본의 축적’을 ‘발전’이라 부르는 자본주의적 합리성의 행태들에서 너무나 잘 드러난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사랑을 마시고 인간적 얼굴을 하게 되면 자본주의는 독약을 삼킨 짐승처럼 죽어버릴 것이다.
노동과 사랑을 산다는 것
여기서, 뜬금없어 보이는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돈 주고 사랑을 살 수 있나? 없다! 그건 자신은 웃지 않으면서 거울 속의 내가 미소 짓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랑은 사랑을 주면서만 받을 수 있고, 오직 사랑과만 교환(증여/수수)할 수 있다. 사랑은, 선물과 마찬가지로, 주는 것이 곧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주면 내 마음이 기쁘다는 정도의 얘기가 아니다. <증여론>에서 마르셀 모스가 관찰한 바 있듯이, 선물증여는 증여자에게 사회적 위신과 권위를 가져다준다. 그는 선물한 것들과 등가의 것들을 조만간 돌려받지 않지만, 그런 타산과는 다른 방식으로 증여의 순간에 곧장 무언가를 돌려받는 묘한 계산대 위에 선다(이런 계산을 하는 것은 증여적 사회이지 증여의 수행자들이 아니다). 그가 받는 것은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만족만이 아니라 다른 인간과의 관계에서 그가 가지는 위상의 객관적 확인이다. 사랑도 이와 같다. 사랑을 준다는 것은 그가 타자와 사랑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사랑하는 자’)를 유지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랑을 준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사)준다는 뜻인가?
라캉은 사랑이 ‘두 개의 결핍이 만나는 것’이며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주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을 어떻게 주는가? 데리다는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에 대한 비판서인 『주어진 시간: 위조화폐』에서 “시간을 준다”는 마담 맹트농의 편지 구절을 오래 붙들고 늘어지는데, 이때 자신이 결코 소유할 수 없는 것으로서의 시간을 준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생(의 시간)을 바친다는 뜻이다. 삶의 시간은 준다고 줄어들지 않고 주지 않는다고 소유하거나 축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바로 이 ‘삶의 시간’의 증여이고,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증여라기보다 전달의 ‘몸짓’이며 교통의 ‘행위’이다. 그런 맥락에서 사랑은 삶의 방식(way of life)이며 몸을 붓으로, 시간을 물감으로 삼아 타자의 세계에 그리는 생의 무늬(紋畵)이다. 우리는 오직 그 타자의 캔버스에만 자신의 생을 남길 수 있으며, 우리 생은 타자의 사랑이 남긴 무늬를 모두 지우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백지와 같다. ‘사랑을 준다’는 것은 결국 타자를 향한 사랑의 몸짓을 ‘살아간다’는 것이며 우리는 그러한 살아감을 통해서만 사랑을 ‘돌려받는다.’ 사랑의 수행자(agent)는 증여가 곧 수수인 사랑의 세계를 살아갈 수 있을 뿐 사랑을 물건처럼 주고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노동도 이와 마찬가지다. 노동은 (임금의 형태든 뭐든) 계량화되어 되돌려 받는 것으로는 절대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과 마찬가지로 돈으로 노동을 살 수 없으며 그것을 물건처럼 주고받을 수도 없다. 노동은 오직 노동과만 교환할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품앗이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노동 속에서 사랑의 계기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노동은 인간이 세계를 향해 자신을 내어준 생의 시간의 총량, 즉 삶 자체이기 때문에 그 대가로 세계 전체를 향유하고 세계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길 기대하며, 세계 전체가 자신의 노동의 산물을 향유하며 기뻐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사랑이 그리움 속에서 타자를 향해 가는 생의 증여/수수라면 노동은 그 사랑의 능동적 표현이자 실현이고 우리는 노동을 통해 그 사랑에 응답해야 한다. 그러한 사랑과 노동을 통해 우리는 화폐를 ‘보조’수단의 지위로 끌어내리고, 비로소 코뮨을 코뮤니케이팅하는 생의 주체로 스스로를 변모시킬 수 있을 것이다.
------------------------------------------------------------------------------------------------------
예전에 빈집 블로그에서 찾은 보석 같은 글!
다시금 꼽씹으며 내 사랑과 노동을 돌아본다.
2010 수리(水理)영역 대비 도올선생 특강!!

예부터 엠비골에 구전되어오는 노래가 있으니
이름하야 '명무보하가(明無湺河歌)'
=============================================
명무보하 - 명박아, 강에 보를 짓지 마라
명경보하 - 명박이가 마침내 강에 보를 짓네
타하이사 -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니
당내명하 - 떠내려간 명박을 어이할꼬
---------------------------------------------
- 갈래 : 풍자시
- 연대 : 2009년
- 성격 : 저항적
- 어조 : 애절하고 비통한 목소리
- 표현 : 직설적, 절박한 표현
- 제재 : 명박이 보를 지음
- 주제 : 보를 짓지 마라
============================================
그렇게 하지마라 하지마라 하는데도
기어이 막겠다는 명박씨를 보니
문득 이 노래가 생각나네요.
머리털은 까맣지만 머리속은 새하얀,
미치기도 했고 삽질도 좋아하니,
이명박은 백수광부가 분명한 듯
Language_Scott Matthew (ShortbBus OST)
Memories of secret handshake, you
It speak my language
Sees, I cease to believe
You're gonna leave
And acting out a fight
when you're not around
With ease, I cease to exist
I slip through the leaves
We once had to wish
Oh we wished for,
Heaven, It now only seems
Like torture
Oh this ghost
Will win my host it's, ingering
In me, and around my neck
It taps on my head
While I'm asleep
Memories of secret handshake, you
It speak my language
Sees, I cease to believe
You're gonna leave
대안화폐 '땀' 시작합니다
작은 걸음들이 이어지면 큰 길로 한데 어우러질 수 있겠지요. 머뭇거리며 선뜻 나서지 못하는 분들께 든든한 디딤돌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간단한 약속을 정해 대안화폐공동체를 시작합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언제든 함께할 수 있습니다. 궁금한 점, 이해 안 되는 것, 신나는 제안거리가 있으면 모임에 함께하면서 같이 만들어가요.
=================================================================
대안화폐 땀 운영안(가안)
01. 대안화폐 이름과 단위는 '땀'으로 한다.
02. 최수영, 살림, 영실, 청산별곡, 히어리, 풀벌레가 함께한다.
03. 무엇을 얼마나 거래할지는 서로의 약속과 합의로 결정한다.
04. 거래에서 땀 흘린 사람(재화 또는 용역을 제공한 사람)에게는 +땀, 땀 닦은 사람(재화 또는 용역을 받은 사람)에게는 -땀이 생긴다.
05. 공동체 모든 사람의 땀을 합치면 항상 '0'땀이 된다.
06. 특정한 거래를 위해 '샘터'를 둔다.
07. 인터넷 카페 '나비야, 청산가자' <대안화폐, 품앗이> 게시판에서 거래 내용(거래요청, 결과)을 함께 나눈다.
08. 대안화폐 활성화를 위해 주마다 한 번 거래를 결산해 게시판에 공유한다.
09. 달마다 한 번 책읽기 모임(나비야 청산가자 + 베지투스) 때 장터를 연다.
10. 아래의 경우 +땀 또는 -땀이 생기며 거래 상대자는 샘터이다.
- 공지를 올린 사람 : +1땀
- 결산을 맡은 사람 : +1땀
- 후기를 쓴 사람 : +1땀
- 장터에 참석한 사람에 : +1땀
- 책읽기 모임 발제를 맡은 사람 : +2땀
- 깜짝 발제한 사람에 : +1땀
- 발제를 맡았는데 준비하지 못한 사람 : -1땀
* 위 내용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동의한 때부터 효력을 갖는다.
* 위 내용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동의가 있으면 수정할 수 있다.
* 결산 예시
| 최수영 | 살림 | 영실 | 청산별곡 | 히어리 | 풀벌레 | 샘터 | 합계 | |
| 거래1 | -1 | +1 | 0 | |||||
| 거래2 | +4 | -4 | 0 | |||||
| 거래3 | -3 | -3 | +6 | 0 | ||||
| 거래4 | -3 | +3 | 0 | |||||
| 거래5 | +5 | -5 | 0 | |||||
| 거래6 | +3 | -1 | +1 | +1 | +1 | +2 | -7 | 0 |
| 결산 | +4 | -8 | +3 | +3 | -3 | +8 | -7 | 0 |
====================================================================================
일단 제가 이해한 것을 정리한 것이에요.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다음 모임 때 함께 고쳐요!
다음모임은 23일(다음주 수요일)입니다.
샘터의 운영방법에 대해서 의견을 모으기로 했어요. 앞서 말한 것처럼 운영안을 수정하는 것도 포함.

그냥 그런 생각을 해봤다.
과거의 경험이 지금 내게 얼마나 남아 있을까.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것 가운데 그때 그 일은 얼마나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일까.
과거4 과거3 과거2 과거1
-------------- + -------------- + ---------------- + ---------------- =
(1+할인율)⁴ (1+할인율)³ (1+할인율)² (1+할인율)
뭐 이렇게 산술적으로 무언가를 매기려는 게 참 우습기도 하네.
0806_재창간 특별칼럼
내가 사랑하는 지구
글 사티쉬 쿠마르 옮김 김미영
자연은 우리 부(富)의 진정한 원천입니다.
우리가 맞닥뜨린 환경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길 원한다면, 지구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변화하길 바란다면, 문제 자체와 현상을 잘 구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지구온난화에 대해 모두가 이야기하고 있는 그 순간에는 지구온난화가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 문제 현상이며, 그 현상을 다루는 일에 대해 이야기 하는 데에 그칠게 아니다. 더 멀리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들이 생기는 이유를 파헤치기보다는 어떻게 그 현상에 대처할 지에만 신경 쓰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특징이다. 지구온난화현상에 관련해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왜 우리는 우리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대기를 통째로 바꾸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올라가 앉아 있는 나무의 가지를 톱으로 잘라내고 있는 이 지경에 도달하기까지 어떻게 해왔는가?
이에 대답은 우리가 정신(idea of the spirit)을 생각하지 않고 문제(matter)에만 신경써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물질주의에 빠져 있다. 그 문제가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온통 문제뿐인 것은 쓸모가 없다. 인간의 몸은 머리, 팔, 다리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인간 정신이 없으면 다 쓸모가 없다. 정신이 있어야 신체가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정신의 결핍이 환경문제의 뿌리이며 지구온난화는 단지 현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곤 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데카르트나 뉴턴과 같은 서구의 많은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지구를 사람이 이용하고 지배하는 생명 없는 기계로 여겨왔다. 인간이 주인이며 지구를 맡고 있는 최고의 종이라고 믿어 왔다. 수년 동안 인류는 식민주의, 민족주의, 남성우월주의 같은 사상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인류는 특별한 종이며 따라서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종편견주의 세계에 여전히 살고 있다.
인류는 과거에는 노예를 소유했고, 지금은 자연을 소유하고 있다. 자연은 어떠한 권리도 없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든지 자연물에 대한 소유를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자연을 죽어있는 것이 아닌 지혜와 영성으로 충만하며 살아있는 것으로 본다면, 우리는 곧 자연세계와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리고 나면 자연은 살아있고 인간의 권리와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이다. 라틴어에서 나탈(natal)은 ‘탄생’을 뜻한다. 이것은 태아(prenatal)나 출산(postnatal)처럼 인간의 탄생과 관련된 단어에는 나탈(natal) 글자가 들어 있는 이유이다. 아프리카에서 태어나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네이티브 아프리카인(native African)이라고 한다. 탄생(natal), 태어난 고향(native), 출생(nativity), 자연(nature)은 모두 같은 말에서 나온 말들이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지 자연의 주인이 아니다. 우리는 나무나 땅, 강을 소유한다고 할 수 없다. 단지 우리는 그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 뿐이다.
현대경제학에 팽배해 있는 ‘인류가 자연을 소유하고 원하는 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뿌리 깊은 결함이 있다. 우리가 ‘자연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자연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지구온난화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석탄연료가 아닌 다른 방법, 가령 풍력발전이나 태양에너지, 핵에너지, 바이오 에너지 같은 데에서 동력을 얻는 방법을 발견한다고 해도 그것은 현상에 대처하는 것일 뿐이다. 자연을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강이나 동물, 열대우림을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지속가능성에 대한 우리 노력은 단지 환상에 불과하다. 기술을 이용한 해결법은 발상의 전환과 함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자연과 관계맺음(relationship)에 대한 개념이 정신주의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반면, 소유물로 자연을 바라보는 생각(ownership)은 물질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소유권(ownership)과 관계맺음(relationship)에는 큰 차이가 있다. 남자가 여자를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하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바꿨고 이제 우리는 남자들이 아내를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부부는 관계맺음이지 소유관계가 아니다. 사람들이 노예를 소유하고, 얼마나 많은 노예를 부리느냐에 따라 부를 측정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사람들은 숲, 대지, 동물을 노예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동물들을 공장식 농장과 우리에 가둔다. 우리는 동물들을 우리 마음대로 다룬다. 그런 인간 중심의 물질위주 마음가짐이 계속되는 한 지구온난화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중심 세계관에서 지구중심 세계관으로 눈에 띄게 도약을 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생명체에 대한 바탕을 이루는 가치를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의 생명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생명체에 대해서 말이다. 인간 사회는 지구 전체의 한 부분이다. 경제는 생태와 조화를 이뤄야 한다. 마음의 변화뿐만 아니라 세계관의 변화도 밑바닥부터 일어나야 한다. 정신영역을 다루는 생태학과 정신을 포함하는 경제를 창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정부가 지구온난화에 대비하여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인류가 지구와 관계를 바꾸지 않는 한 결코 지구온난화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지구의 손님이다. 우리는 지구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부처는 지구의 첫 번째 친구였다. 그는 모든 소유물을 포기하고 나무 밑에 앉아 사람은 지구에 연관되어 있다고 말했다. 지구 전체가 우리 가족이다. 모든 생명체는 우리 형제이다.
서구에서 우리는 유행을 따라간다. 요즘 최신 유행은 기후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1960년대 유행은 핵전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당시 92세였던 버트란트 러셀을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존경하는 러셀 선생님, 선생님은 저에게 영감을 줍니다. 그러나 나는 선생님 철학에 대해서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선생님께서 핵전쟁에 대해서 말씀하신 의제를 사람들이 두려움 때문에 따른다는 점입니다.”
이와 똑같은 일이 기후변화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높이는 일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두려움에 의해서 몰아가지고 있다. 그 두려움은 우리가 소비위주의 생활방식을 더 이상 할 수 없고 물질적 소유를 포기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환경운동의 많은 부분을 움직이는 것이 바로 이런 두려움이다.
내가 버트란트 러셀에게 지적했듯이 평화는 삶의 한 방식이다. 핵무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끌려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지속가능성 또한 삶의 한 형태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소유물을 아끼거나 우리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해야 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우리는 두려운 마음가짐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의 환경중심주의는 생명, 사회, 사람, 지구, 자연에 대한 사랑에서 영감을 받아 나와야 하는 것이다. 부처는 지구온난화현상이 생기기 2600년 전부터 이미 환경중심주의 사상가였다. 그는 민생구제 방법을 찾으면서 나무 아래 앉아 우리가 이 나무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나무 아래에 앉지도 않는다. 대신에 어떻게 하면 저 나무를 이용해서 이윤을 낼까를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저 나무에서 돈을 뽑을까, 어떻게 하면 저 나무로 내 집을 짓고 가구를 만들까 생각한다. 부처에게 나무는 신성하고 바탕을 이루는 가치를 지닌 존재였다. 그러나 서양 문명에게 그것은 단지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대상일 뿐이다.
정신영역을 다루는 경제학은 우리에게 두려워 말고 지구를 축복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이 우리가 자연중심주의자인 까닭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지구온난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지구를 구하기 원하는 게 아니라 지구에 대한 우리의 사랑 때문에 그렇게 원하길 바란다. 생명에 대한 사랑, 자연에 대한 사랑, 사회에 대한 사랑은 파멸과 우울함보다 강력하다. 우리는 두려움이 가지는 힘에서 사랑의 힘으로 이동해야 한다.
지구온난화를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실제 논란거리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한다. 기후 변화에 대처하는 세계의 자세는 모두 현상에 대처하는 것뿐이다. 모두들 특히 정치인과 사업가들은 이에 앞장서고 있다. 그들은 지구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않고 지구온난화가 새로운 사업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렇게 한다. 이 사람들 머릿속은 온통 “경제 성장, 경제 성장, 경제 성장”이라는 주문으로 가득 차 있다. 내 주문은 “내가 사랑하는 지구, 내가 축복하는 지구, 내가 누리는 지구”이다. 지구가 우리에게 준 선물을 누리기 위해서는 지구를 돌보고 지켜야 한다.
지구온난화이거나 지구온난화가 아니거나 지구를 돌보는 것이 우리의 가장 우선하는 책임감이다. 물론 경제학은 나름의 역할이 있지만, 자기 범주에서 제 역할을 다해야지 지배하게 놔두면 안 된다. 에코스(Ecos)는 그리스어로 ‘집(home)’이란 뜻이다. 로고스(Logos)는 ‘지식(knowledge)’을 뜻한다. 노모스(nomos)는 ‘다루다(management)’는 뜻을 가진다.
만약 우리가 우리 행성을 집으로 인식하지 않으면 어떻게 다룰 것인가? 그러므로 생태학(Ecology)이 우선순위가 된다. 우리가 경제학에서 생태학으로 초점을 이동하면 지구온난화현상은 사라질 것이다. 지구온난화는 경제학과 세계화 현상이 온 지구를 지배하면서 생겼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우리에게 말했듯, 처음 문제가 생겼을 때 가지고 있던 마음가짐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우리는 끝도 없이 생태를 파괴시키는 경제성장 보다 더 나은 목표를 세울 필요가 있다. 경제성장이 이룩한 수조 달러는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 우리는 그것이 전쟁과 무기를 만드는데 그 돈이 쓰이는 것을 알고 있다. 특정 한계를 넘어선 돈은 짐이 될 수 있다. 그것은 불행을 가져오고 더 나쁜 경우 돈이 가난과 착취를 낳는다. 돈은 진정한 부가 아니다. 지구가 우리 부의 원천이다. 극한 가난과 극도로 부유함이 없이 중도를 지키는 것이 추구해야 할 이상이다. 왜냐하면 부자가 있는 한 가난한 자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가난의 역사를 만들길 원한다면 우리는 또한 부의 역사도 만들어야 한다. 이 둘의 균형 상태를 이루는 것이 정신영역을 다루는 경제이다.
사티쉬 쿠마르 님은 인도에서 태어나 간디의 비폭력과 연대의 가르침을 따른 사회운동에 헌신하였다. 무일푼으로 인도에서 러시아, 유럽을 거쳐 미국까지 걸어서 평화를 위한 순례를 하기도 했다. 지금은 영국에 살면서 생태잡지 ‘리저선스’의 편집자로 일하며, 녹색사상과 그 실천을 위한 세계적인 교육센터 ‘슈마허 대학’를 설립·운영하고 있다.
김미영 님은 녹색연합 활동가로 일하다가 지금은 배움의 길에 있으면서 <작아>의 번역자원활동가로 함께하고 있다.
댓글 목록
관리 메뉴
본문
오~~ 이 글 원문이 없어져서 한 참 찾아다녔는데... 살림이 찾아줬네요. ^^ 엄청 땡큐. 그나저나 어떻게 살아요? 함 봐야지요?부가 정보
관리 메뉴
본문
지음 / 아... 지음!!! ^^ 한동안 잠수 타다 얼마 전부터 꼼지락 꼼지락 하고 있어요~ ㅎㅎ 금요일에 빈집에서 잔치 열린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ㅋ 조만간 접선해요~부가 정보
관리 메뉴
본문
몇일 몇시 어디서 볼까요? ㅋㅋㅋ 전화번호는 그대로지요? 가끔 전화했는데 안받아서. ㅎ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