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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 L

 

18년을 한국에서 살았던 L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갑작스러운 소식에, 18년의 삶을 이틀만에 정리하고 네팔로 떠났다. 진지하게 활동을 고민하고, 사람들을 따뜻하게 챙길 줄 알았던 그. 재치있는 그의 유머에 박수치며 깔깔거리던 시간이 있었다. 그와의 동지적 관계는 그가 급하게 떠난 만큼 나에게도 갑자기 정리되 버린 또 하나의 단절이었다. 떠나기 하루 전, 송별회는 참 마음이 아펐다. 그렁그렁 물기어린 눈빛.

그에게서 어제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 장례식 후에 사십구제를 지내고, 친척들을 만나고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너무나 오랜 세월이 지나 돌아간 그곳에서 자꾸 아프다고 했다. 바깥에만 나가면 감기가 걸리고 몸이 아프다고. 아픈 건 몸만이 아닐 것이다. 그는 네팔 사람이지만 지난 18년 동안 가족들이 있는 네팔에 갈 수 없었다. 그가 20대와 30대를,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보낸 땅, 한국. 이곳에 오는 것도 이제는 어렵다.  출국할 때 찍었던 사진과 열손가락 지문은 그의 재입국을 막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지나간 시간 만큼, 네팔 사회는 변했고, 한국에서 살았던 시간 만큼 그도 변했다. 변하지 않은 건 어딜가나 존재하는 단절이다. 아픈 건 몸만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S

 

오늘, 전화기 저편의 술취한 S의 목소리가 유독 크다. 도일시장 술친구 그룹의 멤버 S. 앞집, 옆집, 길 건너 집 이렇게 같이 살고, 같은 공장에서 일했던 도일 시장의 사람들. 전화 몇 통화면 한 집에 다 같이 모여, 네팔식 만두를 빚고, 술마시고 노래하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곤 했었다.

지난 여름, 도일 시장 사람들 중 열세명이 퇴근 길 통근차를 막은 출입국 차에 줄세워 태워져 외국인 보호소로 옮겨졌고, 며칠 뒤 본국으로 보내졌다. 첫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 엄마 E만 겨우 집으로 올 수 있었다. 그 날, 울면서 남편과 아이의 짐을 챙기던 E, 몸이 아퍼 출근하지 못해 단속을 피할 수 있었던 R 그리고 친구들의 가방을 싸기 위해 모인 몇몇 사람들과 함께 황망하게 앉아 라면을 끓여먹었다. 그 라면이 함께 먹은 마지막 음식이 될 줄은 몰랐다. 며칠 뒤, 남아있던 몇몇 도일시장의 사람들도 이른 새벽 출근길에 또 다시 출입국 차량에 줄줄이 태워졌기 때문이다. 만삭의 J가 출입국 직원을 피하다가 넘어져 다쳤던 날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살았던 앞집 뒷집 그 방들은 텅텅 비었고, 그렇게 내 마음 속에서 도일 시장은 커다랗게 빈 공간이 되었다. 그 빈 공간에 남아있는 S. 그가 오늘 전화를 한 것이다. 이제 아무도 없다고. 재미가 없다고. 친구가 없다고. 홀로 남은 그가 한 때의 술친구 그룹 멤버였던 나에게 놀러 오라고 한다. 같이 만두를 먹자고 한다. 나는 나중에 갈께요, 라고 기약없는 대답을 하고, 그는 불법 사람에게 나중이 어디있냐고 한다. 내일도 없는데, 나중은 무슨 말이냐고 한다. 유난히 컸던, 술취한 그의 목소리가 너무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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