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튀세르氏 한국 고행기?

2008/10/22 02:18

최근 교수신문에, 홍준기와 진태원의 다분히 감정적인 논평과 반박이 실렸길래, 옮겨둔다. 두 사람의 논조가, 엘피판 튀듯이 툭툭거려서 사실 논쟁으로 볼 수 조차 없는 감정적 배설물일 뿐이다. 하지만 감정적 찌꺼기는 흘려버릴 수 없는 일말의 징후이기도 하기 때문에, 또한 여러 해 전부터 이들 간의 이면에 흐르고 있던 제법 심각한 차이와 논쟁, 즉 알튀세르-스피노자-(발리바르?) 노선과 알튀세르-헤겔-라캉 노선의 '이단논쟁'을 고려한다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단순화하자면, 논쟁의 구도는 라캉(또는 정신분석)과 헤겔을 알튀세르에게서 '정화'하기(진)와 (정신분석적 입장에서) 다소 전형적 방식으로 '옹호'하기(홍)였다.  당연하게도 알튀세르에게 빚진 자들은 '정치가 구획짓기'라면 (제3의 노선을 포함하여) 이론에서도 어떤 이단을 선택을 해야한다. 나는 이단의 증식을 옹호하는 편이지만, 안타깝게도 그간 홍-진 간에 벌어진 논의를 볼 때 입장의 차이만을 확인할 뿐 이단을 형성했는지는 의문이이고, 게다가 알튀세르에 대한 '훈고학'에 그친 점도 아쉬울 따름이다(물론 이들의 기여가 없다는 말도 아니고, 진행 중인 논쟁이기 때문에 보다 생산적이기를 바란다). 여하튼, 알튀세르氏 고생하십니다.//

 


선악 이분법으로 동료 학자들을 비난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진보평론>가을호 알튀세르·들뢰즈 국내 수용 비판 논문을 읽고
(진태원 고려대·철학 )

<진보평론> 2008년 가을호에 발표된 홍준기 서울시립대 교수(철학)의 「알튀세르 맑시즘에 관한 새로운 정치· 윤리적 독해의 시도:라깡/들뢰즈, 헤겔/스피노자 논쟁 구도의 맥락에서」는 국내의 알튀세르· 들뢰즈 수용에 이의를 제기한 논쟁적인 글이다. 홍 교수의 논문에 대해 진태원 고려대 교수(철학)가 반박문과 함께 홍 교수의 논문을 간략히 요약했다.

홍준기 교수가 이 글에서 보여주려는 바는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자기비판의 요소들』(1974) 이후에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주의자라기보다는 오히려 헤겔주의자가 됐으며,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관점과 『일맥상통』(<진보평론> 37호, 288쪽―앞으로 이 글에서 인용할 경우 쪽수만 기입하겠다)하게 주체 개념을 재도입한다. 둘째는 알튀세르에 비해 들뢰즈는 “‘하나의 존재의 모습’, 즉 빈 공간 없는 ‘충만한’ 세계만을 허용하는 세계관을 기준으로 정치적 판단을 내리”고 있으며, 이 때문에 “정치적 오류는 물론 생산적인 학문적 토론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기능할 수 있다”(291쪽)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홍 교수의 알튀세르 논의에 관해 몇 가지만 검토해보겠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점은 알튀세르가 “점차적으로 스피노자로부터 멀어지고 헤겔 철학에 다가서고 있다”(278쪽)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홍 교수가 의거하는 텍스트 상의 논거는 두 가지뿐이며, 설득력도 부족하다는 점이다. 하나는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 “스피노자에게는 헤겔이 마르크스에게 준 것, 곧 모순이 항상 결여돼 있다”(Solitude de Machiavel et autres textes, PUF, 1998, p. 188)고 말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나는 『신학정치론』에서 ‘세 번째 유형의 인식’, 즉 개별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대상을 파악하게 하는 가장 높은 형태의 인식에 대한 가장 명백한, 그러나 가장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해석의 예를 발견했다(나도 인정해야 했듯이 그것은 스피노자에 대한 헤겔적인 해석이었다).”(홍 교수의 글 279쪽에서 재인용)


첫 번째 논거의 경우 홍 교수의 생각과 달리 알튀세르가 스피노자를 포기하고 헤겔의 입장을 대신 택했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1) 알튀세르는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스피노자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 기원도 종말도 없는 이 사상보다 더 유물론적인 것은 없다. 나는 훗날 바로 이 사상에서, 역사와 진리를 목적도 없고 (……) 주체도 없는 (……) 과정이라고 한 나의 명제를 끌어내게 됐다. 왜냐하면 목적을 근원적 원인으로(근원과 목적이 거울에 의해 반사되는 것으로) 파악하기를 거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유물론적으로 사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247쪽) 알튀세르에게 스피노자가 중요하다면 그것은 그가 엄밀한 의미의 유물론적 사상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2) 어떤 유물론일까? 알튀세르는 홍 교수가 준거하는 『자기비판의 요소들』 다음 해에 발표된 「철학에서 유물론자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나는 사실 맑스주의 변증법의 문제는 유물론의 우위에 대한 변증법의 종속이라는 조건 하에서만 (……) 제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그[헤겔]는 (……) “변증법을 신비화했다.” 그런데 사실 헤겔의 신비화는 그 자체 에피쿠로스 이후 또는 아마도 그 이전부터 항상 나타났던 유물론(존재가 됐든 주체 또는 의미가 됐든 간에 일체의 기원의 철학과 거리를 둠으로써만 정립될 수 있는) 과 변증법 간의 항상적인 관계를 입증하고 있다.”(『아미엥에서의 주장』, 147쪽―번역은 수정) 알튀세르에게 유물론은 기원(과 목적)의 철학에 대한 거부를 통해서만 정립되며, 이것이 바로 그가 스피노자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알튀세르는 이른바 유고들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유고들의 핵심 주제 중 하나는 이른바 ‘우발적 유물론’ 또는 ‘마주침의 유물론’에 관한 사고다. 그리고 알튀세르에게 이러한 유물론은 “주체(……)의 유물론이 아니라, 지정할 수 없는 목적이 없이 자기 발전의 질서를 지배하는 (주체 없는) 과정의 유물론”(『철학에 대하여』 동문선, 1996, 40쪽)이다. 심지어 그는 한 대목에서는 마르크스의 최종 심급 개념을 재해석하면서 변증법과 우발성을 대립시키고 있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서설』에서,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형태들이 역사적으로 선행하는가 여부를 검토하면서, “경우에 따라 다르다 a d e、-pend”고 썼어요. 경우에 따라 다르다, 이것은 우발적인 말이지 변증법적인 말이 아닙니다.”(같은 책, 45쪽―번역은 수정) 따라서 「유물론의 유일한 전통」(1993)이 스피노자와 마키아벨리 두 사람에게 절반씩 할애돼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홍 교수는 어떤 근거로 알튀세르가 “점차적으로 스피노자로부터 멀어지고 헤겔 철학에 다가서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두 번째 논거의 경우에 대해서는 여유가 없으므로 한 마디만 지적해두자. 제 3종의 인식의 문제에서 알튀세르가 보편적 개별성이라는 범주를 가지고 사고하고 있으며, 이 점에서 그는 헤겔의 관점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스피노자로부터 멀어지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그것은 알튀세르가 줄곧 강조해왔던 것처럼 인식의 문제에서 스피노자와 헤겔은 데카르트와 칸트의 초월론적 문제설정에 맞서 공통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입증해주는 사례일 뿐이다. 


논증의 빈곤함도 문제이긴 하지만 이 글의 더 큰 문제점은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와 자의적인 재단이 다수 엿보인다는 점이다. 가령 홍 교수는 “교조적인 맑스주의자들이”(251쪽) 자신과 다른 입장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비판했던 오류를 범했던 것”을 준엄하게 꾸짖으면서 “생산적인 학문적 토론”(291쪽)을 위해서는 선/악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좀 더 공정하고 관대한 태도를 가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대목을 읽고 있노라면 홍 교수는 관대하고 공정한 학자가 아닐까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바로 다음 대목에서 홍 교수는 “알튀세르와 정신분석을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려는 이러한 입장은 알튀세르 이론을 ‘정치편의주의’로 축소시킬 뿐만 아니라, 알튀세르와 같은 기품 있는 철학자를 ‘정치꾼’으로 만드는 오류를 범하고 있”(253쪽)다고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다. 요컨대 “알튀세르와 정신분석을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려는 이러한 입장”은 학문보다는 정치편의주의에 몰두하는 정치꾼과 다르지 않다는 것, 다시 말해 생산적인 학문적 토론의 적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관대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알튀세르와 정신분석을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려 했을까. 홍 교수는 그 당사자로 필자를 지목하면서 각주에서 필자의 논문 368쪽을 참조하라고 해놓았다. 문제의 페이지를 참조해보면 독자들은 이러한 전가가 얼마나 엉뚱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홍 교수가 제시한 「라캉과 알튀세르」(김상환ㆍ홍준기 엮음, 『라깡의 재탄생』, 창작과비평, 2002)라는 글에서 필자의 논점 중 하나는 라캉과 알튀세르 사이의 관계를 일방적인 적용이나 차용의 문제로 보아서는 안되며 “알튀세르의 이니셔티브”를 존중해야 하고 “라캉과 알튀세르의 관계는 일차적으로 알튀세르의 이론작업의 맥락 내에서 평가돼야”(앞의 책, 358쪽)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알튀세르의 ‘과잉결정(surd’etermination)’ 개념은 프로이트의 ‘다중결정(Uberdeterminierung)’을 “직접 적용한 것이 아니라, 이 개념[다중결정]에 새로운 개념 규정들을 보태서 이 개념을 대체하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같은 책, 370쪽)낸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고, 또한 “알튀세르는 상상적 왜곡의 측면에서 라캉의 문제설정, 라캉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지만 이러한 “활용을 지휘하고 있는 것은 역시 스피노자-마르크스적인 문제설정”(같은 책, 385쪽)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어떤 식으로 이해하든 이는 알튀세르가 라캉과 무관하다거나 정신분석과 무관하다는 뜻으로 읽을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그는 마슈레와 들뢰즈에 대해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헤겔 철학의 대안으로서 특히 초기에 스피노자 철학을 원용한 알튀세르에 의해 영향 받은 알튀세르의 제자들(특히 마슈레) 그리고 들뢰즈의 영향으로 ‘모순’이라는 범주를 불필요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국내의 프랑스 철학 연구자들 사이에 생겨나는 경향이 있다”(257쪽)고 일갈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과연 스피노자 철학은 ‘무조건 좋은’ 철학이고 헤겔 철학은 ‘무조건’ 나쁜 철학인가?”(같은 곳) 필자로서는 이런 식의 발상이 어떻게 가능한지 잘 알 수가 없다. 마슈레의 『헤겔 또는 스피노자』는 어떤 의미에서도 “무조건 좋은” 스피노자와 “무조건 나쁜” 헤겔을 구별하려는 책으로 읽을 수는 없다. 제목에서 쓰이는 “또는”이라는 단어(불어로는 ou 영어로 하면 or)는 마슈레 자신이 설명하듯이 일차적으로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동일성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곧 스피노자와 헤겔은 특히 인식에 대한 법적ㆍ초월론적 문제설정을 비판하는 데서 공통적이며, 유한과 무한 사이의 단순한 대립을 넘어서려고 한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두 사람 사이의 차이 및 상이한 입장은 이러한 공통성 위에서 비로소 식별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단순한 양자택일을 좋아하는 홍 교수의 눈에는 이것이 “무조건 좋은” 스피노자와 “무조건 나쁜” 헤겔을 선택해야 하는 문제로 보이는 것 같다.
그러니 도대체 선/악 이분법에 사로잡혀 동료 학자들을 정치꾼과 다를 바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이는 누구인가.



충분한 이론적 성찰 없는 문자적 추종을 경계한다
[반론] <교수신문> 495호 진태원 교수의 글을 읽고

(홍준기 서울시립대)


지난호 교수신문은 <진보평론>에 실린 홍준기 서울시립대 HK 교수의 알튀세르-들뢰즈 국내 수용 비판 글에 대한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연구교수(철학)의 반박문을 실은 바 있다. 국내의 알튀세르 및 들뢰즈 수용 문화가 反 헤겔주의를 기치로 지극히 일면적이고 교조적이라는 홍 교수의 비판에, 진 교수는 동료학자를 정치꾼으로 매도하지 말라며 홍 교수가 문제를 호도하고 있다고 조목조목 지적했다. 이번 호에서는 진 교수의 이러한 반박에 대해 홍 교수의 반론을 게재한다.

진태원 교수의 반박문을 읽은 후 필자는 상당히 당혹스러운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진 교수의 글이 인신공격에 가까운 원색적인 글이었을 뿐만 아니라, 마치 필자의 논문이 진 교수의 글을 비판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삼고 있는 양, 필자의 글의 내용과 범위, 문제의식을 완전히 축소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재반론문의 서두에서 우선 다음 사실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필자는 알튀세르 맑시즘의 모습을 되찾고, 들뢰즈 철학의 反정신분석 및 反헤겔적 입장의 문제점을 지적할 뿐만 아니라 정신분석이 정치적으로도 진보적 입장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 논문을 쓴 것이지 진 교수의 편협한 알튀세르 문헌학을 비판하기 위해 그 논문을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진 교수는 알튀세르, 라캉, 들뢰즈, 스피노자, 헤겔 등에 대해 필자가 전반적으로 제기한 복잡한 논의를 ‘알튀세르 문헌학’의 문제로 축소시켜 버림으로써 필자가 쓴 글의 핵심적 내용을 아전인수 격으로 흐려버렸다.

요컨대, 진 교수는 필자가 전반적으로 제기한 현대철학의 문제에 진지하게 학문적 접근을 하기보다는, 필자가 지나가면서 진 교수에 대해 제기한 몇 가지 비판에 대해 자신을 옹호하기에 급급한 편협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필자가 진 교수를 비판하기 위해 그 글을 썼다는 듯이 말이다.

물론, 필자가 그 논문에서 진 교수의 알튀세르 해석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반론을 제기한 이유는 진 교수가 그 이전에 필자의 다른 글에 대해 비판을 제기한 바 있고 따라서 필자는 그것에 대해 일정 정도 대답을 해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진 교수가 필자의 글에 대해 제기했던 비판은 전혀 새로운 것이 없는 진부한 것이며, 80년대 때부터 ‘당연한’ 것으로 간주돼 오던 입장(알튀세르를 정신분석학으로부터 분리시키기)을 반복한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진 교수는 마치 자신이 알튀세르로부터 정신분석을 분리시키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듯한 ‘사후적’ 제스처를 취한다. 그리고 그는 마슈레를 인용하면서 스피노자와 헤겔과의 관계를 배타적이지 않은 관계로 설명했다는 듯 한 외양을 각인시키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마슈레의 책을 실제로 면밀히 읽어보면 헤겔은 사실상 스피노자에 흡수돼야 할 철학자이며, 따라서 기껏해야 모순은 부차적 범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정확히 이러한 마슈레의 견해가 알튀세르의 입장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 필자가 제시한 주장 중 하나이다. 즉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적 관점에서는 모순을 사유할 수 없으므로, 스피노자에 대한 헤겔적 해석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 교수가 알튀세르와 정신분석학을 분리시키기를 원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진 교수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차용(알튀세르의 정신분석 차용)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선택적인 것이며, 따라서 실용적인 이유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김상환 · 홍준기 편, 『라깡의 재탄생』, p. 368, 강조는 원문). 하지만 알튀세르는 선택적이고 실용적인 이유가 아니라 ‘필연적이고 본질적인 이유’로 정신분석을 원용했다고 분명하게 말한 바 있지 않은가. 알튀세르는 『맑스를 위하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신)분석적 개념의 맑스주의 이론으로의 전이는 ‘임의적인’ 차용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두 경우(맑스주의와 정신분석)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같은 이론적 문제이기 때문이다.”(작은 따옴표 첨가는 필자). 알튀세르가 실제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도 왜 ‘알튀세르 문헌’을 열심히 읽는 진교수가 굳이 알튀세르의 의도를 정반대로 왜곡해 전달하는가. 필자가 다른 곳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이러한 식의 오도된 설명은 알튀세르와 같은 ‘기품 있는’ 철학자를 ‘정치꾼’으로 만드는 결과를 낳을 위험이 있다. 

필자의 논문에 대한 진 교수의 왜곡은 계속된다. 그는 필자가 “알튀세르가 스피노자를 포기하고 헤겔의 입장을 대신 택했다”고 주장했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하지만 필자가 주장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알튀세르가 스피노자에 대한 헤겔적 해석으로 나아갔다라는 것, 달리 말하면 알튀세르는 과도한 반헤겔주의로부터 벗어났다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정신분석의 혁명성을 완전하게 인정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렇게 쓴 바 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알튀세르가 스피노자를 완전히 떠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알튀세르가 “나는 스피노자와 결별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또한 알튀세르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나는 내 환상을 거치고, 스피노자와 마키아벨리를 거쳐서 내 첫째가는 관심사가 아니었던 적이 없던 프로이트와 맑스로 힘들게 나아갔다.”

진 교수의 문제의식이 편협하다는 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도 바로 여기다. 필자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스피노자와 헤겔, 혹은 스피노자와 정신분석을 대립시켜 사유하는 것이 학문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얼마나 무익하다는 것인가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임에도, 진 교수는 이러한 쟁점에 대해, 즉 알튀세르를 넘어서 들뢰즈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이러한 가장 중요한 쟁점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의 ‘충만한’ 세계관을 지지하는 사람은 진보적이고, 라깡 혹은 헤겔처럼 결여 혹은 부정성이라는 단어를 행여나 입에 올리는 사람은 무조건 ‘보수적’인가. 필자는 라깡과 헤겔이 단순히 ‘결여’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만족과 결여의 변증법을 얘기했다는 점(들뢰즈는 라깡 이론의 이러한 점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을 상세히 밝힌 바 있으며, 오히려 만족만을 강조하는 들뢰즈적 스피노자주의는 정신병이라는 하나의 실존적 존재형태를 특권화하는 배타적인 입장이라는 것을 설명해왔다.

요컨대, 들뢰즈는 이러한 많은 쟁점들을 극히 단순화시키고, 스피노자와 정신분석, 즉 선과 악이라는 대립구도를 설정하는 문제 있는 철학자가 아닌가(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들뢰즈의 모든 것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진 교수는 이러한 필자의 주장을 분명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필자가 선악 구도에 사로잡힌 사람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하며, 인신공격에 가까운 수준으로 비아냥거린다. 이쯤 되면 진교수의 반론은 학문적 토론이 아니라 ‘대자보’의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는 생각조차 든다. 어쨌든 진 교수는 지면이 부족해서라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으나, 정말로 스피노자와 헤겔, 들뢰즈와 라깡이라는 선악구도를 만들어낸 장본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알튀세르는 스피노자를 버리지 않았다는 (이미 필자도 알고 있는) 극히 지엽적인 문제를 설명하는 데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보다 열린 마음과 프로페셔널한 학문적 자세가 아쉽다.

 형식적으로 볼 때 이 글은 진 교수에 대한 반박문이므로, 그럴만한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그에 대한 대답으로 아까운 지면을 모두 써 버렸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필자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글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다. 들뢰즈 철학(그리고 알튀세르 철학에 대한 진부한 견해)에 대한, 충분한 이론적 성찰 없는 문자적 추종은 민주주의의 동지를 주적으로 간주할 수 있는 정치적 오류는 물론 생산적인 학문적 토론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학문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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