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해야 하는 말은 안 하는 게 좋습니다. 지금처럼요. 저 아시나요? 모르는 사람의 삶에 대해 너무 함부로 말씀하시네요.
그리고 일몽님의 댓글은 마치 저를 가르치려드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의도한 게 아니라면 댓글 다실 때 유념해 주세요. 의도하신 거라면, 저는 일몽님과 대화는 사양하겠습니다 저는 대화를 하고 싶지 훈계를 듣고 싶은 건 아니니까요.
끝으로 일몽님은 제 글을 제대로 읽지 않으신 거 같네요. 아님 제가 제 생각을 제대로 쓰지 못했거나요. 저는 인간성에 관심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쁜놈인지, 어떤 사람이 착한놈인지 관심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 구조를 살피고 싶은 거고, 진보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일몽님 말처럼 지금 보리 같은 구조와 사고방식에선 제가 사장이 되어도 마찬가지일테니까요.
님께서 불쾌하게 생각하시는 건 제가 "님은 삶의 힘겨움을 모르시는 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라고 말한 것 때문인 것 같아요. 삶의 힘겨움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그동안 삶의 힘겨움을 몰랐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1년 전부터 식당에서 식기세척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일하고 있는 곳에서는 기계의 열기가 너무 뜨거워서 속옷까지 다 젖지만 속옷을 갖고 다녀야됩니다. 양말도 젖기 때문에 양말도 갖고 다녀야 됩니다. 샤워실은 당연히 없습니다. 하루 7시간 일하는데 누구 하나 저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람 없습니다. 그냥 7시간 내내 죽어라 접시만 닦다가 나오면 됩니다. 전에 다니던 직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퇴근할 때 해방감을 느낀다는 겁니다. 매일같이 감옥에 출근하고 감옥에서 퇴근하는 기분입니다. 사무실에서 일할 땐 담배도 피울 수 있었고 잠깐 바람 쐬러 나갈 수도 있었고 일이 없을 땐 사무실에서 영화도 봤습니다. 지금은 쉴 때도 앉아 있을 데가 없어서 서 있어야 하고 직원들이 마실 수 있는 정수기도 없기 때문에 홀에서 일하는 직원에게 물을 부탁해야됩니다. 전 제가 삶의 힘겨움을 몰랐다고 생각합니다. 말로는 노동자 노동자 하고 다녔지만 전 노동자의 삶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하지만 단체 상근자라고 해서 왜 노동자가 아니겠어요. 생계를 위해서 그 일 하는건데. 하지만 단체 상근자들은 박봉에 과도노동을 해도 최소한의 자유는 누릴 수 있습니다. 단체에서 상근할 때는 그걸 몰랐습니다. 노동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모르니까 그게 최소한의 인간적 삶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제 개인적 추측일 뿐입니다. 님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님이 정말 삶의 힘겨움을 아시는 분이라면 제 말이 그리 불쾌하게 느껴지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보리 출판사가 아무리 형편없는데라고 해도 육체노동이나 손님에게 굽실대야 하는 서비스직은 아닙니다. 육체노동은 인간체력의 한계를 요구합니다. 매일같이 운동선수처럼 전력투구해야 하는 곳입니다. 제가 하는 일 오래 한 사람들은 온몸이 성한 사람이 없습니다. 저도 지금 기계 소음때문에 귀가 멍멍해서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게 힘들어요. 헤드폰을 끼면 귀가 아파서. 그게 제 유일한 낙인데. 이런 말들이 가르치려고 하는 것처럼 들린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 역시 심란할 때가 있습니다. 전 이주노동자들 체불임금상담을 하면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공장들은 한 번 보면 잊을 수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분노했습니다. 하지만 전 그 살인적 노동을 몸으로 체험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삶의 힘겨움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힘겨운 삶의 전쟁터가 누군가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일 수도 있습니다. 님이 어느 직장을 가더라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겁니다. 회사의 목적이 수익창출인 한. 하지만 왜 많은 사람들이 대기업 정규직들의 임금인상 요구에 부정적인지, 심지어 대기업 비정규직들의 정규직화 요구에 대해서도 무관심한지 한번은 생각을 해보셨을겁니다. 공감대를 형성하기 힘들어요. 마찬가지로 보리출판사에서 있었던 일이 우리 사회의 진보의 문제를 보여준다는 님의 글 역시 공감하기 힘들어요. 오마이뉴스나 알라딘처럼 운동권이 만든 회사가 다른 회사와는 달라야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노동자 대표가 국회에 들어가면 변하는 것처럼 개인의 가치관을 넘어서는 자본의 논리, 정치의 논리가 있는 겁니다. 개인의 양심이 문제가 아니라 양심적으로 살면 망하는 사회구조가 문제인 겁니다. 전 제 생각을 말씀드렸습니다. 대화가 아니라 훈계라고 생각하신다면 그렇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저는 님에게 훈계를 했습니다.
"자기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라들이, 양심과 다른 행동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는 것, 그게 내가 지금 생각하는 진보의 가장 큰 조건이다."
저는 이런 요구를 타인에게 요구하는 분이 어떤 분인지 좀 궁금했어요. 그런데 글로는 사실 사람을 잘 모르죠. 사람은 글보다는 직접 대화를 나눠봐야하는데. 독선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단순한 호기심이었어요. 진보를 말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당연히 요지는 있을 수 없죠.
독선적이라는건 딴 게 아닙니다. 이 블로그는 무화과님의 블로그입니다. 이 블로그에서는 무슨 말을 하든 무화과님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전 그럴 수 없습니다. 무화과님은 제게 말했습니다. 댓글 달 때 유념하라고. 아니면 대화는 사양하겠다고. 그리고 그 뒤엔 저보고 왜 남의 블로그에서 깽판치냐고 말했습니다. 제가 뭘 어떻게 했길래 이런 말을 들어야 하나요? 다른 사이트 유저들은 호전적이긴 해도 이 정도의 댓글 가지고 저렇게 과민반응하지 않아요. 제가 만약 무화과님의 글에 호의적인 댓글을 달았다면 이런 대접을 받을까요. 자기가 하는건 비판이고 남이 하는건 트집인가요? 이런 사람 보면 무서워요.
"맘에 안 드는 직원 징계하고, 못 살게 굴어서 쫓아내고, 수습사원 맘대로 해고하는 거는 나쁜 일이지만, 대한민국 많은 사장들이 하는 짓이다. 물론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윤구병 사장이 그런 짓을 하는 것은 노동자로서 분노할만한 일이지만, 원래 무딘 성격에 스트레스 잘 안 받는 내가 그것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는 아니다. 내가 보리출판사를 다니면서 주로 분노한 것은 윤구병 사장이 하는 나쁜 짓 때문이 아니라, 나쁜 짓을 하면서 자기를 진보적인 사람으로 포장하는 위선과 나쁜짓을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로 진보적인 가치를 들먹이 것이 너무나 역겨웠기 때문이다."
그 밑에 쓰신 글도 읽어봤지만, 대한민국 사장들이 다 하는 짓이니 특별한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비정규직은 나쁘니까 재계약 못하겠다", 비정규직 짤라놓고 "우리 회사엔 비정규직 없다"고 말하는 뻔뻔스러움이겠죠.
이상하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님과 대화를 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하지만 님이 더 이상 저와 대화하고 싶은 생각이 없더라도 그건 백프로 제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바닥을 홀가분하게 떠났기 때문에 말씀드리지만, 님도 이 바닥을 떠나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다 그래요. 하나같이 권위적이고 위선적입니다. 게다가 비열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가장 악랄한 관리자는 다름 아닌 제가 일했던 단체와 같은 사무실을 썼던 한 노동조합의 사무국장이었습니다. 저는 2년 동안 그가 무슨 짓을 하는지 똑똑히 봤습니다. 그래도 그는 밖에서는 사람 좋고 실력 있는 사람으로 대우받았습니다.
님은 인간성 문제를 제기하시는 것 같습니다. 똑같이 착취해서 치부하면서 진보라는 가면을 쓴 사람들의 위선. 그런 사람 밑에서 일하는 사람의 스트레스는 아마 어마어마할 겁니다. 님의 글을 읽다가 문득 제 친구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제 친구는 몇년 동안 계속 한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한번도 사장 욕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친구는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도 여기 오기 전엔 계속 떠돌아다녔다. 옆에 있는 공장 보면 사람 바뀌는데는 맨날 바뀐다. 사장이 하도 갈궈서 사람이 붙어있질 못한다. 우리 공장 오면 누가 사장인지 모른다. 그냥 섞여서 같이 일하는데 일은 무식하게 많지만 이래라 저래라 하질 않는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오래 다닌다.
님은 이런 사장 있는데서 이런 일 하셔야 됩니다. 사장도 말이 없고 일 자체도 말이 별로 필요 없는 직장. 제 친구는 늘 만나도 일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몸이 피곤한거야 스무살 때부터 계속 해온 일인데 특별히 힘들겠어요. 그래도 친구는 가끔씩 말합니다. 애가 아직 어리고 대학 들어갈 때까진 일을 해야하는데.. 친구는 40대 중반이고 50 넘으면 그 일 하기 힘들어요. 비정규직만 있다는 대기업의 그 하청업체 다니는 노동자들이 제 친구보다 일은 덜 하고 돈은 더 받습니다. 다만 고용이 불안하다는게 문제인데 사실 고용이 불안한 건 대기업 정규직도 마찬가지입니다.
감히 말씀드리지만 님은 삶의 힘겨움을 모르시는 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노동자는 자신을 고용한 자가 누구든 상관이 없는 겁니다. 제 친구의 경우처럼 사장이 못살게굴면 못견뎌서 떠나가고 사장이 좋은 사람이면 몇년이고 잘 다니고 이런 직장은 영세사업장입니다. 저는 지난 1년 동안 여러 직장을 전전했지만 맨 처음 들어갔던 한 군데 빼고는 사장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아무도 이건희를 삼성의 사장이라고 하지 않듯이 대기업의 소유구조는 복잡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님이 다녔던 회사가 윤구병씨 소유의 보리출판사가 아니면 누가 이 글에 관심을 가질 것이며 구굴절절 할 말이 뭐 그렇게 많겠습니까. 청소나 경비 하시는 분들이 더 할 말이 많겠지만 그런 분들은 블로그도 안하고 설령 블로그를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관심을 가질 거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제가 전에 만난 50대의 여성노동자 두 분은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쇼핑몰에서 청소를 하셨는데 식사할 공간도 없어서 화장실에서 식사를 하셨답니다. 이런 짓은 인간에 대한 모욕이며 사실 악마짓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미국의 노동운동이 망했다고 해도 미국은 서비스노동자 조직화에 성공했습니다. 게다가 미국 서비스노동자들은 이주노동자들이 많아서 조직화가 훨씬 더 힘든데도 미국 노동총연맹이 수년간 돈과 시간을 투자해서 조직가들을 양성하고 노동자들을 조직했습니다. 지금 가장 조직율이 높은 곳이 서비스연맹입니다. 우리나라 진보는 이런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한 겁니다. 님이 말씀하신 위선이나 양심의 사망에서 원인을 찾으시면 안됩니다.
저도 감히 말씀드리겠지만 저는 도대체 일몽님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너보다 훨씬 힘들게 사는 사람들도 있으니 너처럼 몸 쓰는 직업도 아니고 사회적으로도 주목받는 일을 하는 사람은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그냥 닥치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세상에 나보다 불행한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다면 난 아무리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닥치고 있어야 한다고요? 그게 무슨 진보고 민주주의입니까. 흔한 독재자의 궤변이지. 중요한건 크건 작건 자신의 자리에서 부당함과 맞서 싸우는 것이라는 당연한 말을 치고 있는 제 손가락이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프랑스 대혁명조차 배부른 자들의 밥상투정 이상은 되지 못하겠군요. 엄연히 농노들이 있는데 무슨 놈의 학자들과 부르주아들이 감히 지들이 나서서 혁명을 하겠다고 지랄이란 말입니까 지랄이...
대답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야매하긴 합니다만...저를 포함해서 '그런 자들'이 지금처럼'만' 살아도 세상은 바뀝니다. 아니 바뀌어 갑니다. 문제는 지금보다 '더' 뭘 하려고 하는 때에 발생합니다. '그런 자들'의 대부분 사람들은 뭘 덜 하려고 하기보다는 뭘 더 하려고 애를 씁니다. 더 가지려 하고 더 사려 하고 더 쓰려 하고 더 떠들기를 원하고 더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들의 인정욕구, 에비에미도 못 말립니다.
님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 지금처럼만 살면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일상이 계속될 뿐입니다. 님이 언급하신 '그런 자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제 얘길 하고 싶은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상관은 없습니다. 전 더 가지려고 하거나 더 사려고 하거나 더 쓰려고 하진 않습니다. 돈이 많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더 떠들고 싶고 더 인정받고 싶습니다. 제 인정욕구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나요.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못마땅하겠죠. 인정욕구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못봤습니다. 아마 있다면 너무 무시당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자존감이 없는 사람일겁니다. 하지만 인정욕구가 유달리 심한 사람은 있을겁니다. 그런 사람들때문에 살기가 힘들다는 얘긴 한번도 못들어봤어요. 누군가의 인정욕구는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인정욕구의 실현이 방해될 때만 힘들뿐. 그들은 그들의 삶의 방식이 있고 나는 나의 삶의 방식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항상 문제는 같은 걸 욕망할 때 생깁니다. 누군 가지는데 나는 못가지고 누군 사는데 나는 못사고 누군 쓰는데 나는 못쓰고. 항상 이런 문제들입니다. 님이 정말 소비에 관심이 없다면 그들은 아무 문제되지 않습니다.
꽃개님의 글을 읽고 글을 남깁니다. 하지만 꽃개님에게 답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꽃개님의 글은 일상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제가 하는 생각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가 누구를 비난하거나 비판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꽃개님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꽃개님은 "그런 자들에게 일상에서, 삶에서 진보적일 것을 바라는 것은, ... 죽은 나무에서 꽃이 피는 것을 바라는 것처럼 무망해" 보인다고 하십니다. 그런 자들은 노동과 생존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작은 출판사의 간부직원들이거나 대기업의 정규직 사원들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면 그런 자들이 대부분인 이 사회를 어떻게 바꾸시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꿀 생각이 아예 없습니다. 그래도 바꿀 생각이 있다고 생각하신 분일테니 묻는 겁니까. 그런 자들에게 진보를 바랄 수는 없으니 기대할 것은 노동과 생존의 세계에서 벗어난 자들입니다. 그럼 그들은 누구입니까. 비정규직과 같은 작업장에서 일하면서 비정규직의 고통을 모른 척하고 오히려 그들을 머슴 대하듯이 하며 그들을 자신들의 방패막이로 생각하는 정규직들을 그렇게 만든게 누구입니까. 따지고 보면 자본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족때문입니다. 그럼 보리출판사에서 자기 자리 지키려고 매출에 혈안이 되서 평직원들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간부들은 가족 때문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진보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들과 같이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무화과님의 글 제목인 "'진보'를 다시 생각한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것입니다. 제가 에둘러서 진보적인 사람들도 진보적이지 않다고 항변한 것은 제 개인적 경험에 따른 일종의 환멸을 토로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정작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사람은 근본적으로 같다는 거였습니다. 꽃개님이 "그런 자들"이라고 호명한 사람들과 꽃개님이 얼마나 다를 수 있을까요.
파시스트적 감성은 매우 자연적이며, 직적접인 감성입니다. 부르디외는 파시스트적 감성이 농촌적 감성에 기초한다고 합니다. 순박하고 착한 감성이라는 겁니다. 그럼 이 감성은 무엇일까요. 자기 존재에 자족하는 감성. 자기 자신, 자기와 가까운 것, 자기를 둘러싼 것 이외에는 모두 배척하는 감성. 순박한 이 감성에게는 자신의 세계를 벗어나는 모든 것은 두려운 것이고 그래서 악한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진보적인 사람들은 저를 포함해서 거의 대부분 이런 감성에 물들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일베를 대하는 태도. 그들을 이해하려고 하고 그들을 우리라고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과 같이 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진보적인 사람들은 굉장히 폐쇄적인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노동조합 같은데서 대중운동 하는 사람들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진보적인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족적인 활동을 하지 대중운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대중이 낯설어요. 그래서 나꼼수도 이해하지 못하고 일베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제가 진보적인 사람들을 비난했다고 해서 특별히 그들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당신들도 그들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맑스는 자본가들이 경쟁의 외적 강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자본가들을 이해하고 같이 싸우자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와 같이 생존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관리자들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세상을 바꿀건가요. 진보는 취미생활인가요.
무화과님. 참 좋은 글입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양심대로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긴 합니다. 일단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주변엔 사상과 생각대로 사는 사람이 얼마 없긴 없습니다. 밖에서 노동해방과 진보 혹은 사회주의를 떠들어도 집에 가면 양말 한짝이나마 제대로 벗어서 세탁기에 넣는 일조차 해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생태와 환경을 걱정하며 일회용컵을 쓰는 사람을 벌레보듯 하는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개인 승용차를 '몰고' 다닙니다. 그래서 누군가 진보란 삶의 방식, 양식이라던 그 말에 저는 동의하는 편입니다. 보리나 그린비나 진보이냐 아니냐, 그건 제게 중요하지 않습니다만 그들은 '건강(해 보이는)인문 사상'이라는 상품을 파는 제조회사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상품은 그럴싸한 지적 욕구를 소비하고 싶은 자들에 의해 지속되고 있는 것 뿐이겠지요. 그런 자들에게 일상에서, 삶에서 진보적일 것을 바라는 것은, 너희들이 만들고 소비하고 읽는 책처럼 살 것을 바라는 것은 글쎄요, 죽은 나무에서 꽃이 피는 것을 바라는 것처럼 무망해 보입니다. 진보신당 같은 데는 제게 그저 덜자란 민주당, 같은 느낌을 줍니다만 내 삶의 당대에선 그나마 그게 차선이기 때문에 관심을 갖는 편입니다. 대상화는 이성적인 사고를 돕기는 하지만 마음을 내어 관계를 맺는 데에는 다소 제한적입니다. 지킬 게 많고 갖고 싶은 게 많고 아는 척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면 그들이 왜 그렇게 사는지 아예 이해가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인정하고 이해하자는 건 아니지요. 주절주절 말이 많았습니다만 좋은 글 잘 읽고 마음에 담아 갑니다. 고마워요.
잘 읽었습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글이었습니다. 보리출판사나 윤구병씨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서 찾아보니 저도 감명깊게 읽은 헬렌 니어링의 책을 출판한 곳이더군요. 그외에도 좋은 책을 많이 낸 곳 같습니다.
그런데 왜 이 글의 제목이 "'진보'를 다시 생각하다"일까요? 이 글만 읽고 단정짓기는 힘들지만, 보리출판사에서 벌어진 일은 도대체 누가 진보적이냐의 문제는 아닙니다. 님은 이 글 마지막에서 '양심'을 거론합니다. 양심에 어긋나는 일에는 복종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진보라고 주장하십니다. 그렇다면 간부들은 양심적이지 않기 때문에 진보적이 아닌가요? 님은 이렇게 주장하십니다.
"그러다가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가는 회사 결정이 날 때면 굉장히 열성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보리출판사에서 벌어진 일은 진보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의 의지를 타인에게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강자(간부집단)와 약자(평직원집단) 사이의 대립일 뿐입니다. 이해관계의 문제이며, 자리의 문제입니다. 간부집단과 평직원집단의 위치가 뒤바뀌었다고 상상해봅시다. 평직원들 역시 아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며, 복종을 강요당하는 간부들 역시 마찬가지로 저항할 것입니다. 타인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복종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구라도 저항합니다. 다만 보리출판사는 진보적이라는 사장과 간부집단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님처럼 진보의 문제로 해석할 가능성이 있을 뿐입니다.
진보정당에 대해서 비판적인 분 중에 어느 한 분이 그러시더군요. 부르주아 정당보다 더 심각한 권력투쟁. 이권다툼이 벌어지는 곳에서 양심 운운하는 것은 정말이지 한가한 일입니다. 지겹도록 그런 일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다 떠납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권력투쟁에서 패배했거나 주변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을 뿐, 본인이 당사자가 되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제가 보리출판사에서 겪은 일을 굳이 '진보'로 연결시켜 생각했던 까닭은, 제 경험이 단지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였습니다. 윤구병 대표나 보리 경영진들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진보가 가진 문제점이 보리출판사에서 드러났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당장 그린비 출판사에서 지금 일어나는 일들만 보더라도, 혹은 다른 여러 진보를 표방하는 곳들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지요. 저는 이게 단순히 집단 간의 권력투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진 권력을 성찰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 진보의 문제점을 극복해야한다는 생각입니다.
윤구병과 보리 경영진이 나쁜 사람들이다. 이렇게 말해버리면 저도 편하지만, 그냥 제 개인적인 화풀이 밖에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윤구병과 경영진이 물러나고, 다른 착한 사람이 경영진으로 온다고 해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구조에 대한 고민, 자기가 가진 권력을 성찰 하는 것, 이런 게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양심 운운하는 일이 어떤 일보다도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큐 <송환>을 보면 김동원 감독의 이런 나레이션이 나오죠. "비전향 장기수들이 전향서를 거부할 수 있던 것은, 이념이나 사상의 힘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오기 아니었을까..." 저는 이 오기가 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심은 한가한 일이 아니고,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걸고 지키고 싶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도 회사 다닐 적에, 복지고 임금이고 다 양보할 수 있었지만, 잘못하지 않은 것을 잘못했다고 말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죽어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게 양심이 아닐까요?
목숨을 걸고 양심을 지키는 일이 한가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푸코나 맑스를 몰라도,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가 뭐가 문제인지는 누구나 알 수 있다. 아는 것을,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말하는 것, 그건 양심의 힘이다. 모두가 알아도 모두가 그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자기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라들이, 양심과 다른 행동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는 것, 그게 내가 지금 생각하는 진보의 가장 큰 조건이다."
수많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더 이상 이렇게는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보통 386세대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밑바닥 출신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님이 말한 양심에 따라 저항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양심은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려있을 때는 왜 그렇게 작동하지 않나요? 오히려 자신에게 이로운 것이 양심에 옳고 자신에게 해로운 것이 양심에 어긋나기 때문 아닐까요? 제가 보기에 운동하는 사람들은 양심에 따라 행동하지 않습니다. 거창하게 권력 운운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 편 감싸주기는 어디나 마찬가지일뿐 진보적인 사람들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르지 않습니다. 친구가 잘못 했을 때 그냥 넘어가주지 않으면 자긴 친구를 잃거나 혹은 친구들 사이에서 소외되거나 혹은 자기가 잘못 했을 때 감싸줄 사람이 없습니다. 권력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양심에 따라 사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모두 약자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말할 수 없습니다. 남의 눈치 보면서 적당히 사는 것이 처세술입니다. 진보적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계가 걸려 있는 직장이고 한 두 사람 거치면 다 알고 지내는 좁은 바닥입니다. 그들에게 양심에 따라 살라는 것은 매우 부당한 요구입니다. 그들은 남들의 투쟁에나 들러리 서지 절대로 자신들의 부당함에는 저항하지 않습니다.
지나가는 말이지만, 80년 5월 광주에서 끝까지 남아서 싸우던 사람들 중에 학생, 지식인 몇명이나 됩니까. 거의 대부분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였어요. 어떤 사람은 교사였는데 도청에 모이라고 유인물 뿌려놓고서 부인이 만류하는 바람에 자긴 안갔답니다. 왜 양심에 따라 살지 못하고 저항 안하겠어요. 자긴 잃는게 더 많으니까 그렇지. 손해보는 짓은 안하는게 인간입니다. 양심에 따라 살라는건 손해보면서 살라는 얘긴데 그건 어디까지나 잃을게 없는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말입니다.
노파심에 댓글을 달자면, 이 글은 노동조합 자체가 필요없다거나 문제라는 글이 아닙니다. 물론 노동조합도 분명 한계가 있겠지만, 지금 출판계에는 더 많은 노동조합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제 반성에 대해 당시 조합원인 분들이 질책을 하면 달게 받겠지만, 당시 회사 경영진이었던(혹은 조합워이지만 수습사원을 해고하는데 경영진과 한 편에 서 있던) 사람이 보리 노조를 비난하는 근거로 제 반성을 인용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최근에 무화과가 올린 포스트를 출근 버스 안에서 한 시간 동안 열심히 읽었습니다. 제가 요새 다른 블로거들이 어떻게 사는지 들어가보질 못했는데, 오랜만에 '아, 그래, 진보블로그에 이런 분들이 있었지, 이런 글들이 있었지'하고 반가왔어요. 고맙다는 말 꼭 전하고 싶었어요. 계속 써주세요. 그것이 서로에게 상처를 남긴다 하더라도 그 상처가 또 서로에게 성장이 되리라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