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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이 불법 대선자금을 이회창에게 지급했다는 MBC 기자의 폭로에 대해 경악하고 있을 때 노무현 대통령이 길을 알려줬다. 불법대선자금이 문제가 아니라.. 정경유착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실을 알아낸 도청이 문제라고 그것을 폭로한 기자가 문제라고.....
이 시점에서 난 혼란을 느꼈다.
'이제 더이상 비리폭로는 없다.'
권력과 언론의 비리. 권력과 경제계의 비리 등을 폭로하는 방법에 심대한 문제가 생긴 것이다.
교과서를 통해 배웠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해야 한다는 사실..
그런데 불법비리를 고발하는 데에도 이 진리가 통할까..
글쎄 이제는 결과인 비리보다는 폭로방법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 같다.
이 나라가 이렇게 이성적인 사회가 되었나..
어쩌면
비리는 언제나 일상적으로 일어나니 비리에는 무감각해지고 폭로방식은 아직은 신선한 소재이니 더 경악하는 척할 수도 있고..
비리를 숨기기 위해 비리를 폭로하는 방법에 대한 제약을 둠으로써 비리폭로를 사전에 예방한다는 비리자들의 뛰어난 머리일 수도 있고..
불법비리가 없어질 것인가. 불법폭로가 없어질 것인가.
우석훈 | 성공회대학교 외래교수 22호 | 2007년 4월 / 2007년04월09일 15시41분
사진출처 | 보건의료단체연합 홈페이지 |
숱한 의사친구들도 조카의 아토피에는 속수무책
공단지역을 훌쩍 넘는 도시의 대기오염
2%를 제외한 모든 이들의 고민, 환경성 질환
내가 보건 특히 유아 보건에 관한 조사를 할 때마다 갖는 느낌은 이건 다른 것이 아니라 부패하고 썩은 한국 사회의 증상 그 자체라는 생각이다. 입장을 바꾸어 유아의 눈으로 본다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잘못은 당신들이 했는데, 왜 내가 아파야 해? 가끔 환경부 같은 곳에서 대책이라고 만든 것들을 보면 한숨이 푹푹 난다. 이 상태대로라면 10년 후가 되면 더욱 문제가 심각해지지 전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2006년 8월 1일~4일 주민생협과 일본 생활클럽생협간의 한일청소년교류를 지원하기 위해 도쿄의 생활클럽생협을 다녀왔다....
데포는 우리의 매장과 같은 곳이다. 하지만 우리와는 개념은 좀 다르다.. 데포(depot)의 뜻이 정거장, 집품소인 것처럼 생활재를 각 가정으로 배달하는 것이 아니라 한 곳에 모아두고 조합원이 와서 찾아간다는 개념이다. 이에 비해 우리의 매장의 개념은 뭐 그냥 매장이다. '생활재를 파는 곳' 개념의 차이일까? 워커즈 운영의 차이일까? 작은 부분부분에 조합원의 정성이 엿보인다.
Operations Research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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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개념의 문제해결방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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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 시인
김남주시인의 시들은 내 첫 번째 대학생활을 거의 지배했었다. 비쩍마른 체구와 달리 말만 들어도 섬뜩한 '남민전'이라는 조직의 전위대 전사 출신이다. 70년대 말 썩을대로 썩은 박정희 유신정권에 맞서 정권을 뒤엎을 것을 결의하며 지리산에서 훈련을 하였다는 그 남민전의 전위대 전사. 유약해 빠져 우유부단함을 상징하던 지식인의 이미지를 깨는 그의 모습, 돌아가지 않고 너무나 직설적인 그의 詩들은 20살 팔팔한 나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어쩌면 그는 시인이기 전 전사였는지 모른다. 아래에 시들은 노래로 불려져 너무나 유명해진 '함께가자 우리', '노래',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들이다. | |
- 1946 (01) : (10. 16) 전남 해남군 해남읍 삼산면 봉학리 535번지에서 아버지 김봉수, 어머니 문일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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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의 가슴에 꽃힌 시인전사 최재봉(한겨래신문)기자 한국 현대시사에서 김남주(1945∼94)의 시들은 선명한 메시지와 강렬한 어조로 하여 두드러진다. 김남주가 외세에 대한 거부와 부자들을 향한 증오, 독재권력을 상대로 한 싸움을 노래한 유일한 시인은 아니었지만, 그 거부와 증오와 싸움을 노래 바깥의 현실로 옮기려 했다는 점에서 그는 다른 많은 시인들과 구분된다. 그는 시인인 동시에 전사였으며, 그것은 결코 비유적인 의미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시인이여 라고 그가 부르짖을 때 그것은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는 선동과 같은 궤에 놓이면서도 훨씬 더 강한 울림을 울린다. 그것은 무기(창:화살)와 대상(압제자:과녁)의 차이가 빚어내는 미학적 거리에 문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말 그대로의 전사와 시인의 차이가 반영된 결과라 해야 할 것이다. 철의 독재자 박정희가 심복의 손에 쓰러지기 불과 보름여 전 내무부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을 발표했다. 김남주는 중심인물인 이재문 등 20여명과 함께 그때 이미 체포된 상태였다. 이후 모두 80여명이 검거돼 그 가운데 2명이 사형을 언도받기에 이른 남민전 사건이란 무엇이었던가. 사건 관련자들과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남민전은 제3 세계 민족해방운동과 보조를 맞추어 예속적 독재권력의 타도와 외세의 축출, 그리고 부의 공평한 분배를 목표로 한 비밀결사였다. 남민전이 가장 직접적인 모델로 삼았던 것은 베트남 통일의 원동력이었던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었으며, 국내적으로 그것은 인혁당과 같은 자생적 사회주의 결사의 전통 위에 서 있었다. 그러나 검거당시 아직 준비위 차원에 머물러 있던 남민전은 실제에 있어서는 한국민주투쟁국민연맹 명의의 반독재 유인물 살포에 주력했으며, 김남주와 박석률 등 남민전 전위대 전사들은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잣집 담을 넘기도 했다. 남민전 동지이자 김남주의 부인인 박광숙씨에 따르면 남민전은 무엇보다도 반독재 민주화투쟁 단체였다. "모두가 숨죽이고 있던 공포통치의 시대에 남민전은 교사와 노동자, 학생 등 각계각층을 망라한 통일운동체였다. 강령에 있어서는 반제국주의와 노동해방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반독재·반유신투쟁이 주요한 활동이었다." 김남주의 대부분의 시는 남민전 사건과 관련해 1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던 감방에서 쓰여졌다. "시는 혁명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준비하는 문학적 수단" 이라고 규정한 그에게 선동의 효과가 미학적 고려에 우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와 혁명의 관계를 논하는 글에서 그는 그 둘이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다고 토를 달았지만, 그것은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에 관한 마르크스의 규정과도 같아서 그에게 있어 우선시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혁명이었다. 그러나 흥미있는 것은 시보다는 혁명에 기운 그의 선택이 오히려 미적 완성도가 높은 시의 탄생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김남주는 하이네, 네루다, 마야코프스키 등 외국 시인들의 영향을 진하게 받았다고 밝힌 바 있지만, 한편으로는 '노래'에서 보듯 '새야 새야 파랑새야'에서 김지하에 이르는 참여적 서정시의 전통 위에 굳건히 서 있다. 제국주의/신식민주의, 독재/자유, 자본/민중의 명료한 이분법에 입각한 그의 세계관은 상황의 핵심을 꿰뚫는 촌철살인의 절창을 낳았다. 그의 대부분의 시들은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비상한 수단과 방법으로써 쓰여졌다. 집필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 대한민국의 감옥에서 시인은 머릿속에 시를 써두었다가 면회온 친지들에게 불러주거나, 읽던 책의 여백이나 우유곽을 해체해서 생긴 은박지에 못으로 눌러서 시를 썼다(간수의 눈을 피해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시를 새기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김남주는 먼저 석방돼 나와 그의 옥바라지를 계속한 박광숙씨와 출옥 한달여 만에 결혼해서 아들 토일이를 투었다. 노동자들이 1주일에 사흘 금·토·일요일은 쉬어야 한다는 뜻이 그 이름에 담긴 토일이는 어느새 초등학교 1학년이 됐다. 시인은 가고 뒤에 남은 처자와 함께 그의 해남을 찾는다. 희고 붉은 코스모스, 노랗고 예쁜 벼들, 그리운 이의 소짓처럼 하느작대는 억새로 해서 가을 들판은 따뜻하고 정겨웁다. 해남읍에서 차로 10여분을 달리면 나오는 삼산면 봉학리 그의 생가에서는 팔순이 가까운 노모가 마당에 넌 고추와 호박을 돌보고 있다가 어린 손주를 반긴다. 푸른 대숲으로 둘러싸인 집에는 군 청년회에서 만들었다는 시화패널들 이 처마에 걸려 있을 뿐 시인의 생가임을 알리는 이렇다 할 기념물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시인이 주로 썼다는 사랑채에 그가 옥중에서 보았던 이런저런 잡지와 단행본들이 먼지에 덮여 쌓여 있다. '수번 2164, 교부일 81. 3. 23, 요납일 81. 4. 22'의 열독허가증이 붙은 책들은 80년대 초의 어느 시점에 얼어붙은 채 무심한 세월을 견디고 있다. 시인은 죽어서 망월동에 묻혔다. 생전에 그가 쓴 시 '망월동에 와서'가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5월 광주 희생자 묘역에서 그의 영혼은 비로소 안식을 찾았을 것인가. 그의 분신인 토일이와 부인 박광숙씨를 일어나 반기지 못하는 무덤 숙의 그를 안쓰러워하며 '전사 2'의 뒷부분을 떠올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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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g of Ariran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처음 접한 게 언제였는지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93년 정도였던 거 같다. 처음엔 무정부주의 이력 때문에 관심을 가졌었는데 그때는 무조건 테러리스트, 무정부주의, 저항 이런 말들에 끌리던 나이었던 거 같다. 그 후 다시 읽은 아리랑은 좀 다르게 다가왔던 거 같다. 김산이란 인물은 반공교육과 대학에 와서 알게 되었던 새로운 사상과 역사들로부터 다시 한 번 벗어나 나를 자유롭게 만들어 준 계기였었다. 남과 북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만주와 중국에서 치열하게 살다간 혁명가. 그들은 지금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역사는 항상 승자의 관점에서만 의미있는 것일까. 잊혀진 역사 속을 치열히 살다간 혁명가들, | |
생활인들. 어차피 누가 알아주길 바란 삶들은 아니었겠지만 역사 발전에 조금의 의미가 되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얼마전 김산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TV에 방영되었다. 그리고 정지영감독이 아리랑을 영화로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지영 감독이 만드니 만큼 태백산맥처럼 힘빠진 영화가 되지는 않을거란 기대를 해본다. 그리고 그 영화를 계기로 다시 한 번 인간과 역사에 대한 고민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
Song of Ariran 서문 김산이란 이 인물이 자못 독특한 인물이라는 것, 이런 인물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귀한 기회가 결코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것도 명백한 일이었다. 그는 근래 7년동안 동양에서 만난 가장 매력있는 인물중 한 사람이었다. 그해 여름동안 적잖게 고생하면서, 원고를 쓰는 손에 오는 심한 경련 으로 고통을 받으면서 대략 25명에 달하는 혁명가의 자전을 쓰고 있었는데, 김산은 내가 만난 혁명가중에서도 좀체로 찾아볼 수 없는 몇가지 특성을 구비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런 특성을 분석해낼 수가 없었으나, 오래지 않아 그의 특성을 단정하는 게 무엇인가를 알았다. 그는 투철한 의식과 두려움을 모르는 자주성과 완전한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님 웨일즈 |
A Beautiful Mind
이번 중간고사 기간에 통계관련 서적을 찾으러 도서관 수학서적 코너에 갔다가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다. 옆에 사진의 책은 아니고 754페이지에 달하는 꽤 두꺼운 책이어서 한 번에 읽기에 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시험을 망치고 머릿속 정리 좀 할 겸 책을 대출했다. 몇몇 사이트에서 본 영화 내용은 전기내용을 상당히 뒤틀어 놓았다. 내쉬의 정신분열증의 원인을 첩보전에 이은 음모의 시각으로 그린 거 같은데 순 뻥이다. 헐리웃영화야 무엇이든 자기 입맛에 맞게 바꾸어 버리니까 머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존 내쉬는 인간적으로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천재라는 걸 부단히 뻐기면서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아기를 낳은 가난한 여자를 버리고 좋은 집안, 학력의 앨리사랑 결혼해 버린다. 글구 앨리샤는 | |
물론 내쉬의 치료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내쉬가 병이 심각해지고 호전의 기미가 없자 이혼을 요구하고 10여년 내쉬를 방치한다. 나중엔 내쉬의 동료와 결혼까지 하려다 직장문제와 아이 때문에 결혼이 무산되는 등의 산전수전을 다 겪고 나서야 거의 폐인이 된 내쉬를 받아 들인다. 이때 내쉬는 더 이상 남에게 위협을 주지 않는 조용한 '미친사람'이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앨리샤와의 사이에 난 아들 '존 챨스 내쉬' 역시 총명한 머리로 수학박사학위까지 받고 마셜대학에서 강사로 나가기도 했으나 정신분열증으로 병원을 들락거리고 있다. 중요한 것은 내쉬의 정신분열증이 영화에서처럼 음모에서 비롯되었고 가족의 사랑으로 그것을 극복하고 그런 할리웃의 뻔한 구라가 아니라 너무나 뛰어난 정신의 어쩌면 필연적인 분열,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병에서 깨어나 비록 천재성은 잃었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조금씩 익혀가고 아픈 아들을 돌봐주는 한 천재의 삶에서 인생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
카네기에서의 마지막 봄날, 내쉬의 마음을 짓누른 것이 또 있었다. 졸업이 다가오자 병역문제가 점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미국이 다시 참전하게 되면 보병으로 징집될지도 몰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도 3년이 지나 병력이 계속 축소되고 있었지만 내쉬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가 정기구독하고 있던 신문에서는 연일 징집의 조짐이 시사하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의 베를린 봉쇄, 그에 따른 미국과 영국의 생필품 공수, 냉전의 가소과 등이 그랬다. 자신의 자율성이나 미래 계획에 위협이 되는 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릴 정도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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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1년차 학생들은 말할 수 없이 시건방졌다. 그런데 내쉬는 모든 사람들에게 더 말할 수 없이 시건방졌고, 더 괴팍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외모는 그런 인상을 더욱 부추겼다. 스무살이 된 내쉬는 나이보다 어려 보였다. 키 183센티미터, 몸무게 77킬로그램, 떡 벌어진 어깨. 근육질의 가슴, 군살 없는 허리, 위풍당당한 체격은 아닐지라도 운동선수같은 체격이었다. 음성은 카랑카랑하고 서늘했는데, 느릿한 남부 말투가 어우러져 다소 냉소적으로 들렸다. 길 게 말을 할 때는 장식적이고 위엄을 갖췄기 때문에 남들에게 짐짓 젠체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게다가 표정도 다소 거만했고, 남을 깔보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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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과회에서는 그는 처음부터 이목을 끌었다. 그는 주목을 받지 못해 아달인 것 같았고, 그 자리의 누구보다도 더 영리하다는 것을 다짐받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대수는 헛소리다"라고 그가 칠판에 뤼갈겨 쓰기라도 하면, 대수를 전공하는 다른 학생은 얘기 중간에 입을 다물곤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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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쉬는 거의 모든 수학 분야에 관심을 보였다. 위상수학, 대수기하학, 게임 이론 등에 대해 1년차에 이미 엄청난 지식을 흡수한 것 같았다. 프린스턴에서 별로 힘들지 않게 "꽤 광범위하게 수학을 공부했다"고 스스로도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수업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내쉬와 함께 수업을 들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대학원 생활 내내 내쉬가 책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없다. 사실 놀랍게도 그는 거의 책을 읽지 않았다. 내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정보를 얻는 주된 방식은 교수와 동료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는 클립보드를 들고 다니면서 끊임없이 기록을 했다. 내쉬는 그저 생각만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그는 빌린 자전거를 타고 작은 8자형이나 그보다 더 작은 원을 그리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대학원 건물의 4각 안뜰을 서성거리기도 했다. 파인홀의 어둑한 이츨복도 벽에 어깨를 맞대고, 패널 벽에 맞붙어 굴러가는 이동활자처럼 미끄러져 가기도 했다. 또 비어있는 두레방이나 3층 도서관의 의자나 테이블에 누워 있곤 했다. 도서관에 있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럴 때면 대부분 바흐의 푸가를 휘파람 불곤 했다. 수학과 비서들은 휘파람 좀 못 불 게 해달라고 레프셰츠나 커거를 찾아가 하소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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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쉬가 MIT 강사가 된 것은 갓 23세가 되었을 때였다. 그는 강사 가운데 최연소였을 뿐만 아니라, 다수의 대학원생들보다도 나이가 적었다. 당시 MIT 기준으로 볼 때 무어 강사들의 강의 부담은 가벼운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내쉬는 강의 부담이 싫었다. 그는 연구에 방해가 되는 일이나 판에 박은 일이라면 뭐든 질색이었다. 그의 강의는 설명이라기보다는 자유연상에 가까웠고 마인드게임에 가까웠다. 해결되지 않은 고전적인 문제를 출제하는 것도 내쉬가 즐겨 사용한 수법이었다. 로버트 오만은 이렇게 회상했다. "학생들에게 π가 무리수임을 증명하라는 문제가 출제되었어요. 그건 결국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라는 것과 같았습니다. 나중에 학과장에게 질책을 당한 내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어려운 문제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게 문제인 것 같다. 어쩌면, 그 문제가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지 않으면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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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두레방에서 학생들이 제2차 세계대전의 유명한 병참 수수께끼인 "지프Jeep"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지프 문제의 핵심은, 2천 마일 거리의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려고 하는데 지프의 기름탱크 용량으로는 2백 마일밖에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단. 한 번에 1백 마일을 더 갈 수 있는 휘발유 통을 실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 사막을 건너는 유일한 방법은 2보 전진, 1보 후퇴 전략을 따르는 것이다. 즉, 지프에 휘발유 통을 싣고 1백 마일을 간 다음, 통을 내려놓고 다시 시작 지점으로 돌아가는 일을 반복한다. 그런 다음 1백 마일 지점에서 기름 탱크를 가득 채우고 휘발유 통도 싣고 1맥 마일을 더 가서 통을 내려놓고 돌아가서 통을 가져오는 일을 반복한다. 문제는, 사막을 횡단하는 데 휘발유가 몇 통이나 필요한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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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봄 병원 휴게실 한쪽 구석에서 하버드 대학 교수인 조지 매키는 부드럽게 말하려고 했지만 다소 퉁명스럽게 말이 튀어나왔다. "어떻게 자네가..., 이성과 논리적인 증명에 몸 바친 수학자인 자네가..., 외계인이 자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허황한 얘기를 믿을 수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외계 생물체가 자네를 차출해서 이 세상을 구하려고 한다는 허황한 얘기를 믿을 수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자네가...?" 존 내쉬는 남부 특유의 느릿한 말투로 나직하게, 독백하듯 말했다. "왜냐하면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착상이든, 수학적 착상이든, 내게 떠오를 때는 똑같은 길로 오기 때문이지. 그러니 어떤 착상이든 진지하게 따져볼 수 밖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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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8월 말의 어느 날 아침, 랜드 보안과의 숙직 책임자는 산타모니카 경찰서에서 걸어론 전화를 받았다. 퇴폐행위를 적발을 담당한 두 경찰-한 명은 유인책이고, 다른 한 명은 체포책-이 새벽에 펠리세이즈 파크의 남자 공중화장실에서 어떤 젊은이를 체포했다는 전화였다. 체포된 젊은이는 경범죄인 공개적 외설죄로 기소되었고, 불구속 처리되어 풀려났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 젊은이는 자기가 랜드에서 일하는 수학자라고 주장했는데, 그것이 사실인가? 숙직 책임자는 내쉬가 랜드의 피고용이라는 것을 즉석에서 확인해주었다. 윌리엄스는 베스트에게 내쉬가 "괴짜녀석"이긴 하지만 비상한 수학자이며, 그가 만나본 사람 가운데 가장 영리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내쉬가 사직해야 한다는 것은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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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쉬에게 가해진 최대 충격은 체포 자페가 아니라, 랜드에서 축출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처음 베스트의 말을 들은 후 내쉬가 침착한 반응을 보인 것은, 윌리엄스가 그 사건을 눈감아주리라고 믿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는 랜드의 천재들 가운데 한 명이었으니까. 그러나 맥킨지와 튜링 등의 수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내쉬는 인생이 지난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남의 뜻에 좌우되는 북확실한 것임을 깨달았고, 자신이 생각보다 훨씬 더 약한 존재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위험한 교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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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 바깥에 있는 옛 친구들은 내쉬의 경과에 계속 관심을 보였다. 데이빗 게일은 연구소의 딘 몽고메리에게 편지를 보냈고, 이 편지의 사본은 밀너와 모르겐슈테른에게도 전해졌는데, 이 편지를 보면 내쉬의 상황에 대한 관심과 염려의 수준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존 내쉬 애기만 나오면 우리는 그의 현재 상태, 특히 정신 상태가 어떤지 궁금해왔습니다. 그가 의학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 우리 가운데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누구한테 물어보면 알 수 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의사가 희망이 없다고 한다"부터 "다시 수학 연구를 하고 있다더라"까지 소문만 무성합니다. 걱정이 되는 것은 우리가 내쉬의 상황을 모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수학계의 모든 사람이 우리와 같은 처지에 놓일 경우, 결국 내쉬가 최선의 치료를 받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걱정됩니다. 수학계에서는 필요할 때마다 내쉬에게 펠로쉽과 각종 일자리를 주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다른 사람이-정보에 밝고 능력이 있고 소임을 감당할 만한 사람들이 의학적으로 그를 꾸준히 보살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내쉬가 고등학문연구소에 몸담고 있으니, 그렇게 보살펴줄 만한 사람이 있기는 있는지 당신이라면 알고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내쉬를 위해 할 수 잌ㅆ는 모든 일이 다 잘 되고 있는지 확인하고도 싶었습니다. 만일 돈이 문제가 된다면, 예를 들어 내쉬가 받아야 할 치료를 받고 있지 못하다면, 내쉬의 친구들이 힘을 모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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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만남에서 바이불의 뇌리에 가장 강하게 남은 내쉬의 말은 따로 있었다. 그 말 때문에, 바이불은 초연한 관찰자이자 객관적인 정보 제공자 입장에서 열렬한 대변자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들이 교수 클럽에 들어서기 전, 내쉬는 우물쭈물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들어가도 될까요? 나는 교수가 아닌데요." 이 위대한, 위대한 학자가 자기 자신을 교수클럽에서 식사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바이블이 보기에 마땅히 바로잡아야 할 너무나 부당한 사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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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놀라게 한 이 남자, 이 천재의 이례적인 인생 역정은 계속되고 있다. 남들을 공정하게 대하려 하고, 남들이 그에게 공정한 대우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는 날마다의 노력은, 젊은 시절 차갑고 거만했던 것과 매우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지적으로 전보다 못할지 모른다. 또 새로운 획기적 업적을 이루지는 못 할지도 모른다. 그런 그는 전보다 훨씬 더 넉넉한 사람, 앨리샤의 표현에 따르면 "아주 좋은 사람"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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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가 그의 얘기를 접는 이 순간, 그는 어쩌면 파인홀로 이어진 아이젠하트 문 밑을 총총히 지나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거실 소파에 앨리샤와 나란히 앉아 대형 텔레비젼으로 <닥터 후>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고...아니면 조니와의 체스 게임에서 지고 있거나... 아니면 아내와 사별한 로이드 셰이플리를 위로하는 전화통화를 105분쯤 계속하거나... 아니면 피사에서 있을 강연 원고를 준비하고 있느냐고 묻는 해롤드 쿤에게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거나... 아니면 점심 쟁반을 들고 고등학문연구소의 수학 테이블에 앉아, 방금 캐링턴의 연애편지를 읽고 편지 쓰기의 아취가 사라진 시대를 한탄하는 엔리코 봄비에리에게 고개를 주억거려 보이거나... 아니면, 천문학 강연을 들은 후, 밤하늘에 반짝이는 아득히 먼 별을 망원경으로 지그시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 예전 홈에 게시했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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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break-飛렴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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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저 기간에 의료 생협과 함께하는 학생 모임도 일본 갔다왔던데 뭐 생협이 많군요.ㅋㅋ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