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권이 붕괴할때 자본론을 읽어보았고
누가 손가락이 조금 절단 되었을때 노동법해설과 그의(노동법의 정치적 배경의 은폐와 법철학의 한계-사상의 자유) 한계를 알기위하여 자본론을 보았었다.
물론 자본론은 가식적으로 읽었지만
자본론을 읽어면 반드시 자신의 반성과 성찰의 화두가 주어진다.
이것이 무서운 진실이며(마치 예수나 석가의 진실을 찾기위한 고행과 수행이 주어지는 것과 같은 의미이며 그리고 동시에 이들을 신격화 하는 절대에 대한 철학을 물신의 철학사를 인식해야만 하는 의문이 주어지는 것이다) 실천과 지식이라는 것에 대하여 조명하게 될 것이다.(자신의 삶에 대하여 물어보게 되는 시간이 자본론의 독서의 시간인데 상품의 가치구성과 재구성 총체적 구성 유기적 총체의 구성-화폐론은 다 보지 못했음 노동의 철학이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적 상품은 사회적 필요재로 인간노동의 가치를 그러한 의미에서 대안사회 새로운 세계관을 찾아 나서야 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보다 인간의 노동이 창조성을 잃어버리고 상품화 된 노동에 대한 가치관의 세계관을 떠나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 자본론은 경제과학을 넘어서는 즉 계급적 적대를 넘어서는 인간의 철학적 고찰을 하게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맑스잣대에서 그의 과학이론을 절대화 하는 자신은 아닌가를 돌아보며 자본론 읽기의 의미를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강을 거너온 뗏목을 버려야만" 국부론의 본질을 맑스처럼 과학적 재조명을 하며 그 나름의.....지금까지로 부터 역사인식과 실천에 대한 현실에서 사회적 인간인 자신이 살아 있음을 선언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구성원들과 함께 "지끔까지 역사에 대한 반인류적 반인간적인 역사의 현실과 방향에 대하여 새로운 사회를 위한 선언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철학과 인식은 실천의 강령으로 현실정치사에서 당시의 정치권력의 관계에서 정치활동의 테제를 쓰게되며 이로부터 국가의 지배계급의 정치권력으로 부터 탄압을 받게된다.맑스의 사회과학적 철학의 한계를 발견하는 사람이 또한 레닌이다.그 이후 수없는 맑스주의자가 결코 맑스이론을 화석화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나 또한 그를 추종하였다.(종파)이것이 사회민주주의사의 비극이라고 보며 민주주의가 사상적 다양함에 의한 창조성이 억압되는 것도 현실이었다고 봄
우리의 현실에서도 하나의 교조적 사상 자유주의가 사상적 다양함을 억압하고 탄압하면서 민주주의를 왜곡하고 있다.이념논쟁은 그만 하자고 하면서도 사실은 하나의 이념만 신격화하는 반과학적 역사의 인식이 정치 종교 사회구성원들의 세계관을 지배하고 있다.그 수단이 바로 언론미디어 매체이며 논리의 지배는 하나의 세계관에 의하여 가치관만 논리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이것은 우리의 정치사의 비극이다.아마 다른나라는 우리처럼 이렇게 사상적 경쟁이 없는 나라는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이념논쟁의 핵심은 바로 조중동이다. 자본의 지배의 논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변화무상한 논리를 우리는 조중동을 인간의 존엄성으로서 보면서도 계급적 인간의 지배의 역사에 대하여 그들의 사회구성과 체제를 유지하려는 이데올로기를 대응할수 있어야 한다.그러나 현실에서는 조중동이 자본을 위한 이념탄압의 도구가아닌 것 처럼 말하면서 시민사회의 민주주의의 사상적 토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국가기구의 제위원회에 다수가 자본가단체의 사람들이 개입하여 정책을 결정하면서 노동자들의 정치는 제한하고 있다.정치로 부터 독립화 되어야 한다면 그들이 국가기구에서 정책결정의 단위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다.노조에서 정치활동 현미경으로 보면 현장과 국가기구의 정치활동의 연관의 조직적 위계가 작동하는 것이 자본의 보이지 않는 정치이다
조중동이 이러한 것을 은폐하고 관념화된 가치관의 논리형식만 작동하는 기발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 시장에서 아담스미스의 시장의 원천인 자유와 자율이(시장의 순환의 인격이 스스로 부정되는 과학적 증명이 바로 오늘날 세계경제의 위기를 단증하고 있다.한마디로 구조조정은 국가권력의 개입이며 국가권력은 자본의 순환을 위한 위기를 합리화 하는 것이고 이것이 "과학"이라고 아담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시장의 보이지 않는 영혼을 증명하고 있다.아마도 화폐게임이론은 자유의 영혼을 잃어버린 늘 시장에서 위기때마다 누군가 집단적인 불행의 희생이 있어야만 시장의 위기가 순환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더욱더 야만스러운 전쟁과 같은 희생을 초래하게 된다. 국부론의 시장의 질서와 조화에 대한 그의 과학적 인식은 진실하다 그러나 과학의 증명에서는 반과학적이다.자유주의자들은 이문제를 제기하면 민주주의에서 이탈한다.사실 아담스미스 처럼 그의 과학적 태도를 망각하는 것이다.(국부론의 개념구성이 잘못 되었다 선언하고 시장이 새롭게 조명되어 대안시장을 역사화 사회화 해야한다)아마도 맑스의 상대적 적대로서 아담스미스가 아니라 그와 같은 인류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고민하는 진심은 같은 것이다.그것을 그대로 추종하면 민주주의에 군림하게 되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과학적 인식을 잃어버리고는 민주주의에서 반과학을 합리화하는 역사가 전개된다.이것은 국가권력의 기득권으로 작동되는 정치권력이다.
사회주의도 반민주주의가 관료주의 형태로 그것을 강요하는 정치권력은 반과학적이다.자유주의와 같은 맥락에서 사회주의도 비판되어야 한다.
여기서 철학은 동서양을 넘나드는 속에서 구조주의와 해체주의에 대한 반민중 반철학에 대한 현실들을 비판할수 있어야 한다.(해체주의는 어쩌면 "동일화의 비판과 비움"이라는 철학의 구성에서 이문제는 시론적 담론이 마치 사회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현실적 힘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 처럼 말하지만 자유주의와 자본의 국가권력의 집행에 속수무책으로 노동은 당할수 밖에 없다.물론 해체주의는 구조주의에 대한 반민주성을 비판하지만 그 대안이 담론의 시론일뿐 현실정치의 역학은 아니다.
"변증법유물론의 비판" 절대화에 대한 비판인데 그것도 아니러니 하게도 비판이 해체의 절대화로 귀결되고 있다.)
구사회주의권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해체주의를 담론화 하였던 과정이 당시에 고백론들이 유행 하였다.
이로부터 발생하는 우리의 진보정치는 이론과 실천이 현실에서는 과잉적 논쟁이 마치 진보정치의 세력화 되는 것처럼 말하고 그에 따라서 대중조직의 기반에 대하여 선험적인 관념의 문제가 유물론이라는 철학의 한 범주로써 현실의 혼란을 대안적으로 반영하는 것처럼 나타났다.
맑스의 시각에서만 국부론을 분석하고 그것에 매몰되기 보다는 자신의 관점으로 비판할수 없다면 결코 "자본주의의 위기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나가게 될 것이다.
사실은 맑스가 자본주의 역사적 종말을 이렇게 정리했는데도 마치 우리는 결정론 처럼 다음의 사회구성체는 사회주의라는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처럼 그를 인용하지만 그는 계급투쟁을 말했고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행위에 대하여 "주체" 정치권력의 운동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으로 역사는 후퇴할수도 있고 보다 인류적으로 인간적으로 진보할수도 있다.(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지식은 사회과학적인데 마음은 인식과 괴리되며 현실에서 "나는 조직활동속에서 인간의 순수성을 잃어간다"는 탄식을 하게될수 있다.그런 느낌이 올때 우리의 철학사는 중요하지 않을수 없다.
가치관의 기반인 세계관의 문제이다.
객관의 실재 중심에서 마음의 세계로 마음밖에서 마음안으로 공부할 필요가 있다.(마음밖에서 작동하는 실재는 나의마음의 세계와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그럼으로 외연과 의 실제에 의하여 나의 마음이 작동하는 관계에 대하여도 엄연한 사실이지만 주체라는 것은 관계에서 나의선택이다)
"지금 여기"라는 현실의 지혜작용에서 몸 마음 객관의 실재가 말속에 괴리되지 않을려고 말을 아끼게 되는 것이다.
좀 장황했는데....
공부는 깨달음이라고 생각하며 지금 여기의 지혜작용이라고 본다.
회의에서 안건을 제출할땐 두려워 하지말라
최선을 다하면 되고 평가와 과제가 비판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적합하지 않으면 물러나야 한다.
-글자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