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블랙홀: 번역에 대하여

2011/04/14 00:53

블랙홀 - 그래픽 노블
블랙홀 - 그래픽 노블
찰스 번즈
비즈앤비즈, 2009

이런 만화를 샀다 22,000원이나 하는데 북새통에서 50% 세일해서 샀다. 미국 만화는 거의 취향에 안 맞아서 최대한 안 사는데.. 저번에 배트맨 샀다가 시껍해가지구.

 

내가 만화를 볼 때는 무조건 1권 초반부에 흡입력이 있어야 하는데. 역시 낯설고 취향과 완전 다른 이 만화에는 그 흡입력이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낯선 내용의 싫어하는 그림체를 엠피삼에서 나오는 음악도 안 들릴 정도로 초장에 집중해서 보다가 번역때문에 집중이 완전히 깨졌다.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은 이런 식의 번역도 직역이라고 할 수 있는가이다. 영어와 한국어의 차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영어를 좀 잘하는 사람이 언어의 차이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 때 쓰는 번역들.

 

한국어가 망가져서 가끔 쓰이긴 하지만, 한국어에서는 대명사를 영어처럼 전혀 안 쓴다. 예를 들어서 내가 우리 엄마 얘기를 한다고 하자. 처음에 우리 엄마는 보은 사람이었다. 라고 한 문장을 쓴 뒤로, 특별한 필요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우리 엄마를 절대로 '그녀'라고 쓰지 않는다. 그녀는 처녀 시절에 상경했다. 거기서 그녀는 아빠를 만났다. 그는 그녀와 만나 결혼을 했다. 그들은 아직 시골이었던 압구정에 살까 인천으로 갈까 하다가 인천으로 갔다. 그들 인생 최악의 실수였다. 그들이 후에 목격하듯 압구정 땅이 비싸졌기 때문이다.

 

아무도 이렇게 안 쓴다고. 그녀가 아니라 엄마라고, 그들이 아니라 부모님이라고 계속해서 대명사가 아니라 명사를 쓴다. 이건 번역에 대해 처음에 배우는 거다.

 

영어식 표현에서 유래한 한국어 비문으로 만약 ~한다면 ~할 것이다가 있다. 보통은 "너무 ~해서 ~하다"를 영어 유래 비문의 대표 예로 들던데. 역시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만약.. 이런 말은 안 쓴다. 이런 것은 한도 끝도 없다, 독자가 한국어와 영어의 차이를 정확하게 알고 있을 때 위화감을 느끼는 게 아니다. 번역에서 어떤 차이를 고려해야 하는지 전혀 몰라도 위화감을 느낀다.

 

뒤로 갈수록 점점 번역자는 초벌 번역했고 편집자는 그 초벌 번역을 읽어보지도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사도 꽤 틀리게 썼다. 문장을 다듬었는데도 이 정도면 할 말이 없고. 내가 이 만화의 번역이 나쁘다고 말하는 건 만화의 감상을 완전히 망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든다. 보통 한국어 못 한다고 이렇게까지 책을 못 읽나? 나는 논문을 읽어도, 번역글을 읽어도, 그걸로 먹고 사는 거라면, 최소한 문장 연습은 해야 하지 않나 하고 생각하는데, 문장이야 개판이어도 읽는데 지장만 없으면 된다는 사람도 있고. 그냥 내가 너무 지나친 걸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아마추어가 번역한 거라고 가정하고 읽었다. 아마추어들의 번역작품은 아무리 일본식/영어식 비문이 난무해도 아무렇지도 잘 읽는 내가 아닌가? 그런데 프로가 쓴 글에만 최소한의 문장력이 없다고 읽히지도 않는다는 것은 뭔가? 그것은 화가 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화 낼 이유는 뭐냐고? 나는 너무 쉽게, 쓸데없이 화를 잘 낸다.

 

그리고 이중적이기도 하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비문을 마구 적는 것을 좋아하는데. 비문을 비문 자체로 좋아한다. 그런데 전문적이라고 간주되는 영역에 대해서는 비문을 용납하지 못 한다. 이것은 또다른 엘리트주의가 아닐까? 심지어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싫다. 직업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 하긴 비문은 아닌데 거지깽깽이같은 글은 또 얼마나 많냐고. 그러니까 이런 생각이나 하고 이런 글이나 써대는 것도 하잘떼기 없는 일이다.

 

만화는 좋았다. 워낙 밀도 높고 두꺼운 한 권의 책을 좋아하지만 이 책은 합본호인 이 한 권보다 처음 발표된대로 10개의 책으로 떨어져 있는 게 나을 듯 싶었다. 각 권 사이에 호흡이 필요해서. 만화의 늪같은 끈적임은 성공적이어서, 만화책을 만지는 게 좀 싫을 정도이다. 궁금해서 한 번에 다 읽었지만 천천히 한 회씩 읽는 게 좋을 만화이다.

 

그나저나 사실 만화를 좋아해서 이 책의 번역 얘기를 썼지만, 이 책은 약과이다. <중동정치의 이해> 씨리즈 중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글은 완전 쓰레기 자체이다. 인터넷에서 아무 글이나 검색해서 읽었어도 저 글보다는 낫다. 심지어 내가 써도, 아니 누가 써도 저거보단 잘 쓴다 진짜로 저 아무 내용 없는 저땐 걸 쓰고 돈을 받다니 아오.. 자기 이름에 부끄럽지도 않은가? 저번에는 <9가지 키워드로 읽는 디자인>이라는 책을 샀는데 정말 절망했다. 세미콜론이라는 출판사를 믿고 샀는데, 세상에. 이 책의 저자와 편집자들은 책의 내용을 이해하고 만든 걸까? 이해했다면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거고, 이해 못 했다면 이런 책을 왜 쓰고 왜 출판하는 거야 누구 시간이랑 돈 낭비하라고 작정하고 만든 거야 뭐야?

 

아 쓰다보니까 열받네. 사실 너무 열받아서 한 권씩 한 줄씩 미친듯이 지적하려고 했었는데 쓰레기라는 걸 굳이 입증하기 위해 그런 짓까지 해야 하냐고 관뒀다. 최악의 번역은 샤갈의 자서전 번역이었지 그 책 만든 사람들도 하나같이 양심도 없고 직업 윤리도 없지 세상에 그딴 걸 번역이라고... 완전 번역하는 자기도 무슨 소린지 알아쳐먹을 수 없는 걸. 아 열받아.

 

생각해보면 프랑스 철학 한국에 번역된 것도 엉망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나는 아무 문제 없이 읽었던 책들도 다 번역이 가짜였을 거라고 생각하면, 그러니까 앞뒷 말이 이어지는데 논리적으로 문제가 없어서 나는 괜찮았다니까 그게 번역자가 자기가 읽어도 이상하니까 앞뒤가 연결되게 지어서라고 누가 대답해줬었다 ㅜㅜㅜㅜㅜㅜ 제기랄 ㅜㅜㅜㅜㅜㅜ 그딴 걸 읽고 내가 뭘 안다고 씨부렸던 과거를 생각하면 팍 죽고 싶다ㅜㅜㅜㅜㅜ 다 집어쳐 어차피 다 까먹었어 'ㅅ' 그래 다 까먹었으니까 괜찮다 라마즈 심호흡 후 하 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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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 번역, 증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