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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시작

홈페이지를 만드려다, 실패하고

진보 블로그를 다시 시작해 보려 한다.

 

블로그라는 이 물건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나에게 있어

솔직해질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나를 솔직하게 대할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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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다시읽기]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그가 아니다/이진경

[고전다시읽기]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그가 아니다/이진경

‘마르크스는 휴머니즘적 사회주의자’ 고정관념에 반기
역사과학이라는 대륙 발견한 ‘과학자’로 해석
바슐라르·프로이트 개념 빌려와 새얼굴 빚는다
마르크스주의 안에 상이한 사유 숨쉴 공간 터 
 
 
고전 다시읽기/알튀세르 <맑스를 위하여>

 

 이 책은 원래 1965년에 출판되었지만, 우리가 이 책을, 그나마 영역본으로나마 처음 접할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 초반이었다. 알다시피 그 시절은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던 시기였다. 아니 책을 구하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맑스를 위하여>라는 제목에 놀라거나 충격을 받지 않는 게 가능했을까? 아니, ‘마르크스를 위하여’라니! 일단 숨겨서 몰래 봐야할 것 같은 긴장을 주는 책이었다. 마르크스를 위하여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리고 이듬해(1966년)에 알튀세르가 제자들과 함께 또 하나의 책을 출판한다. ‘<자본>을 읽자!’는 말로도 번역될 수도 있는 <자본 읽기>였다.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 허, 책 제목을 이렇게 지을 수가 있다니!

그러나 <자본>이란 책이야 그 전에도 읽었던 것이고, 그 책이 출판된 당시에도 다들 읽던 책이 아니었던가? 그랬을 것이다. 안 읽는 책을 “이젠 좀 읽자”고 말하려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이제까지 읽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읽자는 말이었을 게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의 고식적인 독서, 그 상투적 독해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읽는 것, 그것이 바로 ‘마르크스를 위하여’ 그가 하고자 했던 것일 게다.


 

‘이론적 반-휴머니즘’ 견지


 그래서 이 책의 서문은 자신들이 마르크스를 읽던 시기에 대해서, 그 독서의 방식을 제한하던 조건들에 대해 쓰고 있다. 그 글의 제목에 ‘오늘’이라고 붙인 것도 이런 점에서 아주 탁월한 작명이었다. 당에 의해 독서와 해독의 방식이 결정되고 제한되던 시절,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적 진리’ 내지 ‘프롤레타리아 과학’이란 이름으로 “오류를 그 모든 서식지에서 쫓아내던 무장한 지식인들의 시대”였고, “세계를 단 하나의 칼로 갈랐던, 예술·문학·철학 및 과학들을 계급이라는 가차 없는 절단으로 갈랐던 철학자들의 시대”였다. 스탈린은 죽었어도, 스탈린식의 진리가 사유를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 책이 정작 겨누고 있는 일차적 대상은 뜻밖에도 스탈린식의 실증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그것을 비판하면서 등장했던 ‘휴머니즘적 마르크스주의’고, 마르크스를 휴머니스트로 해석하는 입장이다. 물론 그는 휴머니즘이 실증주의의 짝이고 보충물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그가 휴머니즘을 겨냥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로 만든다는 점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자 자신을 위한 이데올로기. <경제학·철학 초고>라고도 불리는 마르크스의 <1844년 초고>의 출판 이후 크게 유행한 이른바 ‘소외론’의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스탈린의 ‘비인간적’ 비극을 비판하며 등장한 ‘휴머니즘적 사회주의’가 그것이었다. 그가 자신의 입장을 ‘이론적 반-휴머니즘’이라고 명명했던 것은 이러한 태도를 좀더 극명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독해의 강력한 지지자는 헤겔이었다. 그래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헤겔과 절연시키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한다. 이를 위해 마르크스는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헤겔보다는 포이어바흐에 기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소외론자로서의 마르크스를 ‘청년 시절’의 미숙함으로 돌리고 성숙한 마르크스와 다시 떼어놓는다.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을 이용해서, 역사과학이라는 대륙을 발견한 과학자로서 성숙기의 마르크스와, 그러한 과학을 알기 이전의, 당연히 이데올로기적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청년 마르크스를 분리한다.

 

 이러한 비판 속에서 그는 ‘인간’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관념을 ‘사회적 관계’라는 과학적 개념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즉 인간이란 그가 어떤 관계 속에 들어가는가에 따라 다른 본성을 갖는 존재고, 따라서 그런 구체적인 관계와 무관한 인간의 본성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를 마르크스는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 그 특정한 관계가 달라지면 그는 노동자가 될 수도 있고,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지’가 아니라 ‘어떤 인간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란 목적지 모르는 기차


 그는 또 모순의 개념을 헤겔적 관념에서 끄집어내고자 한다. ‘과잉결정(중층결정)’이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모든 관계의 본질에는 모순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전개 양상이 아무리 복잡해도 본질적으로 다양한 현상들은 모순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러나 알튀세르에 따르면 사회란 ‘기본모순’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동심원적 구조를 갖지 않는다. 오히려 다양한 수준의 외부적 조건들이 기본모순 자체에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모순은 자본과 노동의 모순이지만, 어떤 때는 농민들과 지주의 모순이, 또 어떤 때에는 제국주의와 식민지인민의 모순이 사회 전체의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다른 모순들이 그 모순에 응축되고 그것의 작동을 통해서 작용하게 된다.

 

 또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 ‘목적론적 사고방식’과 평생 동안 집요하게 대결한다. 가령 ‘공산주의’나 ‘절대정신의 실현’ 혹은 ‘인간성의 실현’ 같은 역사의 목적/종말을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 진행되는 것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목적론적 역사관념이 그것이다. 그가 보기에 역사란 “기원도, 목적도 없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출발지도, 목적지도 모르는 채 역사라는 기차에 올라타고 내리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없는 사회란 없다

 

이 책에서 제시된 또 하나 중요한 명제는 “이데올로기 없는 사회란 없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란 원래 사람들이 흔히 갖고 있는 통상적 관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상식’이 바로 그런 것에 속한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1845년에 한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피지배계급의 입장에선 당연히 거짓된 의식, 허위의식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지배/피지배가 사라진다면 그런 허위의식도 사라질 것이고, 허위의식으로서 이데올로기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란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포함하여, 이런저런 생각(표상)들을 방향짓고 미리 규정하는 무의식적 ‘표상체계’라고 본다. 그런 한에서 그것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가 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없다면, 개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을 결정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을 사회가 요구하는 주체로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이데올로기인 것이고, 따라서 어떤 주체도 이데올로기 없이는 불가능하며, 어떤 사회도 이데올로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개념은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과 결합하여, ‘호명’이라는 흥미론운 이론으로 이어진다. 가령 “모세야” 하는 신의 호명에 “예”하고 답함으로써 모세는 히브리 인민을 이끄는 ‘주체(subject)’가 된다. 신이 알려준 주체의 자리가 자신의 자리라고 인정하고 동일시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신이나 부모, 혹은 사회라는 큰 주체(Subject)가 지정한 자리를 나의 자리로 오인하는 것이며, 그를 통해 그 큰 주체의 신민(subject)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이론에 바슐라르나 프로이트, 라캉, 혹은 그가 피하면서 받아들였던 ‘구조주의’ 등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섞어서 새로운 얼굴의 마르크스를 만들어낸다. 고답적인 형태의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난 모습으로. 그리고 그것을 마르크스에게 돌려준다. 그것이 그가 ‘마르크스를 위하여’ 하고자 했던 것이었을 게다. 마르크스가 그의 선물을 반가워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배적인 마르크스주의의 고답적인 사고에 지쳤던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 선물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상이한 사유들이, 새로운 사유가 숨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사유 자체를 마르크스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것을 가르쳤고, 마르크스의 사유가 다시 살아 있는 사유와 소통하고 대화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다시금 새로운 형태로 마르크스적 이론을 창안하여 마르크스에게 돌려주려는 또 다른 사유를 촉발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이 지키고 유지해야 할 또 하나의 마르크스주의가 되는 순간, 다른 종류의 차이를 배제하는 절단의 칼날이 된다는 점을 잊지 않는 한에서지만 말이다.

 

서평자 추천 도서


-맑스를 위하여

알튀세르 지음, 이종영 옮김, 백의 펴냄(1997)


-아미엥에서의 주장

알튀세르 지음, 김동수 옮김, 솔 펴냄(1998)

(알튀세르의 사상 전반에 접근하기에 좋은 책. 쉽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알튀세르 지음, 권은미 옮김, 돌베개 펴냄(1994)

(부인을 죽인 뒤 금치산자로서 유폐된 상태에서 씌어진 알튀세르의 자서전)


◇ Mjspinaza(인터넷서점 예스24 회원리뷰)=“비록 마르크스주의의 실추로 인해 이제는 널리 읽히지 않고 논의되는 빈도도 훨씬 줄어 들었지만, 알튀세르의 문제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일종의 논문모음집임에도, 놀라운 이론적 통일성을 보여 주고 있다.”

◇ 익명=“프랑스 공산당에 속해 있었던 알튀세르는 이러한 복잡한 정치적 사태에 정치적으로,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맑스에 대한 인간주의적 해석 전체를 비판의 도마 위해 올려놓게 된 것입니다.”

◇논장=“이 책에 내포된 세적, 정치적 담화들은 시대의 한계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현 시기 새롭게 번역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책이 갖는 탁월한 인식론적 가치 때문이다.”

 

 [책속으로] 쁘띠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들이 인간주의적 청년 맑스로 변장시켜


“당에 들어왔던 쁘띠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들이 정치적 행동주의나 적어도 순수한 행동을 통해, 프롤레타리아로 태어나지 않았기에 지게 된 상상적 채무를 변제할 수 있다고 느꼈던 것 또한 우리 사회 역사의 한 특징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동류들 속에 우리의 말을 들어주는 자를 갖지 못하였다. …자신의 가장 뛰어난 대화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듣게 하기 위해 몇몇 맑스주의 철학자들은 …언젠가는 가면이 진짜 얼굴이 될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스스로를 변장할 수밖에 없었다. 맑스를 훗설로, 맑스를 헤겔로, 맑스를 윤리적 내지 인간주의적 청년 맑스로 변장시킬 수밖에 없었다.”(<맑스를 위하여>, 이종영 옮김, 22~23쪽)


“모순은 자신이 그 속에서 작동하는 사회적 신체 전체의 구조로부터 분리될 수 없고, 자신의 존재의 형식적 조건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층위들로부터도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순은 그 자체가 그 핵심에 있어서 이 층위들에 의해 영향받고 있으며, 하나의 동일한 운동 속에서 규정적인 동시에 규정받고 있고, 자신이 추동하는 사회구성체의 다양한 수준들과 다양한 층위들에 의해 규정받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모순은 원리상 중층결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같은 책, 116~17쪽)


“인간사회들은 이데올로기를 마치 호흡하는데 필수적인, 역사적 삶에 필수적인 요소나 공기인 것처럼 분비한다. 오직 이데올로기적인 세계관만이 이데올로기 없는 사회들을 상상할 수 있고 …이데올로기가 과학에 의해 대체되어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 관념을 받아들일 수 있다. …도덕이건 예술이건 ‘세계의 표상’이건 간에 역사유물론에서는 이데올로기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를 상상할 수 없다.”(278쪽)
 



이 글을 읽고 나서 나는 적잖이 놀랐다. 이진경의 빼어난 글 실력에. 음, 글 실력이 빼어나다기보다는 어렵다고 정평이 나있는(맑스 저작을 맛보고 다음 순서로 알튀세르의 저작을 맛보는 맑스주의 추종자들에게는 적어도) 알튀세르의 'For Marx'를 이리 쉽게 대중적으로 서술할 수 있다니! 알튀세르는 끊임없는 자기 비판을 통해 시기적으로 단절에 단절을 거듭하기 때문에 'For Marx'라는 논문 모음집이 알튀세르의 철학 전체를 표현한 것이라고 단언하기 어렵겠지만 어쨌건 글을 쉽게 푸는 이진경의 글 실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그러나 그 다음 알튀세르 'For marx'라는 저작에 대해 썰을 풀어보자면 너무나도 막막해진다. 물론 그가 'For Marx'에서 보여줬던 지적 작업은 매우 탁월했으며 그가 말하는 이론적 실천의 과업을 달성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지만, 그래서 "'맑스'주의자들은 무엇을 해야하는지?" 라는 문제설정에 과연 유효하였는 가에는 의문이 든다. 어찌보면 알튀세르의 이루어 놓은 이론적 실천에 대해 현 세대들이 '실천적 이론'을 내놓아야 할 차례이겠거니 하고 지나칠 수 도 있지만, 알튀세르는 후대를 너무나도 과대 평가했나 싶다.

 

 맑스주의가 이데올로기냐 과학이라는 질문에 '과학'이라는 답을 내놓았던 알튀세르는 맑스의 소외론에 천착한(청년 맑스의 사상에 녹아들어가 있는) 서구 맑시즘을 휴머니즘적이라 비판하며 이데올로기로서의 '맑스주의'를 거부했다. 허나 그가 '이데올로기' 분석에서 보여주었듯이 '이데올로기'가 아닌 사회는 없다. 그렇다면 알튀세르는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구분은 과연 어떤 지점에서 이루어 지는지 그리고 과학으로서의 '맑스주의'는 가능한지라는 처음의 문제설정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게 된다.

 

뭐, 한마디로 맑스주의의 지적 발전을 이룬 건 알튀세르의 엄청난 과업이고 니 잘난 건 알겠는데 그래서 맑스주의자들에게 남겨준 것이 뭐냔 말이냐. 문득 새내기 때 97학번 운동권 선배가 녹두호프에서 "그래서 알튀세르가 우리에겐 준것이 뭔데? " 라는 생각이 들면서. 과연 전학행 계열이 말하는 대중들의 '이데올로기적 전화'가 우리에게 혁명을 가져다 줄 것인가?  점점 살기는 각박해져가고 대학생들도 학점과 취직 걱정에 매달리며 노동자들의 세상살이는 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은 이 세상에?

 

휴. 답답하다. 막상 알튀세르에 대한 어설픈 비판을 시도했지만 'For Marx'를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했다. '자본을 읽자'도 마찬 가지로;; 어설픈 비판은 뒤로 한 채 읽어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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