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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털루 (3)

워털루 (3)

- 1815년 6월 15일의 세계

 

 

0.

 

  상브르 강을 건너 12만명의 병력으로 2배나 가까운 22만명이 짱박혀 있는 동맹국의 전진 멀티로 러쉬를 간 나폴레옹의 결단을 보면 확실히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해. 루비콘을 건넌 시저나 한강을 건넌 박정희처럼 나폴레옹도 선후배 군바리들처럼 강을 건너면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걸까? 하지만 나폴레옹의 선택은 그렇게 무모한 것도 비합리적인 것도 아니었어. 오히려 상브르 도강은 공격만이 숫적 열세를 숫적 우세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확신에 근거한 행동이었던 거야. 뭔 말이냐고? 나폴레옹의 구상 속으로 들어가 보자구.

 

  동맹국은 60만이나 동원한다고 하고 있지만 막상 프랑스 국경에는 22만 밖에 없잖아. 그것도 영국애들 10만명과 프로이센 애들 12만명이 따로 따로 있을거고 걔들도 각각 군단별로 사단별로 나눠서 짱박혀 있을 거란 말야. 12:22가 아니라 실질적으론 12:10:12 아니 12:1:2:3:2:3... 이 될 수 있단 거지. 12명이 22명한테 이기는 건 어려워도 12명이 2-3명 패잡는 건 일도 아니거덩. 그런 식으로 약한 부위부터 박살내나가면 22만명 날려버리는 건 일도 아냐. 이 상황에서 방어한다고 짱박혀 있으면 오히려 12:22 심지어 60만명과 상대해야될 지도 모르는 거 아냐. 오히려 이럴땐 공격이 상황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상책인 거지. 병력의 집중과 기동이 절대적 숫적열세를 상대적 우세로 바꿔놓는단 말야. 그게 각개격파의 기본인 거지.

 

빠른 기동과 각개격파의 명인이었던 임요환. 요즘은 공군에서 드랍쉽을 몰고 있다고 한다.

 

  총 잘 쏘는 거보단 잘 걷는게 낫다라는 발상의 전환을 한 기동전의 황제다운 구상이었고 사실 비범하긴 해. 사실 벨기에에 주둔한 동맹군 22만명은 뭉쳐 있을 수 없었거든. 전투 때야 잠시 한 동네에 몇만씩 모여 있을 수 있겠지만 평상시에 웬만한 대도시 인구 수준인 22만명이 뭉쳐 있을 수는 없잖아. 뭐 스타라면 유닛들이 항상 뭉쳐 있을 수 있겠지만 현실의 군인은 밥도 먹고 해야 되니까. 더더군다나 얘들의 보급이란게 상당부분 현지에서 조달한다는 걸 생각하면 동네마다 퍼져서 짱박혀 있을 수밖에 없는거지. 더더군다나 나폴레옹이 설마 공세를 펴리라곤 생각도 못하고 있을테니 (실제로 상브르 강을 건널 즈음에 웰링턴과 영국군 지휘부는 리치몬드 공작부인이 주최한 무도회에 있었다고 해) 기습 효과도 볼 수 있을거고.

 

 

1.

 

  이렇게 대충 시간과 장소는 정해졌어. 6월 중순. 장소는 벨기에. 이제 잠시 시간을 멈추고 1815년 6월 15일 경 벨기에에 모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알아보자구. 뭐 일면식도 없고 앞으로도 만날 일 없는 사람들 이야기하는 건 좀 지겹겠지만 참아줘. 이런 재미없는 부분에서도 인생의 교훈은 나오는 법이니까. 일단 대가리들부터 한번 살펴보자구.

 

1.1.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뭐 사실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유명하고 비범한 사람이야.  정치적으로도 그렇지만 그의 군사적인 비범함은 알렉산더 이후 최고라는 평가가 아깝지 않을 정도야. 근대전의 바이블인 클라우제비츠의 저작 역시 나폴레옹 전략과 군개혁에 기초한 거란걸 생각하면 적어도 전장에서 이 아저씨의 위상은 거의 전설적이었다고 해야겠지. 당장 이번 벨기에 전역에서만 해도 나폴레옹은 열세인 전력이었지만 그의 뛰어난 전략은 상대를 자신이 원하는 시간, 장소, 규모로 싸우게 하고 있잖아.

 

  또한 이 사람은 병사들에게 인기가 좋았어. 뭐 사실 잘 이기는 지휘관은 인기가 좋은 법이기도 하지만 이 사람은 실제로는 어떠했든 간에 굉장히 소탈하고 자상한 이미지를 병사들에게 심어놓는데 성공했어. 거기에다 개그 센스도 좀 있었다고 해. 개그 센스가 인생에 미치는 중요한 영향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지. 여튼 제국의 황제가 군복에 수수한 외투를 걸치고 가끔 병영을 돌아다니며 병사들에게 농담도 한마디씩하는 모습에 병사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나봐. 여튼 그가 전장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기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해서 웰링턴은 나폴레옹의 모자는 병력 4만의 가치를 가진다라고 평했을 정도야.

 

실제로도 소탈하고 검소한 사람이었냐하면 ... 글쎄 그런면도 있지만 어차피 이 종류 직업군의 소박함이란 내가 가끔 누리는 사치와 비교할 수 있는게 아니라구.

 

  다만 몇가지 약점 역시 두드러졌어. 그 중 하나가 건강일 거야. 젊은 시절에도 치질에 시달렸던 그는 이번 전역에서도 그 난치병에 시달리고 있었어. 내내 말등에 매달려서 움직여야할 정도였다고 해. 거기에 그는 위장병 편두통 등 온갖 병을 달고 다니는 움직이는 종합병원이었고, 나이들어 꽤 늘어난 체중 역시 체력 소모를 가중시키는 원인이었을 거야. 뭐 그의 후반부 인생이 안락한 궁정생활 <-> 폭발적인 업무로 가득찬 전쟁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몸이 망가지는게 이상하지만은 않겠지. 평소에 건강을 챙기길 게을리하는 사람들은 한번 이 건강이 인생에 있어 결정적인 승부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눈여겨 봐 둘 필요가 있을 거야. 과거는 항상 미래에 복수하는 법이니까.

 

  한가지 더 이야기 하자면 이 아저씨의 소인배적 마인드 역시 꼬집어야 할 거야. 혁명기 때 당시 군의 중추였던 귀족 장교들이 죄다 도망가 버리는 바람에 프랑스는 역시 혁명적인 조치로 군을 재건해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제3계급에서 장교들을 충원하고 능력과 실적에 따른 임관 및 승진제도를 만들었단 거야.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제도의 가장 큰 수혜자라고도 할 수 있는 나폴레옹은 자신과 라이벌이 될만한 장군들에게 군공을 세울 기회를 주기를 꺼려했어. 또한 장군들이 자신의 명령과 무관하게 능동적이고 유연하게 군을 운영하게하기 보다는 명령에 충실하게 수동적으로 움직이게 요구해왔지. 혁명 프랑스군의 새로운 전통을 압살한 나폴레옹의 소인배적 스타일은 사실 개인적인 소인배적 품성에서도 출발하겠지만 역시 일면으론 민중 혁명을 억눌러야 했던 그의 정치에서 출발점을 찾아야겠지.

 

1.2.

 

  웰링턴 공작, 아서 웨즐리. 배경부터 성품까지 확실히 인간쓰레기의 향기가 물씬 풍겨나오는 사람이야. 이 사람을 평가하기 전에 우선 영국 육군의 임관 제도를 알아볼 필요가 있어. 영국 육군의 기본적인 임관 방식은 계급을 돈을 내고 사는 방식이었어. 가끔 군공을 세워서 임시 계급을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결국 안정적인 승진은 돈을 내야 보장되는 거지. 반면 해군은 승진 시험과 실적 중심으로 임관되었어. 그래서 영국의 지배계급 중 비교적 똘똘한 애들은 관료나 해군으로 빠지고 돈많고 무능한 애들이 무난하게 출세하기 위해 육군으로 많이 가곤 했어. 뭐 지금 기준에서야 경악스럽지만 사실 귀족의 사병들이 군의 근간을 이루던 중세 스타일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이상할 거까진 없었어. 영국이 해군 국가다보니 육군을 양성할 돈이 딸려서 매관이 불가피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영국의 부르주아 혁명이 불철저했고 프랑스와는 달리 사회의 봉건적 잔재가 일소되지 않았던 탓이 크겠지.

 

  여튼 이튼 스쿨에 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애가 좀 굼뜨고 해서 성적이 나빴던 아서 웨즐리는 집에 돈이 좀 있었기 때문에 무난하게 육군 장교로 임관하게 돼. 그리고 고속 승진 가도를 달리게 돼. 한마디로 돈 좀 뿌린 거지. 그리고 형이 총독으로 있는 인도로 건너가서 식민지 전쟁에서 꽤 큰 공을 거두게 돼. 이것도 형 빽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아서 웨즐리가 나름 빼어난 군사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건 사실이기도 해. 재수없는 놈이 실력이 있으니 약간 더 재수가 없어졌다고 해야되나. 그는 인도에서의 군공을 바탕으로 나폴레옹 전쟁의 변방인 스페인에서 크게 활약해서 스페인에 가 있던 프랑스군을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리고 그 공을 인정받아 웰링턴 공작 작위를 따내게 돼.

 

뭐 계급 좀 사면 어떻습니까.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

 

  하지만 아서 웨즐리는 그 공작 작위에 그렇게 즐거워하지는 않았어. 아서 웨즐리의 가문은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로 이주한 영국 귀족과 아일랜드 귀족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의 컴플렉스였기 때문이지. 식민지 지배계급답게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아일랜드에 일호만큼의 애정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누군가 당신 아일랜드 사람 아닌가라고 묻자 "마굿간에서 태어난다고 사람이 말이 되지는 않아 임마"라고 말하는 싸가지를 발휘하기도 해. 그런 그에게 아일랜드 작위-웰링턴은 북아일랜드에 있는 동네거든, 뉴질랜드에 있는 웰링턴은 짝퉁이라구-가 내려졌으니 그가 상심할 법도 하지.

 

  그의 뒷담을 까느라 제대로 분석을 못한 거 같은데 전장에서만큼은 그는 꽤나 뛰어난 지휘관이었어. 적어도 영군국의 강점을 가장 잘 살리고 약점을 가장 잘 숨기는 스타일을 가졌지. 공세에 있어서 센스가 넘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비토리아 전투처럼 예외는 있지만-영국군 특유의 화력 집중-뒤에 설명할께-을 잘 살려 방어전을 잘했다고 해. 약간 띄어줬으니 다시 좀 더 까보자면, 그는 사병들을 굉장히 경멸했다고 해. 반쯤 사실이긴 하지만 자신의 병사들을 '술 마시러 입대한 벌레 같은 놈들'이라고 깠던 적도 있어. 그런 재수없는 놈이었지만 잘난 놈이었고 병사 개인은 벌레처럼 알아도 병력을 아낄줄 아는 사람이라서 그렇게까지 인기없는 스타일은 아니었대.

 

1.3.

  분량도 빡빡한데 프로이센 대빵 블뤼허 원수에 대한 설명은 생략할께. 간략하게 추리면 예전에 나폴레옹에게 포로로 잡힌 적이 있어서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72살 먹은 노땅 할아버지야. 이상.

 

왕년에 한 성질 하셨을 것처럼 생긴 영감님.

 

  남은 분량은 역시 웰링턴을 까는데 쓰자구. 벨기에 전역에서 특히 워털루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의 존재 의의나 비중은 크지만 활약은 딱히 적을 게 없어. 왜냐면 웰링턴이 프로이센군은 워털루 전투 때 저녁 먹을때쯤 되어서 설렁설렁 나타났고 딱히 싸우지도 않았다고 공식 보고에 써 올렸기 때문이야. 대부분 워털루 전투 관련 서적들은 그걸 기본 사료로 삼고 있고. 근데 사실 최근 연구 결과는 프로이센군이 그보다 일찍 전투에 나타났고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보는 쪽을 지지하고 있대. 근데 나한테는 그 자료들이 없고 그래서 딱히 프로이센 군에 대해 주절주절 쓸 꺼리도 없어. 결론은 웰링턴=소인배라는 거지.

 

 

2.

 

2.2.

 

  전술했다시피 영국 육군 장교진은 비교적 사회의 인간쓰레기들을 온전하게 보존해왔기 때문에 평균 이상의 무능함을 유지할 수 있었어. 하지만 기묘하게도 이번 벨기에 전역에서 웰링턴은 꽤나 괜찮은 수준의 장교진을 휘하에 둘 수 있었어. 이는 지극한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고 혹은 15년에 걸친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 나름 검증이 된 애들이 가려진 결과일 수도 있겠지. 유일한 예외가 영국의 동맹국으로 참가한 네델란드의 오렌지 공 정도일거야. 얘는 갓20살 넘긴 경험도 재능도 없지만 네델란드군의 총지휘관이었고 불운하게도 그는 열의에 불타고 있었거덩. 한편 부사령관인 욱스브릿지 백작은 나름 뛰어난 지휘관이었는데 웰링턴과는 좀 껄쩍지근한 관계였어. 왜냐면 욱스브릿지가 웰링턴의 동생의 부인과 바람이 나서 야반도주를 했던 전적이 있거덩.

 

뭐 야반도주 좀 하면 어때요.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

 

  웰링턴은 욱스브릿지를 볼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서 욱 치밀어올랐겠지만 그래도 나름 대인배였던 웰링턴은 욱스브릿지를 중용했어. 물론 대인배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인선권 자체가 웰링턴에게 없었으니까 별 수 없었겠지만. 한편 웰링턴 공작은 오렌지 공으로부터 지휘권을 어떻게든 뺏어내려고 공작을 펼치게 되지. 공작의 공작에 대한 공작은 나름 성공적이어서 워털루 전투 때 웰링턴은 오렌지 공의 보병들에 대한 지휘권을 양도받게 돼. 결론적으로 벨기에 전역에서 영군군의 지휘부는 영국 육군 역사상 유래없이 비범한 상태였다는 거지.

 

2.1.

 

  반면 프랑스 대육군(grand armee)의 장교진은 뭐 당대 유럽에서 두드러지게 비범한 집단이었어. 철저하게 검증되지 않으면 그 자리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이지. 실력 위주의 승진이다보니 병사 출신 원수들도 여럿 있었다고 해. 다만 나폴레옹이 돌아온지 얼마 안된지라 많은 장군들이 복귀하지 못한 상태였어. 거기에 나폴레옹의 소인배적인 인선이 효율적인 인력 배치를 가로막게 돼.

 

  전에도 얘기했지만 나폴레옹은 군사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사람이거덩. 뭐 그래서 더 그렇겠지만 군사 지휘관들이 독자적으로 높은 군사적 업적을 세우게 되면 자신의 입지가 흔들린다고 생각한 모양이야. 더 나아가 군사 지휘관들에게 자신의 명령에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작풍을 군 조직 내에 심으려고 열심히 노력했어. 뭐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미셸 네 원수. 생각해보면 전쟁에 피로나 공포를 느끼는게 정상인 거 같긴 하다.

 

  이번 벨기에 전역에서도 나폴레옹의 인선은 다분히 그러한 의도가 관철되었어. 그는 참모장으로 니콜라 술트, 좌익 지휘관으로 미셸 네, 우익 지휘관으로 엠마뉘엘 그루시가 임명한 거야. 술트는 참모장 경험도 거의 없는데다 몇 안되는 경험에서도 특별한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인물이었어. 오히려 야전 지휘관 타입이었던 그가 참모장을 맡게 된 것은 나폴레옹이 루이-가브리엘 쉬셰를 참모장으로 기용하기 꺼려했기 때문이야. 그의 많은 경험과 실적이 나폴레옹에게는 그의 입지를 위협할 라이벌로 보이게 한 것이겠지. 결국 쉬셰는 전역 내내 후방인 리옹에 배치되었어.

  미셸 네는 후대의 관련 학자들이 진단서라도 끊어본 것처럼 입을 모아 전투 피로증 환자였다고 입을 모으는 아저씨인데, 확실히 이번 전역 내내 그는 충동적인 격렬함과 무기력한 소심함의 양극단을 반복하게 돼. 네는 과감함과 용감 무쌍함이 인정되어 일개 기병 병사에서 프랑스군 원수까지 진급한 대단한 사람이지만 그에게 독자적인 집단군 규모의 병력을 지휘할 전략적 재능이 있다고는 할 수 없었어. 하지만 나폴레옹은 과거 그를 배반하고 부르봉 왕가에 충성을 맹세했던 지휘관들을 포용하는 제스쳐를 취해야했고 그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네를 좌익 지휘관에 임명하게 돼.

  엠마뉘엘 그루시는 뛰어난 기병 지휘관으로 나폴레옹이 가장 마지막으로 임명한 원수야. 그런데 기병 외에 다른 병과와의 연계 작전의 경험이 없고, 더더군다나 집단군 규모의 병력을 지휘하기엔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나폴레옹의 명령에 의존적이었어. 뭐 나폴레옹은 그런 결점을 참 좋아했기 때문에 황제와 코드가 맞는 그루시는 중용되게 돼. 프로이센과 맞붙게 될 우익 지휘관으로 적합한 인물은 니콜라 다부 원수라고 다들 입을 모으는데, 이 사람은 집단군 규모의 병력을 지휘한 경험도 풍부하고 거기에 프로이센군을 여러차례 박살낸 전력도 있어. 물론 나폴레옹은 그를 파리에 국방장관으로 짱박아두게 돼. 이유야 뭐.

 

  결과적으로 당대 유럽 최강의 라인업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군 장교진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다소 언밸런스한 선발이 결정되었어. 나폴레옹은 기본적으로 프랑스 장교진은 우수하니까 다소 부적합한 인사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넘치는 센스로 그들을 컨트롤하면 적당히 문제없을 거라고 판단한 것일까? 하지만 그 판단에 의해 프랑스 장교진은 혁명 이후 두드러지게 부적절한 상태로 전역에 돌입하게 돼.

 

2.3.

 

  프로이센군이라... 뭐 여기서도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라고 하려다 사족으로 좀 덧붙이면 프로이센은 옛날에 나폴레옹한테 대들다가 베를린까지 털리면서 크게 당한 적이 있어. 우울한 일이지만 나름 좋은 일이기도 했는데, 그 사건을 계기로 프로이센과 독일의 (저항적) 민족주의가 크게 발흥했고, 정부를 구성하던 귀족들이 나폴레옹에 의해 깨진 덕에 신정부 구성을 상당부분 부르주아 지식인들에게 문호를 열 수밖에 없었지. 얘들이 나름 농노 해방도 하고 (물론 성과는 한심했지만) 군사 부분에 있어서 프랑스와 나폴레옹의 제도와 전략전술을 도입하게 돼. 이번 전역에서 프로이센군의 참모장을 맡은 그나이제나우가 그 주역 중 하나였지. 1815년의 프로이센 장교진은 무능한 봉건왕정군에서 근대 군대로 변신 중인 상태라고 해야될거야. 이 변신의 결과로 도출된 군사 전통과 장교진의 역량은 클라우제비츠에 의해 이론적으로, 보불전쟁과 양대 세계 대전을 통해 실천적으로 검증되게 될거야. 물론 1815년엔 딱히 그 성과라고 할만한 걸 보여줄 상황은 아니었어.

 

전쟁론을 쓴 클라우제비츠. 저작권 수입이 신통찮았는지 창세기전에도 출연한 듯.

 

 

3.

 

3.3.

 

검은 제복의 프로이센군.

 

  아까도 말했지만 프로이센의 군개혁은 꽤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어. 하지만 반쯤 프랑스의 지배권 안에 있었던 14년 이전까지는 대규모 군대를 둘 수 없었기도 했어. 나름 통박을 굴려서 예비군 체제를 도입하면서 동원력을 높이려고 노력해왔대. 1814년 나폴레옹이 깨지기 시작하면서 프로이센은 대규모 예비군 동원과 징병을 실시하였고 군의 양적 팽창을 도모하였고 결과 이번 원정에 12만의 나름 대군을 투입할 수 있었어.

 

  다만 질적으로는 급격한 양적 팽창 때문에 다소 장비면이나 훈련, 경험면에서 그렇게 신뢰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이들은 사명감에 활활 불타는 프랑스의 징집병들과 질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어. 프로이센의 부르주아 개혁은 굉장히 온건한 것이었고 농노 해방 등은 철저하게 융커(지방 지주)들의 이권을 해하지 않는 수준에서 결정되었어. 봉건적 약취에서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총을 잡은 농민들과 사실 농노에서 농민으로 바뀐 이름만 지키기 위해 총을 잡은 사람들의 사기 차이란 꽤나 큰 것이었지.

 

  더더군다나 독일 민족주의의 느린 성장은 당시 프로이센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던 프로이센이 아닌 독일 제후국 군대들의 신뢰도를 낮게 만들었어. 1814년에 이미 러시아 국경 출신의 고참병들이 집단 탈영한 적도 있고, 벨기에 전역이 시작될 즈음에는 라인 연합 출신의 1만명이 부대를 이탈하고 작센과 실레지아 병사 1만 4000명이 집단 항명으로 무장해제되는 등의 헤프닝이 연출되게 돼. 얘들이 프랑스처럼 국민국가의 군대로 결집하기까지는 보불전쟁과 독일 통일까지 기다려야할 거야. 봉건적 사회를 유지한 채 부르주아 혁명의 군사적 성과만을 거두려는 시도는 여러모로 무리수가 있었던 셈이지.

 

3.2.

 

레드코트로 유명한 영국애들. 근데 아까 그림에서 색깔만 바꾼거 같기도 하고

 

  영국의 육군 장교들이 귀족과 부르주아 사회의 막장들을 모아놓았다면 일반 민중 중에서 상당한 말종들로 구성된 것이 영국 육군이라고 할 수 있을 거야. 유럽이 부르주아적 국민개병제와 짝퉁 징병제의 열풍으로 뜨거웠던 나폴레옹 전쟁 기간에도 영국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육군을 유지해 왔어. 그러니까 건강한 노숙자들과 범죄자, 유랑 농민, 아일랜드 식민지 민중, 허위 광고에 속아서 전화한 삐리한 애들로 육군을 구성하고 걔들에게 푼돈과 술, 그리고 채찍질로 규율과 기강을 유지해 온 거지.

 

  채찍질을 하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 없는 막장 군대였지만 그래도 나름 얘들은 강점들을 가지고 있었어. 사실 영국은 대규모 육군을 가질 필요가 없는 나라라서 소수정예의 육군을 유지하려고 하였고 결과 얘들의 훈련 수준은 세계적으로 뛰어난 수준이었어. 당시 세계에서 실탄을 가지고 사격 훈련을 하는 나라는 영국밖에 없었다고 해. 프랑스의 경우 머스켓에 달아둔 부싯돌이 닳을 까봐 그것까지 빼서 사격 훈련을 한 걸 생각해보면 영국애들이 총을 쏴도 더 잘 쏠 거 같지 않아? 실제로 1분에 프랑스군이 2발 정도 쏠 때 얘들은 3발 정도 쐈다고 하니까. 더더군다나 채찍을 많이 맞아서 그런지 얘들은 노련하고 적의 총검 앞에서도 당황하거나 하지않고 철저하게 화력을 집중할 수 있는 미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 당시 가장 잘나가던 자본주의 국가답지 않은 구시대적인 군사 패러다임, 이걸 당대최고의 경제력과 가장 야만적인 전근대성으로 보완하고 있었던 거야.

 

  한편으로 영국군은 영국 본토에서 건너온 애들과 당시 하노버 왕가의 영지였던 북독일 지방의 KGL(king's german legion)-얘들의 장교진은 유일하게 영국 군대에서 실적으로 진급했다고 해-및 동맹제후국들, 글고 네델란드와 벨기에 연합군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어. 부족한 규모를 늘리려다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결과 다소 미덥지 않은 동맹국들-북독일 제후, 벨기에. 네델란드-과의 공동 행보는 피할 수 없었지. 이걸 보고 웰링턴은 '불명예스러운 군대'라고 투덜거렸다고 해.

 

3,1,

 

제국근위대 아저씨들. 프랑스 군복은 전통적으로 파란색이야. 요즘은 아니지만.

 

  설혹 워털루의 패전을 두고 당시 프랑스군에 정예들은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다들 죽어버리고 신병들이 대부분인 오합지졸만 남아있어서 나폴레옹이 결국 패했다 ... 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뭐랄까 좀 과장된 측면이 있는 얘기야. 나폴레옹 귀환 이후 조직된 프랑스군의 주력은 징집된 신병들인 건 사실이야. 하지만 많은 고참병사들 역시 복귀하였고 포로로 가 있던 병사들 역시 나폴레옹 퇴위 후 귀환하였고 이들이 나폴레옹 육군의 정예인 제국근위대 재구성의 중심에 서게 돼. 나름 높은 숙련이 필요한 기병이나 포병의 경우, 모두 영국군과 프로이센군 각각에 숫적/질적 우위를 가지고 있었지.

 

  더더군다나 이번 원정군은 국적적으로 단일한 군대였고 프랑스 방위의 사명감에 기꺼이 징집된, 혹은 지원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어. 부르주아 혁명의 마지막 성과들을 지키고자 하는 이 사람들의 사기는 대단히 높은 것이었고 아까 설명한 영국-프로이센 동맹군과 좋은 비교가 될 거야. 전반적으로 다소 훈련과 장비가 부족하긴했지만 전반적으로 나폴레옹이 지금까지 지휘해온 군대 중에 질적으로 꽤 높은 수준이었다고 평해야 할 거야.

 

  나폴레옹이 대담한 공격에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지. 벨기에 전역에서 프로이센군과 영국군의 전체에 비하면 절반정도의 규모에 불과하지만 그 각각에 대해서는 양적/질적 우위는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둘의 협공만 당하지 않는다면 이길 수 있다고 나폴레옹은 판단했고 사실 그건 그렇게 틀린 것도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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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털루 (2)

bgm.

 

워털루 전투에 영국-네델란드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스웨덴 출신 의용병, 알텐 백작 휘하의 영국 육군 3사단 소속의 팰트스코크 상병과 린스테드 하사, 그리고 브라운슈바이크 군단 소속의 군악대원 앤더슨과 울바에우스는 전투 직후 우연하게 만나 함께 군가를 부르던 중 의기투합하여 4인조 밴드를 결성하게 된다. 이들은 워털루 전투와 나폴레옹과 웰링턴 사이의 애틋한 연심을 담은 노래를 만들어 데뷔하게 되는데 이후 waterloo 라고 이름붙여진 이 노래는 빈 체제의 반동에 얼어붙어 있던 유럽에 돌풍을 일으키며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다. 이들은 자신의 밴드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들의 군단장 이름의 앞 머리를 따서 대충 abba라고 붙였는데 이때까지는 이 이름이 전세계 롤러장에 불멸의 존재로 남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

 

 

 

0.

 

  사실 나폴레옹이 엘바로 끌려나기까지 손놓고 아무것도 안하고 있지는 않았어. 러시아에서 완전히 깨진 이후 나폴레옹은 나름 통박을 굴리다가 옛날에 자코뱅 정부를 수호하기 위해 프랑스 국민들의 열광적으로 혁명적인 에너지로 위기에 처한 프랑스를 수호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던 거야. 그래서 나름 나폴레옹은 again 1793을 위해 창고에 처박아뒀던 라 마르세예즈-대혁명 때 겁나 히트를 쳤던 민중가요-cd를 틀고 방송차를 끌고 전국을 돌아다녔어. 그리고 인터넷에 알바를 풀어 의용군 모집을 독려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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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나폴레옹이 상심했을법 해. 반응은 보다시피 신통치 않았어. 하지만 15년 동안 나폴레옹은 언론을 통제하고 민중들의 손발을 묶고 부르주아들에게 수동적 복종만을 요구해 왔었거덩. 이제와서 나폴레옹은 이들의 자발성에 기대려했지만 얘들의 조직은 폐허만 남아있었고 활동가들은 정치범으로 빵에 가 있었지. 그 15년의 결실이 나폴레옹이 가장 바라지않던 형태로 돌아오게 된 거야. 혁명을 집어삼킨 나폴레옹은 결국 반혁명군에 의해 프랑스 남쪽에 있는 쥐콩만한 엘바섬으로 귀양가게 돼. 역사는 항상 칼같이 복수를 하니까.

 

 

1.

 

  나폴레옹의 엘바 생활은 그렇게 유쾌하지만은 않았어. 대제국의 지배자가 쥐콩만한 섬에 처박혀서 인터넷 폐인 생활을 하려니 좀이 쑤시기도 하고, 프랑스 정부가 그의 연금을 떼먹고 지급하지 않은 것도 그의 상심을 더해 주었어. 아마 마누라와 자식을 볼 수 없게 된 것도 가족적인 코르시카 섬사람인 그를 상심하게 했을거야. 또 중년들이 많이들 그러하듯 비만과 탈모 문제 역시 그에게 깊은 고뇌를 주었을 법도 해. 자료 화면을 참고하자구.

 

아 빛나는 20대

 

  나폴레옹만 유쾌하지 않았던 건 아냐. 루이 18세가 돌아오면서 프랑스는 반혁명의 광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한 거야. 매각되지 않은 국유지들을 귀족과 교회에 되롤려야 한다는 제안은 농민들을 분노하게 했고, 공화국 출신 관료들과 장교들에 대한 푸대접은 부르주아들과 장교들의 빡을 돌게 하기에 충분했지. 하지만 나폴레옹 아래 15년 동안이나 썩은 탓일까 사람들은 자신의 손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어. 이들은 나폴레옹이 돌아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간절히 원하기 시작했던 거야. 나폴레옹은 젊을 때부터 제비꽃을 좋아했었대. (뭐 안어울리지만.) 그래서 사람들은 나폴레옹의 상징인 제비꽃을 달고 다니기 시작해.

 

위기의 중년

 

  당연히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부르봉 왕가와 유렵의 동맹국들 사이에서 좋지 않게 받아들여졌어, 뭐 사람들이 머리에 꽃을 꼽고 다니니까 좀 정신줄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뭣보담도 그 꽃이 얘들이 싫어해 마지않는 나폴레옹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니까. 우울해진 얘들은 나폴레옹을 엘바 섬에서 대서양의 아조레스 군도나 서인도제도, 혹은 서 아프리카의 절해 고도 세인트헬레나로 유배지를 변경할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돼. 그 소식은 나폴레옹의 근심을 한층 더 깊어지게 만들었고 이대로 가면 안되겠다는 위기 의식으로 발전해. 프랑스 정세도 나쁘지 않고 이대로 가면 정말 쪽박차는 건 시간문제인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몰래 프랑스로 가는 배에 올르게 돼. 뭐 더 잃을 것도 없으니까 홀가분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1815년 3월 1일.

 

 

2.

 

그레노블에서 나폴레옹을 막아선 프랑스 군대

하지만 각성한 나폴레옹의 강력한 눈빛 레이저 공격(←→→a+b)에

낙엽처럼 쓰러지는 수비대들

결국 수비대는 나폴레옹에게 집단 투항하게 되는데...

 

  프랑스에 상륙한 나폴레옹. 그는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 것인가 잠시 고민해. 심야 우등을 타면 금방 파리로 갈 수 있었겠지만 우리의 나선생은 굳이 완행 열차를 타고 그것도 변두리를 빙빙 돌아가는 노선을 따라 파리로 올라가게 돼. 당장 파리로 가봤자 또라이 취급 당하고 엘바섬으로 택배에 넣어져 보내지거나 가까운 단두대를 이용하게 될 공산이 컸기 때문이지. 그래서 나폴레옹은 지지세력을 규합하고 파리의 정세가 변화하기를 기다리며 지역 유세를 겸해 파리로 느긋하게 올라가게 돼. 곳곳에서 주민들의 환영을 받기도 하고 그를 가로막는 수비대 앞으로 나아가 쏠테면 쏴봐 하고 겁도 없이 나서서 수비대를 집단 투항하게 하기도 하는 등 여러 에피소드를 겪으며 나폴레옹은 일군의 도망자 무리에서 돌아온 황제로 파리에 입성하게 돼.

 

인기 일간지, <르 모니퇴르> 1면 기사 표제

 

3/9 괴물 엘바섬 탈출

3/10 코르시카 식인귀, 주앙에 상륙

3/11 맹호, 가프에 나타나다

3/13 폭군, 리용에 있다

3/18 찬탈자, 60시간이면 수도에 도착

3/19 보나파르트, 무장군을 이끌고 전진 중

3/20 나폴레옹. 내일 파리 외곽에 도달

3/21 나폴레옹 황제 폐하, 지금 퐁텐블로궁에 계시다

 

  돌아온 나폴레옹은 당장 예상되는 동맹국들의 공격에 대비해서 프랑스의 여력을 긁어모으기 시작해. 일단 민중들과 부르주아지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나폴레옹은 기자들을 불러 음주운전하고 1년만에 복귀한 연예인마냥 눈물의 기자회견을 한 거지.

 

  "안녕? 난 나폴레옹이라고 해. 내 얘기 좀 들어볼래? 지금까지 내가 안으로는 독재하고 밖으로는 다른 나라 침략한다고 네들이 고생한 거 다 알고 있어. 하지만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서 잠시 깡촌에 있다보니, 아 지금까지 인생이 반성이 되더라구. 이제부터 의회도 소집하고 니들 하는말도 많이 들어주고 그럴께. 자코뱅파 공안탄압도 이제 작작하고 왕당파만 족칠테니까 사이좋게 지내자. 응? 정복 전쟁? 이제 안할거야. 힙합스타일로 가자구. 피-스"

 

  당시 이 아저씨가 하는 말에 얼마만큼 진정성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다시 열광적으로 나폴레옹을 지지하기 시작해. 뭐 이러쿵저러쿵해도 이제 반혁명을 막을 사람은 나폴레옹밖에 없었으니까.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으니까. 자신들의 운명을 다른 누군가에게 일임한 무책임이 어떤 가혹한 결과로 돌아오게 될지 프랑스 사람들은 지난 15년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던 거 같아. 뭐 역사로부터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같은 역사를 되풀이해서 교훈을 얻어야 하겠지.

 

 

3.

 

  한편 나폴레옹이 토해놓은 유럽 영토를 재분배하기 위해 빈에 모인 유럽의 대가리들은 말 그대로 충격과 공포에 넋이 나가 있었어. 하지만 얘들은 재빠르게 냉정을 되찾고 불씨가 불길이 되기전에 파리로 몰려가서 다시한번 나폴레옹을 잡아 조져 버리기로 결심해. 동맹군은 나폴레옹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프랑스가 아닌 나폴레옹에게 전쟁을 선포하게 돼. 3월 25일의 일이야. 뭐 어떻게든 프랑스와 나폴레옹을 분리시키고 싶었던 거지. 그리고 모두가 군대를 끌고-대충 60만명 정도-몰려가서 한방 러쉬를 가자고 합의를 봤던 것이야.

 

플란더스의 개의 배경이 바로 벨기에야 ... 어?

 

  벨기에하면 파트라슈와 걔가 데리고 다니는 네로가 떠오르는 평화로운 동네가 흔히 연상되는데, 사실 역사적으로 그동네는 평화와는 거리가 멀어.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는 아르덴 숲이라는 거대한 숲이 있어서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거나 쌈박질하기엔 불편했다고 해. 반면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있던 벨기에는 탁트인 평원지대라서 교통도 편리하고 싸울만한 공터도 많고 농사도 잘되는 곳이라서 약탈하기에도 좋았대. 그래서 유럽의 깡패들은 군대를 이동시키거나 싸움을 하고 싶으면 벨기에를 자주 찾곤 했어. 이번에 이야기할 워털루도 그렇고 1, 2차 대전 때도 그랬듯이 벨기에는 인기 있는 전쟁터였어. 뭐랄까 유럽의 공설운동장이라고나 할까. 여튼 좀 살만하면 웬 미친놈들이 와서 멋대로 자고 가고 냉장고에 있는 걸 꺼내먹고, 가끔 싸운답시고 논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곤 했으니까 동네 사람들 입장에선 참 괴로웠을 거 같아.

 

  뭐 이때도 마찬가지라서 영국 애들과 프로이센 애들은 일단 결집지를 벨기에로 잡고 진군하기 시작해. 일단 모여서 여차하면 프랑스를 치고 뭣하면 오스트리아애들과 러시아애들을 기다리기로 하고 말야. 프랑스의 바로 면전인 벨기에에 22만명의 동맹국 군대가 자리를 깔기 시작하는 상황에서 과연 프랑스에선 어떤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4,

 

  나폴레옹은 다시 한번 평화 제안을 동맹국에게 했지만 당연히 씹혔어. 유럽의 봉건 왕국들에겐 부르주아 프랑스 존재 자체가 자국의 동요과 혁명을 유발하는 심각한 위협이자 도전이었으니까. 유일한 예외인 영국도 자신들과 경쟁할 자본주의 국가가 대륙 유럽에 나타나길 그닥 원하지 않았고. 하지만 이 평화 제안의 거절은 나폴레옹에게 우리는 전쟁을 회피하려 했지만 부득이하게 방어 전쟁이 필요하다 ... 는 설득력 있는 주장이 가능하게 했고, 다시 프랑스에서 어마어마한 징병이 시행되기 시작해.

 

  15년에 걸친 전쟁에 피폐해져 있던 프랑스 상황을 생각하면, 더더군다나 바로 2년여 전의 러시아에서의 처절한 궤멸을 생각하면 더 싸울 사람이 있냐 싶기도 해. 사실 0.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러시아 원정 실패를 메꾸기 위해서 나폴레옹은 대규모 징병 캠페인을 벌였다가 개쪽을 당했었거덩. 30만명을 목표로 영장을 날리고 방송차에 라 마르세예즈를 틀고 다니면서 홍보도 하고 했지만 12만명 정도밖에 못 모았던 우울한 과거가 있었단 얘기지. 하지만 봉건 반동의 쓴 맛을 살짝 본 프랑스 민중들의 지지덕에 1815년 6월경 나폴레옹은 국경 지대에 배치할 10만명에 즉각 움직일 수 있는 12만명, 그리고 파리로 소집 중인 12만명, 신병보충대에서 훈련을 받을 15만명 등의 어마어마한 병력을 뽑아내는데 성공해.

 

  물론 보기에 그럴듯하기도 하고 실제 괜찮은 성과지만 결국 당장 나폴레옹이 데리고 다닐 수 있는 건 6월 현재 상황에선 12만명 정도가 고작이었단 얘기야. 당장 벨기에에는 영국 애들과 프로이센 애들이 22만명이나 바글바글 거리고 있는데 말야. 7월이 되면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군 역시 국경에 도착할 것이고 상황은 더 우울해 질 거 같았어. 이런 절대적인 열세 속에서 나폴레옹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의외로 나폴레옹의 선택은 12만 8000여명의 휘하 병력을 모두 모아서 벨기에를 향해 상브르 강을 건너는 것이었어. 22만명이 죽치고 있는 곳에 과감한 공격을 가기로 한 것이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건 말이야 ...

 

 

예고.

 

베일을 벗는 전설의 스카치 테이프, 아니 댄스

 

  상브르 강을 건너 웰링턴과 대치하게된 나폴레옹. 웰링턴은 나폴레옹에게 댄스 배틀을 제안하고 나폴레옹은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 치마 입은 아저씨들이 펼치는 압도적인 스코틀랜드 폴크 댄스에 맞선 나폴레옹의 선택은? 과연 제국근위대는 캉캉 댄스를 펼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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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털루 (1)

 

워털루 / 세르게이 본다르처크 / 1974

 

 

 

워털루 (1)

- 엘바로 가는 길

 

0.

 

[속보] 루이 카페 오늘 11시 단두대에서 참수

    ㄴ re : 우왓 1등 가문의 영광

    ㄴ re : 단두대가 프랑스에 단 두대 밖에 없다던데 사실인가여?

        ㄴ re : 님 좀  돌은듯

    ㄴ re : 근데 루이 카페가 뭐임? 새로 생긴 커피집임?

        ㄴ re : 아놔 신문 좀 읽고 살아라 임마

             ㄴ re : 헐, 님 저랑 결투 깔래여? 어따 반말임?

 

  18세기에 처형은 사실 일상사에 가까운 일이라서 사실 웬만한 사람의 목이 매달린다고 해서 그렇게 놀랄 것은 없었어. 근데 1793년 1월 21일 11시, 파리의 혁명 광장에서 벌어진 루이 16세의 사형은 당시 유럽을 충격과 경악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지. 뭐 개가 사람을 무는거야 일상사지만 사람이 개를 물어죽이면 좀 뉴스거리가 되잖아? 이 뉴스가 전 유럽 포탈 사이트들의 1면에 도배되기 시작하자 가장 예민한 반응을 보인 것은 루이 카페와 동종업종에 종사하는 친구들-그러니까 유럽의 왕들-었는데 얘들은 이 뉴스를 접하자 마자 신생 프랑스 공화국을 모르도르의 불구덩이 속으로 파괴하기 위한 원정대를 조직하게 돼. 나름 통박을 굴려보니까 반지원정대가 파리에서 국왕시해자들의 무리를 파괴하지 않는다면 혁명이 자신들의 목언저리까지 불어닥칠테니까.

 

  그리하여 거의 전 유럽이 공화국과 전쟁 상태로 들어가고 바다에서는 영국 애들이 땅에서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스페인 등등 온갖 원정군들이 파리를 향한 레이스를 개시했어. 사실 프랑스가 전 유럽과 맞짱 뜨는 게 없던 일은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신생 공화국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은 많지 않았어, 그도 그럴것이 프랑스 전역은 자코뱅을 중심으로 한 혁명 정부와 왕당파와 지롱드파 등 그에 반하는 파벌로 내전 상태였고 유럽 최강의 육군국 프랑스군의 중추였던 장교들은 상당수 해외로 망명하고 있었으니까? 사실 나 같아도 심정적으로야 혁명군의 손을 들어주고 싶겠지만 한 5만원만 베팅한다고 생각하면 ... 하긴 롯데팬들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여튼 내전에 의해 분열되어 있고 중추까지 마비되어 있는 오합지졸을 무찌르고 파리로 개선하여 국왕시해자의 무리를 가로등에 데롱데롱 매다는 것이 실로 코 앞에 온 상황.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 거야. 파리로 가는 문턱에서 반혁명 동맹군의 군대가 차례로 패퇴하기 시작한 거지. 방데 등 내전을 일으킨 반혁명군들 역시 차례차례 진압되었고. 반혁명 반지원정대의 눈앞에는 오합지졸의 폭도들이 아닌 지금까지 그들이 만난 적이 없던 무시무시한 사상 최강의 군바리들이 있었다고 해. 사우론 오크 뽑듯 사악한 국왕 시해자들이 땅에서 이 악의 군단을 빚어낸 것일까? 대체 얘들은 어디서 튀어나온 것일까?

 

 

1.

 

  다소 생뚱맞기까지한 답은 징병제. 혁명 정부는 자신들이 통제하는 프랑스 전역에서 징병제를 실시하였던 거야. 얼라? 농사짓다가 영장 날라와서 군대로 끌려간 애들이 최강의 군대? 소집 영장이 순박한 농민떼를 사우론의 우르크하이 군단으로 만들었다고? 약간 매치가 안되는 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유럽의 군대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어.

 

  기본적으로 유럽의 왕정 국가들은 모병제를 통해 군대를 유지해왔는데 기본적으로 부랑자, 깡패, 사회부적응자, 혹은 허위 광고에 속아서 지원한 다소 삐리한 농민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어. 유럽 왕국들은 이런 애들을 용돈과 술, 그리고 채찍으로 살살 구슬려서 전쟁터에 밀어넣고 있었던 거지.  그외에 도저히 모병이 불가능한 경우-가령 평시에도 병으로 픽픽 죽어나가는 영군 해군처럼-엔 아예 이런 애들을 납치해서 군대를 조직하기도 하고 때론 직업적 용병 집단을 고용하기도 하고. 이런 인생 막장들이 전혀 와닫지도 않는 국왕의 명예를 위해 싸운다 ... 듣기만 해도 싸울 맛이 안난다고 해야되나.

 

  반면 영장을 받고 끌려온 프랑스군은 비교적 양질의 인간들을 징병제를 통해 무작위로 끌어들일 수 있었어. 뭣보다도 얘들은 국왕이 아니라 신생 공화국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앞서 말한 애들과 다른 거지. 왕의 명예와는 달리 신생 공화국은 이들에게 법적 권리와 봉건적 지대 철폐, 땅 등을 약속하고 있었거덩. 그렇기에 이 친구들은 전쟁을 자신의 전쟁으로 받아들였고 이에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단 말이지. 왜냐면 이 전쟁에서 패배는 자신들이 기껏 손에 얻은 얼마 안되는 자유와 평등, 박애를 다시 왕과 그 친구들의 손아귀로 돌려주는 것이니까. 신념을 가지고 싸우는 오크들과 채찍을 피해 다니다 정신차려보니 전선에 서 있는 호빗떼들은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 는 거지.

 

 

2.

 

이게 그 문제의 큐롯.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당시의 패션 현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어. 당시 잘나가던 패션 리더들은 몸에 딱맞는 레깅스를 입고 그 위에 퀼로트라는 반바지를 입고 다녔대. 지금 기준에서야 약간 웃기겠지만 뭐 패션이라는게 다 그렇잖아. 그런데 잘나가지 않는 사람들, 그러니까 파리의 자영업자들이나 노동자들 그런 사람들은 촌티 풀풀 내면서 그냥 긴 바지를 입고 다녔지. 그래서 퀼로트, 요즘말로 큐롯을 입은 양반들은 걔들을 상퀼로트, 그니까 퀼로트도 안입는 놈들이라고 불렀어.

 

  이게 왜 중요하냐면 상퀼로트들이 1794년까지 혁명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지. 가령 국왕이 군대를 소집하고 부르주아지들이 법과 관념의 세계에서 헤엄치고 있을때 얘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털어서 국왕을 굴복시켰고. 여튼 얘들은 혁명의 위기 상황마다 얘들은 적절하고 급진적인 대안을 제시하였고 또 그걸 실행시킬 폭발력 역시 가지고 있었던 거야. 근데 퀼로트를 입은 신사들 입장에서는 얘들이 나대는 것이 그닥 맘에 들지는 않았어. 일단 패션도 구리고, 너무 급진적이다 ... 뭐 그런 문제를 떠나서 얘들이 급진적으로 주장하는 내용이 자신의 이해와 정면으로 충돌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지. 가령 물가 안정을 위해 최고가격제를 도입하자는 주장에 앙등하는 물가에 재미를 보던 사람들이 빡도는 거고, 최고재산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자 대부르주아들의 심기가 크게 불편해진거지.

 

생각만큼 귀여운 스타일은 아니었던 듯

 

  그래서 94년 혁명력 더운달 그러니까 테르미도르에 상퀼로트와 미묘한-언젠가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관계를 유지하던 자코뱅이 몰락하게 돼. 천것들로부터 정권을 탈환한 기쁨을 만끽하던 것도 잠시. 부르주아지들은 자신들이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 것을 알아채게 돼. 왜냐면 온건 부르주아지들의 정책은 자신들의 주머니를 잠시 지키는데는 유용했지만 혁명을 지키는데 있어선 딱히 유용할 것이 없다는 것이 검증되었고 경제적, 정치적 위기가 심화되었기 때문이지. 그런 상황을 틈타 황금 퀼로트라고 불리는 왕당파 깡패들까지 나타나는 등 반혁명의 움직임마저 보이기 시작해. 기운을 차리기 시작한 봉건주의자들이 부르주아지들은 무지무지 싫었지만 그렇다고 걔들을 제압할만한 능력과 과감함이 자신들에게는 없었어. 그렇다고 상퀼로트들의 힘을 빌리기 역시 싫었고. 결국 방황하는 부르주아지들은 공화국 내에서 가장 잘 조직되고 가장 폭압적인 분파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게 돼. 그러니까 브뤼메르18일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보나파르트 장군으로 대표되는 장교들이 바로 그들이지.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붕괴했고 그 자리는 황제와 비밀경찰로 메워졌어. 다만 그 황제는 부르주아와 프랑스 국민국가의 황제였다는 점이 유럽 제국들과 더 이상 공화국이 아닌 프랑스를 구분지어줬을 뿐이지.

 

 

3.

 

  보나파르트 장군, 그러니까 이야기의 주인공 나폴레옹이 권좌에 올랐고 전 프랑스 군의 통수권자가 됐어. 근대 국민국가와 그 산물인 당대 최강의 국민군대, 그리고 알렉산더 이후 최고의 전략/전술가이자 근대 전쟁에 획을 그은 나폴레옹의 화학적인 결합은 상상 이상의 파괴력을 발휘하게 돼. 나폴레옹과 프랑스 대육군(grand armee)은 수차에 걸쳐 결성된 반 프랑스 동맹군을 번번히 박살내 버린 거야. 마렝고에서 아우스터리츠에서, 울름에서, 예나에서, 바그람에서, 나폴레옹을 만난 유럽의 왕과 장군들은 한여름의 롯데마냥, 결승전의 홍진호마냥, 깨지고 깨지고 산산히 가루가 될때까지 깨졌어. 정신차리고보니 제국은 영국을 제외한 유럽 전역을 사실상 통제하는 수준까지 팽창해 있었지.

 

  나폴레옹은 이 눈에 가시인 영국을 발라내버리고 싶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어. 지금이야 지하철을 타고 가면 되지만 그땐 영국에 가려면 배를 타야했고 바다는 영국 해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니까. 당시 영국 해군은 전세계와 맞장을 깔 수 있을 정도였고 그래서 나폴레옹 역시 프랑스-스페인 함대를 규합해서 좀 찝쩍거려볼려다가 트라팔가르에서 넬슨한데 걸려서 아작이 나버려. 살짝 열받은 나폴레옹은 영국을 굴복시킬 수 없을까 며칠 통박을 굴리다가 베를린 칙령이란 걸 발표해. 이른바 대륙봉쇄령이란 거지.

 

 

  대륙 봉쇄는 쉽게 말해 프랑스와 그 동맹국들은-그러니까 유럽 대륙 전체-영국 및 영국과 무역하는 중립국과 무역을 하지 않는다는 거야. 산업 혁명이 진행되어 슬슬 세계의 공장으로 발돋움 하려는 영국 자본주의의 숨통을 억눌러 굴복시키겠다는 것이 나폴레옹의 구상이었던 거지. 그럼 영국에 지금까지 납품하던 유럽의 하청업체들은 이제 어디로 물건은 납품해야 할까? 혹은 영국제 TV나 세탁기를 구입하던 나라들은 이제 어디서 물건을 사와야 하는 거지? 나폴레옹과 프랑스 부르주아지들은 쉬운 해답을 제시하였어. 바로 프랑스 자본에게 그것을 맡기라는 거야. 대륙 봉쇄령은 영국을 굴복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프랑스를 유럽의 공장, 나아가 세계의 공장으로 나아가게 하는 비전을 담은 로드맵이었던 거지.

 

  대충 듣기에는 그럴듯한 비전이었고 그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아마 영국은 굴복하고 영어는 제2외국어로 몰락했을지도 몰라. 실제로 영국 경제는 심각한 위협을 받았고 근근히 영국 경제의 붕괴를 막아왔던 신대륙과의 무역 역시-유럽과의 무역이 막혀 있던-미국과 전쟁 직전까지 분위기가 가면서 위태로워지고 있었다고 해.  하지만 이 원대한 계획은 다소 현실적인 뒷받침이 부족하여 끝까지 밀어붙여지지 못했는데 뭣보다도 프랑스 자본이 영국을 대체할만큼 성숙하지 못한 상태였다는 것이 그 원인이었어. 쉽게 말해 유럽 애들이 원자재를 잔뜩 팔려고 내놓아도 프랑스 애들이 그걸 다 구입할 만큼 생산력이 뒷받침이 안되었고 또한 유럽애들이 원하는 상품을 다 생산할 처지도 못되었던 것이지. 프랑스 애들은 이 현실과 이상의 갭을 하청업체들-그러니까 유럽 여러 나라들-의 부담으로 돌파하려 하였어. 당연히 반발이 일어났고 결국 러시아가 프랑스 상품에 고액의 관세를 때리고 영국 및 중립국과의 무역을 재개하려 함에따라 대륙봉쇄는 실질적으로 붕괴되었던 거지.

 

  나폴레옹은 해결책을 내놓아야했어. 언제나 그랬듯이 나폴레옹은 쉽게 해결책을 내놓았는데, 그건 이 체제를 만들어내고 유지하기 위해 써 왔던 손쉬운 해결책, 그러니까 전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거지. 하긴 항상 밥먹고 쌈질만 해왔으니까 관성이 붙을 법도 할거야. 여튼저튼 프랑스군 25만을 비롯한 60만명의 대부대가 러시아로 진군하기 시작해. 그리고 언제나처럼 승리하고 프랑스로 개선했느냐 ... 면 물론 그렇지 않지. 그랬다면 지금쯤 프랑스어가 제1외국어일테니까. 나폴레옹은 1812년 겨울동안 이 60만의 원정군을 말 그대로의 의미로 홀라당 까먹게 된 거야.

 

 

4.

 

  러시아 원정의 패배를 두고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추운 날씨 탓을 줄곧 하였는데 이는 전형적인 핑계라고 할 수 있어. 반성이 없는 인생의 패배자들이나 할만한 발상이지. 실상 러시아 원정의 패배는 이미 프랑스 군대와 나폴레옹 정권 자체의 한계에서 그 파멸이 예정되어 있었다고 해야할 거야. 당시 다른 군대도 그렇지만 프랑스 군대 역시 전통적인 중세적 방식에 의해 보급 문제를 해결해왔어. 좋게 얘기하면 현지조달, 쉽게 말해서 약탈을 통해 대부분의 물자를 수급하는 거야. 인구밀집 지역이었던 중부 유럽에선 이 방식으로 짭짤하게 재미를 보았지만 인구 밀도가 낮은 러시아에서, 그것도 60만의 대군이 그렇게 하기는 뭐랄까 다소 무리가 있다고 해야겠지. 이미 니에멘 강을 건너면서 군 전체는 심각한 보급 문제에 직면했고 말들이 굶어죽고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고 해. 실상 겨울이 오기도 전에 원정군은 패배의 늪으로 빠져들었던 거지.

 

  더욱더 큰 원인은 나폴레옹 정권 자체에서 찾아야 할 거야. 나폴레옹 프랑스는 나폴레옹 전쟁 초기에만 해도 혁명의 전도사로 각국 부르주아지들과 농민들에게 받아들여졌대. 그러나 1812년에는 이미 그 환상은 산산조각나 있었지. 영국의 부르주아지들이 프랑스 혁명에 대해 그러했던 것처럼 프랑스 부르주아지들은 유럽 각국의 부르주아지 혁명 혹은 개혁에 냉담하였고 자국 시장의 발전을 위해 프랑스 치하 국가의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외면하였던 거지. 총을 든 침략자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구나! 이건 마치 미국이 이라크를 자유롭게 하겠다는 거랑 비슷한 거구나 하고 깨닫기 시작한 거지. 뭐 러시아에서도 역시나 나폴레옹은 원정 내내 농노제 폐지 초안을 잠시 만지작 거리는 것 이상을 할 수 없었어.

 

 

5.

 

  이렇게 나폴레옹은 패배했고 프랑스군은 치명상을 입었어. 나폴레옹의 주먹 아래 숨을 죽이고 있던 유럽 왕국들은 다시금 힘을 되찾고 지긋지긋한 나폴레옹 제국 붕괴를 위한 동맹을 조직하게 돼. 의리는 멀고 주먹은 가까운 것이라서 항상 나폴레옹의 주먹 앞에 콩가루였던 이들의 동맹은 나폴레옹의 주먹에 힘이 빠진 이때만큼은 굳건한 것이라서 라이프치히에서 나폴레옹군을 아작내고 동맹국은 결국 파리에 입성하게 돼. 영화는 여기에서 시작해. 나폴레옹 휘하 원수들이 나폴레옹에게 퇴위를 끈덕지게 요구하고 나폴레옹은 끈덕지게 퇴위를 거부하지. 뭐 굴러가는 수레바퀴를 고집만으로 세울 수 있다면 누가 고생하겠어. 결국 나폴레옹은 무조건 퇴위를 승락하고 엘바 섬으로 가는 배에 오르게 돼. 프랑스는 삼색기 대신 부르봉 왕가의 하얀 문장이 지배하게 되고 한때 유럽 통합 1짱이었던 나폴레옹은 30x20km의 게딱지만한 섬의 군주로 몰락하게 돼.

 

  여기서 이야기가 끝난다면 영화가 나오지 않았겠지? 하지만 역사는 이 이야기가 시시하게 끝나고 영화가 시작 5분만에 끝나기를 원하지 않았던 건지 역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통통 굴러가고 있었던 거야.

 

 

 

-1.

 

  뭐랄까 대충 쓰고 치워도 될 전쟁 이야기를 길게 쓰게 됐다. 전쟁 이야기는 너무 마이너틱한 취미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글쎄 그냥 쓰고 싶은 거 쓰고 쓰기 싫으면 관두고 편하게 사는게 좋을 거 같아서 쓰기로 했다. 계획하고 있는 연재도 대충 연장선상에 있는 거니까 대충 연습 삼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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